57강,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골로새서 2:20-23절을 보면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세상이 무엇입니까?
아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의 생각에는 교회 밖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세상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마치 교회는 세상과 별개로 동떨어진 노아의 방주와 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세상은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입니다
내 눈에 교회가 보이고 내 눈에 교인들이 보이고 내 눈에 목사가 보이면 그것은 모두 세상에 속한 것임을 바로 분별해야 합니다. 마치 이런 것들은 세상이 아닌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은 세상 이라는 단어조차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입니다
이 지구는 세상입니다
지구 안에 있는 모든 사물은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내가 행하고 있는 선한 일 의로운 일 보두가 세상에 속한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행하는 일을 세상의 일로 생각하지 않고 있으며 그것이 신앙의 본질을 흐트러뜨리는 결과를 가져오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기도를 하고 찬양을 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하는 이 모든 일이 세상에 속한 일이라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일들이 나쁘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또한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세상에 대해서 바른 정의를 하고 싶을 뿐입니다.
교회가 마치 세상 밖에 있는 또 다른 어떤 것으로 오해를 해서는 안 됩니다 그 교회가 주님께서 세우시고 또 진리가 서 있는 교회라 할지라도 역시 세상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교회라 해도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정확히 정의를 하면 내 육체는 세상에 속해 있습니다.
물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나를 감동하고 내 영혼이 하늘에 속해 있는 것을 제가 부정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우리 영혼은 하늘에 속해 있지만 육체는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내 육체가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께서 감동하여 주심으로 내 영혼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의와 평강과 기쁨을 누릴 때 하나님의 나라가 내게 임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육체가 하는 모든 일은 이 세상에 속해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내 육체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하는 일들이 세상 밖에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고 또 복음을 위해 내 육체를 헌신하고 있다 할지라도 역시 이 세상에서 하는 일입니다
내가 숨 쉬는 것
그리고 먹고 즐거워하고 행복을 누리는 모든 일들이 이 세상의 것이지 세상 밖에서 하는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단들 중에는 마치 자기들의 집단이 세상 밖에 있는 또 다른 세계처럼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이단들은 그렇게 주장을 하면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집단생활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다니는 교회가 무척이나 특별한 것으로 주장을 하고 마치 자기 교회만 세상과 동 떨어진 것으로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하고 그런 주장에 한번 미혹이 되면 빠져 나오지를 못 합니다. 세상이라는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의 뿌리가 흔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세상 초등 학문이 무엇입니까?
법을 안 지키면 죄인이라고 합니다, 또 의를 행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죄를 진 죄인은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알고 있는 가장 기초적인 사상입니다
세상 초등 학문이라고 하니까 어렵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세상 사람들이 지극히 상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바로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법을 어겨서 죄를 진 사람을 정죄하고 또 그를 죄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 누구나 그렇게 말합니다.
물론 초등 학문에는 이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등학문의 가장 기초는 바로 위에서 말씀을 드린 세 가지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 세 가지 기초적인 사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고 누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진 사람을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세상적인 것입니다
의롭게 사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합니다.
이웃을 사랑하거나 또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돕는 행위를 하고 때로는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 까지 이웃을 구하는 일을 하는 것을 바로 의인이라고 합니다. 몇 년 전인가 일본 지하철에서 우리나라 청년이 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고 그는 죽고 말았습니다. 아직도 일본에서는 그를 의인이라고 칭하고 있고 또 우리나라에서도 그가 죽은 그 날이 되면 그를 기념하는 행사를 하기도 합니다.
바로 이런 것인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법을 어겨서 죄를 진 사람을 죄인이라고 하고 또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이러한 일들은 교회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배움을 통해 알고 있으며 당연히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만약 법을 어긴 사람을 보고 죄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 세상에서는 오히려 공격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공격정도가 아니라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것입니다
얼마 전에 희대의 살인자 강ㅇㅇ 사건이 있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은 그를 죄인이라고 말 합니다 바로 이렇게 세상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고 하는 그것을 바로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합니다. 만약 강ㅇㅇ을 죄인이 아니라고 누군가 주장을 한다면 그를 강ㅇㅇ과 같은 사이코페스로 취급을 할 것입니다
세상 초등 학문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지난해인가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하는 사람이 영등포에서 가난한 노숙자와 창녀들을 무상으로 진료를 해 주다가 아무 것도 남긴 것이 없이 정말 초라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 사람을 모두가 한국의 성인이라고 할 정도로 의인이라고 말 했습니다.
그런데 그를 의롭지 않다고 한다면 공격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의사로서 충분히 사회적으로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평생을 홀로 살다가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한 그를 의인이 아니라고 한다면 제 정신이 아니라고 할 것입니다 바로 이런 것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릅니다.
디모데전서 1:15절을 보면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라고 말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를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얼마나 헌신을 하고 자기 생명까지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런 자기 자신을 바라볼 때 죄인 중에 괴수로 보였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보면 사도 바울은 의인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 볼 때는 죄인 중에 괴수로 보였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세상의 초등학문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는 이렇게 상이하게 다르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면 사도 바울은 자기를 흠 없는 의인이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실제 그랬습니다.
빌립보서에서 사도 바울은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자기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볼 때는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지만 진리 안에서는 죄인 중에 괴수로 나타난 자기 자신을 고백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의롭게 살았습니까?
나중에는 자기 생명을 잃는 순교를 하기 까지 복음을 위해 헌신을 하다가 로마의 형틀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나가는 형벌로 죽었습니다. 정말 의롭게 살았지만 자기 복음에서 보는 자기 자신은 죄인 중에 괴수로 밖에 보이지 않은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기 때문에 그런 고백이 나올 수 있는 것입니다 초등학문에서 아직 살아 있으면 사도 바울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진 의로운 사람이지만 초등학문에서 죽은 사도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직도 초등 학문아래 있는 사람은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의문이 무엇입니까?
문서로 되어 있는 법을 의문이라 합니다.
성경에서 의문은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초등학문이고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는 것은 하늘의 신령한 지혜를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도 의문에 순종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교회는 다릅니다.
세상은 간음한 여자를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 여자는 정죄함을 받지 않았습니다. 세상은 십자가에 달려 있는 강도를 죄인이라고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죄인을 보고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이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의문에 순종한다는 말씀은 의문에 따라간다는 말씀입니다
세상과 같이 간음한 여자를 정죄를 하고 돌로 쳐 죽이려 하고 강도를 십자가에서 죽이려 하는 것이 바로 의문에 순종을 하는 것입니다 어떤 행위를 보고 사람을 판단을 하고 그가 하는 행위에 따라 죄인이다 의인이다 하는 것을 보고 바로 의문에 순종한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장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에 속한 것을 가지고 교회 안에서 정죄를 하거나 그것을 요구하는 주장을 하는 것은 스스로 진리를 거스른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하는 그들이 교회 안에서 행위로 판단을 하고 또 정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직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21절,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세상의 초등학문을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냐고 반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 보다 죄를 짓지 말아야 하고 또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붙잡지 말라는 말씀은
세상 초등학문에 속한 것으로 보면서 마치 자기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붙잡아야 할 대상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이 세상 초등학문을 붙잡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안 짓고 의롭게 사는 것 자체가 나쁘다는 것을 아니라 그것을 보면서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ㅠ 오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붙잡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은 아직도 세상 초등학문을 붙잡고 있으며 그 초등학문에 속한 것을 잘못하면 마치 구원을 잃어버릴 것으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은 이미 믿음으로 받았는데도 세상 초등학문에 속한 것을 붙잡으면서 자기 구원을 확증하려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맛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한번 그 맛에 길들여지면 마약보다 더 중독성이 있어서 절대로 그것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쁜 일만 중독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 적으로 칭찬을 받을 만한 일을 하고 그 일로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기 시작을 하면 절대로 그것을 끊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어떤 행위를 칭찬을 하면 그것을 하고 싶어 하고 또 더 나은 행위를 하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나중에는 그것을 하지 않으면 마치 믿음이 없는 것으로 정죄를 하기 까지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초등학문의 맛에 길들여져 있는 사람은 절대로 그것을 끊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육체를 망하게 하는 마약 보다 더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결국 그 맛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지지도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른 사람이 초등학문에 속한 것으로 칭찬을 받으면 그것을 만지고 싶어 합니다.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더구나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면 물불을 안 가리고 하는 것이 바로 사람들의 심리입니다 바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 그렇게 하다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한번 만지면 손을 떼지 못 합니다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와의 비유에서 부자가 고운 자색 옷을 입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가 고운 자색 옷과 같은 그것을 한번 만지면 누구나 자기도 그 옷을 입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 합니다.
부드러운 감촉에서 손을 떼지 못 합니다
제가 지금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나쁘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세상 사람들 보다 더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지만 그것에 붙잡고 맛보고 만지는 순간 복음을 버리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세상 초등학문을 따라가다 보면 진리에서 벗어나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은 양날의 검입니다
한쪽을 따라가면 한쪽을 반드시 버리게 되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먼저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내용이 중요 하냐 형식이 중요 하냐 이것을 분명히 깨달은 사람만이 복음 안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용을 주장하는 사람은 형식도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용보다는 형식을 주장하는 사람은 내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고 형식은 내 삶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 가는 형식이고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내용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사람들은 내용보다는 형식에 치우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믿음으로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 자체가 바로 형식에 치우친 사람입니다 정말 믿음으로 하는 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형식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방종을 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형식을 주장하지 않아도 얼마든지 형식을 주장하는 그들보다 더 성하고 의롭게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22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세상의 초등학문은 다 썩어 버린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그렇게 살아보아야 해 아래서 하는 모든 것은 다 부패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초등학문 의문에 속한 율법을 따라 사는 것은 모두가 썩어져 버린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썩어져 버립니다.
사도 바울이 지킨 흠 없는 율법이 어떤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8절을 보면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사도 바울의 흠 없는 율법의 의, 세상 초등학문에 따른 모든 것은 배설물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 3장6절에서 사도 바울이 자기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흠 없는 율법의 의를 어떻게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조금 행하는 아주 작은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자랑하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그것을 붙잡고 있고 그것의 깊은 맛에 길들여져 있고 그것을 만지고 싶어서 안달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도 부자와 같이 그것을 하고 싶어서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흠 없는 율법의 의도 배설물과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발꿈치도 따라가지 못하는 내가 교회 안에서 조금 행하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았기 때문에 초등학문이 살아서 자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고 있습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교회에서 헌신을 하고 있습니까?
내 모든 것을 다 내어 줄 정도로 하고 있다 해도 그 역시 썩어 버린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썩어질 것을 가지고 배설물과 같은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람의 가르침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죄를 짓지 말라 의롭게 살아라. 하는 것은 교회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도 얼마든지 배우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교회가 아니더라도 학교에서 가르치고 사회에서 가르치고 또 다른 종교에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목사가 도덕선생입니까?
영혼을 구원하는 자와 도덕 선생은 다릅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 그리고 세상의 학문은 도덕을 가르칩니다. 그런데 이 시대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 교회 안에서 영적인 것을 모르니까 도덕 선생을 하고 있습니다.
23절,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을 따라 초등학문을 따라가는 것은 우상 숭배와 다를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것들을 함으로서 자기를 억제하는 모양을 나타내지만 사실은 자기를 괴롭게 하는 일에 불과하다는 말씀입니다
공동번역입니다.
“이런 규정은 제멋대로의 예배와 과장된 겸손과 부질없는 금욕주의 따위로 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 데는 조금도 힘이 없습니다”
연습하면 된다고 말 합니다.
자기를 비우면 된다고 주장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실 율법을 잘 행하면서 사는 것이 현명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자기 육체의 욕망을 제어하는데 조금도 힘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을 보면 얼마나 대단해 보입니까?
금욕을 하고 자기를 억제하고 하면서 죄를 안 짓고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고는 있어 그것이 현명하게 보일지는 몰라도 실상은 자기 육체의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그렇게 말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죄를 안지니까 나도 안 질 수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등학문에 순종을 하면서 죄를 안 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지만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할지라도 자기에게 아무 유익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유익이 없느냐면 설령 죄를 조금 안 질 수 있어도 그것으로는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사자고 사람은 양입니다.
사자와 양이 싸우면 무조건 양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자가 건드리느냐 안 건드리느냐의 차이가 겉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자기가 죄를 안 진다고 하지만 실상은 사자가 안 건드리고 있을 뿐이라는 말씀입니다
싸워서 이긴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싸워서 이기는 자기 모습을 본다고 해도 그것은 썩어질 것임을 깨닫는 사람은 그것을 싸워 이기는 것을 보고 기뻐하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자기 육체의 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은 것을 보면서 더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자기가 싸워 이기는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사자가 배가 불러서 곁에 있어도 그냥 지나쳐 지나가는 것을 가지고 자기가 이겼다고 주장을 하는 것이 얼마나 한심하고 어리석은 사람의 생각입니까? 그러나 세상 초등학문, 율법에 속한 사람들은 사자와 싸워서 이겼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렇게 죽은 성도는 율법을 붙잡지도 안고 맛보지도 않고 만지지도 않으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그는 아직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못 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그리스도와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려면 반드시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초등 학문에서 벗어나서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고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ne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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