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39강, 하나님이 주신 3가지

윤주만목사 2019. 3. 23. 19:26


39, 하나님이 주신 3가지 

(Three things God has given us) 

 

히브리서 13:9절을 보겠습니다. (36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성경

아주 간단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시작은 천차만별인 것을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실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오직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인생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만 보아도 이 성경에서 3개 이상의 종교가 탄생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신약에 대해서는 받아들이는 쪽과 그렇지 않은 종교가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모세오경을 시작으로 해서 3대 종교가 탄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니 천주교까지 하면 4대 종교라 할 수 있고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이단들을 합하면 아마도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이 어려워서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을 빙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실제 그들은 하나님을 자기들의 필요에 따라 형상을 만들어 놓고 자기들의 방식으로 믿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입니다

 

보이는 형상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자기들의 사상으로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 안에 하나님을 가두어 놓고 그것이 하나님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종교들이 탄생이 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으로 무서운 것은 그 종교라는 것은 한번 고착화되기 시작을 하면 그 다음에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문제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하나님을 만들고 있습니다. 스스로 계신 하나님을 더듬어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사상에 따라 하나님을 사상의 형상으로 만들어 놓고 믿으라고 사람들에게 강요를 하고 있고 그것이 거대한 세력이 되어 악을 행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런 거대한 세력의 종교를 만들어 놓고 모두가 그 안으로 들어가게 만들어서 사망에 빠뜨리고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다 하나님을 믿게 만들어 놓고 자기들이 아주 잘 믿는다고 안심을 하게 만들어 놓고 다 사망의 길로 끌고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인생이 하나님에 대해서 알아간다는 자체가 사실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서 자기를 계시해 주고 있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 안에서 진리를 알아갈 수 있게 역사를 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화 되어 있는 세력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에 분별력을 상실하고 거기에 세뇌가 되고 있습니다.

 

진리는 도전을 받아왔습니다.

아니 사단에 의해서 끊임이 없이 훼손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왜 이렇게 비유와 은유로 기록을 하셨는가 하면 바로 이렇게 훼손을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기록을 해 놓으면 아마도 한 사람도 구원을 받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에덴에서 하와를 미혹할 때 그가 하나님의 말씀과 전혀 다른 말을 해서 하와를 미혹해서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이 아닙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화와를 미혹했고 하와는 그 말에 넘어가 결국 선악과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어서 둘 다 사망에 이르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도 사단은 그렇게 성경 말씀을 가지고 미혹을 해서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말한다고 해서 다 바른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말하면 다 바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 외에 것을 가지고 말하다가 타락을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더 성경에 대해서 연구를 했고 성경을 어려서부터 읽고 외우면서 산 민족이었습니다.

 

타락을 했습니다.

다른 교훈에 미혹이 되어서 그들은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다른 교훈에 빠져 결국에는 멸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아직까지도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교훈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제 성경이 보편화 되어 있고 신약을 볼 수 있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데 또 신약을 통해서 구약을 해석한 말씀들이 너무 많이 있는데 왜 그들이 아직도 유대교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는가를 우리가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람은 그렇게 한번 사상에 고착화 되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힘이 없고 또 개인이 설령 그것을 안다 해도 거대한 종교의 힘에 굴복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종교를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종교가 되는 순간에는 어느 누구도 거기 들어가면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번 다른 교훈을 전하게 되고 거기에 얽히게 되는 순간 다시 진리로 방향을 잡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가를 이 시간에 분별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전도서7:26절을 보겠습니다. (955)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종교는 아편이라고 말 했습니다.

칼 마르크스가 한 말입니다. 저는 종교는 아편보다 더 지독하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아편에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은 그래도 치료가 가능할 수 있지만 종교에 중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거기서 빠져 나오지를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이상합니다.

세상에서 아무리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도 종교에만 들어가면 마치 순한 어린 양과 같아서 중독이 되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그렇게 똑똑한 사람도 이상하게 종교에 들어가면 어린 아이가 되어서 도무지 그것을 분별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종교에 세뇌가 되어 간다는 말이 맞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을 전도서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종교를 여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여인은 사망보다 더 독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독한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여인에게 한번 붙들리면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오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뇌라는 것은 무섭습니다.

마치 오리가 알에서 깨어나서 처음 보는 것을 자기 어미로 알고 따라 다니듯이 종교에 처음 들어와 들은 사상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거기에 붙들리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은 일반 교인들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목사들도 잘못된 신학을 배우게 되는 순간에 자기는 정말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 한다고 생각을 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자로 평생 일을 하고 있지만 그것이 종교라는 독한 여인이라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물론 알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자기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하는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목사들은 자기가 잘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일을 하면서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생각을 했던 것과 같이 목사들도 사상에 세뇌가 되면 그렇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종교는 거대합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를 보면 너무 거대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종교에 대항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설령 자기가 어느 정도 진리를 알고 있다 해도 교회 간판을 걸고 목사로서 일을 하려고 하면 정통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해서 그 무리에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율법을 폐했습니다.

하지만 처음 부딪치는 것이 예배입니다 지금 교회 마다 수많은 예배가 정해져 있습니다. 교회라는 간판을 내 거는 순간 그 예배의 형태를 그대로 따라가야 합니다. 만약에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자기 스스로 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아주 당연합니다.

매일 새벽 기도를 해야 하고 또 수요 예배를 드려야 하고 금요 철야를 해야 하고 구역 예배를 드려야 하고 또 주일이라는 날을 철저하게 지켜야 하고 하는 것을 누구도 깨뜨리지 못하게 됩니다. 만약에 그것을 깨뜨렸다가는 그 교회에 사람들이 오려고 하다가도 이 교회는 이상한 것 같아 하면서 근처에 가지도 않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교회가 종교화 되면 그렇습니다.

자기들이 정해 놓은 예배의 순서 그리고 그 안에서 행하고 있는 여러 가지 행위들을 하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교회라는 간판을 내 걸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100여 년 동안 우리나라 교회가 그렇게 해 왔습니다. 그것을 안 하는 순간에 그것이 이상하게 보여 지게 되어 있습니다.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또 목사는 어떻게 해야 하고 또 그 안에 교인들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미 세뇌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그것이 맞다 하고 있고 또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은 그들이 하는 것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점점 세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요한복음7:22절을 보겠습니다. (156)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주었으니 (그러나 할례는 모세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조상들에게서 난 것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주느니라

 

조상들이 할례를 행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지금까지도 이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기 조상들이 한 것이고 또 그것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징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누군가 이 할례에 대해서 굳이 안 해도 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그는 돌에 맞아 죽든지 아니면 이단이라고 공격을 당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종교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자기들 조상 대대로 행해왔던 그 할례가 그들의 마음에 믿음의 증표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 할례에 대해서 얼마나 대단하게 생각을 하고 있는 가를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자기 들이 생명과 같이 여겼던 안식일에도 이 할례를 행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렇게 할례와 같은 것들이 교인들에게 표징이 되어서 믿지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기 조상들이 행했던 것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로 앞서서 교회에 다녔던 사람들이 행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을 하면서 그것이 자기 안에 고착화 되어 그것을 안 하면 마치 큰 일이 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점점 그 행위로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릅니다.

사실 할례가 뭐 그리 중요합니다. 아니 지금 이 시대 주일이라는 것이 뭐 그리 대단합니까? 따지고 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 앞서 행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했고 또 자기가 지금 그것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안 하는 사람은 이상하게 보고 있습니다. 제가 목사들 모임에서 주일을 일요일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저를 믿음이 없는 목사로 아니 이상한 목사로 말을 함부로 하는 목사로 취급을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사단이 사람을 어떻게 죽입니까?

바로 이 사상을 세뇌 시켜 가지고 그것을 고착화 시켜서 진리를 찾아가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한번 그렇게 사단에게 미혹이 되어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벗어나지를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여러 가지 다른 교훈을 전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 다른 교훈에 한번 미혹이 되면 거기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고 점점 악을 행하는데 열심을 내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다른 교훈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로 인하여 잘못된 길로 가고 있지만 사람들이 너무 맹목에 빠져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경계를 해야 하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생각을 해 보고 우리가 앞으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그것을 바로 깨달아 진리에 더욱 진보를 하는 성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친히 쓰셔서 주셨습니다. 저는 이단을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전형적인 율법주의는 여호와 증인과 안식일 교회가 있습니다. 이 두 교회는 아직까지도 거의 모든 율법이 다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들은 지금까지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단은 생각할 필요도 없습니다.

지금 한국에 있는 이단이라고 지칭을 하고 있는 교회는 굳이 연구를 할 가치도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 이단들을 공격하고 그것을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심리는 이단을 공격함으로서 해서 자기가 정통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합니다.

 

나쁜 놈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약간 나쁜 놈입니다 그럼 그 나쁜 놈을 점점 부각을 시켜서 아주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리면 마치 내가 그래도 좀 나은 놈 같이 사람들에게 보여 지기 때문에 그렇게 이단을 공격하고 있는데 제가 보기에는 그 놈이 그 놈입니다 내가 나쁜 놈을 나쁘다고 한다고 해서 내가 좋은 놈이 되는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솔직히 묻고 싶습니다.

이 시대 누가 이단을 분별할 수 있습니까? 아니 이단을 정죄를 하고 있는 그들도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으면서 누가 누구를 정죄를 한다는 것입니까? 이단을 정죄할 시간이 있으면 자기 스스로 더욱 진리에 이를 수 있게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자기들도 진리에서 벗어나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단을 공격하고 있는 그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완전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율법주의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정립이 안 되면 모두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은 폐해졌습니다.

만약에 이것을 거절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겠다고 주장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유가 있습니다. 굳이 제가 성경 말씀을 거론하지 않아도 우리는 이제 이 율법이 폐해졌다는 것을 믿고 우리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없게 하려고 힘써 은혜 안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출애굽기24:12절을 보겠습니다. (11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산에 올라 내게로 와서 거기 있으라 너로 그들을 가르치려고 내가 율법과 계명을 친히 기록한 돌판을 네게 주리라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습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 친히 돌판에 기록을 해서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율법을 주셨습니다. 이것이 너무 사람들에게 각인이 되어 있습니다. 신약에 와서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폐하셨다고는 하지만 율법은 성경에 분명히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감히 거부를 하지 못합니다.

어느 말씀이 기준이 되어야 하는 가를 깨닫지 못하고 좋은 것이 좋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을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셨다는 것만을 생각하지 이 율법이 어떤 기능이 있는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법에 의해서 구속이 되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법에 익숙해져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아직 법을 배우지 않은 어린아이도 자기가 잘못을 하게 되면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혼이 날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꼭 법이 아니더라도 내가 이것을 잘못했구나 하는 것을 알고 그것을 감추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의 본능입니다

 

그리고 법에 의해서 삽니다.

사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체가 법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학교에 처음 들어가면 법부터 배웁니다. 학생으로서 해야 하는 일이 있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어서 그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회에 나와서도 우리는 법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지구가 법입니다.

태양계라는 법칙 안에 있어서 그 안에서 정확하게 하루가 지나가고 또 한 달이 지나가고 봄이 오면 여름이 오고 또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면서 정확하게 그 법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들에게 자연스럽게 녹아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그 법을 깨뜨린다는 것은 인생들이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법도 못 깹니다.

그러데 더구나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법에 익숙해져 있는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보고 감히 반박을 할 수 없습니다. 아니 누군가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 그것에 대해서 감히 반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왜 깨지 못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7:12절을 보겠습니다. (248)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합니다.

성경에 이렇게 분명히 율법도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이 이 거룩한 것을 누가 감히 반대를 할 수 있습니까? 법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 인생들에게 율법의 모양은 너무도 좋게 보여 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습니까?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좋습니까? 법을 안 지키는 것이 좋습니까? 그것은 말할 필요도 없이 법을 잘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잘 볼 수 없지만 우리가 여렸을 때는 카드쌕션이라는 것을 해 보았습니다. 모두가 일치된 모양이 나오면 참 보기가 좋은데 누군가 하나라도 틀리면 카드쌕션은 영 보기가 안 좋습니다.

 

거룩해 보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모양이 너무도 거룩해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반대한다는 것은 사실은 쉽지가 않습니다. 인생의 이성적인 지식으로는 율법의 모양이 너무도 좋아 보이기 때문에 또 그것을 지키고 있는 자기 자신을 볼 때 대견스럽게 보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리로 되어 있습니다.

지금 모든 교회가 제사법과 시민법은 폐해졌지만 도덕법은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반대를 하고 있는 교회는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친히 쓰셔서 모세를 통해 주신 이 도덕법을 폐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이 도덕법입니다

율법이 사람의 이성에는 분명히 거룩하게 보이기 때문에 이 도덕법을 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도덕법을 통해서 자기들이 거룩해 지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키면 의롭게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법은 사람을 비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는 나와 그렇지 않고 살아가는 세상 사람과 비교를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람의 눈에는 자기들이 주일을 지키는 그 모습이 너무 좋고 거룩하게 보여 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 율법을 통해서 의로움을 나타내고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법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2:10절을 보겠습니다. (372)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이 시대 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율법을 지키면 남들과 비교가 되어 자기들이 거룩해 보이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인들이 간과를 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율법이 유기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율법주의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율법주의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내가 지키고 있다면 그는 율법주의입니다 야고보서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내가 주일을 지키는 것과 이스라엘이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는 것을 별개의 문제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율법은 유기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를 살리는 순간 모든 율법을 다 살아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서 온 율법을 지키다 하나에 거치면 모두를 범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면 온 율법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의로워지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의롭게 살려고 합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 방법이 문제입니다 율법이라는 유기체를 살리는 순간 모든 율법이 다 살아나고 있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지만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생각을 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것에 있어서 이 세상 사람들에 비하면 의롭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 착시 현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의로워 질 수 있다고 착각을 하면서 점점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3:5절을 보겠습니다. (368)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성경은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여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보는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돈을 이 세상에서 사용하고 있는 돈으로 생각을 하고 있을 것이 분명합니다. 돈을 사랑치 말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돈을 사랑합니다.

의로워지고자 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바로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만 나오면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더욱 더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익숙해져 있는 사람들에게 어쩌면 너무도 당연합니다.

 

죄인입니다

그 죄인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고 싶어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돈을 사랑하고 율법으로 의로워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받은 것을 족한 줄로 여기지를 않고 어떻게 하든지 하나님 앞에 아니 사람들 앞에 자기가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서 돈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면 내가 좀 의로우면 어떻고 또 의롭지 못하면 어떻습니까?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런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의로워도 아무 것도 아니고 또 내가 의롭지 못해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족한 줄을 모릅니다.

내가 거지 나사로면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설령 거지 나사로가 된다 해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구원을 생각하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나타내고 싶어서 족한 줄을 모르고 점점 더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악의 종자고 죄악 중에 탄생이 되어서 죄인으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잊고 있습니다. 그것을 잊게 만들고 있는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의 몇 가지 모양을 보면서 자기가 성도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족한 줄로 아시기 바랍니다.

욥이면 욥으로 살고 또 거지 나사로면 나사로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누구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무엇이 중요한 가를 모르고 이 시대 사람들은 더 높은 이상을 가지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이 올무가 되어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경계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습니다. 비록 내가 세상 사람에 비해 의롭게 보인다 할지라도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성경이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받은 바를 족한 줄로 알면 주님께서 우리를 결코 버리시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우리는 절대로 버림을 받지 않는 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율법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613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이 또 다른 형태로 변형이 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율법으로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제가 율법을 폐했다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습니다.

그렇게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것이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지를 않다는 것입니다 십일조를 율법이 아니라고 하고 주일을 율법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들입니다

 

깨닫지를 못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율법주의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는 전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분명히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자기들이 지키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상에 미혹이 되면 율법도 율법이 아닌 것이 됩니다.

 

갈라디아서4:10절을 보겠습니다. (306)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로마서2:1절을 보겠습니다. (240)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론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율법입니다

삼가 지키고 있고 그것으로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면 그것은 율법이 됩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는 것이 있고 그것으로 남을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하고 있다면 나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이며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 613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그 외에 기록이 안 되어 있다 하더라도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판단과 정죄를 받고 있다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는 율법주의로 깊이 들어가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버렸다고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가장 경계를 해야 합니다.

다른 교훈입니다 이 율법주의에 빠지는 순간 어느 누구도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계속해서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 이 율법주의의 사상이 깊숙이 자리를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율법주의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가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바로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켰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일부를 지키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들이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것을 경계를 했습니다.

 

이 율법주의는 안 없어집니다.

주님이 오실 때 까지 사람들은 이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이유는 율법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고 더구나 그것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주셨기 때문에 잘 모르는 사람들은 이 율법으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가장 큰 문제는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는 그것입니다.

 

그 다음은 은사입니다

 

고린도전서12:11절을 보겠습니다. (278)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시느니라

 

은사

지금 이 시대는 은사주의와 율법주의가 혼재되어 있는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이 은사에 대해서 너무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율법과 마찬가지로 이 은사도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주셨습니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은사주의가 탄생이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성령이 주신 것을 누가 감히 그것에 대해서 판단을 할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성령이 주셨으니까 그것이 나타나면 마음대로 행해도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행하는 것이 나쁜 것은 절대 아닙니다.

제가 은사가 나타나는 것을 반대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성령의 뜻대로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다면 그 은사는 잘 사용을 해야 합니다 문제는 그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은사를 왜 주셨는가 하는 기본적인 것을 모르고 이 시대는 자기에게서 나타나는 은사를 아무 거리낌이 없이 나타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23-25절을 보겠습니다. (278)

우리가 몸의 덜 귀히 여기는 그것들을 더욱 귀한 것들로 입혀 주며 우리의 아름답지 못한 지체는 더욱 아름다운 것을 얻고 우리의 아름다운 지체는 요구할 것이 없으니 오직 하나님이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사 몸 가운데서 분쟁이 없고 오직 여러 지체가 서로 같이하여 돌아보게 하셨으니

 

은사를 주신 목적입니다

나에게 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은사를 통해서 지혜가 부족한 성도를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지식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지식을 알고 아직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지식으로 세워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은사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몸을 고르게 하여 부족한 지체에게 존귀를 더하게 하시려고 우리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은사는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족한 지체를 세우기 위해서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사를 왜 주셨는가 하는 것을 너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은사를 보이려고 합니다.

내게 어떤 은사가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에게 보이라고 은사를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은사를 오해를 해서 자기에게서 은사가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대는 성령의 은사라고 하면서 신비적인 체험을 하는 그것을 마치 하나님의 사인과 같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내게 은사가 있습니다.

만약에 다른 연약한 지체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다른 것으로 이 은사를 사용하고 있다면 그는 은사주의자가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사는 나를 자랑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이 은사를 통해서 부족한 지체를 존귀하게 하려고 주셨습니다.

 

돌아보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2장에 은사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자기 은사를 자랑하느라 바쁩니다. 자기가 기도를 해서 누구의 병을 고치면 그것을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광고를 해서 병원을 차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연약한 지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은사를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12:1절을 보겠습니다. (298)

무익하나마 내가 부득불 자랑하노니 주의 환상과 계시를 말하리라

 

자랑합니다.

이 시대 은사가 나타나면 그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자기에게서 은사가 나타나면 자랑을 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 성령 집회라고 하면서 신비주의적인 것을 체험을 하는 것을 많이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은사

성령 체험, 이 모든 것이 무엇인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익하다고 시작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은사를 받고 또 성령 체험을 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면 무익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을 무익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지 않고 그것을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을 하면서 믿음의 증표로 삼고 있다는데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무익합니다.

은사가 나타나고 성령 체험을 한다고 하는 이 모든 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은사주의자들에게는 이것이 절대로 무익하지 않고 이런 체험을 해야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런 체험을 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것이 자기 믿음의 증표나 되는 것 같이 아니 전쟁에서 이긴 병사와 같이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천국을 갔다 오면 뭐 합니까?

천사를 보았으면 뭐 합니까? 내가 환상을 보았으면 뭐 합니까? 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으면 뭐 합니까? 그것이 내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아무리 그런 체험을 많이 했다 할지라도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무익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무익하지만 내가 자랑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랑하라는 것입니까?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성령의 체험을 하고 너도 나도 자랑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무익한 줄 알지만 부득불 자랑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런 것은 무익하니까 너희가 그런 것으로 자랑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주셨습니다.

또 성령이 역사를 했습니다. 그것을 부정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그것이 필요 하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은사주의자들은 그것을 마치 믿음이 있는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 합니다.

 

천국을 갔다 왔습니다.

방언을 받았습니다. 성령 체험과 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무슨 역할을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구원을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진리를 모르니까 사람들이 그런 보이는 것을 추구하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은사가 나쁘다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분명히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고 있습니다. 또한 성령의 체험을 통해서 진리를 알아 갈 수 있다면 참 좋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가 사람들에게 이용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연약한 지체를 세우는데 사용이 되면 좋지만 그것이 꼭 필요한 것 같이 은사가 있어야 하고 성령의 체험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치명적인 독을 맞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왜 이스라엘이 율법으로 망했습니까?

그것은 율법의 기능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역시 은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에 와서 성령의 은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은사 자체가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은사의 기능을 모르면 역시 율법과 같이 망하는 길로 가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소경을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이 이스라엘을 소경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다가 은사가 더해져서 더욱 소경이 되고 있습니다. 은사가 너무 빛이 나기 시작을 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순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사라진다는 것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것을 하나님이 주셨어도 또 성령이 그 뜻대로 나누어 주었어도 그것의 기능을 모르게 되는 순간에는 그것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자랑을 했습니다.

성경을 보기기 바랍니다. 병을 고쳤다고 누가 자랑을 했고 자기가 지혜가 있다고 누가 자랑을 했습니까? 어느 누구도 자랑을 한 사람이 없는데 이 시대는 너무 그런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에게 은사가 있는 것을 너무 대단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누가 은사를 표징으로 삼았습니까?

 

마태복음7:22절을 보겠습니다. (10)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주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들이 이 은사로 인하여 성령체험으로 인하여 자기가 참 선지자인줄 알고 있다가 버림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이 은사와 성령 체험을 자기 믿음의 증표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은사 가능한 죽이시기 바랍니다.

연약한 지체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면 그 은사를 나타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연약한 지체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자랑하기 위해서 이 은사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은사를 보면서 자기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율법을 주셨고 신약에 와서 은사가 나타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그런 능력이 전혀 없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은사가 덧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은사를 주신 목적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왜 은사를 내게 주셨는가를 모르고 자랑을 하다가 결국에는 그것으로 망하는 길로 가게 됩니다.

 

은사가 있으면 성령을 받은 줄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 방언을 하는 사람은 자기가 보혜사 성령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또 신비적인 체험을 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보혜사 성령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과 은사에 대해서 바른 정립이 안 되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이 진리를 알아 가는데 힘쓰는 것이 아니라 그런 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율법과 은사를 보고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경계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신약 시대에 와서 은사가 주어지면 사람들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은사를 너무 좋게 생각을 하고 있고 또 남들에게서 은사가 나타나면 자기도 받을 수 있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것을 가지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세 번째 성경입니다

 

이 시대 사람들이 머리만 커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같은 경우 문맹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습니다.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고 그런 지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성경 공부를 하지 않고 있는 교회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고 은사주의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은 사실 그것을 알면 쉽게 고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또한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얼마든지 경계를 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합니다. 아카데미를 통해서 복음을 들은 성도님들은 이 부분에 대해서 더 이상 기초를 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고 율법을 폐하고 은사를 조심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성경입니다

자기가 성경을 보고 있고 또 누군가 성경에 있는 말씀을 전하기만 하면 마치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또 성경을 조금 아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마치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기록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동을 해 주심으로 그들이 모두 성경을 기록 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이 성경을 공부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대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 훈련 교제들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지식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배우고 있는 지식이 오히려 걸림이 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배운 그 지식에 세뇌가 되어서 마치 모든 것을 아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면서 자의적으로 해석을 해서 모든 것을 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성경을 공부를 합니까?

바로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목회자들보다도 더 많이 성경을 읽고 있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나름대로 성경을 보면서 연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도 100독을 넘게 했다고 합니다.

솔직히 저 보다도 훨씬 더 많이 읽었습니다. 저도 시간이 된다면 어떻게 하든지 성경을 많이 읽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 지식이 오히려 그들의 눈을 가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서 많이 아는 지식이 오히려 진리를 알아 가는데 있어 방해가 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3:15절을 보겠습니다. (346)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었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성경을 많이 읽었는가를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읽어서 모세오경 같은 경우에는 거의 외운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얼마나 많이 읽으면 그것을 다 외울 수 있겠습니다.

 

지식이 병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너무 많은 사람들이 이 지식에 병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경을 연구를 해서 바른 진리가운데로 인도함을 받는다면 그것처럼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지식에 갇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너무 아는 것이 많아서 그 안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일반 세상에서 법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육법전서를 달달 외우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성경적 지식을 배우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분명히 성경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성경을 보면서 그 안에서 지식을 얻어야 하는데 있어 어느 누구도 이의를 제기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성경적 지식이 나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으로만 안 됩니다

반드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성경의 문자적 지식을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에 갇혀서 자기가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성경을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의 문제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들이 왜 성경을 그렇게 많이 보고 있는데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지 못하고 있느냐면 바로 사람의 지식으로 성경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2:5절을 보겠습니다. (26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를 하고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람의 지혜가 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주의를 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성경을 보고 그것이 사람의 지혜가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 그것이 하나님의 지혜가 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데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고 보는 성경은 사람의 지혜가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 너무 지적으로 높아 졌습니다.

모두가 대학을 나오고 웬만한 사람은 석사 학위를 받을 정도가 되다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 세상에서 공부를 하던 그 습관대로 성경을 보면서 성경 안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많이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성경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이루게 하는 지혜가 있지만 그것을 어떻게 보는 가에 따라서 사람의 지혜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지혜가 되는 순간에는 아무리 성경을 많이 보고 그 안에서 많은 것을 안다고 해도 그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를 많이 아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지적인 수준이 높아지다 보니까 그것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성경을 읽고 배우고 있는데 그것에 성경 안에서 갇혀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안 보아서 망했습니까? 그들이 성경을 안 보아서 망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지식적으로는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성경을 많이 보았지만 그렇게 공부를 한 그것이 오히려 그들의 덧이 되고 말았습니다.

 

교인들이 착각을 합니다.

자기가 성경을 보고 있고 또 성경을 공부하는 그것으로 마치 자기가 하나님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느 사람은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 수 있습니다. 꼭 성령의 감동이 아니더라도 어느 사람은 지식이 뛰어나 하나님의 비밀을 어느 정도 알 수 있습니다. 정말 성경을 탁월하게 해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 시대도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선택입니다 물론 그렇게 선택을 한 성도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가르치고 있고 또 교회 안에 들어오면 성경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성경이 사람들의 이성적 지식이 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또한 그 지식이 교만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목사가 아니더라도 이 시대는 누구라도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어느 정도를 배웁니다. 그러나 지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이 시대는 누구나 성경을 보고 자기 스스로 이해를 해 가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그 문자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고 자기 지적 수준에 맞는 지식이 스스로를 교만하게 만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전서8:1절을 보겠습니다. (272)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지식이 있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어디에 무슨 말씀이 있고 또 누가 나오고 어떤 사건이 있고 하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으로 바뀌고 있는가 하면 바로 우상의 제물로 바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는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경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또 성경을 공부를 하고 하는 것으로 그래서 자기가 성경을 지적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이것은 율법주의와 은사주의와 성하주의보다 더 무서운 일입니다 사실 이것으로 인하여 율법주의와 은사주의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이견을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상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 자체를 아는 지식은 쓰레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그것이 자기 이성적 지식에 갇히게 되는 순간에는 우상의 제물로 바뀌고 만다는 것을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 너무 맹목적입니다

그 안에 있는 말씀이라고 하면 감히 이견을 제시하지 못 합니다 성경 안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가르치고 있으면 사람들은 그것이 모두가 옳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성경을 얼마나 다르게 해석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반대로 해석을 하고 있는 말씀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시편78:25절을 보고 있습니다. (859)

사람이 권세 있는 자의 떡을 먹음이여 하나님이 식물을 충족히 주셨도다

 

식물을 먹고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 자기가 믿음이 있다고 자부하고 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매일 큐티를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매일 식물을 먹으면서 그 식물로 인하여 배가 불러 있고 포만감을 가지고 마치 하늘의 모든 것을 다 얻은 것 같이 마음에 부자가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성경을 보지 말라고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또한 성경 공부를 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것 또한 아닙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식물을 매일 먹어야 합니다. 그 식물로 충족해 져 있어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식물을 어떻게 먹고 있고 어떤 식물을 먹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식물을 먹는다면 그것이야 바랄 것이 없습니다.

 

문자적인 성경이 걸림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성경을 본다고 해서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 성경을 보고 이해를 한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육법전서를 보고 그 안에서 깨닫는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성경은 귀합니다.

또한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분명히 성경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이 성경을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보고 있지만 실제 구원을 받는 사람들이 적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식물을 먹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저는 이제 겨우 50번 정도 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 목회자들 중에 나이가 있는 사람들은 최소한 100번 정도는 다 읽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요즘 50대 이하의 목회자들은 거의 성경을 읽지도 않고 목회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을 그렇게 많이 읽고 식물을 먹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 한국교회가 어떻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지혜가 되었습니다.

이 세상의 이성적 지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의 입에서는 성경이 줄줄 나오고 있습니다. 영혼을 충족히 하는 식물이 아니라 오히려 그 식물이 우상의 제물이 되어서 그것을 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양면성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어야 하는데 도리어 성경을 통해서 구원을 방해를 하는 우상의 제물을 먹는 식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을 정말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설령 그것이 진리를 아는 지식이라 해도 그것을 자랑하게 되는 순간에 여러분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보물이 있지만 또한 성경을 보고 사람들은 악으로 점점 빠져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머리가 커지면 안 됩니다

지금 이 시대 인터넷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속된 말로 개나 소나 이 세상의 이성적 지적 능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 성경을 해석하고 있고 그것을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과연 그 중에 정말 진리를 전하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하나님의 식물을 먹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저는 솔직히 그 분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히브리서13:9을 보겠습니다. (369)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써 굳게 함이 아름답고 식물로써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였느니라

 

성경은 식물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식물이 될 수 있고 또 우상의 제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분명히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설령 그것이 하나님의 식물이라고 해도 그 식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제가 늘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분명히 영생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이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식물로서 할 것이 아니라 식물로 말미암아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좀 이상합니다.

분명히 영생은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족해 져야 합니다. 그런데 히브리서에서는 식물로 할 것이 아니니 식물로 행한 자는 유익을 얻지 못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모든 비밀을 안다고 해도 그것이 유익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가 복음의 모든 비밀을 다 여러분에게 가르친다 해도 그것이 유익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제가 하나님의 신령한 식물을 먹지 말라고 드리는 말씀이 절대 아닙니다.

 

고린도전서13:8절을 보겠습니다. (279)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는 지식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지식도 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좀 어렵지만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비밀을 아는 성경적 모든 지식이 있다 해도 그것을 폐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거할 수 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그것을 폐하지 않으면 내 안에 은혜가 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아카데미를 듣고 있는 여러분에게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저에게서 복음의 비밀을 듣고 있다고 해서 마지 내가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 식물은 여러분에게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분명히 신령한 식물을 먹고 성경을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히브리서 139절에서 은혜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은혜를 모르고 또 이 은혜가 내 영혼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있다면 여러분이 아는 지식이 절대로 유익이 되지 못 합니다

 

감동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은혜가 있는 성도 은혜가 넘치는 성도는 자기 영혼이 얼마나 뜨거운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말로는 은혜를 말하고 있지만 은혜의 성령이 감동을 해 주지 않고 있기 때문에 율법주의 은사주의 그리고 자기 이성적 지식으로 성경을 아는 것에 갇혀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는 양면의 칼이다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쓰셔서 모세에게 주셔서 이스라엘에게 반포를 하시고 그것을 휘장 안 법궤 속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은사는 성령이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40여명의 선지자를 통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세 가지는 분명히 우리에게 너무 좋은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들은 양날의 칼과 같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 자체만으로 너무 좋게 생각을 하고 있고 그 뒤에 있는 나를 찌르고 있는 다른 칼을 전혀 못 보고 있습니다. 이 세 가지만 주의를 해도 구원에 한층 가까워 졌다고 보면 맞을 것입니다

 

1, 율법,

생명에 이르게 하는 그 법이 오히려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거룩하기 때문에 분명히 우리 인생들이 그것을 다 지키면 생명에 이를 수 있지만 그것이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법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좋은 뜻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을 통해 죄를 깨닫고 또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율법을 자기들의 행위로 나타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2 은사

각 지체를 세우는데 있어 꼭 필요합니다. 교회에서 은사가 있어야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쉽게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은사를 사람들이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자랑을 하는 그것으로 인하여 자기 영혼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 체험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너무 억지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성령체험이라고 하는 역사를 보면 그것이 정말 성령의 역사라고 하기 보다는 자기 최면에 가까운 종교적인 행위로 변질이 되고 그것이 너무 자기들에게 강하게 보이고 있어서 그것을 한번 체험을 한 사람은 그것이 자기에게 있어 너무도 강한 증표가 되어 더 이상 진리를 아는데 힘쓰려 하고 있지 않습니다.

 

3, 성경

분명히 우리 인생에게 영생에 이르게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만약 성경이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 사람들은 문자가 갇혀서 거기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는 지적인 수준이 있다 보니까 자기 스스로 성경을 알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잘못된 교훈으로 자라기 시작을 하면 더 이상 진리를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은 분명히 영생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인생의 이성적 지식이 되고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유익을 주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진리를 전했지만 듣는 사람이 그것을 은혜로 받아들이느냐 아니면 인생의 지식으로 받아들였느냐에 따라 그들이 전혀 다른 길을 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로 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22:21절을 보겠습니다. (423)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경의 마지막 절입니다.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저는 이 말씀에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함축이 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을 합니다. 내가 율법을 아는 모든 지식이 있다 해도 또 은사가 있어 모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다 해도 사도 바울과 같은 진리를 아는 자로부터 성경을 배워서 지식이 있다 해도 그에게 주 예수의 은혜가 없다면 그는 분명히 버림을 받게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은혜로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말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가 은혜를 받았다고 아무리 말로 해도 그것이 은혜가 되지를 않습니다. 은혜는 성경을 통해서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을 때 그것이 내 안에서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에 대해서는 너무 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들이 은혜를 받아들이고 있지를 않습니다.

 

성도는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를 내게 있기 하기 위해서 율법의 의를 버리고 또 때로는 너무도 빛이 나는 은사를 버릴 수 있어야 하고 그리고 성경을 통해 아는 지식도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오직 주 예수의 은혜를 바라는 성도가 되어서 주님의 날에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방황하는 교인들에게' 카테고리의 다른 글

41강, 사람의 본분  (0) 2019.03.25
40강, 창조하신 목적  (0) 2019.03.24
38강, 사람의 본분  (0) 2019.03.23
37강, 부활(부활의 형체)  (0) 2019.03.22
36강 새 하늘과 새 땅  (0) 2019.0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