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복음과 율법-설교2

제38강, 양선

윤주만목사 2018. 10. 26. 06:43


38, 양선

​​​마가복음 10:18절을 보겠습니다. (7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양선

선함을 말 합니다. 예수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자 주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고 일컫느냐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서를 강의 하면서 이미 이 선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이라는 것을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선은 순전히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선이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과는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이미 말씀을 드렸지만 생명을 주지 못하는 것은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분명히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일도 선한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전한다 해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에 대해서 전할 수는 있어도 우리가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이 선이 아닙니다.

물론 성경에도 그것을 선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씀을 드리면 선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한 일은 반드시 생명을 줄 수 있는 분만이 선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시편을 보면 다윗의 고백에서 하나님이 선하다는 것을 많이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는 선하시다는 다윗의 시편은 주님은 나를 구원해 주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선하신 분인가 하면 나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선하신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해 주실 수 없다면 절대로 선하신 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구입니까?

마땅히 죽이야 하는 인생입니다 내가 의인이라서 구원해 주신다면 선하신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 나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선하시고 하나님 한분 밖에는 선하신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선하신가 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나를 구원해 주시기 때문에 선하시다는 말씀입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주님이 선하신 분이 아닙니까? 분명히 주님은 우리를 구속해 주셨기 때문에 선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인생의 몸을 입고 있으시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지금 부자 청년에게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하신 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하신 분입니다,

이제 구속의 모든 일을 이루시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이 양선의 열매를 맺어 주심으로 우리가 지금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선하신 분으로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구속의 일을 하시고 하늘에 올라가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히브리서3:6절을 보겠습니다, (355)

그리스도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으니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견고히 잡으면 그의 집이라

충성입니다.

국가나 임금, 윗사람 등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하는 것을 충성이라고 사전에서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3장에서는 모세가 어떻게 충성을 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충성을 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장래에 말할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냈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그는 죽고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하나님의 사환으로서 충성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세는 가나안까지 인도하는 자로서 사환으로서 충성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아들로서 충성했습니다,

어떤 아들로 충성을 했는가 하면 그의 집 맡은 아들로서 충성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역을 다 마치시고 이제 십자가를 지시려고 합니다, 그것을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니까 제자들이 마음에서 근심을 했습니다, 왜 근심을 했는가 하면 언제까지 주님이 자기들과 함께 있으면서 왕이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온 집을 맡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천국의 모든 것을 맡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집을 맡으신 분으로서 충성을 하셔서 이제 주님이 천국에 가셔서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환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주님이 하실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도 사환입니다.

그 사환은 종으로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집을 맡은 아들로서 충성을 하셔서 우리가 거할 처소를 예비하고 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충성에 대해서도 오해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고 자기들의 육체의 행위로 충성하려고 하는 어리석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령의 소욕은 우리의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충성을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도 없고 또한 영생을 줄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모세와 같은 사환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온 집을 맡으신 아들로서 충성하셔서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잡으면 그의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막연하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온 집을 맡으신 아들로서 충성해서 우리가 소망의 담대함과 자랑을 끝까지 잡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들로서 충성하지 않았으면 우리는 천국에 들어가고 싶어도 못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가 충성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충성을 했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들로서 충성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미 그것을 성막을 통해서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그 성막을 보고도 주님께서 어떻게 아들로서 충성을 하셨는가를 모르고 그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 모든 열매는 주님이 맺어주신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맺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는 열매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맺어 주셨고 성령이 계속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고 말씀하면서 그것을 사도 바울이 소욕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23절을 보겠습니다, (308)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온유와 절제입니다. 이런 것들을 막을 법이 없습니다.”

마태복음11:29절을 보겠습니다. (18)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온유

온화하고 부드럽다는 사전적인 뜻입니다, 주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멍에가 무엇입니까?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멘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십자가를 지라는 말씀입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의 일이고 부활의 일이며 천국의 일이라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이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렇게 고난을 받으실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은 온유하셨습니다. 온화하고 부드러웠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렇습니까?

십자가는 주님도 인생의 모습을 입고 계시기 때문에 고통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육체로는 정말 끔찍할 정도의 고통이 기다리고 있지만 주님은 앞에 있는 즐거움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받게 하실 것을 믿으셨습니다,

주님은 온유하십니다.

어떻게 온유하셨는가 하면 영의 일에 있어서 온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멍에를 메시면서도 마음에서는 쉼을 얻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실 때 오히려 제자들이 근심을 했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받게 하신다는 것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온유하게 받아들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온유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인격이 온유해 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얼마나 온유하셨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자기 멍에를 메실 때 온유하지 못했다면 그것을 거절할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의 멍에를 메시면서도 온유하게 받아들으셨습니다.

믿음입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실 것을 믿지 않았다면 절대로 온유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자기 멍에를 메시면서도 오히려 마음에 쉼을 얻고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께서 이 온유하심으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멍에를 매심으로 해서 우리도 역시 주님에게 붙은 자가 되어서 부활할 수 있는 길이 열려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정말 자기 앞에 있는 모든 일에게 온유하셨습니다. 그리고 겸손하게 그 모든 일들을 받아들이셨습니다, 그 온유함이 있어서 지금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내가 온유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그런 모양을 나타내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오신 성도가 육체적으로 온유함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주님께서 얼마나 온유하신 분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온유함을 믿으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이 온유하심으로 우리가 지금 구원을 받고 있다는 것을 성령의 소욕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14:10절을 보겠습니다. (172)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절제입니다.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이 절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다 가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고 마치 폭주기관차처럼 브레이크가 없는 것 같습니다,

주님은 절제를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절제를 하셨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육체를 입고 온 사람의 이성으로 한 번도 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말 하지도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스스로 말씀을 하셨다면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이 복음은 복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어도 그것을 스스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중요합니다,

주님이 절제를 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됩니까? 주님도 우리와 같은 인성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정말 때로는 화도 나고 때로는 인간적으로 말씀을 하시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절대로 그렇게 하시지 않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일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이 절제에 대해서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그냥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닙니다, 사전적인 뜻에서도 말하고 있지만 정도를 넘지 않도록 알맞게 조절하거나 제어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인생의 감정이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세전에 예정하셔서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 일이 만세전에 예정이 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다른 많은 것을 보셨을지라도 오직 이 일만 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절제하셨습니다,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이 완전한 율법주의에 빠진 것을 보시고 얼마나 화가 나셨겠습니까? 그들을 멸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일에서도 절제를 하시고 오직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우리를 구속하는 그 일만 하셨습니다.

주님의 절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이 절제에 대해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절제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모르고 폭주기관차처럼 내 달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성도가 하는 절제에 대해서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다시 말씀을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성령의 열매입니다,

누가 맺었습니까? 우리가 맺은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갈라디아서에 있는 이 말씀을 보고 자기가 맺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령이 오시면 이런 열매들이 나타난다고 주장을 하면서 자기가 성령을 받았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해서 이런 열매들을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17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이 무엇이라는 것을 지난 시간에 하나하나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를 보았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지금 이 시대 교회가 하고 있는 거의 모든 일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열매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모든 일들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열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거스리면서 서로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을 행하면 성령이 소욕이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이 믿어지면 육체의 소욕이 거스린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는 육체의 소욕을 하고 싶어 합니다.

그리고 성령은 우리에게 주님께서 맺어주신 열매를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같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가는 자는 육체의 소욕을 대적하고 있고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성령의 소욕을 대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저도 이제까지 약간 잘못 알았던 부분이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이 우리 육체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으로 설교를 통해서 올렸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 갈라디아서 강해를 쓰면서 그것이 아니라 성령의 소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 열매들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와서 믿게 역사를 한다는 것을 다시 알게 되었습니다.

로마서8:2절을 보겠습니다. (249)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거의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희를 해방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성도는 이제 육체의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데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 해서 맺어주신 열매를 믿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과 믿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마지막이 바로 생명의 성령의 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버리라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성도는 반드시 육체의 일을 버릴 수 있습니다,

믿음의 비밀입니다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믿음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밝히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육체의 일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행하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그 일에 너무 열심을 내고 있어 안타깝기만 합니다,

성령의 법은 생명을 줍니다,

성령의 소욕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소욕은 우리를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성령의 소욕이며 이것을 어느 누구도 금지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막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습니다, 내가 이제까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살았다 할지라도 성령이 오시면 이것을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행한다는 말씀은 성령이 이것에 대해서 소욕을 하면 우리는 그것을 믿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법입니다

성령의 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어느 누구도 이 생명에 대해서 막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의 소욕을 거스리는 육체의 일을 하면서 자기들 스스로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왜 성령을 받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만이 성령의 법이 내 안에 있어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성령의 소욕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9가지 열매를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서로 대적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성령을 받은 사람이 육체의 일을 잘한다고 하면서 부추기고 있습니다. 사실은 성령을 빙자해서 육체의 일을 하게 만들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지 못하게 하는 사단의 고도의 계략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자기 행위를 어떻게 하면 잘할까를 생각하면서 육체의 소욕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성령의 소욕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이루신 일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어떻게 받는 것인지 기본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은 반드시 복음의 말씀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다른 복음이 아닌 반드시 복음을 듣고 믿을 때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24절을 보겠습니다. (308)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사람은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이제 결론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전 시간에 살펴보았던 육체의 일을 하지 않으려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로만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닙니다.

고통입니다,

육체의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정말 자기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이런 말씀들을 아는 것으로 고상한 척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자기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면서 육체의 일을 하고 있다면 그는 이중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말은 참 잘 합니다.

그리고 성경의 문자는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문자를 알았으면 실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말로만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 아니라 실제 내 삶에서 육체의 일이 나타나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문자를 아는 지식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는 문자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들은 안 믿고 여러분은 믿습니까? 믿는다면 그럼 육체의 일이 나타나지 말아야 합니다, 육체의 일을 그대로 하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백번을 이야기해도 그는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저 막연합니다.

남들이 그렇게 성경을 보고 가르치니까 마치 자기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상은 육체의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런 말을 아주 감동적으로 하는 것으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사도 바울이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서로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일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성령의 소욕을 따라 믿을 수 없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믿는 성도는 단 한 가지라도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소욕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게 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 되어서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육체의 소욕을 따라 하는 육체의 일을 하지 말라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주 자랑스럽게 이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서 육체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이렇게 자기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육체의 일을 하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은 참 잘 합니다.

그런데 행동을 보면 다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이중적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과 행동이 전해 다른 사람들입니다. 자기들이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을 텐데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하면서도 육체의 소욕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백성이 지식이 없어서 망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지식이 없어 망하는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꽤나 지식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이 없어서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이라고 하면서 자기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어떻게 못 박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내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사망입니다, 말로만 못 박았다고 하지 마시고 성경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못 박는 것인가를 바로 알고 육체의 일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육체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내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단 한 가지의 목적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까? 그런데 육체의 일을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런 사람은 아무리 말로 그리고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절대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은 참 많이도 압니다, 솔직히 목사인 저 보다도 성경 말씀이 줄줄 나오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그 말씀과는 정 반대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을 따라 살려면 반드시 내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25절을 보겠습니다. (308)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찌니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으니 우리는 성령의 지도를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보는 성경은 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5장만해도 그렇습니다. 25절 앞에다 동그라미를 쳐 놓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제 전혀 다른 말씀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계속적으로 이어져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장절을 구분해 놓은 것은 어느 정도 인정이 됩니다.

사람이 보기에 편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이렇게 자기들 임의로 마치 한 문장이 끝나고 다시 다른 문장이 시작이 되는 것 같이 동그라미를 쳐 놓는 것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런 사소한 것들이 오히려 복음을 알아 가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고 있지만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은 자꾸 자기 생각을 넣어서 어렵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성령이 내 안에 오셔서 소욕을 일으키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 놓으신 열매를 알 수 있게 되었고 오직 믿음으로 생명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지 않으면 절대로 이런 소욕이 우리 안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게 하고 대적을 하게 해서 더 이상 육체의 소욕을 따라 일을 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런 성도가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생명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듣고 믿는 것이나 성령이 오셔서 역사를 해서 믿게 하는 것이나 동시에 임하는 역사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합니까?

그것은 성령이 오셔야 우리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았을 때 성령이 오셔야지만 우리가 진리를 알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가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으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성령의 소욕이기도 합니다. 성령으로 행하면 주님께서 맺어주신 열매를 믿을 수 있고 주님이 하신 모든 일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가 육체의 소욕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이 서로 대적하고 있다는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절대 그 둘이 함께 나타날 수 없습니다,

내가 믿습니까?

그러면 육체의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따라 살지 않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이미 음녀가 되어 있는 교회에 들어가는 순간에 육체의 일을 하게 되고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없습니다.

성령의 욕심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나를 통해서 무엇이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맺어주신 열매를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성령을 따라 행한다고 하면서 도리어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게 되면 그렇게 자기가 무엇을 하는 줄로 모르고 사망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을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강하게 소욕을 일으키시고 있습니다, 어떤 소욕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열매를 믿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26절을 보겠습니다, (308)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찌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는 잘난 체하지 말고 서로 싸움을 걸지 말고 서로 질투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이 한 가지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앵무새처럼 잘하고 있지만 그 은혜가 전혀 그들에게 은혜가 되지 않아서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헛된 것이 무엇입니까?

육체의 소욕이 헛된 것입니다 내 육체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헛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이 헛되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빠져 육체의 일을 하면서도 그것이 헛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하면 모두가 정신을 잃고 혼미하게 됩니다.

헛됩니다,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 하는 모든 수고가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헛되면 솔로몬이 4번이나 반복해서 말씀을 하겠습니까? 그 헛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보았던 육체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입니다.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이러한 것들이 다 헛된 영광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이 모든 것을 교회 안에서 행하면서도 자기들이 이 헛된 영광을 구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성령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잘난 체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입니다, 벌레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했다고 잘난 체를 합니까?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그 자체가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뽐내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육체의 일을 하면서 서로 잘난 체를 하고 있습니다.

서로 싸움을 걸고 있습니다,

누가 더 잘하는가 아니면 누가 못하는가를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에 빠져 자기가 하는 그 일을 하지 않으면 서로 싸우고 있습니다, 이것을 해야 한다고 하고 또 저것을 해야 한다고 하면서 서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서로 투기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을 해서 누군가 빛이 나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도 그것을 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특히 목사들은 남의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면 자기 교회도 그것을 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고 그것이 또 교인들에게 그대로 영향을 주고 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육체의 소욕에 빠져 있기 때문인데도 그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은 망하는 길입니다.

혹시라도 내가 지난 시간에 살펴보았던 육체의 일 가운데 한 가지라도 하고 있는가를 늘 살펴서 경계를 해야 합니다. 그것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와 같은 것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행위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 그것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합니다. 우리 인생들이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행할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인생은 헛된 그림자 같습니다,

그 인생이 하는 모든 일이 다 그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 인생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 육체의 소욕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헛된 것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하는데도 그것에 애착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이 하신 모든 일만이 헛되지 않습니다. 성도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성령의 따라 살아가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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