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복음과 율법-설교2

제40강, 행위

윤주만목사 2018. 10. 27. 06:14


40, 행위

​​​로마서 4:2절을 보겠습니다. (243)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으면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아니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면 분명히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자랑했습니다. 우리가 욥기를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가 고난 중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한 일에 대해서 자랑을 하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렇습니다.

욥이 고난을 받기 전에 어떻게 살았는가를 성경에서 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의롭게 살았으면 하나님의 공평한 저울에 달려 보겠다고 까지 이야기를 하겠습니까?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분명히 남에게 자랑할 것이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남에게 자랑을 하면서 자기가 신앙생활을 잘 해서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저는 제가 이 복음을 깨닫고 생명을 얻었다는 그 생각만 해도 가슴에서 벅차오릅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게 너무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자랑이 됩니까?

영생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절대 모릅니다. 또 이 시대 거의 절대 다수가 다른 복음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모든 진리로 내가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이 제 안에서 무엇보다 더 큰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육체는 약합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내 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말 기적과도 같이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복음을 주셔서 그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너무도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이 자랑은 구원을 받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자랑입니다. 거짓이 아닌 종교에 속은 그런 구원이 아닌 육체의 소욕을 다 버리고 오직 성령의 소욕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자랑이 됩니까?

내 스스로가 자랑이 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아니라 해도 저는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이 세상 사람이 저를 모른다 해도 저에게는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를 그의 의로 정하셔서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그 믿음이 구원을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정말 그렇습니다.

제 자신이 너무도 자랑스럽습니다. 정말 주님의 은혜로 이 복음을 깨달아 그리스도 영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것도 교회 안에 있는 천만이라는 숫자가 모르는 믿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영생을 얻었다는 것이 정말 자랑스럽습니다.

자랑하시기 바랍니다.

내 안에서 자랑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어느 시대를 보더라도 영생을 얻은 자는 아주 적습니다. 노아 시대에는 단 한 사람 노아만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리고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도 갈렙과 여호수아만 들어갔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계속해서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어느 정도 적습니까?

이 세상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도가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갈 정도로 적습니다. 그런 적은 중에서 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생명이 있는 성도는 자기에게 자랑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남에게는 자랑이 안 됩니다.

남에게 자랑해 보아야 그들은 알지 못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 어느 누가 우리 성도님들의 자랑을 알 수 있습니까? 아마도 자랑하려고 하면 도리어 이단이라고 공격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일한 것이 없어서 남에게는 자랑을 못하더라도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믿어지기 때문에 나에게는 자랑이 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5절을 보겠습니다. (309)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임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람은 각각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합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정말 놀라운 비밀들을 가르쳐 주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공평하신 분인가를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 형편과 처지를 보면서 때로 원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를 성경에서 알게 되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를 통해서 역사하시는 모든 일들이 다 받아들여지게 되어 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살펴야 합니다.

왜 살펴야 하는가 하면 시험을 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 일을 살펴서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교회에 나오면 육체의 일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시험을 당하는 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시험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다시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시험을 받는 사람들에게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사람은 육체의 시험에 거의 무방비로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셔서 각각 자기의 일을 살필 때 내가 당하고 있는 시험이 무엇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육체의 일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세상의 음행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리고 세상의 더러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에 세워져 있는 여러 가지 우상을 보면서 우상숭배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누가 우상 숭배를 합니까?

아마 어느 목사가 정말 우상을 만들어서 숭배한다면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는 우상숭배가 이미 초대교회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막 전한 교회에 우상숭배가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우상숭배를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육체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가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교회들이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육적인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 마귀에게 미혹이 되어 있는 마귀의 자식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의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이 그대로 신약의 교회에서도 나타났습니다. 다만 모양이 달라졌습니다. 구약에서는 실제 우상을 숭배했고 신약에서는 그것이 보이지 않은 우상이 되었습니다. 아니 다른 우상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도 우상의 제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자기들이 실제 보이는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마치 우상숭배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숭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한 초대교회에 우상숭배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가 우상숭배를 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무지한 자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얼마나 많은 우상을 숭배하는 줄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죽을 때까지 깨닫지 못하고 살아갈 것이 분명합니다.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5장에서 우상숭배에 대해서 그리고 육체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 육체의 일이 이 시대 교회 안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누구에 의해서 나타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모르고 많이 받은 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적게 받은 자는 자기 짐을 지기가 쉽지만 많이 받은 자는 그것이 다 시험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짐을 진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6:9절을 보겠습니다. (341)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고 말씀합니다.

그 짐이 무엇인가 하면 육체의 시험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각의 사람에게 분복을 주셨습니다. 누가 부하려 하겠습니까? 각각 자기의 짐을 지어야 하는데 누가 더 시험을 받겠습니까?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지 나사로와 같이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더 무거운 짐을 지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역설적인 것을 많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상식으로는 거지 나사로가 더 무거운 짐을 질 것 같지만 실상은 부자가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못하면 괜찮습니다.

하나님께서도 하지 말라고 하니까 하지 않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현저한 일을 다 할 수 있게 받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얼마나 부해지고 싶겠습니까? 못해서 부해지지 못한다면 차라리 포기나 할 수 있는데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람이 육체의 시험에 그렇게 쉽게 빠지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도 몇 가지는 자기가 할 수 있기 때문에 육체의 시험에 아주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많은 것을 할 수 있는데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니까 부해지는 것이 맞습니다. 사실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이 짐을 지고 육체의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형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정말 하나님의 영광이 넘치는 찬양대가 있습니다. 그것을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편지 같이 아무 것도 없는 곳은 사실 그 짐을 지는 것이 쉽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는 상태에서는 그 짐을 진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부해질 수 있는 모든 여건이 다 되는 상태에서는 시험에 빠지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러워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오히려 그런 면에서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부자가 되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리스도편지에서도 내분이 일어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왜 하지 않느냐고 하면서 자기들이 하고자 하는 육체의 일에 점점 더 시험을 받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우리는 가진 것이 없으니까 짐을 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미 한국기독교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시험에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숫자가 없으니까 성가대를 만들 필요도 없고 찬양을 부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그것을 하고 싶어 합니다. 사단은 이렇게 많은 것을 주고 시험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대형교회만 그렇습니까?

아주 작은 교회도 어떻게 하든지 대형교회의 모양을 갖추려고 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서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하고 싶어 하는 육체의 일을 하려고 하나님께 거의 떼를 쓰면서 기도를 하고 응답을 받을 때까지 하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는 부해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물론 적게 준 것도 있지만 많이 주셨다 해도 역시 우리는 우리의 짐을 질 수 있게 성령께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교회에 절대 다수는 어떻게 하든지 부해지려고 애를 쓰고 있고 그것이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짐입니다.

사실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일수록 그 짐이 더 무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가지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정말 이 짐을 가볍게 해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시험은 더욱 강하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에게 무엇이 있었습니까? 지금의 교회는 너무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시험을 당하고 있고 그 시험으로 인하여 침륜과 멸망에 빠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초대 교회는 사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만큼 시험을 덜 당했고 믿음을 굳게 지킬 수 있었지만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짐을 지고 있고 그것이 다 시험이 되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 약한 것에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저는 이렇게 예배할 수 있어 주의 만찬을 나눌 수 있는 처소가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교회가 하나도 부럽지 않습니다. 이런 우리이기 때문에 짐을 질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누구에게는 더 많은 것을 주시고 또 누구에게는 적게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정도로 바리새인으로 살았지만 자기의 짐을 지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의 고백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만삭 되지 못한 자에게도 은혜를 주셨습니다.

시험을 받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장성한 분량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짐을 지고 시험을 이길 수 있는 성도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에게도 은혜를 주셔서 육체의 시험에서 이길 수 있게 성령의 소욕을 일으켜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의 법 생명의 법을 성취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2:47-48절을 보겠습니다. (116)

주인의 뜻을 알고도 예비치 아니하고 그 뜻대로 행치 아니한 종은 많이 맞을 것이요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찾을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주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비유로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에게 주님의 소유를 맡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소유는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어 생명을 얻고 있습니다.

종입니다.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줘야 하는 종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시고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이것을 나눠주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이 시대 역시도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주는 종은 없고 주인이 더디 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노비를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해 있습니다.

왜 먹고 마시고 취해 있습니까?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많은 것을 하나님으로 받아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역시 많은 받은 자들로 교회 안에 넘쳐나서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많이 받은 그것으로 노비를 때리고 먹고 마시고 취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취해 있습니까?

술에 취해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취해 있습니다. 많이 받은 자들은 이렇게 율법의 술에 취해 있습니다.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그는 그만큼 시험이 더 크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는 정말 아무 것이 없어도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노비를 때리지도 않았고 취하지도 않았습니다. 많이 받았을지라도 그들은 오직 복음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나 바나바 같은 사람은 정말 많은 것을 받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취하기보다는 각각 자기 짐을 지고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참으로 오묘합니다.

거의 모든 말씀이 성경에서 답을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에서 답을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이성으로 그 문자를 이해하려고 하다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지금도 사람들은 지독하게 문자에 사로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모릅니다.

아니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문제는 기초가 너무 안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왜 보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것을 자랑하느라 모든 시험에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짐을 지는 것이 아니라 시험이 오면 너무도 쉽게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속히 떠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복입니다.

재물도 물론 분복입니다. 그러나 내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 역시 분복입니다. 또 은사도 분복입니다. 우리 성도는 분복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가 그리고 은사를 통해서 복음을 가리는 일들이 악하다는 것을 알기에 그 분복도 오직 복음을 전하는 일에만 사용하고 있습니다.

누구는 많이 받았습니다.

그 많이 받은 것이 절대로 축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면 우리는 감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분복을 많이 받은 자는 그만큼 시험을 많이 받게 된다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많이 받은 것을 보고 부러워하지도 말고 또 적게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입니다.

우리는 그 명령을 지키기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덤입니다. 그것을 덤으로 생각하는 성도는 내가 많은 받은 것을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으로 시험을 받는데 있어서도 더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보다 사실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이 되는데 안 지키는 것이 더 무거운 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6장의 말씀이 어렵더라도 우리는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계속해서 조금 이해하기 힘든 말씀들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입니다.

그리고 성령의 소욕입니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고 있다면 또 이해가 쉽게 되리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정말 믿음의 비밀을 맡은 자 외에는 안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이 믿음의 비밀을 주시고 성경을 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셨습니다. 성경을 바로 깨닫고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6:6절를 보겠습니다. (309)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시험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시험을 받고 있습니까? 시험을 당하지 말라고 하는 그 말씀을 보고 도리어 사람들이 시험을 받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를 보면 시험을 당하지 않을 수 없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 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성도로 살면서 교회 안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이성이 있어서 교회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에게 많은 것이 있다 보니까 그것이 걸림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에게 많은 것을 주었으니까 이제 그 짐도 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아니 모든 목사들이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각각 자기 짐을 질 것이라고 하는 그 말씀을 가지고 마치 이 세상 교회에서 자기가 해야 하는 일을 하라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오히려 더 욕심을 내고 있습니다. 육체의 시험을 받지 말라고 한 그 말씀을 오해를 해서 자기가 가진 것의 짐을 지라는 뜻으로 받아들이고 교회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때 많이 합니까?

특히 교회를 건축하거나 교회에서 큰 일이 있을 때 이 말씀을 아주 적절하게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보이는 육적인 짐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을 거의 다 육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복음을 다른 복음으로 만드는 데는 사람들이 천부적인 체질을 타고났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짐을 각각이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지 육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왜 다른 복음이 되고 침륜과 멸망을 당하는가 하면 성경을 사람의 이성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문제는 우리나라 목사들이 국어를 너무 모르다 보니까 성경의 문장을 해석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씀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모르게 되면 다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누구나 이 세상에서 공부를 하면 다 알 수 있습니다.

각각의 짐입니다.

그것은 내가 받는 시험의 짐입니다. 교회에서 무엇을 하라는 짐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기 위해서 시험을 받아야 하는 그 짐을 지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이 말씀을 가지고 교회라는 아세라를 위해서 더욱 열심을 내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라는 아세라를 위해서 짐을 지게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육적으로는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없습니다. 일이 있다고 하는 사람은 다 멸망과 침륜에 빠지게 됩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탁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것은 법이 아닙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부탁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부탁입니다. 내가 할 수도 있고 하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 부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은 부탁이 아니라 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단어의 의미를 모르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법으로 만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의 일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보고 육적으로 짐을 지게 강요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강요를 하는 순간에 그것이 육체의 일이 되고 그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정말 지혜롭게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강요에 의해서 하는 것은 다 죄가 됩니다. 그래서 자원하는 마음을 주셨고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 말씀을 너무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번역상의 약간의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그래도 한글개역성경이 성경에 가장 가깝게 번역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원 뜻과는 차이가 있게 번역이 된 것 같습니다.

신명기12:19절을 보겠습니다. (282)

너는 삼가서 네 땅에 거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율법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이 말씀과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연결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에게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이스라엘이 레위인을 저버리지 않은 것과 같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자기 육체의 좋은 것이 있으면 가르치는 자 목사와 함께 나누어 가지라는 뜻으로 가르치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오해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이용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앞뒤 딱 잘라서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고 있는가 하면 자기가 직접 하기는 뭐하니까 다른 목사를 초청해서 설교를 하게하고 그들이 이 말씀을 가지고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말 합니다.

봐라 사도바울도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다 하면서 정말 목사를 잘 섬겨야 한다는 것을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보고 자기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을 목사에게 주려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좋은 차를 타면 목사도 좋은 차를 사줘야 하는 것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있는 것이 좋은 것이 있습니까? 모든 좋은 것이라고 하니까 마치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누리고 있는 분복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좋은 것을 함께 하기 위해서 더욱 열심히 헌금도 하고 있고 또 자기에게 좋은 것이 있으면 목사에게도 주려고 합니다.

생각부터 바꾸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늘 영의 말씀이라는 것을 강조를 했습니다. 그런 육의 말씀이 아니라 영의 말씀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육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미혹하는 자는 거짓 선지자입니다. 그리고 미혹을 당하는 자 역시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망입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사망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수가 좋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른 좋은 것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을 보면서 좋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기초가 없으니까 이 말씀을 보고 목사들이 아주 잘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상의 좋은 것을 가르침을 받는 자에게서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다른 일로 돈 벌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똑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 문장만 보지 마시고 전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 말씀은 분명히 번역상의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제가 성경을 바꾸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앞뒤 문장을 생각하면 절대로 이렇게 번역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헬라어의 원어의 뜻을 정확하게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말씀은 모두가 다 연결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을 하는 중에 전혀 생뚱맞은 말이 나와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 이 말씀은 그래도 개역한글성경이 가장 근접하게 번역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모든 좋은 것입니다.

제가 쉽게 번역을 해 드립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받으십시오. 라고 번역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르치는 자에게 좋은 것을 나눠 주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은 가르치는 자가 주는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말씀이 정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성경의 문장을 보면 그것이 맞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제가 성경을 다시 개역하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못 됩니다 그러나 성경을 해석하면 전체적인 문장의 흐름은 알고 있습니다. 왜 제가 한글개역성경을 기준으로 삼으라고 하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번역된 성경도 나름대로 참고가 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말씀을 이해하는 데는 한글개역성경만한 것이 없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이 좋은 것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부터 바뀌어야 성경이 바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에게서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고 하는 번역이 맞는다고 저는 믿고 있고 그렇게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히브리서7:22절을 보겠습니다. (360)

이와 같이 예수는 더 좋은 언약의 보증이 되셨느니라

좋은 것으로 함께 해야 합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으로 함께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의 어떤 좋은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가르침을 받는 자가 자기에게 있는 좋은 것을 가르치는 자에게 주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 행위가 사람을 부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의 소욕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들을 주는 것이 성령의 소욕입니다. 좋은 것이라고 하니까 마치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지고 있는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고 거의 모든 성경이 그렇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저를 비판해도 좋지만 그 성경들이 잘못 번역이 되었다고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여러분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러면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을 여러분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제가 받은 구원을 여러분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서는 계속해서 구원에 대한 문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가르치는 자가 먼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의 말씀 안에서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제가 아무리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뭐 합니까? 여러분이 그것을 함께 하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저에게 가르침을 받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제가 가진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기 위해서 가르침을 받고 있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이 가진 좋은 것을 저와 나눈다고 해서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세상의 생각으로 이 성경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예입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에게 자기 좋은 것이 있으면 나눠주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런 세상의 도리를 우리가 몰라서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까? 성경을 보는 시각부터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리 그가 평생 성경을 연구한 사람이라고 해도 소경으로 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의 일이 아닙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의 일로 성경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가 무엇이 부족해서 여러분의 좋은 것을 나눠 갖기를 바라고 있겠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설령 그런 일을 한다 해도 자원하는 마음이 아니라면 나눠 갖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으로 여러분의 영혼이 망한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는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모든 좋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미 우리에게 다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좋은 열매를 맺어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좋은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입니다

물론 성경에서 이것 말고도 좋은 것이 많이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이미 이 좋은 것을 다 받았습니다. 세상의 좋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는 열매의 좋은 것을 다 받았습니다. 이것을 어떻게 가르침을 받는 자가 나눠 줄 수 있습니까?

가르치는 자가 주어여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여러분이 저에게 줄 수 있습니까? 제가 여러분에게 줄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도 바울이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사도 바울에게 좋은 것을 줄 수 있습니까? 모든 좋은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성경을 번역하는 사람들까지도 이상하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5장에서 무엇을 말씀했습니까?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시험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육체의 시험의 짐은 각각 자기의 짐을 지면됩니다. 그리고 이제 모든 좋은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갈라디아서 6장은 5장을 연결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씀을 계속해서 보시기 바랍니다.

5장에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1절부터는 육체의 일에 대한 시험입니다. 그리고 6절부터 다시 성령의 열매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가르침을 받는 자는 가르치는 자가 알고 있는 성령의 모든 열매를 함께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금지할 법이 없습니다.

성령의 열매가 여러분에게 주어지는데 어느 누구도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성령의 열매를 주시는데 그것을 사단도 막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을 함으로 해서 그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자기들의 육체의 행위로 막고 있습니다.

함께 하시기 바랍니다.

가르치는 자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육체의 것 때문에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자가 어려워서 그들을 위해서 이 말씀을 기록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르치는 자는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설령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이 율법에서와 같이 레위인을 저버릴지라도 천국을 소유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부족합니까?

물론 저버리면 육체의 고통은 조금 더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저는 천국을 소유했다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가진 것을 저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제가 가진 것을 여러분이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가진 좋은 것은 썩을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가진 좋은 것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입니다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그것으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알고 있는 아니 가지고 있는 모든 성령의 열매를 지금 여러분에게 주고 있습니다. 그 열매를 여러분이 저와 함께 받으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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