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 35

윤주만목사 2017. 5. 7. 11:04

갈라디아서5: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이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교회 안에서 무엇을 먹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밥상을 받아서 먹고 있습니까? 아니면 주의 만찬을 먹고 있습니까? 이도저도 아닌 저희의 밥상도 먹고 있고 주의 만찬도 먹고 있습니까? 어떻게 먹는가에 따라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저희의 밥상 율법이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서를 안 봅니까?

누구와 누가 싸웠습니까? 예수님과 율법주의자인 바리새인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이 바리새인들은 사단의 대리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와 싸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모습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바리새인의 싸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우리가 볼 수 없기 때문에 바리새인이 대리인으로 싸웠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율법 때문에 예수님을 배척 했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자기들은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죄인과 세리들을 영접하는 것을 보고 화가 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잘 믿는 자기들을 악하다고 하는데 어떻게 그를 인정할 수 있겠습니까?

서로 거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주님도 바리새인에게 거치는 것이 되었고 바리새인도 주님이 거치는 것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율법과 복음의 싸움이라는 것을 바리새인들을 대리인으로 해서 보여 주신 예표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도 예수님이 누구에 의해서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세뇌가 되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지킨 것은 율법이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믿음에 따르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율법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얼마나 종교에 잘 세뇌가 되어 있는지 그것이 믿음에 따르는 행위라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되어 있으면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에서 삼가 지키는 것을 율법이라고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다 율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삼가 지키는 것이 너무 많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율법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고 도리어 믿음이라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을 지키라고 했으면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거치는 것이 없었고 자기는 유대인들로부터 핍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 있어 율법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에 취해서 비틀거리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말라고 전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전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것이 더 핍박을 받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하면 아마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별 미친놈이 다 있네 하고 그냥 넘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반드시 핍박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참지를 못 합니다,

율법이 그렇다는 것을 이미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경에서 다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에 잘 이해가 되지 않을 수 있을지 몰라도 초대 교회에 사도들이 누구로부터 고난을 받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또한 성경의 모든 선지자들이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았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싸움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복음과 율법의 싸움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것이 이스라엘에게 광야에서 주신 성막과 율법입니다. 그리나 이스라엘은 생명과 복이 있는 성막을 택하지 않고 사망과 저주가 있는 율법을 택해서 스스로 저주를 받는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우리 앞에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할 것인가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을 것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다수의 사람들은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종교에 나가서 자기가 그 종교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이라는 것도 역시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핍박입니다.

성도는 율법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복음과 함께 그 핍박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라는 복음을 전하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들에게 있어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천국의 축복입니다.

그것을 기업으로 받은 성도는 당연히 이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혹시라도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 핍박을 받고 있다면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하늘의 상이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반드시 율법과의 싸움에서 이기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은, 차라리 자기의 그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할례입니다,

유월절을 먹을 때는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으라고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을 때 성도가 할례를 받는 것은 성경적으로 너무 타당성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쉽게 미혹이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가지고 여러분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차라리 그 지체를 잘라버리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지막지한 말씀입니까? 그러나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이런 마음이 없다면 구원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어떠한 믿음을 가르쳐 주고 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영혼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내 지체라 해도 잘라 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게 하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5:27-30절을 보겠습니다, (신 6쪽)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만일 네 오른눈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며 또한 만일 네 오른손이 너로 실족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네 백체 중 하나가 없어지고 온 몸이 지옥에 던지우지 않는 것이 유익하니라”

간음치 말라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 안에서 행해지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바로 간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라는 여자를 보고 마음에서 음욕을 품으면 이미 간음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음녀가 되어 있는 교회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만 들어오면 이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무엇으로 음욕을 품게 되었는가 하면 할례입니다 할례를 받은 사람을 보니까 진짜 이스라엘 백성이 된 것같이 보였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습니다.

그것을 보고 음욕을 품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쁜 여자를 보는 것과 같이 율법의 행위를 보면 사람들은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일어난다는 것을 주님께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남자가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교회입니다,

성경은 다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서 간음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면 어떻게 합니까? 생리적인 여자와 남자가 실제 간음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문제가 된다면 성경은 그저 이 세상의 도덕을 가르치는 종교서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면 다 음욕이 일어납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 나도 그렇게 하고 싶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처음 들어온 사람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미 간음을 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행위가 너무 좋아서 나도 빨리 그들과 같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보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들을 보고 있습니다. 그 행위를 보고 오른 눈이 실족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러한 행위를 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자기가 보고 있는 것으로 실족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 안에서 예배를 드리는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사실 그것을 보면 모두가 다 미혹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짜 하나님이 임재를 하는 것과 같은 종교의 행위들을 보면서 실족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교회라는 여자를 보고 네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면 그것을 빼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자기 눈을 빼어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하지만 해야 합니다,

그런 종교적인 감성을 안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 눈은 자꾸 그런 것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나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대형교회에서 오케스트라와 같은 찬양대가 연주를 하고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자기도 그렇게 하고 싶어 합니다. 정말 교회라는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쉽게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빼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빼어 버릴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고통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보면 안 할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종교적인 행위에 안 홀릴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교회를 보고 내 마음에서 그것을 하고 싶다면 이미 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고 말씀을 하는 것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뿌리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눈을 빼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손을 잘라 버리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손으로 하는 일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를 손이라고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 손으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각종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헌금을 하는 것을 보면 자기도 하고 싶어서 견디지를 못 합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십일조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지럽게 합니까?

그 지체를 잘라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할례를 받았으면 그 지체를 잘라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하지 않고는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교회를 너무 좋게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이 교회를 음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저 주님의 교회라고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이 세상에 교회를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는 보이는 교회가 아니라 보이지 않은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교회입니다,

반드시 음욕을 품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보이는 교회를 보고 음욕을 안 품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교회가 진리에서 벗어나는가 하면 보이는 교회는 반드시 음욕을 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그 안에 들어가 마음껏 행음을 하면서도 자기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했습니까?

사도 바울이 잘라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러면 그 눈을 빼어 버리라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내 손으로 하나님께 헌금을 한다고 하면서 율법적으로 드렸습니까? 그러면 그 손을 찍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지 않을 때는 지옥에 들어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가 지옥에 갑니까?

성경은 교회 안에서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자체가 율법의 덩어리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신앙생활이 다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율법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저주를 받아야 하는 율법에 열심을 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2:3절을 보겠습니다. (구 281쪽)

“그 단을 헐며 주상을 깨뜨리며 아세라 상을 불사르고 또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 곳에서 멸하라”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멸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우상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런 구약의 말씀들을 보면서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해야 하는 일이고 문자 그대로를 보면서 신상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상

우상 같은 말씀입니다. 그 조각한 신상들을 찍어서 그 이름을 그곳에서 멸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광야도 교회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은 천국을 들어가는 모형입니다. 이제 가나안에 들어왔습니다. 그 가나안은 또 다른 교회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이방 민족들이 세웠던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눈에 보이는 가나안을 정복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에 있는 새 예루살렘을 가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나안이 교회라면 이제 우리 역시 가나안에 들어왔으면 그 안에는 조각한 신상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압니까?

그래서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신상을 세우지 않고 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를 보았으면 그 뒤에 있는 실체를 보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림자를 그대로 보면서 자기들이 성경을 안다고 하고 있고 신상을 조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찍어서 멸해야 합니다.

가나안에서는 분명히 신상들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신상들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신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신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있는 줄을 모르니까 그것을 찍어 버릴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어디에 있는 말씀입니까? 신명기에 있는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자기들이 조각한 신상들이 무수히 많이 있지만 그 신상이 어떻게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우상들이 세워지고 있지만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습니까? 그것을 가지고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사람은 그 지체를 베어 버리는 것이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라는 율법을 자기 몸에 하는 것이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들이 조각한 신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례만 신상입니까?

우상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그렇게 되고 싶고 그렇게 하고 싶은 모든 것이 다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까? 그가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지금 이 시대는 가나안에 있던 사람들과 같이 자기들이 조각한 신상을 수도 없이 세우고 있습니다.

찍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 신상을 찍어서 멸하지 않으면 그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신상을 조각해서 만들어서 그것을 숭배하면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이런 말씀들의 의미를 모르면 갈라디아서에 있는 말씀을 보고도 무엇을 베어 버려야 하는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베어 버리지 않으면 죽습니다. 아니 찍어서 멸하지 않으면 여러분은 다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으면 모두가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수많은 신상들을 조각해서 세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의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고 찬양을 부르는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고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의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록펠러가 신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간증을 하고 있습니다. 그 간증을 하는 사람들이 다 신상이 되고 있습니다. 누구는 전도를 많이 했다고 하면서 전도 왕이라고 합니다. 그 신상이 세워져 있어서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교회 안에 사람들을 많이 끌어 들이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점령했을 때는 진짜 조각한 신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고 나서 그 교회 안에는 조각한 신상들이 하나씩 들어오기 시작을 했습니다. 2000년 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신상이 세워져 있고 그 신상들을 섬기고 있고 자기들도 그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고 있고 따라하고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사람의 행위가 우상입니다. 그것을 베어 버리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이런 신상들을 섬기고 있고 그것을 따라하고 있다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례를 했습니까?

반드시 그 지체를 베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십일조를 했습니까? 반드시 그 지체를 잘라 버리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러 가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 발을 잘라 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 지체를 베어 버리지 않고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찍어서 그 이름을 멸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그 주상들의 이름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왔으면 반드시 그 주상들을 찍어 버려야 하지만 도리어 더 많이 만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약의 신상입니다.

그것은 실제 보였던 신상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 신상들이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으로 교회 안에서 조각이 되어서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로마서1장에서 사도 바울이 우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의 행위가 우상이 되고 있고 그것이 신상을 조각하고 있지만 찍어 버리지를 못하고 도리어 더 많이 세워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현실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 이름을 멸하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성경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할례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에 할례를 하지 않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우리가 믿음이 있는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조각한 신상들이 왜 세워지고 있습니까?

그 신상들이 사람의 이성에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오직 예수라고 말하는 그들이 교회 안에 온갖 신상들을 세워 놓고 있고 그것을 찍어 버릴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찍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베어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문제는 구원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찍어 버리지 않고 베어 버리지 않고 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율법은 폐하여졌습니다.

그보다 더 큰 자유는 없습니다. 주님께서도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자유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유라는 단어의 뜻도 모르고 그저 남들이 자유라고 말을 하니까 자기도 자유 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있습니까?

그것은 자유가 아닙니다, 앞서서 이 자유에 대한 사전적인 뜻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뜻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자유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자유는 남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에 구속을 받거나 얽매여 있는 사람은 자유하다고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두 남편입니다,

복음과 율법입니다, 이 두 남편에게서 함께 자유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우리가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한 남편에게 속해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다른 남편에게서는 자유 해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가르쳐서 자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계속해서 복음과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두 남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이 생명을 얻는 두 남편입니다, 이 두 남편을 함께 섬기고 있다면 음녀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간음하는 자입니다, 성도는 간음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되고 반드시 한 남편만을 섬겨야 합니다,

이 시대는 간음하는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간음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간음을 하는 자는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있던 전 남편이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남편이 죽어야지만 우리가 자유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자유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어디에서 자유하게 부르셨는가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율법 아래 있습니다. 이 세상 학문과 종교 그리고 국가가 다 이 법아래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율법에 의해서 메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키면 어떻게 됩니까?

종교에서는 그를 내어 쫓아 버리고 있고 심지어는 율법대로 형벌을 가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시대도 이슬람 국가에서는 자기들이 알고 있는 법대로 처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가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그렇게 종교 안에서 법에 의해서 철저하게 메여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서서히 더 그 법의 권력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작에 불과하지만 이미 어느 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그 교회 교인으로서의 자격까지 주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일이 있는가 하면 법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있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선가는 분명히 십일조를 내지 않는 교인은 교회도 못 나오게 할 것입니다, 아니 지금도 그 교회 안에서 그들이 하고 있는 십일조에 대해서 반대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교회에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느 이단을 이야기 하면서 저가 이단에 미혹이 되어서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실제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얽매이지 않게 하기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남이 율법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유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는 것으로 자기들이 자유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유의 사전적인 뜻을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자유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공산주의가 자유 합니까? 민주주의가 자유 합니까? 아마 이 질문에 거의 모든 사람이 민주주의가 자유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세상의 상대적인 자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자유주의 국가에 사는 것으로 마치 자유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면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여러분은 실제 민주주의 국가라는 법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유 합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민주주의 국가의 법을 지켰을 때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공산주의 국가도 역시 그 안에서 그들에 말하는 법을 지키면 자유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민주주의 국가라고 해서 법에 의해서 자유 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상대적인 자유입니다.

엄밀히 말해서 사전적은 뜻으로는 자유주의 국가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법이라는 것을 놓고 보면 역시 공산주의 국가나 민주주의 국가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생각하는 자유가 다를 뿐이지 공산주의 국가에서도 그들의 법을 지키면 자유하다고 말을 한다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물론 여러 가지 자유가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에 비하면 민주주의 국가는 상대적으로 많은 자유를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법에 의해서 구속이 되어 있다는 것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법이 차이가 있다는 것을 충분히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의 자유를 생각하면서 성경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중국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직 공산주의국가의 형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나라에 사는 것과 별로 차이가 없을 정도로 자유하고 있습니다. 다만 공산주의의 근간을 흔드는 것을 표현하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경제에 대한 것은 법을 지키는 한 자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이 세상의 자유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자유입니다,

법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말하고 있는 제사법과 시민법과 도덕법은 솔직히 말해서 공산주의냐 민주주의냐를 가지고 이야기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모든 법을 다 지킨 이스라엘은 율법주의고 율법의 제3용도라고 하면서 도덕법을 지키는 자기들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생각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법을 지키면 자유하다는 궤변까지 늘어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민주주의 사회에서 법을 지키면 자유하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성경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법을 지키면 자유 할 수 있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유입니까?

절대로 자유가 아닙니다, 자유라는 사전적인 뜻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무엇에게서 자유 하라는 것을 생각하면 답은 쉽게 나옵니다, 그러나 세상의 자유를 생각하면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법을 지키면 자유 할 수 있다는 그 생각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법을 지키면 자유 할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런 반쪽짜리의 자유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입니다, 그런 것을 가지고 자유라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그가 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은 사람이 마음대로 쪼갤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할례도 율법입니다, 그리고 십일조도 율법입니다. 또 십일조에서 매 삼년에 드리는 십일조는 레위인과 고아와 과부를 배부르게 하라는 것도 역시 율법입니다, 그리고 밭에 곡식을 추수할 때 떨어진 것을 줍지 않는 것도 율법이며 네 모퉁이를 베지 않는 것도 율법입니다.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자유 하라고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에게 자유 하라고 부르셨습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에서 자유 하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마치 민주주의 국가를 생각하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자유 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사람만이 자유 할 수 있다는 궤변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

의문의 직분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의 직분과 영의 직분이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의문의 직분이 무엇인가 영의 직분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의문이 무엇입니까?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에 직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돌에 쓴 의문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 도적법이라고 주장하는 십계명이 돌에 쓴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거짓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의문에 쓴 직분이 죽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문은 죽이는 것입니다,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성경이 돌에 쓴 의문 십계명을 따로 빼서 큰 글자로 적어 놓았습니다, 성경 뒤에는 거의 십계명이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문에 쓴 죽게 하는 직분이라는 것을 분명히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그 십계명을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따로 큰 글자로 적어 놓았습니다,

성경은 성경 그대로 편찬을 해야 합니다,

이 시대 성경은 성경 그대로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대로 성경을 편찬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편찬을 합니까? 그것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다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솔직히 이 시대 성경은 성경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첨삭이 되어 있습니다. 제가 보는 큰 글자 한글개역성경은 그나마 조금 낫습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첨삭이 되어 있습니다,

십계명이라든지 찬송가라든지 사도신경이라든지 교독문이 없습니다, 그러나 역시 성경에 제목을 첨삭 했습니다, 제가 보고 있는 다른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킹제임스라든지, 새번역도 역시 그런 것은 없지만 제목이 첨삭이 되어 있습니다.

첨삭을 했습니다.

그것을 마치 성경과 같이 보고 있습니다, 마귀의 장난입니다, 정말 성경을 보면 화가 납니다, 성경 그대로 원문만 번역을 하면 되지 왜 자기들 마음대로 의문에 쓴 십계명을 따로 빼 놓고 있습니까? 성경을 받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됩니까? 주기도문이라든지 사도신경이라든지 십계명이라든지 반드시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독문은 어떻습니까?

그 뜻을 모르고 그저 성경의 문자를 서로 주고받으면서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이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죽을 때까지도 깨닫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말씀을 교독하는 것이 무엇이 나쁘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뜻을 모르는 문자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종교적인 악한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는 영이십니다

한글을 모릅니까? 의문에 쓴 십계명을 육체라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돌에 쓴 의문이 다른 것 있습니까? 그것이 십계명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럼에도 이 의문에 순종하면서 스스로 사망의 길고 가고 있습니다,

영을 모릅니까?

그리고 의문을 모릅니까? 영은 말 그대로 영입니다, 그리고 육체는 말 그대로 육체입니다. 영의 일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합니다, 그러나 의문은 내 육체의 행위로 그대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는 영이십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육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주의 영의 계신 곳에는 의문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는 말씀을 보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고 하는 그들이 의문에 매여서 전혀 자유하지 못하고 그 의문을 따라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돌에 써서 죽게 하는 의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실상은 그 안에 있는 모든 영혼을 죽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의 영의 계시는 곳에는 이 의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의문에 없어야지 자유 할 수 있지 의문이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에 구속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 말씀은 주의 영이 계신 곳에서 의문이 없어서 자유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자유를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과 같이 마귀의 자식들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너무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너희에게 준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어려운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분명히 우리에게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주셨는데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뜻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1:11-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사도 바울은 사도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기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주님의 은혜로 사람에게서 배운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어 구원을 받았지만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가를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이 같이 은혜를 받았는데 자유를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자유 했습니까?

물론 율법에 대해서는 자유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 대해서는 종으로 살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이방인들을 위해서 종으로 살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폐하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리고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켜서도 안 되고 가능한 종교적인 모든 행위를 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해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모든 것에 대해서 자유 해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복음을 들은 성도로서의 기본도 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전합니다.

그것이 저 혼자서의 일입니까? 제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를 통해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복음을 깨달은 사람도 있고 아직까지 잘 모르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복음을 깨달은 사람이라면 이 복음의 일에 함께 해야 한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교회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만찬을 나누는 가운데서 성도가 교제를 하는 가운데서 새로운 생명이 탄생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는 자유 했지만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종이 되었습니다.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성도는 절대로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저 복음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으로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자유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자유는 주님께서 주신 자유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도는 이 자유를 누려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간혹 가다가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늘 이 문제가 걸림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사도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종과 아들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 아래서 종노릇 하지 말고 이제는 자유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자유가 어느 정도까지냐면 이스라엘이 선민의 증표로 여겼던 할례에서 까지 자유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는 자유 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이 자유를 빼앗아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이 갈라디아서를 보고 아니 사도 바울의 말씀을 보고 자유를 주고자 노력을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주 적습니다.

이렇게 보시면 됩니다.

이 자유라는 것이 복음주의 입장에서는 자유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 눈에는 반드시 방종으로 보여 지고 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는 것을 여러분은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을 부르신 것은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가 왜 사라진다고 생각을 합니까?

저는 시대마다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가진 자들을 세우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물론 숫자적으로는 아주 적기 때문에 이 세상의 교회사를 통해서는 잘 드러나지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이 볼 때는 이단으로 보여 지고 있기 때문에 교회사 안에 등장을 하기 보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사라지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이제 은혜를 생각해야 합니다.

자유를 주신 것은 분명히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러나 자유만을 생각하게 된다면 이 은혜가 사라지게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는 또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까지도 없애 버렸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람들이 이제 할 것이 하나도 없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왜 실패를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역시 천주교와 별반 다를 것이 없는 이 세상의 종교적인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자유를 주었습니다.

분명히 복음을 알았으면 자유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유를 주다 보니까 육체의 기회로 삼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시 교리를 만들기 시작을 했습니다. 복음을 듣고 진리를 깨달으면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려고만 하고 있고 성도로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사를 보면 알겠지만 사람들은 사도바울이 이방인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서 율법에 대해서 너무 관대하게 전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가 무엇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육체의 기회로 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하다 보니까 이제 아무 것도 할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이 시대도 제가 복음을 전하다 보니까 육체의 기회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율법에서 자유를 하면서도 이 진리를 들었으면 자기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으면서 무조건 자유만 누리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을 태운다는 말이 있습니다.

저는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역시 그런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빈대를 잡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초가삼간을 태우고 말았습니다. 설령 육체의 기회로 삼는 사람이 있다 해도 저는 복음만을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자유를 빼앗는 순간에 모두가 사망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육체의 기회로 삼는 자는 어쩔 수 없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면서 99명이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 해도 저는 한 사람을 위해서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이 이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잊어버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듣고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또 망하는 길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주의자들도 거짓을 가지고도 그렇게 자기를 헌신을 하고 있는데 복음을 전해서 자유를 주니까 그것을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5: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여라." 하신 한마디 말씀으로 요약됩니다.”

오직 사랑으로서 종노릇하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아직까지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 성도는 서로 사랑으로서 종노릇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그에게 전해져서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우리는 사랑으로서 종노릇해야 합니다.

레위기19:18절을 보겠습니다, (구 176쪽)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나는 여호와니라”

이웃 사랑하기를 내 몸과 같이 하라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을 해서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이 말씀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거의 다 육적으로 보고 있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온 율법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한 마디로 정의를 한다면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온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신 분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완전케 하신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지 못했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고 율법에 의해서 사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성경에서 율법을 볼 때는 정말 바로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 율법을 완전케 하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 이유를 계속해서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 사람들은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하면서 자기 육체로 사랑을 나타내려고 행위에 열심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를 보면 도와주어야 하고 또 그들을 도와주지 않았을 때는 자기가 죄를 짓는 것 같고 또 그런 것이 자기를 스스로 정죄를 하다 보니까 구원을 못 받을 것 같아 회개를 하면서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구제 헌금을 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고 그런 헌금을 하는 것으로 자기가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최소한의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까지의 기독교는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그 말씀을 보고 그렇게 실천하기 위해서 열심을 냈습니다. 실제 그런 마음에 있어서 미주의 기독교인들이 당시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에 하나였던 우리나라에 다른 복음을 가지고 들어와서 열심을 냈고 이 시대 우리나라 기독교 역시도 마찬가지로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구제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나 그 구제를 하기 위해서 다른 율법을 지키면서 하고 있다면 도리어 악을 행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구제하는 것을 반대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영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욥기31:16-18절을 보겠습니다, (구 791쪽)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던가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였던가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에게 먹이지 아니하였던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었노라”

욥이 한 일입니다.

그는 정말 이웃을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했던 사람입니다,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은 가난한 자가 와서 자기에게 구하면 그것을 다 주었습니다, 정말 누가 이렇게 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세상에 가난한 자가 얼마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 속담에 가난은 나라도 어찌하지 못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럴 정도로 나라도 못하는 가난한 자의 소원을 욥은 다 들어 주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욥이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자기가 했던 일들을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욥은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과부의 눈으로 실망케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나만 홀로 식물을 먹고 고아를 먹이지 않은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욥이라는 사람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을 정도로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한 것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를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모태에서 나온 후로 과부를 인도하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욥이 한 일을 31장에서 보아서 알겠지만 그보다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한 사람이 없었습니다. 자기가 얼마나 순전하고 정직하게 이 세상을 살았는가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이 모든 일들이 실제 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이 이웃 사랑하기를 자기 몸과 같이 했습니까?

아마도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테라사수녀나 장기려박사 같은 사람들을 보면서 정말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 같이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그 말씀대로 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테레사수녀도 장기려박사도 욥과 같이는 못 했습니다, 물론 그들도 욥과 같은 삶을 산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욥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습니까?

욥이 그렇게 한 그 모든 행위로 인하여 욥은 고난을 받고 말았습니다, 성경말씀에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그 말씀대로 산 그것으로 인하여 욥은 고난을 받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욥은 육체적으로 고난을 받았지만 지금 이 시대 욥과 같이 그렇게 이웃 사랑하기를 하는 사람은 주님이 오셔서 지옥에서 고난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이 한 그 행위가 잘못되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욥은 율법을 누가 이루는 가를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웃 사람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그 말씀을 그저 육체적으로 행했던 사람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 사람도 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육체의 일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분복을 받았다면 이 세상을 살면서 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성경을 기록하신 것이 아닙니다. 욥과 같이 사는 사람은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간적으로는 욥은 잘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율법의 완전함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시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이루는 것은 우리 사람이 아닙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이 말씀도 사람들이 너무 많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이미 그것은 야고보서 강해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야고보서강해2장8절을 보면 영적인 의미에 대해서는 알 수 있습니다, 성도가 어떻게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할 수 있는가는 그때에 충분히 설명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른 관점에서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온 율법입니다,

그 율법이 무엇인가 하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하라 하신 한 말씀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온 율법을 지키시고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을 이미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우리 인생들이 지켜야 한다는 생각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미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대신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님과 같은 영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온 율법이 바로 이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다 이루었는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자기들이 지키겠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2: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8쪽)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온 율법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과 사랑하라는 그것입니다. 율법이 바로 그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누가 할 수 있는가를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그렇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사랑이라는 것은 내리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도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신 분이 누구입니까? 자기 목숨을 다 해서 사랑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물론 선지자들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 선지자들은 개인의 목숨을 잃은 것이고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한 창세전부터 예정하신 하나님의 경륜을 이루시기 위해서 목숨을 잃었습니다, 정말 목숨을 다 하기 까지 그리고 뜻을 다 하기 까지 주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아니 하나님의 사랑을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 종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사랑이라는 단어에만 집착을 하고 있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그것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느냐면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셨기 때문에 그 사랑을 믿고 있다면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는 그것이 온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조금 어렵습니다.

저도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려운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래도 잘 이해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온 율법을 누가 지키는가에 대한 생각을 바로 정립을 하고 있다면 제가 설명을 드리는 부분이 조금 미흡할지라도 이해가 되실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네 이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무조건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면서 네 이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네 이웃이라는 말은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전체를 놓고 볼 때는 주님께 해당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사와 예수님의 대화입니다.

율법사가 어느 율법이 가장 크냐고 주님께 묻고 있고 주님께서 그것을 대답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대답은 율법이라는 전체를 놓고 생각하면 네 이웃이 누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도 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에 있어서 말씀을 하는 것이고 지금은 주님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신 분이 주님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가장 큰 율법도 누가 지키셨는가 하면 예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면서 사랑으로서 서로 종노릇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이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하라는 그 말씀을 보고 도리어 자기들의 행위를 나타내고 있고 그것으로 부자가 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사람들입니다, 오직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라고 하니까 자기 육체를 가지고 사랑하려고 하면서 구제를 하는 것으로 자기가 마치 대단한 일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육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조금 어려운 말씀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육체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이 망하는 길로 가는 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을 위해서는 늘 주의 깊게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완전케 하러 오셨는가 하면 율법의 최고의 법인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완전케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지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정말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셔서 우리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마태복음에서 말씀하는 네 마음을 다 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뜻을 다 하여 너의 주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말씀은 잘 알고 있지만 그것을 누가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는 행위를 보면서 그렇게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는 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하셨습니까?

주님이 하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꽤나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다 보니까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5: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서로 물어뜯고 잡아먹고 하면, 피차 멸망하고 말 터이니, 조심하십시오.”

누가 물어뜯습니까?

개가 서로 물고 먹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에게 개들이라고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개들이 헌데를 핥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오직 사랑으로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개들은 서로 물고 먹다가 멸망을 당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지 마시기 바랍니다,

개들이 얼마나 잘 물고 있습니다.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자기들이 지키는 것을 지키지 않으면 그것을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가지고 얼마나 주님을 물로 늘어졌습니까? 지금도 역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 있어 율법은 표징과도 같습니다.

할례를 왜 받으라고 했습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할레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 끝까지 할례를 받게 하는 집요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도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성경을 가지고 그 타당성을 찾아내고 있습니까?

주일 날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은 끝까지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여러 가지 이유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율법을 지키게 하려고 성경에서 그 타당성을 찾아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그럴듯하게 주일을 미화시키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릅니다,

교인들은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설령 분별하였다 해도 이미 수천 년 동안 지켜왔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감히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개들은 지금 이 시대도 율법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 물고 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죄악입니다,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죄악입니다, 주일이 무엇입니까? 죄악입니다, 그 죄악을 행하면서 그것을 하라고 물고 늘어지면서 하나님의 백성을 떡먹듯이 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 하나가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이 시대는 꿈에도 모르고 그저 자기들의 이성에 따라 좋은 것이 좋다고 하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죄악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너무도 바르지만 성경은 그것을 죄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으로 서로 물게 되면 서로 먹힌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은 교회 안에 그렇게 율법주의자를 세워 놓으면 그것으로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는 사자입니다,

그 사자가 개들을 교회 안에 세워 놓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모르면서도 자기들이 안다고 하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모르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하면서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물고 늘어지는 것이며 시편에서는 저희가 죄악을 행하면서 떡먹듯이 내 백성을 먹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보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은 누룩을 가지고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그 적은 누룩이 죄악이 되고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사단은 떡먹듯이 하나님의 백성을 삼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빌립보서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22쪽)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가지고 서로 물고 먹으면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주 적은 율법 하나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너무도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적은 누룩입니다,

그것이 할례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될까 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든 것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지키고 있는 그것들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아마도 개들과 같이 어떻게 하든지 물어 버리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물고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누룩 없는 자라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누룩을 가지고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에 멸망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누룩을 가지고 서로 물고 먹으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개들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개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그래도 삼갈 수가 있었는데 이 시대는 피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모두가 개에게 물려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그저 하나님의 성도의 삶이라는 그 말에 속아 넘어가고 있습니다.

멸망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멸망을 당하는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 가기 원하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까? 구원을 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예수그리스도를 안 믿고 세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더 유익합니다,

그냥 멸망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과 같이 멸망을 당하는 것이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저주가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저주는 사단과 짐승과 그리고 거짓 선지자가 받는 저주입니다, 오직 사랑으로서 종노릇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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