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43

윤주만목사 2016. 12. 28. 16:23

갈라디아서6:9절을 보겠습니다.(신 309쪽)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성도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은 자입니다. 우리 육체는 이미 2000년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이제 우리는 아담의 씨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의롭다 하심을 모르고 있습니다.

정통이라는 교회는 그저 막연하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으로 그 명확한 주체를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어느 이단은 마치 자기 육체까지도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같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들을 의인이라고 하면서 죄인이라고 하면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우리의 영의 일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으라는 말씀입니다. 그 영생이 우리의 영이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들어와 사람들이 할례를 받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나는 그들에게 경계로 보낸 서신입니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복음이 무엇이고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일이 다른 복음입니다.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지켜서는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할례라는 율법은 행하지 않을지라도 다른 율법들을 지키면서 성령을 훼방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성령을 훼방한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많은 율법이 아닙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썩어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는 계속해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면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은 율법주의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교회와 같이 안식일을 지키는 교회가 율법주의교회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에서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킬지라도 율법주의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율법주의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율법주의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글을 모릅니까?

아니 제가 율법 613가지를 가르쳐 줘야 합니까? 성경에 율법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왜 율법이 아니라고 합니까? 한글을 몰라서가 아니라 종교라는 거대한 힘에 의해서 정신까지도 굴복을 당하고 있어서 그들이 율법이 아니라고 하면 율법도 아닌 것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도 무시합니다,

성경에 분명히 십일조가 율법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 율법이 아니라고 종교가 주장하니까 어느 한 사람도 그것이 율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간혹 가다가 있어도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둔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믿음입니까?

좀 정신을 차리고 사시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 십일조가 믿음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성경에는 분명히 율법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다는 그 말씀 가지고 자기들도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자손이 되기 위해서는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 할례를 율법이라고 하면서 이 갈라디아서를 보내고 있습니다. 만약에 십일조가 믿음이라면 그들은 할례도 해야 합니다. 종교의식으로 할례를 반드시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할례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에 이 갈라디아서를 사도 바울이 십일조를 가지고 썼다면 아마도 이 시대 할레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둘 다 똑같이 아브라함이 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 했어도 그 후에 모세를 통해서 율법으로 반포하셨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저 성도로서 사는 것이라면 저 역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의 행위가 성령을 훼방하고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게 하기 때문에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반드시 폐해야 합니다.

나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나타나는 순간 나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며 썩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이 율법이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에 율법을 대적하고 있습니다. 성경도 분명히 율법을 원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폐하여졌습니다.

어느 율법만 폐하여 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의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은 폐하여 졌습니다. 이제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오직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의 문제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반드시 썩어진 것을 거둡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성경의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성령은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해서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게 합니다.

성령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나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고 있다면 그는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입니다. 제가 성령을 받으라고 하니까 무슨 봉창 두드리는 말을 하느냐고 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를 보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하나도 없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교회는 하나님을 안 믿었던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은 알고 있지만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거의 없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지금은 기독교인은 있어도 믿음이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은 우리가 구원을 받기를 바라며 지금도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다수는 그저 남들이 구원 받았다고 하니까 자기도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저를 받는다고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저주를 받게 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어떻게 됩니까?

육체의 일을 하지 않게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종교적인 행위를 하지 않게 하고 성경에서 모든 진리를 알 수 있게 감동을 해 주고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면 진리를 전하는 자의 말씀을 듣고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맙시다. 지쳐서 넘어지지 아니하면, 때가 이를 때에 거두게 될 것입니다.”

선한 일입니다.

바로 앞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선한 일이 무엇이고 악한 일이 무엇이라는 그 기초도 안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19:1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2쪽)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선한 일을 내게 묻느냐 선한 이는 오직 한 분이시니라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키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 앞에 온 부자 청년이 예수님께 묻고 있습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이 부자 청년도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세상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사상입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질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나온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하고 선을 행해야 자기가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는 있지만 선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종교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최근에 문제가 된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코하람을 추종하는 부모가 그 딸을 자살 폭탄테러에 쓰라고 보냈다고 하는 충격적인 기사를 보았습니다. 보코하람에서는 성전을 해서 순교를 하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아 영생을 한다고 하면서 그 중에서도 순교를 최고로 치고 있습니다.

보코하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거의 모든 종교가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자기들이 선을 행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윤회설을 주장하는 불교 역시도 다음 생에 더 좋은 것으로 태어나려고 하면 반드시 이생에서 선을 많이 행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 세상이 사상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의 부자 청년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이 시대 교인들 역시도 이 부자 청년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떠한 생각이 있는가 하면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심지어는 십일조를 믿음의 척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왜 냅니까?

구원을 받는데 있어 내가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서 소득의 십일조를 했다는 것을 마음에서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또 사람의 도리로서 십일조를 하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그러한 행위를 통해서 구원이 완성된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부자청년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지금 이 시대도 역시 똑같이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행위에 점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을 알고 믿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라면 절대로 이러한 질문을 하지 않고 있고 오직 예수만을 믿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교회는 이미 세상의 종교가 되어 버린 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것 한 가지만 보아도 얼마나 타락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지만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해야 하는 일이 교회 안에서 다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내가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얻는다고 이스라엘을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까 이제 성도로서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 이스라엘이나 구원을 은혜로 받았으니까 이제 율법을 잘 지키면서 성도로서 살아야 한다고 하는 교인들이나 똑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이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성경에서 선을 행하라는 문자가 많이 기록이 되어 있다 보니까 선을 행하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선한 이는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에 대한 기초입니다. 우리 인생은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내가 선을 행할 수 있다는 그 자체가 모순입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이 부자 청년에게 선한 이는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절대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제가 선이 무엇이고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선은 생명을 줄 수 있어야 선이라고 합니다. 생명을 주지 못하는 모든 행위는 사실 다 악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를 선이라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위해서 일을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다 해도 그것으로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을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면 뭐 합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도 자라게 하지 않는다면 사도 바울의 그 일은 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일은 그저 하나님의 종으로서 일을 한 것이지 그것이 선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선을 행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믿어 성령을 받게 하시는 역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선한 일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합니다.

사도 바울이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없는데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선에 대해서는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이를 믿는 일은 할 수 있고 그것을 사도 바울은 우리가 선을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선하신 이를 믿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선하신 이를 믿으면 하나님의 선이 우리에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로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이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이 내게 임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 안에 영원한 생명이 탄생이 되는 그 일이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3:1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36쪽)

“우리가 들은즉 너희 가운데 규모 없이 행하여 도무지 일하지 아니하고 일만 만드는 자들이 있다 하니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 하노라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

이 말씀은 제가 많이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를 강해하면서도 두 번째 인용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일만 만드는 자가 누구고 일을 하는 자가 누구라는 것을 이제는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일만 만드는 자가 있고 성경을 보고 일을 하는 자가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일만 만드는 자입니다.

그는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그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행위를 하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일을 하는 자는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 깨닫고 믿는 성도를 일을 하는 자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하나님께서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제자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일만 만드는 자들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런 자들에게 우리가 명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권하기를 종용히 일하여 자기 양식을 먹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종용히 자기 양식을 먹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생명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일을 하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함으로서 어떻게 됩니까?

종용히 자기 양식을 먹음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이것을 선을 행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이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습니다.

그것이 선을 행하는 일입니까? 지구촌에 가난한 나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것에 물질을 가지고 가서 선교를 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까?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이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그런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려면 먼저 일을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일을 하면서 어떻게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도무지 일은 하지 않고 일만 만드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예배, 찬송, 기도, 헌금, 전도, 선교 등 이러한 모든 일들이 사실은 다 일을 만든 자들로 하여금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까지 교회는 2000년이 지나왔습니다.

그러면 얼마나 많은 일들이 있겠습니까? 유명한 신학자 한 사람이 한 가지 일을 만들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일들이 쌓이고 쌓여서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그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든 일을 하느라 종용히 양식을 먹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 못 합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역시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하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낙심이 됩니다.

바라던 일들이 이루어지지 않아 맥이 풀리고 마음이 상하는 것을 낙심이라고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왜 선을 행하면 낙심하게 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종용히 자기 양식을 먹어 보시기 바랍니다. 사실 구원이라는 것이 늘 말씀을 드렸지만 무색무취합니다. 그것은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믿어지기만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할례 한 가지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할례를 받음으로 해서 자기 몸에 표징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 한 가지가 마치 하나님의 성도가 된 것과 같은 커다란 것을 주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과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보면 누가 더 하나님의 백성과 같이 느껴지게 되어 있습니까?

한 가지 예를 들어 봅니다.

지금 기독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합니다. 여러 가지 체험들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은 거의 모든 교인들이 성령세례라고 하면서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고 또 어떤 신체적으로 쓰러지는 것을 경험한다든지 기도를 하면서 자기 마음에 감동이 되어서 어느 성경 구절이 생각이 나기도 하고 또 환상을 보기도 합니다.

여러 가지 체험들이 있습니다.

그런 체험을 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자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체험을 했고 나는 그런 체험을 했기 때문에 확실하게 성도라는 것을 믿을 수 있다고 말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은사주의에 있는 교회들은 그것을 자기가 체험함으로 해서 성도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누구는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하지 못하는 것을 나는 하고 있습니다. 그 십일조 한 가지만 보아도 세상 사람과는 확연하게 구분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해도 십일조를 한다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누가 자기 소득의 십일조를 쉽게 할 수 있습니까?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믿음이 아니고는 도무지 할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날에 하나님께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집에서 쉬거나 휴일이라고 하면서 여행을 가거나 자기 마음에 좋은 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그런 일을 하고 있고 세상 사람들도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인정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종용히 자기 양식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하나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아도 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지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아무도 인정을 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저 내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만 있습니다.

낙심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에 벌써 낙심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도 율법주의자처럼 무엇인가를 하고 싶은데 그것이 다 악이라는 것을 알고 행하지도 못하고 사람들이 나를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고 그저 내 안에 믿음이 역사를 하고 있는데 그것도 전혀 내 보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 믿음으로 하늘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선을 행합니다.

때로는 정말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무엇인가를 보이고 싶고 아니 그것을 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데 악이라니까 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들로부터 내 믿음이 있다는 것을 보이고 싶은데 율법주의자들처럼 보일 수가 없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이 없으면 반드시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든든히 서 있지 못하면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율법주의자들을 보면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있습니다. 기도 응답을 받았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그런 것들을 보면 아무 것도 응답이 없는 나와는 비교가 되고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응답을 받겠습니까?

일만 만드는 자들은 응답을 받습니다. 그 일을 만들어 놓으면 사단은 반드시응답을 해 주고 있습니다. 새벽 예배를 만들어 놓으면 그것을 지키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십일조를 만들어 놓으면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 많이 만들어 놓습니다. 그리고 그 십일조로 또 새로운 일들을 만들어서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외적으로 풍성해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어떻습니까?

아무 응답이 없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그런 응답을 받을 수 없는 정도가 되어야 복음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십일조를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리고 새벽 예배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은 절대로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내세의 일입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것으로도 체험도 할 수 없고 또 성도로서 살아가면서 기도의 응답도 받을 수 없습니다. 육적인 것으로 기도 응답을 받는다는 것은 사실 하나님의 응답이 아니라 사단의 응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오직 생명에 대해서만 응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할례를 받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십일조를 내면 얼마나 좋습니까? 또 내가 매 주일에 교회에 나가서 거룩하게 드리는 그 예배에 참석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 예배에서 기도도 하고 찬송도 부르고 헌금을 하면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 것을 하나도 하지 않고 사는 성도는 때로 낙심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왜 낙심하지 않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이 내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이 때로는 부러울 수도 있지만 정말 믿음에 서 있는 성도는 그것이 다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고 내 안에 생명이 있음을 믿음으로 역사하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선을 행해서 나에게 주어지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그 어떤 것도 주어지지 않습니다. 도리어 종교에 의해서 때로 고난을 받기도 하고 사람들은 우리에게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행함을 보이라고 하는데 우리는 보일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은사도 나타나지 않고 있고 그렇다고 해서 율법의 행위도 할 수 없고 교회가 이 세상의 교회와 같이 부흥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 생명이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선을 행한다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오직 내 안에서 믿어지는 역사입니다. 육에 있는 우리 인생이 이 영의 일을 믿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너희는 선을 행하다가 낙심치 말라고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80쪽)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선을 행했습니까?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복음이냐 다른 복음이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는 것은 육체를 위하여 심어서 자기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이고 선을 행하는 것은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본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주님이 하신 선하신 일을 믿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영생을 거두고 있습니다. 영생을 거두기 위해서 성령을 위하여 심고 있는 성도는 율법주의자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에서 우리가 보았듯이 유대인들이 얼마나 고난을 주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는 지금 정통이라고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의해서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인정하기가 쉽게 않습니다. 성도가 선을 행함으로 해서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고난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도 역시 주님과 같이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그 정와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는 고난이 따라야 합니다.

율법을 안 지킵니다.

그 자체가 우리에게는 고난입니다. 사실 사람은 법에 너무도 익숙합니다. 아니 법을 따라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선을 행하게 됨으로 해서 그것을 다 버려야 합니다. 너무도 익숙한 그것을 버리고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고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는 성도는 그런 고난이 올지라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천국입니다.

그것이 너무도 크기 때문에 우리가 잠깐 받는 고난을 기꺼이 받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세상이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주여 주여 하고는 있지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면 강하게 반발을 하고 있고 때로는 심하게 욕을 하기도 하고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기도 합니다.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하신 이를 믿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고 그 선으로 영생을 얻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되어서 영생을 거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69:1-3절을 보겠습니다. (구 850쪽)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지며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내게 넘치나이다 내가 부르짖음으로 피곤하여 내 목이 마르며 내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왜 피곤합니까?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나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을 생각하면서 피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들이 내 영혼까지 흘러 들어와 내가 설 곳이 없는 깊은 수렁에 빠져 깊은 물에 들어가니 큰 물이 넘쳐서 피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수렁입니다.

다윗은 자기 육체를 보면 사망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습니다. 자기가 아는 이성적 지식이 큰 물이 되어서 자기 영혼까지 흘러 들어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다윗의 시는 우리에게 많은 영적인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들입니다.

피곤합니다.

육체를 보면 우리는 늘 피곤합니다. 그런데 물들이 영혼까지 들어오고 있습니다. 그 물들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이성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면 피곤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깊은 수렁에 빠져 절대로 나오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가를 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말 피곤해 보았습니까?

내 영혼에 물이 들어와 피곤해 보았습니까? 아니 물이 들어와 피곤케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고 그것을 문자적으로 기록된 대로 자기 행위로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피곤합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는 그것을 피곤하다고 하지 않고 있고 도리어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영혼이 어떠한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피곤하면서도 자기 영혼이 사망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기 영혼이 사망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서 부르짖음으로 피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혼 구원에 있어서 정말 피곤할 정도로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교회에만 나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있고 그리고 교회에서 지키는 율법을 행하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성경을 보는 사람의 이성을 자극해서 사망에 깊은 수렁에 빠지게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피곤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이 구원에 확신이 있을 때까지 피곤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평생을 피곤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역설적으로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평생을 이 영생에 대해서 우리는 부르짖어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부르짖어야 하는가 하면 내가 피곤할 정도로 부르짖어야 합니다. 아니 내가 피곤하다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구원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아니 자기들이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또 신앙생활을 잘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을 하느라고 피곤해 져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영혼을 위해서 부르짖으며 피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피곤해야 하는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그것으로 피곤하게 하고 있습니다.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정말 내가 피곤할 정도로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것을 얻기 위해서는 밤을 세워가면서 부르짖는 그들이 겨우 교회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하고 있는 것으로 마치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이 영생에 대해서는 전혀 부르짖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정말 자기 육체의 생명이 끝이 날 때까지 이것을 위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어서가 아니라 구원은 오직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일을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받기 때문에 다윗과 같이 죽을 때까지 이것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정말 피곤할 정도로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신앙생활을 하느라 피곤해 하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해서 피곤하지 않을 때까지 성도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힘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르짖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피곤하지 않을 때까지 성경을 보면서 영생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성도와 가라지는 차이가 있습니다. 성도는 선을 행하면서 피곤하지 않을 때까지 부르짖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들은 이미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이제 성도로서 잘 살기 위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성도는 선을 행하기를 부르짖고 있고 가라지는 성도로서 산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기를 위해서 부르짖고 있습니다.

피곤합니다.

얼마나 부르짖으면 피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그 영혼을 구원해 주십니다. 평생을 이것을 위해서 부르짖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십니다. 이렇게 구원해 주시는 것을 사도 바울은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다는 말씀입니다

내 목이 마릅니다.

그리고 내 눈이 쇠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생수를 먹지 못해서 아니 그것을 성경에서 찾기 위해서 정말 목이 말아야 합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서 내 눈이 쇠하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령을 받지도 못해서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지도 않고 있고 모두가 소경이 되어서 눈이 쇠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구원을 위해서 피곤해야 합니다. 이 구원을 갈망하는 마음으로 피곤해야 합니다. 그렇게 사는 성도만이 언젠가는 피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다윗과 같이 자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부르짖는 성도만이 얼마나 많이 부르짖어서 내 목이 마르고 내 눈이 쇠하였다고 하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누가 성경을 압니까?

아니 이제까지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종교가 되어 있는 기독교라는 곳에서 누가 성경을 바로 해석해서 가르쳤습니까? 정말 구원을 위해서 피곤할 정도로 가르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물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바람이 임의로 부는 것과 같이 보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신학자라는 사람들은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부르짖은 사람이 있습니까?

너무 부르짖어서 피곤해서 내 목이 마르고 하나님을 바람으로 내 눈이 쇠하였다고 할 만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어거스틴이 그랬습니까? 칼뱅이 그랬습니까? 웨슬레가 그랬습니까? 천주교의 어느 교황이 그렇게 했습니까? 어느 신학자가 그랬습니까? 그들이 남겨 놓은 글들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종교인입니다.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을 행하기를 피곤할 정도로 했던 사람이 누구입니까? 저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제가 보는 그 사람들은 종교인으로는 존경을 받을 만하게 살았을지 몰라도 다윗과 같이 자기 영혼 구원을 위해서 부르짖음으로 해서 피곤해서 그들이 목이 마르고 하나님을 바람으로 해서 그들의 눈이 전혀 쇠하지도 않았습니다.

지금은 있습니까?

아직까지 그런 목사를 못 보았습니다. 종교인은 있어도 다윗과 같은 사람은 아직 못 보았습니다. 피곤하지 않아서 때가 이르매 거두었다고 생각이 되는 사람을 아직 못 보았습니다. 정말 죄송하고 들으면 화가 날지라도 제가 볼 때는 그렇습니다.

제가 더 화가 납니다.

한 사람이라도 겸손하게 하나님께 자기 영혼에 대해서 피곤할 정도로 부르짖은 사람이 있었다면 이 시대 교회가 율법주의, 은사주의, 성화주의, 기복주의로 빠지는 것을 조금이라도 견제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모두가 다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 다른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저주를 받게 하는 장본인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1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67쪽)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죄인들에게서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내신 그분을 생각해 보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지치거나 낙심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주입니다.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들에게 이렇듯 심한 미움을 받으시고도 참아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면 여러분이 지치거나 낙심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은혜입니다.

정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고 믿는 성도라면 지금 이 세상에서 가지고 살아가는 그 믿음으로 절대로 피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까지 신학자라고 하는 모든 사람들이 종교로 갔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성경이 있습니다. 비록 우리 앞에 있는 사람들이 종교에 빠져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지라도 이 시대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고 이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 볼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피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영혼의 구원에 대해서 피곤하지 말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가 아니고는 자기 구원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피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피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에서 사도 바울과 같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하는 사람은 피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그 행위에 빠져 성경에서 문자로 알고 있는 것으로 자기가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는 피곤합니다.

정말 자기 영혼을 생각하는 성도는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가 피곤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 죄인들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보고 깨달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이미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이 우리 영혼을 피곤하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저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 십자가에서 의미하고 있는 말씀들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한 가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문자로도 율법을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폐하였다고 하는 그들이 실제 교회 안에서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것까지도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폐했다고 하는 그들이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지키고 있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반드시 폐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피곤하지 않아서 때가 이르면 영생을 거둘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거두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면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성도는 그것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그것을 어떻게 지킬까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율법을 지킬까를 생각하다가 지금 이 시대 제사만 안 드리지 실제로는 거의 모든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를 생각하는 성도는 율법을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성도가 거두어야 하는 것은 영생입니다. 성도는 피곤하지 않을 때까지 이 영생에 대해서 주님께 부르짖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나를 구원하시는 선하신 이를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성경에서 우리는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잠언10:5절을 보겠습니다. (구 920쪽)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여름에 거두시기 바랍니다.

무엇을 여름에 거두는가 하면 영생을 여름에 거두라는 말씀입니다 청년의 때를 그냥 허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시면 나이와 상관이 없이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간단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하루아침에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성도는 정말 내 여름의 때에 그 일을 마쳐야 합니다.

청년의 때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여름입니다. 가을이 되면 이미 수장절이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절기상으로도 그렇지만 우리 인생 역시도 가을이 오면 총기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 가을이 오면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 여름에 거두어야 합니까?

우리 인생은 나이가 들면 총기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아무리 건강하다 해도 70이 넘어가면 총기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 사는 총기가 아닙니다. 성경의 지혜는 정말 오묘해서 나이가 들어서 그것을 깨달아 알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솔로몬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지혜의 왕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말년에 어떻게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우상까지 섬기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우상을 섬겼던 일을 가지고 어느 사람들은 솔로몬이 구원을 못 받았다고 말하는데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솔로몬이 우상을 섬길 때는 이미 총기가 사라진 때입니다.

그때의 행위는 아무 영향을 주지 못 합니다.

솔로몬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청년의 때가 지나고 가을이 오니까 어떻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아무리 그가 지혜가 있다 해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총기가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여름에 거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여름에 거두는 것이 아니라 신앙생활을 하느라 허송세월을 그냥 보내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여름에 반드시 거두어야 합니다. 나이가 들어서 총기가 사라지면 그때는 거두고 싶어도 못 거둘 수 있습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한 시라도 젊은 여름에 우리는 거두어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 여름의 좋은 때를 이 시대는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생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선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또 나이가 아무리 많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구원하십니다. 그러나 그것도 나이가 많을 때까지 성경을 늘 상고하고 있고 성경에서 영생을 얻고자 했을 때 누군가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의 말씀을 들을 때 가능하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영생을 위해서 부르짖은 사람이 복음을 듣지 못하다가 들을 때 가능한 역사입니다.

여름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이제 총기도 다 사라졌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하루아침에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자기들 마음대로 영생을 주는 종교 사기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표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어떻게 했습니까? 그 광야는 우리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나이가 이십 세 이상이었던 사람은 다 죽고 말았습니다. 40년 광야 생활이라는 것은 사람에게 총기가 있는 20세 이상으로 해서 40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총기가 있는 40년이 여름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청년의 때입니다.

피곤하지 않게 해서 거두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거둔 성도를 주님께서 끝까지 견인해서 구원해 주십니다. 나이가 들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청년의 때가 얼마나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은 그때에 이미 결정이 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모태에서부터 예정을 하셔서 경륜 가운데서 구원을 하십니다.

청년의 때를 허송세월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때를 그냥 보내면 반드시 가을에 자게 되어 있습니다. 가을이 턱 밑까지 왔는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절기상으로도 그렇습니다. 또 사람의 개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때가 되면 사람이 다 자게 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여름의 때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해서 내 안에 구원의 확신이 들면 거둘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제도 그렇게 청년의 때에 여름에 거두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 특히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더욱 그렇게 합시다.”

9절은 내 스스로 선을 행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선한 이를 믿어서 영생을 거두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가 선을 행하되 라고 말씀을 한 것은 성도 각 사람이 선하신 이를 믿는 것을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선을 행하면 때가 이르되 거두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거둡니다.

우리는 늘 이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영생을 거둔 사람만이 영생에 대해서 전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이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영생에 대해서 전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서 말씀을 듣더라도 그가 영생을 받은 사람이어야 내가 선을 행하는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목사들이 말 합니다.

목사가 설령 잘못해도 성도가 잘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성적으로는 참 설득력이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일이라면 가르치는 자가 잘못 가르쳐도 배우는 자가 더 연구를 하면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영생의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은 절대로 없습니다.

주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거짓 선지가가 있는데서 성도가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어도 그 안에서 다른 복음이 들어온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는 말씀이 갈라디아서입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그 안에서 복음이 전해질 수 있습니까? 그럴 가능성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자기를 설령 잘못 인도를 해도 내가 하나님을 잘 믿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일이 있으면 거짓 선지자를 삼갈 필요도 없이 내가 하나님께 구하며 됩니다. 아니 선지자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다른 복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 가운데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있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해도 이 가운데서 다른 복음에 빠질 사람은 나와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데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세웠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선지자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제가 바른 것을 전합니다.

그러면 이 가운데서 주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나올 수는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세워서 다른 곳에서 복음을 전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것을 전하는 사람에게서 배운 사람들은 구원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만 잘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이 얼마나 추상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절대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왜 거짓 선지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되는데 거짓 선지자가 있든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거짓 선지자에게서 배우는 모든 사람은 다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중에 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가 있습니다.

그를 사도 바울이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교회에는 가르치는 자가 있고 배우는 자가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가 잘못된 것을 가르치고 있으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사망에 이릅니다. 갈라디아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에 할례를 받아서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누가 할례를 주장했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할례를 주장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자기가 유대로부터 왔다고 하면서 가르치려고 하는 자가 할레를 받게 했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가르침으로 해서 할례를 받은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나는 율법은 안 지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아니더라도 반드시 거짓 형제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가르치는 자는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회가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0:38절을 보겠습니다. (신 205쪽)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저가 두루 다니시면서 착한 일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하신 착한 일이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성경은 모든 말씀들이 성경에서 해석을 해 주고 있습니다. 착한 일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갈라디아서 말씀도 거의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기회가 되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하니까 이 세상의 착한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구나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서 착한 일을 하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얼마나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강해입니다.

그리고 주석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착한 일을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생각하는 그런 착한 일을 하라고 사도 바울이 성도의 도덕에 대해서 가르쳐 주는 것으로 알고 이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었으면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고 믿음의 가정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착한 일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이 세상 사람도 이 갈라디아서를 보면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목사라는 사람들이 얼마나 육체로 가고 있는가를 이 말씀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다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그대로 행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세상에서 하고 있는 아주 작은 착한 일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산다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이 그런 착한 일을 하셨습니까?

주님이 왜 이 세상에 오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배가 고프면 먹이고 아프면 치유하기 위해서 오셨습니까? 그런 일들은 다 예표와 비유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니까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그런 것을 자기들이 직접 보이고 있습니다.

배가 고픕니다.

그 사람에게 밥을 준다고 해서 그가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물론 성도라면 당연히 배가 고프다 하면 밥을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착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에서는 분명히 착한 일이지만 성경에서 말씀하는 착한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단에게 눌린 자입니다.

그런 자들을 다 고쳐 주셨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마귀에게 눌려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 역시도 마귀에게 눌려 있는 것입니다 그것에서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의 이성은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너희가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선하신 이를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이해가 됩니까?

선하신 이를 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 다는 것이 믿어집니까? 이것이 천국 복음입니다. 세상에 속한 자들은 절대로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이 있는 성도는 선하신 이를 믿는 것으로 영생을 얻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마귀에게 눌려 있습니다.

절대로 우리 스스로는 자유하지 못 합니다. 어느 누가 율법에 대해서 자유 할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자유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가 하면 마귀에게 눌려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습니까?

이스라엘이 마귀에게 눌려서 아니 마귀의 포로가 되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마귀에게 눌려 있는 이스라엘에 오셔서 그들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이스라엘은 누리지 못하고 율법의 저주를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복음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전하신 복음이 마귀에게 눌려 있는 사람들을 자유하게 했습니다. 그 일을 하신 주님이 착한 일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착한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밥을 주고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마귀에게 눌려 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기회가 있는 대로 해야 합니다.

영생을 거둔 성도는 기회가 있는 대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저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전하고 오직 예수를 믿으라고 한다고 해서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서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입니다.

그래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 자에게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나 착한 일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 성도는 육체를 위하여 심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착한 일을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악한 일입니다.

빌립보서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18쪽)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너희 속에 착한 일을 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착한 일이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가 영생을 받는 그것을 착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게 역사를 하심으로 해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확신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종교적인 믿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야 가능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입니다.

그 날에 우리가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우리의 믿음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시작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기 시작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복음이 우리에게 전파되기 시작을 하면 주님의 날까지 그것을 이루실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은 은혜입니다.

거저 주시는 은혜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이 없습니다. 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도 이렇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영생을 위해서 자기들이 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한국의 기독교도 역시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하면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 있는 것 같이 율법의 행위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합니까?

우리 속에 착한 일을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비밀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이 있을지라도 영생은 그것과 상관없이 주어진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하는 것이 복음이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영생에 관여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혹시 저 사람이 타락을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할까를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요구도 다 염려에서 나온 것입니다 영생은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정말 우리 속에서 착한 일을 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수의 날까지 이루시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다른 복음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성경으로 보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기초가 되는 말씀들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흔들려서는 안 되는 말씀들이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다 보니까 행위로 점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행위가 자기를 저주 받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종교에 의해서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을 이루는 것이 착한 일입니다. 그것을 이루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성도들을 통해서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그 일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부탁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착한 일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을 통해서 나를 통해서 이 착한 일을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까지 복음을 듣고 믿은 성도들을 통해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래서 기회가 되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그리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합니까?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성령으로 영생을 거둔 성도입니다. 우리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하는 일입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었습니다. 그런 성도는 반드시 이 세상을 살면서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꼭 내가 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할 때는 하는 자를 돕는 것도 하는 일입니다.

초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이 모든 일들을 다 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을 때는 그를 돕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로 도왔습니까? 사도 바울이 눈이 나쁘다고 하니까 할 수만 있다면 자기 눈이라도 빼어 주려고 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착한 일을 기회가 되는 대로 해야 합니다.

고린도후서6:2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지금은 어느 때입니까?

은혜 받을 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 종말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을 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지금 이 시대는 죽을 때까지 종말이 오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영생을 거둔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착한 일을 하신 이를 전하는 일을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회

어떠한 일이나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나 경우를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이 얼마나 좋은 때입니까? 우리가 초대 교회와 같이 생명을 걸고 핍박을 받는 때도 아닙니다. 또 중세 시대와 같이 종교의 권력이 너무 커져서 종교 재판을 하는 때도 아닙니다.

사실 이 때보다 좋은 때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때에 은혜를 받아야 하는 때에 이 시대는 모두가 다른 복음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기회가 되는 대로 착한 일을 해야 하는데 정말 사람이 너무 적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난 이후로 복음을 전하기 가장 좋은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이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 착한 일을 정말 자기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했습니다. 이 일을 하다가 순교를 당한 사람이 얼마나 많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순교를 당한 성도도 참 많이 있습니다. 모두가 착한 일을 하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정말 최악의 기회에서도 그들은 자기 생명을 아까워하지 않고 착한 일을 했습니다.

이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또 중세시대에는 어떠했습니까? 초대 교회 못지않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물론 그 안에는 종교적 신념으로 죽은 사람도 꽤나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착한 일을 하다가 죽은 사람도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회가 좋았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는 지금 너무도 기회가 좋습니다.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어느 누구도 우리를 죽이지 못 합니다 우리를 이단이라고 공격은 할 수 있어도 국가의 법이 있기 때문에 죽일 수 없습니다. 사실 지금 이 시대는 기회가 너무 좋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한 때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복음을 받았습니까?

우리는 정말 이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둔 성도는 이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을 고린도후서에서는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가 아닙니다,.

종말의 때에는 전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정말 좋은 때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로 착한 일을 하게 하시기 위해서 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가정입니다.

세상의 착한 일을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어서 성령으로 영생을 거두는 착한 일을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고 하는가 하면 갈라디아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기 때문에 믿음의 가정을 든든히 세우라는 말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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