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41

윤주만목사 2016. 12. 27. 20:50

갈라디아서6: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모든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가지고 있습니까? 가르침을 받는 자가 아니라 가르치는 자가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주님께서 맺어 주신 성령의 열매를 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럼 여러분은 이 성령의 열매를 저와 함께 가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것입니다.

어느 것도 좋은 것은 없습니다. 다 사라지고 썩어 없어질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분만이 우리에게 좋은 것입니다. 그분이 맺어 주신 그 좋은 열매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 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행위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육체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믿을 수 있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지 우리 육체의 일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주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은 주님이 맺어 주신 성령의 9가지 열매입니다. 그 열매를 여러분과 제가 함께 나누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가복음에서 소금은 좋은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소금은 좋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좋은 것인 줄로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소금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어떻게 압니까?

부패를 방지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금과 같이 살아서 죄를 짓지 않고 세상을 부패하지 않게 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좋은 것인데 그렇다면 자기들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이렇게 말이 안 되는 말을 말이 되게 하는 탁월한 능력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좋은 것입니까?

인생은 부패하여 다 썩는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이야기하면서 성경과 정 반대의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고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그저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면서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습니다.

소금이 무엇입니까?

제가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좋은 것이라는 말씀이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어떤 행위가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선하심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하는 어떤 행위도 결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죄와 악만 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가르치는 자는 하나님의 선하심의 맛을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 모든 것을 알고 있고 여러분에게 가르치고 있고 이것을 함께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거꾸로 보고 있습니다.

아니 번역에서부터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분이 이 말씀을 바로 알지 못하면 이것으로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치는 자의 육적인 문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닌데도 마치 그런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알고 있고 그 일을 하게 됨으로 해서 아주 작은 것이 그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서 사망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저와 같아져야 합니다.

육체적으로 저와 같아지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제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으신 모든 좋은 열매를 가진 것과 같이 여러분도 저와 같이 성령의 소욕으로 이 열매들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도 초대 교회와 같이 성령을 보내 주셔서 복음을 가르치게 하시고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게 하시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 기본만 알아도 됩니다. 하지만 좋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마치 이 세상의 좋은 것으로 알고 그것을 나눠주기 위해서 구약의 말씀과 같이 목사를 레위인으로 알고 그들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서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여러분의 것을 제가 가지면 저도 사망하고 여러분도 사망합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가르침을 받고 있더라도 또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가르치는 자로 세워 주실 수 있습니다 아니 저는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렇게 하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때에 정말 복음을 바로 전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니 누가 보더라도 그렇게 보입니다. 성경의 번역도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서 시험을 당해 행위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과도 같은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소욕을 일으켜 주지 않으면 언제라도 다시 타락할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좋은 것은 가르침을 받는 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가르치는 자에게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성경에 있습니다, 성경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야 합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보화를 찾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보화입니다.

이 세상 어떤 보화와도 비교도 안 되는 보화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가장 좋은 표현이지 실제로는 어느 보화로도 이것을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5장에서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배웠지만 그 보화를 캐낸다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지만 가르치는 자에게 먼저 하나님께 주시고 가르침을 받는 자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강의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저와 같이 되기를 바랍니다. 아니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실 때마다 저 역시 기쁨이 큽니다. 여러분들과 이것을 나누어 함께 할 수 있어 늘 설레기도 합니다.

히브리서3:1절을 보겠습니다. (신 355쪽)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함께

한데 섞여 어우러진 것을 말 합니다. 성경에는 이 함께 라는 단어가 참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이 함께 라는 단어가 나온 성경 구절을 다 세기도 힘들 정도로 함께 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함께는 사전적인 뜻에서도 알 수 있듯이 한데 섞여 어우러져 있는 것을 말 합니다.

함께

같이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가르치는 자가 주님께서 맺어 주신 성령의 열매를 다 가졌습니다. 그러면 배우는 자 역시도 그것을 다 가졌을 때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함께 라는 단어의 의미를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말씀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함께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도 부르심을 입었으면 함께 부르심을 입은 것이 됩니다. 내가 부르심을 입은 것과 그 사람이 부르심을 입은 것이 다를 수 없다는 뜻으로 함께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함께는 육적인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아닙니다.

히브리서에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도 역시 다 천국에 가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만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성도가 아니라 부르심을 입은 모든 사람이 거룩한 성도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함께 라고 합니다.

 

거룩한 형제 입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받은 거룩함과 우리가 받은 거룩함이 다르다면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부르심을 입은 것도 하나님께 로서 부르심을 받아야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함께 라는 단어는 이렇게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주어지는 것을 함께 라고 생각합니다.

이상한 사상들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함을 입는 것은 모두가 동일합니다. 사도들이 거룩함을 입은 것과 그리고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입은 거룩함이 다르다면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함께 라는 단어의 의미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행위로는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실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행위가 다르면 함께하지를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함께 라는 단어는 믿음에 있어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율법에 있어서는 함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아직까지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이방인들을 함께 라고 하지 않습니다. 아니 우리가 갈라디아서를 보아서 잘 알겠지만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외식을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왜 외식을 했는가 하면 영적으로 함께 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외식에 빠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함께가 아닙니다.

율법은 그렇게 함께가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외식을 해서 급히 나갔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으로 가르침을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는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할 수 있습니다.

함께 거룩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는 역사입니다 저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거룩한 성도가 되었고 이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거룩한 성도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동일한 조건으로 되었을 때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고 그렇게 된 사람을 함께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거룩함을 입지 못했다면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함께 거룩함을 입은 형제입니다

그들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함께 거룩함을 입은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함께 라는 단어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말로는 함께 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함께가 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골로새서2: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함께 라는 단어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이 함께 라는 단어를 아주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이 함께 라는 단어를 모르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국어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국어를 모르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어도 모르면서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운다고 하면서 지식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함께 라는 단어를 모릅니다.

갈라디아에서도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어디에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이 함께 라는 아주 쉬운 단어를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함께 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이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면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되지만 이 단어와는 전혀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어떤 학문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세상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초등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또 함께 라는 단어를 모르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 세상초등학문이 율법입니다. 그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한글만 조금 알아도 이 말씀만 보아도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너무 한글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성경을 보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함께 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고 어떻게 성경을 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이 말씀을 지식으로만 알고 있지 그리스와 함께 죽은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말로만 하면 뭐 합니까?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기 위해서 아주 매끄러운 말로 자기가 세상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세상초등학문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고 또 함께 죽었다는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다 의문에 순종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초등학문에서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단어를 아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의미입니다

성경은 메타포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단어가 갖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그저 단어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은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성경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알고 있지 실제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고 함께 죽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서2: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12쪽)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함께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함께 라는 단어를 많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함께가 아니라 각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믿음의 성도들을 함께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영의 일을 함께 라는 단어로 설명하지 않으면 우리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아니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함께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말씀입니다.

성도와 성도도 함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 역시 모든 것이 함께 역사하고 있습니다.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는 말씀이 사실 우리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함께라는 단어가 있음으로 해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수도 없이 말씀하고 있는 이 함께 라는 단어의 의미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함께 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사람들은 전혀 함께 라는 단어를 모르고 그저 지식으로만 함께 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고 있습니다.

이것을 육체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육체적으로는 우리는 각각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내가 각각입니다. 그러나 영의 비밀로는 모두가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영의 비밀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함께 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영의 일에 있어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로는 함께 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영으로는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도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모든 성도들이 함께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은혜가 아니고는 함께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맺으신 열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함께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한 것이라면 함께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은혜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소욕을 따라 함께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이 함께 라는 단어를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의미를 모르면 내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별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모든 좋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맺어 주신 열매입니다.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가르치는 자와 가르침을 받는 자가 함께 하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함께 있기 때문에 가르치는 자도 구원을 받고 가르침을 받는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하는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6: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잘못 생각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조롱을 받으실 분이 아니십니다.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무슨 말씀입니까? 잘못 생각해서 자기 스스로가 속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잘못 생각해서 스스로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계속해서 육체의 일과 성령의 소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자기를 스스로 속입니까?

육체의 일로 인하여 자기를 스스로 속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에 벌써 이런 사람들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복음이 전파가 되었던 그 교회에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우리는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무엇으로 자기 스스로가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우리 역시 스스로 속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사람들만 스스로 속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도 스스로 속고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사람들만 속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그래도 사도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지금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방의 교회는 성경 전체를 먼저 본 것이 아니라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먼저 들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은 두루마리였습니다. 지금과 같이 우리가 편하게 들고 다니는 성경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누구나 성경을 봅니다.

하지만 그 당시는 아무나 성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요즘과 같이 인쇄술이 발달한 것이 아니라 정말 구약 성경만 해도 엄청난 분량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교회에 거짓 형제가 들어왔습니다.

거짓 형제라고 하니까 모든 것을 다 거짓으로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을 사도 바울이 거짓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이 많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할레라는 율법을 지키라고 해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사람들이 그것에 미혹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까지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고 오직 믿었습니다. 그런데 할례를 받고 보니까 이제 정말 이스라엘과 같아 보이는 것입니다 그 할례가 들어옴으로 해서 바로 뒤따라서 육체의 일들이 함께 들어온다는 것을 사도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육체에 속지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은 가르침을 받는 자들이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대로 가르치는 자들과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육체에 속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예배하는 가운데서 육체의 일을 전혀 하지 않고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 믿음이라는 것은 무미건조합니다. 아무 느낌도 없고 그렇다고 해서 변하는 것도 없고 자기 육체적으로 체험하는 것도 없다 보니까 사실 하나님께서 역사하지 않으면 믿음으로 행한다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세상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이 믿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믿음이라는 것을 어떻게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 육체로 무엇인가 체험을 하고 또 변화가 있어야 하고 자기가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참 어렵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아니 교회 안에서 버림을 받는 사람들은 이 믿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확실하게 보여 지는 육체의 일에 사람들이 아주 쉽게 시험을 받아서 넘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보이는 것을 보게 되면 사람들은 참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가 눈으로 본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고 자기가 육체로 체험한 것보다 더 확실한 것이 없기 때문에 육체의 일을 하면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것 같아 보입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얼마나 다른 복음에 쉽게 속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몰라서 자기가 속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속고 있었다는 것을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그런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 전해지고 있어서 이런 말씀들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6쪽)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만 스스로 속았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고린도교회도 역시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 고린도교회가 우리보다 지혜가 없어서 우리보다 다른 복음을 들어서 스스로 속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복음을 들었습니다.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지금은 아예 처음부터 다른 복음을 듣다 보니까 사실 속고 말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나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이 시대 쓰레기 같은 다른 복음이 아니라 복음을 들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은 교회가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육체의 일로 스스로 속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파당이 생겨났습니다. 나는 아볼로파 나는 게바파 나는 사도 바울파 하면서 교회 안에서 서로 당을 짓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 안에서 우리는 성전을 지어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복음을 전한 그 사람을 보고 있습니다. 나는 아볼로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나는 게바에게서 복음을 들었고 나는 바울에게서 복음을 들었다고 하면서 서로 시기와 분쟁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볼로가 무엇입니까?

게바가 무엇입니까? 바울이 무엇입니까? 분명히 이 사람들은 초대 교회에 복음을 전한 귀한 복음의 사역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로 말미암아 시기와 분쟁이 있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아무도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람을 자랑하는 것 뿐 아니라 교회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순복음교회니 사랑의 교회니 하면서 자기 교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들이 다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임에도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스스로 속습니까?

육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자기들이 영적인 성도라고 주장하는 그들이 육체를 보고 고린도교회와 마찬가지로 속고 있으면서도 지혜가 없어서 그것이 속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목사도 육체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교회도 육체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육체를 보고 스스로 속지 말라고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 자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무엇으로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그저 종교에 의해서 사망의 길로 끌려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목사 너무 따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볼로, 게바, 바울은 그래도 다 복음을 전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을 따르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에게서 배웠다고 하고 있고 어느 목사가 설교하는 것을 들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그 목사가 우상이 되어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어느 교회를 다닌 것이 자랑입니다. 지금 다니고 있는 어느 교회의 이름을 대면서 육체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 다 지혜가 없어서 하는 자랑임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 육체를 보면 스스로 속이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 외에 것은 다 쓰레기입니다. 그가 아무리 사도 바울이라 해도 그를 가지고 파당을 만드는 순간 쓰레기가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그런 것으로 스스로를 속이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는 모든 것은 다 육체입니다. 그것이 사도라 할지라도 육체고 또 교회의 건물도 육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육체를 모릅니다.

그리고 영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그런 기초도 모르면서 교회 안에서 그저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초등학생도 알 수 있는 그런 것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것은 영의 일을 믿는 것이지 육체를 보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육체가 무엇인지 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내 눈으로 보고 있습니까?

그리고 느끼고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도 아는 것입니까? 그것은 다 육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런 것 까지도 이해가 안 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예수를 믿는다고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보면서도 마치 영으로 알고 있는 그것이 자기를 스스로 속이는 것입니다.

남이 나를 속인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단이 속이고 있습니다. 사단이 광명의 천사들을 만들어 놓고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고 지혜를 구하면 속지 않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혜가 있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는 것으로 자기가 지혜 있다고 스스로 속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교회들이 육체를 보고 스스로 속고 있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복음이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정말 주님이 오신다고 해도 아무 할 말이 없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을 우리에게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와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스스로 속았을지라도 자기들은 지혜가 있어서 속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무심히 지나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33-3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3쪽)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일과 성령의 소욕입니다. 사람들이 다 이것에 속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 자기들의 이성으로 너무도 좋아 보이기 때문에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은 그것에 다 속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문자에서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다 속게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교회입니다 또 데살로니가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교회들이 속고 있었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다는 것은 쉬운 것 같지만 이렇게 교회 안에 육체의 일을 가지고 들어오면 그대로 속게 되어 있습니다.

이 교회들입니다.

모든 것이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이 교회들만 속을 것 같으면 성경을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들이 역시 이 교회들과 같이 다 속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고 절대로 속고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의 일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모든 일들이 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일들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성경 말씀을 보고 자기들은 전혀 속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심각성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초대 교회가 속았으면 이 시대는 그보다 더 많이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마치 남의 집에 불구경 하듯이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경계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를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초대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속았다면 이 시대 역시 100%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자기들이 어떻게 무엇으로 속고 있는지 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속고 있습니까?

성경 말씀으로 속고 있습니다. 성경이 잘못 기록이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있는 말씀을 이해하지 못해서 속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들에게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았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계속해서 강조를 하지만 이 시대 목사들이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국어를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다보니까 그 안에 담겨져 있는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속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속지 말라고 한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성경을 보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 구원을 받는데 있어 히브리어, 헬라어는 몰라도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나 국어를 모르면 우리가 보고 있는 한글개역성경에서 그 의미를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속지 않으려면 성경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뜻을 모르고 그저 문자를 보고 있다면 다 속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누가 속이기보다는 자기들이 이성에 의해서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지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사실 이 말씀도 거의 다 거꾸로 해석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선한 행실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속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악한 동무고 선한 행실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알아야 하는데 무조건 자기는 선한 행실을 하고 있고 나를 반대하는 사람은 악한 동무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니까 사단이 속이고 말 것도 없이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악한 동무입니다.

이제까지 악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하다는 것이 기초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그 일도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행위를 다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악합니다.

내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하고 또 여러 가지 일을 하는 그 모든 것이 다 악합니다. 이것이 악하다는 것을 모르면 악한 동무가 누구라는 것을 절대로 알 수 없습니다. 아니 자기가 교회 안에서 이 모든 일을 하는 악한 동무면서도 자기가 누군가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입니다.

그 일을 하는 사람은 다 악한 동무입니다. 교회 밖에 사람이 악한 것도 아니고 나와 다른 길을 가고 있는 이단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악한 것도 아니고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내가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단도 역시 악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악한 동무가 선한 행실을 더럽힙니다.

악한 동무에 대해서 간단하게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제 선한 행실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선한 행실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다 악한 동무만 교회 안에 있기 때문에 선한 행실을 더럽게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교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정도로 악한 동무들만 가득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선한행실을 더럽힙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기들이 드리고 있는 예배가 선한 행실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자기들의 기도가 그리고 찬송을 부르는 것이 그리고 십일조를 내는 것이 그리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 모든 일들이 선한 행실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그것을 반대 하는 사람이 있으면 악한 동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한 동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게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악한 동무들은 자기가 악하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악한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9:8절을 보겠습니다. (신 418쪽)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의 기초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세마포를 입었습니까? 아니 천국을 우리가 어떻게 가고 있습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마포는 오직 믿음으로 입은 것입니다 그 외에 어떤 방법으로도 이 세마포를 입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그것은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오직 믿음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함을 얻고 있습니다. 성도의 선한 행실이 무엇인가 하면 내가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이 선한 행실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선한 행실이라고 하면 마치 자기들이 육체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로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다 악한 행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복음을 위해서 일을 했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선한 행실은 오직 믿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마음으로 믿는 것이 성도의 선한 행실입니다.

이 행실을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악한 동무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악한 동무들이 성도들이 마음으로 믿어 의롭다 함을 얻고 있는 그것을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이 선한 행실을 더럽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속지 말라고 말씀을 했으면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악한 동무가 속이고 있습니다.

이 악한 동무가 세상의 이성으로 볼 때는 광명의 천사와 같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볼 때 그가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 절대로 속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속고 있는가 하면 악한 동무인데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가 참 선지자 같고 그가 진리를 말하는 자 같으니까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지가 있습니다.

그가 나를 속이려고 하면 속겠습니까? 아무도 거지에게는 속지 않습니다. 그러나 근사하게 차려입고 또 모든 것을 갖추고 있는 사람에게는 속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어떻게 속는가 하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속는 사람들이 누구에게 속고 있는가 하면 자기 이성으로 볼 때 광명의 천사와 같이 보이는 사람인데 그가 악한 동무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육체의 일입니다.

그 육체의 일을 보니까 정말 성도와 같이 보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는 것이지 그 육체의 일을 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과 같이 생각이 안 되면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믿음의 비밀을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그렇게 겉으로 보이는 그 사람의 행위 그리고 지적인 면을 보고 다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가장 선하고 의롭다고 하는 그것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속고 있습니다. 만약에 거지와 같은 사람이 교회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교회도 없이 그저 아무 곳에서 말씀을 전한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그것을 들으려 하지도 않고 또 속는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것이 성도의 선한 행실입니다. 그것을 무엇으로 더럽게 하고 있는가 하면 악한 동무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들로 더럽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서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는데 악한 동무가 와서 사람의 이성에 선한 일을 하니까 그것을 따라 하게 되면 성도의 믿음이 더럽게 변한다는 말씀입니다

단 하나의 행위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볼 때 정말 이 행위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는 그것이 성도의 옳은 행실을 더럽게 하고 있고 그렇게 더럽게 되는 순간 그 사람은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그것에 다 속아 있으면서도 지혜가 없어서 깨닫지를 못해 그저 소가 푸주로 가는 것과 같이 사망으로 끌려가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악한 것이 무엇인가 선한 행실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가장 기초로 삼아야 하는 것을 모르면서 교회 안에서 악한 일에 열심을 내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악한 것으로 선한 행실을 더럽게 해서 사망에 이르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아니 반발을 합니다.

그들이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가 악하다고 하면 아마도 저하고 싸우자고 할 것입니다 자기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감사해서 그 일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악하다고 하면 싸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스라엘이 악하다고 하니까 그들이 참지를 못해서 결국 십자가로 죽였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속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다 속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속아서 율법주의가 되었고 이 시대 역시 속아서 율법을 지키고 있고 또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은사주의와 성화주의가 만연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악한 동무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천국에 간다고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속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니까 또 이 말씀의 문자에 속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깨어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으면서 죄와 싸워서 이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치열하게 싸우고 있고 그 죄를 지면 스스로 정죄를 받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정말 어느 것 한 가지도 바르게 알고 있지 않습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에서 죄에 대하여라 함은 저희가 나를 믿지 아니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니까 성경 자체가 해석이 안 되고 있습니다. 모두가 잠자고 있으면서도 깨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육체의 행위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속고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초대교회에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가 하면 악한 동무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고 그들이 누군가 하면 육체의 일을 하는 자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죄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죄를 짓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단보다 연약해서 육체로는 죄를 안 짓고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듣고 믿은 성도들은 죄를 안 짓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짓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 짓는 자가 누구입니까?

악한 동무가 죄를 짓고 있습니다. 도덕적으로는 광명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하나님의 성도와 같이 살아가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죄를 교회 안에서 짓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을 한 가지라도 하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다 해도 그의 행동 하나만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속고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 좋기 때문입니다 선교를 하기 위해서 그리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하는 것이 왜 나쁘겠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일을 지킵니다.

그 시간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오케스트라 같은 연주자가 있고 많은 사람이 찬양대에 서서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나쁘다 할 수 있습니까? 아마 그것을 제가 악하다고 하면 저를 공격할 사람이 많이 있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속는 사람은 그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도무지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배를 정해진 틀에 의해서 드리고 있습니다.

먼저 묵상기도를 하고 그 다음에 찬양을 부르고 또 기도를 하고 설교를 듣고 헌금을 하고 하는 이 모든 순서는 질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규모 있게 하는 그 행위를 보면서 누가 나쁘다고 생각하겠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악한 동무는 이렇게 악한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다는 말로 교인들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주의 만찬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실제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떡과 포도주를 주시면서 이것이 생명을 주는 내 살이라고 하시고 또 잔을 드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가 이것을 기념하여 지키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서 이것을 기념해서 지금 작은 떡과 포도주 즙을 마시고 있습니다.

누가 나쁘다고 합니까?

아마도 제가 이것이 악하다고 하면 저를 정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대 교회가 얼마나 많은 악한 일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고 성령도 오시지 않아서 교회 안에서 더욱 더 악한 일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말씀을 문자로 보고 그것을 실제 우리 육체로 행하는 모든 행위가 다 악합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죄인가 하면 성령을 훼방하는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죄를 지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속고 있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지만 의를 행한다고 하면서 악한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누가 속여서 속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교만해져서 자기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성경을 보기 때문에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야고보서1: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0쪽)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복음을 듣고 있습니까? 그리고 진리로 행하고 있습니까? 지금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이 이렇게 속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에 의해서 속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입니다.

성경을 보면서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 외에 것을 이야기를 하면 사람들이 절대로 속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너무 쉽게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 외에 것을 가지고 속은 것은 아니라 자기들이 보고 있는 구약성경을 보면서 속아서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습니다.

왜 속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속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습니다. 율법을 다 지켰고 또 천국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욕심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미 다 가졌습니다.

우리는 부족한 것이 없이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다 보니까 자기가 무엇을 받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욕심을 부립니까? 더 의롭게 되기 위해서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다 욕심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보면서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달란트의 비유나 므나의 비유를 보고 더 많은 달란트를 남기기 위해서 그리고 더 많은 므나를 남기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또 무엇으로 욕심을 부립니까?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데나리온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기 위해서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내가 더 많이 일을 했으니까 더 많은 데나리온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님도 안 됩니다.

한 데나리온 그 이상을 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고 싶어도 한 데나라온 이상을 줄 수 없는데 사람들은 욕심을 부리면서 더 많은 데나리온을 받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주님이 더 이상 줄 수 없는 그것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더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욕심을 부리고 있습니다.

죄입니다.

그리고 사망이 따라 옵니다. 사람들이 지금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에 얼마나 욕심을 내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욕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고 사망이 따라오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고 그저 하나님의 일을 한다는 그 말에 정신이 혼미해져서 속히 다른 복음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정말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다른 것으로 속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 말씀을 바로 깨닫지를 못해서 속고 있습니다. 죄를 짓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악한 행위를 하지 말라고 하면 도리어 더 악한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왜 그런가 하면 다 성경을 보고 속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은 비밀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이 되었지만 이스라엘에게는 허락이 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알아야 하는데 비밀이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지식으로 성경을 보아서 알 수 있을 것 같으면 성경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 있는 자가 보아도 속기 때문에 비밀이라는 말씀입니다.

비밀이 무엇입니까?

아무도 모르고 나 혼자 알고 있는 것이 비밀입니다. 왜 사람들이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하는가 하면 비밀이기 때문입니다. 악이 무엇이라는 것이 비밀입니다. 천국은 이렇게 모든 것이 다 비밀입니다. 그 비밀을 누가 알고 있습니까?

주님이 알고 계십니다.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그 비밀을 절대 알 수 없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이렇게 비밀로 감추어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절대 이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가면 너희에게 또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보혜사가 우리에게 오셔야 이 비밀에 대해서 가르쳐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주님만 알고 있습니다.

이제 주님은 하늘에 계십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직접 이 비밀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보혜사를 보내 주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보혜사가 오시지 않은 사람이 성경을 보면 속게 되어 있습니다. 비밀을 가르쳐 주는 이가 없는데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속습니다.

이 시대 자기들이 성령이 오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신 사람이 없습니다. 죄가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성령이 오셨다고 할 수 있습니까? 그가 오시면 죄에 대해서, 의에 대해서,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압니까?

의를 알고 있습니까? 심판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어느 한 가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책망을 하시고 있지만 문둥병에 걸려서 감각이 없습니다. 성령이 책망을 하시고 있지만 자기 양심에 화인을 맞아서 도무지 감각이 없어서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잠언14:8절을 보겠습니다.(구 925쪽)

“슬기로운 자의 지혜는 자기의 길을 아는 것이라도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속이는 것이니라”

슬기로운 자는 자기의 길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열 처녀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중에 다섯은 슬기롭고 다섯은 미련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슬기로운 다섯 처녀만 예수님이 오시는 것을 기다린 것이 아니라 미련한 다섯 처녀도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서 실제 그렇습니다.

주님은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섯으로 말씀을 하신 것이지 실제로는 어떻습니까? 청함을 받는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도 하나님께서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고 남은 자를 구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섯이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성경의 예표들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에 노아 한 사람만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는 얼마나 적은 숫자가 구원을 받는가를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이런 비유를 보고 그래도 다섯 안에만 있으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자기 길을 압니다.

주님께서 내가 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슬기로운 자는 자기 길을 알기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슬기로운 자는 다른 것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만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예수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미련한 자는 잠언을 보면 그가 어떤 자인가를 아주 자세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이 미련한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미련하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육체의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육체의 일을 하면서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것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다는 말씀은 자기가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로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이 예수를 안 믿고 있습니까?

만약에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다면 그가 왜 기다리고 있겠습니까? 자기 딴에는 정말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또 자기는 반드시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그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지만 미련한 자는 결국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일입니다.

이것이 교회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절대 다수가 미련해서 자기 행위를 보고 천국에 간다고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미련한 자의 어리석음은 자기를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가 미련한지 슬기로운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입니다.

그가 누군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미련한 자가 누군가를 또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열 처녀의 비유를 보면서 그런 것은 생각하지 않고 막연하게 자기는 슬기롭다고 하고 있고 자기와 다른 사람은 미련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내가 슬기롭다고 해서 슬기로운 것이 아니고 미련하다고 해서 미련한 것도 아닙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슬기로운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가운대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는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를 다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슬기로운 자가 누구고 미련한 자가 누구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막연하게 자기가 슬기롭다고 생각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에게 속고 있는가 하면 자기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면서 속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로 보고 그것을 자기 육체의 일로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지각이 없어 자기가 속고 있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사야1:4절을 보겠습니다. (구 968쪽)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

만홀히 여기다

무엇에 관심이 없고 소홀하게 여기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습니까? 이사야1장에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범죄를 하고 어떤 행악을 하고 어떻게 부패 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여호와를 버리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를 만홀히 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이방의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서도 자기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을 멀리 하고 물러가 있으면서도 그저 주여 주여하면서 제사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무수한 제물입니다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가 불렀습니다. 이렇게 제사에 빠져 있는 이스라엘을 보고 하나님께서 너희가 만홀히 여기고 나에게서 멀리 물러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수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에 배가 불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수한 제물을 드립니까?

이 시대 역시 무수한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헌금이라는 명목아래 교회 안에서 드리고 있는 것이 이스라엘의 무수한 제물보다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마 제가 알기로는 10여 가지가 넘는 제목으로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무수한 제물을 드린 것보다 더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많은 헌금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짐승으로 무수한 제물을 드렸다면 이 시대는 헌금으로 무수한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목사들은 온갖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헌금을 강도짓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의 무수한 제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교회를 성과 같이 지어 놓고 그것을 유지하느라 온갖 명목으로 헌금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선교사를 파송하고 또 전도를 한다고 하면서 온갖 제물을 드리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도 그것이 이사야가 말씀하고 있는 무수한 제물과 같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무수한 제물이 범죄입니다. 그리고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가 부른 것이 행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번제로 드렸던 살진 짐승의 기름기 보다 더 번지르하게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내 앞에 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주님이 오셨을 때도 이스라엘은 예배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온갖 제사를 드리면서 마당만 밟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라는 건물로 들어와서 마당만 밟고 가고 있습니다.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무엇을 합니까?

무수한 제물을 드리면서 그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을 드리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을 하면서 마당만 밟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참 잘 믿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만찬을 먹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다 우상의 제물만 먹고 있습니다. 어느 한 교회라도 주의 만찬을 먹고 있는 교회가 없고 다 우상의 제물을 먹으면서 그것으로 기름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만찬을 먹으라고 하니까 종교의 의식으로 성찬식을 하면서 기름으로 두르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다 악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아주 경건하게 의식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행위를 합니까?

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더 소중한가를 모르고 제사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아니 모든 선지자가 전하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라는 종교가 되었듯이 이 시대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이 종교가 두 짐승이 되어서 사람들을 다 죽이고 있는데도 성경에서 그 비밀을 알지 못해서 저주를 받기를 스스로 자청하고 있습니다.

더 악합니다.

이스라엘은 그래도 자기들이 율법이라는 그 한 가지를 지키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을 폐했다고 하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말로는 율법을 폐했다고 하면서 성경에 있는 율법을 그대로 지키는 아주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사야를 통해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기도하는 것은 가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이라는 주일에 모이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악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시면서 내가 견디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보다 더하면 더 했지 덜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안식일이 악입니다.

이 시대 주일이라는 날이 악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을 견디지 못하신 것과 같이 이 시대 육체의 일을 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견디지 못하시고 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 받으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은 이스라엘과 같지 않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이스라엘보다 더 범죄하고 더 악을 행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왜 하나님을 만홀히 여겼는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줄을 몰랐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아는 것을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다 안다고 생각하고 이제는 제사를 잘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이제는 구원을 받았으니까 성도로서 살아야 한다고 하면서 육체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8:5-6절을 보겠습니다. (신 417쪽)

“그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하나님은 그의 불의한 일을 기억하신지라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주고 그의 섞은 잔에도 갑절이나 섞어 그에게 주라”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 죄가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그의 불의 한 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십니다. 이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모든 저주와 화는 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옥을 누가 가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육체의 일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둡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금 교회 안에서 무엇을 심고 있는가를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천국에 갈 것이라는 그런 세뇌가 그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일로 심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심는지 모르고 그저 종교라는 교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대로 줍니다.

그리고 갑절로 갚아 줍니다. 교회는 천국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광야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천국 모형 가나안에 몇 명이 들어갔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장정만 60만 명이 나와서 단 두 명이 들어갔습니다.

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광야라는 교회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왜 죽었는가를 히브리서에서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까? 분명히 겉으로 볼 때는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도 역시 주여 주여하고는 있지만 믿지 않는 사람이 다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만 명입니까?

그런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이스라엘을 그대로 대입해도 40명도 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만 명이 광야라는 교회에 있어도 이스라엘의 숫자를 그대로 대입시키면 40명이 안 됩니다. 그 외에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육체의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면서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성경의 예표를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경의 예표를 무시하고 그저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과 다른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고 다른 복음은 성경을 보고 문자 그대로 행위를 하는 것이 다른 복음입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갚아 주십니다. 아니 내가 심는 것을 그대로 거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둔다는 말씀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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