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44

윤주만목사 2016. 12. 28. 21:17

갈라디아서6: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착한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보다 더 좋은 때는 없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피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복음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늘 생각하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 많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포기 했습니다. 당시에 사도 바울은 세상 적으로 출세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가정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가 이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나서 그의 부인이 떠난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이 복음을 위해서 평생을 혼자 살면서 기회가 되는 대로 착한 일을 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제가 가정과 그리고 세상에 사는 것을 전부 무시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모든 것이 다 분복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다면 당연히 결혼도 해야 하고 또 세상에서 그 분복대로 살아가야 하는 것은 맞습니다. 그것을 포기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니지만 그러나 우리는 착한 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각각의 은사가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긴 직분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을 가장 우선으로 삼아야 하는가 하면 우리는 기회가 되는 대로 착한 일을 해야 합니다. 저는 모든 사람이 사도 바울과 같이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서 그렇게 살아야 하는 직분이 주어졌던 사람입니다.

영생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그들은 영생을 받지도 못했으면서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 주셨습니다. 우리 중에 잘난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도 없습니다. 아니 세상이 볼 때 우리는 교회라고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미약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영생을 거두게 하셨습니다.

천국을 가고자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시대만 해도 우리나라에만 천만 명이 된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원하고는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았습니다. 은혜를 받지 못한 그들도 종교에 의해서 자기들이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고 있는데 우리 성도는 그들보다 더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기회입니다.

지금보다 더 좋은 기회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이 직접 할 수 없다면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라도 소개를 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를 통해서 착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장로가 세워져 있습니다. 그 장로들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더욱 믿음의 가정에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서신을 보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가만히 들어와서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그 할례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입니다. 단 한 가지 율법이 교회 안에 들어온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영혼 구원만을 생각했습니다.

만약에 이 할례라는 율법을 행하는 것이 구원을 받는 것과 아무 상관이 없다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보내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을 저주에 빠뜨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뭐가 나쁘냐고 말 합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면 저주를 받는 그 일도 아무 거리낌이 없이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사람의 이성으로 성도로서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고 또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율법의 십일조를 받고 있으면서도 이 율법이 자기들을 어떻게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써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글자가 안 보입니다. 너무 작아서 안 보이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지만 이 글자가 너무 작아서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큰 글자입니다.

모두가 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두가 볼 수 있게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보냈지만 교회는 너무도 빨리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아니 이 시대는 자기들이 율법주의라는 사실 조차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의 하나입니다.

그것을 세우는 자는 모든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아주 큰 글자로 적어서 보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눈이 나빠서 그 글자는 안 보이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식들이 되어서 자기들이 보고 싶은 글자만 보고 있고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적어서 보낸 갈라디아서의 중심 내용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신학자들입니다.

갈라디아서를 종과 아들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는 복음이 무엇이고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사도 바울이 아주 큰 글자로 명확하게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갈라디아서를 보면서도 다른 복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다른 복음을 전하다보니까 큰 글자가 전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율법은 성경의 문자를 보고 그대로 자기 육체로 행하는 것을 율법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우리가 마음으로 믿는 그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다른 복음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큰 글자로 보낸 갈라디아서를 보고도 다른 복음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이 갈라디아서를 보고도 너희가 착한 일을 하라고 하면서 이 세상의 착한 일을 하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교회는 다른 복음에 속히 빠져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모두가 다른 복음입니다.

누가 누룩이 섞이지 않은 무교병을 전하고 있습니까? 저를 욕해도 좋고 비난해도 좋습니다. 아직까지 저는 그런 사람을 못 보았습니다. 제가 교회사를 통해서 본 인물들이나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목사들을 보았을 때 복음을 전하는 목사는 없습니다.

영생이 없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고 분명히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율법의 행위에 속해 있기 때문에 저주를 받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으면서 천국에 간다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를 큰 글자로 보는 성도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와서 할례를 받으라고 한 그 사람들이 다른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단 한 가지입니다.

분명히 저주를 받습니다. 저는 갈라디아서를 보고 이렇게 말씀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서 축복을 받든지 아니면 다른 복음에 빠져 율법을 지키면서 저주를 받든지 그것은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보고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지키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큰 글자입니다

성경이 안 보입니까? 그러면 큰 글자로 된 것을 보시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도 똑같이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글자를 보는 사람이 없습니다.

갈라디아서6: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로 할례 받게 함은 저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인하여 핍박을 면하려 함뿐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육체의 겉모양을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입니다.

사람들이 이 갈라디아서를 보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할례라는 율법을 가지고 말씀을 하다보니까 마치 할례 그것만이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할례만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은 모두가 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할례가 무엇이라는 것은 다 압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거짓 형제가 들어와서 할례를 받게 한 것이 율법의 시작이었습니다. 만약에 십일조를 가지고 들어왔다면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십일조를 가지고 말씀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마치 할례는 육체의 모양을 내는 율법으로 생각하고 십일조는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누가 육체의 모양을 냈습니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육체의 모양을 냈는가를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기도를 하면서 나는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이레의 이틀을 금식한다고 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내는 것은 사람이 볼 때는 분명히 육체의 모양이고 또 이레의 이틀을 금식하는 것 역시도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는 육체에다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율법은 육체로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할례는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고 다른 율법은 육체로 하기 때문에 그것은 육체의 모양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사람들이 악해서 어리석은 주장들을 억지로 하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럼 교회는 어떻습니까?

그것은 육체의 모양이라고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 안에 있는 것을 성물이라는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약 성경에 어디 교회 안에 있는 것을 성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구약의 성전과 신약의 교회는 전혀 다른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건물을 가지고 성전이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전은 그의 육체입니다.

그러면 교회가 주님의 육체가 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성전은 말씀 그대로 우리에게 그의 육체라는 것을 그림자로 다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그의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육체와 그의 아내는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주님의 아내입니다.

그것도 보이는 건물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도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합니다. 그 교회가 주님의 아내가 되는 것이지 보이는 건물을 지어 놓고서 그것을 교회라고 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사용해야 합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를 가더라도 정해져 있는 모양이 있습니다. 그것은 앞에 단상이 있고 그리고 강대상이 있고 뒤에 의자가 있고 헌금함이 있고 또 악기가 있고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을 교회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 역시 모든 사람이 들어가 보고 여기는 교회라고 하는 것 역시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의로 성경을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이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도 모르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할례를 말씀하니까 마치 할례 한 가지만 육체의 모양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를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할례 외에 다른 율법을 지키는 것은 믿음이라는 아주 이상한 이야기를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해 모두가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늘 기억하고 있기 바랍니다. 우리와 같은 육체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으면 영으로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 세상과 같이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일을 다 육체로 하고 있으면서도 한글을 몰라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육체가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글 모릅니까?

육체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사람의 몸을 육체라고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무엇으로 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영으로 하고 있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종교라는 마약에 취해서 사물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사람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영은 말씀 그대로 영입니다.

육체는 내가 보고 느끼고 감정으로 알고 지식으로 분별하고 하는 모든 것이 육체입니다. 그러나 영은 그런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영은 말씀 그대로 하나님의 역사로 성경에서 진리를 알아 인도함을 받는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육체의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영의 일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례만 육체의 모양이 아닙니다. 십일조도 육체로 하고 있으면 육체의 모양이고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도 내 육체로 하고 있다면 육체의 모양이고 기도도 육체로 하고 있으면 육체의 모양이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내 육체가 부르고 있으면 그것 역시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는 모든 것이 다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8: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9쪽)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모양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형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모양이라는 단어를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볼 때는 반드시 한글을 사전에서 먼저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한글을 알고 있다고 하는데 실제 한글을 정확하게 아는 사람은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육신이 연약하여 율법을 지킬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할 수 없다고 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답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안 받아들입니다. 이런 말씀들은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기초가 흔들리다 보니까 아니 기초가 든든히 서 있지를 못하다 보니까 성경을 보면 이때는 이렇게 말씀하고 저때는 저렇게 말씀하는 것 같아서 도무지 어떻게 믿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혼미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바로 알고 있으면 안 된다고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내가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일이라는 날도 빠지지 않고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은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데 실제 신앙생활에서는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속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속고 있습니까? 사단에게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내가 하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히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능력을 주셔서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고 도리어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누구나 할례를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지 할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것으로 속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육신이 연약해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설령 내가 십일조를 내고 있고 주일을 지킨다 해도 그것은 내가 할 수 있어서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을 사단이 하게끔 만들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해서 저주를 받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디서 보여 주셨습니까?

에덴에서 아담에게 동산 모든 실과는 먹되 중앙에 있는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그것을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동산에 얼마나 많은 실과가 있었겠습니까? 아담의 입에서 살살 녹는 그런 실과가 가득했습니다.

하나만 안 먹으면 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안 먹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로 우리 인생은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아담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아담은 죄를 안 진 깨끗한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런 아담도 많은 율법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는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서 자기가 마치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육신이 연약해서 할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가 해 보니까 되는 것을 보면서 속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모양이 무엇입니까?

겉으로 나타나는 생김새나 형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모양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은 우리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이 직접 눈으로 보고 느끼고 알았습니다.

이것이 모양입니다.

우리가 구약에서는 그 모양을 그림자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이 지었던 성막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은 주님을 성막을 통해서 보았습니다. 그 성막이 이제 신약에 와서 육신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모양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보고 지적으로 분별할 수 있는 것이 모양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적으로 분별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시기 전에는 영이시기 때문에 사람이 그것을 볼 수도 없고 지적으로 분별할 수도 없습니다.

영과 육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영은 모양이 없습니다. 그러나 육은 모양이 있습니다. 할례만 모양이 있습니까? 할례 한 가지만 육체의 모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예배를 드리는 것도 우리가 볼 수 있고 지적으로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 예배를 보면 이 세상 사람들도 다 분별이 됩니다.

어떻게 압니까?

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 사람들이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압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을 보고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헌금을 하는 것을 보고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사람도 보고 알고 지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다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영의 일입니까?

다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영의 일과 육체의 일도 구분을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육체로 하고 있고 그것을 이 세상 사람도 다 알 수 있는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영의 사람으로 영의 일을 하고 있다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영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지금은 하늘에 계십니다. 그것은 부활을 하셔서 신령한 몸으로 계시기 때문에 사람이 이제는 볼 수 없습니다. 이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야 주님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이렇게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져서 알게 되는 것을 영의 일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분명히 육신으로 오셨습니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보았습니다. 그리고 본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지금 알고 있습니다. 육신으로 오셔서 이 세상 모든 죄인의 죄를 십자가에서 지시고 죽으셨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본 것을 육신의 모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지금 성경을 통해서 성령의 감동으로 믿어지는 역사가 영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골로새서2:20-23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이미 이 초등학문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이라고 하니까 이 세상 어느 학문을 말씀하는 것으로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은 성경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는 그것을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입니다.

거의 다 세상 초등학문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목사들의 설교를 들어보거나 그들이 이제까지 낸 책들을 보아도 다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성도는 세상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알고 있는 지적인 것은 다 버리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 성경을 보는 순간 그는 무조건 다른 복음을 만들어 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초등학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지 않은 사람은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 안에서 복음의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소경이 되어서 그가 성경을 수백 번을 읽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갈라디아서6장10절을 보고 그것 역시 세상의 초등학문으로 만들어서 이 세상 사람들이 하고 있는 착한 일을 교회 안에서 하려고 열심을 내다가 그 행위로 저주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을 보면서도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으시기 바랍니다.

제가 성경을 볼 때는 분명한 원칙이 있습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이성적 지식은 버리고 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를 사전에서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는 가를 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초등학문에서 죽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폐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늘 율법으로 미혹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라도 붙잡고 맛보고 만지는 순간 그 영혼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의문에 순종하면서 자기 결국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쓰는 것은 다 부패로 돌아갑니다.

썩어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육체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썩어 없어진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너무도 소중하게 생각하면서 교회 안에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썩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모든 육체의 모양이 다 썩어 없어집니다. 십일조를 냈습니까? 그것 역시 썩어 없어집니다. 예배를 한 번도 안 빠지고 정말 신실한 신앙인으로 살았습니까? 그것도 썩어 없어집니다. 또 내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매일 성경을 읽고 그 지식을 쌓았습니까? 그것 역시 썩어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육체는 썩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육체에는 실제 육체도 있고 그리고 정신도 있고 마음도 있고 내가 신앙생활을 한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아니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수고한 것까지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이 모든 것이 다 썩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미 초대교회 안에서 사람의 명을 따라 가르침을 좇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면서 하나님을 진실 되게 믿는 성도라는 것을 보였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사람들은 지혜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와 과장된 겸손과 부질없는 금욕주의 따위로 지혜의 모양을 내고 있었지만 실상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배가 있습니다.

그리고 과장된 겸손이 있습니다. 과장된 겸손이라고 하니까 마치 우리가 알 수 있는 그런 과장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정말 겸손한 자처럼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 앞에 그 사람이 정말 겸손하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금욕주의가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다 사람의 이성으로 지혜 있는 모양이라는 말씀입니다.

실제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느 목사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겸손하게 보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볼 때 정말 겸손하게 보임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목사와 같이 보입니다. 그것이 지혜 있는 모양과 같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어느 목사는 너무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것에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속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지혜 있는 모양과 같이 보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도 세상적으로 볼 때는 정말 존경을 받을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모두가 존경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을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무 검소하게 살려고 하는 것을 과장되게 보이는 것 역시도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만 육체의 모양이 아닙니다.

자의적 숭배가 무엇입니까? 나를 스스로 숭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성도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성도가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적 숭배를 하고 있는 육체의 모양입니다.

자기 몸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이 있는데도 굳이 그것을 가지고 세상에서 착한 일을 하느라고 자기 몸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대표적으로 자기 몸을 괴롭게 하는 것이 새벽 예배도 해당이 될 것 같습니다. 새벽에 일어난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런 모양들을 보고 사람들은 참 지혜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의 모양입니다.

사람이 생각할 때 참 지혜 있는 성도와 같다고 생각이 되어 질 정도로 자기 육체의 모양을 내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히 어느 목사들은 가난한 자를 위해서 산다고 하면서 모는 일을 하는데 있어 그 일에 집중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세상이 볼 때는 착한 일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자기 본분을 망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목사가 그런 일을 합니까?

솔직히 일반 교인들에게 맡겨도 되는 것 아닙니까? 장로는 가르치는 자입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초대교회에서 믿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처음에는 여러 가지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후에는 그것이 자기들의 분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가르치는 일과 기도하는 일을 하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보았습니다.

목사가 차라리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자기 직분을 모르는 사람은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장로는 정말 영혼을 위해서 기도하고 또 성경을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일을 하고 있다면 그것이 사람의 보기에는 지혜 있는 모양과 같으나 아무 유익이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45쪽)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경건의 모양은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이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또 세상에 나가서도 식사를 할 때는 정말 경건하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행위도 다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경건하게 드려지고 있습니까? 예배의 형식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고 정말 누가 들어와서 보아도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찬양을 불러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은혜가 넘치는 표정으로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보면 천국에 들어갈 성도가 따로 없습니다.

신앙생활입니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은 다 경건의 모양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또 헌금을 정성스럽게 내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사실은 다 경건의 모양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또한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으로 하고 있습니까?

다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 한 가지라도 육체로 하지 않고 있는 것이 있습니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배의 형식이 이미 율법으로 되어 있는데 거기에서 어떻게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습니까? 사람의 말로 신령과 진정으로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이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그런 예배는 할 수 없습니다.

다 육체의 모양입니다.

할례만 억지로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 처음 나온 소자가 그 교회의 거대한 힘에 굴복이 되어서 그대로 따라하는 것 역시 억지입니다. 그 소자가 한 마디라도 물어 볼 수 있습니까? 자기들은 예배를 자유롭게 드리고 있다고 할지 몰라도 그 안에서 제가 한 가지라도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매 주마다 헌금을 받았습니까?

아니 예배를 할 때마다 누가 초대교회에서 헌금을 받았습니까? 제가 지금 교회에다가 매 주마다 하는 헌금을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소자가 교회에 나와서 그 예배에 참석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헌금을 하는데 그 소자가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다수에 의한 억지가 소자로 하여금 헌금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육체의 모양은 다 억지입니다.

사람들은 억지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나 다수가 그렇게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억지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절대 다수가 하고 있는 행위를 소자가 와서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할례만 억지가 아니라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절대 다수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억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양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형상이 다 모양입니다. 교회 안에서 겉으로 나타나는 모든 형상이 다 모양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할례만 육체의 모양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나타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육체의 모양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경건의 모양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모든 행위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제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식사를 하기 전에 다 기도를 합니다. 과연 그가 기도를 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처음에는 안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계속해서 교회에 나오면 기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자의로 한다고 생각합니까?

종교라는 다수의 육체의 모양을 따라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식사 기도를 하는 것 역시 경건의 모양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육체의 모양을 내려고 하는 자들이 이렇게 억지로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이 시대 교회는 모두가 다 율법주의자들입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는 수많은 율법들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할례만 억지로 받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수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이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있던 사람들을 그대로 따라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 억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하셨습니까? 율법을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저주를 받고 싶겠습니까? 교회에 나올 때는 하나님을 잘 믿어서 천국에 가고 싶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저주를 받게 하는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 소자가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먼저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먼저 있던 사람들을 따라 지키게 해서 저주를 받게 하는 모든 육체의 모양이 억지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소자는 축복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억지로 육체의 모양을 내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억지로 할례는 받게 하지 않고 있지만 저주를 받게 하는 또 다른 율법을 육체로 모양을 내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입니다.

마태복음5:11절을 보겠습니다. (신 5쪽)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할례를 왜 받게 합니까?

아니 율법을 왜 지키고 있습니까?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주님께서 악하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사람들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하다고 합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을 어느 누구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아니 교회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자기들이 정말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고 있는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을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심하게 핍박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였습니까?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악하다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정말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하는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참을 수 없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유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였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에서 사도 바울이 왜 고소를 당했습니까? 저가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한다고 해서 고소를 당해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습니까?

믿는 성도라면 반드시 먼저 율법을 폐해야 합니다. 만약에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 자체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부인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왜 핍박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산상수훈을 말씀하시면서 처음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부터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다는 것을 주님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핍박이 너희에게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핍박을 면하려고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할례를 받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율법주의자들로부터 핍박을 받아야 하는데 할례를 받음으로 해서 그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기 때문에 세상이 더 이상 핍박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옳습니까?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옳습니까? 지키지 말라는 것이 옳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당연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옳으냐 그르냐의 문제라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면서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옳다 내가 옳다가 아닙니다.

악하다고 하는 그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누가 핍박을 받겠습니까? 왜 초대 교회가 로마에 의해서 그렇게 핍박을 받았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악하다고 하니까 세상도 그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들이 많이 알려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편지의 말씀들을 많은 사람들이 보고 또 교회 안에서 실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 보고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 이 한 가지로 우리는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도 감사하게도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초대교회와 같은 핍박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핍박을 받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은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악하다 하셨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 역시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느냐 안 지키느냐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악하다고 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됩니다.

핍박을 면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례 한 가지만 받아도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됩니다. 십일조 한 가지만 드려도 그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됩니다. 사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을 해도 핍박을 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다 율법주의자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26: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33쪽)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을 행하여 대제사장들에게서 권세를 얻어 가지고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며 또 죽일 때에 내가 가편 투표를 하였고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심히 격분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을 때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심히 격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심히 격분을 했는가 하면 사도 바울 역시도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도들이 그 흠 없는 율법의 의를 악하다고 말씀을 하니까 하나님에 대한 열심으로 심히 격분해서 참을 수 없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는 것이 이해가 되겠습니까? 지금 아카데미 강의를 듣고 있는 성도님들은 성령이 오셔서 감동을 해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으니까 그것이 깨달아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이 율법을 누가 주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써서 주신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분이 나서 참을 수 없게 됩니다. 물론 일반 교인이라면 저런 이단이 있나 하면서 참을 수 있겠지만 사도 바울은 가말리엘 문하에서 촉망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켜왔고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악하다고 하니까 세상에 저런 이단이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와는 전혀 다릅니다. 초대교회 때는 종교가 그들의 삶이었습니다. 지금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워낙 치열하게 살다 보니까 그저 종교에 한 발 걸치고 있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도 하나의 사치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들이 삶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그들이 영생을 얻는 유일한 길입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이 율법을 통해서 깨닫고 있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지켜온 율법입니다. 자기들의 신앙의 전부가 율법인데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일반 백성이라면 몰라도 최고의 정통인 가말리엘 문하에 있는 사람이라면 격분을 하고도 남습니다.

얼마나 격분했습니까?

자기 나라에 있는 사람들만 핍박을 한 것이 아니라 외국에 있는 성에까지 가서 그리스도인을 찾아내서 핍박을 했습니다. 사실 좋은 말로 격분이지 사도 바울이 얼마나 화가 나 있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다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합니까?

이 세상 어느 국가도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느 종교도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육체로 의문의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다고 하면서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한 핍박입니다.

그 핍박을 피하는 일은 자기도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얼마나 많은 핍박을 가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할례라는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게 함으로 해서 성도가 받아야 하는 핍박을 면하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흠 없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지금은 국가의 권력이 세다 보니까 핍박을 가할 수는 없을지라도 아마 상종도 안 하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핍박을 주려고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은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님은 악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도들도 율법이 악하다는 것을 믿고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는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알면 정통이고 이단이고 할 것 없이 다 그리스도편지를 정죄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악하다고 주님이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핍박을 피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이 율법으로 인하여 오는 어떠한 핍박도 이겨야 합니다.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초등학문에 순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그것에 순종하는 순간에 그는 이 세상과 같이 됩니다. 성도는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할례받은 저희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로 할례받게 하려 하는 것은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할례를 받는 사람들 스스로도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여 자랑하려는 것입니다.”

율법

아마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사람들은 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율법으로 저주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아간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데 더욱 더 열심을 내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율법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미 초대교회부터 교회는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무너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들이 지키는 몇 가지 율법을 가지고 마치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처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을 가지고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그들도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지금 십일조를 내라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주일을 지키고 예배를 드리라고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들도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자기들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몇 가지 지키는 것 같은 모양을 내면서 교인들에게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를 받게 하는 저희도 율법을 지키지 못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누가 지킵니까?

우리 인생은 절대로 못 지킵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할례를 받았다 해서 그리고 십일조를 낸다고 해서 주일을 지킨다 해서 율법을 지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 인생들은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지켰습니까?

아직까지 아니 주님이 오실 때까지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기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다른 사람에게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오직 주님만이 지키셨습니다. 그 율법을 완전케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킨 사람이 없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십일조를 내라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분명히 율법입니다. 그렇게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그 역시도 십일조를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니 십일조를 하라고 하는 순간에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못했다면 그는 아무리 십일조를 했다 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드리면 뭐 합니까?

그 십일조를 드리는 순간 그는 율법을 범한 자가 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자기 믿음을 보이고 싶겠지만 그 십일조를 드리는 순간에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켜야 한다는 말씀이며 모든 율법을 우리 인생은 지킬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십일조를 철저하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드린다 해도 율법을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이미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그 생각부터 버리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7:52-53절을 보겠습니다. (신 199쪽)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스데반집사의 말씀입니다.

그는 단 한번 사도행전7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순교를 당했습니다. 그 마지막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습니까? 지키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은 분명히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집사는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는 문자 그대로를 지키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데 성경은 그렇게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율법을 보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를 잘 지켜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킨 것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사람들은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지켰다고 생각합니까? 자기가 실제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또 도적질 하지 말라는 율법을 보고 자기가 도적질을 하지 않은 것으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지켰습니까?

지금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자기가 실제 우상을 섬기지 않은 것으로 율법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은 자기가 받은 할례를 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육체로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그렇고 스데반집사도 그렇고 나중에 부름을 받은 사도 바울도 역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스스로 율법을 잘 지켰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살인자입니다.

도적질 한 자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하지 않은 자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살인도 하지 않았고 도적질도 하지 않았고 우상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모두가 다 범한 자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육체에 모양을 내서 자기 육체에는 할례의 흔적을 만들었지만 마음에 할례를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육체의 모양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 같았지만 그들은 마음에 할례도 하지 않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백성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할례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으로 믿는 일입니다. 육체에 할레는 받아서 표면적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 같이 보였지만 그들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이미 할례를 받으라고 육체의 모양을 내게 하는 그 자체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할례입니다.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면적으로는 할례를 마음에 받지 않았기 때문에 육체의 모양을 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켰더라면 그들은 절대로 할례를 받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미 할례를 받는 그 자체가 율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에 할례를 받습니까?

그것은 이미 그 자체로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할례는 어디에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신명기에서 할례는 마음에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하는 할례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당연히 육체의 할례를 하지 말아야 하는데 율법을 어기면서 할례를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할례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아니 십일조가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율법 613가지를 자기 육체로 하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까? 진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입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음으로 해서 율법을 육체로 지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완전케 하신 그 율법을 받아들여서 부한 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성경은 역설입니다.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 줄을 이 시대는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내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주일을 지키는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이 모든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은 마음에 할례를 받지 않아서 지키고 있다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되어서 저주를 받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십일조를 왜 내게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십일조를 냄으로 해서 자기들이 자랑하고자 함입니다. 교인들이 십일조를 내면 누가 자랑이 됩니까? 자기들이 교인들을 잘 가르쳐서 봐라 이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로서 십일조를 내고 있지 않으냐고 하면서 자랑하기 위해서 십일조를 내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솔직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율법을 잘 지키면 누가 자랑이 됩니까? 지금 이 시대 목사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인들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는가에 따라 그들의 자랑이 되고 있지 않습니까? 교회를 크게 짓고 있고 십일조를 많이 해서 우리 교회가 선교사를 많아 파송하고 있고 내가 이렇게 일을 많이 하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용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율법에 대해서 알았습니다. 교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누가 자랑이 되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됩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교인들이 율법을 잘 지키면 지킬수록 더 많은 일을 하게 되고 그것을 통해서 결국에는 자기들이 자랑을 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만 주시고 있습니다. 그 생명이라는 것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지키는 일이 다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육체로 지키는 율법은 사람을 자랑하게 하고 마음에 할례는 하나님의 자랑입니다.

율법은 자랑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랑은 다 세상을 좇아 온 것이고 아버지를 좇아 온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아야 그것이 자랑이 됩니다. 그러나 그 구원이라는 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지금은 자랑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시기 바랍니다.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에 할례를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지 않은 것이고 마음에 할례를 하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표면적으로 지키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것이고 율법의 이면을 알아서 지키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육체에 할례를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6: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4쪽)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육체의 모양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야고보서에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자랑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킨 그것이 허탄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내고 자랑하고 있습니까? 아니 십일조를 내고 간증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자기가 십일조를 낸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빙자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증이라는 모양을 빌려서 자랑하고 있는데 그것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그러한 자랑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 합니다

누구의 종입니까?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자기가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종이기 때문에 주인이 시키는 것을 잘 했다고 하면서 자랑하는 것 아닙니까? 율법을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그것을 간증하면서 믿음이 좋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좋은 것이 아니라 가장 악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를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교회 안에서 내 육체로 한 그 어떤 것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랑이 곧 저주로 돌아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사도가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자랑했습니까? 우리 성도는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의 종이냐에 따라 그 주인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율법을 자랑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일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것이 다 들어 있습니다. 내 생명의 구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자랑을 합니까? 내가 율법을 지킨 그것이 내 영혼의 구원에 조금이라고 관여를 했다면 자랑할 만합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성도라면 다른 것을 절대로 자랑하지 않습니다.

내 영혼의 구원입니다.

그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모릅니까?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죄를 지고 가셔서 의롭다 함을 받아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는 그들이 무엇을 자랑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낸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있고 율법을 지킨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율법을 자랑합니까? 허탄하고 악한 그것을 자랑하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욕을 보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아는 성도라면 다른 것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우리가 자랑할 것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자랑하고 싶어도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나를 구원했습니까?

율법의 행위입니까?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까? 내 생명이 어디로부터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율법은 저주를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자랑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나는 절대로 생명을 얻을 수 없습니다. 모든 성경이 이것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형을 당해야 하는 사람이 생명의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그가 무엇을 자랑하겠습니까? 자기 생명을 구원해 준 사람을 자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령이 오신 성도는 성경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왜 십자가만을 자랑하는가 하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해서 내가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자기의 생명을 누가 주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골로새서2: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 초등학문에서 죽었습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이 아닙니다.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교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대해서 전혀 죽지를 않았습니다. 세상이 나를 보면 나는 죽었고 또 내가 세상을 보면 세상이 죽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율법입니다. 지금 교회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율법이 죽었고 율법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에 대해서 그러다는 말씀입니다

말로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그저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고 말로만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내 쪽에서 보면 율법이 죽어야 합니다. 또한 율법 쪽에서 보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말로만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대로 살았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죽은 자이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 쪽에서 보면 내가 또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율법이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습니다. 죽은 자에게 무엇을 더 요구할 수 있습니까? 이렇게 죽은 자가 되어야 율법이 더 이상 우리 성도를 미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입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지구 자체가 율법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반드시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또 율법이 볼 때도 우리는 죽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는 율법이 더 이상 미혹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성경과는 너무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솔직히 말씀을 드리면 초등학생과 같이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국어도 모르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목사라고 하면서 성경을 보다보니까 이상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말씀 자체를 이해를 못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히브리어를 공부한다고 하고 있고 헬라어를 공부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국어만 알고 한글개역성만만 이해를 해도 성경의 반은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나머지 반은 정말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생명이 걸려 있는 너무도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육체의 생명이 죽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하든지 그 생명을 살리려고 노력할 것 아닙니까? 교회는 여러분을 구원하는 방주가 절대로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라는 교회에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성경에 가르쳐 주고 있는데 너무도 안일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영혼의 생명이 살고 죽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다수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다수가 광야에서 죽은 것 같이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또한 율법도 나를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강경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깊이 상고하면 율법에 대해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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