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너희는 귀를 기울리고 내게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45

윤주만목사 2016. 12. 30. 06:20

갈라디아서6:15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세상에 대해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또 세상도 나에 대해서 그렇게 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문제를 가지고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이 우리를 볼 때 또 죽은 자로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믿음이라고 하는 그 행위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죽은 자가 무슨 율법을 지킵니까? 사도 바울은 세상도 나를 그렇게 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보다 더 강한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율법도 나를 죽은 자로 보고 있다면 더 이상 율법에 대해서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사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세상 모든 국가와 종교가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국가의 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국가의 법은 지켜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는 아직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살아가고 있는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국가가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국가의 법을 안 지키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 국가에서 살면서 복음을 전하려면 국가의 법을 지켜야 합니다.

교회 안의 일입니다.

갈라디아서를 누구에게 보내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형제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세상과 교회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교회도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에 대해서 자기가 죽었고 세상도 자기를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성도는 죽은 자입니다. 또 교회도 성도를 보면 죽은 자로 취급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 거의 모든 교회가 다 율법주의로 간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 잠깐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주의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쪽에서 보면 율법이 죽었습니다.

그리고 율법 쪽에서 보면 내가 또한 죽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살지 않으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과는 너무 다르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은 교회 안에서 살아 있고 그것을 지키느라 모두가 짐승에게 경배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지혜가 없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교회는 그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벌써부터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는가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면 모두가 율법주의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도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어느 한 가지도 바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이 이렇게 우리에게 큰 글자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스스로 지혜 있는 척하다가 속고 있습니다. 사단이 속이기도 전에 스스로 속아서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 있던 그 갈라디아 교회도 율법주의가 들어왔습니다. 그 후로 교회는 2000년이 지났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것은 성경입니다. 이 성경이 다 기록이 되고 난 이후로는 하나님께서 더 이상 선지자를 보내시지 않고 있습니다.

더 이상 보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필요한 말씀이 이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을 보는 사람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실 이스라엘보다 더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압니다.

어느 교회가 진리를 전했습니까? 그리고 어느 목사가 진리를 전했습니까?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면 그들이 남겨 놓은 글을 보면 진리를 전한 자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양은 진리를 전하는 것 같았지만 다 다른 복음이었습니다. 어느 한 교회도 율법을 완전히 폐한 교회가 이제까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물론 있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표면적으로 보이지 않고 사라졌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에 대해서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죽었기 때문에 세상의 교회에서는 흔적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죽어 있는 그 교회를 누가 교회사에 기록을 했겠습니까? 아니 그들이 볼 때는 논쟁할 가치도 없는 이단이었을 텐데 누가 그 흔적을 남겼겠습니까?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세상은 우리를 보아도 모릅니다. 아니 우리 성도들을 논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어느 정도가 되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것을 악이라고 하는데 무슨 논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겠습니까?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모르면 그대로 사망입니다. 성경은 믿음을 가진 성도가 아주 적다는 것을 말씀은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셨다는 증거가 되기도 합니다. 이 은혜를 받은 성도는 더 이상 세상에 사는 자와 같이 살지 않고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할례를 받거나 안 받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끝까지 이 할례 한 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 할례 한 가지는 율법 중에서 할례를 대표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냥 단순하게 할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대표하는 것이 할례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 누가 할례를 받습니까?

더 이상 종교에서 할례를 받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나라 교회에서 할례를 행하지 않는 것을 모르셨겠습니까? 사실 할례 한 가지 율법이라면 우리는 갈라디아서를 볼 필요조차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 시대 어느 교회가 할례를 행하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가 이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의 문제라면 우리가 볼 필요도 없는 성경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이 할례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와는 상관이 없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일로만 치부를 하면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의 지혜가 자기들보다 부족해서 마치 할례라는 것에 미혹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이 갈라디아서를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그리고도 자기들이 지혜가 있다고 하고 있고 성경을 알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까지 겉으로 드러나는 목사들의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들은 지혜가 있어서 거짓 형제가 들어와도 할례를 받지 않았고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아서 율법주의가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신학자들과 목사들의 생각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 시간으로 갈라디아서 강해를 마치게 됩니다. 갈라디아서는 할례라는 율법을 가지고 말씀을 한 것이 아닙니다. 율법613가지 중에 사도 바울이 실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들어왔던 할례를 가지고 율법 전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하나님께 정성스럽게 드리고 있습니까?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할례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는 이 시대 교회에게 그리고 십일조를 내고 있는 이 시대 교회에게 복음과 다른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할례를 받는다 해서 여러분에게 어떤 유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또 할례를 받지 않는다 해도 유익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내는 것도 그리고 주일을 지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고 그것이 악이라는 것을 알고 하나도 안 지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왜 아무 것도 아닌 그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육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있어서 구원을 받는 그것이 중요하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이것을 지켜야 하니 아니면 안 지켜야 하니 하는 논쟁을 하는 그 자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율법을 안 지킨다 해도 내 안에 새롭게 탄생이 되는 영이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6:7절을 보겠습니다. (신 341쪽)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정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습니다. 그 육체 그것 하나 가지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가 어떻게 됩니까? 최초의 사람 아담의 흔적이 지금 남아 있습니까? 아니 성경에 아담이 한 일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인생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세상에 와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것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을 지킨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을 위해 선한 일을 한 그것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을 보겠습니다.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수고를 했습니까? 그가 한 수고 중에서 어느 것을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조금 냉정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말씀하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전도서에서도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수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가지고 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라는 그 형체를 가지고 갈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천국에 들어갈 때는 사도 바울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에는 육체의 사도 바울의 모든 것이 다 포함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예 알지도 못하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천국에 들어갈 때는 사도 바울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탄생이 된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들어갑니다.

거기에 사도 바울의 무엇이 포함이 됩니까?

그가 이 세상에서 성경을 기록한 것이 포함이 됩니까? 아니 그가 이방에 많은 교회를 세운 것이 들어갑니까? 아니면 그가 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이방에 복음을 전하려고 수고한 그것을 가지고 들어갑니까? 아니면 그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는 그 신앙을 가지고 들어갑니까?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의 부활에 대해서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이 세상의 사상을 교회 안에 그대로 가지고 와서 종교적인 지식을 가지고 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이 세상의 어느 것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무할례가 무엇입니까? 지금 이 시대 십일조가 무엇입니까? 아니 복음을 알고 십일조를 하지 않는 그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가지고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의 종자로 태어난 사도 바울은 이 지구에서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이 세상을 살았습니다.

정말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라도 가지고 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는 은혜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내가 무엇을 해도 아무것도 아니고 또 무엇을 하지 않는다 해도 그것 역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어떤 것도 천국에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영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복음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대로 살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가지고 가서 천국에 가서 이렇게 살았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가고 만나서 주님께 이야기를 한다고 말 합니다. 주님을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또 같은 믿음의 성도들을 만나서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이야기를 한다고 말 하고 있습니다. 천국도 모르고 영의 비밀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저 육체를 하나 가지고 왔습니다. 그리고 죽으면 그 육체는 썩어 없어집니다. 그 육체가 이 세상에서 한 일을 가지고 천국에 들어간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사도 바울보다 더 큰 일을 했다고 해도 아무것도 천국에 가지고 갈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은혜라는 말이 좋다보니까 은혜 받았다고 하는데 은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정말로 많이 있습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한 그 어떤 것을 가지고 간다면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습니다. 이 은혜를 모르기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들이 종교적 생활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3:2절을 보겠습니다. (신 279쪽)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 세상에서 복음을 전했습니까? 내가 전한 복음을 듣고 천하보다 더 귀한 영혼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제가 이 모든 일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주님께서 부탁을 하셨기 때문에 정말 이 세상에서 이것을 위해서 살아가야 합니다. 나에게 생명이 있다면 착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아닙니다.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고 있어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다 해도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3장의 사랑에 대해서는 이미 아카데미강의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강의를 보시면 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교회 안에서 하는 일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면 뭐 합니까?

그것을 안다고 해서 아니 그래서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그것을 여러분이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안다고 해도 천국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직접 보는 것에 비하면 이 세상 말로 조족지혈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천국에서 우리가 신령한 몸을 입는 순간에 우리는 상상도 하지 못하는 형상을 입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이 안 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내가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안 것이 그리고 그것으로 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천국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감히 생각도 못하고 상상도 못하는 신비한 일입니다. 우리 썩는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의 지식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썩는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썩지 않는 것이 어떻게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영원하다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우리 육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육체에 집착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이미 못 박았습니다. 못 박았다는 말씀은 이미 썩어서 없어졌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못 박아 죽은 것이 한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져가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례를 받았으면 뭐 하고 할례를 받지 않았으면 뭐 합니까? 우리 육체는 아무 것도 아니고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이 무엇입니까?

야고보서에서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안개가 성경의 모든 비밀을 알면 뭐 합니까? 그 모든 비밀을 알아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또 정말 내 의를 나타내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었으면 뭐 합니까? 믿어서 영생을 얻었다 해도 우리의 육체는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 안개가 아무리 아름다운 모양을 갖춘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태양이 강하게 비추면 그것은 다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있는 천국에서는 우리 인생의 그 어느 것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의 비밀입니다.

이 영의 일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안개와 같은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그 인생을 어떻게 하든지 나타내려고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 썩을 가지고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어느 것이라도 천국에 가져갈 것이 있다면 반드시 가져가야 합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세상의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는 말씀 그대로 천국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될 수도 없고 그렇다면 내가 이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해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자 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생이 무엇인가 하면 내 안에 탄생이 된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영의 신비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로서 난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께 로서 난자입니까?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 로서 난자입니까? 육체의 사도 바울은 아담의 종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체의 나 역시도 아담의 종자입니다. 이제 그 종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을 탄생을 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탄생이 된 그 영이 하나님께 로서 난자며 육체의 내가 하나님께 로서 난자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할례가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복음의 비밀을 알아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할례를 받았다 해서 그것을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또 할례를 받지 않은 그 믿음을 천국에 가져갈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기가 대단한 것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감동을 받아 할례를 받지 않을 수 있는 믿음이 있습니까? 그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그것 역시 자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는 것을 바라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을 내가 지식이 있어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지금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그것에 마음 빼앗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지금 살아 있다고 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미 우리 앞에 있던 사람들의 결말을 똑똑히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남긴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 지구가 멸망하는 그 날에 새 하늘과 새 땅이 내려오는 그 날에는 그것 역시 사라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정녕 죽어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인생들이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가서 그 열심을 낸 것을 가지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들을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5:21절을 보겠습니다. (신 44쪽)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비유입니다.

실제 이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우리를 보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비유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성경의 비밀을 알아서 할례를 받지 않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 해서 주님이 나에게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고 말씀을 하는 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들을 어떻게 봅니까?

마태복음25장의 3가지 말씀은 다 비유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보고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천국에 가서 실제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했습니까?

내가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기까지 한 일이 무엇입니까? 내가 다섯 달란트를 남기기까지 한 일이 있습니까? 성경을 모르기 때문에 비유를 모르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그 말씀만 보고 자기도 천국에 가서 주님을 만나서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생각하는 착한 일을 하고 있고 막연하게 충성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아서 달란트를 남겼습니까?

아니 할례를 받지 않아서 달란트를 남겼습니까? 내가 무엇을 해서 달란트를 남겼다면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이 말씀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명의 달란트는 주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나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생명의 달란트를 남길 수 있게 하셨습니다. 내가 한 일은 없고 성령의 역사로 내 안에서 믿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천국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으로부터 칭찬을 듣는 곳이 아닙니다. 그곳은 내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부활의 형상으로 변해서 영원히 축복을 받으면서 사는 곳입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한 어떤 일을 가지고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듣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이 천국입니까?

누구는 많이 했고 누구는 적게 했습니다. 이 세상에 내가 한 어떤 행위를 그대로 가지고 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또 그것에 따라 상이 다르게 주어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곳은 천국이 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영원히 살아야 하는 곳입니다 누구는 열 고을의 권세를 가지고 살고 누구는 다섯 고을의 권세를 가지고 영원히 산다면 그곳이 천국이 되겠습니까?

비유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 왜 사람들이 죄를 짓고 서로 싸우고 있습니까? 누구는 많이 가졌고 누구는 적게 가졌기 때문입니다. 많이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기 위해서 적게 가진 자를 약탈하고 있는 것이 이 세상 아닙니까? 그런데 천국에서도 그런다면 그런 천국이라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도 없고 굳이 가야 할 필요성도 없습니다.

영원한 지옥 때문에 겁이 나서 믿고 있습니까?

걱정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원한 지옥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종교인으로 살지 않으면 그냥 한번 죽는 것으로 끝이 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종교 사기꾼들에 의해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 어디에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 중에 산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요한계시록20장14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영원히 고통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왜 성경에 없는 말씀을 자기들이 지어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까? 그런 지옥은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물론 거짓 선지자들이 받을 벌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지옥에 가기 두려우면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말고 세상에서 그냥 사시기 바랍니다.

그럼 그것으로 끝입니다.

괜히 교회에 나와서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 저주를 받지 마시고 세상에서 편하게 사시기를 바랍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말을 듣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열심히 한 그 행위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영의 비밀을 모르고 그저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는 그 사람들이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복음의 비밀을 알아서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런 육체의 것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제 구원을 받은 성도는 오직 내 안에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만 있을 뿐입니다.

고린도후서5:16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

우리 육체는 반드시 무너집니다.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우리 육체의 것은 다 썩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저 인생으로 살다가 죽으려면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으면 됩니다. 지옥이라는 말로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사람들은 다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영의 일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천국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모두 다 지옥으로 보내 영원한 고통을 당하게 한다는 말에 겁을 먹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국이라는 어마어마한 아니 우리가 감당하지 못하는 그것을 주고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천국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의 형상으로 영원히 썩지 않는 것을 입혀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인생들이 안 받는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 모두를 지옥으로 보내 영원한 지옥에서 살게 한다고 믿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까?

아담이 범죄한 후로 우리 죄악의 종자는 영원히 살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썩어져야 합니다. 그런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우리와 함께 사시기를 원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 믿었다고 해서 지옥으로 다 보내 영원한 고통 중에 살게 하시겠습니까? 그럴 것 같았으면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범죄 했을 때 죽이고 그것으로 끝을 내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죽어야 하는 인생입니다,

아니 썩어 없어져야 하는 인생입니다. 그 인생들과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육체는 반드시 썩어져야 합니다. 그것을 다시 살려서 천국으로 데려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은 점도 흠도 없는 자만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하시기 위해서 영의 비밀로 하시고 있습니다.

육체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영으로서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영의 비밀에 대해서 이 시대는 너무 무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악의 종자인 우리 육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육을 통해서 영의 새로운 생명을 주시고 있습니다. 그 영의 새로운 생명이 점도 없고 흠도 없이 부활의 형상을 입고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한 축복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육체대로 알지 않습니까? 그 육체는 알아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 육체의 어느 것도 천국에 갈 수 없는데 그것을 알아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가 천국에서 만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부르는 찬송가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만나보자, 만나보자 천국에서 만나보자라는 찬송가를 즐겨 부르고 있습니다. 아니 누군가가 임종을 하면 장례식 때 이 찬송가를 꼭 부르고 있습니다. 사실 이 찬송가가 얼마나 진리를 외곡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납니까?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을 보고 아브라함의 품에 나사로가 있는 것을 보고 마치 아브라함과 나사로가 만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성경말씀을 보고 내가 부모와 만나고 자식과 만나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비유입니다. 비유라는 단어를 모릅니까? 모르면 사전에서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육체대로 알아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천국에 가서 내 부모를 만나고 내 자녀를 만나고 아니 지금 교회 안에서 복음을 같이 듣고 있는 성도를 만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생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천국에 가는 영의 일은 주님과 우리 개인과의 일대일의 역사입니다. 내가 주님을 믿음으로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서 그 영이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나와 함께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도 같습니다. 그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고 주님이 오시는 날이 부활을 해서 신령한 몸을 입게 됩니다. 그 신령한 몸은 지금의 형상에서 온 것이 아니라 썩지 않는 형상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서로 만나서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와 나 개인의 문제입니다

내 부모가 구원을 받고 내가 구원을 받고 내 자녀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설령 이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 해도 우리는 주님과 일대일의 관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도를 신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부모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고 나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고 내 아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입니다.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제부터는 우리가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대로 알아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내 부모를 그리고 내 자녀를 육체대로 알아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조금 냉정하게 들릴지 몰라도 성경에서 영의 일을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체로 알은 그것은 다 썩어 없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았습니까?

우리가 육체대로 알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대로 알았다는 말씀은 육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알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된 것은 주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사도들에 의해서 전파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육체대로 보지도 않았고 만나지도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육체대로 알았다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우리의 이성으로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복음을 듣습니다.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들었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이성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처음부터 성령이 오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들을 때는 사람의 이성에 의해서 듣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와서 복음을 전할 때는 육체대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서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이 아니라 진리의 성령이 인도를 하셔서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처음에는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성경에서 문자를 통해서 알다가 성령이 오시면 그때부터는 하나님의 역사로 알게 됩니다.

고린도후서5: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91쪽)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갈라디아서를 마치면서 율법에 대해서 우리 성도는 죽은 자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이렇게 오직 믿음으로 우리 성도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비밀입니다.

우리는 육체로 분명히 태어났습니다. 하지만 그 육체는 죄악의 종자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비밀을 통해서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을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것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새 것이 되었습니까? 우리의 육체는 썩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썩는 것으로 새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으로는 새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에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그리스도와 똑같은 영을 우리 안에 탄생을 시켜 주셨습니다. 우리 육체의 어떤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 것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나는 죄악의 종자고 또 죄를 지었기 때문에 천국에 들어갈 수 없고 이 세상에서 죽어 썩어 없어집니다. 그것은 어느 것이라 해도 새 것이 될 수 없습니다. 한번 더러워진 것은 아무리 그것을 다시 고친다 해도 새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불교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 육체의 어느 것을 새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실상은 불교를 믿고 있으면서 겉으로는 주여 주여 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한번 썩어진 것이 어떻게 새 것이 되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 교회는 불교가 되어서 자기 육체의 것을 새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성화가 되려 하고 있습니다.

새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의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늘로서 온 것이 새 것이 되고 그것은 절대로 더러워지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것은 새 것이라 해도 시간이 지나면 더러워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로부터 온 것은 영원히 썩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전 것은 지나갔습니다.

우리 육체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우리 육체가 아직 살아 있을지라도 성도는 그 육체를 이미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있고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사실 불교와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영의 비밀을 모르고 불교와 같이 자기 육체를 새롭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그것 말고는 사실은 불교가 되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영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체가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영의 말씀을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멀쩡하게 살아 있는 육체가 죽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고 있고 그리고 새롭게 지으심을 받은 영의 존재 자체를 이성으로 깨달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 더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사람은 이 새로운 피조물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새로운 피조물에 대해서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새로운 피조물을 사람들의 이성으로 설명을 하다가 스스로 올무에 걸려들고 있습니다.

설명이 안 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밝히 보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영의 일들은 믿음이 아니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안 믿어지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이 안 믿어진다고 해서 포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세뇌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반드시 먼저 율법을 버리고 믿음을 달라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고도 율법을 지키면서 지혜를 구하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법칙을 따라서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평화와 자비가 있기를 빕니다.”

이 규례입니다.

어떤 규례입니까?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에 대하여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씀은 하는 세상은 이 세상도 물론 어느 정도 포함이 될 수 있다고 하겠지만 율법에 대해서 내가 죽었고 율법이 나를 볼 때도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우리에게 준 규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전혀 이 규례를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단 한 가지의 율법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에 대해서 사도 바울은 분명히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복음에 대한 규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할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 아무것도 아닙니다.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런 것은 결국에는 다툼만 되고 서로의 이론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일이 되고 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무엇입니까?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내가 정말 주님의 은혜로 아니 성경을 많이 보다보니까 성경의 비밀을 알아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지혜 있는 자가 된 것도 아닙니다. 아니 설령 지혜가 있다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물론 먼저 율법을 버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행위를 통해서 내 의를 나타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씀 안에는 내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이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오직입니다.

다른 방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 외에 나타난 다른 한 의를 믿는 것이 성도의 믿음입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해서 내가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내 육체의 어느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이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습니다.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고 해서 내 육체의 어느 것이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 해도 우리 육체는 죄를 지었기 때문에 깨끗하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정립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문제를 바로 알지 못하면 사망에 이릅니다. 사람들이 자기 육체가 의롭다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을 두루 뭉실 넘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분명히 다 지고 가신 것은 맞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 육체의 것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믿는 성도는 새로 지으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규례입니다.

이 법칙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영이 새로 지으심을 받는 법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새로 지으심을 받은 영이 탄생이 됩니다.

이 법칙입니다.

세상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는 법칙입니다.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는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이 영의 말씀을 드리면 너무 어렵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니까 처음 그 말씀을 들었던 제자들이 어렵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는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이 있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육체의 일을 하게 되어 있고 영을 따라 사는 사람은 성령의 소욕을 좇아 영생을 얻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육체는 죽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영을 따라 사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사는 것이 영을 따라 사는 것인가를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 지으심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 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어 있는 성도만이 새로 지으심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된 성도는 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무할례도 아무것도 아니고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만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나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의 나는 썩습니다.

그 썩는 것을 가지고 나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나입니다. 이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는 내 육체가 은혜를 입어서 새로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죄를 진 내 육체를 긍휼히 여기심으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하늘의 법칙입니다.

영의 신비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버리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규례는 다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살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이 규례 밖에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영의 일이 대해서 너무 무지합니다. 영의 일을 말씀을 드리면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너무 어렵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말씀을 듣지 않고 육체를 따라 살아왔기 때문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육체의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고린도전서15:4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3쪽)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육의 몸으로 심었습니다,

그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삽니다.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있기 때문에 아니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 수 있습니다. 우리 육체를 전적으로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이 육체를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육체는 아담이 죄를 짐으로 해서 모두가 죄악의 종자가 되어서 죄를 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육체를 우리에게 왜 주셨는가 하면 이 육체를 통해서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이 육체가 없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도 알 수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니 율법대로 살려고 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이 육체가 있어서 그것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우리 육체가 없다면 신령한 것을 심을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는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 하면서 세상과 같이 믿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통해서 신령한 것을 심어서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아야 하는데 육체를 통해서 육체를 위해서 심어서 그것이 다 썩어 없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죄악의 종자를 통해서 그 은혜를 주시고 있지만 그 죄악의 종자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체로 태어난 이유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를 통해서 신령한 것으로 다시 살기 위해서입니다. 죄악의 육체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 지으심을 받아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은 영의 신비로운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은 이것을 받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영의 규례대로 살게 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서 그 소욕을 따라 새로 지으심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을 우리 안에 탄생을 시켜 주셨습니다. 육체와 같이 썩어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 영이 신령한 몸을 입게 되는 그 날에는 하늘의 천사보다 더 신령한 몸을 입어서 그 천사도 우리의 다스림을 받는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간다는 말씀입니다

이 규례를 알고 있습니까?

그리고 규례를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성도가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입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새로 지으심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평강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영원히 썩지 않은 생명이 있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썩어지는 육체가 어떠한 고난을 당하더라도 내세를 바라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제부터는 아무도 나를 괴롭히지 마십시오. 나는 내 몸에 예수의 상처 자국을 지고 다닙니다.”

사도 바울이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이제 갈라디아서의 강해를 마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똑같은 말씀을 여러분에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받은 것을 함께 받은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받은 것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고 우리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았습니다.

이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율법을 완전하게 폐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기록한 성경 어디에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정말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이 복음을 이방에 전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는 성경을 보면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괴롭게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는데 율법주의자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들어와서 할례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 할례 한 가지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한 그것이 다 헛되게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

얼마나 쉽게 사람들이 다른 복음에 빠지는 가를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전했는데도 거짓 형제들이 들어오니까 속히 다른 복음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해야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 율법 때문에 사도 바울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말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는 아직 까지 이 율법의 문제가 명확하게 정립이 되어 있지 않아서 사도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 그 율법으로 괴롭게 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얼마나 괴로운 일입니까? 그것을 은혜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데 그것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이 이방인들을 괴롭게 했고 사도 바울은 또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괴롭게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기록한 갈라디아서를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이 시대에 있어 교회들을 보았다면 괴로운 것이 아니라 침통해서 견딜 수 없었을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율법은 괴롭게 합니다.

복음을 가진 자들을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한 모양이 교회 안에 들어오면 그 율법을 없애기까지 얼마나 괴로운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갈라디아서를 다 안다고 해서 그들이 율법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성경 전체를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합니다. 왜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가를 가르친다는 것이 하루아침에 될 일입니까?

그리스도편지의 설교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 많은 설교가 율법을 폐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많은 말씀을 보고도 율법을 폐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이 아카데미 강의를 듣고 있다면 그들을 다시 처음부터 복음을 가르친다면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물론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합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그 일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할례라는 그 율법 하나 때문에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이 헛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헛되게 된 사람들을 다시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도 괴로운 일입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낫습니다.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 같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율법에 미혹이 되어서 다시 가르쳐야 한다면 쉽게 돌아올 수 없습니다. 해산의 수고가 배가 더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하셨지만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습니다. 그렇게 율법주의에 빠진 사람이 복음을 듣고 회개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너무도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심각합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지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시대는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또 믿음으로 한다는 말을 함으로 해서 그것이 믿음으로 변해 있습니다. 거기에 은사까지 더해져서 괴로운 것이 아니라 절망적이라고 해야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율법의 행위로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할례가 처음으로 들어왔습니다. 그것이 너무도 사도 바울을 괴롭게 했습니다. 오죽하면 사도 바울이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그러면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15: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13쪽)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나를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할례라는 율법 한 가지로 사도 바울이 괴롭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할례 문제로 결론이 안 나서 예루살렘에 사도 바울이 갔습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율법에 대한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으니까 할례도 받게 하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말을 하고 난 후에 주의 형제 야고보가 다시 일어나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괴로운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이 전혀 괴롭지가 않습니다. 바리새파와 같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은 괴롭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들에게는 율법이 괴롭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그 율법이 얼마나 괴로운 것인 줄을 깨닫지를 못하고 지금도 바리새파와 같이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복음을 듣고 믿으면 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율법을 지키게 하면 얼마나 괴로운 일이 됩니까? 이 괴로운 일 때문에 사람들이 교회에 나오는 것을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어떻게 생각합니까? 십일조 그 문제 하나로 교회에 나오는 것을 꺼리고 있습니다.

왜 괴롭게 합니까?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아무 영향을 주는 것도 아닌데 사람들이 율법을 가지고 괴롭게 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괴롭게 하는 것으로 주님이 오실 때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 불과 유황 못에 들어가 밤낮 괴로움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괴롭게 하는 그것으로 나중에 자기들이 받을 괴로움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괴롭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사람을 괴롭게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전해서 그가 영생을 얻게 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는 살아 있는 동안에 율법의 행위를 하게 함으로 해서 괴롭게 하고 있고 또 죽어서도 거짓 선지자가 되어서 밤낮 괴로움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오죽 하면 사도 바울이 이제는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정말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말씀을 보다가도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가슴이 답답합니다. 정말 어제까지도 잘 따라오던 사람 같은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율법주의 교회로 들어가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괴롭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괴롭게 하는 일입니다. 또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괴로움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정말 해산의 수고를 해서 복음을 전했는데 그가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괴롭습니다. 그가 차라리 세상으로 가면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가 받을 괴로움을 생각하면 답답한 마음을 지을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289쪽)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능력의 심히 큰 것이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입니다.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흔적이라고 하니까 어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말씀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 그런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실제 공동번역에서는 낙인이 찍혔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흔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체험이 아닙니다. 이 시대 자기들이 은사를 통해서 체험하는 그것을 가지고 흔적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가 체험을 한 은사를 마치 자기 믿음의 증표나 되는 것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체험을 한 것을 가지고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겉에 있는 흔적이 아닙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저 문자에 사로 잡혀서 자기 이성으로 알고 있는 그대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다가 이스라엘이 저주를 받은 것을 성경을 통해서 빤히 알면서도 이 시대 역시 성경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도 흔적을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흔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썩어 부서지는 그릇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질그릇에 보배를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보배를 가진 것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흔적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흔적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 역시 우리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해져야 합니다. 이 보배를 내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우리 안에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내 안에 보배를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미 복음이 사라진지가 오래 되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까?

미국의 선교사들이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했습니다. 이미 그때부터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미국의 선교사들의 수고를 전부 폄하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압니다. 그들은 분명히 세상 적으로 볼 때 우리나라에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우리가 보는 한글개역성경입니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번역이 되어서 지금 우리가 보고 이 성경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우리에게 고마운 일을 했다는 것은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우리에게 복음을 전했다고는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보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도 지키지 않았을 때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우리 몸에 가질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해당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모든 것을 다 버리셔야 합니다. 특히 율법은 단 한 가지라도 우리에게서 모양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시대는 율법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종교가 되면서 그 종교 안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모양도 다 악하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우리는 육체의 모양을 가능한 다 버려야 합니다.

율법은 악합니다.

왜 악한가 하면 우리를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모양을 갖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보배를 가져야 합니다. 그 보배가 우리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의 흔적입니다.

그것은 육체에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 흔적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우리 안에 있습니다. 그 흔적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입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이 사도 바울과 동일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세상은 이것을 알지도 못 합니다. 아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도무지 이해 못하는 영의 신비로운 일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여러분에게도 성령이 오셔서 소욕을 따라 이 생명을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6: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찌어다 아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제 갈라디아서를 마치려 합니다.

저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진심으로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학벌이 좋고 문벌이 좋은 사람이 많이 있고 또 큰 교단에 속해 있는 목사들도 참 많이 있습니다. 또 신학을 공부해서 박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어떻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있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있습니다. 저는 늘 성경을 해석할 때마다 이 말씀이 저를 감동해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미련한 것을 택하셔서 세상에서 지혜 있다고 하는 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땄다고 자랑하는 그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에게 이 영의 비밀을 깨닫게 하시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한 규례를 행하게 하는 일은 오직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놀라운 비밀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있는 자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주시는 영의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 놀라운 비밀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이 영의 비밀을 우리가 듣고 믿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의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아니 내 육체의 모든 행위를 버려야 합니다.

율법을 버리는 것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그 안에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의 생명을 얻기 위해서 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있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서 천국의 성도가 되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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