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26

윤주만목사 2016. 12. 9. 06:26


갈라디아서4:8절을 보겠습니다, (신306쪽)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성도는 종이 아닙니다.

무엇에 대해서 종이냐면 율법에 대해서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에 종노릇하였습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 무엇인가 하면 법을 잘 지키고 의롭고 선하게 산 사람이 좋은 곳에 가고 또 더 많이 한 사람이 그곳에 가서도 더 좋은 것을 누린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선하고 의롭게 산 그들을 부자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것이 도리어 악이 되어서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하고 법을 잘 지키면서 의롭게 산 사람이 지옥의 저주를 받고 법을 지키지도 않은 그 사람이 천국에 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세상 사람들뿐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말씀을 할 때는 물론 세상을 말씀하는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세상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을 어떻게 가고 또 천국이 어떤 곳이라는 것을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왜 지극히 적는가 하면 이미 교회라는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부자가 되어 있어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천국에 간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종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지만 그들은 율법의 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스스로 종이 되는 것을 기뻐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이 세상의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는 법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또 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배워왔고 그렇게 행동을 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이 율법을 하나씩 지켜 나갈 때 마다 마치 믿음이 더 좋아지는 것같이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람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사상을 그대로 교회 안에 가지고 와서 성경을 보다 보니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수많은 행위들을 보게 되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을 하면서 자기가 할 수 있는 행위들을 하면서 세상 사람들과 차별을 두고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표징으로 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할례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안식일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는 십일조가 되어 있고 주일이라는 날이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내가 이레에 이틀을 금식하고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에게 기도를 하고 있는가 하면 바로 사단입니다. 율법의 종이 되었다는 것은 마귀의 자식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종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어느 한 가지라도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아니 율법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 성만찬을 하고 있습니까? 이 모두가 종이 되었기 때문에 하고 있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만찬이라는 것도 교회가 종이 되면서 생겨난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을 지킬지라도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진리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아서 자기가 저주를 받는 행위를 하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아들이 되어야 합니다.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생들이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것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들을 속량 해 주신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자기가 저주 아래서 속량이 되었다고 믿는 성도가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버려야 합니다,

아니 행위의 한 모양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고 있는 하나의 행위가 나를 부자로 만들고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무심코 하고 있는 그 행위가 나를 부자로 만들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영의 일을 믿는 성도지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습니다.

영의 일을 믿습니다,

영의 일이라고 하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육의 일입니다, 영의 일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해 주신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 아래 있는 우리를 값으로 사셔서 자유하게 해 주신 것이 영의 일이고 그것을 믿는 성도를 갈라디아에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도 일을 합니다.

그리고 아들도 일을 합니다, 그러나 종은 육신의 행위를 통해서 일을 하고 있고 아들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아 믿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두 사람이 교회 안에서 일을 하지만 하나는 저주를 받고 하나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주도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천국의 축복을 받는 사람보다 지옥의 저주를 받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 많은 정도가 아니라 거의 모든 사람이 지옥의 저주를 받고 있고 아주 적은 소수만이 천국을 유업으로 얻습니다, 내가 누구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잘 분별해서 천국의 축복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예표입니다.

아주 적은 숫자가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정통이라는 거대한 종교에 빠져 자기들이 다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교회에 나오지 않은 세상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있으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는 그 유업은 인생의 이성으로는 설명이 안 되는 상상을 초월하는 곳입니다, 요한계시록에서 신부가 남편을 위해 단장한 것 같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고 아름다운 신부가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단장했을 때를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천국은 우리가 반드시 가야 합니다, 이 천국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을 버려야 합니다, 율법의 행위를 모두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으로는 의인이 없기 때문에 믿음의 방법으로 우리 인생들을 의롭다 하시고 천국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반드시 저주를 받게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지도 못하고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율법 외애 나타난 한 의를 우리는 믿고 있고 그것이 내 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롭게 된 성도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성도들에게 이 믿음의 비밀을 주시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본디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을 하였지만,”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속량을 해 주셔서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노릇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하였습니다.

호세아6:6절을 보겠습니다. (구 1261쪽)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러나 그 때에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지 못 했습니다.

물론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는 이방의 교회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두에게 다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정말 이런 말씀들을 기초로 삼고 있어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기초가 되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바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애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시고 있고 또 우리도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 가를 잘 알아야 우리가 그것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고 또 원치 아니하시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잘 알고 있어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하는 성도가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반쪽짜리 사랑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저 사랑이라는 말씀이 나오면 자기들이 세상을 사랑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가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안 됩니다,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사랑하시는 줄을 모르고 있고 그 사랑이 내 안에 어떻게 있는 가를 모르면서 그저 사랑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랑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데 내가 이웃을 사랑해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또 이웃 사랑도 그렇습니다, 그저 육체적으로만 사랑하려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육체적으로 사랑하는 그것을 종교적인 행위로 하면서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맞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라는 종교는 사랑의 종교가 맞습니다.

하지만 사랑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사랑도 모르고 있고 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도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육적인 것으로만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결국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제사에 빠져 있었습니까?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에 배가 불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나 마당만 밟을 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입니다.

성경은 현재진행형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렇게 했습니까? 이제까지 교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가 지나가면서 교회는 급속하게 타락을 했다는 증거가 바로 유럽에 세워져 있는 교회라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 한국 교회가 그것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교회 건물도 제물입니다.

그리고 예배도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얼마나 많은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까? 이스라엘보다 더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지 시대 교인들이 부르는 찬송의 제사가 하나님을 이스라엘보다 더 배부르게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믿음이 좋은 것으로 생각하고 더 은혜롭게 부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일들을 합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제사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할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를 성경에서 찾아보면 되는데 그저 문자적으로만 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을 드리는 제사를 안 드리니까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더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제사에 미쳐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에 배가 불렀다면 이 시대는 수도 없이 많이 드리고 있는 예배와 그리고 기도와 찬송으로 그리고 헌금으로 그리고 교회의 건물로 하나님께서 배가 부르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제사에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내 육체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그런 것을 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는 점점 더 제사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니 제사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고 말을 합니다,

성경을 왜 그렇게 모릅니까?

이렇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과 원치 아니하시는 것을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참으로 신기하게도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제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아니 종교적인 모든 행위가 다 제사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을 누가 갑니까?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 내가 제사를 원치 아니하고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더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시대 역시 제사를 드리면서 그것을 보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면서 제사에 더욱 깊이 빠져 있습니다.

모릅니까?

그것이 제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일부 목사들은 그것이 제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하고 있습니다, 이미 종교 안에 깊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 해 오던 제사를 하지 않으면 자기가 더 이상 목사로서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계속해서 제사를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제사를 더 이상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성도가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지키라고 해도 안 지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이며 설령 안다 해도 그것이 얼마나 큰 악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율법을 그저 성도로서 의롭게 살아가는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들로 인하여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있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다 제사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제사라고 하니까 양을 잡아서 드리는 것만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도 제사지만 이 시대는 그 제사가 예배로 들어와 있고 찬송으로 들어와 있고 기도로 들어와 있고 또 헌금으로 들어와 있고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로 들어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하면서 천국에 가기를 바라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일만 해도 천국에 가는 것은 정말 은혜인데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차가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해야 합니다.

기도도 해야 합니다, 제가 그것을 무조건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이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해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시면 그렇게 하면 됩니다.

하나님을 압니까?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로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성도와 같이 보인다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지옥으로 간다는 것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하나님을 자기들이 아주 잘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원치 아니하시는 일만 골라서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아들의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시기까지는 다 하나님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들의 영이 언제 오시는가 하면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주님이 속량 하셔서 그것이 내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로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아들이 영이 우리 마음 가운데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17:3절을 보겠습니다. (신 177쪽)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영생입니다,

유업을 이을 자입니다, 반드시 영생을 얻은 성도만이 유업을 이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방법입니다,

다른 것으로는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 나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 아는 것을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면 믿을 수 있고 그 믿음이 있는 성도는 의롭다 함을 받아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면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한다는 말씀입니다,

왜 율법의 종이 됩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의 손을 빌어 반포하셨다고 해서 그 율법을 하나님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습니다,

율법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율법이 하나님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의 종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아주 열심을 내고 있고 그것이 저주를 받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이 아닌 것에 종이 됩니까?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모든 것이 다 가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생명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생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사실 평생을 이 일만 해도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알아가는 것만 해도 우리 청년의 시간이 다 지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광야 사십년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교회 안에서 청년의 때를 보내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그 청년의 때에는 정말 하나님을 아는 것에만 온 마음을 다 써야 합니다, 그렇게 해도 우리는 시간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제사를 드리고 있어서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그 아까운 시간을 허비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제사에 빠져 있습니까?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에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그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면 그 많은 제사의 시간을 허비하지 않고 이 일을 열심히 할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에 빠져 있는 이 시대는 율법에 의해서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고 그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속고 있습니다.

청년의 때입니다.

그 시간을 아깝게 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본질을 잃어버리고 본질이 아닌 것에 열심을 내면서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거대한 짐승이 되어 사람들을 제사에 빠뜨려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예배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이 시대 교회에서 드리고 있는 예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과 함께 했던 그 예배를 지금 이 시대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배를 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저 종교적인 의식으로 그 예배 안에는 수많은 율법들이 있는 그런 예배를 드리면서 자기들이 예배를 하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시간을 아까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예배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가 유일하신 참 하나님의 사랑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감으로 해서 영생을 선물로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배를 하는 성도는 제사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고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고 있습니다.

호세아5:4절을 보겠습니다, (구 1260쪽)

“저희의 행위가 저희로 자기 하나님에게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

이스라엘은 이방의 예표입니다

그들을 통해서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잘못한 것을 마치 그들의 일로만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 일들이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저희의 행위입니다.

그 행위가 저희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나니 이는 음란한 마음이 그 속에 있어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까닭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니까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아니 제사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종교는 그들의 행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일들을 하고 있습니까? 예배만 하더라도 일주일에 보통 10여 차례가 되고 있는 그런 상태에서는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

저희의 행위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입니다. 그 행위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 행위로 인하여 그 마음이 음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음란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도 잘 믿고 또 율법도 잘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참 좋은 것 같지만 성경은 그것을 음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 버리시기 바랍니다.

정말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가능한 모든 행위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제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복음을 전하는 일까지도 하지 말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의식화 되어 있고 율법화 되어 있는 모든 행위를 반드시 버려야 합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입니다.

행위가 우리를 종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은 율법을 가지고 이스라엘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에 의해서 종이 되어 있다는 것을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데도 이 시대는 이스라엘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마귀의 자식입니다.

율법의 종이 되는 순간 마귀의 자식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게 이 말씀을 하면서 너희가 그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하나님이 아닌 것들에게 종노릇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그때에는 하나님이 아닌 율법에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복음을 듣고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기 때문에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아 더 이상 율법에 의해서 종노릇 하지 않고 자유 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더러 하나님의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지금은,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알아주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되돌아가서, 또다시 그것들에게 종노릇 하려고 합니까?”

사도 바울은 이방의 교회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이 하나님을 알았습니다. 호세아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알기에 힘썼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힌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는 그 말씀대로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의 행위를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라고 한 것이 있습니까?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철저하게 율법을 폐하고 오직 하나님을 아는 것을 전했습니다. 자기 속에 계시가 된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전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보면서 행위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서 가르쳤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혹시라도 거짓 형제에게 미혹이 될 것을 늘 염려를 했습니다. 복음을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은 사람들이 얼마나 쉽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고 율법에 대해서 강하게 경계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에베소교회를 떠나면서 하는 말을 사도행전에서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가르치면서 정말 그들이 영생을 얻기를 바랐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떠나고 나면 이리가 와서 양 때를 무참하게 잡아먹을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었습니다, 또 그것은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신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도 나를 아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대통령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나라에 사는 사람이라면 대통령이 누구라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통령이 나를 아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을 안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신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43: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19쪽)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구속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알기 전에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신 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내 것이라

성도는 이미 태중에 있을 때부터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셔서 아신 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셔서 우리를 알고 계십니다, 그렇게 아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나를 짓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나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알고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은혜가 아니고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나를 아시겠습니까?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은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야곱을 창조하시기 전에 부르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그렇게 부르셨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받을 성도를 미리 아시고 부르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는 은혜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너를 아시는데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 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 하려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안타깝게 이 말씀을 하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정말 그 당시 예수가 누군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의 성도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고 믿었고 하나님께서도 너희를 아신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세상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초등학문이 무엇입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할례라는 것이 들어왔습니다. 그 한 가지 율법으로 인하여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고 하나님께서도 아신바 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유대에 있는 거짓 형제들이 들어와 할레를 받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쓴 서신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사람들이 복음을 들으면 처음에는 아주 기뻐합니다, 그런데 율법이 하나만 들어와도 참지를 못하고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기 때문에 해당이 안 되겠지만 이 아카데미를 통해서 그래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와서 복음을 들었지만 안타깝게도 미혹을 이지지 못하고 세상 초등학문으로 돌아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탄식의 소리입니다, 복음을 전하면 듣고 믿는 것 같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때로는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 같이 너무도 기뻐하면서 교제를 하다가도 다시 율법주의로 돌아가는 것을 볼 때마다 안타깝기만 합니다,

차라리 듣지를 않는 것이 낫습니다.

성경에서 분명히 너는 내 것이라는 말씀을 보고 너무도 기뻐합니다. 그런 그들이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보다 나중 형편이 더 심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다가 이제 복음을 들으니까 너무도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주의를 가지고 있는 거짓 형제가 들어와 미혹을 하면 너무도 쉽게 넘어가고 있습니다,


골로새서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노략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는 짐승이 되어서 성도들을 노략하고 있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철학이 무엇입니까? 인간이 살아가는 데 있어 중요한 인생관을 철학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이렇게 철학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는 거의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철학입니다,

그것은 인생의 가치를 가장 높게 형성하는 사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철학에 빠지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도 실제 이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나중에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가 된 사람들이 참 많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배웠습니까?

인생의 가치를 생각하고 인생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배웠습니다, 그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신학을 공부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너무도 불을 보듯 빤한 결과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목사가 되면 무엇을 가르치는가 하면 도덕을 가르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입니다.

거의 철학이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린 말이 아닙니다. 결국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추구하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는 사실 불교와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불교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 있고 거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만 추가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철학입니다.

불교의 경전이 철학이고 논어와 공자가 철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책들이 무엇을 이야기 하고 있는가 하면 사람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최고의 지성에 이를 수 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철학을 이야기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렁이 같은 야곱아

나는 벌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렁이에게 무슨 철학이 있고 벌레에게 무슨 철학이 있습니까? 그저 이 세상에 나와서 자기 정욕대로 살다가 죽는 것입니다, 인생이 그렇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면서 철학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정의입니다.

우리는 벌레입니다, 그리고 지렁이 같은 사람입니다, 철학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지렁이가 지식이 어디 있고 지렁이가 인격이 어디 있고 지렁이가 겸손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 철학이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신앙은 나를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됩니다, 나를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다 거짓에 불과하고 스스로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우리를 그렇게 정의하고 있다면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철학이 들어와 인생의 가치와 존엄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이 세상의 철학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낮아지시기 바랍니다.

한 없이 낮아지는 사람만이 주님께서 나를 높여 주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종교가 되면서 이러한 철학이 들어와서 자기들의 가치를 높이고 존엄을 이야기 하다 보니까 그런 행위들이 교회 안에 만연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습니까?

그리고 의롭게 살 수 있습니까? 이것이 철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끊임이 없이 연구를 해서 경지에 오르려고 하는 것이 철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것을 우리에게 요구하지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사도 바울은 철학에 노략 당할까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좋습니다,

누가 철학을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위대한 철학자들의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인생의 가치를 어떻게 하면 높일 수 있을까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책들을 보고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철학이라는 것은 결국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경지에 어떻게 하면 오를 수 있는가를 각자의 방법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나쁘다고 합니까?

인생을 보고 지렁이 같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심한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과는 다시는 이야기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딴에는 철학을 배워서 인생의 높은 경지에 오르고 싶어 하고 실제 그것을 위해서 추구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지렁이 같다는 말을 하면 얼마나 듣기가 싫겠습니까?

진토입니다.

그리고 썩어 없어지고 맙니다, 철학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람은 이름을 남겨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다 그 가치가 있어서 났으니까 이제 사람답게 세상에서 산 흔적을 남기고 인류의 발전에 공헌을 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그런 사람이 후세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니 헛되고 헛되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헛되면 전도서에서 계속해서 헛되다는 것을 말씀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주님께서는 솔로몬의 모든 영광이 들에 피어 있는 백합화 하나만도 못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인생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어떤 존재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겉을 회칠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겉을 회칠해보아야 그 속은 죽은 시체가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철학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상에서 패러다임이 있지 않으면 그는 절대로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없습니다.

가식입니다.

그리고 모양을 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이 세상 철학에 그대로 속고 있습니다, 교회가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철학을 추구하느라 진리에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런 철학을 더 고상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사람의 가치를 높이고자 하는 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을 논하는 자체가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국가, 사회, 종교가 다 그것을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답게 사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그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지렁이 같은 야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렁이 같이 지었으면 지렁이 같이 살아가는 것이 바른 모습입니다, 그 지렁이가 얼마나 고상하게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런 생각이 철학이라는 말씀입니다.

초등학문입니다.

그런 철학을 가지고 고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가장 고상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철학에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가 얼마나 철학에 깊이 빠져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특히 철학을 공부한 사람들이 신학을 공부하면서 사람의 이성으로 이 성경을 보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철학을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디도서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0쪽)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이 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헛된 속임수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의 다툼입니다. 그러니까 이 율법은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다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율법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우리가 문자 그대로 보고 있는 그 율법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하니까 세상 학문을 배우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그렇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배우는 것이 이 세상 초등학문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배우고 있는 성경적 지식이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물론 세상에서 배우는 것도 초등학문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에 대한 다툼입니다, 그런 율법에 대한 다툼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가지고 다툼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정통과 이단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이단 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런 이단들과 정통과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바로 율법에 대한 다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안식일 교회를 이단이라고 합니까?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기 때문에 이단이라고 합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안식일 교회는 안식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다툼을 하면서 서로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어느 정도로 율법에 빠져 있고 그 무익한 것을 쫓아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심지어는 예배 시간에 사도신경을 하고 안 하는 것으로 이단이라고까지 규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 다 이단입니다,

율법의 다툼을 하고 있다는 그 자체가 이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폐하여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해서 이제 율법은 끝이 났습니다.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이 세상 초등학문적인 율법은 끝이 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다툼 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그 자체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물론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미를 알면 절대로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이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세상 사람이 이것을 보고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아래 있는 우리를 속량 해 주셨다는 것은 모릅니다. 아니 그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내가 속량을 받아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초등학문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이 세상에서 공부를 많이 한 스님이 성경을 보았을 때 그대로 아는 것은 다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십계명을 보았는데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서 그래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구나 하면서 너무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지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나 다 압니다. 아니 초등학교에 다니는 어린 아이도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아!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구나 하고 그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초등학문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다툼을 피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것은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 초등학문이 교회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그것도 목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이 세상 초등학문을 교회 안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세상 초등학문을 좇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분명히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죽고 사는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이 세상 초등학문이고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정말 안타깝게도 율법을 너무 많이 지키고 있습니다.

무익합니다,

헛된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든지 지키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이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골로새서2: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을 보고 육체적으로 살인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영적으로는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저주에 빠지게 만들어서 살인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정말 명확하게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저 문자적으로만 보다보니까 도리어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누가 더 율법을 잘 지키는가를 경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율법을 잘 지킨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서로 칭찬을 하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그것에게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눈물로서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듣고 믿는다고 했다가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가 와서 할례를 받으라고 하니까 할례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할례를 주장하고 받는 것이 이 세상 천한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 평생에 한번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사실 율법이라고도 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 한 가지로 인하여 갈라디아서를 써서 서신을 보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할례를 받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어찌하여 약하고 천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저희에게 종노릇하려고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강경합니까?

단 한 가지의 율법 아닙니까? 그런데도 사도 바울은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순간 그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주를 받기 때문에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아서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시 의문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아래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을 하는데 자기가 이방에 복음을 전한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시 의문에 순종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너무도 안타까웠던 것입니다,

다시 종이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교회에 종이 안 된 교회가 있습니까? 솔직히 제가 보는 한국교회에서 종이 안 되어 있는 교회는 아직까지 못 봤습니다. 아니 한국교회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거의 모든 교회가 복음을 버리고 다른 복음을 받아들이면서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 단 한 가지입니다.

그것이 종으로 만들고 있고 저주를 받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찌하여 다시 종노릇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을 전하는 성도만이 느끼는 안타까운 마음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그저 성도의 삶이라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저주를 받는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오해할 사람이 있으니까 합니다. 제가 이 세상에서 아무렇게나 살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탁을 받은 성도입니다, 그 성도가 복음을 전하려면 이 세상 사람이 볼 때 그들의 기준으로 의롭게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의가 종교적인 의가 아니라 순전히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의로움입니다,

그래야 내가 전한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 이미 저주를 받은 사람은 다시 저주를 받지 않는 것이고 또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 죽은 자가 다시 율법을 지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숭상하기 시작했다고 하니 여러분을 위한 내 수고가 허사로 돌아가지나 않았나 염려됩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삼가 지키는 것이 율법입니다, 교회 안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으로서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613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그것만 율법이 아니라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다 율법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삼가 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가 다 율법입니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만 율법이 아니라 교회에서 새로 만든 법도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또 성경에 나오는 말씀을 내 육체로 삼가 행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율법입니다.

갈라디아교회입니다,

먼저 할례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나니까 이제 무엇이 들어옵니까?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이렇게 무섭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처음에는 너무도 타당한 할례라는 것 하나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이제 날을 지키기 시작합니다.

또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하나를 지키게 해서 그것이 타당하게 만들고 있고 그 다음에는 또 다른 율법이 교회 안에 들어온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날을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날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만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삼일예배를 드리고 있고 매일 새벽 예배를 드리고 있고 금요 철야 예배를 드리고 있고 구역 예배를 드리고 있고 일주일 내내 날을 지키고 있다고 보면 맞습니다.

주일입니다,

그 날을 통해서 수많은 율법이 지켜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먼저 예배 시간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배의 형식이 지켜지고 있습니다. 그 예배 안에는 다 형식이 있습니다. 그것들은 다 삼가 지키고 있는 것들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시작할 때 기도를 하고 있고 사도신경을 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말씀이라고 하면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습니다. 또 예배가 끝나기 전에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 헌금 중에는 십일조를 포함해서 수많은 삼가 내고 있는 헌금들이 있습니다. 날을 지키기 시작을 하니까 그것이 다 율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다 법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에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날을 하나 지키기 시작을 하니까 그 안에 수많은 율법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다 거론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실제 그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다 삼가 지키고 있는 율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나도 모르게 이렇게 무섭게 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조차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계속해서 지켜왔던 것이기 때문에 감각이 없어졌습니다. 어느 것이 율법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날이라는 하나를 지키니까 그 안에서 삼가 지키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런데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감각이 없습니다.

에베소서에서 저희는 감각이 없는 자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 그것이 율법이라고 가르쳐 줘도 이제는 너무 오래 동안 익숙해져 있고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하고 있다 보니까 아예 감각도 없어졌다는 말씀입니다,

주일을 누가 율법이라고 합니까?

그리고 그 날에 예배를 드리는 형식을 누가 율법이라고 합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제가 더 이상한 사람입니다, 사도신경을 주문처럼 외우고 있고 그 안에서 성경적이지 않은 찬송가를 부르고 있고 또 바알에게 기도를 하고 있고 수많은 헌금을 하면서도 감각이 없어서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입니다.

그런데도 그런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실상은 이 세상 초등학문 아래서 종노릇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종이 되면 유업을 얻지 못한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지만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입으로 부르고 있고 믿는다고 하면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고 있는 교회의 모습입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날을 지키면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은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될까 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혼 구원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수고를 했는데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율법주의가 들어오면서 모든 것이 허사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히브리서7:18-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9쪽)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율법은 아무것도 온전케 못할지라) 이에 더 좋은 소망이 생기니 이것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느니라”

날을 지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그 날에 맞추어서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주일마다 무슨 절기가 그렇게도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분명히 제사 제도가 변역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절기를 아직까지 지키고 있습니다. 절기를 지키려면 모두를 지키든지 왜 유월절은 안 지키고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까?

얼마나 영악합니까?

자기 종교에는 아무 도움이 안 되는 유월절은 안 지키고 맥추절과 추수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지키려면 다 지키고 그렇게 않으면 아무 것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절기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될까 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절기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다 율법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에도 없는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절기를 지키는 일도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정말 감각이 없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정욕에 빠져 방탕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이 무엇입니까?

교회에서 추수감사절을 지키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추수감사절은 없습니다. 왜 성경에도 없는 것을 지키면서 스스로 타락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갈라디아서4장10절의 말씀을 모르는 목사가 있습니까?

다 압니다.

그런데 알면 뭐 합니까?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아주 즐겁게 축제의 분위기로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추수감사절은 미국 사람들이 만든 명절입니다 그 명절을 왜 교회가 지켜야 합니까? 물론 미국으로 이주를 했던 청교도들이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켰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뭐라고 말씀합니까?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헛되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습니다, 전엣 계명은 아무 것도 온전케 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온전케 되지 못하는 그 절기를 왜 지키고 있습니까? 아니 성경에도 없는 절기를 아무리 청교도들이 감사해서 지켰다고 해도 그것을 지키는 것이 바른 일입니까?

다른 복음입니다.

아니 율법의 저주를 받게 하는 종교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율법 아래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는 점점 더 많은 율법을 지키게 만들고 있고 그 거대한 종교 안에 있는 소자들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도살장으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성탄절을 왜 지킵니까?

히브리서에서 분명히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누가 성탄절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까? 이것이 교회가 타락을 하기 시작한 313년 이후에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느 사도가 성탄절을 지켰습니까?

성경에 없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시작한 날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태어난 날을 안다고 그 날을 정해서 성탄절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이 다 어디서 왔는가 하면 종교에서 왔습니다. 이렇게 거대한 종교는 짐승이 되어서 사람들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지만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종교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대로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절기를 지키는 자는 반드시 저주를 받습니다. 누가 가장 악한 자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입니다, 성탄절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격하시키기 위해서 종교가 만들어 놓은 절기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해를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하지 말라는 것은 다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내가 너희를 위해 수고한 것이 헛될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헛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들로서 유업을 받는 것이 아니라 종이 되어서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송구영신예배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서 별별 일을 다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그 예배를 드리면서 일 년 동안 지은 죄를 종이에 써서 태우는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무당이나 주술사와 무엇이 다릅니까?

그리고 그 날에 무엇을 합니까?

복을 빌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복을 빌고 있습니다. 송구영신예배라는 것이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자연스럽게 바알이 같이 들어와서 그 날에 일 년의 복을 빌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해맞이를 하면서 복을 비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렇게 세상 초등학문에 종노릇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삼가 지키는 모든 것은 다 율법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면 더 잘 지킬까를 고민하고 있고 잘 지키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증한 행위입니까?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복음을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수고한 모든 것을 기독교라는 종교가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여러분이 알고 있는 그대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두려워하는데 교인들은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0: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64쪽)

“우리는 뒤로 물러가 침륜에 빠질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고 십자가에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습니다, 성도는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고 묻고 있습니다.

율법

이 세상 초등학문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 초등학문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아주 고상한 영의 일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서 천국을 유업으로 얻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십자가에서 폐하신 율법을 가지고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초등학문인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의 행위로 돌아가는 사람을 침륜에 빠질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영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침륜에 빠지고 만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영혼을 침륜에 빠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세상 초등학문이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세상 초등학문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면서도 두려워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그가 아직 믿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들로 인하여 영혼이 사망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전혀 두려워하지 않고 도리어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 안 됩니다,

절기도 안 됩니다, 송구영신예배도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삼가 지키고 있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게 내가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율법을 지키는 자가 아니라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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