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4: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6쪽)
“저희가 너희를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이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 붙여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 내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성경을 보면서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될 때까지 있다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갔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전에는 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율법을 몰랐습니다.
물론 유대인들을 아는 사람들은 그들이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는 백성들이었는가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을 통해서 전혀 다른 복음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역사하심으로 그들이 복음을 듣고 믿었습니다.
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거짓이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에게 참된 것을 전해서 너희와 원수가 되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수가 되었는가 하면 율법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들어왔습니다. 많은 율법이 들어온 것이 아니라 할례라는 율법이 들어와서 갈라디아에 있는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제까지는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오직 믿음으로 알았습니다.
그런데 할례가 들어오고 나니까 굳이 믿음이 아니더라도 이 할례를 행했다는 그것으로도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표징으로 삼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볼 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유대인과는 전혀 다르게 살았는데 이제 유대인이 되어 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구약에 있는 율법을 가르치면서 봐라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먹으려면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고 먹으라고 했다고 하면서 할례를 받게 하니까 그 할례로 자기들이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입니다. 아니 세상 사람들에게 그리고 유대인들에게도 우리가 율법에 있는 대로 할례를 받았으니까 이제 우리도 하나님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면 지금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인들이 하고 있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거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식사 기도도 삼가 지켜서 하기 때문에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식사 기도를 함으로 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또 사람들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마음입니다.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또 스스로에게도 내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면서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율법에 쉽게 빠져 들어가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율법이 나쁘다는 것을 안다면 절대로 안 지킵니다, 그러나 율법은 이렇게 나를 나타낼 수 있고 다른 사람이 나를 인정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단체로 식사를 합니다.
그들이 식당에 가서 아주 큰 소리로 기도를 하고 식사를 하는 것이 이 시대는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그래 저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야 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자기를 나타내는데 있어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은 주일에는 아무 것도 안 하고 반드시 교회에 나간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날에 하는 것을 꺼려합니다. 또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그런 일에 참석을 하지 않고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을 대단한 자부심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척도가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것을 얼마나 잘하는가에 따라 자기 믿음의 척도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가를 모르고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또 하나님께서 친히 써서 주셨기 때문에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합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런 속담들이 사람들의 이성 안에서 자리하고 있다 보니까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에 나왔으니까 교회법을 따라야 한다는 것은 고민할 필요도 없는 문제입니다.
세상의 생각입니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는 그들이 율법을 보고 무슨 고민을 할 수 있겠습니까? 교회에 나왔으면 당연히 하나님을 섬기는 법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하는 가를 고민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있던 사람들이 다 그렇게 하니까 이제 교회에 들어온 소자는 그저 따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2000년이 됐습니다.
초대교회에 벌써 율법주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의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초대 교회가 지나가면서 이제까지 있었던 거의 모든 교회는 종교로서의 교회지 참된 것을 전하는 교회는 표면적으로는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들어도 쉽게 율법에 빠지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더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교회에 율법주의가 들어오니까 그대로 다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교회는 점점 더 많은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지금은 참된 것을 전하는 교회가 없다고 보면 맞습니다. 다 거짓을 전하고 있지만 그것이 사람에 이성에는 바르기 때문에 종교에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원수입니다.
참된 것과 율법은 서로 원수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율법의 행위를 폐하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저를 원수와 같이 생각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고 있고 하나님의 성로서 살아가고 있는 그것을 폐하라고 하면 솔직히 무엇을 해야 할 줄을 모르기 때문에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가진 자와 원수가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복음에서 므나의 비유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주님이 왕 되시기를 것을 싫어했고 또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그 사람들을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은 주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을 행위로 나타내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과 원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주여 주여 하면서 자기들이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입으로는 주여 주여 하면서 행위로는 원수가 되어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위에서 내가 말한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내게서 떼어놓아서, 여러분으로 하여금 자기네들을 열심히 따르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할례를 받게 하는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입니다. 그들이 할례만 가지고 온 것이 아니라 그 할례를 시작으로 해서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복음만을 들었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그런 것을 해 보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이제 교회 밖에 있는 사람과 자기들의 차이를 쉽게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고 하나님께서 너희 안에 역사하시는 그 믿음을 따라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믿음이라는 것은 아무 것도 보일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리고 영이 일이다 보니까 나 스스로도 때로 회의감에 빠져 내가 진짜 하나님을 바로 믿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율법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감성으로 자극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몸에 할례를 행한다는 그 자체만으로 세상 사람과 자기들은 완전히 구별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저희들이 너희에게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10:1절을 보겠습니다. (신 362쪽)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므로 해마다 늘 드리는 바 같은 제사로는 나아오는 자들을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느니라”
율법주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을 하면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너무도 타당하게 생각이 됩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나쁩니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이 나쁩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의 이성에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쉽게 율법주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거짓 형제입니다.
그들이 할레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표징을 보니까 너무도 좋은 것입니다. 그런 표적들을 볼 수 있으니까 더구나 그것이 사람에 이성에 옳다 보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쉽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어서 천국에 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좋게 보입니까?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거짓 형제가 좋게 보입니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사도 바울이 좋게 보입니까? 복음만 들었을 때는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는데 이제 자기들이 율법을 행하고 보니까 사도 바울이 전한 것은 왠지 모르게 부족해 보이는 것입니다.
거짓 형제가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나쁜 것을 가지고 열심을 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이성에 좋은 것을 가지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실제 율법을 안 지키던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켜보니까 너무 좋은 것입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에서 어떻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의 그림자요 참 형상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율법이 좋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율법은 좋은 일에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에 그림자라는 말씀은 좋은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좋은 일에 그림자입니다. 그것이 좋은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분명히 율법을 지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좋은 일에 그림자지 좋은 일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언제든지 온전케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켜보니까 좋습니다. 이 세상의 상식으로는 율법을 폐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마치 무정부주의를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고 그렇게 되면 사회는 큰 혼란을 가져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법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것을 실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해 보니까 좋았습니다.
그러나 좋은 뜻이 아닙니다.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들이 율법을 지키라고 정말 순수한 마음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강요를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이면서 봐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백성이고 또 하나님께서도 원하신다고 하지 않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왜 당연하게 받아 들이냐면 그것을 그저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세상 사람과 구별이 되게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율법을 모르고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생각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왜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가 하면 율법으로는 누구든지 온전케 할 수 없기 때문에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성도로서 사는 그런 척도라면 좋습니다, 그러나 율법은 온전케 되느냐 아니면 온전케 되지 못하느냐를 분명히 묻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얼마나 좋습니까?
누구나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내가 처음에 교회에 나갔을 때는 새벽 예배에 참석한다는 것이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때부터인가 새벽 예배를 나가면 그때는 자기가 믿음이 일취월장한 것같이 생각을 하게 됩니다. 마치 믿음이 좋은 것같이 느껴진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것은 좋은 일에 그림자로서 누구든지 온전케 되지 못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율법을 지키던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갈라디아서를 쉽게 이해하기가 힘이 듭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처음부터 참된 복음을 들었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들이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키기 시작하면 그것이 너무도 좋게 받아들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좋은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에는 좋은 뜻이 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고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켜보니까 이제 자기들이 진짜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또 사람들은 그런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자기 인생의 가치가 더 높아진다는 것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좋은 일에 그림자입니다.
그것을 지키게 하는 것은 절대로 좋은 뜻이 아닙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율법주의가 되어 있습니다. 물론 613가지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닐지라도 실제 교회 안에 생긴 새로운 법들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 한 가지의 율법이 들어오면 그렇게 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언17:9절을 보겠습니다. (구 929쪽)
“허물을 덮어 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
이간을 붙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율법주의자가 들어왔습니다. 그들이 아주 속히 복음에서 떠나 다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이성으로 다른 복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기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너무 오래 동안 교회가 율법을 지키다 보니까 지금은 당연히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아니 거꾸로 되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키면 이단이 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하면서 사도들을 핍박한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역시 똑같이 행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다 보니까 교회는 심각하게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허물이 어디서 나옵니까?
법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사람은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물을 거듭 말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법을 지키지 못한 허물을 계속해서 말을 해서 그것을 지키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일이라는 법이 있습니다. 누군가 설령 그것을 안 지켜도 복음이 있는 성도는 무슨 사정이 있는가 하면서 덮어 줍니다.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은 어떻게 합니까? 이 주일에 대해서 성경적으로 자기들 나름대로 정리를 해서 왜 주일을 지켜야 하는가를 계속해 말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주일을 소홀히 하고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말을 성경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간하고 있습니다,
누가 누구를 이간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이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셨는데 율법주의자들은 계속해서 이 폐해진 율법을 이야기를 하면서 이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라고 합니다,
그들이 그냥 지키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 성경에서 그 정당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간하는 자라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이간하는 것은 누구에게 열심을 내게 하고 있는가 하면 자기들에게 열심을 내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이간하는 자입니까?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이간하는 자입니다, 그들은 할례를 받게 하고 있고 또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결국에는 누구에게 열심을 내게 하려는 것인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십일조를 못 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을 계속해서 말하는 사람은 이간하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십일조를 누가 받습니까?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받으십니까? 사람들이 종교에만 들어오면 거의 어린아이가 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누가 쓰고 있습니까?
저희가 쓰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쓰신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이미 그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다른 복음인데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사도 바울이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는데 그 다른복음을 가지고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맞는 말입니까?
허물이 어디서 나타납니까?
육체의 행위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허물이라는 것이 법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다른 복음을 가지고 이간을 하는데도 이 시대는 그저 따라가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게 하고 날을 지키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누구에게 열심을 내는 것인가 하면 바로 율법주의들에게 열심을 내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10: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저희로 구원을 얻게 함이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저희가 열심이 있습니다.
어떤 열심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저희가 하나님께서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들어온 다른 복음을 가진 거짓 형제도 하나님께 열심이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다른 복음에 넘어갑니까?
그들도 하나님에 대해서 열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정말 진실 되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나도 안 됩니다 그런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욥이 얼마나 하나님을 잘 믿고 싶었던 사람이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의 열심입니까?
욥이 한 그 모든 행위가 다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욥은 이 세상에서 사람의 생각으로는 하나님을 가장 잘 믿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그를 순전하고 정직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이 말씀도 이미 아카데미 강의에서 했기 때문에 그것을 보시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열심이 있지만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서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을 전하니까 이렇게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이간을 붙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다 하나님을 위한 일이라고 합니다.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고, 또 전도를 하고, 선교를 하는 일이 다 하나님께 열심이 있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그러한 일들이 너희를 이간 시켜 저희를 위해 열심을 내게 하고 있는 일들이라는 말씀입니다.
거기에 다 속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합니까?
율법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율법은 내 의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은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것을 율법의 의와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이 누구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하고 있는가 하면 저희를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율법을 지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거짓말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다 밝혀주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누구를 위하여 율법을 지킵니까?
종교를 위하여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사람들의 의를 가지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사람은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폐하여 졌습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은 순전히 종교인들 자기들을 위하여 지키게 하는 것이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여 하는 일이라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그 율법이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지식을 얻은 사람은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식이 없는 사람은 그저 성경을 이 세상 초등학문으로 보면서 율법에 열심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은 사람이 지킬 수 없습니다.
만약에 지킬 수 있었다면 아담은 절대로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습니다. 사단과 우리 인생이 싸우면 게임이 안 되는 것입니다. 마치 젊은 사자와 어린 양과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려고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입니다
그리고 모든 국가나 사회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율법입니다. 그런데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믿는 사람들은 오직 그리스도인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율법을 버리는 행함이 있어야 복음에 복종하는 성도라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람에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종교에 대하여 열심을 내는 것이 율법입니다 성도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 의를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에 복종한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은 내 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속의 일입니다, 그것이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는 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도리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세우는 순간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의가 함께 공존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를 세우면 하나는 반드시 사라집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를 믿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수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리석은 자의 생각입니다, 이 둘을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이것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도 잘 지키고 예수도 잘 믿고 하는 것이 너무 좋습니다. 저 역시도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이성이 아니라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않는 일이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지킨다는 그 자체가 사실은 성경적으로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사람의 이성으로 옳다 해도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입니다.
율법은 마침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지켜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모든 설교와 그리고 야고보서 강해와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말씀을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행하고 있습니까?
모세의 말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누가 더 의롭고 덜 의롭냐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성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순간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사라지고 그 의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순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의는 사라집니다. 이제부터는 율법을 지키는 그 의로 살아야 합니다, 나는 하나님의 성도로 살기 위해서 지킨다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그런 말씀은 없습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는 그 의로 살아야 하는데 그 의로는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니까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리는데도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화를 자초하는 일입니다. 나는 율법을 안 지킵니까? 그러면서 율법을 지키는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까? 그 교회에 다니는 순간 여러분은 교회법에 속해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 교회전체가 율법 아래 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게 됩니다.
고린도후서1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97쪽)
"내가 하나님의 열심으로 너희를 위하여 열심 내노니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함이로다"
사람의 열심은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열심은 사도 바울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열심을 낸다고 하면서 내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드리려고 중매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신부입니다, 그 여자를 정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중매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하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율법을 버리는 성도만이 이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한다는 것은 이미 그 자체가 간음을 하는 음녀가 되게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인들을 다 음녀로 만들어서 율법의 남편과 예수 그리스도 두 남편을 섬기게 하고 있습니다,
정결한 처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음녀를 만들고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유로 해서 두 남편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생명을 주는 남편이고 예수 그리스도도 생명을 주는 남편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망이 함께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오직 생명만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두 남편을 함께 섬기면 세상 적으로는 좋게 생각이 되지만 성경에서는 음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초대교회를 지나오면서 이제까지 교회를 보면 율법에 대해서 바로 정립을 한 어느 글도 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었지만 사람의 눈에 보였던 교회는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끔찍한 일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모르고 그저 종교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을 도리어 비난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의롭다 함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성도로서 율법을 지키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고 그것이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있습니다. 이 세상 종교에 이야기를 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율법을 안 지키고 그런 일이 있느냐고 말도 안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는 그것이 내 안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정결한 처녀로 중매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의롭다 함을 얻는 성도를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입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히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종교적 열심입니다.
그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면서 초등학문에 빠져 있습니다.
율법과 복음은 서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나타나면 복음은 사라집니다, 그리고 복음이 나타나면 율법은 사라집니다, 이 둘이 함께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면 율법도 잘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도 잘 믿는 것이 백번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모르면 반드시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다 예수를 전한다고 말 합니다.
그런 말에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는 실상은 예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너희로 저희를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이 흔들리지 않고 있는 성도는 율법이 누구에게 대한 열심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한 남편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복음은 두 남편입니다. 사도 바울은 너희를 정결한 처녀로 한 남편인 예수 그리스도께 중매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지키게 하고 예수도 믿게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르면 한 남편이 누구인지 그리고 또 다른 남편이 누구인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이성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그들이 말하는 좋은 곳에 간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율법으로는 안 되니까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십자가에 율법을 폐하시고 우리에게 그 의를 주셔서 구원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또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그대로 문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 같으면 누구나 구원을 받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실 때 버림을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열심을 가진 사람은 아니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4: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좋은 동기로 여러분에게 열성을 보인다면야 얼마나 좋겠습니까?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뿐만 아니라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사도 바울의 심정입니다.
이제까지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에 의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웠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뿐 아니라 복음을 알고 전하는 모든 성도의 마음이 같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사도 바울은 좋은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방에 전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다른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오니까 그들이 속히 떠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일로 여러분에게 열심을 보인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은 그들이 좋은 일로 열심을 내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좋은 일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고 있는 표징인 할레를 행하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구약에서 유월절을 먹을 때는 이방인이라도 할례를 받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자기들에게 어떤 표징도 없었는데 할례를 행함으로 해서 이제 진짜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 같이 생각이 되었습니다.
안타까워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것을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저주를 받는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이 말씀을 전하면 사람들이 다 당황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도무지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조금 더 잘 살기 위한 성도의 도리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천국에서 더 큰 상을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좋은 일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반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일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게 하는 거짓 형제는 좋은 일에 대해서 열심을 내게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좋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반어적으로 묻고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모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말씀을 거꾸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거의 모든 말씀을 다 거꾸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라도 복음에 근접한 사람이 있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전혀 그런 사람이 없다는 것이 너무도 큰 불행입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천국에 갈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노아의 시대가 어떻고 소돔과 고모라가 어떻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가나안에 들어갈 때가 어떻고 예레미야 시대가 어떻다는 것을 안다면 이 시대가 어떠하다는 것을 어느 정도는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시대는 하나님을 잘 못 믿었어도 우리는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바랍니까?
사도 바울이 좋은 일을 바라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뿐 아니라 항상 그랬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 교회에 벌써 다른 복음이 들어와 그들이 할례를 받고 있었습니다.
생명의 문제입니다.
정말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천만이라는 기독교인이 구원을 받을 것 같으면 아마도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이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아니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을 당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고 난 후에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해 디아스포라가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언제나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정말 얼마나 간곡한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말씀과는 전혀 다르게 갈라디아교회는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종이 되어서 저주를 받는 사람들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사도 바울이 안타까움에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 편지를 보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자리에서 복음을 듣다가도 이 세상의 초등학문에 빠져 다시 돌아가는 것을 볼 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 줄을 모르겠습니다.
가슴이 아픕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습니까? 그런데 그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접을 했던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가 들어와 다른 복음을 전하니까 속히 떠나고 있습니다. 그들이 좋은 일로 열심을 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안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언제나 좋은 일에 열심을 낸다면 참 좋겠는데 갈라디아에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는 그렇지가 않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주의에 얼마나 쉽게 사람이 미혹이 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계속해서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더욱 더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
얼마나 좋겠습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좋은 일에 열심을 내고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탄식으로 반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이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수고를 해서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수고입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 수고가 어느 정도인가 하면 해산하는 고통이 있을 정도의 수고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낳을 때 배속에 있을 때부터 해서 해산할 때까지 얼마나 수고를 합니까? 사도 바울이 그렇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졌습니다.
아이를 낳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잘은 모릅니다. 그러나 해산을 할 때는 모든 여자들이 그 고통이 너무 커서 두려워하기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 해산의 고통을 사도 바울이 또 감내를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복음 그냥 전해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의 지금의 말씀이 있기 까지는 정말 많은 고통이 따랐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많은 말씀들이 하루아침에 써진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자랑하고자 이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은 정말 고통 중에서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가 온전히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설교를 보신 분들은 알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완전히 내 안에서 역사하기 까지는 그냥 되는 것이 아닙니다, 수백편이 넘는 설교와 강해 그리고 강의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를 합니다.
사도행전20:31절을 보겠습니다. (신 223쪽)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
에베소 교회와 고별을 하면서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가져 해산하고 혼자 자립할 때까지의 시간이 정말 오래 걸립니다. 물론 성년이 될 때까지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어느 정도 자기 앞가림을 하기 까지는 최소한 7-8년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을 다 보고 그것이 내 안에서 믿어지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일깨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말이 삼년이지 사실 사도 바울에게는 너무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혹시라도 그 중에서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사람이 있을까 하여 정말 눈물로 훈계를 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받은 복음의 은혜가 너무 크기 때문에 그것을 바로 전하고 또 그들이 믿음에 든든히 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는데 그가 죽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입니다.
이 말씀은 그들이 구원에 확신이 있을 때까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하루아침에 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에 있는 모든 것을 다 합치면 아마도 설교로 하면 천여 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천편이 넘는 설교를 하루아침이 볼 수도 없습니다, 또 본다 해도 사람의 이성과 수많은 싸움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아침에 이 복음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정말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고 있는 복음이 성경과 맞는가 하면서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을 전도하고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까지는 정말로 많은 시간이 필요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정말로 복음을 위해서 산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열심으로 한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해산의 수고를 한 사람입니다. 저 역시 복음을 전하고 있지만 사도 바울의 그런 고통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솔직히 눈물을 흘려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마음에서 안타까워하는 심정은 있습니다.
눈물로 훈계했습니다.
아마도 이방에 처음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이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런 면에서는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을 솔직히 전하고 싶습니다, 저는 이 자리에 왔다가 돌아가는 사람을 보아도 그들에게 눈물로 호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주님의 뜻이라고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안타까워하고는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눈물로 그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떠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들을 붙잡으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어쩌면 그런 시간까지도 저에게는 아깝기도 합니다. 저는 이 시대 주님이 제게 주신 이 복음을 성경에서 더 많이 설교로 기록해 놓고 싶은 마음이 강해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사도 바울은 정말 영혼을 위해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안타까워했던 사람이었음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밤낮 쉬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삼년을 전했는데도 사도 바울이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내가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가 너희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복음을 전했는데도 사도 바울이 떠나니까 실제로 흉악한 이리가 와서 양 때를 죽였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거의 모든 교회가 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다 흉악한 이리에게 잡혀 죽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밤낮 쉬지 않고 삼년이나 가르쳤는데도 사도 바울이 떠나니까 흉악한 이리에게 잡혀 먹혔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처음 복음을 전한 이방의 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모두가 다 다른 복음에 빠져 있습니다. 다른 복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할례를 안 받는 것으로 율법을 지키면서도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지런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늘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지금도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는 정말 많은 고통이 따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어머니가 해산의 고통을 하는 것과 같은 그런 고통이 따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무 감각이 없이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들어왔습니다,
사도 바울이 해산의 고통을 다시 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속히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너무도 안타까운 마음에 내가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해온 수고를 다시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후서11:23-27절을 보겠습니다, (신 298쪽)
“저희가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도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사도들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이 어떻게 기록이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사도들이 이 해산의 수고를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성경을 볼 수도 없고 또한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누군가를 통해서라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창조주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전하기까지는 사도들이 너무도 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너무 편하게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어서 잘 실감이 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그것을 알면서도 자기들이 당연하게 받은 복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옥에 갇혔습니다.
지금과 같은 감옥이 아닙니다, 2000년 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그래도 인권이라는 것이 있었지만 그때에는 죄를 진 사람이 갇히는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최소한의 인권도 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복음을 우리가 지금 성경을 통해서 보고 있는데 다른 복음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매도 수없이 맞았습니다.
그래도 지금은 얼마나 감사합니까? 종교의 자유가 있다 보니까 이런 매를 맞을 이유는 거의 없어졌습니다. 그리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로마에 의해서 극심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잡히는 순간에는 거의 다 죽음을 면치 못했던 시대입니다. 더구나 사도들은 더욱 그랬습니다.
유대인에게 사십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 맞았습니다.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고통을 당했는가 하면 그것은 복음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이 누구입니까?
율법주의자입니다. 그리고 거짓 형제입니다.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니 유대인들은 아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지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해서 사도 바울을 이렇게 핍박을 했습니다. 단지 율법의 문제 때문에 이런 고난을 유대인들에게서 당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들은 아무리 주여 주여 하고 있을지라도 유대인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이유로 유대인들이 이렇게 사도 바울을 핍박을 했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방인이라고 하지만 실제는 표면적 유대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해산의 고통입니까?
어느 정도 고통을 당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는데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오니까 속히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는 좋은 말로 해산의 고통이지 그가 어떻게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을 왜 보고 있습니까? 사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쓴 성경을 볼 자격도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 성경을 보면서 다른 복음을 만들어서 율법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 점점 더 그 강도가 더 세지기 시작을 하고 있고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제는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있습니다.
해산의 고통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한 고통을 당하면서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면서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든든히 서기를 바랐습니다. 그렇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했지만 사도 바울이 다른 곳으로 떠나니까 흉악한 이리가 와서 잡아먹었습니다. 이 흉악한 이리가 바로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3: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7쪽)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아는 것 역시 이 세상 초등학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거짓의 아비에서 났는가 하면 율법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이스라엘을 감동해서 율법을 지키게 했습니다.
그 율법의 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습니다. 성경을 보면 너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을 이 시대도 역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가 거짓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보는 눈이 감겨져서 도무지 안 보입니다.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 버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옛사람이 무엇입니까? 내가 육체적으로 살았던 모든 것이 옛사람입니다. 새사람이 있고 옛사람이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사는 사람은 옛사람이고 아들이 영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은 새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종교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는 다 옛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옛사람이라고 하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옛사람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내 안에 보내 주신 것은 새사람입니다. 마치 예전에 하던 행위를 하는 것을 옛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을 새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아담의 자손은 옛사람입니다. 그 옛사람을 이제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그 육체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모든 열심은 다 옛사람입니다, 그것을 마치 새사람이라고 이야기를 하니까 사람들이 복음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과 복음을 계속해서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나 육체로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하는 것은 옛사람입니다. 그리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것이 새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옛사람은 보입니다.
그리고 느끼고 사람의 이성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오직 성령이 오셔야지만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성도는 이제 옛사람을 버리고 새사람을 입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새사람을 입는다고 하면서 도리어 옛사람으로 더 멀리 가고 있습니다.
옛사람은 율법의 행위를 합니다.
그러나 새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역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의 비밀을 모르는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들은 옛사람을 벗어버리지 못하고 아직까지 옛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육체가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행위는 옛사람입니다. 성도는 그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합니다,
율법을 버려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버리지 않고는 새사람이 내 안에 거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옛사람과 새사람을 비교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런 말씀들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치 세상에 있는 사람은 옛사람이고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자기들은 새사람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담으로 탄생이 된 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거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이 영의 사람은 내가 느끼거나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내 안에서 믿음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옛사람을 벗어버리라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다시 말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이렇게 내 육체를 죽여야 옛사람을 벗어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지를 못하고 도리어 옛사람의 행위를 하는 것을 보고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해석이 안 됩니다.
이 시대는 거의 다 거꾸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다 교회 안에 와서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을 보고 새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초적인 말씀들이 해석이 안 되니까 도무지 복음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옛사람의 행위를 벗어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새사람을 입고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아담의 형상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을 수도 없고 지식에 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이런 영의 비밀을 깨닫지 못하면 교회 안에서 옛사람으로 살다가 지옥에 갑니다,
율법과 복음입니다,
그것은 옛사람과 새사람입니다. 옛사람은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를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고 새사람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충만한데 까지 지식으로 자라서 자기를 창조하신 형상을 이루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이루는 성도 안에 아들의 영을 보내 주셔서 그 영이 주님이 오실 때 새사람과 하늘의 형상을 입어서 천국에서 영원한 축복을 받으면서 산다는 것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는 복음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겉으로 입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아들의 영이 거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 옛사람을 입고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들어왔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면서 다시 새사람을 입게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 위해서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역사입니다.
성도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구원을 받는 성도는 다릅니다. 내 평생의 시간동안에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내가 언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할 시간이 어디 있습니까? 수많은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양을 배우고 부를 시간이 어디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성도는 광야 사십년 동안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청년의 때 사십년 동안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에까지 자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한데 이 시대는 다른 제사에 너무 많은 시간을 빼앗기면서도 그런 제사를 보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집니다,
그런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를 사도 바울은 너무도 안타까워하면서 내가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옛사람 육의 사람이 되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그러나 새사람 영의 사람이 되는 것은 무척이나 힘이 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복음이 전해지고 그것을 듣고 믿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음성을 변하려 함은 너희를 대하여 의심이 있음이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제라도 내가 여러분을 만나 어조를 부드럽게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책망입니다.
이제까지 갈라디아서를 보면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에 미혹이 되어 있는 갈라디아교회에게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심하게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떻게 수고를 해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 교회가 너무도 쉽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사도행전의 말씀과 같이 눈물을 흘렸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수고로 복음이 전파가 된 갈라디아 교회가 너무도 속히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아마도 참담함을 금할 수 없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원수가 되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가 되기 위해서 복음을 전했고 그들을 의심하지 않았는데 그들이 속히 율법주의에 빠져서 이제는 원수가 되었습니다. 정말 그 마음의 표현을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그가 복음을 듣다가도 한번 율법주의 사상이 그 안에 들어오면 그들이 다시 복음으로 돌아온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해산하는 수고를 해도 그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복음을 듣지 않았다면 몰라도 많은 복음의 말씀을 듣다가 율법주의로 빠지는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못한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다혈질입니다.
그가 얼마나 이 복음에 대해서 다혈질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알고 있습니다. 그는 한번 자기가 아니라고 하면 그것으로 끝을 볼 정도로 단호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성질을 가지고 있는 사도 바울로서는 자기가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참을 수 없는 분노를 가졌을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그런 성질이 있었기 때문에 복음의 일군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사실 복음을 전하는 일은 타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아주 작은 타협하나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성도는 이 율법에 대해서 사도 바울과 같이 단호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역시도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내가 한 가지라도 타협을 하는 순간 망한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능한 옛사람의 행위를 모두 버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지만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그렇게 감동을 해 주고 있는 줄 믿고 있습니다.
찬양 부르는 것이 어떻습니까?
식사할때 기도 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당연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옛사람을 버리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정말 그것까지도 버릴 수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버리는 것은 사도 바울이 할례라는 율법 한 가지와 싸우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성도는 그것과 강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알기 때문에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아주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라도 내가 부드러운 어조로 바꾸어서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의심하고 있다고 말씀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나는 여러분의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당황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나는 여러분의 일이 걱정스러워 안절부절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를 얼마나 걱정하고 있는가를 잘 표현을 해 주고 있습니다. 정말 막막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입니다.
돌아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아무리 강경하게 말씀을 한다 해도 이미 율법주의로 돌아간 사람들은 다시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사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알기 때문에 지금 반어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갈라디아서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한 사람도 이 갈라디아서를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313년 이후에 보이는 교회사를 볼 때 거의 복음이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갈라디아서를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실입니다.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바로 정립을 해서 가르쳐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적은데 다른 복음을 가르쳤다는 것은 그 안에는 구원이 없었다는 말과 같습니다.
내가 이제라도
얼마나 간곡한 표현입니까? 너희가 이제라도 이 복음을 다시 받아들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도 바울이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 해도 아마 거의 모든 사람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심정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을 듣는 사람과 복음을 가르치는 사람의 차이가 얼마나 큰 가를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참담합니다.
복음을 듣다가 다시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는 것을 보면 어떻게 말로 표현을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참된 것을 전하는데 오히려 그것이 원수가 되는 것을 보면 안타깝기만 합니다. 사도 바울의 그런 심정이 잘 표현이 되어 있는 말씀들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서 내 영혼의 구원을 어떻게 받는가를 깨닫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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