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시편25:1-7절을 보면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영혼 구원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영혼 구원보다는 그저 이 세상에서 더 잘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영혼 구원은 하나의 보너스고 교회에 나오면 본격적으로 자기 기복을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고 또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결국에는 무지에서 나오는 기독교인들의 신앙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다윗의 시편과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의 기도를 보면 너무 차이가 나고 있습니다. 다윗의 시편은 물론 시입니다, 그러나 이 대부분은 기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다윗의 시를 보면서 우리가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 가를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모릅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단어를 유창하게 하는 기도를 하면서 또 자기 마음에서 진심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 기도를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기도는 다 우상에게 하는 기도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는 이미 종교화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불교에서 하는 기도와 천주교에서 하는 기도와 그리고 무당이 하는 기도와 기독교 안에서 하는 기도가 같다는 말씀입니다 기분이 나쁘더라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그들이 부르고 있는 신의 존재만 다를 뿐이지 그들이 하고 있는 기도의 내용이 같다는 것을 들어보면 아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신부가 기도 합니까?
목사가 기도를 합니까? 스님이 기도를 합니까? 무당이 기도를 합니까? 사실 이 시대 이런 사람들의 기도는 다 같습니다. 단지 자기들이 부르는 이름만 다르고 그 형식만 다를 뿐이지 기도의 내용은 다 같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너무 모릅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로 아는 것을 가지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시편을 몇 번만이라도 묵상을 해 본 성도라면 하나님이 누구고 또 우리 인생들이 어떠한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지만 그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시편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과 같은 기도를 해야 합니다.
감정이 아닙니다.
성도는 철저할 정도로 이성적이어야 합니다. 이 성경을 보면서 조금만이라도 감성에 젖는 순간에는 사망으로 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서 감성에 빠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시편에 있는 말씀 그대로 노래를 만들어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노래를 부르면 뭐 합니까?
그것에 감동을 받아서 뭐 합니까? 자기 마음이 그렇게 감성에 빠지면 대단한 은혜를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시편에 있는 글자를 노래를 부르고 그 곡조에 취해서 감성에 빠져 헤어 나오지를 못하고 있고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으면서도 이 시대 교인들은 그런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의 이성으로 알 수 없습니다.
그런 말씀을 가지고 노래를 하면서 감동에 빠지고 있는 것이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곧 사망의 길로 가는 길임을 모르고 그저 교회에서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말하고 있고 자기 진심을 이야기 하는 것으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종교입니다.
성도는 절대로 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교회 자체를 부정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세우신 교회를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교회 역시도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는 것을 또한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보이는 건물에서 가기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 있다고 하는 자체가 종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알아야 기도합니다.
모르고 어떻게 기도를 합니까? 그저 유창하게 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을 내가 고백하는 것이 시고 기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은 그것을 시로 기록을 했고 우리는 이 시대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기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기도를 너무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기도가 누구에게 하는 기도인가 하면 바로 사단에게 하는 기도고 바알에게 하는 기도고 우상에게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면서도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하고 기도를 하면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시로 고백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기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내가 다윗의 시편을 바로 알고 기도를 하고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기도도 자기 감성에 치우쳐 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을 바로 깨닫지 못하면 평생 교회 안에서 기도를 했을지라도 그는 주님이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결국에는 주님으로부터 책망을 듣는 기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는 바리새인의 기도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도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행위를 보이면서 기도를 했지만 이 시대는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도대체 누구에게 기도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이사야44:17-18절을 보면
“그 나머지도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 못함이라”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이 신상 자기들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부복하여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그냥 지나치듯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나쁜 것은 지금 이 시대 그대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될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너는 나의 신이라고 말 합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라고 생각을 합니까? 이스라엘을 실제 그런 일을 했어도 지금은 그것이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게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니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함은 그 눈이 가리워져서 보지 못하며 그 마음이 더러워져서 깨닫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그렇게 했습니까?
그 눈이 가리워졌습니다. 우상을 보면서도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몰랐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이해가 됩니까? 지금 이 시대도 우상을 보면서도 그 눈이 가리워져서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가 됩니까?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자기들이 만든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그 앞에 부복을 해서 기도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신이라 하면서 나를 구원한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면서 이러한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에 이미 그 마음에 우상이 들어와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멸망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만든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그 앞에 부복하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너는 나의 신이라고 하면서 나를 구원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스라엘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시대 역시 그대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 우상입니다.
그리고 그 우상을 보고 경배를 하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이름을 주여, 주여 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이사야 시대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눈이 가리워져 있으면서도 보지 못하고 있고 마음이 어두워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보고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예배를 하고 있고 또 찬송을 부르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는 그런 모든 행위들이 하나님을 향해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육으로 해결을 하고 있습니다. 영이라는 의미조차도 모르고 그저 영이신 하나님을 자기들이 육적으로 믿는 그것으로 영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 시대는 이스라엘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선민으로 택하신 이스라엘도 이렇게 했는데 이방의 교회는 말을 해서 무엇하겠습니까?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눈이 가리워져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어두워져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상으로 가득한 이 시대 교회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상이 얼마나 많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그저 주여, 주여 하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우상입니다.
교회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실상은 다 우상을 경배하는 일이고 또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해서 그 우상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이름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를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영혼에 대해서 기도를 하지 않고 자기 육체를 위해서 기도하는 그 모든 것이 실상은 다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있고 우상에게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내 욕심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기 위해서 간구하고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이 실상은 다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있는 것이고 우상에게 기도를 하는 것임을 모르고 이 시대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의 일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일들을 성경에서 알아 믿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상에게 빠져 있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하고 싶은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하기 위해서 우상에게 경배를 하면서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일입니다. 알아야지 내가 믿고 말 것 아닙니까? 알지도 못하고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그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던 이스라엘과 지금 교회 안에만 있으면 마치 자기가 성도나 된 것으로 생각하는 교인들이나 무슨 차이가 있는가를 냉정하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다윗은 하나님만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아는 하나님을 시로 찬송을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다윗의 기도이기도 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을 생각하고 이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하여 기록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모릅니다.
성경을 모르니까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우상에게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달리 우상에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역시 성경을 모르다 보니까 그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로 아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님,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기다립니다.
무엇 때문에 주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까? 내 영혼이 주님을 우러러 보는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여러 가지 목적을 가지고 주님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있는 것임을 모르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입니다.
그것 외에 주님을 우러러 보고 있다면 그는 이 세상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이라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교회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어떠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것을 얻기 위해서 우러러 보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이 세상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이고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왜 다른 것을 바라고 있습니까?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모르기 때문이고 천국이 얼마나 큰 선물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욕심을 부르고 있고 그것이 우상 숭배를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육체들이 주를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상 숭배를 하는 것임을 모르고 오히려 목사들이 그렇게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안타까운 실상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행전7:55절을 보면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스데반 집사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에게 돌에 맞아서 죽임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가 지금 어떠한 상황입니까? 가장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는 하늘을 우러러 보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살려 달라고 우러러 보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 집사가 살려 달라고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의 생명이 죽임을 당하는 그 순간에도 자기 육체를 위해서 우러러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영혼을 위해서 우러러 보았고 또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 우러러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보면서 스데반 집사는 자기 영혼을 받아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떻습니까?
너무도 신앙생활하기가 좋은 이 시대에 사람들은 자기 영혼에 대해서 우러러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있고 교회 안에서 자기를 더 나타내기 위해서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다 우상에게 경배를 하는 것임을 모르고 거대한 짐승에게 사로 잡혀서 사망의 길로 가면서도 그 마음이 어두워서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기도를 합니까?
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그 답을 스데반 집사가 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가 돌에 맞아 죽는 비참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자기 영혼을 받아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가라지들은 교회 안에서 그 육체를 더 잘 보이기 위해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마음이 어두워서 우상 숭배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잘 하고자 하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우상 숭배입니다.
그것을 교회 안에서 보이고자 하는 것이 우상 숭배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더 잘 보이기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우상에게 하는 기도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육체가 바라는 그 무엇이 있다면 다 우상 숭배라는 것을 알고 성도는 이 우상과의 싸움에서 반드시 이겨야 합니다.
내 영혼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하늘을 우러러 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찾고 있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보다 더 귀한 한 영혼이 구원을 받는 것을 기뻐하시지 그가 이 세상에서 잘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영혼 구원이 얼마나 귀하고 놀라운 가를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는 우상에게 철저하게 빠져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 합니다.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를 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인들은 모두가 다 자기들이 주께 의지를 했다고 말하고 있을 것입니다. 주께 의지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무엇을 의지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가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습니까? 정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성경은 차라리 모르는 것이 더 낫 습니다. 그것이 우상에게 경배를 하게 만들고 있고 그것이 우상에게 기도를 하게 만들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교회 안에서의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우상 숭배를 하지 않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것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라로의 비유에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누가 부끄러운 사람입니까?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거지 나사로가 부끄러운 사람입니다. 다윗이 부끄럽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가 부자가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닌데 이 시대는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는 거지 나사로가 부끄럽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율법을 아주 잘 지킨 부자가 부끄러움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든지 심지어는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기 위해서 치열한 싸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부자가 되고 싶은가 하면 그것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고 또 우상에게 사로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10:11절을 보면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나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누가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자기 육체로 부자가 되려하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성도가 되어서 고운 베옷을 입고 있습니까? 은사를 나타내고 있습니까?
다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보고 있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움을 당하는 자도 교회 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행위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지만 그들의 행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을 지키고 있고 자기의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내 원수가 누구입니까?
자기 원수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로 안타까운 것은 자기 원수가 누군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찾고 있습니다. 원수된 것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율법에 의해서 사망을 당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수가 나를 이깁니다.
우리 인생은 율법을 항상 다 지킬 수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에게 져서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런 인생들을 위해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 율법의 요구를 이루셔서 완전케 하시고 율법을 십자가에서 못 박아 죽이셨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그 율법이 우리를 대적하지 못하게 하시고 우리를 율법의 멍에에서 벗어나게 하셨습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것을 다윗이 말씀을 하고 있고 이 말씀 그대로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다 이루셨습니다. 이 모든 구속의 일을 믿는 성도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육체의 부끄러움이 아니라 영혼의 부끄러움을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으려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요한계시록3:18절을 보면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라오디게아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흰 옷을 서서 입고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라오디게아교회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은 교회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 의의 옷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옷입니다.
그리고 율법의 의의 옷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은 성도는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의 의로 옷을 입은 사람은 결국에는 그 옷이 다 헤어져 벌거벗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아담이 에덴에서 범죄를 하고 난 후에 입은 무화과나무로 가린 옷이었습니다.
행위의 옷 반드시 벌거벗겨집니다.
성도는 이 행위의 옷을 입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옷을 입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차지도 않고 더웁지도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행위로 의로 옷을 입으면서 자색 옷과 고운 베옷으로 입고 있으면서 부자와 같이 자기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가 결국에는 음부의 고통 중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구속의 일을 믿지 않는 사람은 반드시 수치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무고히 속이는 자가 누군가 하면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자들이 무고히 속이고 있습니다. 그 율법으로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데 율법을 지키라고 하면서 아니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교회 안에서 해야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속여서 벌거벗게 만들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보이시고 주의 길을 내게 가르치소서”
새변역을 보겠습니다.
“주님, 주님의 길을 나에게 보여 주시고, 내가 마땅히 가야 할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주님의 길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는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알고만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의 길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 길을 어떻게 가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편 말씀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그 길을 보여 달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으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가 주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더 이상 무슨 길이 있겠습니까? 마땅히 가야 하는 그 길을 모르면서도 주님이 길이라고 앵무새처럼 떠들고 있습니다.
주님은 길입니다.
구원의 길입니다, 오직 주님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이 길이라고 하는 그들이 또 다른 길로 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고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자기들이 마땅히 가야 하는 길은 마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길인데도 지금 이 시대는 너무 행위에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그 행위가 결국에는 벌거벗은 수치가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두 가지 길입니다.
율법을 항상 다 지키는 일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하는 것을 음행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 둘 중에 하나만을 택해야 합니다. 내가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길이 무엇인가를 바로 알고 그 길로 가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생명을 얻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길을 가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거절하고 있습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주의 진리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진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의 진리로 나를 어떻게 지도하고 교훈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진리의 성령이 우리 안에 오셔서 이 성경에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게 역사를 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는 내 구원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종일 주를 바라나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주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종일 자기들이 일만 만들어서 그것을 하느라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 일이 다 우상 숭배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종일 바라시기 바랍니다.
내 구원의 하나님을 그렇게 바라시기 바랍니다. 종일이라는 말씀은 내 평생을 그렇게 바라고 살라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것이 내 평생의 시간을 다 쓴다 해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구원을 받을 정도는 우리가 알 수 있지만 성도는 종일 주를 바라는 것과 같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구원론에 대해서 다 배웠습니까?
그리고 다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제는 예수를 믿으니까 신앙생활을 잘하기 위해서 배우고 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시편에서 말씀하는 뜻을 바로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어리석은 자는 그렇게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평생을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기를 힘쓰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하옵소서”
얼마나 은혜가 넘치는 말씀입니까?
여호와여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이 영원부터 있었사오니 주여 이것을 기억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을 기억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주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또 사랑해 달라는 간곡한 말씀입니다.
주여 이것을 기억하소서.
정말 이러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내 입술의 고백이 이렇게 나오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긍휼하신 분입니다, 또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그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기억하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고 사랑해 달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시편을 보아서 알겠지만 다윗의 영성은 성도의 고백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지 않습니까?
내가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기억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나는 원수에 의해서 죽을 수밖에 없다는 간절한 고백입니다. 성도의 영성이라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 영혼에 대해서는 구하지 않고 육체의 것을 구하느라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넘쳐야 합니다.
이 시편을 보고 정말 내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시편은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믿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고 자기 입술로 이 문자를 고백하는 것으로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것을 위해서 주님을 바라면서도 주님을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마시고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하옵소서”
이 말씀도 많이 오해를 합니다.
자기가 젊어서 진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말아 달라는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죄와 허물이 무엇입니까? 구약의 죄와 허물은 이 시대 믿지 않는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해도 진리를 알기 까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때까지 진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육체적인 죄를 안 짓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가 젊었을 때는 주님을 몰랐습니다. 주의 길도 몰랐고 진리도 몰랐고 주님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도 몰랐습니다. 이 소시의 죄와 허물을 기억지 말아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주의 길을 알았고 주의 진리를 알았고 주의 긍휼하심과 인자하심을 알았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제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이 구원을 받았는데 주의 인자하심을 따라 나를 기억하시되 주의 선하심을 인하여 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도의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시편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편을 보면서도 다 육으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원수가 이기어 개가를 부르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자기 영혼이 벌거벗어 수치를 당하고 있지만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성경을 다 문자적으로 보고 행위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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