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6: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9쪽)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그들이 왜 순종치 아니 하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보고 거기서 복음을 본 것이 아니라 완악하여 져서 율법을 자기들의 육체로 지키려고 하다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우리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우리 이방인의 수가 충만하게 되게 하시려고 이스라엘의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으셨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셨다면 그들은 분명히 복음에 순종을 했습니다.
그들에게만 주시지 않았습니까?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들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이방인들 역시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는 이방인들은 자기들에게는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셔서 성경을 바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율법의 행위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영의 일을 믿을 수 있게 예표와 그림자를 통해서 기록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 이방인들의 충만한 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초대 교회를 통해서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이 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었는가 하면 지금과 같이 기독교를 통해서 율법을 지킨 것이 아니라 당시에는 어느 누구도 율법을 지키지 않은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 가난한 자들이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가지를 찍어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어떻게 긍휼을 입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것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어서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을 받은 자는 성령의 소욕과 육체의 소욕이 서로 거스리면서 대적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았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육체의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을 함으로 해서 이방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된 것이 복음에 순종을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내 육체를 대적하고 거스리면서 복음에 순종할 수 있게 역사를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의 가지 얼마를 꺾으시고 우리를 접붙이시기 위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해서 복음에 순종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밝히 보여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그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성령이 육체의 소욕을 그러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자하는 소욕을 거스리고 대적을 함으로 해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 규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입니다 할례라는 율법 한 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할례는 율법 전체 613가지를 대표하는 율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할레로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을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가르쳐 준 규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마무리를 하면서 할례도 무할례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접붙이심으로 말미암아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새로 지으심을 받은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있는 성도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이 규례를 지킬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에 빛을 보여 주심으로 해서 이제 이 규례를 우리가 알게 되었고 이 규례대로 행하는 자를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들을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해서 이스라엘에게도 이 규례로 긍휼을 입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베푸시는 긍휼로 이스라엘도 긍휼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서는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찌어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리고 우리 이방인입니다 복음으로 하면 이스라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택하심으로 하면 그 조상들로 인하여 사랑을 입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빛으로 오셨습니다. 왜 이방인에게 빛이 되시는가 하면 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못지않게 부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당시 율법으로 가난한 자였던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게 하셔서 그들로 믿고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이방인들이 이 시대에 와서는 이스라엘보다 더 순종치 아니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반복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사실 지금 이 시대 이방인들에게는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의 이방인들은 이미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이스라엘과 같이 순종치 아니하면서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베푸시는 긍휼로 이스라엘로 긍휼을 얻게 하시고 있지만 이방의 교회는 점점 더 율법주의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입니까?
저는 그들이 뭐하고 해도 저는 그들을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설령 저에게 어떠한 위해를 가한다 해도 저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좋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얼마나 많이 영혼들이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분명히 성경은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고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면 그들이 참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생각에서 나오고 있는 모든 것을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왜 할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들이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을 했고 그것이 할례를 받게 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도 그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를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교회입니다 저와는 비교도 되지 않게 복음의 모든 비밀을 다 알고 있었던 사도 바울입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그 교회에 있는 사람들도 할레를 받고 말았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율법주의에 빠져 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그것이 이성에 옳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로마서1장에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의 생각이 어떻다는 것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동성연애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동성연애를 반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심정적으로는 동성연애를 반대를 합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나니까 이제는 그것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는 세상의 일이고 우리가 나설 일도 아닙니다.
아니 우리가 나서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그 일이 도리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성경에서 복음을 알기 전에는 그들과 같이 정치는 하지 않았어도 그들의 의견에 동조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동조한 것까지도 우리가 순종치 아니하는 것에 빠진 것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반대를 하는 것이 있습니까? 내 이성적으로 그것이 충분히 공감이 갑니까?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동성연애와 같이 그것이 우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것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가난한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거룩함을 입게 했는데 이 시대는 거꾸로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그러나 긍휼을 입지 못한 자가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사도 바울이 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 이스라엘과 같이 순종치 아니함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어느 특정한 사람을 바리새인들과 같이 세리를 공격하듯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악이 무엇입니까? 그 악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악을 행하지 않는다고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악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생각과 같다면 그것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악에 빠져 있는 사람의 생각은 항상 악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순종치 않습니다.
어느 것에는 순종을 하고 어느 것에는 순종치 않을 수 있습니까? 세상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은 모든 것에게 다 순종치 아니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그들의 생각에 편승을 하려합니까?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무엇이라고 합니까? 빌립보서에서 자기를 어떻게 소개를 합니까? 내가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베냐민 지파요 율법의 의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행위만 버렸습니까?
아닙니다.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고 베냐민 지파고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인 것까지도, 그들의 생각까지도 다 버렸습니다. 그는 히브리인으로서 베냐민 지파요 바리새인이었지만 그 모든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의 생각까지도 버리고 도리어 그 바리새인의 생각이 그에게 원수가 되었습니다.
기독교인입니다.
그들 가운데 옳은 것이 있을 수 있습니까? 믿음은 감정으로 접근하면 안 됩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아닙니다. 율법주의자는 개입니다. 그들은 생각부터 모든 것이 다 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듣고 있는 성도님들이 그들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면 저는 제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전부 다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에게서는 좋은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그들은 전부 다 순종치 아니하는 자입니다 어느 것은 순종하고 어느 것은 순종치 아니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생각이 얼마나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룩이 있는 빵입니다
누룩이 없는 부분을 제하고 먹을 수 있습니까? 그들의 생각은 누룩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정말 냉정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감성적인 것이 아니라 분명해야 합니다. 이미 누룩이 들어가 있는 빵은 그 자체를 먹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만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 내가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까? 그 모든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들과 같은 생각까지도 버려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진리를 알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생각까지도 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우리를 돌감람나무에서 찍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입니까?
모든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이성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항상 악만 행하고 있는데 내 생각이 그들과 같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여러분이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이 문제가 영생과 관계가 없다면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마음부터 그리고 행위까지 모두가 다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우리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그대로 빠져 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저는 기독교인이 옳다고 하는 것은 다 그르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쁘다고 하는 것은 세상 적으로는 분명히 나쁠지 모르겠지만 자기들이 옳은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 나쁘다고 하고 있다고 그렇게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들이 왜 그렇게 나쁜 것을 비판하는가 하면 그것으로 자기들이 옳다 함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악한 자입니다
악인은 남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어느 것으로라도 남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남을 판단하는 그것이 정죄에 빠지기 때문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를 순종치 않는 본에 빠지게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세상이 모릅니다. 혹시라도 그런 판단으로 스스로 정죄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을 사는 것과 같이 살지 마시고 정말 영생을 위해서만 사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부탁드립니다.
로마서11:32절을 보겠습니다. (신 256쪽)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심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로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이제 또 조금 어려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은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했는데 32절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했습니다.
그럼 우리 이방인은 순종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이방인들이 순종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이방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로마서는 초대교회의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물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이지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면 이방에 복음을 전함으로 해서 그들이 긍휼을 입었기 때문입니다.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것은 이제까지 순전히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초대교회에 성도들이 긍휼을 입은 것입니다 그들이 긍휼을 입은 것과 순종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초대 교회에 성도들은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파되었습니다.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음으로 해서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복음이 전파가 되고 난 후에 과연 이방인들이 순종을 했는가 하는 문제는 별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에 일부의 사람들이 긍휼을 입어서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서 그 가지가 거룩함을 입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말씀이 이스라엘을 예표로 하고 있다 보니까 그들은 정말 순종치 아니한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어떻습니까? 우상을 섬기지도 않고 있고 아세라를 섬기지도 않고 있고 태상상을 숭배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11장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은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이 완악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밥상은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실족하여 넘어졌습니다. 또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그들의 가지 얼마가 꺾였습니다.
그리고 우리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접붙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볼 때 어떻습니까? 자기들은 바알에게 무릎도 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완악하지도 않습니다. 걸려 넘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듣고 있는 말씀은 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순종을 잘하고 있습니다.
표면적으로 그렇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교만한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모두가 같은 이야기를 합니다. 기독교가 타락을 했어도 자기만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들이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완악하여 진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심으로 이방인들에게 긍휼을 입게 하셨는데 이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보더라도 솔직히 순종을 하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지금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우리 성도들 역시도 예전에는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었는데 정말 기적과도 같은 하나님의 은혜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고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복음에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습니다. 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모든 사람을 가두어 두셨는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21:18-21절을 보겠습니다. (구 295쪽)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찌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볼 때 비유를 잘 이해를 하고 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습니다. 로마서11장25절에서 이스라엘의 더러는 완악하여 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다는 말씀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완악하여졌다는 것을 율법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완악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완악하다는 것은 율법을 지킨다는 말씀입니다 신명기의 말씀에서도 방탕하여 술에 잠긴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굳이 이 비유를 말씀을 드리지 않아도 이 아들이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을 비유로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아들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육체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닙니다. 성경을 볼 때는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있는 모든 아들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율법에 이미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율법을 지킨 자는 반드시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이미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완악하고 패역하여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아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부모가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에게 해당이 되는 율법이지만 이스라엘과 우리는 같은 진토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으면 우리 역시 순종치 아니합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은 순종을 하지만 우리 사람의 아들은 태생적으로 순종치 아니한다는 것을 이미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완악하고 패역하여 영적인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아니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 모두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 시대는 율법을 보면서도 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은 앵무새처럼 잘 외우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는 말씀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실제 성경에서 율법을 보면서도 전혀 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 율법을 보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깨달은 성도는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추상적으로 내가 마음으로 실인을 하고 우리는 그렇게 산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전혀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그 율법을 보았으면 그냥 내가 살인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실제 내가 살인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면 그는 율법을 보고는 있지만 죄를 깨닫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신명기의 율법을 보았으면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럼 내가 완악하고 패역하여 부모의 말을 순종치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추상적으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자라는 것을 깨달으면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왜 내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가 하면 나는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해서 저주를 받아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이미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체질을 우리보다 더 잘 알고 계십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 성도님들도 하나님의 긍휼을 입기 전에는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다가 긍휼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아집니까?
율법을 모르면 절대로 깨달아 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너무 추상적으로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 신명기의 율법을 보고 로마서에서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우리는 완악하고 패역합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다 이렇게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 성도는 이 율법을 보고 자기가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돌에 맞아 죽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이미 한번 죽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율법을 보면 우리는 어떻게 해도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보고도 전혀 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들이 왜 순종치 아니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이미 죽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대로라면 벌써 돌에 맞아 죽었어야 합니다. 우리는 태생적으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부모의 말에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돌에 맞아 죽어야 하는 인생이라는 것을 율법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도리어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모두가 다 방탕하여 술에 잠겨 있습니다. 율법의 술에 취해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술에 잠긴 자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자의적으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순종치 아니하였어도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는가 하면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신체를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그 신체와는 비교가 되지 않은 그리스도의 영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입어서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입니다.
조금 이해가 안 될 수 있습니다. 앞에 이방인들에 긍휼을 입은 것은 가난한 자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뒤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가운데 모두 가두어 주시고 나서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5: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그것을 욥을 통해서 보여주셨습니다.
욥은 율법주의자입니다 이 세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보다 율법을 잘 지켰습니다. 욥을 통해서 우리를 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욥을 순종치 아니하심에 가두어두시고 그로 율법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욥의 결말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없었다면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겠지만 욥과 같이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전에는 모두가 다 율법주의로 살았습니다.
긍휼입니다
불쌍하고 가엾게 여겨서 도와준다는 사전적인 뜻이 있습니다. 욥이 왜 그렇게 율법을 지켰습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욥의 결말을 보니까 어떻습니까? 욥이 구원을 받기 위해서 지킨 그 율법이 도리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힌 것이 되었습니다.
사람은 다 같습니다.
누구나 구원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가 율법주의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욥의 결말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누가 더 긍휼을 입은 자입니까? 욥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긍휼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을 잘못 지키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잘 지킨 사람이 있습니다. 결말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긍휼을 입은 자입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잘못 지킨 자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율법을 가장 잘 지킨 욥이 가장 많은 긍휼을 입는 자입니다
하나님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긍휼히 여겨주십니다.
11장 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긍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이방인들은 율법을 지키지 않아서 모두가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는데 사람은 태생적으로 율법주의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를 누구라고 합니까?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였을 때는 그것을 모르고 했는데 이제 복음이 계시가 되고 나니까 자기보다 더 긍휼을 입은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긍휼입니다
내가 지독한 율법주의에 있으면서 훼방자로 포행자로 그리고 핍박자로 살 때는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어떻습니까? 내가 누구보다 더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습니디.
욥의 결말입니다
결말로 보았을 때 욥보다 더 긍휼을 입은 사람은 없습니다. 욥은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았지만 결과적으로 볼 때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순종치 아니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욥을 말씀을 하면서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똑같이 율법을 지켰더라도 누가 더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까? 바로 욥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자기가 율법주의였을 때를 말씀하면서 내가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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