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8:33절을 보겠습니다. (신 159쪽)
“저희가 대답하되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리라 하느냐”
이스라엘입니다.
주님과 대화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을 하자 유대인들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케 되라고 말을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도 그들이 육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것을 인정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진리를 몰라서 자유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 자유하지를 못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에서 자유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믿음이 없어서 율법의 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자기들이 누구의 종이 되어 있는 줄을 모르고 육적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이스라엘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 했습니다 왜 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지 못했는가 하면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아직 진리를 모르고 있는 사람이고 그는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것으로 마치 믿음으로 말미암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모두가 알고 있어서 자기들이 믿는다고 하면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 못지않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진리의 하나님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자유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럴 것입니다
주님이 오셔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이 시대에 똑같이 말씀을 하신다면 교인들 역시 우리는 자유하고 있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우리는 진리도 알고 자유하다고 하면서 우리가 얼마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는지 아느냐고 대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 합니다
아니 그렇게 대답할 것입니다 우리가 일제 강점기를 거쳤지만 이제는 자유를 누리는 국가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대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처음 우리나라에 복음이 전해졌을 때는 자유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얼마나 자유하냐고 대답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 말을 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고 자유하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알아듣지를 못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똑같은 말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금 자유주의 국가에서 종교의 자유를 누리는 것을 보면서 그리고 마음껏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행위들을 보면서 자유하다고 대답을 할 것입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민주주의국가에서 사느냐 공산주의국가에서 사느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자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종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더 모릅니다.
이미 우리나라는 해방이 된지도 오래 되었고 또 공산주의와 전쟁을 하고 나서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것도 오래 되었습니다. 그런 자유를 누리면서 종교인들로 살아가고 있는 그들에게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인 줄을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조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아비 마귀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면서 종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었습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기도 합니다.
유대인의 조상이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렇게 할례를 자기 몸에 받았습니다. 그 할례는 자기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받았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어도 할례를 받았습니다. 왜 할례를 받았는가 하면 이스라엘 전체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할례를 받았습니다.
선지자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다 성경에서 복음을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했다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들이 할례를 받기 전에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누가복음1:59절을 보겠습니다. (신 88쪽)
“팔 일이 되매 아이를 할례하러 와서 그 부친의 이름을 따라 사가랴라 하고자 하더니”
세례요한입니다
그도 역시 난지 팔일이 되매 할례를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세상에서 난 자 중에 세례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가 주님의 앞에서 주님이 오실 것을 전하면서 살다가 죽은 사람입니다
그가 어떻게 할례를 받았습니까?
세례요한이 자의적으로 율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았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세례요한의 생각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유대인으로 태어나면 모두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할례라는 율법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부모에 의해서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례요한만 할레를 받았습니까?
주님도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복음2장21절에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할례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이라는 표징으로 할례를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몸에 하는 할례가 영원한 언약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인 이스라엘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은 다 할례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제자들도 마찬가지고 사도 바울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할례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할례를 안 받았습니까?
이스라엘 사람은 다 받았습니다. 성경에서 진리를 알고 있던 선지자들의 아들들도 할례를 다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 민족에게 있어 할례라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당연하게 유대 지파의 자손으로 오셨기 때문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자의가 아니라 이스라엘에게 있어 할례는 너무도 당연한 표징이라는 말씀입니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중에 율법을 지켰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한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할례라는 것을 바로 알면 제가 드리고 있는 말씀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가 아무리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해도 날 때부터 복음을 깨달아서 자의로 할레를 받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난지 팔일 만에 받는 할례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이 할례자의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율법은 자기가 나중에 복음을 깨달으면 안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이스라엘 전체는 짐승이라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짐승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에게서 할례를 받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가 무엇을 하는 줄도 모르고 마치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소와 같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대한 짐승입니다
이스라엘은 이미 짐승이 되어 있었습니다. 언제부터 짐승이 되었는가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중간 중간에 선지자들을 세워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그들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할례는 의무적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짐승 안에 있으면 다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짐승 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자들을 세워서 구원을 하셨습니다. 지금 이방의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한계시록의 두 짐승은 이스라엘과 이방의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고도 무조건 자기들은 짐승이 아니고 다른 곳을 짐승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자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우리 믿음으로 말미암은 이방인만의 조상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다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도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을 부르셨고 또 주님께서는 가난한 자들을 만나 영접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할례는 그렇습니다.
내가 받고 싶다고 해서 받고 안 받고 싶다고 해서 안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난지 팔일이 되면 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세례요한도 마찬가지고 또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에게도 아브라함은 조상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8: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9쪽)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어늘”
이스라엘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곧 할례를 받은 자 뿐 아니라 우리 조상 아브라함의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조금 더 쉽게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할례를 받은 사람들이란 그저 할례를 받은데 그치지 않고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보여준 믿음을 본받아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라면 의무적으로 받았습니다.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받았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았어도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레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비록 할례는 받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이 무할례시에 보여 주었던 동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주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의 행사를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행사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을 본 받는 것이 아브라함의 행사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 받아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행하고자 한다고 말씀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우리 이방인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난지 팔일 만에 모두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브라함의 행사를 한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비 마귀의 욕심을 그대로 행하면서 율법주의가 되고 말았습니다.
할례를 받았습니까?
그것은 이미 지난 일입니다 아니 이스라엘에서 태어나는 모든 사람에게는 필연적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은 이스라엘이라 해도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사람이 있다면 그 역시도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행사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4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그가 어떤 할례를 받았는가를 말씀을 하면서 그 할례는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가 무할례시에 믿음으로 된 의를 인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인친 것은 이는 무할례로서 믿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어서 이방인 중에 믿는 자가 아브라함과 같이 의로 여기심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습니다. 그것은 주님도 받으셨다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할례자의 조상도 되는데 그 할레자는 누군가 하면 할례를 받은 것으로 그친 것이 이니라 그들이 할례를 받고 난 후에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 역시 믿음의 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을 왜 부르셨습니까?
그리고 그를 왜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습니까? 우리 이방인들이 그와 같은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이스라엘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에게도 의를 주시기 위해서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의 행사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가 우리 이방인들의 믿음의 조상도 되고 이스라엘의 조상도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우리도 어려서는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것을 할례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우리가 모르고 율법을 지켰을지라도 이제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고 있다면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한번 율법주의에 빠지면 거기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우리 이방인도 믿음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받았을지라도 이스라엘도 역시 믿음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철저하게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로마서를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빠져서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오직 믿음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비밀입니다
이스라엘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그가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성경을 보아서는 알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을 보아서 알 수 있었다면 이스라엘은 마귀의 욕심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행사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갈라디아서5:5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좇아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들입니다
우리 성도는 믿음의 자취를 좇은 자들입니다 어떻게 믿음의 자취를 좇을 수 있는가 하면 성령으로 믿음을 좇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야 믿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성령이 오십니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을 수 있는가 하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설교를 듣는다고 복음을 듣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입니까?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복음이 전파된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 미국은 복음이 있었습니까? 그들 역시도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그들이 다른 복음인가 하면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면 다른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목사들 중에서 성령을 받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저를 비난해도 좋습니다. 저는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성령을 받은 목사를 만나보지를 못 했습니다 믿음이 있어야 아브라함의 아들이 될 수 있는데 불행하게도 우리나라는 처음부터 다른 복음이 들어와서 듣고 믿을 수 없었습니다.
성령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령은 반드시 복음을 들어야 받을 수 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어느 사람에게 성령을 보내주실 수 있습니다. 그럼 그 한 사람은 성령을 받아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있어야 복음이 전해지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들어야 듣고 믿음으로 성령이 오신다고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좇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됩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성령으로 믿음을 좇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가 아브라함의 자손이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믿음을 모르고 있고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서 성령을 거역하고 있습니다. 아니 대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어디에 있습니까?
마음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가 교회에 나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을 부르고 헌금을 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내 안에서 하나님의 역사로 구속의 일이 믿어지는 것이 믿음을 좇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릅니다.
이 시대는 율법도 모르고 믿음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도 누군가 믿음이라고 하면 믿음이 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 교회의 목사가 믿음으로 하라고 하면 모든 것이 다 믿음이 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좇은 사람은 사라지고 종교에 의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지만 믿음이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내가 믿고 싶다고 해서 믿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주셔야 합니다. 어떻게 주시는가 하면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게 해서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믿음을 좇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좇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4: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요 오직 믿음의 의로 말미암은 것이니라”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온 세상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그가 믿고 의롭다는 인정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온 목적을 모르고 다른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이방의 교회는 이스라엘보다 더 타락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입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지만 이 시대 역시 똑같이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참으로 이해가 안 되는 일은 이스라엘이 한 일은 율법이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일은 믿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똑같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이스라엘이 하면 율법이고 자기들이 하고 있으면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이나 그 후손에게 세상의 후사가 되게 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춰주시고 있지만 이스라엘보다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세상의 후사입니다
아브라함이나 그 자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일경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언약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천국의 모형인 가나안을 유업으로 얻은 것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더 명확하게 말씀을 해야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율법에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거대한 포승에 묶여서 꼼짝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더 이상 말을 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세상의 후사가 될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그리고 그 후손이 누구입니까? 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11-12절에서 그 후사가 누군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안 풀리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명확하게 말씀을 해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일로 후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디도서3:7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저의 은혜를 힘입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는가를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디도서에서는 저의 은혜를 힘입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만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습니다. 그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어느 누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고 있습니까? 어느 국가도 종교도 그런데는 없습니다. 오직 성경에서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은혜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까? 그가 율법의 행위를 해서입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율법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믿어서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는데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면 그것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무할례 시에 가졌던 믿음의 자취를 좇은 모든 사람에게 의롭다 하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어서 이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은혜를 받지 못해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을 보면서 영의 일을 아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육체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영의 일을 알아야 은혜를 알 수 있는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롭다 하심입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의롭다 하심을 마치 자기 육체가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죽었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육체를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살아 있는 육체를 보고 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을 의롭다 하신 것도 은혜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자취를 좇는 모든 사람을 의롭다 하시는 것도 은혜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어서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까지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들이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후사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아니라고 하면 받아들여야 하는데 어떻게 하든지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도로서 조금 더 의롭게 사는 문제라면 우리는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면 후사가 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삶입니까?
그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살고 죽는 문제의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단순히 성도의 삶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너무도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정말 암담합니다.
그리고 참담합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끌려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차라리 세상 죄인으로 산다면 이런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더구나 인척 중에 예수를 믿는다고 하다가 죽는 사람들을 보면 참담한 심정을 금할 수 없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기에 더욱 가슴이 아픕니다.
차라리 세상에서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마음이라도 편하겠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평생을 단 한 번도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하고 종교에 의해서 율법을 지키다가 죽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세상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들어 보지도 못한 그 사람들이 불쌍하기만 합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습니까?
천국은 따 놓았다고 자신 만만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수많은 율법을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것으로 자기가 천국에 들어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속이는 자도 나쁘지만 속는 자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거짓 선지자가 백 명 중에 한두 명 된다면 예수님께서 거짓 선지자를 삼가라고 말씀을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교회를 보면 모릅니까? 진리를 전하는 자가 백 명 중에 한 명이라고 있으면 다행입니다 아니 만 명 중에 한명이라도 있으면 그것 역시 은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모르겠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목사가 그리고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렇게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후사가 되리라고 하신 언약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아니 성경을 보는 눈이 다 소경이 되어서 그래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여러분을 망하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복음과 율법의 싸움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이고 율법은 내가 행위를 해서 나타나는 의입니다 이 두 가지의 의의 싸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두 의는 서로 적대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무엇을 말씀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로 여기심을 받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왜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가 하면 세상의 후사가 율법의 의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강조를 하고 또 강조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6쪽)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라 애굽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가나안 땅을 그 후손에게 주시려고 그들을 이끌어 냈습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의 강한 군대에서 이스라엘을 꺼내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 스스로는 절대 나올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기사와 기적을 보이셔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몇 명이 나왔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계수를 해서 알고 있습니다. 장정만 60만 명이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들어가지를 못 했습니다 물론 그 중에는 구원을 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표면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예표는 60만 명 중에서 단 두 명이 가나안에 들어갔다는 사실입니다 왜 그들이 못 들어갔는가를 히브리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입니다
그것은 천국을 모형하고 있다는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두 명이 들어갔다는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스라엘만 두 명이 들어갑니까? 성경은 예표와 그림자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도 그와 같다는 것을 성경이 우리에게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의 숫자를 이야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60만 명 중에 두 명입니다 왜 그들이 들어가지를 못했는가 하면 믿음이 없어서 들어가지를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적은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올 때에 믿음이 있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가진 자가 적습니다. 어느 정도 적은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의 의로 후사가 될 사람이 얼마나 적은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고 실제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그가 아무리 오직 믿음이라고 해도 그것은 오직 믿음이 아닙니다. 아니 오직 믿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입니다 후사는 율법의 행위를 하는 자가 아니라 오직 믿음을 가진 자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댓글목록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37-2,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0) | 2024.08.10 |
---|---|
37-1,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0) | 2024.08.10 |
36-1, 저가 할례의 표를 받은 것은 (0) | 2024.08.07 |
35-2,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0) | 2024.08.03 |
35-1,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0) | 2024.08.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