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5-2, 너희와 나의 믿음을 인하여

윤주만목사 2024. 6. 1. 07:44

로마서1:14절을 보겠습니다. (239)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문명인에게나 미개인에게나 또 유식한 사람에게나 무식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복음의 직분을 받은 자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도의 직분을 받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그것을 전도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번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 번역이 더 성경적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개인적으로는 무슨 빚을 졌겠습니까?

그러나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사도 바울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일에 얼마나 책임감을 가지고 살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이 시대도 복음을 가진 자의 마음이 같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대는 복음이 사라졌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이 되면서부터 복음은 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아니 기독교라는 종교가 있기 전부터 이미 교회는 타락의 길로 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복음이 있는 성도가 교회사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런 말씀들을 감성적으로 이용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감성 때문에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가 되었고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을 볼 수 있습니다. 비록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서 번역이 되었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성경을 우리가 지금 보고 있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우리가 복음을 깨달을 수 있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성경이 없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는데도 복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데 성경이 없다면 그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면에서는 분명히 기독교인들에게 감사해야 하겠지만 그들은 너무 종교적으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도 복음의 직분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복음의 비밀을 알고 있는 성도는 그것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헬라인과 같이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자기들이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얼마나 자랑하고 있습니까? 솔직히 저는 머리가 나빠서 성경을 외우는 것을 잘 못 합니다. 아니 제가 쓴 설교도 다시 찾아 볼 정도로 기억을 하는 재능은 정말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헬라인입니다

복음을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헬라인과 같이 교회 안에서 자기 지식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야만인과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 모든 사람에게 복음의 비밀을 먼저 알고 있는 성도는 전도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어렵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면서도 율법의 행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을 전하면 벌써 거부 반응부터 나타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책임이 있습니다.

전도할 책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초대 교회의 사도 바울입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에는 사도들이 있었습니다. 사도들 뿐 아니라 집사들까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이 유대인이었고 나중에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해서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늘 복음을 전하면서 느끼는 것이지만 너무 힘이 듭니다, 때로는 편히 쉬고 싶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솔직한 인간적인 생각입니다. 강해설교를 쓰고 강의를 한다는 것이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물론 기독교의 목사들에게는 그것이 쉬운 일일지는 몰라도 적어도 제게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습니까?

이 시대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하는 자가 있습니까? 저는 아직까지 만나 보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시대 복음을 전하게 하시는 것은 큰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육체가 조금 힘이 들더라도 참고 이 복음을 전하려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을 전하는 자가 없기 때문에 해야 한다는 책임입니다

책임입니다

이 책임을 저 혼자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아카데미강의에 참석을 해서 같이 주의 만찬을 나누고 또 여러 가지로 도움을 주고 있는 모든 일들이 다 함께 이 시대 책임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고 있다고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전도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초대교회보다. 복음을 가진 사람이 더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음을 전해서 열매를 맺게 해야 하는 책임이 우리 복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이것을 다 알고는 있지만 전도를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은 초대교회보다 더 어렵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인이 되어서 복음을 철저하게 배척을 했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배척하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그들에게 빚진 자로서 살아가야 합니다. 아니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는 성도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이제 없지만 그래도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을 성령의 감동을 받아 바로 풀고 있습니다. 이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도 느끼겠지만 우리는 아주 적은 숫자입니다. 그럴지라도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먼저 복음을 깨달아 직분을 받은 우리에게는 반드시 이것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4:5절을 보겠습니다. (346)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디모데입니다

사도 바울이 내가 낳았다고 하면서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산고의 고통을 겪으면서 이방에 복음을 전해서 열매를 맺게 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잘 알고 있는 디모데나 디도 같은 사람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이방인입니다.

디모데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직무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복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주님께서 맡기신 것이고 주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부탁을 하신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전도의 직무는 당시 사도들과 그리고 장로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대는 초대교회보다도 못 합니다. 저 역시도 복음을 전한다고는 하지만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만 전하고 있습니다. 늘 생각하지만 성경을 볼 때마다 제 한계를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구원에 대해서 만이라도 전할 수 있어 감사하게 생각을 하고 있고 이 책임을 가지고 지금도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임입니다.

정말 이 세상에서 잘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저는 지금 이 시대 상황이 초대 교회보다 못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사도들이 있었고 복음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이스라엘이 완전하게 유대교인이 된 것과 같이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앞으로 더 힘이 듭니다.

아무리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점점 더 적어질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는 이 책임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저 혼자서 할 일이 아니라 여기서 복음을 듣고 있는 모든 성도님들이 함께 해야 합니다.

그런 역사는 없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할 때에 삼천 명이 회개를 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주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역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런 기대를 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제가 포기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분명히 전도의 책임이 있는 성도입니다.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동일하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입니다 아니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네 직무를 다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근신하며 고난을 받으면서 전도의 일을 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솔직히 저는 늘 말씀을 드리지만 목사가 되고 신학을 공부한다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신학을 공부하게 하시고 또 성경을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아카데미 강의를 하게 하시면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저도 이제 와서 생각하면 제가 이 복음을 어떻게 깨달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아니 사람의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이 시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복음을 누가 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성령의 감동을 받아 깨닫고 있는 이 복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복음을 전하는 책임을 가지고 살아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사도 바울에게서 배웠습니까?

그렇다고 복음이 있는 사람에게서 배웠습니까? 저는 기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사람에게서 배웠다면 이렇게까지 말씀을 드리지 않습니다. 물론 신학이라는 공부를 사람에게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신학에서 배운 모든 것을 거의 다 버렸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솔직히 이제까지 제가 풀어서 기록한 설교도 그렇지만 이제 또 로마서를 쓰면서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모두가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져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교제케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는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그래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에게서 복음을 들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저도 정말 그런 사람이 이 시대에 있다면 듣고 싶습니다. 성경의 깊고 오묘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저는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제가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복음이라는 것이 얼마나 복된 것이라는 것을 알라고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하늘의 복입니다

그 복을 우리에게 거저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한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복음을 뿌려 주셨습니다. 그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 안에서 자라게 하시고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셨습니다.

그 주신 것이 천국이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그런 것을 우리에게 거저 주셨습니다. 순전히 하나님의 역사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천만 명이라는 기독교들 중에서 우리를 선택하셔서 하늘의 보화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제 그 보화를 가지고 있는 성도는 주님의 부탁의 말씀과 같이 이것을 전해야 합니다.

고난이 따릅니다.

복음을 전하면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분명히 고난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이 복음을 사람들이 감사하게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핍박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나라의 열매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성령이 감동해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에게나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갖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말씀한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도 아닌 것을 가지고도 얼마나 열심을 내고 있습니까? 자기 종교를 전하려고 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거짓에 속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는데 우리가 가진 것은 참입니다.

진리입니다

저 혼자가 전도인이 아닙니다. 이 복음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은 모든 성도들이 다 전도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임재 하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전도인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물론 사람마다 전하는 방법이 다를 수 있지만 이 일을 위해서 사시기를 바랍니다.

생명입니다

그것을 얻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것을 주셨을 때는 우리에게 그 일에 직분을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고 있고 믿는 성도는 전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만 빚진 자가 아니라 우리 역시 빚진 자입니다.

고린도전서1:21절을 보겠습니다. (264)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하는 소위 어리석다는 복음을 통해서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세상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는 세상입니다. 성경을 누가 봅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보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세상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니까 불교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서 마치 절을 떠나 세상으로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교회 밖을 세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입니다

마치 천국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구원의 방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라는 세상에 나와서 어떻게 되었는가를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광야는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뿌리 깊은 불교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니까 이런 말씀들을 보고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지 못 합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사람의 지혜로 성경을 보아서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 가지만 알아도 이 말씀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325년에 아타나시우스에 의해서 채택이 된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하나님을 알지 못하게 가로 막고 있지만 세상이 되어 있는 교회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왜 삼위일체가 만들어 졌습니까?

교회가 세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려고 하다보니까 삼위일체라는 것을 만들어 놓고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것을 비유로 할 만한 말씀이 없는데도 세상이 되어 버린 교회는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삼위일체라는 자기들이 만들어 놓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참으로 신비롭습니다.

그것이 보이는 자에게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삼위일체라는 교리가 325년에 채택이 되었는데도 그것을 아직까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그것이 더 불가사의합니다. 물론 그 중간에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래도 너무 그 숫자가 미미하기만 합니다.

세상 지혜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 성경을 보는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그것으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인도함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 자체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없게 한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본다고 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삼위일체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이라는 것이 보이지가 않습니다. 세상의 지혜로 교회 안에서 성경을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세상의 지혜가 무엇인가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물세례를 주었습니다.

세례 요한만 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세례를 주었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니까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와서도 세례를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세례를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이렇게 세례 요한이 세례를 주고 주님의 제자들이 세례를 준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합니다.

이렇게 성경에 문자 그대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세례를 주고 있다면 그것이 세상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세례를 주지 않는 교회는 거의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 세례를 가르쳐 주기 위한 예표인데도 아직까지도 교회는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분명히 성경적으로는 침례가 맞습니다. 세례는 번역상의 문제고 본래는 침례가 맞습니다. 그래서 침례교와 몇몇 교단에서는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침례를 주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침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그것을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 세상 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세례를 주는 것 한 가지만 보아도 그들은 세상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성경을 보고 그대로 행하게 한 것이 하나님의 경륜이고 그렇게 세상 지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어리석음에 빠지게 만든 것이 하나님의 경륜입니다. 소경이 되어 있는 사람은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

세상 지혜로는 복음이 어리석은 것으로 들려지게 되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교회에서 하는 세례가 세상 지혜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을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우리에게 어리석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미련해서 성경도 몰라서 구원을 못 받는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 그 말씀입니다

세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한 일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에게 미련하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대 하고 있는 성찬식을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성경을 몰라서 구원을 못 받으려고 저렇게 하고 있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물세례도 안 합니다

그리고 성찬식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도 안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미련하다고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어리석다고 하는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의 미련한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미련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미련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어리석어 보이는 그 복음이 우리를 구원해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1:15절을 보겠습니다. (239)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책임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이 복음을 전할 직분을 받은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도 복음을 알고 있다면 사도 바울과 같이 직분을 받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이 직분의 일을 부탁하셨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사도 바울이 처음으로 이방에 복음을 전하던 때입니다. 지금과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직접 주님으로부터 음성도 듣고 자기가 이방의 사도로 세움을 입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성령이 오신 성도만이 이 복음의 비밀을 알게 하시고 있습니다.

같이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의 기독교는 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없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이 정말 꿈만 같습니다. 마치 꿈을 꾸는 것과 같다는 표현이 맞습니다. 어떻게 이 복음을 우리가 이 시대 교제를 할 수 있습니까?

초대교회는 그래도 낫습니다.

비록 핍박이 심해서 순교의 피를 흘렸지만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많아서 복음을 확실하게 들을 수 있었습니다. 아니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만 해도 복음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살아 있는 그때에 이미 교회 안에는 벌써 다른 복음이 들어왔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복음이 없습니다.

정말 그리스도편지가 아니고는 복음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라고 해서 보았지만 역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 시대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이용하면서 자기들이 마치 사도 바울과 같이 간절한 마음이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복음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복음을 가진 성도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는 그들도 그렇게 열심을 내고 있는데 우리는 말을 해서 무엇 하겠습니까?

복음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면서 고난을 받을지라도 우리는 전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한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수고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 뿐 아니라 초대 교회에 성도들은 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얼마나 많은 성도들이 죽었는가를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좋습니까?

우리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초대 교회와 같이 죽이지는 않고 있습니다. 물론 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초대교회보다 더 심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초대 교회는 그만큼 잘 받아들였기 때문에 순교를 당했지만 이 시대는 순교는 당하지 않는 대신 한 영혼을 구원하기가 그때보다 더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5:19절을 보겠습니다. (291)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저희의 죄를 저희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지금은 사도가 없습니다.

사도만 없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가진 자도 초대 교회보다 더 없습니다. 이 시대 100명이 넘어도 여러분에게 이렇게 까지 말씀을 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알고 있지만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그리스도편지의 회원의 숫자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지방에서 멀어서 사모하는 마음은 있지만 못 오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있고 디모데가 있고 아니 초대교회의 여러 집사들이 있다면 이렇게 말씀을 안 드립니다. 정말 우리는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물론 우리가 이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구원을 못 받는 것은 아닙니다. 제가 강조를 한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강요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부탁입니다.

얼마나 간곡한 표현입니까? 이 세상에 성도가 많이 있다면 이렇게까지 부탁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한 시대에 성도가 1000명만 되도 성경에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한 시대에 복음을 가진 자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너무 적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부탁하시고 있습니다. 일꾼이 많이 있다면 굳이 부탁을 하지 않아도 아마도 서로 알아서 한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직분을 받은 성도가 너무 적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가진 자입니다

성경에서 이 복음의 비밀을 아는 자가 너무 적습니다. 이 시대 얼마나 적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부탁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은혜를 받은 자입니다.

은혜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것을 거저 주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 은혜를 주시고 다른 것을 부탁하신 것이 아니라 그 은혜를 전해 달라고 우리에게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 복음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정말 광야에 홀로 사는 것과 같고 벽에 대고 외치는 느낌을 받고 있지만 그래도 이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것을 우리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바다 모래 같이 많지만 이 일을 우리에게 부탁하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을 하기 위해서 헌신을 해야 합니다. 아니 주님의 은혜를 받는 성도라면 당연히 은혜를 주신 자의 부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제가 말씀을 안 드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 복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내가 미약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를 통해서 한 영혼이라도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면 그보다 더 귀한 일은 없습니다. 세상에 너무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분명히 맞지만 그래도 우리에게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어느 신학교입니까?

그리고 어느 목사입니까? 한 사람이라도 전하고 있다면 이런 말씀을 안 드립니다. 아니 대형교회 하나라도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있다면 이런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주님께서도 이 시대 믿음이 있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아시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우리에게 부탁을 하시고 있습니다.

로마입니다

당시 로마는 상당히 먼 거리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만 그래도 교통이 발달을 해서 그때보다는 많이 가까워 졌습니다. 이 시대는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있습니까? 때로 고난으로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이 일에 부탁을 받은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음전하기를 원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먼저 내가 완전하게 복음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가르칠 정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 까지 이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로마에 가기를 원하는 것도 그가 복음을 완전히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먼저 화목해야 합니다.

복음을 알아야 화목할 수 있습니다. 먼저 내가 화목하고 난 이후에 주님의 부탁을 들을 수 있는 것이지 아직 화목하지도 않은 사람은 해당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를 보면 화목하지도 않은 사람들이 주님께서 부탁하셨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2:4절을 보겠습니다. (329)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기쁘게 하는 일입니까? 물론 복음을 전해서 듣고 믿어서 구원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기쁨이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습니까? 사람이 구원을 받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구원을 받습니다. 이 영의 일을 깨닫지를 못하면 회의론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럴지라도 누군가 믿음이 없어 회의론에 빠질지라도 구원을 받은 성도이기 때문에 주님께서 부탁하신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회의론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회의론에 빠진다면 그 또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 인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회의론에 빠지지 않을 수 있지만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면 자칫 회의론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우리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내 안에 탄생이 되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에게서 난 내가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서 난 내가 구원을 받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복음입니다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전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종교는 사람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의 기복 같은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하는 복음은 오직 영의 일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환심을 사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환심을 살 수 없는 것이 우리가 전하고 있는 복음입니다.

아니 도리어 고난을 받습니다.

고난이나 안 받으면 그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전도를 하는 그 일을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전하면 기뻐하십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원했습니다.

성도 한명입니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는 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성도를 통해서 복음이 전파되고 있기 때문에 기뻐하시고 있습니다. 정말 부탁을 드립니다. 이 시대는 초대 교회보다 더 암담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도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할 수 있는 대로 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이 은혜를 받은 성도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라고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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