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15강,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윤주만목사 2019. 6. 28. 08:01


115,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사도행전 16:11-15절을 보면

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믿음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모르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를 더욱 불쌍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믿음과 행위가 교묘하게 혼재 되어 있고 자기 행위로 믿음을 보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꼭 그렇게 보입니다.

야고보서를 보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라는 그 말씀을 이해하지를 못해서 더욱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차라리 모르면 가만히 있는 것을 좋습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자기가 잘 모르고 해석이 안 되는 야고보서를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까지 말했습니다.

 

오히려 지혜로울 수 있습니다.

그는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을 의지해서 종교 개혁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그 말씀에 배치되는 야고보서의 말씀이 도저히 이해가 안 되니까 해석하는 것을 포기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주석을 쓰면서도 야고보서는 쓰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안 하는 것이 좋습니다.

타락으로 가는 지름길이 무엇인가 하면 모르는 성경 말씀을 억지로 해석을 해서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 했다가도 또 야보고서의 말씀을 보면서는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맞는데 행위도 있어야 한다는 애매모호한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이 결국 열심으로 나타납니다.

그 열심이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를 모르고 모조건 행위가 좋으면 좋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특히 이 시대는 전도에 거의 미치다 시피 합니다.

 

전도에 대한 예화가 수 없이 많습니다.

그런 예화들이 결국 행위를 강조하게 되고 믿음 보다는 행위가 더 우선시 되고 있습니다. 마치 전도를 못하면 성도가 아닌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예화들을 사용해서 성도들을 겁박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전도하면 됩니까?

내가 예수를 전하면 그가 예수를 믿을 수 있습니까?

아니 내가 잘 못 전하니까 교회 안으로만 끌고 들어오면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고 그러다 보니 자꾸 전도에 대한 행위가 강조가 되고 있습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내가 노력을 한다 해도 그를 구원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단지 교회 안에 끌고 들어온 것으로 마치 자기가 구원을 시킨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만 명을 교회 안으로 데려 왔다 해도 그를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교회=구원이라는 공식이 붙어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를 믿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그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도 않고 예수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는가 하는 것은 무시해 버리고 그저 교회 안에 들어온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합니다.

 

예수님도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할 때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모두 다 믿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적과 기사를 보이시면서 또 복음을 전했는데도 그 당시 아주 적은 사람들만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오천 명이 떡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병자들을 다 고쳐주셨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더 이상 얻을 것이 없으니까 모두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복음을 전하셨는데도 떠나가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였는데 그리고 복음을 받아들이지를 않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교회 안에 들어 온 것으로 그리고 자기가 복음을 전한 것으로 그들이 구원을 받은 것으로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66-67절을 보면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셨습니다.

아마 지금 같아도 그런 기적을 자기 눈으로 보았다면 모두가 놀라고 오직 예수님만을 쫓아다니려 할 것입니다 자기들의 먹을 것을 해결해 주고 또 병을 고쳐주고 했는데 누가 안 따라 가겠습니까?

 

누가복음에 발에 밟힐 정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문제가 해결이 되는데 누가 안 따르겠습니까? 지금 같아도 인산인해를 이루고 예수님이 나타나는 곳에는 서로 예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기 위해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다투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떡을 먹고 배가 부르고 난 후에 영생에 대해서 하늘에 대해서 말씀을 하니까 어렵다고 하면서 모두가 떠나가고 있습니다.

 

육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니까 왕을 삼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영적인 문제를 가지고 말씀을 하니까 하나 둘씩 모두가 예수님의 곁을 떠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영적인 문제를 전하면 오히려 저항을 하고 심지어는 공격을 합니다.

 

기독교는 영의 종교입니다

그리고 영혼의 구원에 대한 문제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미 육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에 다 기록 되어 있습니다. 뭐라 기록해 놓았느냐면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회 안에는 육적인 사람과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육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모두가 육체를 입고 있기 때문에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문제에 들어가게 되면 육적인 사람들은 견디지를 못하고 또 이해를 하지 못하고 떠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왜 그들이 떠나 가냐면 그들은 처음부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1,“드로아에서 배로 떠나 사모드라게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압볼리로 가고 거기서 빌립보에 이르니 이는 마게도냐 지경 첫성이요 또 로마의 식민지라 이 성에서 수일을 유하다가 안식일에 우리가 기도처가 있는가 하여 문 밖 강가에 나가 거기 앉아서 모인 여자들에게 말하더니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정말 그는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을 시키기 위해서 자기 생명까지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수고를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했고 또 기독교 교리의 모든 기초를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는 복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깨닫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로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면서 완전한 믿음으로 든든히 섰습니까? 아무리 사도 바울이라고 하지만 그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모두가 믿음을 가졌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교회 안에 들어와서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나중에는 사도 바울을 공격까지 했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전해 듣고 교회에 들어와 신앙생활을 하다가 왜 타락을 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더구나 복음에 대해서 완전하게 깨달은 사도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도 믿음을 갖지 못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전도를 하러다녔습니다.

만나는 사람마다 어떻게 하면 자기가 간직하고 있는 복음을 전할 수 있을까 늘 고민을 했고 또 수고를 기꺼이 감당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본문의 말씀과 같이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다가 강가에서 옷에 물을 들이던 여자들을 발견을 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두아디라 성의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들었는데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하게 하신지라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그가 행한 일들을 익히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주께서 그 여자의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청종케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고 완전한 복음의 경륜에 참여를 했다 해도 주께서 그 마음을 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수는 있어도 그 영혼을 구원에 이르게 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니라 그 어느 누구라도 그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이고 주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구원은 선택입니다

이것을 부정하는 순간 기독교의 기초가 흔들립니다.

주께서 그 마음을 열지 않으면 사도 바울이 아니라 그 이상의 사람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아무리 열심을 가진다 해도 그래서 그가 교회 안에 들어왔다 해도 주께서 그 마음을 열지 않으면 믿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행위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왜 이단에 빠집니까?

교회가 하찮은 이단에 왜 흔들거립니까?

바로 그 이유는 기초가 든든하지 못하고 또 그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직 믿음을 바로 갖지를 못했기 때문에 떡을 먹다가 더 좋은 떡이 있으면 그리고 몰려가는 것입니다 이단이 와서 흔드는데 흔들린다는 것은 한 마디로 그 교회가 복음이 없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자기가 행하고 있는 행위의 열심을 보면서 믿음으로 착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이단이 와서 한 마디만 하면 우수수 낙엽이 떨어지는 것 같이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입니다 기초가 든든하면 믿음의 뿌리가 반석 위에 서 있으면 어떤 이단이 와서 절대로 흔들이지 않습니다.

 

물론 그 이유는 단 한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말씀을 들어도 그것을 청종하지 않고 그저 육신의 문제에만 관심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더욱 열심만 가득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열심이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모르고 무조건 복음만 전하면 다 믿을 것으로 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다니는 교회에 나오면 마치 그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상관이 없습니다.

그를 구원하셨는가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고 그저 교회라는 곳에 나온 것으로 마치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 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에 나오는 것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는 성도들에게 있어 꼭 필요합니다.

 

다만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에 대한 문제를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 단지 광야 생활인데도 마치 구원의 방주처럼 생각을 하고 그렇게 인식을 시키고 있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왔다고 다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정통의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과 믿음은 전혀 다른 것임을 모르면 나중에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때는 후회를 해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요한복음6:65절을 보면

또 가라사대 이러하므로 전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서 오게 하여 주지 아니하시면 누구든지 내게 올 수 없다 하였노라 하시니라

 

내가 전해서 그가 믿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전도를 해서 그가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믿게 그 마음을 열어 주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아무리 복음을 깨닫고 있어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지 않는다면 그는 복음을 믿을 수 없습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작정된 자를 믿게 하시고 있습니다.

마치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그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지금 교회가 더욱 전도에 열심을 내고 있지만 그 열심이 과연 누구를 위한 열심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위한 열심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행한 열심인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거의 100%의 사람들이 자기는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굳게 믿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는 것에 조금도 의심을 하지 않았지만 결국 그들의 열심은 모두가 자기들을 위한 것이 되어서 그 열심이 자기들에게 오히려 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고 나를 살펴보는 사람이 지혜롭습니다.

 

내가 전도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수만 명을 전도를 하면 무엇 할 것입니까? 그 중에 하나도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지 않아서 믿음이 없다면 그 열심은 사람의 열심이 결국 보이는 교회를 위한 열심이 되고 맙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전도가 오히려 자기 영혼을 파멸로 가게 만들 수 있고 또 잘못된 열심으로 그 영혼까지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내가 하고 있는 전도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내 열심으로 하는 그 행위가 배나 더 지옥 자식으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23:15절을 보면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합니다.

이스라엘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도 외식하는 자는 그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치레를 하고 바깥쪽을 치장하는 것이 외식입니다.

 

전도로 겉치레를 하고 있습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는 너무도 좋게 보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고 있습니다. 교회가 텅 비어 있는 것 보다는 교회가 가득 차 있는 것이 더 좋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 외식에 빠져 있는 사람들에게 주님께서는 동일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도도 행위입니다.

내가 그 전도의 행위로 겉치레를 하고 있다면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다는 것을 인식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바리새인들이 한 것은 외식이고 자기들이 한 것은 믿음이라고 말 합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입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로 남이 하면 불륜입니다

내가 행위로 무엇을 하고 있다면 행위로 무엇을 행한 그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내 입장에서는 그것이 좋게 보이는 로맨스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불륜으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저 교회에 한 사람이라고 끌어 오는 데는 관심이 많지 그 영혼이 어떻게 되는 가는 자기도 모르기 때문에 그저 막연하게 구원을 받겠지 생각을 합니다.

 

내 열심으로는 안 됩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그에게 믿음을 주셔야지 만 가능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믿음을 주셨는가를 알려면 내가 믿음으로 서 있어야 가능 합니다 자기도 믿음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믿음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한국 교회에 천만이라는 숫자가 있지만 과연 믿음이 있는 자가 몇이나 될 것 같습니까? 점점 종말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 믿음이 있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자기가 교회 안에 들어가 있다는 것만으로 믿음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행위를 분별을 못 합니다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마치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믿음과는 상반된 행위들을 하고 있으면서도 행위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을 거절을 하고 있으면서도 믿음을 모르기 때문에 자기들의 행위에 취해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것을 보면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면서 내 믿음을 보라고 합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는 믿음을 겉치레로 보이면서 자기는 믿음이 있다고 생각을 하고 또 자기가 전도한 그 사람에게도 그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고 있습니다.

 

내 열심이 나를 망하게 하고 또 다른 사람을 망하게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하는 그 행위들이 얼마나 해악을 끼치고 있는 가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사방으로 다니면서 교인 하나를 만들기 위해 열심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심이 결과로 나타나면 마치 천국을 얻은 것 같이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전도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셔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마음이 열어진 것은 그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는 것입니다 바울이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했지만 만약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 주시지 않았다면 바울의 수고는 헛것이 됩니다.

 

물론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는 전도를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저 숫자를 채우는 것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먼저 복음 안에 있어서 그를 완전하게 구원할 수 있는 믿음이 내게 있는 가를 먼저 스스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 다른 사람을 전도하는 것은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오히려 방해를 하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3:48절을 보면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누가 믿습니까?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믿었습니다.

내가 전도를 해서 교인 하나를 불러 교회 안으로 데려온 사람이 믿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들이 믿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냥 나갔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루디아가 있었기 때문에 나갔습니다.

루디아는 영생을 받기로 작정된 자입니다 그에게 누군가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보내서 루디아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냥 전도 여행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그 여행 중에는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 된 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부르셔서 일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이 일은 사도 바울이 아니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누군가를 통해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안 갔으면 다른 사람을 보냈을 것입니다

내가 아니더라도 그 영혼을 구원하시려면 하나님께서는 그 작정된 자에게 반드시 복음이 있는 성도를 보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감동을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작정된 자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을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열심이 루디아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루디아는 이미 구원을 받기로 작정이 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사도 바울을 보내야 했습니다. 바로 이 루디아는 믿었습니다.

 

저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고 우리에게 청하여 가로되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 하고 강권하여 있게 하니라

 

고백을 합니다.

자기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들어와 유하라고 강권을 합니다.

사도 바울도 루디아가 주 믿는 자라는 것을 알고 그 집에 들어가 또 계속해서 복음을 전했을 것입니다. 믿음이 있는 사도 바울이기 때문에 루디아가 주를 믿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먼저 내 믿음을 점점 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믿음이 있는 가 스스로 확증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믿음이 있는 성도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을 하고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를 분별할 수 있습니다. 내 믿음이 오직 하나님의 작정에 의해 되어 진 것임을 깨닫기 바랍니다. 그렇게 믿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사모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가 되어서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큰 은혜입니다 그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