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16강,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윤주만목사 2019. 6. 29. 06:11


116,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애굽기 2:23-25절을 보면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출애굽은 구원을 예표 합니다.

출애굽기부터 신명기까지 여러 가지 사건과 그리고 율법의 제정과 규례를 통한 하나님의 섭리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가 하는 구원의 예정을 성경을 통해 바로 알아야 합니다.

 

모세오경을 말 합니다

그리고 마치 모세 오경이 율법서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성화주의가 교회에 만연을 하면서 또 알미니안 주의의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를 하면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율법이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 오경에서 율법이 차지하는 부분은 아주 지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율법에 대한 이해 부족으로 아직까지도 율법의 굴레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모세오경의 전체 내용이 무엇입니까?

천지 창조와 그리고 인간의 타락이 나오고 노아 홍수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나오고 그 후에 또 인생들은 역시 타락을 하지만 그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 그리고 야곱을 통해 그 자손들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것이 전체적인 내용입니다

 

결국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그 택하신 자들을 구원하시는 과정 속에서 율법과 규례가 반포되고 그것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를 깨닫게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교회라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때로 시험을 하고 때로는 원망을 하기도 하고 간음을 행하다가 성인들은 광야라는 교회에서 모두 죽고 여호수와와 갈렙 그리고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아이들을 이끌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그와 모든 것은 가나안에 들어가는 과정 속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승천하신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에 빠져서 벗어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핵심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런데 이 뜻을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얼마 전에 노회 모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모임 예배 시간에 헌금을 하느냐 안 하느냐가 논쟁이 되었습니다. 물론 일부 노회는 헌금을 안 하고 또 일부 노회는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안 하는 쪽에서는 노회 회비를 내는 것 자체가 헌금인데 굳이 또 헌금을 할 필요가 있느냐 그리고 형편인 안 되는 가난한 목사를 생각하자고 말 했습니다

 

그러나 반대쪽에서는 어떻게 예배를 하면서 헌금을 안 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두 편 다 일리가 있지만 사실 조금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헌금이 그렇게 중요하느냐는 것입니다

 

다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입니까?

율법과 규례를 지키는 일입니까? 그들이 해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일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만약 그들이 율법과 규례를 완전하게 지켰다 해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다면 애굽에서 나온 목적을 상실한 것입니다

 

그러나 율법과 규례를 가지고 다투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너무도 중요한 일에는 침묵을 하고 있는 그들이 율법과 규례를 가지고 싸우면서 노회 모임에 헌금을 해야 하느냐 안 하느냐를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는 목적을 상실한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인식해야 합니다.

 

바로 성경은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를 통해 가르쳐 주고 있느냐면 이스라엘을 통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교훈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훈을 받아들이기 보다는 아직도 율법과 규례를 가지고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자체가 얼마나 한심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광야라는 교회에 나온 목적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무엇을 해야 하고 또 무엇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쓸데없는 일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을 어떻게 섭리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것과는 상관이 없이 자기들의 문제로 교회 안에서 모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경륜을 깨달아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하느냐 안 하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모든 것을 다 잘했어도 그가 영적인 가나안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버림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 가를 모르고 산 사람입니다

 

지금도 섭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수많은 사람들을 교회 안으로 부르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들어온 그들이 가나안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삶에 매여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유명하다고 하는 기도원은 매일 사람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기도를 하는 것을 나쁘다고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도가 대부분 영적인 가나안을 사모하는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른 자기들의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기도원에 가서 부르짖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그들이 하나님께서 섭리하시는 그 경륜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역으로 인하여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한지라"

 

누가 고역을 주었습니까?

물론 직접적으로 애굽 왕이 이스라엘에게 고역을 주었지만 하나님께서 허락을 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고역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처음 애굽에 내려갔을 때는 그들에게 고역을 준 것이 아니라 그들을 환대 했고 그들에게 살 수 있는 좋은 땅을 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약속을 잊어 버렸습니다.

수 세대를 살아오면서 이제 애굽은 고향과도 같은 그런 곳이 되어 버렸고 그들이 애굽을 떠나간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애굽을 떠나려 하지 않는 이스라엘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는 그들에게 고역을 주어야만 했습니다.

 

세상에 안주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 아직도 안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도 그렇게도 편하기만 했던 세상에서 고역을 당하게 만들어서 교회 안으로 사람들을 부르시고 있습니다.

 

사람은 애굽에 안주하기를 원 합니다

이스라엘의 고백과 같이 물론 그곳에서 고역은 있었을지라도 자기들이 먹고 싶었던 것 하고 싶었던 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곳이기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사람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있습니다.

 

만약 세상에서 살기가 좋으면 절대로 교회에 안 나옵니다.

모든 것이 다 풍족하고 고난을 당하지 않고 세상에서 나름대로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출세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교회 안에 들어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출세를 위해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도 있고 자기 목적을 위해서 교회에 나와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야 출세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기복주의 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어서 교회를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더 좋은 출세와 명예를 얻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애굽은 세상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곳이 너무 좋아서 나오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바로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고역을 주었습니다.

 

고역을 주니까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전까지는 애굽이라는 세상에 만족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 바로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고역을 주니까 그제 서야 하나님을 찾으며 자기들이 당하는 고역을 인하여 탄식을 했습니다.

 

참으로 인생이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살기 편하고 좋을 때는 절대로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하신 그 백성인데도 자기 조상들과의 언약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만족을 누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조상과 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면 그들이 하나님을 찾도록 만들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 고통 소리를 들으시고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세운 그 언약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모르셨습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다가 이스라엘이 부르짖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신 것입니까?

 

만세전부터 예정하고 있는 하나님이십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창세전부터 예정하셔서 내가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잊으시고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기억하시고 있습니다.

그들이 고역을 당하기 전부터 그 고역이 너무 심해서 탄식이 나오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간에도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한 시라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치 자기가 부르짖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기도를 해야지만 너무 고통이 심해서 탄식을 해야지만 하나님께서 마치 들으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기도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마치 형식을 갖추어서 눈을 감고하는 기도를 기도의 표본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부르짖은 것은 그 삶에서 그냥 나타나고 있는 호소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힘이 들어 보세요.

꼭 눈을 감고 기도를 하지 않아도 내 마음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일상에서 당연히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기도가 되어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런 부르짖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고통을 허락하시고 그들이 내는 그 고통의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애굽에서 그들을 인도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 이십니다.

내 심장과 폐부까지도 내 마음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는 것까지도 모두를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400년 전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서 하신 언약을 기억하지 않으셨겠습니까? 그들이 고통을 당하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그 언약을 기억하셨고 그들이 애굽이라는 세상에 안주하려고 하니까 고통을 주셔서 부르짖게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8절을 보면

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아직도 구약의 이스라엘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을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줄 알고 구하는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다수를 이루고 그들은 정욕을 이기지 못해 끊임없이 구하고 있습니다.

 

마치 자기들이 구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모르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내가 무엇이 필요 한가 또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가 하는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언약을 기억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언약을 기억하려 하기 보다는 이생의 정욕에 빠져 교회 안에서 안주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는 것과 같이 지금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신 언약을 기억하시고 있고 구원하시고자 하는 성도들을 섭리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이 무엇입니까?

영적인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는 언약이 있습니다.

우리는 육적인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마치 자기들이 육적인 이스라엘과 같이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언약과 같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도 언약을 해 주셔서 영적인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인도하시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54절을 보면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이 언약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생을 얻게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육적인 가나안에 들어간 것과 같이 우리가 이 언약을 기억하고 있으면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고 있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영생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싫어합니다.

아니 세상에 안주하려고 합니다.

솔직히 영적 이스라엘이라고 자부하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에 너무도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이것만은 해야 하는데 다른 것은 아주 잘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에는 아주 게으름을 피우고 있습니다.

 

언약을 모릅니다.

이스라엘이 그 언약을 기억하지 못해서 고통을 당 했습니다

그들이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니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고통을 주셔서 그들로 기억하게 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당하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언약을 기억하시고 때로는 고통을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당장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원을 찾아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탄식을 하면서 부르짖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슨 기도를 해야 하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당장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어 합니다.

언약을 기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에 당하는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에게 무슨 조그만 문제가 있으면 그것을 해결하고자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통을 주시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기 보다는 당장 자기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재물을 많이 모으고 출세를 하기 위해서 입니까? 아니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나름대로는 헌신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착각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이런 모든 것이 다 육체의 정욕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대단하게 생각을 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 헌신을 하고 봉사를 하고 하는 것을 마치 자기가 이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목적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을 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수고하고 있지 않다면 그는 이 세상에서 헛되게 살다가 티끌과 같이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인식하고 사시기 바랍니다.

언약을 모르고 아니 언약을 안다고 하지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에 얼마나 게으른가는 나중에 보면 압니다. 예수님께서 청함을 받은 자는 많으나 택함을 입은 자는 적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언약을 모르기 때문에 그것이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일에 더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다 압니까?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다 알고 안다고 하는 그들이 아무 것도 모르고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다 안다고 했지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습니다. 이 시대 그저 예수 이름을 알고 또 십자가에 대해서 대충 들은 지식으로 다 안다고 착각을 하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기억하시고 혹시라도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 가 늘 자기 자신의 믿음을 확증해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언약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고통을 당하면서도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가 기복주의에 빠져 사단의 꾐을 전혀 모르고 고통도 모르고 아주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거대한 성 같은 교회를 서로 경쟁을 하듯이 짓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서 할 수만 있다면 전국에 있는 좋은 땅은 다 사서 자기들의 욕구를 채우고자 하고 있습니다.

 

성도와 가라지는 다릅니다.

성도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언약을 분명히 기억을 하면서 자기 육체의 고통을 기꺼이 감당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언약을 기억하기 보다는 당장 자기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영혼을 위해 탄식을 하고 있고 가라지는 자기 육체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모형이고 또한 그림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의 육적인 문제를 마치 지금 이 시대의 육적인 문제로 생각하면 안 됩니다

 

고린도후서 5:2절을 보면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구원은 단회성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늘 그 구원에 대해서 자기가 하늘로부터 오는 처소를 입기 위해서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못 받아서가 아니라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성도는 자기 육체를 볼 때마다 탄식을 안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다릅니다.

자기 육체의 문제를 가지고 탄식을 하면서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목적이 다릅니다. 하늘을 보고 있는 사람이 있고 이 세상의 것을 바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가 기복주의가 만연을 해서 이 세상 것을 구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습니다.

 

잊어버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너무도 중요한 가나안에 들어가는 언약을 잊어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언약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들에게 육체의 고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생각은 가나안에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생각은 육체의 고통을 당하면서도 가나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당하는 육체의 고통을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위해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들어가야 하는 가나안을 생각하면서 탄식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장 당하는 육체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탄식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마치 교회 안에 들어온 것으로 자기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의 행위를 보면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또 그 언약을 이루기 위해 탄식하지 않고 있는 사람은 결코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언약입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도 사람들은 이 언약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우리 인생들을 돌아보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하나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해서 때로는 견디기 힘든 고통을 주시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육체의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가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내 영혼에 대한 문제를 살펴보라는 하나님의 섭리이고 나를 간섭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고통을 주신 것과 같이 지금도 극심한 고통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게 하고 있지만 육체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을 권념하셨더라

 

이스라엘을 돌아 보셨습니다.

지금도 고통을 주시고 그 택한 백성을 돌아보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를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눈으로는 보는 것에 취해 언약을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내 구원을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잘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방적인 은혜로 베풀어 주신 그 언약을 기억하시고 때로 나에게 고통을 주시면서 하나님을 찾게 하시고 그런 고통 중에 있는 나를 돌아보시고 구원으로 인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돌아 보셔야 합니다.

정말 나를 불쌍히 여기시고 나를 돌아보실 때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언약이 나를 통해 이루어 질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살을 먹기를 즐거워하고 피를 마시기를 기뻐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돌아보신 것 같이 이 시대 주님께서 나를 위해 기도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복음을 깨닫고 또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