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14강,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윤주만목사 2019. 6. 25. 06:24


114,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시편 143:1-6절을 보면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방종과 믿음은 같이 보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입장에서 보면 그것이 자유 함이고 율법에 사로 잡혀 있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분명히 방종으로 보여 집니다. 바로 이 문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면 절대로 믿음이 무엇인가를 이해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좋다.

참 좋은 말 같지만 사실은 그 말을 뒤집어 보면 행위가 있어야 믿음이 있다는 것으로 정립이 됩니다. 그들은 믿음과 행위는 별개라고 강조를 하면서도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좋아야 한다고 주장을 합니다.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수학 공식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수학이라는 것은 답이 나오면 역산을 해서 그 답이 맞는가를 다시 확인을 합니다. 믿음이 좋으면 행위가 좋다는 말은 수확의 공식과 같은 말로서 뒤집어서 역산을 하면 행위가 좋아야 믿음이 있다는 말로 풀어지는 것입니다

 

진리는 수학이 아닙니다.

그렇게 역산을 해서 답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진리 그 자체가 답이기 때문에 어떤 역산도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이라는 말씀은 변치 않는 다는 것이며 다른 방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수학은 변합니다.

1+1=2가 수학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닙니다. 1+1=1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수학입니다. 그것을 어느 것에 대입을 시켰느냐에 따라서 변할 수 있으며 또 조건에 따라서 그 답이 얼마든지 변할 수 있습니다 지구에서의 수학과 저 우주에서의 수학은 다릅니다.

 

만약 지구에서의 수학을 그대로 우주에 대입을 시켰다가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또 그것이 어느 물질이냐에 따라서 반드시 답이 2가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진리는 변치가 않습니다. 그 조건과 그리고 저 우주를 나가더라도 변치 않는 것이 진리입니다 만약 경우에 따라서 변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리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과 행위가 마치 수학 공식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것은 다시 역산을 하려고 하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자기 믿음의 정체성에 대해서 혼란을 갖게 됩니다. 어떤 때는 분명히 오직 믿음이 되었다가도 어떤 때는 행위가 없는 사람을 보면 도저히 그 믿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게 됩니다.

 

행위와 믿음은 별개입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믿음에 대해서는 혼란이 올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믿음이 있는 성도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는 것에는 반론을 제가할 수 없겠지만 그러나 그 행위가 내 눈에 나쁘게 보인다 해서 그의 믿음을 의신하게 되는 순간 오직 믿음이 아니라 믿음 플러스 행위라는 공식이 그 마음에 자리하게 됩니다.

 

진리가 변했습니다.

나의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진리가 어느 새 자기도 모르게 행위가 포함이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마음에서는 행위를 보고 판단을 하고 그 믿음에 대해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음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 행위가 믿음의 조건이 된다면 이 세상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성도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하지만 행위의 어떤 조건을 내 세우기 시작을 하는 순간 내 스스로가 그 행위의 조건의 덧에 걸려 사망으로 끌려 내려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행위를 강조 합니까?

자기가 치명적인 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행위를 강조하지를 못 합니다. 누가 대표적인 인물입니까? 바로 다윗입니다. 다윗은 사람이 질 수 있는 가장 추악한 죄를 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시편을 보면 다윗은 늘 자신의 연약함을 호소하고 있고 행위를 강조하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다윗은 인간적으로 볼 때 정말 나쁜 사람입니다

충성스러운 자기 신하의 아내와 간음을 한 것도 부족해서 그것이 드러날 까봐 그 신하를 전쟁터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다윗은 도저히 용서가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 죄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다윗은 어느 누구에게도 행위를 강조하지를 못하고 시편을 보면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그리고 은혜를 구하는 시를 써서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자기가 조금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에 미혹이 되어서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고 자기 눈에 보이는 행위가 조금 나쁘면 그 믿음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기준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내가 기준을 정하는 순간 하나님께서 기준을 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그 기준이 율법입니다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하는 그 순간 그 기준에 의해서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정죄하는 그 기준이 하나님께서 나를 정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을 아는 성도는 절대로 행위를 강조하지를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준에 도달할 수 없는 인생인데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기준을 제시할 수 있고 또 그 기준에 합당한 행위를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를 아는 성도는 절대로 행위를 강조하지 못 합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언제든지 자기 안에서 그와 같은 죄가 다시 일어 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1,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시며 내 간구에 귀를 기울이시고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하소서

 

다윗은 너무 간절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이 세상에 대한 것을 기도했기 보다는 자기 영혼에 대한 기도를 너무도 간절하게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이런 기도를 할 수밖에 없느냐면 그는 인간적으로 볼 때 너무도 추악한 죄를 졌고 또 자기 안에 있는 그 죄 성이 언제든지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다윗이 밧세바와의 간음 이후에 진정으로 회개를 해서 다시는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은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다윗을 지켜주시지 않았다면 다윗은 또 그와 같은 죄를 지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내가 죄를 안 질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물을 흘리며 회개를 하고 난 후에는 그와 같은 죄를 반복해서 안 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곰곰이 나를 생각해 보시면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내가 정말 이 죄 성만은 떨쳐 내고 싶어서 밤을 세워가며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해 본 경험이 누구나 한번쯤은 있을 것입니다

 

묻겠습니다.

그렇게 기도를 한 후에 회개를 한 후에 다시는 그 죄를 안 졌습니까? 제가 부족한지 몰라도 저도 약한 부분이 있어 그 죄에 대해서 수많은 날을 새워 가면서 회개의 눈물을 흘렸지만 역시 또 그 죄에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하고 난 후에야 은혜가 무엇인가를 깨닫고 더 은혜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죄를 짓는 것을 변호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제 자신을 압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고 내 기도가 더 절실하고 내 간구가 더 호소가 있습니다. 만약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그 죄를 다시 짓지 않았다면 저는 그렇게 까지 절실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다윗도 똑 같은 심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내 기도를 들어 주시고 내 간구에 귀를 기울여 달라고 얼마나 간절하게 호소를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내가 죄를 다시는 안 짓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을 해 달라고 호소를 합니다.

 

자기가 죄를 안 짓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다윗은 자기 체질을 너무 잘 알고 있고 자기가 진토임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에 다시는 죄를 안 짓겠다는 기도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 기도를 하기 보다는 주의 진실과 의로 내게 응답을 해 달라고 기도를 합니다.

 

주의 진실이 무엇입니까?

 

요한복음5:24절을 보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주의 말씀은 듣고 믿는 자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있어도 심판을 받지 않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 주시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을 구하지는 않고 자기들이 조금 지키고 있는 행위를 바라보면서 믿음을 확증하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이 진실입니다

비록 한편 강도와 같이 또 간음한 마리아와 같은 처지에 있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구원해 주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진실입니다 그런데 이 진실을 구하려 하기 보다는 눈물을 흘리면서 회개를 하고 또 자기가 다시는 그 죄를 안 짓겠다고 합니다.

 

사람이 안 되려고 합니다.

회개를 하고 난 후에는 사람이 아니라 신이 되려고 그것을 요구를 하고 있습니다. 주의 진실을 구하려 하기 보다는 자기 행위를 고치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나 간절한 기도 입니까?

나는 연약해서 도저히 죄 가운데서 빠져 나올 수 없으니까 주의 진실로 나를 구원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인생임을 그리고 자기가 한 없이 약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 인정을 하고 그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 교인들은 그 진실을 구하기보다는 자기가 죄를 안 질 수 있을 것처럼 주장을 하고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립니다.

제가 죄 짓는 것을 변호하고자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성도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제가 굳이 말씀을 안 드려도 어린아이라도 아는 것입니다 아니 교회에 나온 모든 사람들은 그렇게 살고자 자기 마음으로 다짐을 하고 또 다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있지만 역시 죄 가운데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낙심을 합니다.

때로는 자기의 믿음을 스스로 의심을 하게 됩니다. 행위를 강조하게 되면 믿음이 있으면 행위가 좋다는 말을 하게 되면 나도 정죄에 빠지고 다른 사람도 정죄에 빠질 수 있으며 또 믿음 자체가 흔들리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의를 구합니다.

다윗의 기도는 다시는 죄를 안 짓겠다는 그리고 바른 행위로 살겠다는 그런 기도가 아니라 주의 진실과 주의 의를 구하는 그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인들의 기도와 다윗의 기도가 얼마나 다른 가를 이 기도 하나를 보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지금도 자기가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2, “주의 종에게 심판을 행치 마소서 주의 목전에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나이다

 

행위로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으로부터 해서 이 세상에 모든 사람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아니 그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행위로는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내가 의롭게 살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칭찬을 받고 있고 별로 잘못한 것이 없기 죄 안 짓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만약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율법의 착시 현상에 의해 속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조금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착시 현상에 빠져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생은 모두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내 평생을 돌아 볼 때 뭐 그렇게 특별한 죄를 안 진 것 같아도 그가 설령 욥과 같이 아니 욥보다 더 의롭게 살았어도 반드시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의 행위가 그것을 모르게 하고 있고 마치 자기 행위를 보면서 심판을 받지 않을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끔 만들고 있습니다.

 

의로운 인생이 없습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말을 합니다. 누구는 조금 더 낫게 살고 저 사람은 개차반으로 살았는데 어떻게 똑 같이 취급을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이는 것은 사람의 눈입니다 하나님이 볼 때는 그 마음의 폐부까지도 감찰을 하시기 때문에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사진을 봅니다.

인생의 전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사진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극히 일부의 사진을 보면서 마치 전체를 보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또 그 일부의 사진을 보면서 누구는 의롭고 누구는 악하다고 판단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내가 보지 못하고 있는 더 많은 사진이 어떤 가를 모르면서 자기 눈에 보이는 사진 몇 장을 보면서 행위를 말하고 있습니다.

 

확 까집어서 다 보면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극히 일부의 사진을 보니까 누구는 의롭고 누구는 죄인으로 보이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 모든 사진을 다 본다면 절대로 그렇게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모든 사진을 다 보는 순간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주님의 은혜만을 구하게 됩니다.

 

3, 원수가 내 영혼을 핍박하며 내 생명을 땅에 엎어서 나로 죽은 지 오랜 자같이 흑암한 곳에 거하게 하였나이다

 

원수가 무엇입니까?

물론 사단도 될 수 있지만 율법도 원수입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그 원수에 의해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아니 반드시 정녕 죽게 됩니다. 원수는 지금도 내 생명을 노리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나는 죽어야 합니다.

행위로는 의롭다 할 육체가 없다고 성경은 정의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율법에 의해 진노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 시대 그 율법에 깊은 수렁에 빠져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이 음행이라는 것을 모르고 마음껏 영적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진노를 가져 옵니다.

내가 한 가지 율법을 지키는 순간 모든 율법이 다 살아나 그 율법에 의해 판단을 받고 나중에는 반드시 그 율법이 내 등에 비수를 꽂는 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은 지금도 나를 핍박을 하고 있는데도 그 율법에 빠져 자기 의를 드러내려고 합니다. 주님의 의를 구하기보다는 자기 의를 드러내고 있습니다.

 

4, “그러므로 내 심령이 속에서 상하며 내 마음이 속에서 참담하니이다

 

율법을 보면 참담합니다.

행위로 따지고 보면 나는 반드시 죽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참담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가 조금 지키고 있는 율법에 미혹이 되어서 마치 그 지키는 율법의 행위가 자기의 믿음인 것으로 착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다윗도 참담 합니다.

그도 인생이기 때문에 자기가 의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너무도 참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가 조금 지키는 그 율법을 보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특별한 일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더욱 더 율법의 그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고 있습니다.

 

내가 인생인 줄 아는 사람은 참담 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인생인 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참담함을 모릅니다. 왜 모르느냐면 자기가 지키는 율법에 미혹이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주 조금 지키는 그 율법이 사람의 생각을 마비 시켜서 진리를 분별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립니다.

 

율법은 부자로 만듭니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처지를 알고 참담하지만 부자는 절대로 참담할 수 없습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비유에서 보듯이 부자는 자기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로 자색 옷과 고은 베옷을 입고 있기 때문에 참담함이 무엇인가를 도무지 깨닫지 못 합니다

 

주님의 의로 부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행위로 부자가 되는 순간 그 영혼은 망 합니다. 행위를 왜 강조하지 말아야 하느냐면 사람을 부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은혜만을 구할 수 있게 하지만 행위는 자기가 지킨 율법의 의를 보면서 그것을 하지 못하는 사람과 비교를 하게 되어 있고 하는 자기와 하지 못하는 다른 사람을 보면 스스로 부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행위를 강조 합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부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하면서 자기가 입은 고운 옷에 취해 진리를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조금 지키는 그 행위를 보면서 마치 자기가 무슨 특별한 사람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의로운 인생이 하나도 없는데 행위는 의로운 인생이 있게 만듭니다.

주일을 지키는 사람 입장에서 보면 주일을 안 지키는 사람 보다 자기가 분명히 의롭게 보이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당연히 하고 있다고 하는 신앙생활의 행위가 사람의 마음을 부자로 만들어 자기 영혼이 얼마나 참담한가를 깨닫지 못하게 만듭니다.

 

5, “내가 옛날을 기억하고 주의 모든 행하신 것을 묵상하며 주의 손의 행사를 생각하고

 

나를 보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성도는 나를 보지 않고 주님께서 행하신 그 구속의 경륜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습니다. 나를 보면 참담하기 이를 때 없지만 주님을 보면 내 영혼이 기뻐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나를 보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까 자꾸 행위를 강조하게 됩니다.

성도는 나를 보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모든 사역을 내 것으로 가져오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내 것으로 가져오는 그것이 바로 은혜입니다

 

내가 의롭게 산 것을 보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의롭게 산 것을 보고 그것을 내 것으로 가져오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나를 보면 참담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보면 내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 시대도 자기의 행위를 보는 사람이 있고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성경을 통해 보는 성도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제 행위를 보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 보다 행위가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자신 있습니다. 비교해서 자신이 있지만 그러나 나를 보면 참담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율법의 기준에 비추어 보면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주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신 일을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는 자기 행위를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고 주님께서 행하신 그 기이한 일을 보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행위를 따르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은혜를 구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6,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 (셀라)”

 

내 영혼이 메말라 있습니다.

도저히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인생이기 때문에 이 세상에는 단 한사람도 의로운 사람이 없기 때문에 거기에 나도 포함이 되고 있기 때문에 내 영혼이 마른 땅 같다는 말씀입니다 마른 땅이 얼마나 갈증이 나겠습니까? 마른 땅 같은 사람만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나를 아는 데서부터 출발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으며 또 사랑과 은혜를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입술로는 은혜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자기가 얼마나 참담한 가를 깨닫지 못한 사람은 자꾸 행위를 강조하게 되어 있고 그 행위에 취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게 됩니다.

 

인생은 의롭지 못 합니다

내 눈에 의롭게 보이는 그것은 마치 신기루와 같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그림자입니다. 실체가 나타나면 그 그림자는 사라지게 되어 있고 그 그림자에 취해 있다가는 결국 진노를 받게 됩니다.

 

성도는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떤 기준을 삼으면 안 됩니다 그 기준이 다시 또 다른 기준으로 나에게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오직 믿음으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윗과 같은 믿음이 있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은 먼저 내가 도저히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을 하는데 서부터 출발을 하는 것이며 그런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더욱 더 성도님들에게 은혜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