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78강,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윤주만목사 2019. 5. 28. 06:38


78,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고린도후서 4:16-18절을 보면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기독교의 본질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교리가 없는 종교는 한 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뿌리가 없는 나무와 같다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도 바람이 불면 쓰러지게 되고 나무가 쓰러지면 그 생명이 다 합니다.

 

산에 올라가 보세요.

나무는 쓰러지는 그 순간 죽습니다.

물론 다행히 다른 나무가 받쳐주어서 쓰러지다가 말았다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약 45도 이상 나무가 쓰러지게 되면 죽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뿌리는 중요합니다.

 

교리는 너무 중요합니다.

칼빈주의냐 알미니안주의냐 하는 것을 논하기 이전에 자기는 그런 교리를 따지지 않고 성경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칼빈을 따른다면 그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 교리가 맞는가 아니면 틀린가 하는 것은 분명히 분별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굉장히 위험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터넷이라는 매체가 발달을 하다 보니까 신앙의 선배들이 정립을 한 교리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한결 같이 자기는 성경을 믿지 사람이 만든 교리를 따르지 않겠다고 주장을 합니다.

 

물론 사람이 만든 교리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리는 지금의 교회가 있기 까지 수많은 순교자들의 터 위에서 세워진 교리입니다 그런데 그 교리를 완전히 부정을 하는 것에 있어서는 그 사람의 생각이 짧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어느 교리가 일관성이 없기 때문에 그리고 서로 다른 교리가 상충이 되기 때문에 성경적인 지식이 부족한 사람으로서는 그것을 검증하고 확증하는데 있어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느 한 가지 교리는 맞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교리라는 것이 사람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성경말씀을 토대로 해서 교리가 세워 졌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교리가 사라져 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리가 사라졌다는 것은 그만큼 기초가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기독교는 처음부터 교리를 지키기 위해 싸웠습니다.

한 가지 교리 때문에 수많은 순교자들이 있었고 그들은 자기들이 성경적으로 정리를 한 그 교리를 사수하기 위해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다른 복음을 가진 자들과 싸우다 순교했습니다.

 

로마 시대가 지나고 난 후에 수 천만 명의 순교자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로마라는 특정 나라의 박해를 받아서 순교를 당한 것이 아니라 단지 성경적인 교리를 가지고 싸우다가 순교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리적인 싸움이 어느 시대부터 사라졌습니다. 바로 미국으로 넘어온 청교도들의 중산층이 생기기 시작한 시점부터 교리적인 싸움이 사라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좋습니다.

그러나 교리적인 싸움이 없다는 것은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를 사수하겠다는 의지가 사라지고 말았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세계가 급속한 산업화를 이루면서 그런 신앙적 교리 싸움 보다는 어떻게 하면 이 세상에서 편하고 잘살까 하는 문제가 더 커져 이제는 교리라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고 굳이 그것을 사수해야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교리적인 싸움은 영혼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런데 영혼에 대한 싸움을 하지 않고 그저 교회에 나온 것으로 마치 구원이 보장되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편하게 자기 신앙을 지키고자 합니다. 이 시대는 그런 교리보다는 어떻게 하면 조금 더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하는 문제가 더 크게 작용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불행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 온 시점이 바로 이 불행이 싹터서 기복주의가 만연하게 되는 그런 때에 전파되었습니다.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기독교가 전파되었다기 보다는 미국 중산층들이 늘어나면서 그들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 하는 그런 욕구에 의해서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전파되었습니다.

 

1600년대만 해도 순교자가 많았습니다.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는 서로 이단이라고 하면서 싸움을 했고 그 교리에 반하는 주장을 하게 되면 종교재판을 통해 교수형과 화형에 처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종교싸움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왔고 그들이 1800년대에 이르러서는 두터운 중산층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싸움이 필요 없었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자기들이 원하는 모든 것을 얻기에 충분했습니다. 풍요가 넘치는 그런 환경 속에서 고리타분한 교리싸움을 한다는 것은 시대에 뒤떨어진 발상이었습니다. 교리싸움을 하기 보다는 그 중산층들이 무엇인가 뜻 있는 일을 하는 것이 더 좋아 보였습니다.

 

한국 교회의 불행입니다.

물론 겉으로 보기에는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아주 단기간에 괄목할만한 성장을 이루어서 교회가 주류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미국이나 유렵의 교회들이 지금 한국 교회를 연구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리고 그 중산층들이 했던 그 일을 지금 한국 교회가 똑같이 행하면서 그것을 보람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미국과 유렵의 중산층에 의해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을 한 이 한국에서 급속한 산업 발전이 이루어지고 그들과 같이 한국 교회는 전 세계에 선교사를 파견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이 나쁘다는 뜻으로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목적이 없이 선교사가 나갑니다.

그들은 오직 하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진리를 전파하기 위해서 선교사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다만 기독교라는 종교를 전하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는 세계 선교를 아주 자랑스럽게 말 합니다

그리고 때만 되면 그 교회에 교인들은 단기 선교를 다녀오고 그런 행위들을 통해 무한한 만족을 느끼면서 마치 그렇게 하는 자기들의 행위가 바른 믿음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기 위해 선교사를 파견하기 보다는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이상한 교회를 전파하기 위해서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교리는 믿음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 주는 분명한 지침입니다.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리고 내가 지금 교리적인 정립을 하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 부는 바람에 반드시 쓰러지게 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의 터 위에서 쓰러지지 않으려면 바른 교리로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겉을 보면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적인 타락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 겉모습을 보면 타락을 할 수밖에 없고 또 지금도 타락을 하고 있기 때문에 낙심을 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낙심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기 겉모습을 보고 낙심을 하기 보다는 오히려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을 보면 낙심이 되어서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는데 지금 한국 교회의 교인들은 조금도 낙심을 하지 않고 자기들의 행위를 보면서 아주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갖습니까?

바로 자기가 행하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를 해서 나는 주일이라는 날도 잘 지키고 또 십일조도 하고 있고 매일 기도도 하고 새벽 예배를 드리고 또 가난한 이웃도 적당히 돕고 있는 자기를 보기 때문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과 자기를 비교해서 보면 분명히 자기는 점점 깨끗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겉 사람을 깨끗하게 하라고 설교 때마다 강조를 하고 있습니다.

겉 사람이 깨끗하지 못하면 마치 믿음이 없는 사람처럼 취급을 하기 때문에 겉 사람을 깨끗하게 하려고 거기에 마음이 다 빼앗겨 있습니다. 깨끗해 지지 않는 것을 깨끗하게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힘이 들겠습니까? 깨끗하지 않은 것을 뻔히 아는데 깨끗하라고 하니까 깨끗한 척을 하려고 하니까 얼마나 마음이 괴롭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 겉 사람은 후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후패한다는 말은 썩어 문드러진다는 말입니다 점점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인정을 하려고 하기 보다는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얼마나 무거운 짐을 지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겉은 썩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결국 기초가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내 겉은 자꾸 썩어 문드러지고 있는데 깨끗하게 만들라고 하면 얼마나 괴롭겠습니까? 전적인 타락을 인정하지 않고 교회 안에 성화주의가 만연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포기를 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비록 내 겉은 썩어 문드러질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위해 할 수 있는 한 깨끗하게 살아가려고 수고를 해야 합니다. 그것은 내 겉이 썩는 것을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지 마치 깨끗해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것은 불교적인 사상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깨끗해 질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는 해탈의 경지에 이르러서 열반에 들어간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 모든 종교는 자기들이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합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절대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썩어 문드러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리가 바로 서지 못하면 이상한 종교가 됩니다.

왜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인이 이율배반적으로 이중적인 사람으로 보여 지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안 되는 것을 된다고 하니까 문제가 발생을 하는 것입니다 세상 종교와 기독교는 다릅니다. 세상 종교는 모순이 있어도 원래 무순 된 종교니까 상관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가 있는 종교에서 모순되게 말을 하면 그것은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성경말씀에 의한 교리가 바로 서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성도는 그것을 사수해야 영혼을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말씀은 우리 겉 사람은 썩어 문드러진다고 하는데 자기는 깨끗해 질 수 있다고 주장을 한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 겉이 깨끗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겉 사람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지만 낙심하지 않는 것은 우리 속이 날마다 새로워지기 때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속이 깨끗해지는 것은 믿으려 하지 않고 자기 겉을 깨끗하게 하려고 가식을 하면서 회칠한 무덤처럼 화장을 짓게 하고 있습니다.

 

얼굴에 범벅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겉을 회칠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속이 날로 새로워지는 것을 믿으려 하기 보다는 자기들의 행위로 썩어 문드러지는 것을 깨끗하게 하려고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이라는 것에 착시 현상을 일으켜 깨끗해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다가 그 착시가 사라지고 나면 후회를 하게 됩니다. 자기가 조금 행하고 있는 율법의 의에 착시 현상을 보다가 결국에는 썩어 문드러지는 자기를 보고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

 

나는 깨끗해 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내 안에 있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깨끗함을 얻게 됩니다.

 

디도서 3:5절을 보면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이 내 안에 임재하심으로 내 안이 새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내 속이 새롭게 되는 것은 내가 어떤 행위를 해서 내 지식이 많아져서가 아니라 오직 성령께서 내 안에 임재하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하심을 받아 새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 새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은혜로서 깨끗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럽습니다.

다만 율법의 옷을 입다 보면 마치 신기루를 보는 것과 같이 깨끗해지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나 율법에서 벗어나서 자기를 바라보면 썩어 문드러지는 자기 겉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렇게 썩어져 가는 것을 보는 사람은 절대로 자기를 깨끗하게 하려 하기보다는 긍휼하심을 입어 깨끗하게 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율법의 옷을 벗으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을 절대로 분별할 수 없습니다.

진리가 가려지게 되어 있고 착시 현상을 보면서 자기도 모르게 끌려가게 되어 있습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속이 날마다 새롭게 되는 것이지 내 능력으로는 절대로 새롭게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썩어가는 것이 환난입니다

후패하는 것이 바로 환난을 당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환난 당하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지금 받고 있는 이 환난은 경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볍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환난을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겉모습은 당연히 썩어져 가는 것임을 인정하면 가볍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썩어져 가는 것을 참지를 못 합니다. 그리고 썩어져 가는 것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인생 팔십은 안개와 같습니다.

있을 때는 마치 무엇인가 대단한 것 같지만 햇살이 비추기 시작하면 마치 일장춘몽과 같은 것이 인생입니다 아주 잠시 받는 환난인데 그것을 인정하지를 못하고 그렇게 환난을 받고 있는 사람을 오히려 정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썩어지는 것이 환난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 썩어지는 감추기 위해서 율법으로 회를 칠하면서 겉을 늘 새롭게 꾸미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를 보면 자꾸 이 세상의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면서 어떻게 하면 새롭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내가 썩어야 은혜를 압니다.

썩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렇게 썩는 것이 지금은 환난이 되고 나를 괴롭게 하고 있지만 그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내 영혼을 새롭게 하셨습니다. 내가 썩어지고 있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5:20절을 보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죄를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자기 죄를 깨닫는 그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썩어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어 넘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죄를 깨달으려고 하기 보다는 죄와 싸워 이기려고 무던히도 애를 씁니다.

 

그리고 죄를 이기는 자기를 자랑을 합니다.

너무도 한심한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이기게 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사단이 이기게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가 은혜 되게 하시려면 죄를 절대로 이기게 해 주시지 않습니다. 내가 연약해서 죄가 보일 때 은혜가 더욱 은혜가 되기 때문에 죄인의 모습을 보게 만드십니다.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죄와 싸워서 이긴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랑 할 것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 세상 죄를 모두 지고 가신 그것을 자기가 자랑을 합니까? 그럼 예수님께서는 무엇 하러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죄를 지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죄와 싸워서 이긴 것을 자랑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행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내가 죄와 싸워서 이겼다고 자랑을 하면 예수님은 뭐가 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가로채는 행위입니다

그러고도 그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면 아직 복음을 모르는 미련한 사람입니다 당연히 법과 싸워서 지기 때문에 죄가 나타나서 환난을 당하게 되는데 그 환난을 이겼다고 자랑을 하는 것은 이만희가 자기는 이긴 자라고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이 만희가 이긴 자라고 하는 것과 내가 죄와 싸워서 이겼다고 자랑을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그런데도 아주 작은 죄와 싸워서 이긴 것을 사단과의 전쟁에서 이긴 것으로 오해를 하고 돈키호테처럼 긴 창을 들고 허공을 찌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썩어 갑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환난을 당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법과 싸워서 지기 때문에 죄가 나타나고 그래서 썩어져 간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만이 더욱 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가슴에서 은혜가 되어 넘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율법은 보입니다.

하지만 성령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보이는 것에 모든 마음이 다 빼앗겨서 어떻게 하면 잘 보일까 고민을 하고 있고 교인들도 그렇고 교회도 겉모습을 가꾸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신기루는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고 맙니다.

부탁드립니다. 정말 율법에 취해 눈에 보이는 것을 따라가다가는 그 영혼은 반드시 멸망을 당하고 맙니다. 지금 교회는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모두가 보이는 그것만을 따라가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꿩 잡는 것이 매입니다.

진리가 있고 없고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이 좋게 보이면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는 이상한 교회가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진리는 그들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고 교리는 고리타분한 논쟁이 된다고 생각을 하면서 그저 보이는 것을 더 좋게 보이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입니다

물론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보이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보이는 것을 따라가다가는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보이는 것을 쫓아가다가 결국 진리를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으로서 자긍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보이는 것 율법으로 말미암아 예수를 거절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 너무 보이는 것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고 하기 보다는 보이는 것을 보면서 믿음을 판단하고 심지어는 율법의 잣대로 사람들을 정죄를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소망을 주기 위해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환난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초대 교회 교인들은 거의 노예의 신분이거나 또는 하층 계급의 신분으로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소망을 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육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말씀에는 깊은 영적인 의미를 담아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것을 바라보면 우리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썩어져 가는 내 육체를 보면 그리고 늘 죄를 짓고 있는 내 육체를 보면 절망감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말미암아 그 공로로 내 안에 성령이 임하셨습니다.

 

새로운 영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새로 탄생된 영은 하늘로부터 늘 새로운 것을 공급 받고 있기 때문에 늘 새롭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 율법을 보지 않고 보이지 않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는 성도는 소망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도는 보이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소망을 갖기 때문에 지금 환난을 당하고 있으나 참고 견딜 수 있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지만 믿으세요.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의 실상입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는 영원한 것을 얻음으로 천국에서 무한한 축복을 받게 될 줄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성도님들에게 임하시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