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발 씻기(1)
요한복음 13:4-5절을 보겠습니다. (신 170쪽)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세족식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참 말도 잘 만들어 내고 또 행위도 잘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성경의 비밀을 모르고 그저 문자적으로 보고 성경을 이해를 하려고 하고 있고 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실제 일입니다
성경의 거의 모든 말씀들은 이 세상에서 실제 있었던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일들은 비유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말씀들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이해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성경이 얼마나 오묘한가를 모르고 있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성경을 기록하셨는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지식이 아닙니다.
성경을 우리가 그렇게 알 수 있다면 이 세상에 구원을 못 받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그런 일은 하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면서 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어도 메시야라는 것을 모르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병자들이 주님께 가면 났습니다. 심지어는 소경이 눈을 뜨고 천형이라고 하는 문둥병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오천 명을 들판에서 먹이시는 기적을 나타내셨습니다. 그런 기적들을 보고도 이스라엘은 주님을 영접하지를 못 했습니다.
왜 그랬습니까?
성경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주님이 오실 것을 예언을 하셨고 또 수많은 선지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예표를 하고 있었지만 이스라엘은 그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무식해서 성경을 보고도 몰랐습니까?
이스라엘 민족은 복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 민족은 어느 나라보다도 머리가 지혜로운 민족이었습니다. 그런 민족이 성경을 보고도 몰랐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해서 그 자손 대대로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그래서 성경을 보고 살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사람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영의 비밀입니다
육의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비밀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정말로 오묘해서 그것이 육의 눈으로도 그대로 보이고 있고 또 보혜사가 임한 성도들은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실 영의 비밀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지혜롭다 해도 성경을 보고 영의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스라엘이 노벨상을 가장 많이 타고 있지만 그들은 아직까지도 신약 성경을 안 보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습니다. 노벨상을 그렇게 많이 배출한 민족이지만 성경은 그들의 지혜로는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 주고 있는 사실입니다
인생입니다
하나님과 인생의 차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생각하는 사고가 있고 이성이 있다 보니까 자기들을 너무 과대평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행위를 하다 보니까 더욱 그렇게 되고 있습니다. 신과 사람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인정하는 사람만이 자기의 모든 지식을 버리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수 있습니다.
이 지구 안에서만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개가 동물 중에서는 아주 똑똑합니다. 사람이 시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개가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사람의 지혜에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르쳐 주면 그것을 따라 할 수는 있어도 스스로가 사람보다 더 나은 생각을 해서 사람에게 인정을 받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과 미물의 차이입니다.
동물들이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그것이 스스로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사람이 가르쳐 주었을 때 그 동물이 아주 조금이나마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개가 반려 동물이라고 하지만 그 개가 사람의 마음까지 알아서 사람에게 무엇을 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육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짐승입니다
같은 육을 가지고 있는 존재도 그런데 하물며 영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육과 육의 존재도 그런데 저 하늘 우리가 갈 수도 없고 볼 수도 없는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마치 개를 훈련을 시키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하늘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일을 직접적으로는 말씀을 할 수 없으니까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자기들의 존재를 모르고 이성적 지식이 있다는 그것으로 교만해 져서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문자적으로 보고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8:10절을 보겠습니다. (신 103쪽)
“가라사대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다른 사람에게는 비유로 하나니 이는 저희로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비밀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습니다. 반드시 그 비밀을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허락을 해 주셔 야지만 사람이 성경을 보고 하늘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들의 지혜로 보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다르게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그래서 보아도 모릅니다. 성경을 분명히 비유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실제 성경에서 문자 그대로 보아야 하는 말씀은 아주 적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성경이 다 비유로 되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비유로 보아야 할 것들을 다 문자 그대로 보고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유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은 영의 일을 우리가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언어로는 그것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다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가 알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유입니다.
영의 일을 직접 말씀을 하실 수 있으면 좋은데 그 일을 그렇게 말할 수 없어서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 가장 기본적인 생각이 바로 이 비유라는 것을 생각하고 보아야 합니다. 말씀을 보고 내 이성적으로 그냥 깨달아 진다고 해서 문자 그대로 보아서는 안 되고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비밀이 무엇인가를 늘 생각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세족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왜 행해지고 있는가를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비록 그 일을 행하셨다고 해도 그것을 비유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대로 행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것을 문자 그대로 보면 이 세족식을 그대로 행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보고 그 문자에 사로 잡혀서 율법을 그대로 지키려고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고 하니까 살인을 하지 않았고 또 할례를 받으라고 하니까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으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표징으로 삼고 살았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비유를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행위로 나타내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모르다 보니까 육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을 보였고 그런 행위들로 인하여 결국에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으면서 까지도 그것을 아직까지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그리고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나 그 제자들이 행했던 일들을 문자 그대로 행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일들이 또 하나의 율법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주님께서 하셨으니까 나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유입니다
그러니까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 교회들이 마치 병원을 차리는 것과 같이 광고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 주셨고 또 너희도 그런 일을 할 수 있다고 말씀을 하셨으니까 그것을 그대로 자기들이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일들이 솔직히 이스라엘이 율법을 문자로 보고 그대로 행했던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정말 안타깝습니다.
어느 교회들을 보면 병원이 되고 있습니다. 아니 실제적으로 교회 안에서 그러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셔서 자기들이 주님과 같이 그런 은사를 통해서 병자가 치유되고 있다고 주장을 하면서 사람들을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제가 늘 말씀을 드립니다.
그 병이 고쳐지면 영생을 합니까? 천국을 사모하고 살아간다고 하는 그들이 이율배반적인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 병이 고침을 받아서 영생을 한다고 하면 저 역시도 그것을 백번이라도 따라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그가 암 병이 치유가 되었다 해도 역시 죽을 수밖에 없고 또 죽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보다 더 애착이 있습니다.
썩어지는 그것에 무익한 그것에 이 세상 사람들보다 더 애착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왜 그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가야 하는데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문자를 그대로 보고 있으니까 교회가 병원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행위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문자적으로 행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진리의 성령이 그에게 오셨다면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을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그저 행위를 보고 그 일을 통해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에 확인을 하려하고 있습니다.
정말 무지합니다.
이스라엘이 그런 일을 하다가 율법주의에 빠져 사망에 이른 것을 빤히 보고도 이 시대 역시 그런 일들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 일인가를 늘 깨닫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시지를 않고는 그런 일들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우리 인생들의 한계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것은 행위에 반대가 되는 말씀입니다 가장 기본이 되는 것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어떤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만 보아도 압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보고 그것을 행하려고 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아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을 스스로 증명해 보이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라면 이제 장성한 자가 되어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알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1-3절을 보겠습니다. (신 170쪽)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유월절 전입니다.
이 유월절이 무엇을 예표하고 있는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런 것은 기초가 되어 있습니다. 유월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절기입니다. 이제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드시면서 이 밤이 지나고 나면 유월절 양으로 십자가에 달리실 것을 아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십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있는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하셔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모든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이 십자가는 주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보여 주시는 확증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가 어떠한 사랑을 받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후에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사십일 동안 이 땅에 계시다가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모든 일을 아시고 계셨습니다. 만약 이 모든 일을 모르셨다면 주님은 이 일들을 하실 수 없습니다.
사랑입니다
이 사랑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랑을 알려고 하면 먼저 성경에서 율법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하는 사람은 거짓에 미혹이 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율법에서 그림자를 걷어 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사랑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세족식입니다.
세족식이라는 단어도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겠습니다. 물론 발을 씻기는 것이 세족입니다. 그런데 어느 새 교회 안에서 그것이 예식이 되어 버렸습니다. 세족식이라는 자체가 얼마나 진리를 방해하는 단어라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는 함부로 사용을 하고 있고 또 세족식을 하면서 마치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발을 씻김을 당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4-5절을 보겠습니다. (신 170쪽)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유월절 전입니다
그날에 주님께서 제자들과 저녁을 드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셔서 겉옷을 벗으시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담아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있습니다. 아마 이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꼭 교회를 안 다니더라도 그들이 말하는 세족식을 이 세상 사람들도 이제는 거의 다 알고 있습니다.
발을 씻겨주시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아직 성령이 오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베드로의 고백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 주님께서 인체에서 가장 더러운 발을 손수 씻겨 주시는 것은 생각도 하지 못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더러운 곳입니다
아마도 의학 상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 인체에서 가장 더러운 곳이 어디인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발입니다 세균 검사를 해보면 발이 제일 더럽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위해서는 발이 깨끗해야 한다고 하면서 발 관리를 잘 하고 있습니다. 물론 보통의 사람은 그것을 관리를 받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발을 씻겨 주시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이 시대도 자기들이 그대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저 역시도 예전에 집사로 신앙생활을 할 때 목사가 발을 씻겨 주는 의식에 참여를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것을 천주교나 기독교 역시 똑같이 세족식이라고 하면서 행하고 있습니다.
감동입니다.
누군가 발을 씻겨 주면 그것이 얼마나 좋은 가를 경험을 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습니다. 꼭 교회가 아니라 집에서도 남편이나 부인이 서로 발을 씻겨 주면 발이 얼마나 시원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정말 그때에 목사가 발을 씻겨 주는 그 느낌이 너무도 좋았습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세족식을 하고 목사가 발을 씻겨 주면 그것을 잊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더욱 그 목사를 보면서 신뢰를 합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것과 같이 목사도 낮아져서 자기들의 발을 씻겨 주었으니까 정말 예수님의 제자와 같이 그가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가끔 뉴스에서도 나옵니다.
더구나 교황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주는 행위를 하게 되면 그것이 뉴스의 탑 기사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천주교에 다니는 사람들은 교황에 대한 절대적인 신임을 하고 있습니다. 교황이 신도들의 발을 씻겨 주었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교황이 자기들과 같이 낮아져서 살아가고 있다고 믿어 버리고 있습니다.
교회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를 그래도 몇 년 이상을 다닌 사람이라면 목사가 발을 씻겨 주는 것을 경험을 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씻겨 주는 그것을 보고 정말 목사가 자기들과 같이 낮아지려고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 일을 하신 것과 같이 목사도 하면 그 행위 하나로만도 예수님의 모든 것을 바르게 전하는 목사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행위로 봅니다.
예수님께서 하셨던 행위를 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 사람이 진짜 주님께서 세우신 목사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행위라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과 똑같은 행위를 함으로 해서 사람들은 주님의 제자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행위라는 것이 그런 효과가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나 좋습니까?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를 보고 누가 주님께서 세우신 목사라는 것을 부인을 할 수 있겠습니까? 종교가 그런 쇼를 하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의 쇼에 사람들이 다 미혹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다른 것이 율법주의가 아닙니다.
바로 이렇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을 그대로 행하면서 그것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느끼려고 하는 자체가 다 율법주의에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행위들이 다 자기들의 의를 나타내고 있고 또 그런 행위들을 보면서 하나의 표징으로 삼으려고 하는 자체가 진리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행위 아닙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던 것만 행위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종교적으로 행하고 있는 자체가 행위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것이고 그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끊어진 자라고 사도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4: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5쪽)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주 앞에 낮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가 교회 안에서 교인들의 발을 씻기는 본을 보여 준다는 것이 교인들에 눈으로 볼 때 얼마나 낮아지는 것입니까? 성경을 모르면 이렇게 자기들의 행위로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어떤 행위로 자기를 낮추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낮추는 것입니까?
오히려 교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를 낮추게 보이려고 하는 것은 오히려 그 행위를 보고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더 놓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낮추는 것이 아니라 높이는 것임을 우리가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목사가 이렇게 하는 행위를 보면서 우리 목사님은 정말 낮아 지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그것은 낮추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종교적인 행위에 불과 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세족식을 하면서 교인들의 발을 씻겨 주는 것이 주 앞에서 낮춘 것입니까? 교인들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주님 앞에서는 그것이 얼마나 교만한 행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다 육에 빠져 있어서 모르고 있습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주 앞에서 낮추라는 것이 이런 행위를 통해서 낮추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평소에 그들이 얼마나 높아져 있으면 자기를 낮추게 보이려고 그런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자기가 낮아져 있는 목사라면 절대로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기를 낮추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기만입니다
사람들을 미혹하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행위를 함으로 해서 누가 그를 낮다고 말 합니까? 주님께서 그가 낮아졌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행위로 낮아지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늘 주님 앞에서 낮아져 있어야 합니다. 아니 그 은혜를 아는 성도라면 절대로 높아질 수 없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행위로 하고 있는 이 세족식이라는 예식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높이고 있다는 것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왜 이런 일을 합니까?
아직까지도 초등학문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뜻을 깨닫지를 못하니까 그런 행위를 하면서 자기를 낮추려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식에 미혹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런 의식을 행하는 자체가 이미 종교가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해가 안 됩니다.
어떤 행위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면 그것을 하지 못하고는 견디지를 못하는 것이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사람들이 이런 행위에 너무도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아시고 성경의 문자를 그대로 행하는 일을 삼가시기를 부탁드립니다.
사실 경험을 해 보신 사람은 알 수 있습니다.
비록 작은 교회라 해도 자기 목사가 발을 씻겨 주는 그 행위가 얼마나 감동이 되는 가를 알 수 있습니다. 사단은 이렇게 사람의 행위를 통해서 감동을 받게 만들고 있고 거기에 미혹을 당하는 교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감격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3:6-8절을 보겠습니다. (신 170쪽)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주님이십니다.
그래도 베드로는 주님이 누구시라는 고백을 했던 사람입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마태복음 17장에서 말 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이기 때문에 지금 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셔도 깨닫지를 못하고 그저 일상의 일로 받아들이면서 주님께 발을 내 밀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런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려고 하자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렵니까? 하면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아니더라도 이 세상의 이치로 생각을 할 때 자기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입니다.
왕입니다
그 왕이 신하의 발을 씻기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것은 이 세상의 이치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이 발을 씻기려고 하자 주님께서 어떻게 제 발을 씻기시려고 합니까? 하면서 절대로 내 발을 씻기지 못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십니다.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을 알고 못 알고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주여 어찌 제 발을 씻기시나이까? 말을 하자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는 이상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발을 씻기는 그 행위라면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이 시대 쇼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까? 아마 몰랐다면 베드로는 주님에게 주여 어찌하여 내 발을 씻기나이까? 라고 물을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렇게 야기를 하고 있고 주님께서는 네가 지금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족식입니까?
그것을 모른다면 바보입니다 주님께서 저녁을 드시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수건을 두르시고 제자들을 발을 씻기는 행위입니다 단순히 그 말씀을 하고 있다면 베드로가 지금 그것을 모르겠습니까? 바보가 아니라면 주님께서 자기 발을 씻기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몰랐습니다.
주님께서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세족식이라면 베드로가 모를 수 없습니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보고 목사가 되어서 교인들의 발을 씻기는 그런 예식을 하는 것으로 마치 주님께서 이 후에는 알리라는 그 말씀을 알아서 하고 있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안 된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네 발을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베드로가 주님을 예수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 다녔는데 베드로가 끝까지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한다면 주님과 베드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이상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발을 씻겨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거부를 해서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면 주님과 베드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되지 왜 주님께서 발을 씻기시는 것을 못 씻기게 하는 것으로 상관이 없다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베드로가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믿으면 되지 왜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면 주님과 베드로가 왜 아무 상관이 없겠습니까? 그저 발을 씻겨 주는 것이라면 이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역시 주님과 상관이 있으려면 주님이 지금 이 시대도 우리의 발을 씻겨 주셔야 한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고린도후서 6:14-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92쪽)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무슨 상관입니까?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는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은 서로 상관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을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있기 때문에 주님과 베드로가 상관이 있는 것이고 그것을 주님께서 유월절 전에 마지막 저녁을 드시면서 직접 본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행위가 아닙니다.
정말 우리는 늘 성경을 볼 때 마다 주의를 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어떤 사건을 문자 그대로 행하기를 너무 좋아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결과는 가져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종교가 되어 의식화 하고 있습니다.
상관이 있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베드로의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은 주님과 베드로가 상관이 있다는 것을 직접 본으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이 행위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안에서 담겨져 있는 뜻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하는 것을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베드로가 주님께서 발을 씻겨 주시는 것을 도저히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자기 발을 씻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후에는 알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후가 언제입니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난 후에 성령이 제자들에게 오시면 주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을 알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무슨 말씀입니다
이 후에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주님이 하신 것을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세족식이라는 예식을 만들어서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족식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지금 베드로와 같이 모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이 세족식을 교회의 하나의 예식으로 만들어서 목사나 천주교의 신부들이 그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모르니까 문자 그대로를 보고 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행위를 통해서 자기들이 얼마나 높아지고 있는 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행위로는 낮아지는 것처럼 보일 수 있을지 몰라도 그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기들이 얼마나 이제까지 높아졌는가를 스스로 증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주님께서 유월절 전에 저녁에 식사를 하시던 중에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는 그것을 예식으로 해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꼭 기독교가 아니더라도 이 세족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그런 행위를 하는가 하면 행위로 낮아지는 것을 보이고 싶기 때문입니다. (2)-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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