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천국모형 가나안
로마서 10:1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저희가 듣지 아니하였느뇨 그렇지 아니하다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난다고 말씀합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이지만 사람들은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들음에서 난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떤 말씀을 들어야 합니까?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믿음이 난다고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은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기록한 말씀이라는 것을 이미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까?
아마 교회에 다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다고 주장을 할 것입니다 한 사람도 이것에 대해서 의심을 하시지 않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씀을 듣고 있다고 말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고 자기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 왔습니다. 그런 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오히려 대적을 하고 심지어는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겠습니까? 구약 성경도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기록한 말씀인데 그들은 예수를 안 믿었습니다.
예수 믿습니까?
교회에 다니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하면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자기를 무시한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왜 믿지를 않느냐면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듣지를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자기들이 예수를 믿는다고 할 것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어느 누구도 의심을 가질 필요도 없고 그것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을 오히려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솔직히 결론 적으로 말씀을 드리면 지금 한국교회는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는 믿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표면적으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맞지만 그들은 믿음의 말씀을 듣고 있지를 않고 있기 때문에 믿음의 비밀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정말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가 않습니다. 여러분이 평생 예수에 대한 말씀만 듣는다면 복 있는 성도라고 저는 감히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에 대한 말씀을 듣기가 너무도 힘이 듭니다. 예수를 믿으라고 하지만 예수에 대해서는 전혀 가르치지를 않고 있는 것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 외에 말씀을 듣고 있다면 그것은 천국에 들어가는 일에 있어서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너무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면 다른 것은 안 들어도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만 들어도 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조금 극단적으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동안 아무 것도 안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분명히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믿음을 얻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믿음은 오직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었을 때만 생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믿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까? 어린 아이들도 압니다. 왜 그리스도에 대한 말씀을 들어야 하는 가를 잘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면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맹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샤머니즘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믿고 싶다면 그 대상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모르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그것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일 뿐입니다. 자기 필요에 의해서 믿고 싶은 것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베드로후서 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87쪽)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저에게 있을지어다”
이스라엘이 왜 실패를 했습니까?
그들은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 자라가지를 못 했습니다. 성경은 보았고 또 신앙생활은 아주 열심을 다 해서 했고 하나님을 믿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천국 가는 길입니다
다른 길을 찾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지 못 한다면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를 다닙니까?
그리고 그 안에서 늘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이스라엘도 여러분보다 더 잘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에서 말씀을 듣고 성경을 공부를 하고 있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식에서는 어린아이보다도 못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성경 말씀을 설교로 듣고 그 말씀을 본다고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간다고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시적인 언어입니다. 시라는 것은 메타포를 감추어 두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본다고 해서 예수가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그 메타포를 찾아야 예수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가 안 보인다면 그는 믿음이 없다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최소한 예수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믿을 수 있는 것 아닙니까? 모르면서 어떻게 믿습니까? 막연하게 다른 사람들이 믿으니까 나도 믿는다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교회는 광야입니다
구원의 방주가 아니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왔으면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으로 자라가서 우리가 소원하는 천국에 들어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간 것 같이 우리는 그들을 경계로 삼아 천국에 들어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되어 있습니다.
구약은 하나님께서 옛 사람들과 하신 약속이 구약입니다 신약은 새 사람들과의 약속입니다 구약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들에게 하신 약속이며 신약은 온 세상 사람들과의 약속입니다
구약은 무엇이고 신약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구약은 그림자요 신약은 실체입니다 구약은 설계도요 신약은 실재되어진 건물입니다 구약의 믿음을 통해서 신약의 믿음을 볼 수가 있습니다. 구약을 바로 알아야 신약이 바로 보입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희미하게 보였던 것이 실체를 봄으로 해서 아! 그래 이제 바로 보이는 구나 실체를 분별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설계도대로 지어진 집은 잘 지어진 집입니다
설계도대로 집을 짓지 않으면 그 집은 부실공사가 되어 준공검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구약의 모형의 믿음을 통해서 그 믿음을 바로 알게 됨으로서 잘 믿을 수가 있습니다. 구약에 대해 바른 것을 들으면 신약에서 어떻게 믿어야 하는가를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가나안은 천국의 모형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출발하여 가나안땅에 들어 간 것은 오늘 우리가 세상에서 나와서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에 들어가는 모형과 같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홍해를 건너서 광야에서 생활하다가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 땅에 들어갑니다. 이것은 구약에 이스라엘백성이 실제 가나안으로 들어간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렇게 모형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신약에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을 구약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서 배워야 합니다. 그들의 애굽 그리고 광야 가나안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왜 배워야 하겠습니까?
이스라엘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데 중간에서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모형을 보고 우리는 그들과 같이 광야에서 죽는 자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이 왜 죽었는가를 바로 알아야 내가 교회에 나와서 죽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은 모형입니다.
그들만의 실패가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역시 그들과 같이 실패를 할 수 있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너무도 안일하게 생활을 하고 있고 마치 그 실패는 이스라엘만의 실패인 것으로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아주 잘 하고 있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막연하게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6-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저희 중에 어떤 이들과 같이 너희는 우상 숭배하는 자가 되지 말라 기록된 바 백성이 앉아서 먹고 마시며 일어나서 뛰논다 함과 같으니라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간음하다가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죽었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간음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주를 시험하다가 뱀에게 멸망하였나니 우리는 저희와 같이 시험하지 말자 저희 중에 어떤 이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저희와 같이 원망하지 말라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입니다.
그들이 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못 들어갔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도 똑같이 행할 수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거울이 무엇입니까?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육적으로 이런 일들을 했지만 지금 이 시대는 영적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육입니다
그 육을 보고 그대로 안하려고 한다면 정말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역시 이스라엘과 똑같이 망하고 말 것입니다 그들의 육을 통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경계를 해 주고 있지만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고 이 시대가 이스라엘과 같이 그렇게 망해가고 있습니다.
교회는 광야입니다
반드시 천국에 들어가야 하는 여정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했던 것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악을 즐겨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간음을 하고 있고 하나님을 시험을 하고 있고 또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영적으로 깨닫지 못하고 있고 자기가 육적으로 우상숭배를 안 하고 간음을 안 하고 시험을 안 하고 원망을 안 하는 것으로 자기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안 하고 있습니까?
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이었다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겠지만 영의 이스라엘인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데는 문제가 됩니다. 아니 그런 것을 육적으로 안 한다고 해서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림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그림자를 실체로 보고 있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안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숭배, 시험, 간음, 원망이 무엇인가를 실체를 모르기 때문에 역시 우상숭배를 하고 있고 간음을 하고 있고 시험을 하고 있고 원망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면 죽습니다.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나와서 교회에 다니다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은 사람과 마찬 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 땅에 들어 간 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모형이자 설계도입니다
그림자를 그림자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림자가 무엇인가를 모릅니까? 그림자가 사람으로 보인다고 그것을 사람이라고 합니까? 그림자는 사람으로 보일지라도 그 실체는 나무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또 어떤 돌멩이가 될 수도 있는 것이 그림자입니다
우상숭배가 부처 같은 우상을 섬기는 것입니까?
로마서 1:23절을 보겠습니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사람과 금수의 영광과 바꾼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우상 숭배를 한 것이 지금 이 시대는 어떻게 하고 있느냐면 사람이 우상이 되고 있고 금수와 버러지가 우상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우상입니까?
목사가 우상이 되고 있고 교회가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의 행한 영광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데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간증하느라 정신이 팔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 마치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이 되는 줄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우상이 되어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우상 숭배를 한 것을 이 시대도 역시 그렇게 우상 숭배를 즐겨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구약당시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왜 못 들어갔는가를 깨닫는 것은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느냐 못 들어가느냐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림자를 통해서 그것을 경계로 삼아 실체가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이스라엘과 같이 광야에서 죽는 불행한 일을 안 당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가나안에 못 들어갔을까 라는 문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천국 가는 것과 같은 모형과 그림자라면 세상 사람들이 나와서 교회 안으로 들어옵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세례를 받고 성도로서 이름이 올라갑니다.
이스라엘백성들도 광야로 들어갈 때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0: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74쪽)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모형과 그림자라는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우리는 이스라엘백성이 할례만 받은 줄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건넌 것은 세례 받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였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냥 홍해를 건너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 받는 것과 같이 모형과 그림자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애굽에서 나와서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광야로 들어 왔습니다. 광야로 들어와서 사는 것은 우리가 세례 받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도 신앙생활 하다가 천국 못 들어가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고 어떤 사람이 천국에 못 들어가는지를 보겠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습니다.
그런 의식을 통해서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데 실제 구약의 그림자에서도 세례를 받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광야라는 교회에서 죽고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가나안에 못 들어갔는지를 살펴보면 우리가 천국에 들어 가냐 못 들어 가냐를 깨닫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광야로 나올 때에 억지로 나왔습니까? 스스로 나왔습니까?
출애굽기 14:12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쪽)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고한 말이 이것이 아니뇨 이르기를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뇨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들은 억지로 나왔습니다.
우리를 버려두라 우리는 안가겠다 왜 우리가 광야로 들어가야 하느냐면서 안가겠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 억지로 끌어냈습니다. 사실 400년 이상을 살던 땅에서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나온 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억지로 하시는 분입니까? 자의로 하기를 원하십니까?
에덴에서 선악과를 만들어 놓으시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왜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강제로 끌어 내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자유의지를 주시고 선택하도록 하신 분인데 왜 그렇게 하셨을까요?
에덴에서 죄를 안진 사람에게도 강제로 하기를 원하시지 않으셨는데 세상에서 죄를 진 백성들에게 강권을 쓰셨겠습니까? 그 이유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창세기 15:13-14절을 보겠습니다. (구 18쪽)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이방에서 객이 될 것이며 4백년 만에 나올 것이라고 약속 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너의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살다가 4백년이 지나면 재물을 이끌고 나올 것이라는 하나님의 예언적인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 강권적으로 하신 것은 4백년이 되어서 이스라엘백성이 나와야하는데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안 나오면 누가 답답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답답하실 수밖에 없습니다. 약속을 했는데 이스라엘백성이 안 나오면 하나님 스스로 문제가 생깁니다. 이스라엘을 나가게 하시려고 어려움을 주고 힘든 일을 하게 만들었는데도 그들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심한노동을 하게 해도 안 나오니까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다 죽이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안 나오는 것입니다
남자가 태어나는 대로 죽이면 몇 십 년만 지나면 그 종족이 멸종될 것입니다 애굽에서 계속해서 살면 씨가 멸종될 텐데도 안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이행하시려고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강제로라도 끌어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약속이 안 되어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절대적으로 강제로 끌어내시지 않았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12:40-4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0쪽)
“사백 삼십년이 마치는 그 날에 여호와의 군대가 다 애굽 땅에서 나왔은즉 이 밤은 그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심을 인하여 여호와 앞에 지킬 것이니 이는 여호와의 밤이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대대로 지킬 것이니라”
4백 년 만에 나오리라 하셨는데 그들이 안 나와서 30년이 더 지나갔습니다.
30년이 더 지나가니까 하나님께서 편히 계실수가 없습니다. 약속을 하고 안 지키면 누가 잘못하는 것입니까? 왜 성경에서 언약에 대해서 그렇게 중요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약속입니다
그 약속이 이루어 진 것을 우리가 보고 이 시대 사람들이 앞으로 남아 있는 단 한가지의 약속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아브라함에게 일방적으로 언약을 하셨지만 그 언약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하신 언약이 어떻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안 나오는 것은 사람 책임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잘못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것을 변절 시키는 분이 아닙니다. 한번 약속 하신 것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시는 분입니다 약속을 했는데도 이스라엘이 안 나오니까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강권적으로 끌어냈습니다.
모세를 보내서 애굽 사람들에게 재앙을 내림으로 그들이 재앙을 받는 것을 보고 나오도록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나올 수밖에 없게 만드시고 그들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왜 안 나왔을까요?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가면 좋은데 왜 그들이 안 나왔을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애굽의 고센 땅은 참으로 좋은 땅입니다 4백년을 살면서 몇 대를 거치면서 그곳에 기반이 잘 잡혔습니다. 자기들이 수백 년을 공들여서 건축하고 또 그 땅은 애굽에서도 제일 좋은 땅입니다
이렇게 생각을 하면 됩니다.
만약에 지금 북한이 어느 정도 살기가 괜찮다면 그들이 탈북을 하겠습니까? 탈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은 북한이 너무 경제적으로 나빠졌고 거기에 있다 보면 굶어 죽게 되니까 목숨을 걸고서라도 나오는 것입니다 만약 먹을 것이 해결이 되면 절대로 탈북을 하지 않습니다.
남쪽은 이방과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같은 동족이 살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여기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고 남쪽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쉽게 나올 수 없습니다. 더구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나와야 합니다. 하지만 고통이 심해지니까 죽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을 하고 나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애굽을 나가게 되면 광야 길을 가야하고 또 가나안에 지금 거주하는 사람들과 전쟁도 해야 합니다 가나안에 가는 것 보다는 애굽에서 그냥 사는 게 좋았습니다. 힘은 들더라도 그래도 애굽이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안 나오려는 것을 하나님께서 강제적으로 끌어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기반이 잡힌 사람들은 예수를 안 믿으려 합니다. 광야생활은 교회생활과 같습니다. 그럼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광야는 말 그대로 사막입니다
광야는 고생입니다
집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풍족한 것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원망을 할 때 애굽에서 있던 것을 추억하면서 하나님을 원망을 하다가 진노를 받았습니다.
교회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국 교회는 너무도 기복주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교회에 나오면 모든 것이 다 해결이 되고 자기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사실 편안했던 것이 절대 아닙니다.
그들은 당장 먹을 것과 마실 물이 없었습니다.
광야는 사막입니다 그 자리에서 정착을 해서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이동을 해서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물과 먹을 것을 주시지 않으면 자기들 스스로는 구할 수 없는 곳이 광야라는 것을 우리가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광야를 마치 가나안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육적인 것을 하나님을 이용해서 채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광야에 나온 목적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오히려 광야에 안주를 하려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6:48-50절을 보겠습니다. (신 154쪽)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만나도 하늘에서 내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만나를 먹고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늘에서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도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왜 죽었습니까?
그들은 믿지를 않았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육적으로는 하늘로부터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 배가 불렀을지 몰라도 생명의 떡을 먹지를 못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알고 먹을 수 있겠느냐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육적으로는 분명히 하늘로부터 내려주는 만나를 먹고 살았지만 그들의 영의 양식을 먹지를 못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예수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성막을 통해서 충분히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모형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그들은 믿음을 몰랐고 또 그 성막을 왜 짓는 가에 대해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모세를 통해 성막을 지으라고 하니까 그 모형을 만들어서 제사를 드리는데 급급했습니다.
성막을 어디서 만들었습니까?
광야라는 교회에서 이미 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셨는데도 이스라엘은 그것에 대해서 전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사실 그들에게 있어 가나안은 그저 자기들이 육적으로 살아야 하는 땅에 불과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나안이 어떤 곳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몰랐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에 나와서 어떻게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정말로 불행한 자입니다. 이미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그 모형을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깨닫지 못한다면 이스라엘 보다 더 큰 저주를 받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만나를 주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만나를 먹으면서도 그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고 그저 자기들의 육적인 배가 부르는 것에 만족을 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에 나와 있으면서도 이스라엘과 같이 그렇게 자기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구하면 다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갈증이 나서 물이 필요할 때 그들에게 물을 주셨고 또 배가 고파 했을 때 만나를 내려 주셨고 고기가 먹고 싶을 때 메추라기를 보내 주셔서 고기를 먹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하기도 전에 먼저 원망을 하고 시험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 알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그냥 죽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언약을 이루시려면 반드시 그들에게 물을 주어야 하고 먹을 것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다 알고 계셨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구하기도 전에 먼저 원망과 불평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탐욕을 부렸습니다.
만나를 더 많이 먹기 위해서 욕심을 부렸고 또 메추라기를 더 많이 먹기 위해서 탐욕을 부렸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역시 그렇게 자기들의 육적인 것을 위해서 탐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셔서 가나안으로 데려 가실 텐데도 그것을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19:4절을 보겠습니다. (구 111쪽)
“나의 애굽 사람에게 어떻게 행하였음과 내가 어떻게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로 인도하였음을 너희가 보았느니라”
어떻게 인도를 하고 있습니까?
독수리 날개로 이스라엘을 업어서 인도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그것을 믿지를 못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광야에서 불평을 하고 원망을 하고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에는 모두가 죽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나와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통해서 우리를 어떻게 인도를 하고 있는 가를 모형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약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그들과 같이 원망을 하고 탐욕을 부리다가 결국에는 광야에서 다 죽고 마는 신세가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거울입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도하셨는가를 알면 우리도 역시 그렇게 천국으로 인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역시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믿음이 없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자기들을 천국으로 인도하시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만나를 어떻게 했습니까?
부지런해서 잘 먹고 사는 줄 알고 남들 보다 더 일찍 일어나 두 배를 거두어 보니까 나머지는 썩어 버렸습니다. 열심을 내서 이틀 먹을 것을 거두어 오니까 하루 먹고 나머지는 썩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썩게 해 주셔야 되는 것이지 남들보다 열심을 내서 한다고 그것이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면 하나님께서 너희의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광야 생활 하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우리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해 주셔야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것을 깨닫기 까지는 40년이란 세월이 걸렸습니다.
참으로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어려서부터 이것을 바로 깨달으면 참 좋은데 그렇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저도 물론 이것을 깨닫기 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 했습니다
제가 지금 여러분에서 부지런함을 열심을 내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조차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시라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왜 요단강을 건너지 못하고 죽었을까 입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해서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습니까?
그들이 순종을 못해서 광야에서 죽었습니까?
이스라엘백성들이 가나안에 못 들어갔다는 이유는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유는 간단합니다. 광야에서 원망을 하고 또 시험을 하고 탐욕을 부리고 우상을 섬기고 한 것도 물론 이유가 되겠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가나안의 의미를 몰랐습니다.
그들이 안 들어갔기 때문에 못 들어갔습니다.
가나안 앞에까지 와서 그들은 들어가면 되는데 안 들어갔기 때문에 못 들어 간 것입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많지만 결정적인 이유는 그들이 들어가기를 싫어했습니다.
신명기 1:8절을 보겠습니다. (구 259쪽)
“여호와께서 너희의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사 그들과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하신 땅이 너희 앞에 있으니 들어가서 얻을지니라”
요단강 앞에서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믿고 들어가서 얻으면 됩니다. 들어가서 얻으라고 하셨는데 그들이 안 들어갔습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여러 가지를 말하는데 지금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대로 들어가서 얻으면 되었지만 안 들어갔습니다. 안 들어가서 40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하다가 죽었습니다.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고 생각을 할 것입니다
마치 이스라엘만이 믿음이 없어서 안 들어 간 것으로 오해하지를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역시 마찬가지로 들어가라고 해도 안 들어가고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우리는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그냥 들어가서 얻으면 되었는데 안 들어간 이유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정탐꾼을 보냈는데 그 사람들이 갔다 와서 보고를 잘못해서 못 들어갔다고 말 합니다
12명의 정탐꾼을 보냈는데 2명은 갈수 있다고 하고 10명이 악평을 해서 못 들어갔다고 말 합니다 그 말도 어느 정도 맞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12정탐꾼이 갔다 와서 보고를 잘못해서 못 들어 간 것이 아니고 12정탐꾼을 보낸 것 때문에 못 들어갔습니다.
12정탐꾼을 보낼 필요가 없이 그냥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12정탐꾼을 보낸 것이 원인입니다 12정탐꾼들을 모세가 보낸 것이 아닙니다. 마치 이 정탐꾼을 모세가 보낸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를 못해서 정탐꾼을 보내자고 했습니다.
신명기 1:19-22절을 보겠습니다. (구 260쪽)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명하신 대로 우리가 호렙산에서 발행하여 너희의 본바 크고 두려운 광야를 지나 아모리 족속 산지 길로 가데스바네아에 이른 때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주신 아모리 족속의 산지에 너희가 이르렀나니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너희가 다 내 앞으로 나아와 말하기를 우리가 사람을 우리 앞서 보내어 우리를 위하여 그 땅을 정탐하고 어느 길로 올라가야 할 것과 어느 성읍으로 들어가야 할 것을 우리에게 회보케 하자 하기에”
이스라엘백성 전체가 다 모세 앞으로 나와서 안 된다고 말 합니다
백성들이 다 나와서 안 됩니다 우리가 정탐꾼을 먼저 보내어 어떻게 가야 우리가 승리 할 수 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온 후에 들어가야 한다는 것이 이스라엘전체 백성들의 제안입니다
모세는 그냥 올라가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왜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고 했느냐면 21절에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얻으라 두려워 말라 주저하지 말라 한즉” 이 땅은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신 땅입니다
약속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약속된 땅이 이 앞에 있으니까 주저 할 것도 없고 두려워 할 것도 없이 올라가서 얻으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언약을 믿지를 못했기 때문에 자기들이 직접 눈으로 보고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가서 얻으라고 하니까 백성들이 안 됩니다
그냥 갔다가 적군들을 만나면 어쩌렵니까? 우리가 어떻게 전쟁을 해서 승리할 것인가를 가서 보고 와야 한다고 자기들 힘으로 전쟁해야 한다고 하면서 정탐꾼을 보내라고 모든 백성들이 아우성을 쳤습니다. 모세가 보내고 싶어서 보낸 것이 아니라 모세는 그냥 가고 싶었지만 모든 백성들이 모세 앞으로 나와 요구 하니까 보낸 것입니다
사실 모세는 보내지 않아도 됐습니다.
모세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들어가면 승리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신명기 1:30-31절을 보겠습니다. (구 260쪽)
“너희 앞서 행하시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애굽에서 너희를 위하여 너희 목전에서 모든 일을 행하신 것 같이 이제도 너희를 위하여 싸우실 것이며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하나”
애굽에서 인도 하신 것 같이 요단 저 편으로도 인도 하실 것이다 애굽에서 인도 하실 때 이스라엘이 애굽과 싸웠습니까? 그들이 싸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싸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싸우셔서 이기시고 이스라엘백성을 요단 앞까지 인도하신 것입니다 그럼 그 다음 요단강 건너가서 싸우는 것도 누가 하시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다 싸우셔서 이기시고 이스라엘백성은 들어가서 살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 들어갔습니다.
여기서 믿음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모세에게 나와서 아우성 친 것은 자기들이 싸워서 이겨서 들어가려고 한 것입니다 자기의 노력으로 자기의 힘으로 요단강을 건너 전쟁에서 승리하려고 한 것입니다
약속을 안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너희들의 노력으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내가 약속했기 때문에 너희를 인도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은 하나님께서 가나안에 들여보내신다는 약속을 믿고 그냥 들어가면 됩니다. 자기들이 무기를 가질 필요도 없습니다.
들어가서 여리고성을 일곱 번 도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것입니다 여리고 성은 정말 튼튼한 성 이었습니다 쉽게 말씀드려서 철옹성과 같은 곳 이었습니다 그런 성을 하나님이 무너뜨리시니까 그냥 무너졌습니다.
이 말은 우리의 노력으로는 여리고 성이 무너질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시니까 무너졌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안 무너뜨리면 하나님의 책임이니까 무너뜨린 것입니다 애굽에서 광야로 나올 때도 하나님께서 싸워 주셨고 요단 건너서도 하나님께서 싸워 주실 것입니다
내 힘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때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성도는 지금도 하나님께서 싸워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과 우리의 머리로 꾀를 부리는 것은 중단해야 합니다. 우리의 머리로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안 되는 것입니다
안 됩니다
우리의 머리로 잘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 한번 불어 버리시면 끝이 납니다. 10년,20년,30년 노력해 놓은 것이 하루아침에 없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싸워 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냥 들어갔으면 그들은 평안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안 들어갔습니다. 12정탐꾼을 보낸 후에라도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으면 그들은 들어 갈수 있었습니다. 정탐꾼이 갔다 왔을 때에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고 자기들의 노력으로만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싸워서 천국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대 다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잘 해가지고 천국에 들어가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안 들어갑니다.
예수 믿으면 들어갈 수 있는데 예수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를 믿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데도 그것을 믿지를 못하니까 자꾸 다른 것을 하려고 정탐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을 가지고 정탐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입니다
자기들이 싸워서 이기려고 정탐을 해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지킬 수 있는 것을 아주 열심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양을 내는 사람들은 서로가 칭찬을 해 주면서 그 모양이 마치 믿음의 증표나 되는 것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정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싸우려고 정탐을 하는 순간 그는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냥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들어가라고 하면 들어가면 되는데 예수만으로는 못 미더운 것입니다 혹시 믿음만 가지고 들어가다가 율법에 의해 죽는 것이 아닐까 정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어디를 정탐하고 있습니까?
구약의 율법을 너무 열심히 정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것도 지켜야 하고 저것도 지켜야 하고 혹시 이것을 안 지켰다가 율법에 의해서 죽는 것이 아닐까 스스로 생각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내가 싸워서 들어갈 수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업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게 해 주셔야지 들어갈 수 있는 것이지 내가 싸워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왜 광야에서 죽었는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믿지를 않았습니다.
언약을 믿었다면 그들은 가나안에 노래를 하면서 들어갔을 것입니다 자기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하나님이 애굽보다 약한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쉽다는 것을 알았다면 광야에서 죽지 않고 모두가 가나안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민수기 13:31-33절을 보겠습니다. (구 217쪽)
“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가로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탐지한 땅을 악평하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정탐꾼이 갔다 왔습니다.
12정탐꾼이 갔다 와서 10정탐꾼이 말하기를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그 거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고 말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았습니다.
자기들 보기에 스스로 메뚜기 같았으며 그들이 보기에도 메뚜기 같았다고 이야기 합니다 메뚜기와 사람이 싸우면 누가 이깁니까? 여호수아와 갈렙은 메뚜기와 사람이 싸우면 메뚜기가 이긴다고 했고 열사람은 사람이 이긴다고 했습니다.
메뚜기와 사람이 싸워서 메뚜기가 이긴다고 한 것은 믿음입니다.
사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는 가나안에 그냥 무작정 들어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일은 율법에 비추어 보면 불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내가 율법을 다 지켜서 들어간다는 것은 천국을 빨리 포기를 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합니다.
민수기 14:1-9절을 보겠습니다. (구 217쪽)
“온 회중이 소리를 높여 부르짖으며 밤새도록 백성이 곡 하였더라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며 온 회중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죽었거나 이 광야에서 죽었더면 좋았을 것을 어찌하여 여호와가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칼에 망하게 하려 하는고 우리 처자가 사로잡히리니 애굽으로 돌아가는 것이 낫지 아니하랴 이에 서로 말하되 우리가 한 장관을 세우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하매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 일러 가로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탐지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오직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 밥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 말라 하나”
믿음이 있는 사람은 다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사람은 메뚜기의 밥이다 사람하고 메뚜기와 싸워도 사람은 메뚜기의 밥이라는 것이 믿음 입니다 사실 가나안에 살던 사람들은 신장이 장대한 사람들 이었습니다 큰 사람들을 볼 때 자기들은 스스로도 메뚜기처럼 보였던 것입니다
다윗과 골리앗이 싸웠습니다.
골리앗이 아무리 신장이 장대 할지라도 다윗의 밥 이었습니다 다윗은 물맷돌 하나로 골리앗을 죽였습니다. 그것이 믿음 입니다
8절을 보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믿음은 약속을 믿는 것이라고 믿음의 정의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들어 갈수 있다고 말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약속을 믿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그 땅에 사는 백성이 키가 크고 성이 튼튼한 것은 문제 삼을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가 들어가는 것이 기뻐하냐 기뻐하지 않으시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면 그곳보다 더 견고하더라도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가자고 했습니다.
그 땅은 좋은 땅이니 들어가자고 했을 때 백성들이 그들을 돌로 쳐 죽이려고 했습니다.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들어가기 싫으면 말라 하시고 광야로 들여보내서 그들을 광야에서 죽게 만들었습니다. 교회는 나왔지만 천국에 들어가지를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들어가라면 들어가면 됩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기적을 많이 경험하고도 금세 뒤 돌아서면 잊어버립니다. 사실 우리는 그들을 보면서 이해를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도 또한 말씀으로 분명히 밝히셨지만 우리도 뒤 돌아서면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가진 사상과 열사람이 가진 사상을 비교해 보겠습니다. 열두 사람은 그 지파에서 우두머리를 뽑았습니다. 열두 사람이 보고 느낀 것은 같았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었고 열사람은 하나님이 약속했을 지라도 우리가 전쟁해서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를 의지한 사람들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을 의지 했습니다.
열두 사람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보고 느낀 것은 같았어도 약속을 믿는 믿음이 달랐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을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약속을 믿는 믿음이 확실한 사람은 모두 천국에 갈수가 있습니다. 열 정탐꾼과 두 정탐꾼의 비유는 가나안을 먼저 보고 와서 백성들에게 보고 하는 자들입니다 중간 보고자들입니다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 천국을 먼저 보고 와서 말해 주는 자가 누구입니까? 말씀을 전하는 자들입니다
어디서 봅니까?
성경에서 천국을 보고 와서 성경 속을 다 조사해 보고 와서 백성들에게 보고를 해 줍니다 이때 쉽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고 어렵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어떻게 들어 왔습니까?
은연중에 천국은 자기들이 노력해서 열심히 이겨서 들어가야 한다고 들어왔습니다. 애굽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 겨우 두 사람만이 들어갔다는 것을 들어 왔습니다.
노아 당시에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방주에 들어 간 사람은 겨우 8명이다 구원이 그렇게 쉬운 줄 아느냐 하면서 은연중에 성도들에게 열심을 내고 노력해서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열 정탐꾼과 여호수아 갈렙이 한 말을 비교해 보면 압니다. 열사람은 어렵다고 주장하고 두 사람은 쉽다고 주장 합니다
오늘날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한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말하고 한사람은 천국에 들어가기 쉽다고 말 합니다 누가 바른 진리를 전하는 사람입니까?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목사들은 정말 위험합니다.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연합한 사람 모두는 못 들어갔습니다. 광야에서 고생만 하다가 죽었습니다. 지금도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을 들으면 그들 모두가 같이 못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쉽게 표현해서 교회생활만 자기 열심으로 고생만 하다가 죽는 것입니다
어느 쪽이 많겠습니까?
지금도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천국을 자기들이 싸워서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내가 속해 있는 곳의 말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천국 들어가기 어렵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 다 같이 멸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데 무슨 그리도 걸림돌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모세와 여호수아는 두 인도자를 상징 합니다
모세는 율법을 상징하는 사람이고 여호수아는 은혜를 상징하는 사람입니다
요한복음 1:17절을 보겠습니다. (신 142쪽)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율법은 모세로 왔고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이 가나안 땅에 두 명밖에 못 들어갔다고 말 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스라엘백성 전체가 들어갔다고 말 합니다 두 명밖에 못 들어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천국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다 들어갔다고 믿는 사람은 들어 갈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는 안 됩니다
모세가 인도 한 사람들에게는 율법을 지켜라 이것을 하라 저것을 하라 모세는 계속해서 지켜라 무엇을 하라 그런 것만을 가르쳤는데 그들은 모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지켜서는 도무지 못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들어간다고 했습니다.
지키고 안 지키는 것은 둘째 문제고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에 들어 갈수 있다고 가르쳤습니다. 말은 참 잘 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았어도 하나님의 성도로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그 말은 닭이 먼저냐 알이 먼저냐 하는 논쟁만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리는 그런 논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에서 벗어난다면 그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하는 길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모세와 같이 율법을 강조하면서 이것 지켜라 저것 지켜라 하는 사람은 광야에서 죽은 것 같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모세도 가나안에 못 들어갔습니다. 모세가 천국에 못 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는 설계도입니다
설계도이기 때문에 이런 사람은 못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세 자신은 구원은 받았지만 가나안에 못 들어 간 것은 이런 사람은 천국에 못 들어간다는 것을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율법이 한 모양이라도 내게 있으면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들어갔습니다.
약속을 믿고 들어간다고 말한 사람들은 모두 들어갔습니다. 모세와 같이 그런 교육을 받아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들어가기가 힘들고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들어 갈수가 있습니다.
예표입니다.
여호수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람 갈렙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실 이 갈렙에 대해서 사람들이 잘 모릅니다. 이 갈렙은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라 에서의 자손 중에서 애굽에 포로로 잡혀 와서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천국은 누가 들어갑니까?
이스라엘을 대표해서 여호수아가 들어갔고 이방인을 대표해서 갈렙이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갈렙에 대해서 생각을 해 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도 아닌 갈렙이 왜 그토록 가나안에 들어가고자 했고 이스라엘도 가지지 못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은 이스라엘과 이방인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부터 예표로 보여 주셨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은 이스라엘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들어간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왜 갈렙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갈렙은 너무도 절박했습니다. 왜 절박했는가 하면 그는 애굽에서 있을 때 포로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보다 더 심한 박해를 받고 살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이스라엘은 포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포로로 잡혀와 완전히 노예로 살아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애굽에서 그렇게 산 갈렙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습니다. 갈렙은 가나안 민족과 싸워서 죽나 애굽으로 돌아가서 노예로 사나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도 가나안은 희망이 있습니다.
애굽으로 돌아가면 무조건 노예가 되지만 가나안이 싸워서 이기면 젖과 꿀리 흐르는 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하겠습니까? 갈렙은 다시 애굽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절박함이 있었습니다.
천국은 누가 들어갑니까?
정말 갈렙과 같이 절박한 심정이 있는 사람만이 들어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소망이 없는 사람은 당연히 천국에 소망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많은 성도들이 노예나 종들이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갈렙 만큼 절박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지만 갈렙은 노예로 다시 돌아갈 바에는 차라리 싸우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설령 자기는 죽는다 해도 자기 자손들이 얻을 수 있다면 싸우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절박함이 있어야 가나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나중에 이 갈렙에 대해서는 따로 말씀을 하겠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은 정말 절박하고 이 세상에서 소망이 끊긴 사람들이 사모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갈렙을 통해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단의 노예가 되기보다는 죽는 한이 있어도 가나안에 들어가겠다는 각오를 가진 성도는 주님께서 믿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여호수아 4:18절을 보겠습니다. (구 324쪽)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이 요단 가운데서 나오며 그 발바닥으로 육지를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 여전히 언덕에 넘쳤더라”
요단의 뜻은 죽음입니다.
요단강은 죽음의 강이라는 뜻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요단강을 건어야 합니다. 무슨 말씀이냐면 반드시 죽어야지만 요단강을 건너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표입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죽음의 강 요단으로 들어가니까 천국으로 가는 길이 열려 졌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율법이 죽어야 합니다. 율법이 죽음의 강 요단강에서 빠져 죽어야 여러분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하든지 그 율법을 더 많이 살리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 요단강을 건너기를 주저하면서 율법을 죽이지 않고 있습니다.
잘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이미 그림자와 예표에서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도 우리에게 율법이 어떻게 되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만약 율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들어갈 수 없고 오히려 율법에 의해서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에게서 믿음의 말씀을 듣는가는 너무도 중요 합니다 모세와 같은 지도자에게서 들으면 들어가기가 힘이 듭니다. 여호수아에게서 들은 사람들은 한 사람도 거역하지 않고 모두 들어갔습니다. 모든 백성이 요단강이 갈라지며 들어 갈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율법을 못 지켜서 못 들어 간 것이 아니고 약속을 믿지 않아서 못 들어 간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습니다.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우리도 이것이 모형과 그림자라면 천국에 들어가는 약속이 필요 합니다 지금도 율법을 지켜서 들어가려는 사람은 못 들어가지만 약속을 믿는 사람은 모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천국 들어 갈 줄 믿습니까?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백성이 자기 노력으로 들어가려면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들어가게 해 주시면 간단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붙어 있으면 됩니다. 붙어 있으면 주님의 날에 끌려올라 가는 것입니다 내가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붙어 있기만 하면 됩니다.
사도바울은 내가 붙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셨을 때 나도 살아났다고 말 합니다 사도 바울은 꼭 함께 라는 말을 썼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믿은 사람이지만 자신이 십자가에 함께 못 박히고 살아났다고 말 합니다 우리도 마찬 가지입니다 우리도 함께 십자가에 달리고 살아났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습니다.
천국의 모형입니다
가나안은 약속을 믿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들어 갈수 있다는 것을 모형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을 잘해서 가나안에 들어 간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 9:4-5절을 보겠습니다. (구 276쪽)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여호와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너희의 정직함도 의로움도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약속을 이루기 위해서 하심이지 너희가 잘 나서 들어 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의 의로움도 아니요 정직함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약속을 믿음으로 천국에 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성도는 은혜로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그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려고 하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이 세상 사람의 기준이라는 말씀입니다.
천국 갈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예수 이름을 힘입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부족을 보지 않으시고 믿음을 기뻐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님들을 천국으로 인도 하실 줄 믿습니다. 믿음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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