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8: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초대교회입니다.
그들은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도 믿음으로 이긴 성도들입니다 지금은 우리나라만 해도 민주주의가 몇 십 년 계속되다 보니까 왕정 국가의 실상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죄수들은 인권이라는 것이 없었다는 것을 역사를 통해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고난입니다
사도 바울은 양자의 영을 받은 성도들에게 자녀이면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라고 말씀을 하면서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받고 있는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에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고난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 큰 안심이 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지만 우리나라에도 100여 년 전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고난을 당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만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고난입니다
그들을 폄하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고난이라는 것은 어쩌면 자기 종교를 위해서 받은 고난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그런 고난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인하여 받는 고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모르는 나라에서 믿는다는 이유로 받는 고난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고난이 없습니다.
왜 고난이 없는가 하면 솔직히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는 사람은 많이 있을지라도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고난을 받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그리스도편지에서 율법을 완전히 폐하고 예배를 한다는 것을 그들이 모르기 때문에 고난을 주지 않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우리 피조물은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자손으로 태어난 우리 육신은 고난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시대였으면 사도 바울이 혹시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럽의 역사를 보아서 잘 알겠지만 중세 시대만 해도 종교의 권력이 너무 강해서 많은 사람들을 종교 재판에 넘겨서 고난을 주었습니다.
육신의 생명입니다
그것 까지도 빼앗기는 고난을 당했습니다. 그런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통해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시 원형 경기장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을 가둬 놓고서 굶주린 맹수들을 풀어서 잡아먹게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고난입니다
유대인들로부터도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로마라는 강대국에 의해서 고난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의 문제로 고난을 주었고 로마는 자기들의 정치를 위해서 성도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고난을 받는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그래도 위로가 될 수 있는 말씀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담의 자손인 이 피조물들이 너무 고난을 심하게 받았습니다. 그들에게 고난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보호해 줄 국가가 있었던 것도 아니고 또 종교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부활의 형상으로 변하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서는 왕과 같이 제사장으로 영원히 왕 노릇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 천국에서는 천사를 부리는 그런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그것이 있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아도 소망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받은 이 고난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영광이 있기 때문에 기꺼이 고난을 받을 수 있다고 위로를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도들이 어떠한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는가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그런 피조물입니다
그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서는 아무 소망이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사도 바울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고 있는 그 피조물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한 가지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피조물은 나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도 나입니다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은 자기 육신을 보고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자기 안에 양자의 영을 받은 것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빼앗기는 그런 고난에서 성도들이 바랄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고난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깊은 뜻을 알게 되면 우리가 피조물이 바랄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날 때는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일이 우리 앞에 펼쳐질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피조물이 받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들이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피조물을 나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나라고 하고 있습니다. 진짜 나는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이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하셨습니다. 이 영을 하나님의 영,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양자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피조물이 허무에 굴복했지만, 그것은 자의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굴복하게 하신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피조물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 말을 바꾸어서 하고 있습니다. 7장에서 8장 초반까지는 육신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을 보고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전혀 다른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육신을 가지고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의 법을 섬기고 있는 우리 육신을 피조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피조물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양자의 영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피조물들이 고난도 함께 받고 있습니다.
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종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육신은 허무한데 굴복을 했는데 그것은 자기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허무한 것에 굴복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문제가 되는 말씀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복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들에게는 참으로 문제가 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허무한데 굴복한 것이 우리 뜻이 아니라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았다고 하면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뭐냐고 따질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허무한 것에 굴복케 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면 그럼 우리는 무엇이냐고 따질 사람도 있습니다.
이사야41:29절을 보겠습니다. (구 1017쪽)
“과연 그들의 모든 행사는 공허하며 허무하며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뿐이니라”
우리 인생입니다
그 생각이 허무하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아담이 범죄를 하는 그 순간부터 그 생각이 허무하게 되었습니다. 아니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는 따 먹는 순간부터 우리 인생은 허무한 것에 굴복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행사입니다
모든 행사가 공허하며 허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허무한가 하면 이스라엘 모두가 허무한 것이 굴복하고 있기 때문에 허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은 바람이요 허탄한 것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우상이 바람이라는 말씀은 그만큼 허무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람입니다.
그것은 헛되고 무의미합니다. 이스라엘의 모든 행세가 다 그렇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다 허무한 것에 굴복을 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허무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 육신으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다 우상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사람의 모든 행위가 다 우상인데 그것이 허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은 그 허무한 것에 다 굴복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율법입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사도 바울이 여러 가지로 표현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은 그렇게 허무한 것에 굴복이 되고 말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허무한 것에 굴복을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은 다 허무한 것에 굴복이 되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그 자체가 허무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육신으로 죄의 법을 섬기고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는 그것을 사도 바울이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지킨 그 율법의 행위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허무의 사전적인 뜻이 헛되고 무의미 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피조물이 허무한 것에 굴복을 했다는 말씀은 우리 인생은 율법에 다 굴복이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의 지혜로 성경을 보면 모두가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율법주의에 빠졌습니까? 그리고 이방의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킨다는 것조차 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실 제사만 안 드리고 있지 이스라엘 못지않게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가 율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허무한데 굴복을 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서에서는 그들의 부어 만든 우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부어 만들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십계명을 몰라서 우상을 부어 만들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 역시 육적으로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이 시대는 우상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도 그들이 부어 만든 우상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우상을 섬기는 일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피조물은 허무한데 굴복을 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그것에 굴복을 해서 교회 안에는 율법의 행위가 만연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것을 아담 스스로 따 먹었습니까? 사단이 와서 하와를 미혹해서 하와가 그것을 따 먹고 아담에게 주어서 먹었습니다. 아담이 이 선악과를 따 먹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선악과를 따 먹은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여자의 후손이 와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어야 합니다.
좀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게 동산 중앙에 그것을 두셨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단순하게 죄를 진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죄를 진 것이라기보다는 율법을 지키기 시작했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아니라 율법에 손을 대서 그것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을 먹으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자기가 이제까지는 벌거벗은 것을 몰랐는데 율법을 따 먹고 나니까 벌거벗은 것을 알게 되어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은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미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창세기2:25절을 보겠습니다. (구 3쪽)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요한계시록3:17절을 보겠습니다. (신 402쪽)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기 전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벌거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는 자기가 벗은 것을 알고 나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율법이 세상에 오기 전에는 아담은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먹고 나니까 자기가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우니까 치마를 만들어서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악과를 따먹기 전까지는 아담은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선악과를 따 먹고 난 후에는 자기가 벗은 것을 알고 부끄러워서 무화과나무 잎사귀로 치마를 만들어서 입었습니다.
선악과는 율법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덴에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생명나무 실과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동산 중앙에 두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따먹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면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반드시 사망을 당하기 때문에 따먹지 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굴복했습니다.
아담은 피조물입니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우시고 코에 생기를 넣어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피조물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율법에 굴복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죽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 부자가 되어 있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도 벌거벗었습니다.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람도 벌거벗었습니다. 아담은 자기가 선악과를 따먹고 벌거벗은 것을 알았지만 라오디게아 교회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벌거벗고 있다는 것을 죽을 때까지 모르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 허무합니다.
그것이 얼마나 헛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그것이 부자로 보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율법의 행위가 어떻다는 것을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그것이 좋게 보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을 누가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율법의 행위를 나쁘다고 하는 그가 도리어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지혜는, 사람의 생각은 허무한 것에 굴복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은 자기들의 지혜가 얼마나 허무한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굴복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사람들과 같이 모두가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면 세상에 대해서 그는 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는 순간에 자기 벌거벗은 것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우리는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그 순간부터 태생적으로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을 때 혼자 따 먹은 것이 아니라 우리 역시 같이 따 먹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표성입니다 아담이라는 사람의 조상이 그것을 따 먹었으면 모두가 따 먹은 것이 됩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피조물은 허무한 것에 굴복을 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피조물은 모두가 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을 때 함께 따 먹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담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표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입니다
그래서 그를 오실 자의 표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생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들을 대표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성도는 아담의 피조물로 태어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양자의 영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굴복했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굴복한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아담의 뜻이 아니라 오직 굴복케 하시는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아담을 굴복케 하셨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피조물로 지으셨을 때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 아담을 지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아담은 피조물입니다 그 피조물이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있습니까? 지음을 받은 그 피조물은 하나님과 함께 살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담 그 피조물을 죽이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영을 보내 주셔서 피조물이 아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마도 처음 듣는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육의 사람은 절대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감동을 받는 성도들은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아담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 피조물이 하나님과 함께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담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아담에게 하나님의 영이 탄생을 하게 해서 그가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게 해서 같이 사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신체의 부활을 믿다 보니까 제가 지금 하고 있는 말씀을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성령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님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서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그 아들들은 아담을 반드시 죽여야 탄생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담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탄생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아담과 주님이 오실 때 나타나는 하나님의 아들은 전혀 본질이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안 따먹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은 영원히 피조물로만 있어야 합니다. 어렵더라도 잘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지으신 이유는 아담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굴복을 하지 않고 선악과를 따 먹지 않으면 아담은 영생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아담을 처음 지으셨을 때부터 하나님은 구원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율법에 굴복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아담 그 한 사람으로 끝이 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마치 우리에게 저주가 임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담이 범죄를 했다고 하면서 아담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를 짓고 살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것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 아담을 지으셨을 때부터 구원을 받기를 원하셨습니다.
그 구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구원을 원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피조물인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고 죽어야 합니다. 그가 죽어야, 그가 율법에 굴복을 해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그 아들의 영을 주셔서 양자의 영을 받게 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실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입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성경의 기초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입고 있는 이 피조물은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우리에게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려고 아담에게 선악과를 따 먹게 하셨습니다.
이 피조물이 무엇입니까?
우리 육체와 정과 욕심입니다 이 피조물이 굴복을 해서 죽은 성도만이 양자의 영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피조물이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이미 십자가에서 죽은 그 피조물이 자꾸 일만 만들어서 교회 안에서 온갖 우상에게 굴복을 하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저 역시도 늘 성경을 보고 있지만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만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놀라운 뜻을 펼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다는 것 밖에는 말씀을 드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셨기 때문에 피조물이 굴복을 했고 그래서 그 피조물이 죽고 이제 그 피조물들에게 양자의 영을 주셔서 구원을 하시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희망이 있다고, 소망이 있다고 번역이 되어 있습니다. 정말 피조물이 굴복을 한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 피조물이 굴복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어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소망입니다
우리의 소망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왕 노릇하면서 살아가는 그것입니다 정말 이 소망은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일이 펼쳐지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들에게 무엇을 아끼시겠습니까?
로마서8: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0쪽)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 노릇 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소망은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곧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어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릴 영광된 자유를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에게는 비록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을 해서 사망에 이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 가운데 소망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율법으로 죄의 법을 섬김으로 해서 모두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지만 그 가운데 소망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하시는 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깨닫지를 못하면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그저 문자에 사로 잡혀서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다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입니다
잘 나가는 목사가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는 설교를 하면서 계속해서 성경의 문자를 열거를 하고 있습니다. 암기력이 뛰어난 자기 지식을 자랑하면서 그 뜻은 하나도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성경의 문자를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리석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는 목사를 대단하다고 하고 있고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법 고시를 볼 정도로 암기력이 뛰어난 사람은 누구나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르치는 자가 아닙니다. 일반 교인들도 지적인 능력이 있으면 그 정도는 누구나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을 했습니다.
그 허무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입니다 그래서 저주를 받아 사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허무한데 굴복케 하는 것은 사람이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담을 굴복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아담은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그 피조물은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 소망이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고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그렇게 굴복케 하신 것은 아담에게 소망을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소망이 무엇인가를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셨습니까?
아담이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서 자기 부끄러움을 가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정녕 죽어야 하는 아담에게 구원의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비록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을 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아담에게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고 소망을 갖게 하셨습니다.
율법을 주셨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저주를 받게 하는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저주를 받아 죽는 우리 피조물들을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양자의 영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정말 놀랍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구원하시는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린도전서15: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82쪽)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
그 바라는 것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바래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온갖 우상이 있고 바알이 있어서 이생에서 얻고 싶은 것을 바라느라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둘 다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있는 곳에 재물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천국을 바라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를 보면 천국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생에서의 것을 바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의 기도는 모두 다 이생의 것을 바라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쌍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라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생의 것을 바라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게 했습니까?
이스라엘이 바알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발람이 불의의 삯을 위해서 기도를 하다가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불의의 삯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더 의롭게 살고자 하는 율법의 행위를 잘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망입니다
아니 그냥 사망만 당하면 다행입니다. 더욱 불쌍한 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바라야 하는 것은 바라지 않고 바라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정말 밤을 새워가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들이 바라야 하는 것과 바라지 말아야 하는 것을 모르고 모두가 발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더욱 불쌍한 자입니다
자기가 바라야 하는 것을 모르면 그는 세상에서 가장 불상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기독교는 성경에서 너무 멀리 벗어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불쌍한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이생을 것을 바라고 있는 그들이 더욱 불쌍하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온갖 샤머니즘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들이 조각한 신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불쌍한 자인가를 모르고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서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벌거벗은 것을 모르고 율법의 의로 옷을 입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피조물들이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기를 바라고 있고 율법을 잘 지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들이 자기들을 벌거벗게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이생의 것입니다
어느 한 가지도 바라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분복대로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적게 주셨으면 그것을 인정하고 또 많이 주셨으면 감사함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더 얻기 위해서 바라고 있는 사람은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리지 않고 거절하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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