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7:16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노니”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렸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있습니다. 정말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육신에 속하여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이제까지는 사도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후에는 육신에 속한 모든 행위가 죄라는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로마서7장에서 마무리로 가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죄 아래 팔리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무엇으로 하고 있는가를 잘 생각하고 있어야 합니다. 육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영의 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다 육신에 속해 있어서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죄 아래 팔려 있는 자신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팔렸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내가 하는 일을 도무지 모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 아래 팔려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라는 것을 사람이 깨닫지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도 알지 못하는 그 일을 하면서도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구원과 상관이 없는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는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정작 생명과 관계가 있는 영적인 죄를 몰라서 마음껏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를 짓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죄 아래 팔리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절대로 지켜서는 안 됩니다 율법의 문제만이 아니라 나를 부자로 만드는 모든 행위가 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어야 천국을 얻을 수 있는데 부자가 되는 순간에 낙타가 바늘 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려워서 영생을 얻을 수 없습니다.
왜 죄를 짓습니까?
영생을 얻기 위해서 죄를 짓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천국에 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기를 원하는 그들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천국을 가려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원하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는 이 영생을 위해서만 살아가야 합니다. 영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이 시대는 영생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원하는 일을 하지 않는가 하면 자기들이 이미 다 이루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성경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말과 같습니다.
영생입니다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아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교회에 나와서 어느 정도 설교를 듣고 또 나름대로 성경을 보고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것으로 마치 이 영생을 다 이룬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쉽습니까?
그 정도로 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다면 굳이 이렇게까지 성경을 기록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성경은 사람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풀어지지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몰랐습니다.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지만 그들은 자기들이 아는 것으로 원하는 것을 했다고 하면서 이스라엘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방의 교회 역시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자 듣고 믿었습니다. 그것으로 자기들이 성경을 다 아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방의 교회에 율법주의가 들어오자 속히 복음에서 떠났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은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불가능합니다. 사도 바울과 같이 아는 사람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그 사람 안에서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성경을 안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평생을 성경만 보고 그것을 알아간다고 해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다 깨달을 수 없습니다.
원하는 것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 믿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 원하는 일을 다 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그것만 해도 시간이 부족한데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다 했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아 천국에 가는 성도라고 하면서 도리어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분명히 영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그 영생은 반드시 내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는 성도가 있고 자기는 이미 다 알았다고 하면서 이제는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워합니다.
왜 미워합니까? 나를 사망으로 이끌고 가기 때문에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망으로 끌고 가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육신에 속하여 그 미워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이 미워하는 것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교회는 노아의 방주가 아닙니다. 교회에 들어와서 신앙생활을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보아도 이스라엘에서 얼마나 적은 숫자가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왜 그들이 구원을 받지 못했는가 하면 미워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행위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버림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미워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도리어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 행위로 인하여 그것이 죄가 되고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면서 더욱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않는 일을 하게 되면 그것은 율법이 선하다는 것을 내가 인정하는 것이 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이제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 주심으로 해서 이제 율법이 영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깨달은 성도는 이제는 더 이상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을 아는 성도가 어떻게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리겠습니까? 율법이 영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몰랐을 때는 우리가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을 깨달았기 때문에 더 이상은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한다는 말씀입니까?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 역시도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2:7절을 보겠습니다. (신 18쪽)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면 무죄한 자를 죄로 정치 아니하였으리라”
원치 아니하는 일입니다
이 시대는 원하는 일이 무엇인가 그리고 원치 아니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분명히 기록이 되어 있지만 제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원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원치 아니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하면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원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사람을 비교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까?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모두 다 알고 있습니다. 호세아서의 말씀을 주님이 인용을 해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적으로는 다 알고 있지만 실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의 행위를 보면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문자를 알면 뭐 합니까?
성경에서 그런 것을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말씀이 호세아서에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서 보고 있지만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경을 보았으면 제사가 무엇이고 인애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원하는 것을 하고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말로는 참 잘하고 있지만 실제 행위는 거꾸로 하고 있습니다.
제사를 원치 않습니다.
그런데 제사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제사라고 하니까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성전에서 드렸던 제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만든 성전이 무너질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방의 교회는 보이는 성전을 짓지 않는다는 것을 아시고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은 제사를 안 드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만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절대로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럴 가능성을 열어 놓고 하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제사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양을 잡아서 드리는 것이 제사입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제사가 있습니다. 영적인 제사가 있고 육적인 제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은 원치 아니하는 육적인 제사를 드리는 일에 깊이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이분법으로 보아야 합니다. 거의 모든 말씀이 영과 육을 가지고 이분법으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해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원치 아니하는 제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는 교회가 원치 아니하는 제사에 빠질 것을 아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냥 기록된 말씀이 없습니다.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노라는 호세아서의 말씀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왜 주님이 호세아서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인애를 원하지 않고 제사를 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앞으로 세워질 이방의 교회 역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것보다는 제사에 열심을 내기 때문에 이 시대 제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도 모두가 제사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제사를 안 드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고 자기들은 인애를 알고 제사를 하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그렇게 됩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에 속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지금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갈 때 제자들이 시장해서 이삭을 잘라 먹는 것을 보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제자들이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하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은 제사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이라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제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가 무엇인가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저 문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한다고 앵무새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원치 아니하는 제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말씀을 아는 것이 아니라 소경이 되어서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이 제사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주일을 지키는 것 그것이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만일이라는 말씀을 쓰면서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그 만일이 현실이 되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히브리서7: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59쪽)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니”
제사가 무엇입니까?
율법에 따라 드리는 것이 제사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제사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 제사 직분이 변역한즉 율법도 반드시 변역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제사 직분이 변역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사 직분입니다
반드시 레위인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사장이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 제사장이 변역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율법을 따라 드렸던 그것이 변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 없어졌으니까 이제 율법도 변역이 되어야 합니다.
안식일을 지킵니다.
물론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안식일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안식일에 해야 하는 일을 누가 했습니까? 제사장이 했습니다. 이 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이제 제사 직분이 번역이 되었으니까 율법도 변역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성전이 없고 제사장이 없으니까 율법이 변역이 되어서 더 이상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변역이 되었습니다.
이제 율법은 폐하여 졌다는 말씀입니다 제사 직분이 변역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육적으로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율법대로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대제사장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제사장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제사 직분이 변역이 되어서 제사장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면 이제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원치 아니하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원치 아니하는 제사입니다 여러분이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제사가 되어서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게 되면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문제가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은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사
내 몸으로 하는 모든 율법의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해서 이 제사 제도를 번역을 시켜 버리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제사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예수 그리스도만이 계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도 원하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모두가 제사에 빠져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교회입니까?
인애는 없고 제사만 있습니다. 그들이 드리는 예배가 제사고 그들이 부르는 찬송이 제사고 그들이 하는 기도가 제사고 그들이 하나님께 드린다고 하면서 하고 있는 헌금이 다 제사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이 제사라는 것을 이 시대는 아무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 제사를 하면서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다 제사입니다
사람이 육신으로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제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는 사람은 없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것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종교가 되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는 바리새인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이 실제 제사를 드린 것을 빼고는 거의 모든 것을 바리새인들이 하고 있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안식일을 지켰으면 이 시대 역시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고 그들이 소득의 십일조를 낸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있고 그들이 손을 씻고 음식을 먹은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식사 기도를 하고 음식을 먹고 있습니다.
원치 아니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런 행위들이 다 원치 아니하는 그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영적인 말씀이라는 것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모든 교회가 이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하나도 없습니다.
제사입니다
내 육체로 하는 것은 다 제사입니다 그것을 아무리 교회 안에서 하고 있고 또 하나님을 위하는 일과 같이 생각이 되어도 다 제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제사를 원치 아니하시고 인애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이 제사를 해서 의인이 되어 있는 사람을 찾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아니 국어를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하니까 또 이 말씀을 보고 사도 바울이 율법이 선한다고 시인을 했다고 하면서 선한 것이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보고 있습니다.
목사들이 얼마나 왔다 갔다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이때는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가 이제는 또 율법이 선하니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한 절 안에서도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했다가 지키라고 했다가 도무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자기도 모르고 있습니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그런 일은 없지만 혹시라도 사도 바울이 율법의 지키는 일을 하게 되면 내가 이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왜 율법이 선하다고 말씀하고 있는가는 이미 12절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로마서7: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이로 보건대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도다”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 선하다고 하는지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이 왜 선합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죽였습니다.
그 죽인 것이 선하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속았는데도 죽지 않았다면 율법은 선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율법대로 자기가 죽었기 때문에 율법이 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법을 법대로 할 때 그 법을 선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법을 법대로 하지 않으면 그 법은 선하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이 죽었습니다.
율법에 속아서 그것을 지키다가 율법을 범하는 자가 되어서 죽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속아서 율법을 지키다가 그것을 범했는데도 죽지 않았다면 율법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왜 율법이 선하다고 말씀을 하는 줄은 모르고 율법이 선하니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성경을 같은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 반대로 풀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문자를 아는 것으로 율법이 선하다고 하면 안 됩니다 율법이 계명으로 말미암아 속아서 죄를 지음으로 해서 죽을 때 율법이 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자를 아는 것으로 율법이 선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선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래서 이 로마서를 보고도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선하다고 하는데 무조건 율법이 선하니까 이제 성도로서 살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그리고 교인들이 모두가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다가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압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도리어 그 아는 것이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고 있고 사망의 길로 가게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율법이 선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를 모르고 막연하게 율법이 선하다는 그 문자를 보면 율법이 선하니까 지켜야 하는 것으로 생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합니다.
시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실을 옳다거나 그러하다고 인정하는 것을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시인은 법정 용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시인을 하고 그것을 다시 뒤집으면 위증이 되는 것과 같이 한번 시인을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법정 용어입니다
시인이라는 단어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시인을 한다는 것은 그것이 옳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이 신령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렸다고 말씀을 하면서 나의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했는데 내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그것을 하면 내가 이로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대로 죽는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선하기 때문에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율법은 법대로 해서 나를 죽게 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합니다.
그러면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나를 죽인다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그 말씀입니다 내가 사형 선고를 받다 죽어도 그것이 옳다고 인정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반드시 법대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율법은 법대로 사도 바울을 죽이는 것을 인정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한 것을 시인하는가 하면 내가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하면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려 사망에 이르는 것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나를 죽여도 그것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까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고도 그 의미를 몰라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이 선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선합니까? 죄에 팔려서 사망에 이르기 때문에 선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를 진 그 사람을 죽지지 않는다면 율법은 선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범해서 죄를 짓는 그 사람을 죽이면 율법은 선한 것이 됩니다.
만일 내가 율법을 지키면
율법은 선한 것이기 때문에 율법으로 죽는다 해도 나는 그것이 옳다고 인정을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비장한 말씀입니까? 자기가 죽는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율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우리에게 정의를 해 주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로마서를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이 나를 죽입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일을 원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에게서 그런 일은 없겠지만 율법을 지키면 율법이 선해서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담대한 말씀입니다
얼마나 단호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것을 하면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나는 그것을 인정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런 인정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내가 죽는 그 일에도 인정을 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내가 죽어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사도 바울은 자기가 죽겠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 일로 나를 죽인다 해도 그를 선하다고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이 선한 것을 시인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담대한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키면 내가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내가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시인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 생명을 걸고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장16절의 말씀은 자기 생명을 걸고 법정에서 하고 있는 용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게 되면 아니 풀어지지가 않으면 사람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더 유익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한 마디로 자기 스스로 섶을 지고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율법이 영적인 것임을 알고 난 이후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율법을 지키는 일을 했다면 그것으로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인정을 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고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생명을 걸고 법정 용어를 사용하면서 단호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이 선하다고 하니까 문자만 보고 율법을 지키는 어리석음에 빠져 있습니다.
얼마나 담대합니까?
아니 사도 바울은 율법이 영적인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 성도들 역시도 율법이 영적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도 거룩하며 계명도 거룩하며 의로우며 선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만이 이 말씀이 깨달아질 수 있습니다.
로마서7: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와 같은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죄입니다.”
사도 바울은 인정을 했습니다.
만일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율법을 지키면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죽는 다는 것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만일 그런 일을 하면 율법은 선하기 때문에 그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들이라는 사람들은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이방인들에게 율법에 대해서 너무 관대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자들이 이 시대 유명한 신학자입니다
율법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이 성도로서 조금 더 의롭게 사는 문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성경을 볼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단지 도덕의 문제라면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의를 내리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율법이 생명에 대한 문제인데 그것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무리 믿는다고 해 보아야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율법에서 먼저 생명에 대한 것이 해결이 되어야 그 다음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만일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에게 세상 사람이 법을 지키는 것이 옳으냐 지키지 않는 것이 옳으냐고 묻는다면 저 역시도 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말을 합니다. 저 역시 세상의 이성을 따라서는 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영생을 위해서 성경에서 진리를 알아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제 사람의 이성도 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저는 사람의 이성을 따르기 보다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을 따르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입니다
생명이 아니라면 저 역시도 율법을 지킵니다. 율법을 지키면 얼마나 좋습니까? 제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그 율법의 행위를 통해서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만일 율법을 지키면 그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고 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그러면 그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죄를 짓게 하기 때문에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에 그 율법이 나를 죽인다 해도 그것을 인정하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원하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러나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25절을 보겠습니다. (신 40쪽)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바리새인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하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만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리새인입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려 있는 사람은 다 바리새인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에게만 이 말씀을 하셨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굳이 이 말씀을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리새인만의 문제입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교인들 역시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는 바리새인과 마찬가지로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이 시대를 사는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입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잠시 복음이 전해지고 난 이후에 이방의 교회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만 보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습니까? 말로는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하지만 역시 가서 보면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입니다
지금의 이방의 교회가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리새인들 못지않게 율법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있으면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 마치 자기들은 율법을 안 지키고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가득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탐욕입니다
그들이 무엇으로 탐욕을 부렸습니까?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얻기 위해서 탐욕을 부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은 탐욕과 방탕이 없는데 바리새인들은 뭔지 모르지만 탐욕과 방탕이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으로 바리새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 안에 탐욕과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안에 있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이 죄라는 말씀입니다 이 죄가 사도 바울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가득합니다.
어느 정도 가득한가 하면 바리새인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려고 가득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합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모든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니지만 자기들이 정해서 지키고자 하는 그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그 죄가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탐욕이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 말씀을 보고도 마치 세상에서 탐욕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말씀하고 있는데 탐욕이 무엇이고 방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깨닫지를 못 합니다
무엇이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의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이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율법을 지키게 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그들의 속에 있는 탐욕과 방탕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 교인들이 있습니다. 그들의 차이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바리새인은 온 율법을 문자 적으로 지키고자 했고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이 정한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바리새인만 화를 당하고 자기들은 율법을 지켜도 괜찮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은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탐욕과 방탕으로 율법을 지켰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 진실 된 믿음으로 율법을 지킨다고 정당성을 찾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 죄는 똑같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에베소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15쪽)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내 속에 거하는 죄입니다.
바리새인의 속에 방탕이 있었습니다. 그 방탕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바리새인에게만 있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없습니까? 이 시대 역시 모든 교회가 술에 취해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 속에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속에 죄가 있기 때문에 죄가 가득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속에는 이렇게 방탕함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리새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이것을 행하는 것이 내 속에 있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에 무엇이 있습니까?
죄가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어느 사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죄인으로 살기를 원하겠습니까? 처음부터 죄인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은 없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죄인으로 살고 싶겠습니까?
그러나 방탕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탐욕이 있습니다. 이것이 속에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이지만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자기 안에 무엇이 있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무엇을 원합니까?
바리새인들이 무엇을 원했습니까? 그들도 하나님의 백성으로 잘 살아서 구원을 받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탐욕과 방탕이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죄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때 사도 바울이 행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죄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하나님을 믿으면서 죄를 짓고 싶었겠습니까? 그는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정말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 바울 안에 있는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구원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겠습니까? 모든 사람이 교회에 나온 것은 내세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꼭 내세만이 아니라 이생에서 복을 받고 자기들이 원하는 것을 받기 위해서 나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 결 같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천국이며 구원입니다
모두 다입니다.
그러나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행하는 사람이 교회 안에는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리새인과 같이 잔과 대접의 겉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죄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누가 행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내가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내가 아니라고 하는가 하면 사도 바울은 정말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던 그것이 자기 속에 있는 죄를 행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바리새인이었기 때문에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했습니다.
술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는 방탕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방탕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리새인의 안에 있었습니다. 또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죄를 짓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영혼 구원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거하는 죄로 인하여 원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원치 아니하는 것을 행함으로 내가 죽습니다. 그렇게 죽는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거하는 죄 때문에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렇게 다 탐욕과 방탕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행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술 취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으려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령이 오시면 도리어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하면서 더 술에 취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고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죄가 무엇인가 하면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 안에 가득한 탐욕과 방탕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구원을 받기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안에 있는 탐욕과 방탕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도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속에는 이것이 있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죄가 있습니다.
탐욕과 방탕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죄라고 그리고 탐욕과 방탕이라고 생각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아가는 당연한 행위라고 생각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것에서 자기 의지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스스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우리 속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마음이 대단히 선하고 좋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렵습니다.
그래도 잘 이해를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성경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어떤 말씀은 정말 설명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는 이것을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라는 이 말씀도 설명하기가 쉽지가 않습니다. 이제부터 7장 마지막 절까지 하고 있는 말씀이 실제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가정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주의였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제 율법이 영적인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 율법주의에서 빠져 나올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실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면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문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서7장에서는 자기가 지키는 것과 같이 말씀을 하면서 율법을 우리 육신이 어떻게 지키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설명하기가 참으로 어렵지만 그래도 말씀에서 이해가 되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내 속에 곧 내 육신 속에 선한 것이 깃들여 있지 않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선을 행하려는 의지는 있으나, 그것을 실행하지는 않으니 말입니다.”
육신입니다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육신은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도 원하는 것을 하고 싶었지만 자기 육신이 죄에 팔린 것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의 속입니다.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습니다. 그것이 육신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육신으로 선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입니다
이 육신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은 무엇만 행하고 있는가 하면 죄만 짓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마지막으로 말씀을 하면서 내 속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입니까?
생명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율법을 말씀했습니다. 그 율법을 무엇이 지키고 있는가 하면 육신이 지키고 있습니다. 육신으로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육신으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육신으로 선을 행하려고 하고 선한 것이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내 속입니다.
그 속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의 마음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과 그리고 육신에는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은 선한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데 이 시대는 마치 선한 것이 거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육과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육을 사도 바울이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내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있고 그것을 내 육신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음도 육입니다
혼도 육입니다 정신도 육입니다 사람들은 이 마음을 육이 아닌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8장에서 영과 육에 대해서 분명하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전에 율법에 대해서 정의를 하면서 내 속 곧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율법이 영적인 것을 안다고 해서 그 율법을 안 지킨다고 해서 그것이 선한 것이 될 수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육신으로 한 것은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선한 일을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육신으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입니까?
그리고 육신입니까? 어느 것도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육신으로 무엇을 하는 순간에 그것이 죄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육신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 순간에 육신이 속하여 죄에 팔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육신으로 합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육신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육신으로 하는 예배를 드리는 일, 찬양을 부르는 일, 기도를 하는 일, 헌금을 하는 일 등 모든 일들이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내 마음입니까?
이것은 선한 것이 있습니까? 만약에 이 마음에 선한 것이 있다면 거듭남은 잘못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은 천국에 갈 수 있는 것이 없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속, 그리고 육신의 어느 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5쪽)
“입에서 나오는 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나니 이것이야말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성화주의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 역시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들로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선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선은 반드시 생명이 있어야 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하는 말씀을 왜 하고 있습니까? 육신에 속하여 죄에 팔렸기 때문에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죄 아래 팔려서 원치 아니하는 것을 해서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했습니다.
자기 육신이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선한 것을 시인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도 바울의 육신이 죄에 팔려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육신에는 마음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마음을 많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는 그런 말씀들을 보고 진짜 자기 마음이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마음이 믿는 다고 표현을 했을 뿐이지 성령의 역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우리 마음이라는 것은 선한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니 마음에 선한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이 오심으로 마음이 감동을 받고 있다는 말씀이 맞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그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합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의 마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나 역시도 마음에는 탐욕과 방탕이 가득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사람은 마음에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그대로 자기 겉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 자기가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어떠한 행위를 하게 역사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입니다.
거기서 나오는 것은 결국 행위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성령의 역사입니다 내 마음이 감동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문제는 성령이 오셔서 어떠한 일을 하시는 가를 모르기 때문에 자기 마음에서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자기들이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우리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서 성령이 오셔야지만 내가 선하신 이를 믿을 수 있는 것이지 내 마음 스스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면서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속 곧 내 육신으로는 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이라는 것은 마음도 될 수 있고 정신도 될 수 있고 지혜도 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것과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 합니다
그러나 거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내세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지으실 때부터 내세에 대한 마음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인생은 죽기 때문에 죽은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내가 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육신에는 정신, 혼, 마음까지도 다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사도 바울이 독백을 하듯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백성으로 살아보았던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없습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선한 것이 조금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만 들어오면 자기들이 선한 것을 하려하다가 도리어 악한 일을 함으로 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에게 선한 것이 없다면 우리 역시 선한 것이 없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마태복음12:35절을 보겠습니다. (신 20쪽)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사람들이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성경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자기들의 마음에서 생각을 하고 성경을 보고 있다고 하는 것이 더 맞습니다. 내 마음의 생각을 버리고 나서 성경을 보아야 하는데 이미 자기 마음에서 결정을 하고 나서 성경을 보니까 성경이 보일 수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선한 것을 좋아하고 있고 그 선한 것을 행위로 나타내 보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정의는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한다는 말씀입니다
선한 사람입니다.
주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했으면 사도 바울은 선한 것을 내고 싶어도 낼 수 없다는 말씀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선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기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아무리 사도 바울이라고 해도 자기 속 곧 자기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습니다. 누구만이 선한 것이 거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만이 선한 것이 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을 하니까 성경을 보면서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선한 사람이고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것으로 거의 모든 사람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자기가 선한 사람이니까 선한 것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무엇인가도 모르면서 세상의 이성적 지식으로 알고 있는 그런 선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선한 사람이라서 선한 것을 내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선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나도 선한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고 자기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3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다 하든지 나무도 좋지 않고 실과도 좋지 않다 하든지 하라 그 실과로 나무를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사람을 좋은 나무로 말씀을 하고 있고 악한 사람을 나쁜 나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무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무가 있고 사단의 나무가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두 나무가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게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선한 것을 쌓았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모든 구속의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선한 사람이 아닙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선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으로 낸다고 하신 것은 주님이 선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선한 것을 쌓아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선한 것을 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나무도 좋고 실과도 좋습니다. 주님은 좋은 나무입니다 그래서 좋은 실과를 내고 있습니다. 그 실과가 무엇인가 하면 생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이 생명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단에게 잡혀 있어서 선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하는 그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선한 것을 낼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도 자기 자신을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속해 있는 우리 인생은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신입니다
육체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육과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육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지적인 것도 혼도 그리고 마음도 다 들어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육신에 속한 사람은 다 죄 아래 팔려 있기 때문에 선한 것을 낼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인생에 대해서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람들은 자기들이 선한 것을 내려고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것에서 그 악한 것을 낸다고 말씀하니까 자기들이 바리새인이 아니라서 선한 것을 낼 수 있는 선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아닙니까?
우리 역시 육신은 바리새인과 같습니다. 그들만 그 쌓은 것에서 악한 것을 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도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선한 것은 우리 인생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나무만이 좋은 실과를 낼 수 있습니다.
어떤 나무입니까?
육신의 나무가 아니라 영의 나무입니다 육신의 나무는 어떻게 해도 좋은 실과를 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나무는 좋은 것을 내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 좋은 것을 내고 있고 그 좋은 것을 우리 믿는 성도들에게 주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좋은 실과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탄생이 되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좋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좋은 실과를 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라 해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어떻게 해도 선한 것이 거할 수 없습니다.
생명입니다
그 실과만이 좋은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낼 수 있는가 하면 영의 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서11장에서 이제 그 영의 실과가 어떻게 맺을 수 있는 가를 말씀하면서 접붙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한 것이 거하지 않는 우리 인생이 선한 것을 하려고 하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복음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163쪽)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만이 선한 목자입니다 어떻게 선한 것을 내셨는가 하면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심으로 해서 선한 것을 내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지 않았다면 선한 것을 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 살리심으로 받으심으로 해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셔서 선한 것을 내셨습니다.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어디서부터 오고 있습니까? 좋은 나무에서 선한 것이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좋은 나무는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생명을 주는 나무가 좋은 나무라는 것을 주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 인생에게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선하게 보일지라도 그것은 선한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는 말씀 그대로 영의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육신에는 그 선한 것이 거하지 않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오직 예수 그리스도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분만이 선한 것을 쌓았습니다.
그 나무만이 좋은 실과는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신에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받기를 모두가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사도 바울 속 곧 육신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원함은 있으나 사도 바울은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시며 그 분만이 선한 것을 쌓아서 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하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도 내 속 곧 내 육신에는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그 분만이 선을 쌓아서 선한 것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아무리 원한다고 해서 선한 것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할 수 없으면 선한 것을 내시는 분을 믿어야 지혜로운 성도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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