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6:8절을 보겠습니다. (신 346쪽)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이미 죽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죽었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우리 성도는 이미 죽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그 자체가 죄라는 것을 사도 바울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모두가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성도는 죄에 대해서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죄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가 해결이 안 되면 그는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미혹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이 시대는 율법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데도 율법이 아니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고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율법이 아니라는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삼가 지키는 모든 것은 율법입니다 그리고 육체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 있다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십일조가 믿음의 증표가 되어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도 십일조가 믿음의 증표라는 말씀이 없고 분명히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찬양도 마찬가지고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주일이라는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종교의 법에 의해서 드려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순서에서 어느 것을 하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그것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사단은 그 율법으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을 다 잡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리새인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지켜서 율법주의고 나는 그 중에 꼭 필요한 것을 지켜서 율법주의가 아니라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모릅니까?
십일조도 율법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도 율법입니다 율법 613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를 지키더라도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을 다 지켜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고 그 중에 한 가지를 지켜도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중에 단 한 가지를 지키면서 그것을 율법이 아니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쉽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곤충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곤충이 많이 있습니다. 거미, 풍뎅이, 잠자리, 매미, 귀뚜라미 등 수를 다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하나를 이야기를 할 때는 그 이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통틀어서 말할 때는 곤충이라고 해도 됩니다.
매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매미라고 해도 됩니다. 그러나 곤충이라고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매미만 곤충입니까? 잠자리도 곤충이고 나비도 곤충이고 매미도 곤충입니다 그 하나하나를 부를 때는 이름을 부를 수 있지만 곤충이라고 부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와 같습니다.
율법이 있습니다. 십일조도 율법입니다 주일도 율법입니다 맥추절도 율법입니다 이 하나하나를 부를 때는 마치 곤충의 이름을 부르듯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해도 주일을 율법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군가 잠자리를 보고 곤충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잠자리라고 끝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은 어리석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입니다.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의 어느 한 가지를 이야기를 해도 율법이라고 합니다.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해도 맞는 말이고 또 십일조라고 해도 맞는 말입니다 그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했다고 해서 틀렸다고 한다면 그는 잘못된 사람입니다
율법에 속해 있으면 다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죄에서 우리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미 죽었다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죄에 대해서 죽은 자가 없습니다. 아니 그 죄를 더 많이 짓는 것을 좋아하고 있고 그 죄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성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죽으시기 바랍니다.
죄에서 죽었다는 말씀은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그 기본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죄라고 하면 도리어 이상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세상 초등학문에 얽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죄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서 죽은 자만이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다 거짓입니다
율법의 모양이 단 한 가지라도 나타나고 있다면 그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한 사람이고 절대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전제 조건입니다 반드시 죄에서 벗어나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야고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율법을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야고보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만 아닙니다.
교회 안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그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행함이 있어야 하는데 그 행함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제까지 유대인들이 지켜왔던 율법을 버리는 행함이 있어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야고보가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다면 너희 믿음은 거짓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방인입니다
사도들이 이방에 처음 복음을 전할 때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만 조상 대대로 지켜왔던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실 이방인들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고 말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2000년 가까이 흘러오면서 율법이 고착화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왔던 이스라엘에게 하는 말씀인데 이방의 교회가 그렇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들어왔습니다.
이미 초대 교회에 율법이 들어왔기 때문에 사도 바울도 죄에서 벗어나야,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죄에서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지만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어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해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그와 함께 우리도 또한 살아날 것임을 믿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실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정을 해서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이 말씀은 실제 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있다면 이라는 것을 죽을 수 없지만 죽은 것과 같이 된다면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죽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런 말씀들을 문자적으로만 알다 보니까 자기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도리어 죄를 짓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율법도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그 생명에서 죽어야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는 종교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죄에서 벗어나야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죄에서 벗어나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골로새서2: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26쪽)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에 순종하느냐”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이런 말씀의 의미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로만 알고 있지 그 의미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모두가 법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세상은 다 법에 의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법을 지키는 것이 옳은지 법을 안 지키는 것이 옳은가를 이야기 해 보시기 바랍니다. 조직 폭력배라도 자기들이 정한 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법입니다
그것이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우리가 무엇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는가 하면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율법에서 죽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세상 초등학문에서 죽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의문입니다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죽었는데 어찌하여 율법을 지키고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찌 그런 일이 있느냐고 묻고 있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성경으로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가 율법의 제3용도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성경을 보는 눈에 소경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의문입니다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 전체를 말씀할 때도 율법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어느 한 가지를 말씀을 할 때도 율법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잠자리를 곤충이라고 하는데 이 시대는 그것은 곤충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생각이 의문에 순종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얼마나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해야 죽을 수 있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을 보는 눈이 다 소경이 되어 있습니다. 죽었다는 의미도 모르고 말로만 죽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다는 것을 미사여구를 쓰면서 사람의 말로 감성을 자극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입니다
여러분이 실제 죽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엇에 대해서 죽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죽을 수가 없고 말로 죽었다고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 막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이 말씀도 그 의미를 몰라서 그저 막연하게 자기들이 죽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의문에서 죽어야 합니다.
의문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 613가지가 의문입니다 그 의문에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실제 죽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죽어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잠자리가 곤충인 것과 같이 십일조도 율법입니다 의문이라는 말씀입니다 주일도 의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내가 무엇에 대해서 어떻게 죽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율법을 하나라도 지키는 순간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서 그것을 함께 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사단은 그것을 함께 보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미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다른 면인 율법의 행위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동전의 양면을 다 보게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잘 믿고 율법도 잘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는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 해도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내 생각입니까?
그것을 주장하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지 내 생각으로 성경을 보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내가 다시 올 때에 믿음이 있는 자를 보겠느냐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믿음이 있는 자는 아주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교회 안에는 믿음이 있는 자가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동전의 다른 면인 율법의 행위에 붙들려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짐승과 함께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3: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0쪽)
“그리스도께서 약하심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으셨으니 우리도 저의 안에서 약하나 너희를 향하여 하나님의 능력으로 저와 함께 살리라”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그와 함께 살 줄로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와 함께 어떻게 죽어야 하고 또 그와 함께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아담을 통해서 하와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육체의 탄생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부부지만 또 다시 생각하면 자녀가 되기도 합니다. 아담에게서 하와가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자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 예표를 통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어떻게 함께 죽어야 하고 또 살아야 하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사야에서 그는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와 부부이기도 합니다. 마치 아담을 통해서 하와가 지음을 받아 한 몸이 된 것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담을 통해서 하와가 지음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이 영의 비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가 약하심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영으로서 살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으로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영으로 살리심을 받고 있습니다.
육체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부활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육체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미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다시 사신 예수 그리스도는 육체의 예수 그리스도와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죽었습니다.
아직 살아 있지만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죽었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에 대해서 죽은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으로 사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그리스도의 영을 주셔서 살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반드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성도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저와 함께 삽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사셨는가를 이 시대는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서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으로 알고 있고 자기들도 그렇게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영으로 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영이 탄생이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령한 육체로 사셨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 천국에 들어갈 때가 되지 않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사는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함께입니다.
같은 형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하늘의 형상을 입혀 주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영으로 탄생을 시켜 주시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형상을 입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그 형상은 죄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그 죽은 형상을 다시 살리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와 함께 삽니다.
이 영의 일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육체의 일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영의 일을 모르면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무엇을 믿어야 하는 가를 모르면 막연한 사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신앙생활을 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렇게 살리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사신 것과 같이 사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살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살리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역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육체의 어느 것이 산 것이 아니라 아니 변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성령이 내 안에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일을 믿음으로 내 안에서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살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알고 싶어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말미암아 믿어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은 믿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이 생명이 있는 것이 함께 사는 역사입니다 그러나 이 생명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이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와 함께 살 줄로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같이 믿지를 않고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믿음,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 믿음이 아니고는 영의 일이 설명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믿음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누가 그런 일을 경험을 했습니까? 누가 내세에 갔다가 와서 우리에게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살리시는데 있어서 조건이 있습니다. 그와 함께 반드시 죄에서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 합니다. 그것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믿고 있습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영의 생명을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산다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와 같이 생각이 됩니까? 그래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이것을 이해를 못하니까 자기들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더 이해를 시키려고 하니까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삽니다. 우리 이 신체의 형상을 가지고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형상을 입으신 것과 같이 우리 역시 하늘의 형상을 입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의 생명은 영원히 죽지 않는 새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생명입니다
어떤 생명인가 하면 의로운 생명이고 그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우리에게 준 생명은 죄악의 종자인 생명을 주었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생명은 의의 생명이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두 생명은 분명히 이분법으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두 생명을 섞어 놓고 있습니다. 죄악의 생명과 의의 생명을 섞어 놓고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저와 함께 살 줄을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악의 생명은 썩어 없어지고 의의 생명만이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정과 혈과 정신까지도 버리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 있는 이 모든 것을 버리지 않고 아니 죽이지 않고는 새 생명이 여러분에게 탄생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모든 사람이 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살리셨습니다. 그리고 또 우리를 살리시고 있습니다. 예수와 함께 다시 살리시는데 어떻게 다시 사는 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지 마시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의 일을 바로 알고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샤머니즘을 믿으면 사망에 이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영의 일을 믿어야지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세상 샤머니즘에 빠져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가 어떻게 죽어야 하는 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죽었다고 하니까 마치 세상 사람과 같이 살지 않고 신앙 생활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당시는 사도들로부터 직접 복음을 들었고 그들은 정말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고 말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교회라는 종교의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율법주의입니다
종교는 늘 율법주의를 따라갔습니다. 그 세상에서 죽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아는 것으로 그가 믿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죽은 성도만이 그와 함께 살 줄을 믿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입니다
그와 함께 살 줄을 믿습니까? 물론 그들도 그와 함께 살 줄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는 것과 성도들이 믿는 것은 다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자기들의 신체에 그리스도의 영혼이 결합을 해서 사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릅니다.
우리 신체는 썩어져 없어지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일을 알고 믿음으로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로 믿는 것입니까?
분명히 다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믿는 것과 우리 성도가 믿어서 사는 것은 분명히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신체가 영혼과 결합을 해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우리는 신체는 썩어 없어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에 그 썩어 없어지는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이미 죽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믿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기본이 되는 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죽으라고 하고 있지만 신체가 영혼과 결합을 해서 산다고 믿기 때문에 그 신체가 율법을 잘 지켜야 하고 그리고 그 신체가 다시 살아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서 자랑을 하려고 하니까 더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우리라고 하니까 아담의 사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단어를 보고 마치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를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 있는 성도를 우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율법의 행위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안 됩니다 이 일을 믿을 수 있게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냥 막연하게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표와 그림자와 비유를 통해서 우리가 신약에서 밝히 보이는 복음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6: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이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으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기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셔서, 다시는 죽지 않으시며, 다시는 죽음이 그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물론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그리고 부활 승천하시는 것도 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후에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주님께서 그를 부르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복음을 전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복음을 전한 성경 말씀을 보고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교회 안에서 이 말씀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는 것을 안 믿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떻게 믿습니까?
성경에 문자로 너무 쉽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너무 쉽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하니까 아니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이 그저 죽은 자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살리셨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입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지를 못 했습니다 물론 구약에서도 신약에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살아났다는 말씀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누군가 그렇게 말 합니다
자기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었는데 천국에 갔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아직까지 살아 있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시 죽는 그를 보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다시 죽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면 그것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일시적으로 죽었던 사람이 사는 것을 가지고 살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살았다고 하는 말씀은 영원히 사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하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성경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다고 하면 안 됩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신 것은 영원한 생명으로 사셨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죽은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가 사셨다는 말씀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이 살았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만이 사셨습니다.
고린도전서1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82쪽)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미 주님께서는 첫 열매로 드려지실 것을 구약의 절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셨습니다.
그것을 첫 열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절기들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첫 열매로 드려질 것을 이미 절기를 통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어느 누구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지를 못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 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지금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모든 사람은 다 자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이 있지만 아직 주님이 오시지 않아서 다 자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지금 사람이 죽으면 천국에 간다고 합니다. 물론 그 죽은 사람의 시간이 정지가 되었기에 그렇게 이야기를 한다 해도 크게 틀리다고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정확하게 말을 해야 합니다. 성경은 성도가 죽으면 잠잔다고 하지 천국에 갔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천국에 가는 것은 사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언어의 사용입니다
정말 우리 성도는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좋게 생각이 된다고 해도 함부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무심히 사용하는 그 언어가 복음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사신 것이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다가 죽은 그가 살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천국에 갔다는 표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부활을 해서 사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과 같이 살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주님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생명은 말씀 그대로 영이지 아직 주님과 같은 부활의 형상을 입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도 살았습니다.
그러나 열매로 드려지지는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어 산 것과 부활을 한 것은 다릅니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부활의 형상을 입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직 절기상으로도 수장절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 부활입니다
아직 아무도 첫째 부활에 참예를 한 사람이 없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있는 내세의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언제 첫 열매가 되셨는가 하면 오순절이 임하니까 주님께서 첫 열매로 드려지고 바로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그 일을 우리가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알아 믿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주님과 우리는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하나입니다
주님과 우리는 하나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육체로 하나가 되었던 것과 같이 주님과 우리는 영으로 하나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도 죽은 자 가운데서 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주님과 내가 별개의 사람이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 해도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으로 주님과 내가 하나이기 때문에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우리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살 줄을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는 아담입니다
그러나 영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이 두 생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이 두 생명이 연합이 되는 것이 아니라 아담의 생명은 아담과 연합이 되어 있고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리스도와 연합이 되어서 하나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연합이 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 사신 것이 우리에게는 너무도 중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연합이 안 되어 있다면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것은 주님의 일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 그래서 우리와 하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렇게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기 때문에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378쪽)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조금 더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왜 믿고 있는가 하면 저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해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들은 그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는 그 문자를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 말씀을 보고 믿는 믿음과 소망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살리실 것을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사셨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생명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늘 깨어 이 생명에 대해서 알아가야 합니다. 이 생명의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교회라는 세상에 대해서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물론 우리가 영에 대해서 그리고 내세의 일에 대해서 정확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럴지라도 이런 영의 일에 대해서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야 영생의 소망을 가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그저 자기들이 성경을 보고 문자를 아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영생에 대해서 천국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믿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기 때문에 믿을 수 있습니다.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이 영의 일을 믿음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는데도 사람들은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의 문자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문자를 보았으면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하는데 성령이 오셔서 어떻게 감동을 해 주시는 줄을 모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보아도 아무런 감동이 없고 마치 예수 그리스도도 혼자 죽은 자 가운데서 사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6: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42쪽)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죽는 자 가운데서 사셨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다시 죽는다면 살아났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예표들을 통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가 다시 죽었습니다. 왜 다시 죽었는가 하면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았지만 육체가 살았기 때문에 다시 죽었습니다.
다시 죽었습니다.
성경에서 기적으로 다시 산 사람들이 다시 죽었습니다. 그런 것을 보고 살았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다시 죽지 않는 형상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죽는 육체로 살아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죽지 않는 하늘의 형상으로 살아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직입니다
주님만이 다시 죽는 것이 없습니다. 이제까지 성경에서 다시 산 사람이 있을지라도 그들은 다 죽었습니다. 오직 주님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지 아니함이 왜 있는가 하면 주님은 썩지 아니할 몸으로 다시 사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지 아니하시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이라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내세의 일은 우리의 상상으로는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 하셔서 죽지 아니하신다는 것 자체가 이해가 안 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아니 이 세상에는 죽지 아니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비밀입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어디서부터 오는가 하면 죽지 아니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고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보았지만 그것 역시 비유입니다 우리가 알아들 수 있는 언어지 실제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이해를 한다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주시고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아무 사람도 보지 못 했습니다 또 볼 수도 없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의 이성으로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는 하나님은 사실 장님이 코끼리 다리는 만지는 것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설령 그가 복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알고 있다 해도 역시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지 그 이상이 아닙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죽지 않는다는 자체가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세상에서 알고 있는 그런 샤머니즘이 아니라 우리 성도의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내세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말하고 있는 그런 것들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이 정도까지 내세의 일에 대해서 모르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도 성경을 보는 사람이라면 고민을 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잘못된 신학에서 나온 결과입니다
성경을 봅니다.
그러면 자기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말씀들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당연히 고민을 해야 하고 또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는데 도리어 성경을 자기가 잘못 알고 있는 그것에 맞추려고만 노력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이성으로 알고 있는 문자를 가지고 논리적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다가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54절을 보겠습니다. (신 284쪽)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이 이김의 삼킨 바 되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응하리라”
사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육체는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주장하지 못 합니다
사망이 자기 권리를 내 세우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형상으로 부활을 하셨는가 하면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하는 형상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사망이 있습니다. 그 사망이 자기 권리를 내 세우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데 주님이 죽은 가 가운데 다시 사심으로 다시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죽으라고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영으로 부활을 하셨습니다. 다시 죽지 아니하는 형상으로 부활을 하셨기 때문에 사망이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떠한 형상으로 부활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망은 누구라도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의 형상은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을 수 없습니다.
다시 죽을 수 없습니다. 왜 다시 죽을 수 없는가 하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었기 때문에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썩을 것을 그대로 입고 계시면 사망이 다시 주장할 수 있지만 썩을 것이 아닌 썩지 아니할 것을 입으셨기 때문에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은 사망을 삼키고 승리를 얻은 생명이기 때문에 사망이 다시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에게서 지셨다면 또 다시 사망을 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심으로 사망을 이기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을 하셨습니다. 사망이 이미 졌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사망이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는 우리의 부활을 말씀하면서 사망을 삼키고 이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0:14절을 보겠습니다. (신 420쪽)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 합니다
왜 사망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주장하지 못하는가 하면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입니다 이 마지막 심판에 사망도 불못에 던지우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망입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사망이 어떻게 불못에 던지우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의미적으로 볼 때 사망이 심판을 받아 더 이상 사망이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서는 분명히 사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는 모두가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그 사망도 불못에 던지 웁니다. 이 사망을 누가 가져오고 있습니까? 사단이 사망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사단이 불못에 던지우게 됨으로 해서 사망이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이 완전히 소멸이 됨으로 해서 더 이상 사망을 당하게 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후의 심판입니다
사망도 불못에 던지 웁니다. 바다가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사망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생명입니다
그리고 사단은 사망입니다 사단이 무엇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는가 하면 율법으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마지막 심판에는 사단이 불못에 던지우게 됨으로 해서 더 이상 사망이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시대는 이 마지막 심판도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입니다
첫째 사망이 있으니까 둘째 사망이 있습니다. 첫째 사망은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심판에 둘째 사망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는 사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사망에 대해서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둘째 사망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더 이상 사단이 활동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사망에 대해서도 거의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이 주장하는 것이 사망입니다 사단은 이제까지 사망에 대해서 주장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고 요한계시록에서는 사망도 불못에 던지운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일입니다
교회 밖에 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축복을 받고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에서 고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이 지옥에 대해서는 너무 무지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옥에 갔다고 말합니다.
누가 지옥에 갔습니까? 아직 아무도 지옥에 가지 않았습니다. 아직 아무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도 지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샤머니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마치 다른 사람들이 죽어서 지옥에 들어간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불못입니다.
최후의 심판에서 사망도 불못에 던지웁니다. 그래서 사망이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왜 영원히 사는가 하면 우리가 가는 천국에서는 이미 사단이 불못에 던지어서 둘째 사망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사망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세의 일입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둘째 사망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둘째 사망을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망도 불못에 던지어서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둘째 사망을 전혀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담입니다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심으로 해서 사망이 왕 노릇하는데서 의가 왕 노릇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영생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영생을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사셔서 죽지 아니하고 사망이 불못에 던지움으로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6: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이니”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고 다시 살아나셔서는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 계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십자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사람들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초등학문을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아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십자가를 어느 정도는 알고 있다고 했지만 역시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다 아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무지한가를 알아야 하는데 사람들은 성경을 볼 수 있는 지적인 능력이 있는 것으로 자기들이 꽤나 지혜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입니다.
우리가 이제까지 어떻게 알고 있었습니까? 우리가 짓고 있는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 죽은 것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에서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해여 단번에 죽으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다 도덕적인 죄만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다 그렇게 보입니다.
그러나 어떤 죄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5장부터 해서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죄에서 단번에 죽으셨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죄에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죄에서 죽으셨습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에서도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 6장을 통해서 죄에서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씀은 그런 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죄에서 단번에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 번 죽으심으로써 죄의 권세를 꺾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권세 그러니까 율법의 권세를 꺾으신 것이 더 이해하기가 쉬운 것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율법의 권세를 꺾어 버리셨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서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단번에 죄에서 죽으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9:30절을 보겠습니다. (신 182쪽)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 가라사대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시고 영혼이 돌아가시니라”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것도 다 이루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율법이 완성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율법을 다 이루셨다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다 이루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그의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단 한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완전케 하셨습니다. 단 한 번에 이 모든 일을 다 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우리를 위해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이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주님께서는 단번에 죽으셨는데 우리가 율법을 지킨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막연하게 지키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 이루셨습니다.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것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요구도 다 이루셨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거룩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거룩함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스스로 거룩해 질 수 있습니까?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으로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다는 말씀은 죄의 권세를 꺾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권세를 단번에 꺾어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미리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하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율법의 권세를 꺾어 버리셨기 때문에 사망이 더 이상 주장하지 못하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사망의 권세를 꺾어 버리셨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6:39절을 보겠습니다. (신 154쪽)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신 것은 하나님께 대해서 살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번역에서는 그의 살으심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셔서 살아나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될 수 있게 죽으셨습니다. 그의 죽으심은 우리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범죄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정말 이 문제를 바로 알아야 하지만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범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은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다 이루심으로 해서 우리가 더 이상 범죄를 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단번에 죽으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해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잘 이해를 하셔야 합니다.
율법에 대한 기초가 없다 보니까 로마서의 강해를 보고 어려워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 가를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보았지만 몰랐기 때문에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증거를 해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율법을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율법을 범하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심으로 해서 우리가 범죄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활을 하셨습니다.
주님이 부활을 하신 것은 하나님에 대하여 살으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을 원하십니까?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대하여 살아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살아나지 않았다면 이 세상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없습니다.
주님께 주셨습니다.
생명을 주님께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생명이요 부활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살으신 것은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기 위해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을 위해서 살아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살으셨습니다.
성경은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까? 그리고 범죄 한 자들을 왜 바로 죽이지 않았습니까? 우리가 영생을 받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 생명을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셨습니다. 주님이 살아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도 이와 같이 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6: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로 여길찌어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죄에 대해서는 죽은 사람이요, 하나님을 위해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서 대해서 죽은 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십자가에서 단번에 죽으신 것과 같이 우리도 역시 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범죄에 대해서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모두가 율법에 대해서 살아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해서 단번에 죽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이 말씀도 거꾸로 해석을 해서 죄에 대해서 죽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는 어리석음을 행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그렇게 행하고 있고 가르침으로 해서 모두가 죄를 짓게 만들고 있습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도덕적인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성경입니다
모르면 다 거꾸로 하게 되어 있습니다.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죄에 대해서 죽지 않고 도리어 죄에 대해서 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은 자라고 하면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계량을 따지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계량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으라고 하면 반드시 모든 죄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죽지 않고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죄에 대하여 죽은 자만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산 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로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먼저 여러분이 죄에 대하여는 죽어야 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로 죽었다고 해서는 안 되고 죄에 대하여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죄에 대하여 죽지 않은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말은 참 잘 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다고 합니다. 그러나 먼저 죄에 대하여 죽지 않으면 그가 하는 말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신 것은 우리도 죄에 대하여 반드시 죽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주님이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께 대하여 살으심과 같이 우리 역시 죄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 산자가 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어느 누구도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라고 하지만 이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도리어 죄를 안 짓기 위해서 범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은 자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을 정말 여러 가지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성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의 이성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바르게 판단이 되어서 더욱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먼저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죄가 무슨 죄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죄라는 단어를 보면 도덕적인 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지혜를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산 자가 될 수 있는 가를 명확하게 알아서 영생을 얻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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