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6: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율법이 가입을 했습니다.
우리에게 율법을 주지 않았다면 우리는 사실 범죄를 하면서도 내가 범죄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깨달을 수 있습니까? 율법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 율법을 보고 내가 어떤 범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의 도덕적인 죄를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사람의 이성에 따라 보면서 죄라고 하면 도덕적인 죄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우리를 그 도덕적인 죄에서 구원을 해 주시기로 예정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그 도덕적인 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도덕적인 죄를 보면서 죄라고 하는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범죄를 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보고 정죄를 하는 그들이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범죄를 교회 안에서 마음껏 지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범죄를 더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범죄를 더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아도 범죄를 더 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범죄에 대해서 알게 된 것만 해도 우리에게 얼마나 큰 은혜를 주시고 있는 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누가 압니까?
어거스틴이 알았습니까? 칼뱅이 알았습니까? 루터가 알았습니까? 웨슬레가 알았습니까? 조직신학을 정리한 루이스 뻘콥이 알았습니까? 아무도 모르는 이 범죄에 대해서 알게 해 주셔서 죄가 더하게 하고 있고 그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도 모르는 성경의 비밀을 지금 우리가 성령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가 아닙니다.
오직 성령이 감동을 해 주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를 구원해 주시려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이 가입을 해서 죄가 더하게 하셨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꿈만 같습니다.
시편에서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리실 때에 우리가 꿈꾸는 것 같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이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의 남편에게서 수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은혜를 주신 것과 같이 지금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꿈같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평생을 범죄만 하다가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될 것이 분명합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나름대로는 하나님을 위해서 성도로서 살려고 평생을 헌신을 했는데 그것이 다 가증한 일이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꿈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교제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정말 꿈같은 일이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은혜를 입는다는 것이 어떻다는 것을 이 시대 교인들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가 더한 것을 아는 성도만이 은혜가 더욱 넘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 역시도 그렇습니다.
제가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아니 예전에는 다른 복음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 아카데미 강의를 통해서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은혜가 넘치게 역사를 해 주시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망이 왕 노릇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천국에 간다고 굳게 믿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고 해야 맞을 것 같습니다. 그런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노아에게 주신 은혜를 주시면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게 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저 역시도 이 율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이 율법이 보이기 시작함으로 해서 죄가 더하게 되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이 얼마나 큰 죄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라고 합니다. 우리보다 더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저는 정말 이 은혜를 생각하면 세상이 하나도 부럽지가 않습니다. 물론 세상을 사는 동안에는 조금 힘들지 몰라도 이 은혜가 있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있다 해도 견딜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은혜가 더욱 넘쳤습니다.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어디서 은혜가 넘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이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로마서5장에서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가 더한 곳에서만 은혜가 넘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 다른 곳에서도 이러한 말씀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는 말씀은 로마서에서만 하고 있습니다. 다른 어느 말씀에서도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반드시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를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제까지의 어느 교회를 보더라도 은혜가 넘치는 곳은 없었습니다.
이 은혜입니다
넘치는 은혜입니다 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은혜가 어떻게 넘치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은혜가 넘쳐야 영생에 이를 수 있는데 범죄를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백번 생각해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이 가증한 일이라는 것을 사람의 지혜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받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아무리 이 복음을 전한다 해도 이것이 믿어지지가 않으면 안 됩니다 한 성령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는 성도는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지식으로만 받아들이고 있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다.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우리에게 의가 주어지고 있습니다. 이 의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여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다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여호와 앞에서 가증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이라고 말을 해야 하겠습니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여전히 죄 가운데 머물러 있어야 하겠습니까?”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를 더 받으려고 계속 죄를 지어야 하겠습니까?”
그런즉
5장에서 아담의 범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습니다. 어느 정도 많은 사람이 죽었는가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않았지만 역시 범죄를 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6장1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도 거의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전에 썼던 로마서 강해를 안 보아서 잘 모르겠지만 저 역시도 그렇게 오해를 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6장1절의 말씀을 거의 모든 사람이 율법을 범하는 도덕적인 죄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입니다
5장에서 범죄를 이해를 하지 못하다 보니까 6장에서 죄를 도덕적인 죄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5장에서의 범죄는 율법을 지키는 범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 범죄를 말씀하고 6장에서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꼭 그렇게 말을 합니다.
도덕적인 죄가 폐하여졌다고 하면 이제 마음 놓고 죄를 지어도 되겠네. 라고 말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이 5장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또 은혜를 더하게 하려면 죄게 거해야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라고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을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가입을 해서 죄가 더해졌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죄에 거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4:6절을 보겠습니다. (신 374쪽)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죄에 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대교회에서 사도 바울에게 복음을 들었던 사람들과 지금 이 시대 사람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할 때는 정말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거의 2000년 가까이 기독교라는 종교에 의해서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이제까지 교회사를 통해서 나오고 있는 인물 중에서 어느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고 있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이제까지의 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어느 사람도 복음을 전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릅니다.
이 시대는 로마서의 말씀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을 해야 죄가 더하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칠 수 있습니다. 로마서6장을 깨달으려면 반드시 율법이 가입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율법이 가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자기들이 율법에 가입을 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죄가 더 합니까?
율법을 지키는 가운데서는 죄가 더할 수도 없고 또 죄가 더하지 않으면 은혜가 더욱 넘칠 수도 없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로마서6장의 말씀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이 말씀을 보고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라고 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이 말씀을 보고 이 시대는 더욱 율법주의에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죄에 거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깨닫지를 못하니까 죄를 안 지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참으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 주시지 않으면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거의 모든 목사들입니다
아니 이제까지의 로마서 주석이나 강해가 다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서 죄를 지어서 안 되니까 율법을 잘 지켜야 한다는 뜻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거꾸로 해석을 해서 모두가 사망에 길로 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은 범죄입니다 그렇게 범죄를 하면 사망이 왕 노릇한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범죄도 모르고 있고 성경을 모르다보니까 도리어 죄에 더욱 거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하지 않으려고 율법을 지키면서 범죄에 거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입니다
그 한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면 모두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지혜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죄에 거하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기 위해서 죄에 거하는 것이 아니라 죄에 거하겠느냐는 그 말씀으로 인하여 율법을 지키면서 죄에 거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율법을 지키는 것이 범죄라고 5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범죄라는 것을 가르쳐 주면서 그 율법을 지키는 범죄로 인하여 은혜가 우리에게 더욱 넘쳤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도덕적인 죄를 죄라고 하는 것은 이 세상 사람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초보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기들이 성경을 알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하고 있는 그들은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안 믿는 사람입니다
야고보서입니다
우리가 강해를 통해 교제를 나누어서 잘 알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보고 행하는 자를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는 성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신 그 율법을 보고 믿는 성도는 문자적인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 은혜가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교만한 자입니까? 교회 안에서 정욕을 따라 살면서 간음하는 자가 교만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이 시대는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말씀을 깨닫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가 죄에 거하고 있는가 하면 교만한 자들이 죄에 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가 더한 곳에 더욱 은혜가 넘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는데 기초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면 그마나 다행입니다.
그 정도의 사람이라면 은혜를 더할 수 있는 가능성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다 보니까 이 시대는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정욕으로 살면서 교회 안에서 간음을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도리어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면서 교만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물리치십니다.
죄에 거하고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물리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교만한 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교만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자기 정욕에 따라 율법을 지키는데서 온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입니다.
그러나 죄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짓고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도리어 죄에 거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그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도 모르는 그들이 죄에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이 사실 얼마나 교만한 말입니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더욱 큰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어떻게 더할 수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은혜라는 단어를 보면서 세상에서 사용하는 온갖 미사여구를 써서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하겠습니까?
죄를 알고 죄에 거하겠다고 한다면 그나마 가능성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정욕을 주체를 하지 못하고 죄에 거하고 있으면서도 은혜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 복음을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혜가 없으면서도 대적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교만하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가장 교만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거절하는 자가 가장 교만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성도가 겸손합니다. 이 교만과 겸손도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이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전해 보아야 도리어 거치는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갈라디아서5: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로 영생에 이르렀습니다. 이 영생에 이르기 위해서는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반드시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유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는 자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이 두 사람이 있는데 자유하는 자는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고 종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 613가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 그는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유를 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 성도들에게는 은혜입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는데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으면 저주를 받아야 하는데 주님이 그 율법을 폐하심으로 우리를 자유케 하셨습니다.
그런데 종이 되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종이 되었는가 하면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누가 죄의 종이 되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죄의 종이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이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죄의 종이 되었다는 말씀을 깨달아야 죄에 거하지 않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로마서입니다
은혜를 어떻게 더할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넘친다고 해서 사도 바울이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까 이제 더 이상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사실 로마서에서 죄를 알아야 합니다. 범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갈라디아서의 말씀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여러 가지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도리어 굳세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합니까?
그것이 아니라 은혜를 폐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는 이 말씀은 죄에 거하면 은혜를 폐할 수 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종이 되어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은혜를 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입니다
그것은 죄에 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로마서에서는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죄에 거하고 있는 사람은 종이 되어서 멍에를 메고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폐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성경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죄에 거함으로 해서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고 있지만 죄에 거하고 있는 그들이 아니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하겠느뇨
죄에 거하지 말라는 강한 말씀입니다 죄에 거하면 은혜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가 더해서 은혜를 더욱 넘치게는 할 수 있지만 죄에 거하는 순간 여러분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고 그의 은혜를 말한다 해도 은혜가 폐해진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굳세게 서시기 바랍니다.
믿음에 굳게 서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죄에 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은 백번 생각해도 죄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생각이 되어 지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누구라도 죄에 거하는 것이 은혜라고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강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죄에 거하고 있는 사람이 이 말씀을 듣고 본다고 해서 죄에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이 없습니다. 반드시 성령이 오셔서 그 안에서 역사를 해서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에 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는 죄의 종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은혜로 자유하는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이 말씀을 보고 은혜를 받은 성도는 죄를 짓지 않는다고 하면서 도리어 죄에 거하는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죄에 거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제 로마서6장은 이 죄에 거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영생에 이른 성도는 절대로 이 죄에 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6:2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공동번역에서는 절대로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절대로 그럴 수 없다는 이 말씀을 모르다보니까 도리어 율법주의로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죄에 거할 수 없다는 이 말씀 때문에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모르면 사망입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에게 재앙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마음껏 즐기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비유하신 한 부자와 나사로의 말씀과 같이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면서 연락을 하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통곡입니다
누구에게 통곡의 날이 오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통곡의 날이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모르면 차라리 안 믿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합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사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가슴에서 더할 수 없는 슬픔이 오고 있지만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저 기도나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사람들은 그저 교회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영생에 이르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기 가족들에게 친지들에게 그리고 친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든지 교회 안에 들어오게 만들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사촌 동생이 죽었습니다.
암이라는 병으로 죽었습니다. 그 동생이 참으로 세상에서 선하게 살려고 노력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여러 가지 많은 일을 하고 갔지만 생각만 해도 안타깝기만 합니다. 그런데 장로교를 다니다가 우연하게 안식일 교회를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지금 이 시대 장로교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안식일 교회에 교인들과 교제를 하면 거의 80% 이상은 안식일 교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살기를 원했던 사람은 거의 100%가 안식일 교회의 교인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동생의 부탁입니다
자기 어머니가 교회에 나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을 할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병으로 치유를 받고 있고 그런 과정에서 연세가 드신 고모가 동생을 따라 교회에 나가게 되었고 그 동생이 죽고 나서는 안식일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연세가 드셔서 총기도 다 사라져 있는 고모를 교회에 들어가게 하고 죽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어느 교회가 죄에 거하지 않고 있습니까? 어느 교회가 죄 가운데 살지 않고 있는 교회가 어디 있습니까? 더구나 안식일 교회는 장로교보다 더 율법주의입니다 그들은 구약에 안식일을 그대로 지킨다고 하고 있고 돼지고기도 부정하다 해서 먹지를 않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가슴이 먹먹합니다.
동생이 죽고 나서 고모를 찾아뵈었는데 이제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겠다고 하면서 안식일 교회를 다닌다고 합니다. 정말 그럴 때마다 참담함을 느끼면서도 제가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답답하기만 합니다. 복음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서 죄에 거하고 있지 않지만 죄가 거하는 그 교회에서 꺼낼 수 없다는 것이 더 안타깝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더구나 안식일 교회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더 이상한 놈으로 생각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죄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아니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점점 더 율법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이 강해를 쓰면서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을 지금 이 시대 교회는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그럴 수 없다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지만 다 소경이 되어서 죄 가운데 살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들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일을 하면서 사망이 왕 노릇하는 그 일을 하면서도 그 일에 열심을 내면서 어떻게 하면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일까를 고민하고 그것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간곡합니까?
사도 바울이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때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까? 있을 수 없는 일을 할 때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 그러니까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할 때 이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할 때 그럴 수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절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 사망이 왕 노릇하게 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지혜를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종교에 의해서 매너리즘에 빠져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모두가 죄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한 교회도 그렇지 않은 교회가 없습니까? 정말 화가 납니다. 사망에 왕 노릇하게 하고 있으면서도 전혀 죄의식조차 느끼지 않고 그것이 하나님을 위하는 성도의 삶이라고 하면서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을 보면 화가 납니다.
원수입니다
왜 율법이 원수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성경을 본다고 하는 그들이 다 소경이 되어서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로 빠지고 있습니다.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어떻게 성경을 보면서 누구 하나 지혜를 구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우리나라만 해도 교회가 얼마나 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됩니까? 그들은 그래도 남이니까 그런대로 참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가족이 이 종교에 미혹이 되어서 그 안에서 그럴 수 없는 일을 하다 죽은 것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차라리 열심이나 안 냈으면 얼마나 좋았습니까?
그럴 수 없는 일을 하는 그들이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로마서6장을 시작하면서 가족을 생각하니까 화가 나서 참을 수 없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 그렇게 앞장서서 함으로 해서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습니다.
기도도 못 합니다
이미 그 육체가 죽은 사람을 위해서 기도를 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나기도 하지만 이 시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또 죄 가운데서 살지 않게 역사를 해 주심으로 우리가 은혜를 입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6: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69쪽)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슴 아프게도 이 시대 모든 교회는 다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죽이기 위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죄에 거하게 하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도리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고린도전서5장에서 음행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6장에서 사도 바울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록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 안에 음행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음행을 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내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가지고 창기의 지체를 만들겠느냐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이러한 일들이 어디에서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들이 초대교회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모든 교회 안에서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누구 하나도 깨닫지를 못하고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에 모두가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창기입니다
누가 창기입니까? 자기 남편이 있는데 다른 남편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있다면 창기입니다 성경은 육의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의 일이고 우리 영생에 관한 말씀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정말 다시 부탁을 드리지만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사망이 왕 노릇하게 만들고 있습니까? 그냥 사망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구더기도 죽지 않고 꺼지지 않는 불에서 세세토록 고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육체로 살아가면서 해서는 안 되는 일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하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이라는 기본조차도 안 되는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죄에 거하게 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영의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자손이 아니라 그 자손은 이미 죽었고 이제는 영의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들은 고린도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육체에 빠져 창기의 지체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떻게 창기의 지체가 되는 줄을 모르고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6:16-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69쪽)
“창기와 합하는 자는 저와 한 몸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일렀으되 둘이 한 육체가 된다 하셨나니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니라”
창기입니다
교회가 이미 창기가 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회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까? 모두가 육체가 되어서 창기가 되어 있으면서도 육체가 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 육체로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육체가 되게 하고 있고 그것이 창기와 한 육체가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육체를 모릅니까?
율법을 누가 지키고 있습니다. 내 육체가 지키면 그것은 육체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지키셨으면 영이 됩니다. 우리는 영의 성도지 육체의 사람의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영의 성도라고 하는 그들이 결코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주와 합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한 영이 되었습니다. 육체의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한 영이 되어 있는 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영의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을 이 시대 모든 교회가 하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결코 그럴 수 없는 일을 하면서 어떻게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그럴 수 없다고 하는 일을 하면 반드시 사망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이 시대는 안타깝게도 영생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에 모두가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가 되어서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방의 교회도 역시 기독교가 되어서 종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가 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고 있지만 사람들은 종교를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교회는 다 창기입니다
그 창기와 한 몸이 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도 안타깝게도 율법이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그것이 율법이라 해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교회가 창기고 그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창기와 한 육체가 되어 있는데도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어떻게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율법 때문에 우리 인생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있어서 주님이 오셔서 그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는데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까?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에서 잠시 복음이 전해지고 나면 다 육체가 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복음을 전하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복음 안에서 교제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한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영으로 부활하시면서 우리에게도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영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한 영으로 살게 하시고 있지만 이 시대는 이 영 조차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영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럴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만연을 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모두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5: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히브리서7: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59쪽)
"그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법을 좇지 아니하고 오직 무궁한 생명의 능력을 좇아 된 것이니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를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아니 성경을 그래도 몇 번은 보았다고 하는 사람은 다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알면 뭐 합니까?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는 것을 알면 뭐 합니까? 실제 그들의 삶을 보면 이 말씀과는 반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그리스도의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말씀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입니다
율법을 어떻게 지킵니까? 그것을 영이 지키고 있습니까? 육체가 지키고 있습니까? 육체로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말로만 하고 있지 실제로는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육체에 상관된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왜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까? 육체에 상관된 계명을 지키지 않으려고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 뜻도 모르면서 목사들은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자기가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거짓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 이 말을 하고 있다면 그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 성도는 육체가 죽었습니다. 그 말씀을 로마서에서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무엇인가를 모르다보니까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육체가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범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5장20절에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보고도 자기가 어떠한 범죄를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목사들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죄 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죄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로마서 강해를 해서 가르쳐 줘도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자기들이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그런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이 그럴 수 없는 일을 교회 안에서 마음껏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런 자기들의 행위를 보고 믿음이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율법을 지키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 죽었다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를 않고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어려분이 죄에 대해서 죽지 않으면 반드시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율법을 지켰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죽지를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율법을 보고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증거를 해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자기들의 이성으로 보면서 더욱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누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겠습니까?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말할 수 없습니다. 율법을 보고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자기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하지만 이제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율법을 지키지 않은 교회가 없고 점점 교회는 율법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죽은 자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육체가 죽은 자가 육체에 상관된 계명의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없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가 자기들이 생명을 얻어 천국에 간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 남편입니다
율법은 우리의 전 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죽었습니다. 이미 율법에 대해서는 우리는 죽은 몸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은 우리가 율법을 지킬 수 있다는 말씀입니까? 하지만 로마서의 이 말씀을 보고 사람들은 더욱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망하는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정말 이 로마서의 말씀을 깨닫기 까지는 성령의 감동이 아니고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5장의 말씀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아서 아니 쓰고 나면 이상하고 또 쓰고 나면 이상해서 몇 번을 지우고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서 그 말씀에 대해서 확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확신도 없는 말들을 억지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억지가 결국에는 많은 사람을 사망으로 이끌고 가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분명히 앞뒤에 있는 말씀이 서로 연결이 안 되고 있는데도 목사라서 억지로라도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4쪽)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에 대해서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율법이 그것을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만 율법에 의해서 죽은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과 동일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우리 성도들 역시도 율법에 대하여 죽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 죄에 대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죄를 더 짓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22:19절을 보겠습니다. (구 116쪽)
“짐승과 행음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요한계시록13:3절을 보겠습니다. (신 411쪽)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온 땅이 이상히 여겨 짐승을 따르고”
나는 이미 율법의 손에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왜 죽었습니까? 짐승과 행음을 했기 때문에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 이스라엘이 모두가 이 짐승을 따르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짐승을 따랐습니까?
갈라디아서1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유전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요한이 환상으로 보고 온 땅이 이상히 여서 짐승을 따랐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깨닫기 전에는 유대교라는 짐승과 행음을 했기 때문에 율법의 손에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짐승이 무엇인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요한계시록에서 이스라엘이 짐승이 되었고 또 이방의 교회가 짐승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고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반드시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가 유대교라는 짐승과 행음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율법의 손에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역시 기독교가 되어서 짐승과 행음을 하고 있으면서도 율법을 보고도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그림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다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출애굽기의 짐승을 진짜 짐승으로 보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육체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유대교가 짐승과 어떻게 행음을 했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기 위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기를 소개할 때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죄를 지었습니까?
사도 바울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죄를 짓고 짐승과 행음을 했는가를 알기 때문에 갈라디아에서 내가 율법의 손에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까? 우리 역시 예전에는 다 짐승과 행음을 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교회 안에서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면서 산 사람은 다 짐승과 행음을 한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죽이라고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의해서 반드시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 안 지킨 사람이 있습니까?
출애굽기의 율법을 보고 아마도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고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에 반드시 죽일찌니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그 율법을 우리가 다 범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반드시 죽어야 하는 율법을 우리가 교회 안에서 다 범하고 있었습니다.
레위기20:10절을 보겠습니다. (구 177쪽)
“누구든지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 곧 그 이웃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간부와 음부를 반드시 죽일지니라”
반드시 죽일찌니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남의 아내와 다 간음을 했습니다. 이런 율법을 보고도 자기가 남의 아내와 간음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남의 아내입니다 누가 남의 아내입니까? 이미 설교로 올려 드렸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주님의 아내입니다
그 아내와 간음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남의 아내와 행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평생 남의 아내 주님의 아내인 교회와 간음을 하다가 사망이 왕 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이며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누구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사도 바울이기 때문에 율법에 대해서 나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율법에 대해서 죽었는가 하면 짐승과 행음을 하고 또 남의 아내와 간음을 했기 때문에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릅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은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하는 말씀을 문자로는 알고 있지만 왜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를 알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범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서 죽었다는 말씀입니다
흠 없는 율법을 의를 가졌습니다.
그것이 도리어 율법을 범하는 죄를 짓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로마서나 갈라디아서와 같이 율법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율법을 보면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죽임을 당했습니다. 짐승과 행음하는 자,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2장에서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죄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 자체가 죄입니다. 성경은 이 율법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할 수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 수 없는가 하면 죄에 대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율법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죽었습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를 지었습니다. 어떻게 그 죄를 지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면서 그 죄를 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바리새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더욱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죽어야 합니다.
아니 이미 우리는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어찌 율법을 지킬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이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직 참 빛을 비춰주시지 않아서 그렇다고 해도 이 시대는 로마서가 있지 않습니까?
로마서만 그렇습니까?
율법도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성경이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초등학문으로 만들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일이 사망이 왕 노릇한다는 것을 모르고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어찌 그 가운데 삽니까?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보고 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탄식을 하면서 어찌 그 가운데서 살리요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도리어 이 말씀을 보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 하나도 로마서의 이 말씀을 바로 해석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어떻습니까?
율법을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죄 가운데 살지 않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가슴 아픈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가족을 구원한다고 말을 하고 있고 자기 친지를 구원하겠다고 하면서 그 교회 안으로 어떻게 하든지 끌어 들이려 하고 있습니다.
아무 것도 모릅니다.
나이가 팔십이 가까운 사람이 무엇을 알겠습니까? 그 사람이 무슨 총기가 있겠습니까? 제가 연세를 드신 분들을 폄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왜 성경에서 청년의 때를 헛되게 보내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가슴 아픕니다.
그럴 수 없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자기 가족들을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율법 안에서 살게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는 발을 들여 놓는 순간에 율법 안에서 살아간다는 것을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6: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뇨”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예수님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십니까?”
우리는 죽었습니다.
죄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죄 가운데 더 살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도리어 그 율법을 지키는 열심에 빠져 들어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소경이 되어서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것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살리요.
우리가 어찌 율법을 지키면서 살겠습니까? 성경을 모르면 자기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율법 가운데서 살지 말라고 이렇게 간곡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율법이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아니 생각하면 할수록 가슴이 답답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천만 명이 되는 사람들이 성경에서 말씀하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연락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을 정도로 율법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율법이라는 생각조차도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습니다.
아니 반드시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합니다. 왜 죽어야 하는가 하면 율법을 알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보면 우리는 이미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욥과 같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서 이미 죽은 자를 살려 주시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가 된 우리는 모두 세례를 받을 때에 그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세례를 받아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례를 받을 때 그 의미를 다 알고 받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교회도 있고 침례를 받는 교회도 있습니다.
그때 목사들이 가르쳐 줍니다.
물에 들어가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다시 물에서 나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고 세례를 받는 사람도 듣고 있습니다. 그 의미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세례를 하지만 실제 그들의 행위는 세례와는 정 반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종교의 영향입니다.
우리나라는 불교 국가였고 유교 국가였습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들어왔습니다. 사실 신학을 공부한 목사들이 다 그런 사상을 가지고 공부를 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세례의 의미를 알면서도 율법을 지키는 이유는 그것을 마치 불교에서 속세를 떠나는 것과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생각을 하는가 하면 불교에서 속세를 떠나는 것과 같이 이제까지는 세상에서 살았는데 세상에서 사는 것을 죽이고 이제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이제 교회 안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것을 보면서 세례를 받은 교인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제 교회 안에서 사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과 교회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의미를 바로 알지 못하면 그는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는 그것으로 마치 자기가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저 형식에 따라 그 의미를 이야기를 하고 그것을 지식으로 아는 것으로 자기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들의 삶을 보면 전혀 그렇지가 않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이 왜 갑자기 뜬금없이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마도 범죄에 대해서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이 어찌 보면 생뚱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 사도 바울은 죄에 대해서 죽은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죄에 대해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죄에 대하여 죽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죽었습니다.
왜 죽었는가 하면 율법이 가입을 해서 보니까 율법에 대해서 죄가 넘치게 되어서 죽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죄를 이제까지 우리가 지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렇게 죽은 것을 세례로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을 보면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받은 세례를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받은 세례나 침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자기들이 죽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받은 그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죽었습니까?
제가 보기에는 한 사람도 죽지 않았습니다. 말로만 죽었다고 하지 마시고 진짜 죽어야 합니다. 말로 그가 아무리 그 의미를 알고 이야기를 한들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고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로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세례를 받았습니까?
아니 침례를 받았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죽었습니까? 이 시대는 세례를 받은 자도 없고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은 자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세례를 받은 자가 없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받고 있는 그 세례를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일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지난주에도 누구를 만났는데 자기가 교회 안에서 세례를 받은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세례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지금 이 시대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 안에서 받은 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마태복음3: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쪽)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세례 요한이 나타났습니다.
그리고 그가 광야에서 주의 임하심을 외치면서 회개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해서 물로 세례를 준다고 하면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다고 하면서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로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똑같이 물로 세례를 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물로 세례를 받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마도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제 막 교회에 나온 사람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사람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 세례입니다.
그 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한 세례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요한을 통해서 주고 있는 물 세례는 회개케 하기 위해서 하는 세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무슨 회개인가를 누가 복음을 보면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입니까?
정말 성경을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례는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세례를 받으면서 내가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었고 이제 물에서 나옴으로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간다는 생각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받고 있는 물 세례는 앞으로 있을 성령 세례를 예표하고 있을 뿐입니다
회개케 하기 위해서 주는 세례입니다
그리스도와 합하여 받는 세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세례를 받으면서 자기들이 이제 그리스도와 합하여 세례를 받았다고 하면서 마치 하늘의 성도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성도가 구원을 받는 세례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도 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 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생각하고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세례를 받는 것을 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에서 받는 세례는 그냥 물 세례입니다. 그 세례로는 여러분이 그리스도와 합하여 죽은 자가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세례도 다 종교의 의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그 세례가 마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합하여 받는 세례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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