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생명입니다
우리 성도는 이 생명에 대해서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다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얻는 생명에 대해서 성경은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생명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가 생명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종교에 속는 사람입니다 종교는 대충 이야기를 하면서 마치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은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또 생명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넘어 가고 있습니다.
기독교입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가 된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는 기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배우고 있는 교리로 인하여 마치 포승으로 묶여 있는 것과 같이 모두가 꼼짝을 못하고 있습니다. 교리는 이미 포승이 되어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교리 안에서는 생명을 알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 안에서 배우고 있는 아니 그들의 신학에서 배우고 있는 교리로는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 절대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2000년 가까이 정립을 하기 시작한 그 교리는 이제 어느 누구도 끊어버릴 수 없는 포승이 되어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교리를 배워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생이 무엇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알고 있다면 그런 교리에서 빠져 나올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한 때는 장로교의 교리가 그래도 성경적이라고 생각을 했었습니다. 물론 다른 알미니안주의보다는 그래도 조금 더 성경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는 안 됩니다
생명에 대한 문제입니다 조금 더 가까이 갔다 해서 그것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조금 더 좋은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진리의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영의 생명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느낄 수도 없습니다. 육체의 생명과 같이 숨을 쉬고 심장이 뛰고 또 감촉이 있고 따뜻함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 생명이라면 내가 생명을 얻었는지 못 얻었는지를 정확하게 사람의 이성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영의 생명입니다
말씀 그대로 영입니다 그 생명이 우리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그 생명을 주셔서 구원을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생명이 오직 믿음으로만 역사를 하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그것을 내 보일 수도 없고 사람의 이성으로는 증명할 수도 없습니다.
사람은 감성적입니다
우리가 꽤 이성적인 것 같아도 실상은 감성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과학이라는 것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자기들이 정립한 이론이 실제적으로 맞아 떨어질 때 그것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감성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지혜를 말씀을 하고 있고 지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지식과 지혜가 사람의 이성과는 충돌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그것이 깨달아 질 수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교회는 많이 달라졌을 것입니다 아니 지금과 같이 거대한 종교의 모습을 갖추지도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종교는 감성입니다
그들이 하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는 것을 행위로 나타내서 그것을 보고 느끼고 이성적으로 알면서 자기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런 일상적인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감성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체험의 종교라고 하면서 그런 감성을 자극하는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지식입니다
그 안에서 영의 일에 대한 지식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호세아서에서도 여호와를 알자 힘써 알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인 우리 인생이 영이신 하나님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실은 불가능합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인생이 영이신 하나님을 안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을 정도로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성도는 평생을 이 생명을 얻기 위해서 힘써야 합니다. 물론 구원은 단회적인 사건이지만 그러나 구원을 얻은 성도는 성경에서 생명을 얻기 위해서 늘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가 생명을 얻는데 있어서 방해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가고 있고 또 은혜가 더욱 넘치게 성경을 깨달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믿음으로 역사를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해서 생명이 주어지고 있고 그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은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죽었습니다.
범죄로 인하여 사망이 왕 노릇 해서 모두가 다 죽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만 범죄를 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범죄를 했기 때문에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 성도는 사망이 왕 노릇하는 아담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죽은 아담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 분만이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우리 육체의 생명이 아닙니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거하는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의 생명이 있는 성도는 생명 안에서 왕 노릇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누리면서 살아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니 한 사람의 범죄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유죄판결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의 의로운 행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의롭다는 인정을 받아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입니다
그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 한 사람이 범죄를 함으로 해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전체에서 다수를 말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은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잘 보아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가 있는데 그 중에서 많은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많은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죄를 짓지 않은 의인은 세상에 아주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전체에서 많은 사람이 아니라 전체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이 세상에서 범죄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을 통틀어서 한 범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의 범죄도 물론 한 범죄가 될 수 있겠지만 성경은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이 한 범죄를 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범죄를 하지 않았는가 하면 다른 사람도 역시 범죄를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대표성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어떻게 생명을 얻는가를 말씀하기 위해서 한 범죄와 의의 한 행동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를 했다고 하니까 마치 아담 한 사람으로 우리가 죄를 짓게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는 다 아담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의 한 행동입니다
그것을 말씀하기 위해서 한 범죄를 말씀을 하고 있고 그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분명히 아담은 우리 인류의 조상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담이라서 범죄를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생은 처음부터 지음을 받을 때 진토였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죄
죄가 있다고 단정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죄가 있다고 단정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없었다면 정죄도 없습니다. 그러나 죄가 있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3: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0쪽)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니라”
한 범죄입니다
그것을 도덕적인 죄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범죄를 한 것은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영적인 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도덕적인 죄를 지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를 짓는 자마다 마귀에게 속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지금 무슨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무슨 죄를 짓게 하고 있습니까? 도덕적인 죄를 짓게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도덕적인 죄로는 처음부터 우리 인생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도덕적인 죄로 정죄에 이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아니 주님은 만세 전부터 예정을 하셨습니다. 창세전부터 아담을 짓기 전부터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시기로 예정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의 범죄를 이 시대는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가 주님 앞에 끌려 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약에 아담이 지은 죄가 도덕적인 죄라면 주님이 잘못하고 있든지 아니면 지금 사도 바울이 말씀을 잘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문제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왜 죽습니까?
우리가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 죽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범죄를 해서 정죄에 이르렀기 때문에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간음하다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에 이른 한 범죄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입니다
율법을 먹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은 율법을 지키겠다고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율법에 가입을 한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귀에게 속한 자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한 자입니다. 그가 무슨 범죄를 했는가 하면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자기의 의를 드러내는 죄를 지었습니다.
바리새인입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도덕적인 죄를 지어서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범죄를 했기 때문에 주님이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가 무엇인가 하면 그들이 지켰던 율법의 의를 보고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그들은 범죄를 했습니다.
아담과 같은 범죄를 했습니다. 아담의 한 범죄로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그것을 요한일서에서는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무슨 죄를 짓게 하는 줄을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것은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럼 아담의 한 범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하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범죄를 했고 그것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146쪽)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정죄가 무엇인가 하면 요한복음에서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 범죄가 무엇입니까?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을 도덕적인 죄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범죄는 도덕적인 범죄가 아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악과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범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만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우리 역시 복음이 오기 전까지는 정죄를 이르는 범죄를 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단순히 도덕적으로 죄를 진 것이 아니라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 되어서 정죄에 이른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정죄입니다
예수님께서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를 정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마귀이 자식인가 하면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마귀의 자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죄에 이릅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면 정죄에 이릅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더 사랑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면 어두움에 있지 않고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다는 뜻으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합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구를 더 사랑하고 누구는 덜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빛에 있으면 어두움을 미워하고 어두움에 있으면 빛을 미워한다는 말씀입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해서 많은 사람이 율법을 지키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을 바로 알지 못하면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다가 사망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것으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이 정죄는 빛이 세상이 왔으되 사람들이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어두움을 더 사랑했는가 하면 마귀의 자식들인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서 어두움을 더 사랑했다는 말씀입니다
정죄를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누구를 정죄를 하셨는가는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바리새인들이 정죄를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문제는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이 지키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았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것과 의의 한 행동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에 이르는 범죄를 많은 사람이 지었지만 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합니다.
요한일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90쪽)
“그가 우리 죄를 없이 하려고 나타내신 바 된 것을 너희가 아나니 그에게는 죄가 없느니라”
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의의 한 행동입니다 한 범죄는 육체의 사람을 대표하는 아담의 범죄입니다 그리고 의의 한 행동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의입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습니다. 그 정죄로 사망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한 범죄와 의의 한 행동을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세상의 이성이 아닙니다. 세상은 내가 죄를 지었으면 내가 죄 값을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의로운 행동을 했으면 내가 의롭다 함을 받습니다. 내가 의로운 행동을 했는데 다른 사람이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진토인 사람의 대표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의 생명의 대표입니다 이 두 사람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육체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입니다 그리스도도 육체라면 이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기 때문에 의의 한 행동으로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사람인 아담을 대표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표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범죄입니다
아담의 사람은 모두가 이 한 범죄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의의 행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은 이 의의 한 행동에 속하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사람이 아담의 사람도 되고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아담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한 범죄의 영향을 그대로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의의 한 행동을 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아담의 사람이 의의 사람이 된 것으로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습니다.
죄가 없다는 말씀은 의롭다는 말씀입니다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과 같이 의의 한 행동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습니다. 이 생명은 육체의 생명이 아니라 영의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5: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한 사람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으로 판정을 받았는데, 이제는 한 사람이 순종함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으로 판정을 받을 것입니다.”
한 범죄입니다
그리고 의의 한 행동입니다 이것을 이제 한 사람이 순종치 않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과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담의 사람입니다
육체의 우리는 아담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아담과 예수 그리스도를 비교를 하면서 우리 아담의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어서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을 얻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지음을 받았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하늘로서 오셨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왜 사도 바울이 두 사람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우리에게 영의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어떻게 해서 되어질 수 있는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아담의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아담의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해도 아담의 사람입니다 그것이 변화가 되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영의 생명을 의인화를 시켜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영의 생명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기록이 의인화로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 마치 우리 사람과 같이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의인입니다
이 세상에서 말하는 그런 의인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의로운 일을 한 사람을 의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의인은 우리 사람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으로서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과 같이 한 사람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같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볼 때는 국어를 공부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습관적으로라도 사전을 찾아보시기를 바랍니다. 같이 라는 단어를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앞에 있는 것과 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이제까지 배웠습니다. 그것과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과 의인이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본질의 것입니다 하지만 의인이 되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죄인의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그것과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말씀의 의미를 알려고 하기보다는 그 단어를 아는 것으로 미사여구를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디모데전서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38쪽)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순종
순순히 따르는 것을 사전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순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순종이라고 하면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잘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순종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다 그와 같이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에서 우리가 알겠지만 순순히 따르는 것이 순종입니다
무엇에 순순히 따릅니까?
아무 것에나 순순히 따르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들이 있습니다. 그 아들이 순종한다고 하면서 아버지의 말을 듣지를 않고 옆집 아저씨의 말을 잘 듣는다면 순종한다고 할 수 없습니다. 옆집 아저씨의 말은 잘 안 듣더라도 아버지의 말을 잘 들으면 그 아들은 아들로서 순종한다고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아버지의 말은 안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무 상관이 없는 옆집 아저씨의 말은 아주 잘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눈이 다 소경이 되어 있다 보니까 자기가 누구에게 순종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무엇입니까?
물론 성경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왜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믿는 것이 아버지의 뜻이고 순종하는 일입니다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합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자기가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해야 하는 순종입니다
아담입니다
그가 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까?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인이 되어서 쫓겨났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했는가 하면 구원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아담은 순종치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죽는 것을 원하신 것이 아니라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선악과입니다
그것을 따 먹은 것은 생명에 대해서 순종치 않았습니다. 그냥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어느 말씀을 순종치 아니한 것이 아니라 구원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아담은 죄가 없는 상태로 지음을 받았으니까 선악과를 따 먹지 않으면 영생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영생에 대해서 순종을 하지 않아서 정녕 죽고 말았습니다.
구원입니다
행위를 하는 것을 가지고 순종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이 세상 사람도 아는 초보입니다 그런 초보적인 행위를 하면서 순종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이것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을 하려면 믿어야 합니다. 다른 어떤 행위를 잘했다 해도 그것은 사람의 이성에 따르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여러분은 순종하지 않은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에 정녕 죽으리라는 그 말씀대로 사망이 왕 노릇 했습니다. 아담에게 순종은 선악과를 따 먹지 않고 에덴에서 생명나무의 과실을 먹으면서 영생을 하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지 못 했습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행위를 해도 하나님께 순종할 수 없습니다. 순종할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는 그것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순종의 의미도 모르고 그저 행위를 잘하는 것이 순종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도리어 그 행위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순종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 순종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그것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순종에 대해서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순종을 하는 것인가를 성경에서 먼저 알고 나서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그것도 모르면서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순종한다고 하는 것은 도리어 그 행위로 순종치 않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순종치 않았습니다.
아담은 구원을 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이미 에덴에 있었습니다. 그가 순종하는 것은 선악과를 따 먹지 않는 일입니다 선악과만 따 먹지 않으면 그는 에덴에서 영원히 살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실 아담은 이미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정녕 죽지만 않으면 됐습니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다 아니 구원을 잃어 버렸습니다. 에덴은 천국을 예표 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아담은 순종치 않아서 그 에덴에서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하는가 하면 구원에 있어서 순종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무엇에 대해서 순종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순종이라는 단어를 보면 행위를 떠올리고 있습니다.
시편51:14절을 보겠습니다. (구 839쪽)
“하나님이여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여 피 흘린 죄에서 나를 건지소서 내 혀가 주의 의를 높이 노래하리이다”
요한복음14:10절을 보겠습니다. (신 172쪽)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구원의 하나님이십니다.
시편을 보면 구원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입니다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사단에게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왜 하나님을 믿는가 하면 구원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믿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만약에 이 구원이 없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성경을 왜 기록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시는 가를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생명이고 그 생명의 부활입니다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왜 오셨습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주님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만약에 우리의 구원이 없다면 주님은 괜스레 이 세상에 오신 것이 되고 또 십자가도 괜히 혼자서 지신 것밖에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입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이 다 아버지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고 그 일을 위해서 순종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아담은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순종하지 않아서 우리가 죄인이 되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고 사망이 찾아왔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의 일을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육체가 아니라 영으로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아버지의 일을 순종하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순종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일에 있어서 순종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육체가 의인이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한 사람의 순종으로 우리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아담 한 사람입니다
그가 순종을 하지 않음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성경에서 규정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 한 사람은 순종치 아니함으로 죄인이 되어서 의인이 하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셨습니다. 그럼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라고 하니까 마치 아담의 자손이 다시 의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죄인은 어떻게 해도 다시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죄인입니다
세상 말에 걸레는 빨아도 걸레라는 비속어가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죄인은 어떻게 해도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같이 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그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와 같이 입니다.
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그와 비슷하게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성경의 비유와 예표를 잘 깨달아야 합니다. 아담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죄인인 되었습니다.
그와 같이 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순종하심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이 많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아담의 자손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자손은 의인입니다 아담의 자손은 육체를 말씀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자손은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교입니다
똑같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은 육의 사람이 있고 영의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육의 사람도 되고 영의 사람도 됩니다. 그러나 이 영의 사람은 지금 내 육체가 느끼지도 그렇다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으로 내 마음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5:53절을 보겠습니다. (신284쪽)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
썩을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썩지 아니할 것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습니다.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이 썩을 것은 그대로 썩고 그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입는다는 단어를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치 옷을 입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거의 단어로만 보다보니까 이런 단어를 보면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썩을 것이 무엇을 입어서 의인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바른 설명을 하면 이렇습니다. 이 썩을 것이 신비하게도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정말 이해할 수 없지만 죽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는 말씀입니다
의인이 되었습니다.
마치 내가 의인이 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담의 혈통을 따라 난 나는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썩을 것이 불가능하지만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 안에 새로 탄생이 되는 영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입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영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것을 설명을 하려고하니까 이렇게 밖에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이렇게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초보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책을 보듯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미가 있습니다. 그 의미를 아는 것이 중요하지 단어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면 이제 그런 초보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도리어 점점 더 초보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합니다.
세상의 책은 점점 더 난해하게 깊이 파고 들어갑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상할 정도로 점점 더 문자에 집착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의미를 알려고 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점점 더 매너리즘에 빠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어른이라고 있다 보니까 감히 어느 누구도 그 매너리즘을 깨지 못하고 있습니다.
늙은이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 성도가 늙은이가 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보면 볼수록 그 깊이와 넓이와 높이가 우리의 상상을 뛰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교회 안에 늙은이들이 많아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져 타락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제가 나이 많으신 분들을 폄하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니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을 알기 위해서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신학 박사입니까? 내가 목사입니까? 그런 것을 여러분이 버리지 못하면 절대로 성경에서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성도는 겸손해야 합니다. 내 지식을 자랑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소경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5: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율법은 범죄를 증가시키려고 끼여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무지합니다.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를 모릅니까? 사전적으로 우선 말씀을 드립니다. 물체가 빛을 가리어 물체의 뒤에 나타나는 검은 형상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실제 물체가 있습니다.
그러면 빛이 비추게 되면 빛을 가리어 나타나는 형상이 그림자입니다 우리가 그림자를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느 것은 실제 그 모습 그대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은 전혀 다른 형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림자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율법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그림자로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실제 그 모습 그대로 보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림자는 실제와 다르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율법은 장차 오는 좋은 일에 그림자라고 말씀을 해도 그것을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지를 않고 스쳐 지나가듯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이 세상 책에 불과합니다. 아니 세상 책보다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차라리 세상 책을 보면 그저 죄인으로 살다가 죽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순간에 악인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책입니다
그것은 죄인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문자는 악인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이스라엘이 성경을 보고 악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가 하면 성경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지 않았다면 그들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이지 않았습니다.
누가 악인입니까?
성경을 너무 잘 알고 있는 그들이 최고의 악인이 되었습니다. 시편에서 천만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그와 같이 다수가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했는가 하면 바로 율법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을 이 시대 똑같이 보고 있습니다.
무엇이 먼저입니까?
믿음이 먼저 입니까? 율법이 먼저 입니까? 아니 하나님과 우리 사람과의 사이에 누가 있었습니까?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이 끼어 들어왔습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언제입니까? 율법이 있기 전 500년 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율법에 가입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 우리에게 가입을 했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우리가 율법에 가입한 것으로 생각하고 그렇게 보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4장에서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표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 끼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가입을 했든 율법이 우리에게 가입을 했든 어찌 되었든 율법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으려고 하는 성도들에게 끼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왜 율법이 가입을 했습니까?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더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어느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3장에서 거의 비슷한 말씀이 있습니다. 20절에서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면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장은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5장에서는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죄와 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범죄는 다릅니다. 성경이 참 어렵습니다.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3장의 말씀과 5장의 말씀을 같이 해석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5장입니다
이제까지 무엇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까? 범죄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이 범죄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말씀들을 여러분이 깨닫지를 못하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3장에서 말씀한 것을 5장에서 다시 강조를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죄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우리는 먼저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십계명을 보고 죄를 깨달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십계명을 보고도 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고 죄를 깨달아야 그 다음에 5장으로 와서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는 말씀을 깨달 수 있는데 3장부터가 풀리지가 않고 있습니다.
차례입니다
먼저 해결이 되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에 다음 것을 해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앞에서부터 전혀 해결이 안 되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제까지의 로마서 강해를 보면 빤합니다. 3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는 그 말씀도 제대로 풀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율법이 가입을 하겠습니까?
최소한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성도에게 율법이 가입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십계명을 보고도 죄를 깨닫지도 못한 사람에게 율법이 가입을 하겠습니까? 율법으로 죄를 깨달아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혜가 되어서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가 어떻게 받았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것도 모르는 사람에게 율법이 가입을 하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신명기24:1-4절을 보겠습니다. (구 298쪽)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온 후에 수치되는 일이 그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거든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낼 것이요 그 여자는 그 집에서 나가서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려니와 그 후부도 그를 미워하여 이혼 증서를 써서 그 손에 주고 그를 자기 집에서 내어 보내었거나 혹시 그를 아내로 취한 후부가 죽었다 하자 그 여자가 이미 몸을 더럽혔은즉 그를 내어보낸 전부가 그를 다시 아내로 취하지 말찌니 이 일은 여호와 앞에 가증한 것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으로 너는 범죄케 하지 말찌니라”
율법이 가입을 했습니다.
왜 율법이 가입을 했는가 하면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율법이 가입이 안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들이 율법에 가입을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전혀 다릅니다.
율법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데 가입을 하는 것과 사람이 율법에 가입을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도 고민도 하지 않는 그런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목사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범죄가 있습니다. 3장에서 죄를 깨달음이라고 하는 말씀과 5장에서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고 하는 말씀은 전혀 다른데 이 시대 목사들은 아니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한 거의 모든 목사들이 같이 해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이런 기초를 모르게 되면 그는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죄를 혹시 깨닫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범죄를 더하게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성경을 보면서 마치 이 말씀을 다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교인들은 목사의 말이라면 독약을 섞어서 먹여도 아멘으로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의 율법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이미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그 설교를 보신 분들은 이해가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는 영생을 얻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은 다 보아야 합니다. 정말 간곡하게 부탁을 드리지만 그 말씀들을 다 보아도 구원을 받는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어느 한 말씀만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서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도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들이 이 시대 가장 복음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최소한 이 말씀들을 보고 나서 영생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그림자는 비유라는 말씀입니다 그림자를 보았으면 그 뒤에 있는 사물의 실체를 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 그림자의 형상을 보고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율법은 지금 이 시대와는 전혀 맞지 않아서 사람들이 아마 이런 율법이 있는지 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사람이 아내를 취하여 데려왔습니다.
이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리고 아내는 누구입니까? 아마도 거의 모든 사람이 이 율법을 보고 문자 그대로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혼인에 대해서 이렇게 하라고 율법으로 정해 놓았다고 생각하고 혹시 누군가 이 율법을 보고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할 것이 분명합니다.
사람입니다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을 온전히 다 지켜서 받을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두 가지의 방법을 비유로 많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그렇고 예수 그리스도도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둘을 지금 신명기에서 그림자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가지가 있는데 율법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둘을 사람으로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내가 있습니다.
이 아내는 진짜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 성도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를 비유로 해서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제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인데 어떻게 범죄를 더하는가를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우리 인생은 나면서부터 다 율법 아래 있습니다.
우리가 나면서부터 복음을 깨닫고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의 아내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따라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비유로 해서 사람의 아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내입니다
율법의 아내도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도 됩니다. 아니 먼저는 율법의 아내였다가 나중에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사는데 수치가 발견이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수치가 발견이 되면 죽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죽이지 못하게 하시고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어느 누구도 우리는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수치가 발견이 되면 율법을 범하면 죽여야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이혼 증서를 써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집에서 내어 보냈습니다. 더 이상 율법을 지키면서 살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혼자 살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 다른 사람이 누군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남편이 있습니다. 영적으로는 두 남편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두 남편이 있습니다.
남편에게서 내어 쫓김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이제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하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었어도 우리는 역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랑을 받을 수 없는가 하면 율법으로 죄를 범했기 때문에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는 미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버리시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를 버리시지 않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해야 할 수치를 대신 당하시면서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참으로 율법은 우리에게 놀라운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율법을 보면서도 모두가 소경이 되어서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아주 영원히 죽은 것은 아니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어찌 되었든 이 세상에서는 죽으셨습니다. 더 이상 우리가 눈으로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영으로 살리심을 받아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지금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아니 우리를 아내 삼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우리의 수치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이제 하늘에 올라 가셨습니다. 그 후부가 죽었다고 율법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곁에 계시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입니다
전부는 우리의 수치 때문에 우리를 버렸습니다. 아니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고 나서 후부의 아내가 되었는데 후보가 죽고 이제 우리가 남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율법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전부가 다시 우리를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모두가 전부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보고 그것을 깨닫지를 못해서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범죄입니다
그것도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을 하는 범죄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을 보고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도무지 이 말씀을 깨닫지를 못해서 모두가 율법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아서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주님이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신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서에서 두 남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남편이 누구라는 것쯤은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에서 두 남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신명기의 말씀을 보고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을 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율법을 보았으면 범죄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 범죄가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범죄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하는 것이 다 범죄입니다
율법이 가입을 했으면 범죄가 더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율법을 보고도 범죄가 더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그 범죄를 짓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왜 범죄가 더해야 하는가 하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입니다 이 율법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은혜가 넘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실 우리가 이 율법을 알고 나니까 얼마나 은혜가 되고 있습니까?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가 더해졌습니다. 우리가 예전에는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복음이 없을 때는 그런 가증한 일을 하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그 가증한 일을 더 많이 하려고 노력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가 지금 어떻게 이 복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정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와 성도는 다릅니다. 가라지는 사단이 어떻게 해도 하나님께서 그냥 두십니다. 그러나 성도에게 있어서는 사단에게 율법대로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버렸습니까?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 율법을 안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로서 난 자는 이 율법대로 율법이 우리를 다시 아내를 삼을 수 없으니까 우리가 복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지킬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율법이 우리를 다시 아내를 삼지 말라고 율법에 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은혜입니다
율법이 가입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율법을 알았습니다. 알고 보니까 우리가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을 하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을 하면서도 율법이 가입을 하지 않아서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 줄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은혜가 더욱 넘치겠습니까?
이 율법을 깨닫는 성도와 그렇지 못하는 사람과 누가 은혜가 더욱 넘치겠습니까? 이렇게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가 더한 사람은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비단 이 율법 하나뿐 아니라 거의 모든 율법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범죄가 더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모릅니다.
범죄가 더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상태에서는 범죄를 더하고 싶어도 더할 수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범죄도 더하지 않고 은혜도 넘치지도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아무 것에나 은혜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도덕적인 죄가 아닙니다.
물론 그것으로도 우리는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초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에서 이런 범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이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알아야 은혜가 더욱 넘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무지 합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보던 율법과 이 시대 교인들이 보는 율법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들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고 이 시대 역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들이 안식일을 지키고 있고 이 시대 교인들 역시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이 원치 않는 제사를 드리는 일에 열심을 냈고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 남편에서 다시 돌아가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은혜라는 말을 감성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것은 은혜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단 하나의 율법입니다
그것을 미화시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 성도로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이 성립이 될 수 있습니까?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가 더한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단 하나의 율법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5: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6쪽)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죄가 죽음으로 사람을 지배한 것과 같이, 은혜가 의를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려는 것입니다.”
한 가지 율법만 예로 들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보면 범죄가 더하는 율법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면 이제 초보에서 벗어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더욱 넘치게 받아야 합니다.
죄가 사망에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무슨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짓는 도덕적인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범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왜 지켜서는 안 되는 가를 율법이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가증한 일입니다
도덕적인 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범죄가 여호와 앞에 가증한 일입니다 그런 가증한 일을 하고 있는 이 시대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를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왜 죽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절대적인 다수가 자기들이 왜 죽는지도 모르고 평생을 교회 안에서 범죄만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 행위가 얼마나 가증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악합니까?
세상 사람이 악합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악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가증한 일을 하는 사람이 더 악하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저주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세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생입니다
교회 안에서 영생을 얻지 못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가증한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을 했으면 그 율법을 보고 가증한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모르다보니까 사망이 왕 노릇하고 있는데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여러분이 믿음이라고 하면서 지키고 있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이 그리고 행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망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는 범죄를 교회 안에서 마음껏 지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이 시대 교인들은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성경에 은혜라는 단어가 얼마나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가장 먼저 은혜를 받은 자가 노아입니다 그러나 이 은혜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노아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어디서 은혜를 받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체가 되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여호와 앞에서 가증한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다고 하면서 여호와 앞에서 가증한 일을 하면서 육체가 되었습니다. 모두가 육체가 되어 있는데 하나님께서 노아 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율법이 가입을 해서 범죄가 더하게 했다는 말씀입니다 노아는 범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았고 그래서 자기도 역시 범죄를 했는데 그 죄가 더했습니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습니다. 노아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욥이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세상에서 가장 율법을 잘 지킨 사람입니다 그 범죄가 넘치는 욥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구원해 주시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우리가 보고 있는 욥기입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성도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 지키셨습니다. 그래서 의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의가 있는 성도는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그 의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율법을 모르면서 은혜라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알아야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율법을 주님께서 지키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있습니다. 그 의를 우리에게 주셔서 가난한 우리를 부요하게 하셔서 왕 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도무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싶어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주님이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 의가 우리 안에서 왕 노릇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늘 깨어 성경에서 이 영생에 대해서 알기를 사모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더욱 넘치게 될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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