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5: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은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는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생명을 주시는 가를 알고 있다면 은혜는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영의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성령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이 생명은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으로 난 생명과 영으로 난 생명이 어떤 연결 고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전혀 다른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이 생명에 대해서 어정쩡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고 사람들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 하고 있습니다.
내 생명입니다
천국에 가서 영원히 사는 아니 주님이 오실 때 영접을 받아야 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에 대해서 모르게 되면 주님이 오셨을 때 그는 영접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생명이 탄생이 됨으로 해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를 강해를 하면서 계속해서 이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 예정입니다 하지만 이제까지 수십 년을 신앙생활을 했어도 이 생명에 대해서 처음 듣는 사람들이 많아서 받아들이기가 쉽게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신사적인 성도는 이 말씀이 성경과 맞는가 하면서 묵상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이 문제만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대 교회가 왜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들어가 있는가 하면 이 구원에 대해서 생각을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저 역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구원을 끝까지 붙잡으려고 성경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아는데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습니다.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해서 이제 끝이 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붙잡으려고 늘 성경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못 받아서 붙잡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확증하기 위해서 입니다.
성경입니다
그 문자를 아는 것으로 마치 내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성경을 보고 구원을 받는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성경이 그것을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우리가 믿음에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4장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이 이 믿음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믿음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고 서 있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 하면 영의 일은 믿음이 아니고는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지 않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사람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늘 확증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믿음에 서 있는가를 늘 확인을 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율법의 행위에 빠지고 외식을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정말 믿음에 서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의 행위를 하고 그것이 결국에는 사망에 이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성경을 보면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은혜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에서 말하는 그런 구원이 아니라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을 받으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구원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은 주님이 오셨을 때 반드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역사를 해서 우리에게 믿어지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영광이 어떤 영광이라는 것을 분명히 믿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이 주님이 오실 때 주님과 같은 형상으로 화해서 영광으로 영광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깨끗한 영이며 하나님의 영이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이 주님의 날에 신령한 몸을 입는 그것을 성도는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누가 믿을 수 있습니까?
이 시대 교인들에게 말씀을 드려도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 신체의 구원을 생각하고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부활을 한다고 하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이 영의 부활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혈과 정에 매여 있는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더구나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의 행위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행위로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은 그 행위를 가지고 주님께 가려고 하기 때문에 그 행위와 아무 상관이 없는 그리스도의 영이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제까지 해온 신앙생활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것은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 안에서 이루시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서 영광을 돌린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 역시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 영광에 참여를 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에게 임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영광과도 비교할 수 없는 그런 영광이 우리 성도들에게 부활의 형상으로 화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대통령입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설령 대통령이 된다 해도 포기를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버릴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설령 그런 일이 있다 해도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영광스럽다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에 그 영광을 바라면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비록 거지 나사로와 같이 살아갈지라도 우리는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다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재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분복대로 살아가면 됩니다. 그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어도 교회 안에서 행위로 부자가 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있다는 것은 부자가 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을 안 지킵니다. 그리고 외식의 모양도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또 성화가 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는 저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가 할지 몰라도 우리는 그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다 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그것을 다 버린다는 것이 쉽지 않지만 성령이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기뻐합니다. 고통은 인내를 낳고”
성도입니다
육체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입니다 세상이 우리를 받아들일 수 없고 세상이 이해를 하려고 하지도 않습니다.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광을 바라고 사는 대신에 세상에서는 고통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은 초대교회가 아닙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만약에 우리가 이런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을 누가 알았다면 우리에게 많은 고통이 왔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민주국가에서 살아가고 있고 종교의 자유가 있어서 설령 우리를 세상이 안다 해도 우리에게 고통을 가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적습니다.
저는 솔직히 많은 숫자가 모이는 것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많은 숫자가 모이면 세상에 알려지게 되고 분명히 고통이 따르게 되어 있고 그 중에서는 믿음을 버리는 사람도 있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섭리이기 때문에 저도 모르겠지만 그리스도편지가 세상에 그렇게 많이 알려지는 것도 바라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이 영광에 참여를 하는 성도는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육체의 생명까지도 빼앗기는 고통을 당했다는 것을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런 고통은 당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꿩 먹고 알 먹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면 고통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꿩 먹고 알 먹으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생명을 주시는 성도는 그것만을 바라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환난이 옵니다.
어떤 모양이든지 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 환난이 왔을 때 믿음이 있는 성도와 버리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성도들이 환난을 당하는데 그 환난을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즐거워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18:6절을 보겠습니다. (구 813쪽)
“내가 환난에서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도다”
시편입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고 있습니다. 시편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실 일들을 말씀하고 있는 내용들이 많이 있습니다. 시편18편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으로 다윗이 시를 썼지만 실상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음부의 줄이 나를 두르고
사망의 올무가 내게 이르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다윗 개인의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편의 말씀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당하시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윗을 통해서 주님을 보여주시고 있는 말씀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어떠한 환난을 당했는가는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율법주의자들인 이스라엘에게 의해서 채찍을 맞으시고 또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사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가장 고통을 받는 사형제도였습니다 사망의 올무가 주님에게 임해서 환난을 당하는 것을 다윗을 통해서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분은 우리를 위해서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듯이 주님 개인의 문제라면 절대로 이 환난을 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열두 영이 되는 천사를 부르셨으면 어느 누구도 감히 주님을 잡을 수 없었고 십자가에서 죽일 수도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가 강대합니까?
아무리 그 국가가 강하더라도 열두 영이 되는 천사가 온다면 그 나라를 무너뜨리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 세상에서 오셔서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왜 십자가를 지셨는가는 성경은 계속해서 우리를 위하여 지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환난이 왔어도 우리를 위하여 피하시지 않았습니다.
영의 성도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영광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받는 영광이 아니라 내세의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이 세상의 어느 영광에도 비교할 수 없는 영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영광입니다
아니 주님께서도 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영광을 받으셨습니까?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셨습니다. 사망의 올무를 받으시는 환난을 당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설령 우리가 로마 시대에 산다고 해도 마찬가지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런 환난이 와도 성령이 붙들어 주시고 있는 성도는 기꺼이 그 환난을 받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힘으로는 믿음을 버릴 수밖에 없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해 주시면 어떠한 환난이 온다고 해도 그것을 받을 수 있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누가 그런 환난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저 역시도 솔직히 자신이 없습니다. 만약에 지금 저에게 로마 시대와 같은 그런 환난을 받으라고 하면 인간적으로는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으로는 못하지만 성령이 우리 안에 오시면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 할 수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시편에 있는 말씀과 같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것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께서도 우리 인생들과 같은 육체를 입고 오셔서 그것을 피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 환난의 고통이 얼마나 크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 기도를 하셨습니다.
환난이 올 수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환난은 올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에게 환난이 온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는 성도라면 어떠한 환난이 오더라도 그것을 인내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까지는 우리 성도들에게 너무도 평안한 때를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가 세상에 알려지지가 않아서 환난을 당하지 않을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주님의 말씀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게 된다면 환난을 당하지 않고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설령 환난이 오더라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환난 중에 여호와께 아뢰며 나의 하나님께 부르짖었더니 저가 그 전에서 내 소리를 들으심이여 그 앞에서 나의 부르짖음이 그 귀에 들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를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영광을 받으셨다는 말씀입니다
환난이 옵니다.
우리는 반드시 기도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부르짖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를 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영의 일을 바라고 살아가고 있는 성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천국입니다
그것을 얻는 성도는 세상을 기꺼이 버릴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물론 인간의 정과 그리고 혈이 붙잡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능력은 그것을 이기고도 남습니다. 우리가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는 그 전에서 들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4:17절을 보겠습니다. (신 290쪽)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성도는 환난을 받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일을 당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거꾸러뜨림을 받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이 이러한 환난을 받고 살아가지만 우리가 잠시 받은 환난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율법주의입니다
그들과 성도는 서로 생각이 다릅니다. 전혀 다른 것을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시편에서도 예수님이 어떻게 되실 것을 미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개들이 나를 에워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복음을 가지고 말씀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율법주의자들은 우리를 우겨쌈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진리와 비진리가 싸웁니까? 절대로 못 이깁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고 사람들이 진리를 알고 있다 하면서 이길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전하면 진리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로 이길 것 같습니까?
성경의 문자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우리가 전하는 진리를 들을 수 있습니까? 그들이 성경에 문자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우리는 더 이상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문자 그대로도 얼마든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우리 성도가 비유를 풀어서 진리를 말씀하면 도리어 성경을 알레고리하게 푼다고 하면서 이단이라고 공격을 받게 되고 있습니다.
절대 이기지 못 합니다
그들이 성경에 있는 문자를 가지고 말을 하면 우리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왜 개들에게 에워싸이셨습니까? 바로 율법의 문제입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가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주의자들은 우리를 우겨 싸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합니까?
성경에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런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비유로 되어 있는 말씀이 풀어지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것을 전하면 율법주의자들에게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갈라디아서 강해를 통해서도 알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입니까? 그러나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할례를 받게 하니까 그것이 악한 일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밝혀서 말씀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과 이 문제를 가지고 결론을 내릴 수 있었습니다.
안 됩니다
진리는 율법에 의해서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에서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을 가지고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설교를 다 하기도 전에 끌려 내려올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울도 이런 환난을 당했기 때문에 고린도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사람들이 아! 우리가 몰랐던 것을 가르쳐 줘서 감사하다고 할 것 같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고 도리어 대적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예레미야도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를 하니까 이스라엘이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했습니다. 답답하여 견딜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가장 안타까운 일이 가족입니다 그 가족들이 진리를 들으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합니까? 그래도 가족이라도 이 진리를 들었으면 좋겠는데 가족까지도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환난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을지 몰라도 이것 역시 우리에게는 환난이 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이 진리를 빨리 전해서 그들을 구원받게 하고 싶은데 전혀 들으려고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하는 그 자체가 환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리를 전하면 쉽게 사람들이 받아들일 것 같지만 도리어 강하게 반대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다가 얼마나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까? 특히 유대인들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율법주의자들에게 핍박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지금 이 시대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 하고 주일을 지키는 행위가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듣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핍박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핍박을 받습니다.
제가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핍박을 받더라도 이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런 핍박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들이 자기 생명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복음을 전해서 지금 우리가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을 받아 믿음으로 의를 얻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 의는 사람이 이성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율법의 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의를 전하면 핍박을 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을 두려워하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면서 복음을 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거꾸러뜨림을 당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있어 우리는 반드시 거꾸러뜨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이러한 환난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더구나 복음을 전하면 이 환난은 직접적으로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주의자들을 당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지라도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성도는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런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이 우리의 잠시 받은 환난이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경한가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면 그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잠시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도 너희는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안개에 너무 애착을 갖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안개와 같이 잠시 보이는 것의 환난을 견디지 못한다면 그는 영원히 받을 영광이 어떠한 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복음을 전합니까?
아니 우리에게 복음이 있습니까?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까? 그러면 이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까지 거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이 환난을 당하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아무리 크다 해도 우리가 받을 영광에 비할 수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성령 안에서 주의 만찬을 나눈다 해서 누가 환난을 주지도 않고 있습니다. 이런 좋은 환경에 있으면서도 복음을 전하면서 약간 받는 그 환난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 환난이 두려워서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저버리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꼭 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으면 해야 합니다. 구원은 설령 주님이 우리에게 부탁하신 그 일을 하지 않을지라도 받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만찬을 나누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가 이 세상에서 환난을 받는 것을 당연하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환난을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영광이 크다는 것을 알면 기꺼이 받을 수 있습니다.
시편27:5절을 보겠습니다. (구 820쪽)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성경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환난을 당할 때 지켜주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의 은밀한 장소가 있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실제 그것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구약은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비유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에 성도들이 가장 받아들이기 힘든 것이 있었습니다. 분명히 다니엘서를 보면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건져 주시고 또 그 친구들을 풀무 불에서 지켜주셨습니다. 그런데 초대 교회에 성도들이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죽게 그대로 두셨습니다.
구약은 육의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이 시대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우리는 믿을 수 없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는 것이 바른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그 비유를 모르게 되면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구약을 아니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입니까?
그것은 이 세상의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마치 그것이 진리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경의 문자를 듣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만약에 그것이 진리가 된다면 이스라엘은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환난을 당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환난 날에 나를 초막에서 지키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종말의 환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지키십니까? 내 육체를 지키신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나를 지키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탄생이 되어 있는 나를 지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 육체를 지켜서 무엇 하겠습니까? 어차피 한번 죽는 것은 정해져 있고 또 썩어 없어집니다. 그런 육체를 지켜주셔서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습니까?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무엇을 말씀하는 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의 나를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장막의 은밀한 곳에 나를 숨겨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육체를 그렇게 하겠다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는 내 영을 그렇게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를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지켜 주어 보아야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자기의 무엇을 지켜 주시는 줄도 모르고 그 장막에 숨겨 주시는 줄도 모르고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성도는 환난을 당합니다.
우리 겉 사람은 반드시 환난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때로는 우겨쌈을 당하게 되어 있고 때로는 답답한 일을 당하게 되어 있고 때로는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고 때로는 거꾸러뜨림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 영은 지켜 주시고 있습니다.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을 생각하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육체에 너무 깊이 빠져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을 자기들의 육체로 연결을 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육체는 환난을 당하게 하시고 내 안에 탄생이 되는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하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2:19-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9쪽)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성도는 환난을 받습니다.
그 환난이 세상 사람이 보기에는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진리를 알면 애매히 고난을 당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무 잘못 없이 누명을 쓰거나 책망을 받아 억울하게 환난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전하는 복음이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율법주의는 죽이는 일입니다
그러나 성도가 전하는 복음은 살리는 일입니다 사실 얼마나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진실 되게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애매히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당하지 말아야 하는 환난을 당하는 것이 우리 성도입니다 율법주의자는 사람을 죽이는 일을 하면서도 도리어 그 세력이 크다보니까 성도들을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참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인내를 해야 합니다. 설령 환난이 온다 해도 우리에게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조건 참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보면서 세상에서 바보 같이 무조건 양보를 하고 참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 일이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있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고난을 받고 참으라고 하니까 마치 세상일을 하다가 자기에게 고난이 오면 참으라고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것도 성도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참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가 애매히 고난을 받는 그 일에 인내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을 사는 것으로는 애매히 고난을 받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다 원인과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은 정말 애매히 받는 고난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을 받을지라도 참으라고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참습니까?
우리가 참음으로 해서 한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다면 기꺼이 참아야 합니다. 진리는 율법주의에 의해서 반드시 애매히 고난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생각이 율법주의인데 그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해 보시기 바랍니다.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의 행위가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법정에 가도 우리는 지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교회가 타락을 했어도 이 문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하면 세상 사람도 기독교를 편들지 우리를 편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리를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지혜가 그들보다 더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 은혜를 입게 함으로 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은혜를 받은 성도는 애매히 고난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하나님을 믿으면서 애매히 고난을 당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슬픕니다.
우리가 전하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가슴이 아픕니다. 그럴지라도 참으면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환난이 우리를 인내하게 하고 있습니다. 오래 참게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참습니까?
그것이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아름다운가 하면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광을 누리는 것이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복음도 모르면서 자기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고난을 받습니까?
율법주의자가 고난을 받습니까? 물론 그들도 때로 고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고난은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받는 고난이지 애매히 받는 고난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이 애매히 받는 고난이지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그것을 누리기 위해서 받는 고난은 애매히 받는 고난이 아닙니다.
간증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애매히 고난을 받은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런 고난을 받고 자기들이 종교생활을 잘 했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들이 이 세상에서 누리는 종교적인 즐거움을 위해서 받는 고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런 고난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애매히 받는 고난을 모릅니까?
아무 잘못이 없는데 고난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아무 잘못이 없는데 고난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진리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그런 종교를 위해서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방해를 받는다고 해서 애매히 고난을 받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것이 종교가 되는 일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낳습니다.
우리가 환난을 받음으로 해서 인내력이 생긴다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애매히 환난을 당하면 그 환난으로 더욱 인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가 세상에서 복음을 전하는 일이 그렇습니다. 하늘의 상을 받으면 세상에서 받는 고난쯤은 당연하게 받는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도 고난을 받는데 우리는 천국의 상을 받은 성도가 아닙니까?
로마서5: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5쪽)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낳고 그러한 끈기는 희망을 낳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인내를 하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애매히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환난이 인내를 낳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받는 환난으로 인하여 더욱 인내할 수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가기까지는 정말 광야와 같은 삶이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곳은 축복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 시대는 교회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기복주의가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이 세상에서 복을 받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서 이러한 복을 받았다는 간증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어서 복을 받았습니까?
물론 구약에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예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 말씀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초대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이 세상에서 복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그렇다고 사도들로부터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은 성도들이 복을 받았습니까? 복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에서 고난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고 그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를 함으로 해서 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도가 성도들로부터 십일조를 받았습니까? 신약에 와서 어느 사도가 받았다는 말씀이 있습니까? 초대교회에서는 십일조를 내지도 않았고 또 이 세상에 복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세상의 복을 받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 복이 저주로 온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그것은 광야 40년 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모형으로 가나안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가나안에 들어가기 까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40년을 살았습니다. 불과 15일 정도면 들어갈 수 있는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해서 광야에서 40년간을 인내하면서 살았습니다.
교회는 축복의 장소가 아닙니다.
천국을 바라보면서 인내를 해야 하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가 축복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너무 부자가 되어서 그 돈을 주체를 하지 못할 정도가 되니까 그것을 자기들의 생각에 좋은 일에 쓰겠다고 하면서 선교를 하고 있습니다. 개 같은 자의 소득을 십일조로 받아서 선교를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입니다
어떻게 합니까?
자기들이 한 행위를 가지고 마음껏 자랑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넘치는 돈으로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고 또 거기를 다녀와서 자기들이 한 행위를 가지고 자랑을 하면서 마음에서는 한껏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회가 인내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넘치는 부를 주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있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사실 그런 돈이 어디 있습니까? 초대 교회를 보아도 사도들이 얼마나 어렵게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지금과 같이 십일조를 받고 선교헌금을 받고 예배 때마다 여러 가지 명목으로 헌금을 받았다면 사도들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초대교회에 성도들은 그렇게 부자가 없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받는 인내를 말씀하는 것이지 세상에서 종교 활동을 하는 그런 인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은 너무 불쌍합니다.
그들이 얼마나 인내합니까?
솔직히 교회에서 요구하는 것을 하기 위해서 그들은 정말 먹을 것 안 먹고 입을 것 안 입고 누릴 수 있는 것 안 누리고 다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인간적으로 인내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데 주님이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게 된다면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내가 아닙니다.
그것을 인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아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믿음을 굳세게 세우기까지는 많은 미혹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입니다
보기에 얼마나 좋습니까? 지금과 같이 근사한 예배당이 있고 그 안에는 성가대가 있고 또 여러 가지 사람을 감동시키기 좋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얼마나 좋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들이 사람에 이성에 옳게 보이고 또 종교는 그렇게 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이 있다고 칭찬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를 보면 그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사람은 누구나 자기가 잘한 행위를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아니 법대로 잘하고 싶어 하고 있고 그것을 칭찬 받고 싶은 것은 모든 사람의 마음입니다. 그런 것을 인내한다는 것이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야고보서1:3-4절을 보겠습니다. (신 371쪽)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시험이 옵니다.
율법은 늘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은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이라는 것이 보이지 않은 것을 믿는 일입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사람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해가 안 되는 그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함으로서 이 시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반드시 시련이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구원을 받는 것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받는 일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마치 이것을 신앙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어떻습니까?
그것이 우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하기 위해서 야고보는 처음부터 시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고 그런 행함이 있는 믿음이 시련을 오게 하고 있고 그 시련에서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율법을 버리는 행함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버리는 행함을 가지게 되면 시험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율법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이 말씀이 잘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여러 가지 시험으로 우리를 시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육체입니다
끊임이 없이 시험을 해 오고 있습니다. 그 시험을 끝까지 이길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행함이 있는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 지체를 잘라 버리는 것과 같은 시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시험이 나에게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물론 온전히 율법을 다 지킨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정해서 지킬 수 있는 율법을 지키는 일은 쉽습니다. 율법을 아예 지키지 않는 것보다는 쉽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어서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것은 마치 시련이 오는 것과 같이 어렵습니다.
인내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지체는 끊임이 없는 정욕으로 나를 견디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시험을 이기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그 인내가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인내를 말씀하는 것은 구원에 대한 인내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으로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너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광중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환난이 있고 그 환난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가 연단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내를 온전히 이루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연단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시험으로 우리를 연단하고 있고 시련으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인내를 온전히 이룸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없으면 이 시험에서 이기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좋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교회를 지어 놓고 그 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성가대가 있고 예배를 드리는 것이 좋습니까? 그런 것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까? 물어보는 제가 더 이상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말하나 마나입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여러분에게 때로는 시련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인내를 온전히 이루어야 합니다. 행함이 있는 믿음이 있을 때까지 우리는 온전히 이루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에 대해서 수도 없이 말씀을 들었기 때문에 어떠한 시험이 와도 이제는 그것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까지도 내 안에 있는 성령이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야고보가 누구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까?
흩어져 있는 유대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유대인입니다 그들이 조상 대대로 율법을 지켜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당시 시대 상황을 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회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이 모입니다. 그 안에는 율법주의자도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야고보가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다가 어느 날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이겠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지 말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회당에서 율법주의자가 많으면 엄청나게 시련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에서 인내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여러 가지 시험이 있습니다. 아마도 경험을 하신 분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나오기 전에 교회에서 나올 때 그들이 여러 가지 말로 시험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있는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는 엄청나게 시험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게 시험을 해서 안 넘어 오면 이제 시련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도 역시 그럴 수 있습니다 제가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은 누구도 장담하지 못 합니다 그런 일이 있는데 여기에서 누군가 율법주의로 돌아서서 그가 말씀을 전하고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시험을 하지만 나중에는 시련을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 인내입니다
저는 성도님들을 믿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여기를 거쳐 지나간 사람들은 생각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교제하고 있는 지금 이 자라에 있는 성도님들은 이제 더 이상 그렇게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나 야고보가 전했던 초대교회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몰랐고 실제 그렇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7쪽)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연단을 하시기 바랍니다.
인내는 연단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을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도 세상입니다 교회가 세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불교의 사상이 그대로 들어와서 성경에서 세상이라고 말씀을 하면 마치 교회 밖을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인내는 연단을 이룹니다.
어떻게 연단을 해야 합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여야 합니다. 정말 교회에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6절에서 이것들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말씀을 보면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성경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무엇입니까? 내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내 육체가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하고 있는 내 육체가 땅에 있는 지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내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육체 그리고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의 욕심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잘 지키고 싶어 하는 모든 사람의 마음이 욕심이라는 말씀입니다
연단입니다
내 지체를 죽이기까지 여러분이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반드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죽이라고 하면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너무 살아 있습니다. 그 지체를 주체를 하지 못해서 욕심에 사로 잡혀서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내를 하는 성도만이 연단을 받습니다.
땅에 있는 내 지체를 죽이기까지 연단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더 살리 라고 조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지체가 살아서 하고 있는 행위를 간증이라고 하고 있고 또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는데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목사입니까?
그가 유명한 목사입니까?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까지의 목사들을 보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기보다는 땅에 있는 지체로 욕심을 부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시기 바랍니다.
지체가 죽었으면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죽은 시체가 무슨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자기 지체를 죽이지 않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 믿음이 있다면 이러한 인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인내로 자기 지체를 죽이는 연단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자기 지체를 죽이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참 잘하고 있습니다.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은 참 잘하고 있습니다. 전혀 죽이지 않고 있는 사람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말로 자기가 어떻게 지체를 죽였는가를 이야기를 하는데 실제로는 도리어 지체를 더 살리고 있습니다.
죽었습니다.
그 죽는 자가 무엇을 합니까? 여러분이 어떠한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는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은 사람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인 사람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그 예배를 드리면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에서 여러 가지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가 해야 하는 마땅한 일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지체가 살아 있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제가 예배를 하는 것 까지도 반대를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주일이라는 날에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일주일에 여러 가지 예배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찬송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교회에 교인의 숫자를 늘리기 위해서 전도를 하고 있습니다. 또 십여 가지가 넘는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고 있습니까?
땅에 있는 지체가 살아서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땅에 있는 지체가 죽었다면 그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습니다. 아니 못 합니다 인내가 연단을 이룬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 합니다 아니 죽이는 순간에 시련이 찾아오고 그 교회에 더 이상 나가지도 못 합니다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여러분이 이런 연단에서 이겨내지 못하면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여러분을 겁을 주는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라
지금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행위들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이 가운데 한 가지라도 안 하고 있는 교회는 없습니다. 다 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모르니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고 교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을 다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내하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기를 위해서 인내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지체는 이것을 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 땅에 있는 지체가 살아 있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고 그 행위가 믿음을 막고 있습니다.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은 속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않고 그 지체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믿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믿음이 있다면 당연히 환난을 받고 인내를 하고 있고 그 인내가 연단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하고 있다는 그 모든 율법의 행위가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지 못해서 하고 있는 악한 행위며 그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가 여러분에게 임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연단이 있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복음을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그 복음을 듣는 성도가 믿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는 율법의 행위에 속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습니다. 그렇게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영이 있는 성도가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이러한 일이 믿어지는 역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구속을 이루지 않았다면 이 은혜를 우리가 믿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은혜에 들어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면 환난이 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환난이 인내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인내가 내 지체를 죽이는 연단을 하게 해서 그 지체로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받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러한 영의 일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성경 말씀을 보고는 있지만 소경과 다름이 없습니다.
잠언17:3절을 보겠습니다. (구 929쪽)
“도가니는 은을, 풀무는 금을 연단하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을 연단하시느니라”
은입니다
그리고 금입니다 실제 도가니는 은을 연단해서 은을 나오게 하고 있고 풀무는 금을 연단해서 금이 나오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은 믿음을 비유로 하고 있고 금은 생명을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는 마음을 연단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음을 연단합니다.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마음을 어떻게 연단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 마음에 무엇이 있습니까?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음을 어떻게 연단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음에 굳세게 서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 마음으로 믿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사람들은 믿는다는 말을 너무 쉽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으로 믿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성도님들이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으로 믿기까지 하루아침에 내가 믿겠다고 해서 믿어졌습니까?
아닙니다.
연단을 했습니다. 정말 많은 연단을 받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동일한 믿음으로 서기 까지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 하셨습니다. 믿음이 하루아침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수많은 갈등이 있었고 정말 내가 믿는 것이 맞는가 하는 의구심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셔서 우리가 이제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연단을 받았습니다.
마치 도가니에서 은을 연단한 것과 같이 풀무에서 금을 연단한 것과 같이 우리 마음을 연단을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연단을 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이제 율법의 행위에 속하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새사람이 지으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믿어지는 것이 절대도 아닙니다.
우리가 믿어지기까지는 하나님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로 믿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연단하시는가 하면 우리가 마음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의 마음을 연단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연단하시고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연단 받은 성도는 이제 자기 지체를 죽이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경륜을 마음으로 믿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그 믿음이 있어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7절을 보겠습니다. (신 377쪽)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우리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얼마나 귀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믿음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아무에게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믿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아니 믿음이 없이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어떤 믿음인가 하면 불로 연단하면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계속해서 이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믿음에 대해서 말씀합니까?
금보다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가 있는 금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시련을 받고 있습니다. 연단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냥 믿으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믿음은 반드시 시련이 따라오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시련입니까?
우리를 무엇에서 연단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저 역시도 사람입니다 이 사람의 이성으로는 아무리 생각해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입니다
저도 이렇게까지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답답하기만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제 이성으로도 백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은데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 믿음이 율법에 대해서 바로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불로 연단하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그리고 내 지체는 끊임이 없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이 믿음으로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연단을 받고 있습니다. 정말 사람의 이성으로는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다시 돌아보고 또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우리를 시련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영생의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영생의 문제가 아니라면 얼마나 편하겠습니까? 사람의 이성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도 믿고 율법도 잘 지키면서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자는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구원에 대해서 이렇게 연단을 받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삶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대해서 우리가 환난을 당하고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받게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화평을 이룬 성도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이 있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영의 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삶이 아니라 영혼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믿음이 있는 성도는 환난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이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영생을 이렇게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다 육의 일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디도서1:2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연단입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께서 연단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불로 이겨낼 믿음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어디에서 인내를 해서 연단을 하는가 하면 우리 지체에서 인내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의를 죽이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입니다
태생적으로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누가 죄인으로 살고 싶은 사람이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다 의롭게 살고자 합니다. 처음부터 죄인으로 살고 싶어 한다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 사람이 일부러 알면서도 죄를 지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실상은 더 악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봅니다.
그러면 사람은 정신을 차리지 못 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의롭게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 중에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습니다.
성경의 정의입니다
율법을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한 가지를 지키면 모든 율법을 다 지켜야 하는 의무가 주어지고 그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율법의 기능을 모르고 자기가 하나님의 성도로서 조금 더 의롭게 살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성경은 율법을 지키면 진노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싸움입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게 해서 의로 여기심을 받아 그리스도의 영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게 하는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율법으로는 죽는데도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 지키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우리는 환난을 받고 있고 그 환난이 인내를 인내가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로 알고 있다고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소망이 무엇에 대한 소망인가 하면 영생의 소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연단이 소망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 영생이 소망을 이루는데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 영생의 소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성도가 어떻게 이루는 가를 사도 바울이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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