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2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우상을 숭배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우상 숭배가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교회 안에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이제까지 우상 숭배를 하지 않은 교회가 거의 없을 정도로 이 시대는 우상이 만연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누가 우상이 되어 있는가 하면 짐승 같은 사람이 그리고 버러지 같은 사람이 우상이 되어 있으면서도 그 우상이 하는 행위를 따라 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버러지 같은 사람이 우상이 되어서 그가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것을 자기도 하고 싶어 합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있어 가장 큰 우상이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 우상에게 혼이 다 빼앗겨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그렇게 하고 싶어 하는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의 지도자라고 하는 사람들은 도리어 그것을 권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회가 찬양이 미쳐 있습니다.
아니 찬양을 부르지 않으면 예배조차도 예배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의 모습입니다. 자기들이 부르고 있는 그 찬양으로 집단 최면에 빠져 들어가고 있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모두가 따라 하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맹목적인 인기를 끌거나, 숭배되는 대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맹목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찬양이 조금 심하다 뿐이지 찬양만 있는 것이 아니라 버러지 같은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우상이 되어서 인기를 끌면서 그것을 하고자 하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젊은 날에 우상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나 그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 것도 우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도 교회 안에서는 무조건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하면 모든 것이 다 용납이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우상이 누구입니까?
이 시대 젊은 아이들에게 스포츠 스타나 연예인들이 우상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가 바라보고 있는 그 사람이 우상이 되어서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어 합니다. 이것이 세상에서는 통할 수 있고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만 교회 안에서는 우상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상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특히 교회 안에 있는 목사들은 우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상을 만드는 것을 좋아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을 가지고 자랑하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간증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그 간증을 통해서 수많은 우상들이 나오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합니까?
그것으로 누군가 감동을 받았습니까? 이미 그 감동을 받은 사람에게는 우상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 교회 안에서 기도를 유창하게 잘하고 있습니까? 그것 역시 기도를 못하는 사람에게는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예배를 잘 드리고 있습니까?
정말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예배를 드리고 있고 맨 앞자리에서 은혜를 다 받는 것 같이 하고 있습니까? 그것 역시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들이 다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또 교회 안에 전도를 아주 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칭찬을 듣고 믿음이 좋은 것 같으니까 우상이 되어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아마도 그리스도편지에 그것을 우상이라고 하면 도리어 반박을 할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시면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려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그것을 더 잘하기 위해서 노력을 하고 있다면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아니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성경에서 우상을 숭배하는 자는 천국을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로마서를 누구에게 보냈는가를 생각해 보시면 조금 더 쉽게 답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우상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것이 무엇으로 나타나고 있는가 하면 짐승 같은 사람으로 그리고 버러지 같은 사람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짐승 같은 사람이, 버러지 같은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두셨습니다.”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상을 숭배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부처를 숭배하고 또 어떤 형상을 만들어서 숭배하는 것을 보고 우상 숭배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우상 숭배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런 우상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만약에 어느 목사가 정신이 이상해 져서 혹시라도 부처상을 교회 안에 세운다 하면 모든 사람이 교회를 떠나거나 아니면 그 목사를 고소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은 지금 그런 우상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입니다
지금과 같이 다른 복음에 빠져 있는 교회도 아니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그런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우상을 숭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우상을 숭배하는 자들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얻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 숭배가 무엇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정욕대로 행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 정욕을 탐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누가 이렇게 되었다는 말씀입니까? 교회 안에서 우상 숭배를 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을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신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우상을 숭배를 하면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예표라는 것을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이 기록이 되기 전하고 성경이 다 기록이 되었을 때는 다르다는 것을 여러분이 분명히 알고 있어야합니다.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그 일에 대한 예표를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성경이 기록이 되어 있는 상태에서는 더 이상의 그런 예표는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징계는 없습니다.
누군가 교회 안에서 우상을 숭배한다고 해서 그것을 이스라엘과 같이 바로 징계를 하셨다면 이 시대 교회가 절대로 이렇게 우상을 숭배하는 교회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들이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5:20절을 보겠습니다. (신213쪽)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우상의 더러운 것입니다
사도행전에 이 말씀도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우상이라는 단어만 생각하고 일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그 우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설교로 이미 올려 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보시면 이 우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보이는 우상이 아닙니다. 누가 교회 안에 감히 그런 보이는 우상을 가져다가 섬길 수 있습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아니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그는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런 보이는 우상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상에 대해서 바로 알지 못하면 그는 교회 안에서 평생을 우상 숭배만 하다가 결국에는 우상 숭배자가 되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입니다
짐승 같은 사람입니다 버러지 같은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모든 행위가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내가 따라 되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이 우상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어떤 인물도 따라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아브라함의 행위를, 그리고 이삭의 행위를, 또 야곱의 행위를 따라하려고 하는 순간에 우상이 되고 맙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성경의 모든 믿음의 선진들은 동일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믿음을 얻기를 간구해야 하고 그 동일한 믿음이 내 안에서 역사를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믿음의 선진이라고 해도 그가 한 행위를 따라하려고 하는 순간 그 역시도 우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물며 믿음의 선진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종교에 빠져 사람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거대한 종교는 그런 우상들을 세워 놓고 있습니다. 우리가 상상하지도 못하는 그런 많은 우상들을 세워서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그들에게 정욕대로 더러움에 버려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입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정욕대로 더러움에 버려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정욕, 아니 교회 안에서 누군가 하는 그 행위가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 좋아서 그와 같이 되고자 하는 것을 정욕이라고 하고 있고, 우상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그것이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었습니다.
우상이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욕이라고 하니까 나쁜 것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의 정욕입니다 누가 정욕이 있었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달으면 됩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얼마나 정욕이 있었는가 하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정도로 정욕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상의 더러운 것을 멀리 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정욕의 더러운 대로 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더러운 것이 무엇인지 깨끗한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이 더러운 것을 알아야 그것이 우상의 더러운 것이고 더러운 정욕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육체의 일은 더럽습니다.
교회 안에서 많은 육체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그것이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이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으면 그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일이 왜 더러운가 하면 그것이 우상을 숭배하는 일이기 때문에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우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우상이라는 말씀입니다 우상이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정욕의 더러운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육체의 일이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육체로 하는 일이 더럽다는 말씀이며 그것이 우상 숭배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의 일이 무엇인가를 모릅니까?
내가 하는 모든 행위가 육체의 일입니다 영의 일은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구원을 하신 일이 영의 일입니다 이 기본을 모르기 때문에 이 시대는 거의 모든 교회가 다 육체의 더러운 일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예배 육체로 드립니다.
찬송 육체로 부르고 있습니다. 기도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헌금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전도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일이 다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제사와 번제를 기뻐하시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일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성경을 보고 있는 신학자들입니다.
예배를 주님이 드립니까?
찬송을 주님이 부르시고 있습니까? 기도를 주님이 하고 있습니까? 십일조를 주님이 드리고 있고 각종 헌금을 주님이 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전도를 주님께서 하시고 있습니까? 만약에 주님이 이 일들을 하신다면 그것은 영의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육체의 일이 더럽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육체의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영인 것으로 착각 속에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다 육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럽습니다.
얼마나 더러운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그것이 얼마나 더러운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행위를 하면 마치 그것이 좋고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을 성경에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저 막연하게 사람의 생각이 아니라 성경이 어떻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사야 64:6절을 보겠습니다. (구 1045쪽)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성경의 기초입니다
왜 우리의 육체의 행위가 더럽냐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으면 왜 우리의 행위가 더러운 가를 알려고 지혜를 구해야지 그것이 아니라 막연하게 자기가 의로운 행위를 하고 있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정말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두 가지의 행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 인생들이 하는 행위고 하나는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입니다 이 두 가지를 가지고 하나는 더럽고 하나는 깨끗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마음에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그러니까 자기의 의를 하게 그대로 내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졌을 때는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셔서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을 지키고 있더라도 저희 마음에 정욕대로 내어 버려두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의 정욕이 얼마나 더러운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의 의입니다
누구의 의입니까?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의 의가 이렇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의 의가 더럽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를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세상을 살면서 도덕적으로 지은 죄에 대해서는 그렇게 인정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것이 더럽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그것도 더럽습니다. 찬양을 영광스럽게 부르고 있습니까? 그것도 더럽습니다. 내 정성을 다 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까? 그것 역시 더럽습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그런 모든 행위가 다 더럽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러운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하지만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는 거의 모든 목사들이 자기 교회는 아니고 또 교회가 아니라 세상 사람이 우상을 섬기는 것을 보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무지가 되고 그 무지가 자기 영혼을 망하게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잠언 30:12절을 보겠습니다. (구 945쪽)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느니라”
누구에게 하는 말씀입니까?
더러움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다고 하니까 이스라엘에 어느 작은 무리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교회 전체를 가지고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그랬고 이 시대 교회가 스스로 깨끗한 자로 여기면서 오히려 그 더러운 것을 씻지 아니하는 무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전체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유대교 전체가 짐승에게 사로 잡혀서 더러움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 전체가 또 짐승에게 사로 잡혀서 더러움에 있다는 것을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환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우상에게 경배를 하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는가를 보시기 바랍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와서 내가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으면서도 주님께서 그것을 말씀하시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율법을 지켰다고 하면서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을 하다가 복음을 듣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그랬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깨끗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더러움을 씻지를 않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방의 교회도 더러움을 씻지 않아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더러움에 있으면서도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척이나 깨끗한 것으로 겉을 회칠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입니까?
그들은 겉과 속이 다른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지만 자기들이 세상에서 제일 깨끗한 척은 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중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어 버려두셨기 때문입니다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다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가 얼마나 더러운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만큼 깨끗한 자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면 무엇 합니까? 이런 기본적인 지혜도 없는 사람에게는 재앙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면서 마음에 부자가 되어서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없습니다.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을 행하는 자가 없다고 성경이 정의를 내려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서 율법 몇 가지를 지키는 자기를 보면서 스스로 깨끗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종교라는 거대한 짐승이 율법이라는 포승으로 묶어서 그들의 지각까지 혼미하게 만들고 있지만 스스로 지혜 있다고 하면서 우상 숭배를 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스스로 깨끗하다고 합니다.
어느 무리에게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그랬고 지금 역시도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무리에 한번 들어가면 자기 이성까지도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이 시대 정욕에 빠져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스라엘과 같이 바벨론에 포로가 되게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대로 내어 버려두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육체로 조금 받는 고난을 가지고 마치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시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그대로 내어 버려두십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징계를 하셔서 돌이키시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시겠다고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의를 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율법이 악이라는 것을 그것이 더러운 것이라는 것을 징계를 해서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두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시대 진리가 사라지고 교회 안에 더러운 불의가 가득한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요한이 환상을 본 그대로 놓아두시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면 로마서의 말씀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저희 몸이 다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욕되게 하셨는데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더러운가를 모르고 도리어 그 더러움에 다시 들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후서 2:21-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86쪽)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도다”
정말 두려워하시기 바랍니다.
사도들이 주님이 승천하시고 난 후에 성령이 오시고 나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그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의의 도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의가 아니라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내 안에 의에 생명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명령입니다
성도는 이렇게 의의 도를 알고 믿음으로 해서 거룩한 명령인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교회가 낫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것보다 그래도 엉터리라도 율법을 지키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더 낫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이 얼마나 어리석은 말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차라리 복음을 듣지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복음을 듣고 그것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차라리 복음을 안 듣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더 낫는가 하면 그래도 세상 죄인은 세세토록 불구덩이에 들어가는 특별한 형벌은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율법주의 교회입니다
그래도 그 안에 있는 것이 낫습니까?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는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전혀 보지도 않고 알지도 못할 것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왔습니다.
그래도 복음을 듣고 의의 도를 알았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 외에 한 의가 되어서 그 의를 믿음으로 거룩한 명령을 지켜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 성도는 오직 이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받지 못 합니다
교회 안에서 명령을 저버렸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두려워해야 하는 말씀입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는 의의 도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의의 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어느 교회에서 의의 도를 바로 가르치고 있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는 이 의의 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르치고 있지도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의 도를 알기도 전에 기독교라는 종교는 우상을 숭배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들 마음에 더러운 정욕에 빠져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더 낫습니까?
그것은 그 교회가 의의 도를 전할 때의 일입니다 그 교회가 의의 도를 전해도 거룩한 명령을 지키는 자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의의 도를 알지도 못하고 있고 모르는 상태에서는 거룩한 명령을 지킬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더 낫습니까?
기독교인이 더 낫습니까? 종교가 없는 세상 사람이 더 낫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그것에 대해서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으면서 거룩한 명령, 그러니까 의의 도로 자기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탄생이 되지 않으면 세상 사람보다 더 불쌍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 우상을 섬기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그래도 세상 보다 더 낫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차라리 알지 못하는 것이 그러니까 교회 안에 안 들어오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에 안 들어오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막연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진리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불행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스스로 깨끗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가득합니다. 실상은 다 더러움에 빠져 있으면서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에 빠져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다수가 이렇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그럴 것 같으면 성경에 굳이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나쁜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절대적인 다수가 이렇게 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고 경계하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를 보고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가 하고 있는 이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개가 되어 있고 돼지가 되어 있으면서도 더러운 자기의 의를 가지고 깨끗하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고 있습니다.
이제는 구약의 이스라엘이 아닙니다.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경을 보고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런데도 지혜를 구하지 않고 성령을 구하지 않는 사람들은 이 말씀과 같이 그대로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러움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참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저희에게 응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에게 그대로 응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5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숭배하고 섬겼습니다. 하나님은 영원히 찬송을 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더럽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럽습니다. 우리 육체가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더럽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의의 도를 알고 거룩한 명령을 지켜서 내 안에 탄생이 되는 그리스도의 영만이 깨끗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 의를 믿는 성도만이 거룩한 명령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는 자기 마음에 있는 정욕에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더럽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그것이 깨끗하다고 생각하면서 그것에 열심을 내고 있으니까 하나님께서 그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내어 버려두셨습니까?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기 때문에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경배한다고 하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실제 우상을 숭배하듯이 경배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 심지어는 우리나라의 인사법을 마치 경배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경배가 아닙니다. 성경은 세상 법과 제도를 따르라고 했지 그것을 무시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도 이제까지 우리가 살아왔던 관습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경배가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교회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서 그 일이 교회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답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서는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진리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이 이 진리를 몰라서 거짓으로 바꾸고 있습니다.
누가 바꿉니까?
이스라엘이라는 유대교가 그렇게 했습니다. 또 이방의 기독교라는 종교가 그렇게 했습니다. 이 시대 예수님께서 진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는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짐승이 되어 있는 기독교는 거짓을 이야기 하고 있지만 모두가 다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7절을 보겠습니다. (신 143쪽)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진리가 어디서 왔습니까?
성경이 진리입니까? 성경의 문자는 진리가 아닙니다. 이 시대는 마치 성경을 진리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으로 내가 진리를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 지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입니다
로마서는 시작부터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예수 그리스도고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알려면 구약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세가 기록한 율법이 누구에 대해서 기록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세가 기록한 율법에서 복음을 아는 것이 진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에서 은혜와 진리를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율법을 문자적으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지만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지는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지혜입니다
성경을 보면 율법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임재하시면 율법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같은 성경을 가지고 보는 사람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진리를 거짓으로 다 바꾸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율법을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정말 까막눈이 아니고는 누구라도 성경을 보면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와 진리를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는 사람이라도 해도 그것이 안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다 이렇게 율법으로 보는 것을 보고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시편 31:6절을 보겠습니다. (구 823쪽)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여호와를 의지하나이다”
디도서 1: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48쪽)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야고보서 2: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73쪽)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
거짓입니다
그리고 진리입니다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서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진리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알고 있는 진리라는 것은 겨우 문자적으로 주님이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그 말씀을 아는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거짓이 무엇입니까?
기독교라는 종교가 탄생이 된 것도 이 거짓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도 유대교가 되었습니다. 그들이 다 진리를 안다고는 하고 있지만 실상은 진리도 잘 모르고 있고 문제는 거짓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거짓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고 또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거짓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단어만 알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자기들이 세상이 인정하는 정통이니까 참이고 자기들과 다른 곳은 거짓으로 알고 있습니다. 사전적인 뜻이 사실이 아닌 것을 거짓이라고 말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실이 아닌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사실이 아닌 것이 무엇입니까?
헛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인생들의 모든 행위가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한 다툼을 버리라고 하면서 이는 무익하고 헛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닌 헛된 것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가장 기초가 되어야 하는 진리와 율법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그저 교회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이 아닙니다.
디도서에서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고 말씀을 하면서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사실이 아니고 헛된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다툼을 피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헛된 것을 마치 사실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무익하고 헛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무익하고 헛된 것은 사실이 아니라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거짓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제까지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헛것입니다
그것은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거짓 선지자가 누군가 하면 이 헛것을 가르치고 있는 사람이 거짓 선지자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을 거짓 형제라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진리가 무엇인지 거짓이 무엇인지도 분별이 안 되고 있고 모두가 거짓에 빠져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내가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자를 미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는 이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면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허탄한 거짓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모르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차라리 복음을 모르는 것이 아니 듣지를 않는 것이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고 있다면 그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수입니다
이스라엘의 다수를 기뻐하시지 않았습니다. 소수의 이단을 따라가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들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다수에 속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단이나 정통이나 할 것 없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모든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지나치지 않지만 이 시대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을 본다고 하는 사람들도 율법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거대한 종교가 시키는 대로 하고 있습니다.
허탄한 거짓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어떤 허탄한 이야기를 했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말씀하시니까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가지고 거절을 했습니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못 보는 무지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아서 잘 알겠지만 유대인들은 율법을 가지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도 사도 바울을 고소하면서 저가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이고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유대인입니다
그들은 허탄한 거짓을 숭상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유대인과 같이 허탄한 거짓을 숭상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로마서에서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이 어떠한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서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일을 하면서도 자기 정욕에 빠져 깨닫지를 못하고 있고 하나님께서는 불의한 자를 그대로 불의하게 두어서 저주를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이 율법을 가지고 얼마나 진리를 대적했는가를 성경을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율법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라는 이상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것이 진리를 배반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도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역시 진리를 배반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이렇게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 거짓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허탄한 것이 거짓입니다.
그것을 야고보는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고자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행함이 있는 믿음은 이미 야고보서를 통해서 강의를 했습니다. 그 강의를 보고도 행함이 있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허탄합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까지 유대인으로서 지키고 있는 율법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은 조상 대대로 허탄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왔습니다.
그것이 거짓입니다
이제 주님이 오셔서 많은 유대인들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초대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사람들에게 허탄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에게 허탄하다고 말씀을 하면서 너희의 믿음이 헛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있습니까?
그런데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야고보는 그런 유대인들에게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런 말씀들이 깨달아지지를 않아 도리어 율법을 지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을 합니까?
성도로서의 삶인 도덕법이 살아 있으니까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과 전혀 반대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을 깨닫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까지 야고보서를 썼다고 하는 모든 신학자들이 거꾸로 풀고 있습니다. 야고보서 뿐 아니라 모든 성경을 거꾸로 풀고 있다고 해도 별로 틀리지 않습니다.
거짓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거짓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성경을 보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인가를 모르고 마치 세상 사람에게 하고 있는 말씀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9절을 보겠습니다. (신 413쪽)
“또 다른 천사 곧 셋째가 그 뒤를 따라 큰 음성으로 가로되 만일 누구든지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에나 손에 표를 받으면”
짐승입니다
요한계시록 13장에 두 마리 짐승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미 아카데미 강의에게 말씀을 드렸듯이 먼저 나온 한 마리 짐승은 유대교가 되어 버린 이스라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뒤에 나온 짐승은 이방의 교회가 기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종교가 되어 버린 두 교회를 환상으로 사도 요한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경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짐승에게 경배를 하고 있고 이 짐승이 만든 그의 우상에게 경배를 하고 있습니다. 그의 우상이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서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우상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를 하고 섬기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보이는 건물의 교회를 얼마나 열심을 다 해서 섬기고 있습니까? 그것을 섬기면서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치 주님이 세우신 교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짐승이 세운 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이 섬겼던 아세라가 이 시대 교회라는 건물이 되어 그것을 섬기느라 모두가 이성을 상실했습니다.
짐승입니다
그것은 종교가 되어 버린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우상을 교회 안에 세우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피조물을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다니고 있는 기독교라는 종교가 짐승이 되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까?
전부 우상만 가득 차 있습니다. 짐승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섬기느라 모두가 정신을 잃고 있지만 그것을 우상이라고 생각하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하나님을 잘 믿는 성도의 행위라고 하면서 칭찬을 하니까 사람들이 우상을 경배하고 섬기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피조물을 모릅니까?
그것에 마음을 빼앗기는 순간에 하나님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짐승이 되어 버린 종교는 이렇게 교회를 만들어 놓고서 그 안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조물을 더 섬기고 경배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분만을 우리가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 마음의 정욕을 이기지를 못해서 우상을 숭배하는 더러움에 빠져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요한계시록의 두 짐승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우상에게 경배하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짐승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는 교회를 세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거짓 선지들이 있게 하고 있고 그 거짓 선지자들은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보이는 부처 같은 우상이 아니라 사람이 우상이 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행위가 우상이 되어서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정욕을 이기지 못하고 그 우상이 하는 행위를 따라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거짓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체가 거짓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이 얼마나 허탄한 것이고 헛된 것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더 많은 율법을 지키고자 경쟁을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이단이라고까지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이 율법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거짓입니다 율법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왜 거짓인가 하면 그 율법으로는 우리가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도 생명을 주고 있지만 율법으로는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성경은 허탄한 거짓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26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을 부끄러운 정욕에 내버려 두셨습니다. 여자들은 남자와의 바른 관계를 바르지 못한 관계로 바꾸고,”
무엇으로 인하여 입니까?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셨으니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대로 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 문제가 많은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비유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육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실제 비유로 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비유로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정말 심각할 정도로 성경을 문자로 보고 있습니다.
동성연애입니까?
성경이 우리 인생들이 하고 있는 동성연애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정말 안타까운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이 동성연애를 안 하니까 좋은 건수가 생긴 것입니다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을 반대를 하면서 자기들이 그런 것을 안 하는 거룩한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어 합니다.
성경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인생들이 하고 있는 동성연애로 인하여 그가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아니 그것이 구원을 받는 것에 문제가 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아니 믿어 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동성연애를 찬성합니까?
이렇게 말씀을 드리면 마치 동성연애를 찬성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도 정상작인 남자입니다 동성연애를 하는 것에 대해서 솔직히 제 개인적으로는 혐오감을 가질 정도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분명히 저 역시도 혐오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동성연애에 대해서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동성연애를 찬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구원을 잃어버린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죄를 지고 간 것이 아니라 세상 죄에서 동성연애를 빼고 지고 가신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했어야 맞습니다. 확실하지도 않는 것을 왜 믿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분명히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저 역시도 찬성 안 합니다
그러나 동성연애를 하는 자들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최근 들어서 가끔 이 동성연애를 반대하는 목사들의 행위를 메시지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이 꽤나 정의로운 일을 하는 것과 같이 기도를 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고 이 메시지를 믿음이 있는 성도들에게 돌려달라고까지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누구입니까?
솔직히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나타내기도 시간이 부족한데 그런 일을 하면서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것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고 있는 동성연애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그것이 바르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지만 그렇다 해도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 목사입니다
복음을 알면 그 일을 하겠습니까? 정말 그가 복음을 알고 있다면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동성연애를 하는 것과 우리 성도와 무슨 상관이 있다고 그것을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고 경찰서까지 갔다 왔다고 무용담을 늘고 놓고 있습니까?
갈라디아서 5: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08쪽)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저희의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렸습니다.
그것을 비유로 저희 여인들이 쓸 것을 역리로 쓰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인이 누구입니까? 진짜 여자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여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이런 비유를 알지 못하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동성연애를 반대한다고 세상일에 빠져 들어가게 됩니다.
여인입니다
이 여인은 비유입니다 진짜 여자가 순리대로 남자와 혼인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서 사랑을 하는 그런 것도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인이 누구라는 것을 모르게 되면 이렇게 자기가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남자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아직 여인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은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있지만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쉽게 말씀을 드리면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못하고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여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니까 자기가 순리로 쓸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역리로 바꾸고 있습니다. 여자면 당연히 자기 쓸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의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역리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는 순리가 무엇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순리입니다 그럼 역리는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저주를 받는 것이 역리라는 말씀입니다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것이 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하지를 않고 교회 안에 있는 여인들은 정욕의 더러움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에 나와서 복음을 들었으면 순리를 따라가야 합니다. 그 순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역리를 따라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상을 섬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서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모든 행위가 다 우상을 숭배하는 행위고 또 그것이 부끄러운 욕심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러한 일을 하고 있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기 때문에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말씀을 압니까?
문자적으로 아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가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절대로 그렇게 한 사람이 아닙니다.
여인입니다
순리를 따르시기 바랍니다. 구원을 받는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길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너무도 쉬운 순리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순리를 따르지 않고 역리로 바꾸어서 저주를 받는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8:44절을 보겠습니다. (신 160쪽)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부끄러운 욕심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마귀의 자식들입니까?
그들은 순리를 따르지 않고 역리를 따라 율법을 지켰기 때문에 주님께서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는 순리와 역리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구원에 대해서 순리와 역리를 말씀하고 있고 그것을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너희 아비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욕심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부끄러운 욕심을 냈습니다. 그것이 바로 흠 없는 율법의 의로 욕심을 냈는데 그 흠 없는 율법의 의가 영광이 된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데 있어서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말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끄러운 욕심을 이 시대 교인들이 그대로 따라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그것은 부끄러운 욕심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에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는 말씀입니다 이 부끄러운 것이 마치 여인이 순리를 거스르고 역리로 쓰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역리가 되어서 부끄러움을 당한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서1:27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또한 남자들도 이와 같이, 여자와의 바른 관계를 버리고 서로 욕정에 불탔으며,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잘못에 마땅한 대가를 스스로 받았습니다.”
이와 같이 입니다.
무엇과 같이 입니까? 교회 안에 있는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순리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데 율법을 지키는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과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입니다.
남자는 여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또 여자는 남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2000년 전이지만 로마 시대에 그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실제 있었던 일을 가지고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동성연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순리입니다
세상의 순리입니다 그것은 여인과 혼인을 하는 것이 순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버리고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남자들이라는 말씀은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구원을 받은 사람을 계수하기 위해서 구약에서 남자만을 계수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실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비유로 영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지 실제 동성연애를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자기가 동성연애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마치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지금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비유로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들이 그러는 것과 같이 남자도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남자와 남자로 부끄러운 일을 행하고 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로마 교회에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또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런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 사람이 없는 일을 가지고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람이 많이 있기 때문에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세상의 이치입니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여자로 더불어 그렇게 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이 그런 부끄러운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부끄러운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순리로 쓰면 안 부끄럽습니다.
그런데 역리로 써서 율법을 지키면 부끄러움을 당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도 마치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과 같이 저희의 그릇됨으로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게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44쪽)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부끄러운 일을 했습니다.
마치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이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구원을 받은 남자라고 하면서 믿음을 무너뜨렸다는 말씀입니다 진리에 관하여 그릇 되어서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영생을 얻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남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마치 이 세상에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이 믿음을 무너뜨림으로 해서 저희의 그릇됨이 상당한 보응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끄러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당시 동성연애가 있었던 것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동성연애를 당시 로마에 있는 사람들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끄러운 일인데 영생에 있어서 저희가 불의를 행하면서 우상을 숭배하면서 순리를 저버리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육체의 부끄러운 일이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부끄러운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요즘은 세상이 자유하다 보니까 이 부끄러운 일도 정당하게 대우를 받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과 100여 년 전만해도 이 부끄러운 일을 하면 세상이 가만히 두지를 않았고 감히 이야기도 할 수 없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육체의 일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입니다
그래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습니까?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이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하는 것과 같이 그릇 행하여 믿음을 무너뜨려서 자기 자신에게 상당한 보응을 받았다는 말씀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고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마치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서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이 이 믿음을 무너뜨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이것을 문자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부끄럽습니다.
믿음을 무너뜨린 사람은 반드시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희가 그릇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자가 순리를 역리로 쓰고 있는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고 또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것과 같이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는 사람들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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