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이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그 말씀에서 복음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그렇게 믿음의 말씀을 보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제까지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모든 성경 말씀이 이 복음을 알고 믿으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복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알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야 믿을 수 있는데 이 시대 아니 이제까지 신학자라고 하는 사람들이 남겨 놓은 글들을 보면 복음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입니다.
물론 신약 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우선 구약의 말씀들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많은 믿음의 말씀이 있습니까? 그런데 이 시대 구약의 말씀들을 보고 어떻게 말합니까? 하박국의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만 보고 있습니다. 그것도 문자적으로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말씀입니까?
다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고 있습니다. 그 말씀만 그렇습니까? 율법이라고 하는 출애굽기에서 신명기까지의 모든 말씀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초등학문에 빠져 있는 사람은 그것이 다 율법으로 보이지만 복음을 보는 성도들은 그 말씀들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또 믿음입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믿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을 못 보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율법만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성경을 보면서 율법의 행위를 보다가 결국에는 주님으로부터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십일조라는 율법을 보았으면 그것이 믿어져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것을 자기 육체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바리새인과 같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시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과 바리새인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그렇게 율법의 행위 아래 있으면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식일을 보았습니까?
성경에서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것을 보았습니까? 그러면 그 안식일이 믿어지는 역사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도 안 봅니까?
저의 안식에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맞지만 복음으로는 저의 안식에 들어가는 것이 맞습니다. 저의 안식에 어떻게 들어가는가 하면 믿음으로 들어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을 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안식일을 믿는 역사가 내 안에서 일어나면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라고 했습니까? 성경에는 물론 이스라엘이 그것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복음을 몰랐기 때문에 지켰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밝히 보이는데도 그것을 지키고 있습니다. 말로는 제사법이 폐하여 졌다는 그들이 맥추감사절을 지키고 있는 이중성을 보이고 있습니다.
말로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누가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맥추절을 믿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제사법과 절기가 폐하여 졌다고 이야기를 하면서 맥추감사절을 너무도 당연하게 지키고 있습니다. 말로 그렇게 하는 종교에서는 정말 말로 십일조를 하고, 말로 주일을 지키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말로는 감언이설을 하면서 행위로는 복음에 복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복음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성경이 구약 성경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구약 성경을 보고 복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보면서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도무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았습니까?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어야 합니다. 출애굽기를 보았습니까? 역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어야 합니다. 또 레위기도 마찬가지고 민수기도 마찬가지고 신명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 말라기까지 역시 그렇게 믿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믿을 때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그렇게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는 그 말씀대로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십일조를 하고 있고, 주일을 안식일과 같이 지키고 있고,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다. 왜 그러한 행위를 하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복음이 안 보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그가 목사면 뭐하고 신학박사면 뭐 합니까? 그의 눈에 복음이 안 보이면 그는 소경과 다름이 없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고 있지만 복음이 안 보이니까 믿을 수 없고 점점 더 성경의 문자를 보고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이 시대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가르치고 있는 성경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아니 율법에 눈이 멀어서 복음이 안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 말씀이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모르게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믿으라고 하고, 주일을 믿으라고 하고, 맥추감사절을 믿으라고 하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이 보이는 성도는,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는 그것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렇게 믿어져야 합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믿음의 말씀을 계속해서 보면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그 말씀을 보고 믿음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으면 그것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믿음에 이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구약 성경에서 믿음의 말씀을 100개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어느 사람은 구약에서 믿음의 말씀을 1000개 보았습니다. 누가 믿어지는 역사가 있겠습니까? 당연히 구약에서 1000개를 본 사람이 100개를 본 사람보다 믿어지는 역사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한 행동으로 진리를 가로막는 사람의 온갖 불경건함과 불의함을 겨냥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납니다.”
축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노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축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진노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는 축복만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성경을 보았지만 복음을 본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보고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다가 진노를 받았습니다.
정말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보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역사를 합니다. 하지만 누가 진노를 받고 있는가 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서 하늘로부터 좇아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진노가 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불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불의로 진리를 막은 것같이 이 시대 역시 똑같이 하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잠언 12:12절을 보겠습니다. (구 923쪽)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교회 안입니다.
성도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는 악인이라는 말씀이 참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믿지를 않고 있는 사람을 악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지만 복음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이 안 보이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이 율법이 무엇인가 하면 불의의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불의의 이를 탐했는가 하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정도로 불의의 이를 탐했지만 그들은 복음을 몰라서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이 불의의 이가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는 것을 방해하고 말았습니다.
악한 자입니다
성경을 보았으면 당연히 복음을 보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가리는 율법의 행위를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가리고 있다는 것을 이스라엘도 몰랐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도 역시 모르고 종교에 빠져 모두가 율법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이 악합니까?
그들은 죄인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누가 악한 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의 종교 안에 있으면 선하고 자기들의 종교 밖에 있으면 악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이 있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불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두 가지의 의입니다
사람이 행하는 의가 있습니다. 주님이 오셔서 이루신 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루신 의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는 복음입니다 우리가 의를 행하지 않았지만 의롭다 함을 얻게 하는 의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행하는 의는 다 불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절기를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로서 살아가는 행위들을 하고 있습니까? 이것이 사람의 이성에는 의로 보일지 몰라도 성경에서는 불의의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가 다 불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의가 진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지만 사람들은 불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불의입니다
그리고 의입니다 의라고 할 때는 반드시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내가 의를 행하면 그것으로 생명을 얻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을 얻지 못하면 다 불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생명을 얻지 못하고 행하는 의는 다 불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불의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막고 있습니다.
악인은 이 불의의 이를 탐하면서 진리를 막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서 진리를 막았습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면서 진리를 막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불의의 이를 탐하면서 진리를 막고 있지만 도리어 불의의 이를 탐하는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누가 진리를 막습니까?
교회 안에서 불의의 이를 한 가지라도 탐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진리를 막고 있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가르치는 사람이 있다면 진리를 막고 있는 악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요한계시록 22:11절을 보겠습니다. (신 422쪽)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되게 하라”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불의를 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에 종말이 올 때에 까지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 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를 하는 자가 회개를 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불의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을 가슴 깊이 새겨야 합니다.
불의를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이 회개를 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이성으로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불의가 사람의 이성에는 의로 보이기 때문에 그대로 불의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에 이 불의가 사람의 이성에 불의라고 생각이 되면 당연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의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불의를 왜 그대로 하는가 하면 십일조를 내는 것이 성도로서 살아가는 당연한 도리라고 생각을 하고 있고,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는 것이 성도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이것이 불의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죽을 때까지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보시기 바랍니다.
죽을 때가 되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불의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도 잘 나가고 또 찬양도 은혜롭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제 은퇴도 했고 세상에서 별로 할 일도 없다 보니까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그것이 의를 행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서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저 세상에 있는 사람이고 자기들은 의를 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아니 더욱 의를 행하기 위해서 불의를 행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진리를 막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불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의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불의를 행하면서도 자기가 의를 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의를 모르고 불의를 모르기 때문에 불의를 죽을 때까지 그대로 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의를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의를 행하라고 말씀을 하니까 자기가 무슨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씀합니까?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하나도 없다고 성경이 분명히 말씀하고 있지만 그것을 사람의 지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자기에게는 적용을 안 시키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하는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의라고 하는 것이 다 의가 아니라 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이 없다고 말씀을 하면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도 없습니다.
오직 주님만이 이 세상에 오셔서 죄가 없으신 분이고 선을 행하신 의로운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천주교에서 성인이라고 하는데 성인이 어디 있습니까? 그들 역시 죄를 짓지 않고 선을 행한 의인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합니다.
행한다고 하니까 꼭 육체로만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죄를 짓지 아니하시고 선을 행하신 것을 마음으로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있는 성도는 죽을 때까지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거룩한 성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사는 자체가 불의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불의라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이것을 모르면 죽을 때까지 불의를 그대로 행하다가 더러운 자가 되어서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진노를 받습니까?
그 불의가 진리를 막기 때문입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그 불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대로 불의를 행하면서도 그 불의로 도리어 부자가 되어서 그렇게 행하는 불의를 보고 천국에 들어가는 성도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불의와 진리를 깨닫지를 못하면 다 진노를 받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보다보니까 진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불의로 인하여 진리를 막아서 진노를 받게 되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진노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이 진노를 받는다는 것이 아니라 정통이라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들이 복음을 알고 들어서 믿고 있다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 2:25절을 보겠습니다. (신 90쪽)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마태복음 5:4절을 보겠습니다. (신 5쪽)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경견한 자입니다
그는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경건치 아니한 자는 위로를 기다리고 있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에서 주님께서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경건한 자는 위로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건치 아니한 자는 위로를 기다리고 있지를 않고 있고 애통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애통한다고 하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 육체의 죄를 고백하면서 눈물을 펑펑 흘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애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심령이 가난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가난한 것이 아니라 불의의 이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자기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만 들어가서 그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애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가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야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보니까 하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애통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성경에서 죄인이라고 하니까 애통하는 사람은 위로를 받을 수 없습니다.
죄를 지었습니까?
그럼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 성도만이 애통할 수 있고 위로를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저 육체적으로 지은 죄를 생각하면서 그 죄를 고백하는 것으로 위로를 받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으로 위로를 받을 수도 없고 주님이 위로도 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믿지 않은 그 사람을 왜 위로해 줍니까?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나서 위로를 받아야 합니다. 경건한 자가 누구인가 하면 자기 죄를 알고 애통하는 자입니다 내가 십계명을 보았습니다. 그 계명을 보고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아는 성도는 애통할 수밖에 없습니다.
경건치 않은 자입니다
자기 죄를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죄를 모르고 있으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말로는 믿는다고 하고 있지만 실상은 믿지를 않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자기가 우상을 숭배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자기가 간음하는 자라는 것을 알아야 애통할 수 있는데 경건치 않고 불의를 행하는 자는 모르고 있습니다.
불의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불의를 모르면 자기가 경건한 자인가도 모르게 되고 죽을 때까지 그대로 불의를 행하다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하늘로 좇아오고 있지만 죽을 때까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로마서 1: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저희에게 보이셨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을 알 만한 일이 사람에게 환히 드러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환히 드러내 주셨습니다.”
불의를 행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불의가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불의를 행하면서도 자기들이 의롭게 살아가고 있다고 착각에 빠져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는 모든 일이 다 불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를 드립니까?
찬송을 부르고 있습니까?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전도를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십일조와 정해진 헌금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 진심에서 한다 해도 역시 불의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을 알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아담이 범죄를 했을 때 이 세상은 멸망을 했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입혀 주셨습니다.
그리고 노아 시대입니다
이 세상은 죄악이 관영하여 사람들의 생각이 항상 악함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류를 완전히 멸망을 시키지 않고 노아에게 은혜를 주셨습니다. 이스라엘도 진리를 찾고 공의를 구하는 자들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고 이방의 포로가 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이 시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다 해도 이 성경을 보고 누가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성경이 그것을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님을 삼년 반이나 쫓아다니 면서 천국복음을 들었던 제자들도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모두가 이전에 자기가 하던 생업을 하려고 갔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이 시대 지혜가 있어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누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기독교인은 있어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아주 극소수의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아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세상이 알고 있는가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이 시대 하나님을 알아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까? 불의를 행하느라 모두가 정신이 팔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 수 있게 성경을 통해서 보이시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게 마귀의 자식들이 되어서 율법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으로 우리 속에 보이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복음을 보아야 하는데 문자 그대로를 보면서 불의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2: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65쪽)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이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지 않은 상태에서는 아무리 그가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 해도 하나님을 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사람의 지식으로 보려고 하다가는 불의만 행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 이 시대 불의를 행하고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소경입니다
진리의 성경이 오시지 않으면 그가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역시 소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학 박사학위를 받고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이 인정을 한다 해도 역시 그는 소경입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없고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경륜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령을 받았습니까?
계속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아직 성령이 임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가 신학박사라 해도 소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일조를 믿음으로 드립니까? 정신 나간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데 어떻게 믿음으로 드립니까? 주일을 믿음으로 지킵니까? 주일날도 율법이고 또 주일에 드려지고 있는 예배가 종교의 법에 의해서 그 형식대로 드리고 있는데 믿음이라는 말로 미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습니까?
율법을 모를까봐 말씀을 드립니다. 사람이 자기 육체로 행하면서 삼가 지키고 있다면 그것은 다 율법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가 아무리 믿음으로 한다 해도 성령을 받지 못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할례를 행하는 사람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아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았다는 말도 스스로 속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에게 절대로 보이지가 않습니다. 그저 종교인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는 불의를 그대로 행하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우리에게 오셔야 합니다. 왜 성경에서 성령을 말씀하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성경을 보고 율법의 행위를 하게 되고 그것이 불의가 되어서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성령이 오시면 율법을 잘 지키고 심지어는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믿음을 준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우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을 믿지를 않고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이셔야 볼 수 있다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보이셨습니다.
성경을 보는 것으로 보이신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내 안에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성령이 오신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묻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행위를 단 한 가지라도 하고 있다면 그는 성령이 아직 오시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우리에게 보이셨는데도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왜 불의를 행하고 있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에 이 불의가 옳기 때문에 불의를 행하면서도 죽을 때까지 그대로 불의를 행하다가 더러운 자가 되어서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시편 31:21절을 보겠습니다. (구 823쪽)
“여호와를 찬송할지어다 견고한 성에서 그 기이한 인자를 내게 보이셨음이로다”
그 기이한 인자를 보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하나님의 사랑을 못 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복음이 보여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되어야 하는데 복음을 못 보니까 그 기이한 인자를 못 보고 불의를 행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이 불의와의 싸움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불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배가 부를 정도도 제사를 드렸지만 그것이 불의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지켰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이레에 이틀을 금식했습니다. 지금으로 하면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매일 새벽 기도를 나가고, 매 주일날 예배를 드렸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게 불의를 행합니까?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인자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음을 주시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고 있지만 그 의를 믿지를 못하니까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아니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사람이 알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지혜로 알 수 있다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이 무슨 세상의 공부를 하는 것으로 알고 이 시대는 박사 학위를 남발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공부를 해서 박사 학위를 따면 뭐 합니까? 하나님께서 복음을 안 보이시면 아무 것도 아닌 그저 이 세상에서 다른 박사를 따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압니까?
누가 성경에서 감히 자기를 박사라고 했습니까? 사도 바울도 만삭 되지 못한 자기에게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신약 성경의 대부분을 기록한 사도 바울도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자기에게도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이심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데 이 시대는 박사가 되어서 보려고 하고 있습니다.
제발 웃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박사는 개나 주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목사들이 박사라고 가운에 세 줄을 그어 입고 강대상에서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가르치고 있습니까? 복음을 모르다보니까 불의를 행하라고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감성적입니다.
그 불의를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말로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이 어떻게 육체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룰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 종교가 되어 있는데 모두가 그 종교의 포승에 묶여서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는 늘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성경에서 복음을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그 불의가 무엇이라는 것도 모르고 그 불의로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모르고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습니까?
그럼 율법 외에 나타난 한 의를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람이 복음을 알고 있고 하나님의 의를 믿음으로 구원에 이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알 만한 것이 우리 속에 보이면 불의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의에 대해서 보이신 성도는 겸손합니다. 누가 자기를 박사라고 합니까? 누가 자기를 의롭다 합니까? 아니 율법을 지키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이 복음이 보이지가 않는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는 불의를 행하게 되어 있고 그 불의가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라는 말씀입니다
로마서 1: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 세상 창조 때로부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속성, 곧 그분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은, 사람이 그 지으신 만물을 보고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핑계를 댈 수가 없습니다.”
창조입니다
이 시대는 과학이 발달을 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지구에서 나타나고 있는 여러 가지 화석이나 이제까지 있었던 생명체를 보면 당연히 진화론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진화론의 한계는 생명에 대한 단서를 아직 못 찾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구 나이가 45억년이 되었다고 말 합니다
그리고 우주를 보면서 나이를 계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런 것이 다 틀리다 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진화론으로 규명을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생명의 탄생입니다 다 추측에 의한 가설이지 이것이다고 명확하게 이야기를 하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가설에 의한 것을 가지고 진화론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화석으로 있는 것으로 보았을 때는 분명히 공룡이 살았던 때가 있었던 것은 사실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왜 이 세상을 창조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스스로 계신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우주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속해 있는 은하와 태양계를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이 지혜가 있고 과학이 발달을 했다 해도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것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과학적으로 빅뱅을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중력에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이 우주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물에 분명히 보이셨습니다.
세상에 있는 갖가지 것들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있고 또 보이지는 않지만 알고 있는 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도리어 이 보고 있는 것들을 보면서도 진화론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물에게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신성을 만물에게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구속을 이루심으로 만물이 그것을 보았고 알게 되어서 이제는 불의를 행하면서 핑계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이제는 더 이상 핑계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고진도전서 1:18절을 보겠습니다. (신 264쪽)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 보이지 않는 능력을 만물에게 보이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도 불의를 행하는 사람은 더 이상 핑계할 수 없이 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사람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먼저 보여 주신 것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지었던 성막입니다 그러나 그 성막을 보고 이스라엘은 제사를 드리는 일에만 열심을 냈습니다. 그 후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보이지 않던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보이셨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이것을 보았다면 당연히 이제는 더 이상 불의를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이스라엘은 이해가 되지만 이방은 이제 신약성경까지 다 보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모른다면 그가 아무리 핑계를 댈지라도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의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 하나님의 능력을 못 보았습니다. 물론 성막을 통해서 그림자로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방의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더 이상 핑계할 수 없이 진노를 받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진노를 받게 되는 그 불의를 행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멸망을 당한다는 말씀입니까? 지금 이 시대 교회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들이 멸망을 당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이 멸망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만약에 그에게서 불의가 하나라도 나타나고 있다면 그는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아닌 사람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면 그는 믿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이렇게 불의를 행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한 것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능력을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이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불의를 행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진노를 받을 사람이고 그는 핑계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알고 있습니까?
그것이 복음이고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말로는 십자가의 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불의를 행하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십자가의 도를 알고 있다고 해도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의 영원하신 능력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영생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얻는 것이 복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영생을 얻는 것이 얼마나 쉬운가 하면 하나님의 은혜로 얻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오직 믿음으로 살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복음을 믿는 능력이 우리에게 임해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이 되고 있지만 불의를 행하면서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아주 미련하게 보인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오직 믿음을 말씀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지혜가 없는 미련한 사람으로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능력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보고 있습니다. 그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의 도를 믿지 않고 교회 안에서 그대로 불의를 행하는 자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핑계할 것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직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모든 사람들에게 임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능력을 만물에게 보이셨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도 그 능력을 믿지 않고 도리어 불의를 행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십자가가 능력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진노를 받으며 불의를 행하는 사람들에게는 이 능력이 미련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사를 보아도 그렇고 지금 이 시대 교회를 보아도 역시 하나님의 능력을 믿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불의를 행하면서 그것을 서로 칭찬해 주고 있습니다.
보이셨습니다.
십자가의 도를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나중에 진노를 받을 때 핑계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을 믿는 것이 어려운 것이라면 너무 무거워서 우리가 믿을 수가 없어서 그랬다고 핑계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가난한 자에게도 하나님의 능력이 되어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핑계를 아시기 바랍니다.
어떤 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공연히 내세우는 구실입니다. 복음을 우리에게 보이셨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선지자들로 미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신약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핑계를 댑니까?
성경은 핑계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려운 것이라면 핑계를 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저 하나님의 능력을 마음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15절을 보겠습니다. (신 43쪽)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핑계 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에서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구원을 받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생 모두에게는 믿을 수 있는 재능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달란트의 비유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생명을 얻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구원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비유입니다 세 사람을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세 사람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재능을 주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을 수 있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다 믿을 수 있습니다. 거지도 믿을 수 있고, 고아도 믿을 수 있고, 과부도 믿을 수 있고, 나그네도 믿을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생명이 탄생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재능을 받았으면서도 믿지 않는 사람이 교회 안에 있습니다.
누가입니까?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만물들에게 보이셨는데도 이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믿지를 않았습니다. 그 재능이 어려운 것이라면 핑계를 댈 수 있는데 재능이 너무 쉬운데도 한 달란트를 받은 종은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악 합니까?
불의의 이를 탐하다가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주님은 재능을 주시고 갔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만물들에게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불의의 이를 탐하는 자는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게 되는데 그때에 핑계를 대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핑계합니까?
달란트를 남기는 것이 어렵습니까? 보고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아무리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어도 성경을 보고 믿으려고 하기 보다는 불의를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밝히 보여주셨는데도 만물들에게 모두 보여주셨는데도 사람들은 믿지를 않고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주님께서는 부활하셨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복음이 그들의 눈에는 안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성경을 자기 이성으로 보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들에게 보이셨지만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81쪽)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그의 신성입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었습니다. 이 시대는 부활에 대해서 너무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부활을 하셨는가도 모르고 주님이 누구신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너무 막연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보고 있고 일관성이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이때는 이렇게 보고 저때는 저렇게 보면서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는 기초가 되는 말씀들이 있고 그 말씀을 기초로 두고 보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의 신성입니다
부활을 하셨다는 것은 그의 신성을 보여주신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고 오셨습니다.
이 시대는 주님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으로 믿지를 않고 삼위일체의 성자의 위의 하나님으로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신성을 모르는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았다는 말씀은 주님은 영이신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영으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육체의 부활을 믿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신체가 부활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영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하셨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부활을 하심으로 해서 하나님으로 나타나셨다는 말씀입니다
다 보았습니다.
만물들에게 이 모든 것을 다 보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이 지음을 받은 만물이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나타내신 것을 믿는 일이지 그것이 종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그때에 복음을 믿지 않는 자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다고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25:41절을 보겠습니다. (신 45쪽)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왼편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시기 바랍니까? 우리가 언제 하지 않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들의 핑계를 듣지 아니하시고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입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 딴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께서 물으시니까 우리가 언제 하지 않았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를 묻는 것이 아닌데 이 염소들은 복음을 믿지도 않았으면서도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핑계대지 못 합니다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하느냐고 할 것입니다 차라리 믿지를 않으면 진노를 받지 않을 수 있습니다. 아니 저주를 받아 영영한 불에 들어가지를 않을 수 있습니다 누가 저주를 받는가 하면 불의를 행하면서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그렇게 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누가 저주를 받고 누가 진노를 받습니까? 성경이 누구에게 말씀하고 있는가를 정말 냉정하게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사람은 나중에 주님이 오셔서 다 심판을 할 때 불로 소멸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막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는 영영한 불이 예비가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는 축복과 저주가 있습니다.
분명히 복음을 알아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러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의를 행하다가 주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하면서 저주를 받았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이 불쌍합니까?
물론 그들도 정말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불쌍합니다. 그러나 더 불쌍한 사람은 교회 안에서 불의를 행하면서 진리를 막고 있다가 저주를 받아 영영한 불에 들어가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들이 누군가 하면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오셨을 때 저희가 핑계대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잘 모르는데 목사가 이렇게 믿으라고 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목사가 율법을 지키라고 해서 지켰고 나는 진심으로 믿고 싶어서 목사의 말을 따라 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핑계가 안 됩니다
그런 말이 나중에 핑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모두가 볼 수 있는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지혜가 없으면 구하면 주시겠다고 하셨고 성령을 구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아무리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어도 주의 깊게 보지를 않았습니다. 아니 성경보다 목사의 말에 더 귀 기울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 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40쪽)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면서도,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드리거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해져서, 그들의 지각없는 마음이 어두워졌습니다."
하나님을 압니다.
누가 압니까?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고 알지도 않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일입니다
그래도 구약은 이방과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신약의 거의 모든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잘하는 것은 자기들이고 성경에서 나쁜 말씀이 나오면 자기들이 아닌 이 세상 사람과 이단에 대해서 말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정통입니까?
그 정통에 미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선민이라는 것은 이 시대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를 말씀하고 있고 성경의 모든 나쁜 일들이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렇게 합니까?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말씀들을 보면서도 자기들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의 나쁜 의미의 말씀들이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서 다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성경에서 책망을 하고 나쁘게 하는 말씀은 이 시대 교회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복음을 모르다 보니까 성경을 거의 자의적으로 풀고 있습니다.
영화롭게도 하지 않습니다.
귀하게 되어 세상에 이름이 빛나게 되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습니다. 그 이름이 무엇입니까? 그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아야 영화롭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으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됩니다.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데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그들이 불의로 인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유명한 전도자가 되어서 기독교라는 종교를 세상에 전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다면 그는 하나님을 안다고는 하지만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불의를 가르쳤다면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존경을 받는다 해도 미련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구원을 받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을 받지 못한다면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행위로 영화롭게 했다 해도 그는 미련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지만 영화롭게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감사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불의를 행하고 진리를 막아서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와서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이렇게 불의를 행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계속해서 18절의 말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말씀합니까?
이 시대 교회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너무도 잘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로마서를 보면서도 아니 이 로마서의 주석을 쓰고 강해를 하는 수많은 신학자들이 교회 안에서 불의를 누가 행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불의를 행하는 것을 당연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내 행위입니다 그것은 다 불의입니다 내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불의고 그것이 진리를 막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 또 불의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모든 교회가 불의를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 불의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지도 않고 감사치도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불의로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는데도 자기들이 그저 말로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참 빛을 보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44:9절을 보겠습니다. (구 1021쪽)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의 기뻐하는 우상은 무익한 것이어늘 그것의 증인들은 보지도 못하며 알지도 못하니 그러므로 수치를 당하리라”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습니다.
교회 안에서 불의를 행하는 사람의 생각이 허망하여졌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알고는 있지만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하지 않고 있고, 감사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시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입니다
교회 안에 절대 다수가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행하고 있는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사야에서 우상을 만드는 자는 허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우상을 만드는 자는 허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만드는 우상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상에 대해서 로마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우상을 만들어서 허망하여졌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가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우상을 안 만들었습니까?
십계명의 두 번째 계명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래도 장담하는 계명이 있다면 이 우상을 섬기는 일일 것입니다 이사야의 말씀과 같이 그래도 자기들이 이스라엘과는 다르게 우상을 만들지 않았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상을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십계명을 보고 우상을 만드는 일을 자기는 지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온갖 우상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솔직히 너무 많은 우상이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습니다.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으면서도 도무지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우상입니다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우상을 만들거나 숭배하면 지옥에 간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자기들은 절대로 우상을 숭배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행위로는 분명히 우상을 만들지도 않고 우상을 숭배하지도 않습니다.
율법은 그림자입니다
구약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문자 그대로는 분명히 우상을 숭배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율법에 가입한 것은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깨닫기 바랍니다.
십계명에 두 번째 계명이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계명입니다 이 율법을 보았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가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가입을 했으면 당연히 죄를 깨달아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복음이 될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우상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우상을 만듭니까?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로 진리를 막는 자가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우상을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우상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불의를 행하는 자가 진리를 막고 있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생각이 허망하여져 있다면 그런 것입니다 또 우상을 만드는 자가 허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다면 불의를 행하는 자는 우상을 만들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상을 만들고 기뻐하고 있지만 그것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하고 있습니까?
이 로마서를 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얼마나 많은 우상이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우상이 무엇인가 하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59쪽)
“전엣 계명이 연약하며 무익하므로 폐하고”
디도서 3:9절을 보겠습니다. (신 350쪽)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우상은 무익합니다.
그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엣 계명은 연약하고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는 허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우상은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전엣 계명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율법에 대한 다툼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는 우상입니까?
이제는 보이지 않는 우상이 교회 안에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이 무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우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고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이 우상이라는 것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부처가 우상입니까?
단군 상이 우상입니까? 몇 년 전인가 사회에서 단군상을 세우니까 그것을 훼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 하면 우상을 만들어서 섬기고 있는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부처가 우상이고 단군이 우상입니까? 물론 우상이 맞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누가 그런 우상을 만들고 누가 그것을 세워 놓고 숭배를 하겠습니까?
어느 교회에서 누군가 그렇게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이제 처음 교회에 나온 사람까지도 그 교회를 나갈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보이는 우상도 물론 우상이 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는 보이지 않는 우상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 우상을 마음껏 섬기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라고 하면서 우상을 훼손하고 있습니다. 정말 코미디를 하고 있습니다. 우상을 마음껏 만들어서 섬기는 그들이 교회 밖에 있는 우상을 훼손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지만 그 생각이 허망하여져서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섬기면서도 그 마음이 어두워져서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는 있지만 소경이 되어서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가 하면 그 생각이 허망하여졌고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불의로 진리를 막아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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