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4:26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그 자녀들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이스라엘이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노릇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과 바리새인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종이 되어 있으면서도 우리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남의 종이 된 적이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동문서답을 하면서 육의 일을 말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이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육체의 혈통으로 난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대화가 안 됩니다,
우리가 복음서를 보면 잘 알겠지만 주님과 이스라엘의 대화를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육체로 따라 난 사람과 성령으로 난 사람의 대화가 그렇다는 것을 보여 주는 일입니다, 이 시대도 역시 육체를 따라 난 율법을 지키는 교인들과 성령으로 말미암은 성도들은 동문서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모릅니다.
절대 그들에게는 이해가 안 됩니다, 사실 율법주의자들에게는 영의 일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이해가 되겠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그것은 이해할 수 있다 해도 율법을 지키는 일이 악하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를 따라 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거치는 것이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종교적인 일들이 다 악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아니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이라는 것은 성령이 오시지 않은 성도가 아니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율법을 폐하였다고 하는 사람은 간혹 가다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또 다른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간혹 가다가 있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이라고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육체를 따라 난 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악이라는 말씀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도 받아들이기가 힘이 듭니다.
이것이 영의 일입니다.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말씀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시대도 거의 모든 교회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설령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 해도 성화의 부분에서 또 다른 악을 행하고 있고 은사에 대해서도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저주 아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분명히 저주를 말씀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왜 두려워하지 않는가 하면 율법의 종이 되어서 진리를 모르다 보니까 두려움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2000년 전에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사람이 종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교회라고 다를 것 같습니까? 성경의 예표들은 지금 이 시대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말씀은 이 시대 지금 있는 교회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한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단 한 가지 할례라는 율법이 들어왔고 그 율법을 행하고 있는 사람들이 종이 되었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사도 바울이 이렇게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는 얼마나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 그 수를 다 셀 수 없습니다.
전혀 모릅니다,
종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아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 다 아들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도 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습니다. 그러나 할례라는 율법이 들어오니까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성경에서는 많은 말씀들이 교회를 예표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교회들이 어떻게 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카데미 강의에서는 거의 부정적인 교회의 모습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은 교회가 그렇게 타락을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며 실제 이 시대 교회를 보면 그렇기 때문에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갈의 교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라의 교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라의 교회는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예루살렘은 거의 모든 사람들이 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인정을 한 교회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교회가 종노릇하고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면 다 율법의 종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율법을 지키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에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리를 모르다 보니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과 같이 율법의 종이 되어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문자를 알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지만 실제 그들을 보면 하갈에게서 난 종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이며,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과 같이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하갈과 사라는 두 언약이며 두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며 그것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것은 이 땅에 있는 교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전이 있던 예루살렘은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보이는 성전은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보이는 교회는 이 세상에서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두 언약을 말씀하면서 하갈이 누군가를 가르쳐 주었습니다.
예루살렘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굳게 믿고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고 자부를 했던 그 중심의 교회가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모두가 인정을 하는 그 예루살렘이 종이 되어 있는 교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모두가 인정하는 그 교회들이 종노릇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리고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이것은 두 교회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1:2절을 보겠습니다. (신 420쪽)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요한계시록21:7절을 보겠습니다. (신 421쪽)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은 교회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모두가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도가 탄생이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땅의 교회입니다.
그것은 종노릇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 땅에 있는 교회들은 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교회라고 간판을 내 걸고 있는 모든 교회는 다 율법의 종이 되어 있습니다. 어느 교회가 율법에서 자유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저는 아직 못 봤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제가 모르는 곳에 그런 교회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교회를 못 봤습니다. 땅에 있는 교회는 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의 어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하늘의 있는 교회만이 자유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고 거기서 낳아야 아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요한계시록에서는 새 예루살렘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고 있습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의 이 말씀은 천국을 환상으로 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가 어디에 있는 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디로부터 낳아야 하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늘로 부터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듯이 성도도 역시 하나님께 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육의 사람이 아니라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다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 교회가 우리의 어머니 사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자유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그 어머니에게서 난 사람은 다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리입니다, 또 하나님을 진리의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성도만이 하나님께 로서 난 자고 그들이 위에 있는 자유하는 여자 위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성도가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유입니다.
지금 하갈과 사라를 비유로 해서 두 예루살렘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하갈이며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사라입니다. 이 사라를 자유하는 여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땅에 사는 사람은 종이 되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성도는 진리를 알아 자유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입니다.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가 누구입니까? 요한일서에서 우리의 이김은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유업으로 얻는 성도는 이기는 자입니다,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을 받는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서냐고 묻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은 우리의 어머니 자유하는 여자 사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예루살렘을 기업으로 얻는 성도는 이기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복음을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은 성도라는 말씀입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은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물론 성도가 예배하기 위해서는 때로 그 보이는 교회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땅에 교회를 세우는 순간 어떻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 사는 자가 아니라 새 예루살렘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의 일입니다.
참 어렵습니다. 이제까지 땅에 있는 교회에서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던 사람들이 영의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초대 교회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건물을 교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그 건물이 교회가 되는 순간 그것은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배하는 장소입니다.
물론 필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하늘에 있습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장소가 필요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이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되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어머니는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기는 자만 들어갑니다.
우리의 이김은 믿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자인가 아니면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난 자유하는 자녀인가를 잘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이기는 성도만이 새 예루살렘을 기업으로 얻을 수 있습니다.
땅에 교회를 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순간 그 교회에서 종노릇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제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종노릇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예배를 드리는 일, 찬송을 부르는 일, 기도를 하는 일, 그리고 모든 행위들이 다 종노릇하는 율법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찬송이 기도가 어떻게 율법이 되느냐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율법입니다.
지금 예배 때 마다 찬송을 언제 부르고 기도를 언제하고 하는 것이 다 법으로 정해진 예배 순서에 따라 하고 있지 않습니까? 땅에서 종노릇하는 사람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위에 있는 예루살렘 자유하는 여자 사라에게서 난 성도들은 그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삼가 지킵니다,
다 율법입니다, 예배를 삼가 드리고 있습니다. 그 예배를 드리면서 순서에 따라 삼가 찬송가를 부르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율법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제가 전혀 기도를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의식화 되어 있는 모든 것은 다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자유하는 여자가 곧 우리의 어머니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말씀입니다, 진리를 알게 되면 하갈에게서 난 종과 같이 율법에 종노릇 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땅에 교회를 세워 놓고 사람들은 스스로 종이 되고 있고 그것이 이제 2000년 가까이 그렇게 하다보니까 이제는 어느 누구도 그것을 부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났습니다.
그 말씀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말씀이며 그것은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진리를 알고 있는 성도는 성령으로 난 자이며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듣고 믿음입니다. 어디에 속한 교회에 있는가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는 사람은 지금 있는 예루살렘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말씀은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를 만들어 놓고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입니다,
이기는 자입니다, 하늘의 유업 새 예루살렘을 받았습니다. 그 성도는 이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종노릇하지 않습니다. 오직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에 속해 있고 자유하는 여자에게서 낳은 자녀입니다. 그렇게 낳은 자를 그리스도이 영이 있는 성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27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기록된 바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구로치 못한 자여 소리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성경에 기록하기를,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여, 즐거워하여라. 해산의 고통을 모르는 여자여, 소리를 높여서 외쳐라.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남편을 둔 여자의 자녀보다 더 많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여자입니다.
성경에서 여자라는 말씀이 있을 때는 네 가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첫째는 우리가 알고 있는 생리적인 여자입니다. 두 번째는 아직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을 여자라고 합니다. 세 번째는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여자라고 합니다, 네 번째는 교회를 여자라고 합니다. 이 네 가지를 늘 생각하면서 여자라는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사람은 너무 일률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비유 하나를 알았으면 모든 것을 다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이웃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내 이웃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의 관계를 이웃이라고도 합니다. 그리고 사단을 뜻하기도 하고 있고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기도 합니다.
비유를 잘 알아야 합니다.
어느 한 가지를 알고 있는 것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그렇게 해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그래서 더 어렵습니다. 이 모든 비유를 알아야 성경을 그나마 어느 정도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비유도 모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비유인지 아니면 문자 그대로인지도 잘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도가 탄생이 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바른 교회가 아니라 음녀의 교회가 너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말 그런 음녀의 교회를 비유하는 말씀들을 깨닫지 못하면 하갈의 교회에서 평생을 종노릇하다가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54: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4쪽)
“잉태치 못하며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이사야의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그대로 인용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여 생산치 못한 너는 노래할지어다 구로치 못한 너는 외쳐 노래할지어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지식보다 많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여자를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잉태치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본 적이 없는 너는 소리 질러 외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를 보니까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갈의 자녀가 되어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여자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잉태를 하지 못하고 해산의 고통을 격어 보지도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라는 교회는 어떻습니까? 율법의 남편을 섬기면서 거의 모든 사람이 그 안에서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하는 여자에게서는 자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해산하는 수고를 다시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는 여자에게서 낳은 자녀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은 종노릇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의 남편에게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홀로 사는 여자는 남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기 때문에 홀로 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많습니까?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가 많습니다. 이 세상에서는 지금 현재 이스라엘을 볼 때는 남편 있는 여자의 자녀가 많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교회에 사람들이 더 많다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서에서 두 남편으로 비유를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지금 현재 이사야 시대의 이스라엘은 남편 있는 자의 자녀가 더 많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많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보이는 교회입니다. 늘 그 안에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보아도 그렇고 초대교회로부터 해서 중세를 지나오면서 교회가 얼마나 성장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보시기 바랍니다, 남편 있는 자의 자녀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잉태를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잉태를 못한다는 말씀입니까? 자유하는 여자 새 예루살렘이 잉태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해산의 고통을 격어 보지도 못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잉태를 하지 못하니까 당연히 해산의 고통도 느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압니다,
지금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 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새 예루살렘을 유업으로 얻으려면 정말 해산하는 수고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복음이 있는 성도만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남편 있는 자는 너무도 많은 종을 낳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도 그것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홀로 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식보다 많음이니라
지금 그렇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은 남편 있는 자의 자녀가 훨씬 더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실 때가 되면 누가 더 많이 있습니까? 그때가 되면 이 세상이 주님의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들은 다 사망에 이르고 홀로 된 여자가 낳은 아주 적은 숫자지만 그들만 남기 때문에 홀로된 여인의 자식이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더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누가 더 많다는 것은 이제까지 갈라디아서 강해를 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잉태치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해산의 고통을 격어 보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듣고 믿는 성도가 얼마나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얼마나 적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노아 홍수 때는 노아 한 사람이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때는 의로운 롯만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는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예레미야 때는 진리를 찾고 공의를 구하는 자가 한 사람도 없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습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의 숫자가 천만 명입니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수가 바다보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만 명 중에 몇 명이 남은 자인 줄은 잘 모르겠지만 아주 적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잉태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늘의 새 예루살렘이 잉태치 못하고 있습니다. 남편 있는 자의 자녀는 천만 명이 가까지 되는데 홀로 사는 여자는 그러니까 진리를 전하고 있는 교회는 거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해산의 고통을 겪어 보기라도 해야 하는데 없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고 복음을 듣고 믿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우리는 거의 안 보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홀로 사는 여자입니다,
성경 밑에 따로 적혀 있습니다. 광야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예루살렘의 교회에 성도들은 마치 이 세상에서 광야에서 사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성도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적습니다.
아주 적다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볼 때는 잉태치 못한 자 같고 또 해산의 고통을 격어 보지 못한 자 같아도 영원히 있을 성도들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주 적은 숫자지만 주님이 오실 때는 지금 많아 보이는 그 숫자들은 사망을 당하게 되고 우리는 영원히 천국에서 축복을 받기 때문에 많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편지 아카데미를 하고 있습니다.
아주 적은 사람이 모여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교회가 보았을 때는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정도입니다. 지금 우리가 대도시에서 아주 조그만 사무실에서 하고 있습니다, 도시만 대도시지 사실은 광야와 같은 사무실에서 주의 만찬을 나누고 있습니다.
안타깝습니다.
정말 사도 바울과 같이 해산하는 수고를 하고 있지만 그 사람들이 복음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다가도 다시 세상으로 가는 것을 볼 때마다 정말 한 영혼을 구원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가를 느끼고 있습니다. 잉태치 못한다는 이 말씀이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주님께서 구원하실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영혼 구원의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달려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너무 힘들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이 시대에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그것을 듣고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갈라디아서4: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사도 바울이 정말 간곡하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이삭을 낳은 것 같이 너희도 약속에 의해서 태어난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종이 되고 있는 교회를 보고 너무도 안타까워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인데 왜 하갈이 낳은 종과 같이 율법의 종이 되려고 하느냐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 있는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유대인들이 종인데 왜 너희가 그들을 따라 종이 되려고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누구의 자녀입니까?
하갈의 자녀는 반드시 율법의 종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저유하는 여자인 사라의 자녀는 아들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사도 바울이 할례라는 율법 한 가지가 들어와서 할례를 받고 있는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많습니까?
당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아주 적은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복음이 전해진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가 쉽게 율법에 미혹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예루살렘에 있는 많은 사람이 있었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은 아주 적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당연히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예루살렘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아직까지 예루살렘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들도 역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어떻습니까?
비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쉽게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홀로 사는 여자의 자녀가 너무 적다 보니까 사람들이 쉽게 흔들리고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가 아니라 이방에 복음이 먼저 전해지고 나서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지고 들어왔습니다. 지금은 율법이 이미 교회 안에 들어와 있고 사실 복음은 거의 사라졌습니다,
약속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천국의 유업을 얻는 자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유대에서 온 거짓 형제들에게 미혹이 돼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이제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의 유업을 약속으로 받았다고 믿었는데 율법을 지키므로 종이 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일서2: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90쪽)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그 약속이 무엇인가 하면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만이 이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저 문자적으로만 알고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라고 하니까 그저 약속의 자녀라고 생각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이런 말씀을 안다고 해서 내가 약속의 자녀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신약 성경을 보면서 이런 말씀을 알고 나면 마치 그냥 자기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약속의 자녀라고 하니까 자기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약속의 자녀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는 것이 병입니다.
바로 알면 그것이 병이 안 되는데 어설프게 아는 것이 이 시대는 병이 되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가 약속의 자녀가 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 약속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자기가 약속의 자녀가 되었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적으로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약속의 자녀가 되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내가 약속의 자녀인가 아니면 종으로 살고 있는가를 알아야 약속의 자녀가 되고 그 약속이 곧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다고 다 약속의 자녀는 아니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분명히 사도 바울이 지금 현재는 남편 있는 자의 자녀가 많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종노릇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남편 있는 자의 자녀가 더 많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남편 있는 자의 자녀는 어떻게 살고 있습니까?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교회가 계속해서 있었지만 다 율법주의에 빠졌다고 보면 맞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고 또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교회사를 보아도 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싸움입니다.
복음과 율법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지는 사람은 종이 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라는 교회에서 이스라엘이 사십년을 유리하다가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이 다 죽은 후에 그 후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광야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를 주셨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왜 성막을 지었습니까? 가나안에 들어가서 성전을 지어도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광야에서 반드시 성막을 지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전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시고 주님께서 너희가 성전을 허물라고 하시고 내가 삼일 만에 일으키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성전은 자기 육체를 가르쳐 하신 말씀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전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면 뭐 합니까?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가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왜 광야에서 성막을 짓게 하셨는가 하면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에 성막을 짓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보이는 성막을 짓기는 했어도 주님의 육체가 되시는 성전에 대해서 영의 의미를 하나도 몰랐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성경에 있는 말씀은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기 안에 보이지 않는 성전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을 짓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보이는 성전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 했고 이 시대는 신약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 때문에 자기 안에 성전이 지어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성막론에 대해서 바로 강의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것만 보아도 그들이 자기 안에 성전이 있는가 없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영생이 이것이라고 요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의 자녀입니다.
그냥 성경에서 약속의 자녀라고 하니까 약속의 자녀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약속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어져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는 이 성전을 짓기 위해서 광야 사십 년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율법의 종이 되어서 광야 사십 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생명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이 성전에 있다는 말씀이며 그 성전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라는 말씀입니다, 광야 사십 년 동안 우리 성도는 반드시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어디에 지어야 하는가 하면 내 안에 지어야 합니다.
바로 성령입니다,
성령이 오셔서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서 내 안에 성전이 지어져야지만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전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율법을 받고도 왜 주셨는가를 몰라서 자기들이 다 지키겠다고 하나님과 언약을 하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그것을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죄를 더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죄를 깨닫지도 못했고 율법을 보고 죄가 더해지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표를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요단강입니다.
죽음의 강입니다. 그 강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발을 담그자 물이 갈라졌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요단강에 빠져 죽어야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요단강에 빠져 죽게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십자가에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먼저 내 안에 성전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반드시 그 율법을 요단강에 빠뜨려 죽여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약속의 자녀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것이 어디에 있는가 하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성막입니다.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반드시 이 성막을 지어야 합니다, 그리고 율법을 통해서 죄가 더해져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율법을 반드시 폐할 수 있습니다, 율법을 폐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그것을 이루셨다는 것을 믿고 행함이 있는 믿음을 보여야 합니다.
성경은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그리고 비유입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그저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약속의 자녀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약속의 자녀가 어떻게 되는가를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종노릇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면 그는 절대로 약속의 자녀가 될 수도 없고 요단강을 건너서 가나안에 들어갈 수도 없습니다.
약속의 자녀입니다.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합니다, 믿으려면 내 안에 성막이 지어져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요한복음에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의 자녀는 반드시 율법의 종이 되어서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라는 단 한 가지의 율법을 가지고 지금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그 약속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약속의 자녀가 되려면 반드시 내 안에 성전이 지어져야 하고 또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가려면 율법을 죽음의 강에 빠뜨려 죽게 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가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종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면서 약속의 자녀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종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으면 그는 종이라고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는 말씀은 듣고 믿어서 성령을 받았고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지 그냥 성경에서 약속의 자녀라고 하니까 율법을 지키면서도 자기가 자녀가 된 것으로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갈라디아서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제까지 복음과 율법을 비교하면서 계속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를 말씀하면서 너희는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에서 난 종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성도들에게 사도 바울이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입니다,
종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약속의 자녀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가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 믿음이라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
사도 바울이 정말 안타까움에 간곡하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했는데 그들이 듣고 믿는다고 했는데 율법주의자들이 와서 미혹을 하니까 아주 속히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움에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2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생각으로 보았을 때도 누가 더 옳게 보이겠습니까? 교회가 모든 율법적인 것을 다 버린다고 할 때 이 세상 사람이라고 해도 이상한 교회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아마도 두 교회가 있다면 율법을 지키는 교회로 자연스럽게 사람들은 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종이 되어 살아가면서도 사람의 이성에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니 실제 자기가 해 보아도 율법을 지키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교회로 가서 신앙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사는 그 자체가 법에 익숙하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향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약속의 자녀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에게서 핍박을 받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율법을 지키는데 혼자 안 지켜보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서 율법에 대한 강요가 있기 마련입니다.
창세기21:9절을 보겠습니다. (구 26쪽)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소생이 이삭을 희롱하는지라”
이스마엘입니다.
그리고 이삭입니다. 둘의 나이차가 많이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이미 어느 정도 성장을 했고 이삭은 이제 어린 아이입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예표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때에 육신을 따라 난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형제입니다.
그렇다고 심하게 핍박을 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형이다 보니까 이삭이 꼼짝도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다 형제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예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그때에 육신을 따라 난 이스마엘이 성령을 따라 난 이삭을 핍박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비단 이스마엘과 이삭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면 이스라엘은 어김이 없이 핍박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이스라엘은 복음을 전하는 선지자들을 핍박을 했습니다. 그것과 같이 주님이 오셨을 때도 육신에 속한 이스라엘은 핍박을 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자입니다. 그런 자들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핍박을 하는가 하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에 대한 보상 심리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이렇게 힘들게 율법을 지키는데 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려고 하면 기분이 나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입니다.
유대로부터 온 거짓 형제가 할레를 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할례의 정당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또 그 할례를 누군가 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자기는 했는데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도 계속해서 하라고 강요를 하게 됩니다. 율법의 속성이라는 것이 바로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보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보이기 때문에 세상 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가 더 믿음이 있는 자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주류를 이루고 있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게임이 안 됩니다
핍박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들이 왜 핍박을 받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모든 사람이 다 율법을 지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복음을 혼자 전하려고 하니까 핍박을 받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거의 모든 교회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이 거의 절대 다수라서 성령으로 난 자가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부자는 개들과 함께 있었고 거지 나사로는 혼자였습니다. 그러니까 개들이 와서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개들은 당시 율법주의자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령으로 난 성도는 이 세상 종교인이 볼 때는 도무지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보여 지지가 않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에게 핍박을 받았습니까?
바로 율법주의자입니다. 이스라엘의 율법주의자들에 의해서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었습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날 때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하고 부르니까 사울이 누구시냐고 묻자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독한 율법주의자로 있었을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을 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자입니다.
당연히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육체를 통해서 일을 하는 사람은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이해할 수 없고 자기들이 행하는 율법의 행위를 강요하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도 제가 십일조를 하지 말고 주일을 지키는 행위가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만히 있겠습니까?
그냥 하지 말라고 하면 그나마 괜찮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악한 일이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하지 말라는 것은 그래도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지만 그것이 악하다고 말씀을 하면 얼마나 기분이 나쁘겠습니까? 자기는 정말 선한 마음으로 했는데 그것을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요한복음7:7절을 보겠습니다. (신 155쪽)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율법의 행위입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거의 모든 교회가 이것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소수의 교회에서는 십일조가 율법이니까 하지 말라고 하는 곳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일조를 악하다고 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제가 못 보았습니다.
십일조를 어떻게 합니까?
지금 이 시대 거의 모든 교인들이 이것을 믿음의 증표라고 하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한 십일조를 자기들도 믿음의 자손으로서 당연히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고 그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복을 쌓을 곳이 없게 부어 주신다는 성경 말씀을 보고 아주 열심을 내서 진실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생각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이 자기 믿음을 표현하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는가 하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악하다고 하니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누가 보아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는 의롭고 선한 일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악하다고 말씀합니다.
그냥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도 이스라엘에게는 참지 못할 일인데 그것을 악하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제는 분이 나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얼마나 선하게 살려고 의롭게 살려고 노력을 하고 있는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는 모든 행위를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나쁩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한기총 같은 곳에 가서 일인 피켓 시위를 하면서 한국 교회에서 하고 있는 십일조가 악하다고 하고 또 주일을 지키는 것이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곳에 다녀가는 사람들이 정신병자 취급을 할 것이 너무도 분명합니다. 그냥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악하다고 하면 그렇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사람도 저를 비난할 것입니다.
그래도 어떻게 주일까지도 비판을 하느냐고 하면서 그러면 저 사람들에게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하느냐면서 세상 사람도 저를 온전하게 보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이것이 육신을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와의 차이입니다, 그 간격을 어느 누구도 좁힐 수 없고 성령을 따라 난 자는 세상으로부터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말라는 것은 어느 정도 수긍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악하다고 하면 누가 더 욕을 먹겠습니까? 꼭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세상 사람도 저를 비난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 성령으로 따라 난 자가 핍박을 받는가 하면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폐하여 졌습니다.
그것을 지키지 말라고 하는 것과 그 행위가 악하다고 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속한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차원이 다릅니다. 누가 보아도 자기들이 하는 행위가 정당성이 있는데 그것을 악하다고 하면 다수를 이루고 있는 그들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핍박하게 되어 있습니다.
악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보아도 율법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을 해도 악하다고 하면 도무지 받아들이지 못 합니다. 십일조만 악한 것이 아니라 주일도 악하고 또 교인들이 세상에 가난한 자들을 돕는 그 일도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자를 종교인이 돕는 것도 악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세상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성경에서도 가난한 자를 도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그런 행위까지 악하다고 하느냐면서 저를 비난할 것이 분명합니다. 십일조를 반대하는 세상 사람들도 가난한 자를 돕는 종교인들의 행위는 의롭고 선하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저를 더 나쁘다고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은 교회 안에 있든지 교회 밖에 있든지 모두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가 악하다는 것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으로 난 자는 육신을 따라 난 자들에게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은 육신을 따라 난 자들에게 핍박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스마엘과 이삭의 예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때에도 이스마엘이 형이다 보니까 아직 어린 이삭을 핍박한 것과 같이 이제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주의자가 육신적으로는 더 강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입니다,
성령으로 따라 난 자가 많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주 극소수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세상의 핍박을 견디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 핍박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3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계집종과 그 아들을 내어쫓으라 계집종의 아들이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로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아라. 여종의 아들은 절대로, 종이 아닌 본처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받지 못할 것이다" 하였습니다.”
성경은 육신의 일이 아닙니다.
구약에 있었던 육신의 일들은 다 영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예표들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아들이고 이삭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이스마엘이 형이다 보니까 아이들끼리 정난도 칠 수 있고 때로는 약간의 다툼이 있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세상의 생각으로는 그렇습니다.
하지만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들은 다 예표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만을 보았을 때는 조금 냉정하다 싶을 정도로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습니다.
그 일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이야기를 하고 그 말을 듣고 아브라함이 기도를 하니까 하나님께서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 좇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첩의 자식이라고 해도 분명히 아브라함의 아들인데 아무 것도 주지 않고 내어 좇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성경을 보면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도 아들인데 혼을 내 주어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이해가 되어도 그냥 내어 좇는다는 것은 좀 냉정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예표를 통해서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인간적으로는 냉정하게 보일지 몰라도 복음을 알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왜 당연합니까?
육신을 따라 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종과 아들이 누구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난 자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이고 그는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고 십자가의 구속의 일을 거절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냉정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육신을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의 예표라는 것을 알게 되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을 보면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냉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육신을 따라 난 자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보았을 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입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믿음으로 동일하게 주시는 은혜입니다. 이 십자가의 은혜는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게 미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모르고 그 행위로 십자가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마엘을 왜 내어 쫓아야 하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단순히 그가 이삭을 희롱한 그것 때문이 아닙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이스마엘과 같이 육신을 따라 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보고도 육신을 따라 난 자가 누구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의 모습입니다.
육신을 따라 난 자입니다.
누가 육신을 따라 난 자라는 것을 모르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계속해서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제 모든 예표들을 통해서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육신을 따라 난 자와 같이 교회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내어 쫓기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25:30절을 보겠습니다, (신 44쪽)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계집 종과 그 아들을 내어 쫓으라
창세기21장10절에서 사라가 아브라함에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종의 아들은 내 아들과 함께 기업을 얻지 못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신적으로 계집 종의 아들을 내어 쫓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니라 성경은 이 일을 통해서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앞으로 육신을 따라 사는 자는 이렇게 이스마엘과 같이 내어 쫓기게 되고 아들과 함께 유업을 잇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누가 종의 아들입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성경을 너무 단순하게 보고 있습니다. 자기는 무조건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자기가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지금 두 교회와 그 안에 있는 두 사람을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무익한 종입니다.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 종을 주님께서 무익한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달란트를 남지지 못한 무익한 종을 내어 쫓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육신을 따라 난 자들은 무익하고 헛된 율법의 행위를 하다가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정말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보면서 무조건 자기가 약속의 자녀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도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교회 안에 헛되고 무익한 율법을 따라 행하는 자가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해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하신 약속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얻는 성도는 자기 안에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생명의 달란트를 어떻게 남겨야 하는 줄을 모르고 그저 자기에게 달란트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서 도리어 교회 안에서 더욱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계집 종과 그 아들은 내어 쫓깁니다.
사라로 말미암아 탄생을 한 약속의 아들 이삭과 그들이 함께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창세기에서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을 보면서도 누가 종이고 누가 아들인가를 도무지 분별을 못하고 있고 종이 되는 길로 속히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서로 더 충실한 종이 되기 위해서 경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과 복음에 대해서 말씀을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듣고 믿어서 영원한 생명의 약속을 받는 사람이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니 교회가 계집 종이 되어 있는 교회도 있고 자유하는 여자가 되어 있는 교회도 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면서 약속의 자녀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자는 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서 무익하고 헛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종이 생명의 달란트를 남기지 못하고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잘 하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종이라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잘하는 일이 아니라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그런 날이 그에게 반드시 찾아오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억울합니까?
자기 딴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기 위해서 율법을 너무도 잘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율법으로 인하여 종이 되어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난다면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육신을 따라 난 종들은 자기 육체가 죽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다가 주님이 오실 때 자기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슬피 울게 됩니다.
두 교회입니다.
그리고 그 두 교회에서 난 두 아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는 약속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행위에 열심을 내다가 율법의 종으로 살다 주님이 오실 때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을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입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이 아닙니다, 정말 성경을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실제로는 종으로 살아가고 있으면서 마치 이스마엘이 아브라함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산 것과 같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대답을 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자기 혼자서 부르다가 결국에는 하늘의 유업을 받지 못하는 불행한 인생이 됩니다,
유업입니다,
다른 것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줄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세상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스스로 넘어지고 있습니다. 성도는 오직 이 유업을 생각하면서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천국을 선물로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라지는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하면서 율법의 행위에 빠져 있습니다.
갈라디아서4:3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7쪽)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계집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하는 여자의 자녀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를 가진 여자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계집 종의 자녀가 아닙니다.
그 계집 종이 누구입니까? 이것은 비유라고 말씀을 하면서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산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 시내산에서 율법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주신 이유를 모르고 그것을 지키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시내산입니다,
그것이 지금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면서 거기서 종노릇하고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계집 종의 아들이 누군가 하면 율법에 의해서 종노릇하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교회입니다.
그것을 계집 종으로 비유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계집 종에게서는 종을 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 안에서는 종만 태어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회 인가를 바로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계집 종의 교회는 반드시 종이 태어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 계집 종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그 교회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배를 드리고 있고 찬양을 부르고 있고 기도를 하고 있고 정말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교회와 같이 보입니다. 누가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을 보고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거기서 종노릇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그 안에서 모두가 종이 되어서 종노릇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지혜가 없어서 자기가 누군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종으로 살아가고 있는 자기들을 보면서 성경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생각을 하면서 마치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것으로 생각하면서 자기들의 율법의 행위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계집 종의 아들입니다,
그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 교회가 그리고 그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다 계집 종이고 또 그 아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계집 종과 그 아들은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과 함께 유업을 이을 수 없다는 것을 창세기에서 이스마엘과 이삭을 예표로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여자의 아들입니다.
이 자유하는 여자는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들의 교회는 이 세상에 보이는 건물이 아니라 위에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말 교회에 대해서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땅에 있는 교회는 반드시 종노릇하게 되어 있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자유하는 여자입니다.
그 교회는 율법에서 완전히 자유하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어느 율법도 지키지 않습니다. 또 외식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성도들은 주님이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생명의 문제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생명을 얻으라고 가르쳐 주고 있지만 종교에 빠져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면서 스스로 종이 되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약속의 자녀라고 말씀합니다.
그냥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다. 약속의 자녀가 누구라는 것을 사도 바울이 자세하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종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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