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갈라디아서 강해

갈라디아서 강해-11

윤주만목사 2016. 12. 4. 07:28

갈라디아서2:11절을 보겠습니다. (303)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할 일이 있기로 내가 저를 면책하였노

 

복음입니다.

분명히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전해집니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심령이 가난해 지려면 율법을 잘 못 지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안 지켜야 합니다, 물론 천국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고 자기가 가고 싶은데 율법을 보아서는 절대로 가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역시도 복입니다.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부자가 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자기가 가난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부자가 누구고 가난한 자가 누군가를 바로 알아야 내가 가난한 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위로는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 자기는 가난하다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 보아야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내 마음이 아닙니다.

가난해지라고 하니까 자기가 못 지킨 의문의 율법을 보고 가난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율법을 지키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을 못 지켜서 가난하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것은 부자가 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내 이성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가지고 성경을 본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지적인 능력이 오히려 진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그 지적인 능력이 있어야 성경을 볼 수 있지만 문제는 그것이 먼저 사람을 부자로 만들고 있고 그런 상태에서 성경을 보면 반드시 다른 복음에 빠지게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알고 있는 그런 가난한 자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가난한 자를 돕는 그 일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그런 가난한 자를 돕는 일은 이 세상 모든 종교가 다 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이 누가 그런 육체의 가난한 자를 도왔습니까?

물론 예루살렘에 큰 흉년이 들어서 이방의 교회가 그들을 도운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형제들이 너무 고통을 당하고 있으니까 육체적으로 잠깐 도와주었던 일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가난한 자들을 도운 기록이 성경에는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들은 그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심령이 가난해서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정말 가난하게 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부요하게 되었습니다. 육체적으로 부요하게 된 것이 아니라 천국의 백성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그 시대 심령이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믿어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부자가 되려고 하는 자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복음이라고 하면서 전하고 있고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점점 더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런데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에 잘못한 일이 있어서, 나는 얼굴을 마주 보고 그를 나무랐습니다.”

 

사도 바울은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그 당시 로마의 지배를 받았던 거의 모든 지역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그 모태에서부터 택정을 하시고 당시 모든 문화와 학문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사도행전7장에서 스데반집사가 순교를 당합니다.

그러고 나서 예루살렘 교회가 핍박을 받기 시작을 했습니다. 당시는 물론 로마라는 강대국이 모든 나라를 치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현대 국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종교의 막강한 영향력이 살아 있었던 때이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가까운 지역으로 흩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물론 이방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기도 합니다.

이 안디옥이라는 곳도 그때에 핍박을 피해서 간 곳 중에 하나입니다. 아직 예루살렘 성전은 무너지지 않았지만 주님께서 분명히 성전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고 무너지리라고 말씀을 하셨기 때문에 성도들은 가능했던 사람들은 이방으로 이렇게 피해서 갔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전파되었던 곳이 안디옥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중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왜 사도 바울이 다메섹으로 갔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의 핍박을 피해서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자연적으로 이방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당시 안디옥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가 있었고 그들에 의해서 이방인 안디옥 지방에 복음이 전파되었던 것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디옥에서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했습니다.

왜 면책을 했는가 하면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이 있어서 사도 바울이 얼굴을 보고 면책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실 사도 바울과 베드로는 같은 사도라고 하지만 인간적으로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세상일로 하면 선배입니다.

더구나 주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입니다. 그런 그를 사도 바울은 면전에서 면책을 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누군가 세상 적으로 윗사람이 책망을 받을 일이 있어서 면책을 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로 용납이 되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말할 것입니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조용히 이야기를 해도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데 면책을 했다고 하면서 오히려 감정만 상할 것이 분명합니다.

 

생명입니다.

정말 우리는 이 생명에 대해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책망을 받을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도 모르게 책망을 받을 일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정말 사도 바울과 같이 면책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생각입니다.

면전에서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베드로를 책망한다는 것을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책망을 받을 일을 했다고 해도 사람의 이성으로는 사도 바울의 면책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되고 오히려 사람들은 사도 바울을 비난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책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으면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한 것이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요한복음16:8절을 보겠습니다. (175)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누가 책망을 합니까?

물론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 했습니다. 그러나 이 책망은 성령의 책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을 책망했다면 분명히 이 책망은 사도 바울이 잘못한 일입니다. 아무리 성도라 해도 예의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책망은 사도 바울의 책망이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책망을 합니까?

보혜사가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에게 책망할 일이 있어서 면책을 한 것은 사람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 개인이라면 이것은 사도 바울의 잘못입니다. 그러나 보혜사가 오셔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가면 그를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오시면 세상을 책망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적 지식을 책망하시겠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알고 행하는 것을 책망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법과 윤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수제자입니까?

그럴지라도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은 사도라 할지라도 그 역시도 사람입니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시는 진리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인 베드로는 책망을 받을 일을 할 수 있어도 진리의 영은 절대로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책망이 아닙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책망을 받을 일이 있다면 그가 누구든지 면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이 시대 가장 존경을 받는 목사라 할지라도 그가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이 있다면 당연히 면책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모두가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되어 있습니다. 모두가 다 책망을 받아야 할 일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초대교회에 베드로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는 모두 다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일은 그것을 면책할 사람이 없다는 사실입니다, 책망을 받아야 마땅한데 그가 면책을 받지 않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가 목사입니다.

더구나 모든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아타나스우스가 있고, 어거스틴이 있고, 칼뱅이 있고. 루터가 있고, 웨슬레가 있고, 로이드존슨이 있습니다. 아니 수많은 신학자들이 있습니다.

 

사실은 어떻습니까?

그들은 다 책망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복음을 전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그들이 세워 놓은 교리 중에는 정말 성경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적인 교리를 세웠다고 해서 그가 책망을 받을 일을 한 것을 상쇄 시킬 수 없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잘한 것은 잘한 것입니다.

그러나 10가지를 잘 했어도 한 가지를 잘 못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사람들이 우리에게 전해준 모든 것을 책망하고자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율법에 대해서 정확하게 정의를 내리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내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해서 정의를 내리지 못 했습니다. 그것을 몰랐다면 결국에는 다른 복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제 말씀을 드리겠지만 베드로가 책망 받을 일은 정말 하찮은 일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아무 것도 아닌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성령께서는 책망을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찮은 일 같아도 그 일로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성령께서 책망을 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책망이 안 됩니다.

그 도가 이미 넘어섰습니다. 아마 주님께서 다시 오셔서 책망을 할지라도 오히려 테러를 가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이 십자가에 못 박은 것과 같이 똑같이 하고도 남을 사람들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심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바로 알고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라면 당연히 그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일에서 책망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다른 복음을 전했습니까? 아니 베드로가 복음을 몰랐습니까? 그는 주님의 제자이며 성령이 임한 사람이며 또 그가 설교를 함으로 해서 삼천 명이 회개를 하는 역사가 일어났던 사람입니다. 그는 책망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아주 작은 사소한 것으로 책망을 받을 일이 있으니까 사도 바울이 바로 면책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아닙니다.

사람이 생각하는 도덕이 아닙니다, 그것으로는 어느 누구도 책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것으로 책망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을 받는데 있어 문제가 되는 행위 때문에 책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 책망은 사도 바울 개인이 하는 책망이라기보다는 성령의 감동으로 베드로를 면책하고 있습니다.

 

잠언6:23절을 보겠습니다. (917)

대저 명령은 등불이요 법은 빛이요 훈계의 책망은 곧 생명의 길이라

 

책망입니다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한 것은 곧 생명의 길이기 때문에 그를 꾸짖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누구입니까? 일반 성도가 아닙니다, 그는 사도며 그 당시 모든 사람은 베드로의 말을 들었습니다. 베드로가 하는 말을 진리로 알아듣고 있었고 베드로가 하는 행위를 그대로 따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책망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베드로만 생명을 얻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에게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이 생명을 얻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베드로가 아니라 이름이 잘 알려지지 않은 성도가 그랬다면 아마도 갈라디아서에 이 말씀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책망하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깨우쳐 주는 교훈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책망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누가 선배냐 누가 연배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누가 목사냐 평신도냐 하는 것 역시 중요하지 않습니다. 혹시라도 잘못알고 있는 것이 있다면 그리고 잘못하는 행위가 있다면 반드시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누군가 책망을 할 때 그것을 듣는 사람이 있고 도리어 공격을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생명을 얻은 성도입니다.

누군가 나를 책망할 때 그것을 듣습니다. 그가 아무리 연소하다 할지라도 그가 나보다 성경에 대해서 모른다 할지라도 그것을 듣고 자기가 잘못한 것을 고치는 것이 성도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이 책망을 듣지 않으면 생명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책망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고 거의 제왕적인 목회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초대교회에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직까지 신약 성경이 다 기록이 되지 않았을 때입니다. 만약에 성경이 다 기록이 되었다면 베드로는 절대로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을 한 베드로가 성령으로부터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을 알고도 하겠습니까?

구약의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선지자들이 와서 그들을 책망했지만 그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계속해서 선지자들을 보내 주셔서 그들을 책망 하셨지만 그들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라고 다를 것이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스라엘보다 더 타락을 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 단 한 가지도 안 듣습니다.

성령은 계속해서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책망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느라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생명의 길로 갈 수 있는데 도리어 성경에서 없는 말을 지어내서 성령이 오시면 율법을 잘 지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는 안타깝습니다.

베드로가 책망을 받을 일을 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외식입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었습니다. 613가지 율법 중에 단 한 가지를 지키는 일로 인하여 책망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키고 싶어서 지킨 것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다보니까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책망을 받을 일을 하지 않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무엇을 어떻게 아니 어느 것부터 책망을 해야 할지를 모를 정도입니다. 너무 많이 책망을 받을 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일일이 다 이야기를 하면 도리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이단이라고 했던 것과 같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을 일일이 다 열거를 하려면 너무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교인들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책망을 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믿음이라고 하는 신앙생활 전체가 책망을 받을 일임에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도리어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책망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누구도 책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책망을 한다는 것이 누군가 도덕적인 문제가 있을 때 마치 이스라엘과 같이 면박을 주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모르다 보니까 책망을 받을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책망을 받을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에베소서5:11절을 보겠습니다. (315)

너희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말고 도리어 책망하라

 

사도 바울이 왜 베드로를 책망했습니까?

그가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참여를 했기 때문에 책망했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에서 베드로가 외식을 한 그것이 어두움의 일이기 때문에 그 어두움의 일에 참여를 함으로 해서 생명의 열매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책망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행한 어두움의 일이 무엇입니까?

외식입니다. 그 외식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의 행위입니다. 어두움의 일을 참여를 하면 반드시 책망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성도들에게 어두움에 일에 참여를 하는 사람이 있으면 책망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어두움의 일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리고 외식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하는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보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모두가 어두움의 일에 참여를 해서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율법은 유기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면 그 역시도 어두움의 일에 참여를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지금 베드로가 무의식적으로 어두움의 일에 참여를 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책망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열매 없는 어두움의 일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전체 율법을 다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전체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를 자기 조상 대대로 해 오던 규례대로 하다 보니까 어두움의 일을 자기도 모르게 참여를 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어두움이 무엇인지 그리고 빛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내 행위 다 어두움의 일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은 참 빛입니다.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어두움의 일에 너무 많이 참여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심으로 드리고 있는 예배, 찬양, 기도, 그리고 신앙생활의 거의 모든 행위들이 다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아무도 책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어두움의 일을 하라고 칭찬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잘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좋다고 말을 하니까 자기가 믿음이 있으려면 어두움의 일을 더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 일이 어두움의 일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어야 책망을 할 수 있는데 이 시대 목사들 중에 단 한 사람도 그것을 책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말로는 빛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실제 그들의 행위는 어두움을 더 사랑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제 어두움의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교인들이 하는 일이 왜 어두움에 일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은 빛이 아닙니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그것이 빛으로 보여 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더 쉽게 어두움의 일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율법을 지키는 일은 어두움의 빛이라고 로마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성에 율법을 지키는 그것이 너무 좋아서 어두움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습니까?

반드시 책망을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이 어두움의 일을 책망하지 않고 있습니다. 책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생명의 길로 가지 않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성경에서 어두움이 무엇인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믿음으로 하든 아니면 율법으로 지키든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아무도 책망을 하지 않고 있다면 그 사람은 생명의 길이 아니라 사망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어두움의 일을 하면 반드시 누군가가 책망을 하게 되어 있는데 율법을 지키면서도 누구로부터 책망을 듣지 않고 있다면 버림을 받은 사람입니다.

 

율법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에 계속해서 세뇌를 당하다 보니까 이제는 율법이 믿음이 되었습니다. 어두움의 일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책망을 해야 하는데 도리어 칭찬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의 일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어두움의 일입니다. 세상의 어두움의 일은 교회에 나오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믿음으로 하고 있다는 모든 행위가 실상은 다 어두움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두움의 일과 참 빛을 모르면 결국에는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책망을 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아무도 책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모든 교회가 다 이 어두움의 일을 하는 것을 교리로 채택을 하고 있고 자기들과 같은 어두움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도리어 이단이라고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단 한 가지의 일로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두움의 일에 참여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모든 율법은 다 어두움의 일입니다, 아니 율법뿐 아니라 은사라든지 성화가 되기 위해서 하는 행위라든지 거의 모든 신앙생활의 행위가 다 어두움의 일입니다. 내가 하는 모든 행위는 다 어두움의 일이고 주님이 하신 일만 빛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27:5절을 보겠습니다. (941)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나으니라

 

베드로가 책망 받을 일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면책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말로 면책이지 얼굴을 보고 면박을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사람의 도리로서는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베드로에게 면박을 주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면박을 주었습니까?

그것을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사도 바울이 베드로를 믿음의 형제로 사랑해서 그가 책망을 받을 일을 했는데도 덮어 두었다면 그것은 도리어 생명을 잃게 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도 얼마든지 이 일을 숨길 수 있습니다.

 

더구나 베드로입니다.

나중에 서신을 보낼 때 이런 말씀을 언급을 해도 충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씀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면책은 그렇게 인간적으로 숨은 사랑보다 더 낫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면책을 했기 때문에 베드로가 더 이상 이러한 외식을 하지 않을 수 있었고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경계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입니다.

우리는 정말 이 생명에 대해서 냉정해야 합니다. 좋은 것이 좋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비록 나보다 신앙의 연조가 높고 또 사회적으로 대우를 받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 생명의 문제에 있어서만은 우리가 냉정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느 것이 좋습니까?

그를 사랑해서 그냥 숨겨 주는 것이 좋습니까? 그의 얼굴을 보면서 면전에서 면책을 하는 것이 좋습니까? 세상의 일이라면 당연히 이 일을 숨겨주면서 사랑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세상의 일이 아니라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베드로이고 그도 성령을 받은 사람인데 조용히 불러서 이야기를 해도 알아듣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그것은 인생의 생각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떻게 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베드로의 책망 받을 일을 보고 면책을 했는데 그가 듣지를 않았다면 그 영혼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몰랐겠습니까?

한번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몰랐겠습니까? 분명히 사도 바울도 베드로가 구원을 받은 성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책망을 받을 만한 일을 그냥 사랑으로 덮어주지 말고 반드시 면책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복음에 있어서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그와 같이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만약에 베드로만 조용히 불러서 면책을 했다고 하면 그들이 모를 수도 있습니다. 어찌되었든 성경은 책망을 받을 일을 했으면 면책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안 들으면 어떻게 합니까?

그것은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도는 반드시 책망할 일이 있으면 면박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한 가지 조심해야 할 것은 종교의 세력이 너무 커져 있는 곳을 상대로 면박을 하면 도리어 핍박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을 받고 난 이후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자 이스라엘이 도리어 핍박을 했습니다.

 

일반 성도들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되어 있는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책망할 일이 있다고 해서 그것을 했다가는 도리어 해를 당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도 우리가 보아서 잘 알고 있지만 사도들이 복음을 전할 때 당시 유대교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을 핍박을 했습니다.

 

이 일은 성도와 성도 사이에 있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면책은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기독교는 면책을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그들을 면책했다가는 성도가 핍박을 받습니다. 간혹 가다가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을 보고 교회 안에서 책망을 하는 말을 하고 있는데 그들은 절대로 듣지를 않습니다. 종교가 된 이스라엘이 예수님의 말씀도 안 들었는데 일반 성도의 말을 듣겠습니까?

 

면책은 숨은 사랑보다 낫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성도와 성도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무에게나 책망의 말을 하면 그들은 이해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책망하면 원수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탁드리지만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를 변화시키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책망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되었겠습니까?

책망을 들었다면 이스라엘은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또 이방의 교회 역시 마찬가지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유대교보다 더 악한 종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도 유대교는 자기들이 율법주의라는 것을 인정을 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믿음이라고 미혹을 하면서 종교 안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을 사망의 길고 끌고 가고 있습니다. 아니 본인들도 사망으로 가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12절을 보겠습니다. (303)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저희가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것은 게바가, 야고보에게서 몇몇 사람이 오기 전에는 이방 사람들과 함께 음식을 먹다가, 그들이 오니, 할례 받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떠나 물러난 일입니다.”

안디옥입니다.

그곳에 흩어져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로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는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말씀은 실제 식사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서 안디옥으로 가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이방인들과 사도들과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였던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그가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고 있고 주님이 부활하셔서 자기들에게 보이시고 하늘에 승천하는 것을 직접 본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니 거의 다 라고 해도 전혀 틀리지 않습니다. 지금 사도 바울이 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이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도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마치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제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제까지의 다른 복음이 무엇인가 하면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악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의 문제는 끝이 났습니다.

분명히 주님께서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 우리가 더 이상 죄로 인하여는 사망에 이르지 않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악이 남아 있습니다. 사실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부터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아니 초대 교회의 제자들조차도 악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가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악한 일입니다.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을 했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회 역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말씀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의 서신서를 보시기 바랍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서도 이 악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악이 너무도 의롭게 보이기 때문에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악을 행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전혀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에 이르는 악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악을 행하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특별한 형벌을 받게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답답합니다.

어제도 어느 분과 우연히 통화를 했습니다. 물론 그분의 신실한 신앙을 제가 폄하하고 싶지 않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믿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또 평생을 신앙생활을 하면서 나름대로 바른 길로 가면서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데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악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왜 망했는가를 그들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았는가를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들은 악을 행하다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이 악이라고 생각했습니까?

그들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이 자기들이 믿는 하나님이라고 굳게 믿고 그것을 조금이라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악인이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악인이 되었는가 하면 바로 율법의 행위로 악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 인정합니다.

그러나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선이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악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악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다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유대인들이 오니까 그 자리를 피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방인과 함께 식사를 하면 어떻고 또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것이 문제입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 더 문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문제를 가지고 면책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 문제로 면책을 받을 만한 일이 아닙니다. 그냥 서로 대화를 해서 풀어 버리면 되는 아주 간단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외식을 한 것이기 때문에 문제가 되고 있고 그것을 사도 바울이 면책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을 하셨습니까?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여 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단지 이방인들과 식사를 하고 안 하고 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지금 베드로는 외식을 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그들을 면책하고 있었습니다.

 

화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별로 문제가 될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외식으로 인하여 화가 있기 때문에 성령이 책망을 하고 있고 사도 바울이 성령의 감동으로 면책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이유는 이 외식으로 인하여 화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경계를 하기 위해서 면책을 했습니다.

 

누가복음5:30절을 보겠습니다. (97)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스라엘은 죄인들과 함께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유월절의 규례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먹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규례로 내려오면서 율법주의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으면 자기도 죄인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아직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파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15장에서 말씀을 보았듯이 율법을 지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율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조상대대로 지켜온 율법도 지키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도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너희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그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어찌하여 율법을 어기느냐 그리고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라고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사상들이 그대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것을 직접 보이시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먹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때 분명히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보면 알겠지만 바리새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사도행전1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한번 이 경험을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었습니다. 그 일을 유대인들이 알고 나서 베드로를 힐문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기도 중에 환상으로 보여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직까지 입니다.

이런 율법의 문제가 정립이 안 되어 있었던 때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베드로고 그때 분명히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또 그런 일이 있자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함께 먹다가 그 자리를 서둘러서 피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도도 이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보혜사가 오셨습니다, 그런 그도 역시 이렇게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외식에 빠지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쉽게 외식에 빠집니까?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사람의 이성에는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베드로도 쉽게 외식에 빠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베드로도 이렇게 쉽게 빠지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외식에 빠진 것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외식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외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외식에 빠지고 그것이 성령의 책망을 받을 일이고 만약에 그가 면책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잠언29:25절을 보겠습니다. (944)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베드로가 누구를 두려워했습니까?

할례자들을 두려워하다가 외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아직 성경이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직 정립이 안 되어 있는 초대교회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역시 잠시 이렇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지만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어떻게 미혹을 당하는 가를 베드로의 외식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잠시 외식에 빠졌을지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면책을 하게 함으로 해서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왜 두려워합니까?

사람의 이성은 바로 법입니다, 그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행위를 내가 어겼을 때 그 사람이 나를 비방할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 행위가 올무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도 이렇게 됩니다.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외식에 빠지는 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쉽게 빠지는 것이 외식입니다, 그리고 그 외식이 어떠한 결과는 가져오는가 하면 사단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2:13절을 보겠습니다. (30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바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와 같이 외식을 하고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이 유혹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이 외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 외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도 아주 철저하게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바나바는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했던 바나바도 그렇게 쉽게 외식에 빠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집사가 순교를 당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가까운 지역으로 흩어진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메섹이기도 하고 또 안디옥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행전15장에서 바리새파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자기 조상들이 메었던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외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외식이라는 것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식이라는 단어를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좋게 꾸미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좋게 꾸미는 겉모양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이라고 하니까 나쁜 의미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내는 것 자체가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외식하므로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외식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외식한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이방인과 함께 먹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수천 년 동안 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겉으로 모양을 냈던 그 모든 행위들이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그 외식이라는 것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외식이라고 하니까 마치 나쁜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그대로 행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믿는다는 것을 겉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누가 외식을 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고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외식을 했고 바나바까지도 외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외식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겠습니까?

만약에 사도 바울이 면책을 하기 전에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한 행위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베드로가 그렇게 안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외식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외식이 자기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잠깐 자기도 모르게 외식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서 그렇게 했습니다. 왜 두려워하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 그것을 안 하면 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식사 기도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식사 기도를 하지 말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냐고 물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외식입니다.

자기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모든 행위는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이 시대는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누가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는가를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기도를 해야 하는 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다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왜 식사 기도를 합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타내는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감사해서 기도를 하는 마음까지 제가 폄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감사해서 했을지라도 겉모양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기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 그 모양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까? 진심이라는 그런 말은 그리고 믿음이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정말 냉정하게 보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6:5절을 보겠습니다. (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결국 외식에 빠져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도 진심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진심이고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 역시도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부러 보이려고 했든지 믿음으로 했든지 사람에게 보이면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했으면 사람에게 안 보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그 뜻을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도 이러한 행위들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회당과 큰 어귀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이 시대 교회 안에서와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공공의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진심입니까?

나는 믿음으로 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허탄한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했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식사기도 외식입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분명히 외식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축사하신 것도 외식이냐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육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 영의 양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천 명도 먹이시고 삼천 명도 먹이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믿음으로 했든 진심으로 했든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시대 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물론 감사하는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사 기도를 모두가 다 하고 있는데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할까봐 식사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기도 뿐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겉모양을 나타내는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식사 기도만 외식이 아니라 너무 많은 외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행위를 보고 아!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을 하면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외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식이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어느 누가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시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해 보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이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따라 했고 그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외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도 뿐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이 있는 성도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행위들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여지다보니까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는 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나 그리고 가정에서 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중이 있는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고 기도를 큰 소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람들의 행위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들은 이미 상을 다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라고 부르는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상은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왜 육체를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종교가 하는 그대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혹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까지도 그들에게 유혹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이방에 가르치고 있는데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러 간 바나바까지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이 되어 넘어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외식을 도리어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것이나 믿음이라고 하면 믿음이 되어버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27절을 보겠습니다. (4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게서 외식하는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분명히 성경에서 외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을 아름답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 겉을 아름답게 보이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니까 정말 외모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름답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안 지키는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제가 아무리 이런 말씀을 드려도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저 지식으로 알고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입니다.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부자가 고운 베웃과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의 고운 베옷과 자색 옷이 무엇입니까? 그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모든 행위가 그것이고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일부러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입니다, 그것은 예배도 될 수 있고 기도도 될 수 있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될 수 있고 봉사와 헌신을 하는 모양도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생각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은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을 합니다. 그렇게 인정을 하는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일입니다.

 

겉은 내 행위입니다.

아니 내 전체가 겉입니다. 그것은 내 행위만이 아니라 내 족보와 그리고 내 지적인 능력도 겉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고 하는 것도 역시 겉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겉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제 목사로는 안 되니까 박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케스트라 같은 찬양대가 있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다 외식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누가복음12:1절을 보겠습니다. (114)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그것이 외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구제할 때도 시장에서 나팔을 불면서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어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도 아주 길게 했습니다. 금식할 때도 얼굴에 칠을 해서 슬픈 기색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니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이것은 아주 지극히 일부의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지금 이 시대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했고 이 시대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했고 이 시대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이고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아니 바리새인들은 율법이라고 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모든 일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율법입니다. 그것에다가 바리새인들이 겉모양을 내려고 했던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그런 외식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외식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다 외식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교회 역시도 외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반포되고 1700년 동안 늘 지켜왔던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습입니다. 지금도 역시 초대교회가 지나고 나서 2000년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그 외식을 지금 이 시대 그대로 하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 시대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2:14-15절을 보겠습니다. (303)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라도 외식을 하는 사람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외식의 모양이 하나라도 나오고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진리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악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신 성도도 이렇게 쉽게 외식에 빠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냥 뭐 어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그러면서 외식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외식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진리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은 외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말로만 오직 예수라고 하지 실상은 외식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겉모양을 보고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단 한 가지 외식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외식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외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힘써 행해야 합니다. 아니 힘에 지나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영지주의가 되라고 복음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외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늘의 큰 축복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정말 이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외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외식을 하는 순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화가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제 율법을 버리고 살아가지 않고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네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를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을 누가 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왜 너는 외식을 하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외식하는 것을 보여서 외식하는 유대인과 같이 살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온 이후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외식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식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네가 유대인으로서 외식을 버렸는데 네 외식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외식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지만 이방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유대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고 외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우리에게 와서 유대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외식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말 지금 이 시대는 믿음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교회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만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기독교라는 종교라고 밖에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다 외식에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외식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외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누가복음5:30절을 보겠습니다. (97)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스라엘은 죄인들과 함께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유월절의 규례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먹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규례로 내려오면서 율법주의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으면 자기도 죄인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아직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파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말씀을 보았듯이 율법을 지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율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조상대대로 지켜온 율법도 지키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도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너희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그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어찌하여 율법을 어기느냐 그리고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라고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사상들이 그대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것을 직접 보이시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먹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때 분명히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보면 알겠지만 바리새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한번 이 경험을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었습니다. 그 일을 유대인들이 알고 나서 베드로를 힐문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기도 중에 환상으로 보여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직까지 입니다.

이런 율법의 문제가 정립이 안 되어 있었던 때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베드로고 그때 분명히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또 그런 일이 있자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함께 먹다가 그 자리를 서둘러서 피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도도 이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보혜사가 오셨습니다, 그런 그도 역시 이렇게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외식에 빠지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쉽게 외식에 빠집니까?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사람의 이성에는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베드로도 쉽게 외식에 빠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베드로도 이렇게 쉽게 빠지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외식에 빠진 것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외식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외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외식에 빠지고 그것이 성령의 책망을 받을 일이고 만약에 그가 면책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29:25절을 보겠습니다. (944)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베드로가 누구를 두려워했습니까?

할례자들을 두려워하다가 외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아직 성경이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직 정립이 안 되어 있는 초대교회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역시 잠시 이렇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지만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어떻게 미혹을 당하는 가를 베드로의 외식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잠시 외식에 빠졌을지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면책을 하게 함으로 해서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왜 두려워합니까?

사람의 이성은 바로 법입니다, 그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행위를 내가 어겼을 때 그 사람이 나를 비방할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 행위가 올무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도 이렇게 됩니다.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외식에 빠지는 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쉽게 빠지는 것이 외식입니다, 그리고 그 외식이 어떠한 결과는 가져오는가 하면 사단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13절을 보겠습니다. (30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바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와 같이 외식을 하고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이 유혹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이 외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 외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도 아주 철저하게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바나바는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했던 바나바도 그렇게 쉽게 외식에 빠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집사가 순교를 당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가까운 지역으로 흩어진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메섹이기도 하고 또 안디옥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바리새파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자기 조상들이 메었던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외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외식이라는 것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식이라는 단어를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좋게 꾸미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좋게 꾸미는 겉모양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이라고 하니까 나쁜 의미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내는 것 자체가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외식하므로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외식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외식한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이방인과 함께 먹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수천 년 동안 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겉으로 모양을 냈던 그 모든 행위들이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그 외식이라는 것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외식이라고 하니까 마치 나쁜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그대로 행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믿는다는 것을 겉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누가 외식을 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고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외식을 했고 바나바까지도 외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외식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겠습니까?

만약에 사도 바울이 면책을 하기 전에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한 행위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베드로가 그렇게 안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외식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외식이 자기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잠깐 자기도 모르게 외식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서 그렇게 했습니다. 왜 두려워하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 그것을 안 하면 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식사 기도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식사 기도를 하지 말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냐고 물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외식입니다.

자기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모든 행위는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이 시대는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누가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는가를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기도를 해야 하는 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다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왜 식사 기도를 합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타내는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감사해서 기도를 하는 마음까지 제가 폄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감사해서 했을지라도 겉모양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기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 그 모양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까? 진심이라는 그런 말은 그리고 믿음이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정말 냉정하게 보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5절을 보겠습니다. (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결국 외식에 빠져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도 진심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진심이고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 역시도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부러 보이려고 했든지 믿음으로 했든지 사람에게 보이면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했으면 사람에게 안 보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그 뜻을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도 이러한 행위들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회당과 큰 어귀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이 시대 교회 안에서와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공공의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진심입니까?

나는 믿음으로 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허탄한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했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식사기도 외식입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분명히 외식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축사하신 것도 외식이냐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육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 영의 양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천 명도 먹이시고 삼천 명도 먹이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믿음으로 했든 진심으로 했든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시대 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물론 감사하는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사 기도를 모두가 다 하고 있는데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할까봐 식사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기도 뿐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겉모양을 나타내는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식사 기도만 외식이 아니라 너무 많은 외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행위를 보고 아!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을 하면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외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식이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어느 누가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시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해 보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이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따라 했고 그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외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도 뿐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이 있는 성도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행위들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여지다보니까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는 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나 그리고 가정에서 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중이 있는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고 기도를 큰 소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람들의 행위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들은 이미 상을 다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라고 부르는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상은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왜 육체를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종교가 하는 그대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혹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까지도 그들에게 유혹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이방에 가르치고 있는데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러 간 바나바까지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이 되어 넘어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외식을 도리어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것이나 믿음이라고 하면 믿음이 되어버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7절을 보겠습니다. (4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게서 외식하는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분명히 성경에서 외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을 아름답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 겉을 아름답게 보이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니까 정말 외모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름답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안 지키는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제가 아무리 이런 말씀을 드려도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저 지식으로 알고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입니다.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부자가 고운 베웃과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의 고운 베옷과 자색 옷이 무엇입니까? 그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모든 행위가 그것이고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일부러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입니다, 그것은 예배도 될 수 있고 기도도 될 수 있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될 수 있고 봉사와 헌신을 하는 모양도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생각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은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을 합니다. 그렇게 인정을 하는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일입니다.

 

겉은 내 행위입니다.

아니 내 전체가 겉입니다. 그것은 내 행위만이 아니라 내 족보와 그리고 내 지적인 능력도 겉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고 하는 것도 역시 겉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겉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제 목사로는 안 되니까 박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케스트라 같은 찬양대가 있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다 외식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누가복음 12:1절을 보겠습니다. (114)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그것이 외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구제할 때도 시장에서 나팔을 불면서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어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도 아주 길게 했습니다. 금식할 때도 얼굴에 칠을 해서 슬픈 기색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니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이것은 아주 지극히 일부의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지금 이 시대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했고 이 시대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했고 이 시대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이고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아니 바리새인들은 율법이라고 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모든 일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율법입니다. 그것에다가 바리새인들이 겉모양을 내려고 했던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그런 외식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외식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다 외식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교회 역시도 외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반포되고 1700년 동안 늘 지켜왔던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습입니다. 지금도 역시 초대교회가 지나고 나서 2000년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그 외식을 지금 이 시대 그대로 하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 시대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14-15절을 보겠습니다. (303)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라도 외식을 하는 사람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외식의 모양이 하나라도 나오고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진리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악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신 성도도 이렇게 쉽게 외식에 빠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냥 뭐 어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그러면서 외식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외식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진리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은 외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말로만 오직 예수라고 하지 실상은 외식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겉모양을 보고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단 한 가지 외식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외식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외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힘써 행해야 합니다. 아니 힘에 지나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영지주의가 되라고 복음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외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늘의 큰 축복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정말 이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외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외식을 하는 순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화가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제 율법을 버리고 살아가지 않고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네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를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을 누가 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왜 너는 외식을 하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외식하는 것을 보여서 외식하는 유대인과 같이 살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온 이후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외식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식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네가 유대인으로서 외식을 버렸는데 네 외식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외식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지만 이방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유대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고 외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우리에게 와서 유대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외식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말 지금 이 시대는 믿음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교회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만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기독교라는 종교라고 밖에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다 외식에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외식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외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겉모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고 믿는 일입니다 영의 일과 육의 일을 바로 분별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모양이라도 외식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게 주의하여야 진리를 따라 행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누가복음5:30절을 보겠습니다. (97)

바리새인과 저희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가로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이스라엘은 죄인들과 함께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과 함께 먹지를 않았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유월절의 규례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할례를 받지 않은 자들과 함께 먹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규례로 내려오면서 율법주의자들은 죄인들과 함께 먹으면 자기도 죄인이 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앞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아직 초대교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는 바리새파에 있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말씀을 보았듯이 율법을 지키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직까지 율법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습니까? 그러니까 조상대대로 지켜온 율법도 지키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예수도 믿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바리새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는 것을 보면서 어찌하여 너희가 죄인과 세리와 함께 식사를 하느냐고 그 제자들을 비방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어찌하여 율법을 어기느냐 그리고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느냐고 묻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제자들이라고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 사상들이 그대로 내려왔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런 것을 직접 보이시면서 세리와 죄인들과 먹는 것이 결코 잘못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때 분명히 베드로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서 보면 알겠지만 바리새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방인과 함께 먹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입니다.

사도행전 11장에서 베드로는 이미 한번 이 경험을 했습니다.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서 함께 먹었습니다. 그 일을 유대인들이 알고 나서 베드로를 힐문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내가 가고 싶어서 간 것이 아니라 기도 중에 환상으로 보여 이방인인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천사의 지시를 받고 그렇게 했다고 말을 했습니다.

 

아직까지 입니다.

이런 율법의 문제가 정립이 안 되어 있었던 때입니다. 그런 경험이 있는 베드로고 그때 분명히 이방에 복음을 전하면서 불가피하게 일어났던 일이었다는 것을 자기 입으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또 그런 일이 있자 베드로는 유대인들을 두려워해서 함께 먹다가 그 자리를 서둘러서 피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도도 이렇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베드로는 분명히 보혜사가 오셨습니다, 그런 그도 역시 이렇게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외식에 빠지는 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쉽게 외식에 빠집니까?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악을 행하면서도 사람의 이성에는 그것이 바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베드로도 쉽게 외식에 빠져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는 베드로도 이렇게 쉽게 빠지는 것이 바로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베드로가 외식에 빠진 것은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를 두려워하고 있습니까?

사람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을 두려워하다가 외식이 빠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했다면 절대로 외식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을 두려워하다 보니까 외식에 빠지고 그것이 성령의 책망을 받을 일이고 만약에 그가 면책을 받지 않았다면 그의 믿음은 거짓이라는 말씀입니다.

 

잠언 29:25절을 보겠습니다. (944)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베드로가 누구를 두려워했습니까?

할례자들을 두려워하다가 외식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아직 성경이 기록이 되지 않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이라는 것에 대해서 아직 정립이 안 되어 있는 초대교회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할례자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두려워했다는 말씀입니다, 베드로와 같이 성령을 받은 사람도 역시 잠시 이렇게 된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두려워서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인하여 비방을 받을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가 안 됩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가 사람을 두려워한다는 것이 있을 수 있는 일입니까? 하지만 성령을 받았을지라도 어떻게 미혹을 당하는 가를 베드로의 외식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물론 베드로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가 잠시 외식에 빠졌을지라도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면책을 하게 함으로 해서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을 왜 두려워합니까?

사람의 이성은 바로 법입니다, 그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하면 사람은 사람을 두려워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는 행위를 내가 어겼을 때 그 사람이 나를 비방할 것을 두려워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두려워하는 그 행위가 올무에 걸리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을 받은 베드로도 이렇게 됩니다.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얼마나 쉽게 외식에 빠지는 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와 같은 사람도 쉽게 빠지는 것이 외식입니다, 그리고 그 외식이 어떠한 결과는 가져오는가 하면 사단의 올무에 걸리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갈라디아서 2:13절을 보겠습니다. (303)

남은 유대인들도 저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안 먹은 체하며 게바와 함께 물러나갔고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를 따르는 남은 유대인들도 베드로와 같이 외식을 하고 바나바도 저희의 외식이 유혹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이 외식을 했습니다. 그런데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휩쓸려 외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물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도 아주 철저하게 전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이 폐하여 졌다는 것을 성경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 바나바는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과 함께 이방에 복음을 전했던 바나바도 그렇게 쉽게 외식에 빠지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유대인들은 예루살렘에서 함께 있었습니다,

그리고 스데반집사가 순교를 당한 이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들이 가까운 지역으로 흩어진 것을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다메섹이기도 하고 또 안디옥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여러 지방으로 흩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바리새파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지만 사도들이 이방인들에게 자기 조상들이 메었던 무거운 멍에를 메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 후에 예루살렘 교회가 흩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했습니다.

 

외식을 했습니다.

사람들이 이 외식이라는 것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외식이라는 단어를 먼저 아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좋게 꾸미는 것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좋게 꾸미는 겉모양을 외식이라고 합니다. 외식이라고 하니까 나쁜 의미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겉모양을 내는 것 자체가 외식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은 누구나 잘 살고 싶어 합니다. 꼭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 해도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구나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에 들어와 있는 사람들은 더욱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희가 외식하므로 심지어는 바나바까지도 외식을 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외식한 것이 나쁜 일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유대인으로 보았을 때는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은 조상 대대로 이방인과 함께 먹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일을 수천 년 동안 해온 사람들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겉으로 모양을 냈던 그 모든 행위들이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더구나 그 외식이라는 것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외식이라고 하니까 마치 나쁜 것으로 생각을 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를 그대로 행하는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 믿는다는 것을 겉모양으로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누가 외식을 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고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외식을 했고 바나바까지도 외식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외식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했겠습니까?

만약에 사도 바울이 면책을 하기 전에 이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았으면 그렇게 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들이 한 행위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았으면 베드로가 그렇게 안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외식이라는 것을 몰랐기 때문에 그렇게 했습니다. 그 외식이 자기 조상 대대로 지켜오던 너무도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잠깐 자기도 모르게 외식을 했습니다.

 

왜 그렇게 했습니까?

야고보에게서 온 유대인들을 두려워서 그렇게 했습니다. 왜 두려워하는가 하면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하고 있는데 자기 혼자서 그것을 안 하면 그 사람들로부터 비방을 받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쉽게 말씀을 드리면 이렇습니다.

 

식사 기도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식사 기도를 하지 말아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기도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냐고 물을 것이 분명합니다. 물론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주신 것을 감사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제가 그들의 마음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외식입니다.

자기들과 같이 되기를 바라는 모든 행위는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누구나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적으로 따라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도를 하는 것을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외식입니다.

이 시대는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누가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는가를 실제로는 아무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기도를 해야 하는 가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하지 않으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까?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했다는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물론 예수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실 때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근거로 해서 사람들이 식사를 할 때 기도를 한다는 것은 너무도 궁색하기만 합니다.

 

왜 식사 기도를 합니까?

자기들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나타내는 것을 외식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진심으로 감사해서 기도를 하는 마음까지 제가 폄하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아무리 감사해서 했을지라도 겉모양을 나타내고 있다면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기 좋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식사하기 전에 기도를 하는 그 모양이 보기에 좋지 않습니까? 진심이라는 그런 말은 그리고 믿음이라는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정말 냉정하게 보지 않으면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6:5절을 보겠습니다. (8)

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말라 저희는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사람에게 보이려고

이 말씀을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결국 외식에 빠져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지 않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들도 진심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진심이고 사람의 믿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 역시도 사람이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일부러 보이려고 했든지 믿음으로 했든지 사람에게 보이면 같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아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것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믿음으로 했으면 사람에게 안 보입니까?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그 뜻을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도 이러한 행위들이 하나님을 믿는 행위였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이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이 사람들이 회당과 큰 어귀에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과 이 시대 교회 안에서와 그리고 사람들이 있는 공공의 장소에서 기도하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나는 진심입니까?

나는 믿음으로 했습니까? 그것이 얼마나 허탄한 이야기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으로 했더라도 그것이 사람에게 보였다면 그것은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모양을 보고 사람들이 믿음이 있다고 인정을 한다면 그것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식사기도 외식입니다.

저를 이단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성경적으로 볼 때 분명히 외식입니다. 그러면 주님도 오천 명을 먹이실 때 축사하신 것도 외식이냐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하신 모든 일은 영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을 육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실제 영의 양식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오천 명도 먹이시고 삼천 명도 먹이셨습니다.


사람이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믿음으로 했든 진심으로 했든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보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이 시대 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물론 감사하는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식사 기도를 모두가 다 하고 있는데 하지 않으면 믿음이 없다고 할까봐 식사 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기도 뿐 아닙니다.

사람에게 보이는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겉모양을 나타내는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식사 기도만 외식이 아니라 너무 많은 외식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내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는 모든 행위가 사실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는 행위를 보고 아!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세상 사람들이 알고 있다면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인정을 하면 그것이 바로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외식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다 외식을 하고 말았습니다. 외식이라는 것이 이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마도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어느 누가 식사를 하기 전에 기도를 시작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을 해 보니까 정말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보이니까 모든 사람들이 다 따라 했고 그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의 외식이 되고 말았습니다.

 

외식하는 자와 같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기도 뿐 아니라 모든 신앙생활에 있어서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는 너무 많은 외식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믿음이 있는 성도의 삶이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실제 그러한 행위들이 사람의 이성에는 너무도 당연하게 보여지다보니까 모두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는 가를 살펴보는 것이 아니라 그저 종교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교회에서나 그리고 가정에서 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대중이 있는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모든 사람이 다 들으라고 기도를 큰 소리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행위가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이 사람들의 행위와 무엇이 다릅니까?

 

이들은 이미 상을 다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도라고 부르는 상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상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상은 받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은 영이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영이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왜 육체를 나타내려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모르고 그저 종교가 하는 그대로를 따라가고 있습니다.

 

유혹이 되었습니다.

바나바까지도 그들에게 유혹이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고 이방에 가르치고 있는데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를 하러 간 바나바까지도 베드로의 외식에 유혹이 되어 넘어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안타깝습니다.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너무 많은 외식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뿐 아니라 밖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외식을 도리어 믿음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아무 것이나 믿음이라고 하면 믿음이 되어버리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3:27절을 보겠습니다. (40)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외식하는 자들에게 분명히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내게서 외식하는 한 모양이라도 있다면 반드시 화를 당한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분명히 성경에서 외식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외식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외식이 무엇입니까?

겉을 아름답게 보이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자기 겉을 아름답게 보이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름답게 보인다고 하니까 정말 외모를 그렇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주님께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얼마나 율법을 잘 지키고 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아름답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안 지키는 사람이 아름답습니까? 제가 아무리 이런 말씀을 드려도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편지를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도 그저 지식으로 알고 겉을 아름답게 꾸미는 그 일을 계속해서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부자입니다.

주님께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부자가 고운 베웃과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했다고 하셨습니다. 이 부자의 고운 베옷과 자색 옷이 무엇입니까? 그가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한 모든 행위가 그것이고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보이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일부러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행위를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하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입니다, 그것은 예배도 될 수 있고 기도도 될 수 있고 찬송가를 부르는 것도 될 수 있고 봉사와 헌신을 하는 모양도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겉을 아름답게 보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와 같이 생각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식당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 것만 보아도 사람들은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구나 하고 인정을 합니다. 그렇게 인정을 하는 그것이 아름답게 보이는 일입니다.

 

겉은 내 행위입니다.

아니 내 전체가 겉입니다. 그것은 내 행위만이 아니라 내 족보와 그리고 내 지적인 능력도 겉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신학을 공부해서 목사 안수를 받고 박사 학위를 받고 하는 것도 역시 겉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그 겉을 너무도 좋아하고 있습니다. 이제 목사로는 안 되니까 박사가 되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대형교회의 목사들은 가운을 입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오케스트라 같은 찬양대가 있고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최고로 아름다운 것으로 꾸미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이 다 외식에서 나온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하는데 안타깝기만 합니다.

 

누가복음 12:1절을 보겠습니다. (114)

그 동안에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더니 예수께서 먼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바리새인들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라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그것이 외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그들은 구제할 때도 시장에서 나팔을 불면서 했습니다. 기도할 때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어귀에서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도 아주 길게 했습니다. 금식할 때도 얼굴에 칠을 해서 슬픈 기색을 보이려고 했습니다. 그리고 식사를 하기 전에 손을 씻었습니다.

 

박하와 회향과 근체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아니 소득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해서 바다와 산을 두루 다녔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이것은 아주 지극히 일부의 일입니다, 이러한 모든 일들이 지금 이 시대도 그대로 행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했고 이 시대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똑같은 일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율법으로 했고 이 시대는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리새인의 누룩이고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이 시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아니 바리새인들은 율법이라고 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입니다, 율법을 행하는 모든 일이 다 외식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룩은 율법입니다. 그것에다가 바리새인들이 겉모양을 내려고 했던 모든 것이 다 외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그런 외식에 너무도 깊이 빠져 있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이 아니라고 하고 있고 외식을 하면서도 그것을 하나님을 믿는 모습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입니다.

이스라엘이라는 교회가 다 외식에 빠졌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 교회 역시도 외식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율법이 반포되고 1700년 동안 늘 지켜왔던 율법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관습입니다. 지금도 역시 초대교회가 지나고 나서 2000년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외식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신 그 외식을 지금 이 시대 그대로 하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바리새인의 누룩 곧 외식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이 시대 믿음이라고 하면서 하고 있는 교회 안에서의 모든 행위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갈라디아서 2:14-15절을 보겠습니다. (303)

그러므로 나는 저희가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을 좇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똑바로 걷지 않는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게바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대 사람인데도 유대 사람처럼 살지 않고 이방 사람처럼 살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이 되라고 강요합니까?" 우리는 본디 유대 사람이요, 이방인 출신의 죄인이 아닙니다"


외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가지라도 외식을 하는 사람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에게서 외식의 모양이 하나라도 나오고 있다면 이미 그 자체로 진리에서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것은 쉽습니다.

그러나 악이 무엇이라는 것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정말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악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신 성도도 이렇게 쉽게 외식에 빠진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냥 뭐 어때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습니까?

그러면서 외식을 하고 있다면 그는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 사람이고 그는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외식을 하면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는 진리를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는 것은 외식을 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말로만 오직 예수라고 하지 실상은 외식으로 넘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겉모양을 보고 예수를 믿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단 한 가지 외식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도 바울은 진리를 따라 행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얼마나 많은 외식을 하고 있습니까?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외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외식을 하면서도 자기들이 믿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저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그 일을 함에 있어서 힘써 행해야 합니다. 아니 힘에 지나도록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저는 한 시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제가 영지주의가 되라고 복음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외식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부탁하신 일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성도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하늘의 큰 축복을 받은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정말 이 일을 위해서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하지만 그 일을 한다고 하면서 외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외식을 하는 순간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화가 임한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제 율법을 버리고 살아가지 않고 있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네가 이방인들에게 유대인이 되라고 강요를 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외식을 누가 했는가 하면 유대인들이 했습니다, 그런데 왜 너는 외식을 하지 않으면서 이방인들에게 외식하는 것을 보여서 외식하는 유대인과 같이 살게 하려고 하느냐고 말씀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베드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복음이 온 이후로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순간적으로 외식을 했습니다. 그렇게 외식하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네가 유대인으로서 외식을 버렸는데 네 외식으로 말미암아 이방인들이 외식하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방인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지만 이방인과 같이 살아가고 있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유대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지키고 있고 외식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이 우리에게 와서 유대인으로 살아가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외식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말 지금 이 시대는 믿음과 너무 동떨어져 있습니다. 종교는 있어도 교회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이 유대교를 만들었습니다, 그와 같이 이방인들이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정말 죄송하지만 지금의 교회는 기독교라는 종교라고 밖에 말씀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다 외식에 무감각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외식에 대해서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외식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종교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진리를 따라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겉모양을 내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루신 구속의 일을 알고 믿는 일입니다 영의 일과 육의 일을 바로 분별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한 모양이라도 외식이 나에게서 나오지 않게 주의하여야 진리를 따라 행하는 성도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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