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고린도전서15:29-34절을 보면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부활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어디서부터 잘못을 보고 있는지 그것을 이제는 어느 누구도 바로 잡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부활에 대해서 바로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샤머니즘입니다,
이 세상 종교에서 말하는 부활에 대해서 교회 안에서 그대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부활에 대한 기본적인 것도 모르면서 어떻게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이 시대는 부활에 대해서 아주 잘못된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으로 인하여 부활에 대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불교의 열반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의 부활입니다, 그것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불교에서 윤회가 끝이 나고 열반에 오르는 것과 기독교에서 부활을 말하는 것은 실상은 차이가 없습니다. 단지 기독교는 윤회를 말하지 않고 있다 뿐이지 실상은 결국에 가서는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해서 교리로 채택을 하고 있는 것이 신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살던 이 신체가 어떠한 형태로든지 변해서 부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아주 짧게 약간은 애매오호하게 신체의 부활을 말하고 있고 그 신체가 우리의 육체인지 아니면 다른 신체인지도 정확하게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 시대 기독교에 신학에서 배우고 있는 부활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심지어는 지상의 몸과 동일하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이제까지 교회사를 통해서 말하고 있는 신학자들의 주장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에 대해서는 아주 간단하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신학을 공부한 목사들이 과연 부활에 대해서 어떻게 말을 할지는 빤한 것입니다,
부활에 대해서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신체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체가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성이라든지 그리고 정신이라든지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간다는 것은 개를 잘 훈련을 지키면 사람이 된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은 부활에 대해서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그리고 내세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신체는 반드시 썩어 없어진다는 것이 성경적인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썩어 없어지는 것이 다시 부활을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만약에 그 썩어 없어지는 것이 그대로 천국으로 부활을 해서 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은 죄가 있습니다,
그리고 상대가 지은 죄가 있습니다, 아무리 의롭다 함을 받았다 해도 아니 하나님께서 기억치 않는다 해도 우리는 기억하게 되고 그러면 그곳은 더 이상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이 세상을 살면서 지은 죄와 그리고 허물에 대해서 모두를 기억하고 있다면 그곳은 천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조직신학입니까?
그것은 기독교라는 종교의 조직신학 책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신학자가 쓴 책이라 해도 성경보다 더 권위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앞으로 교회는 점점 더 성경보다 그런 책들이 주장하는 것을 기본으로 세우고 성경을 보게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책은 하나의 참고는 될 수 있어도 그것이 성경보다 더 권위를 가져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창세기3:19절을 보면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
아담이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리고 전역 죽어야 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담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담의 자손인 우리 역시도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아담이 구원을 받습니까?
아담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아담이 주님이 오실 때 아담으로 다시 부활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담은 이미 범죄를 했기 때문에 반드시 흙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아담이 부활을 한다는 것은 절대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왜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면 비유를 오해해서 마치 사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어디서 보고 그렇습니까?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입니다 주님께서 그 비유를 말씀을 하셨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비유로 보지 않고 있고 실제로 보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가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 것을 말씀하니까 아브라함도 있고 거지 나사로도 있는 것으로 알고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 말씀이 너무 결정적으로 와 닫고 있습니다,
아담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모든 자손에게 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아담의 자손은 이미 범죄를 했기 때문에 이 세상을 살다가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 아담이 부활을 해서 천국에 들어간다는 것은 지금 창세기의 말씀을 뒤집어 버리는 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아담이 천국에 들어갑니까?
그럼 아마도 천국에 가 있는 사람들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담에게 왜 에덴에서 선악과를 따 먹어서 우리가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게 했느냐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도 아담은 천국에서 영원히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이 세상에서 한 일을 가지고 천국에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그곳은 천국이 아니라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교인들이 참 착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얼마나 그들이 이 세상에서 잘 살았기에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고 하는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저는 제 신체가 천국에 간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겠습니다,
무엇하러 믿습니까?
아니 저는 그렇게 잘 살지를 못한 사람입니다 율법의 어느 한 가지도 못 지킨 제가 그것을 가지고 어떻게 천국에 갈 수 있습니까?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모르고 신체를 가지고 부활을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죄 덩어리입니다,
그리고 평생을 악만 행하다가 죽습니다. 그런데 그 신체를 가지고 부활을 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얼마나 외식에 빠져 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자기들이 꽤나 선하고 의롭게 산 것으로 착각에 빠져 있어서 그것을 가지고 천국에 가려하고 있고 또 그것이 천국에 간다고 하니까 더욱 더 외식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죽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죽습니다, 이 신체는 흙이기 때문에 죽으면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것을 다시 부활을 한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입니다, 정말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보면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아니 지혜를 구하고 성령을 구하면 하나님께서 이 부활에 대해서 바로 가르쳐 주실 수 있는데도 종교에 빠져 종교가 주장하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그 신체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하면서 거듭남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두 번 낳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면서 육으로 난 것으로 육이니까 그것은 아담과 같이 흙으로 돌아가고 성령으로 난 영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의 형상으로 변한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것은 진짜 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나라고 하는 신체는 썩어서 흙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내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신체의 생명이 끝이 나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그것이 어떻게 내가 될 수 있습니까? 죽는 것을 나라고 하는 사람은 죽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나라고 하는 사람은 그 생명과 함께 부활의 신령한 몸으로 변할 것이 분명합니다,
이 시대는 부활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막연한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명확한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야 하는데 그 중요한 것은 어정쩡하게 넘어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어떻게 되고 부활이 어떻게 되는 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새번역입니다.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지 않는다면, 죽은 사람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사람들은 무엇 하려고 그런 일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정말로 살아나지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그들은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습니까?”
성경 참 어렵습니다.
그리고 번역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는 이 말씀을 우리가 번역을 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 헬라어로 기록을 했을 때도 여러 가지 비유와 은유를 해서 말씀을 기록했을 것이 분명한데 그것을 우리가 또 번역을 해서 보고 있습니다, 저는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뒤 문장을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15장에서 부활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보면서 번역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번역이 잘못 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물론 방언의 은사를 받은 사람이 이 성경을 번역을 해서 우리가 지금 이 시대 여러 가지 성경을 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입니다, 성경은 우리를 죽은 자들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보면 분명히 신체의 부활을 말씀하는 것과 같이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부활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부활은 내 신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아담은 흙이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돌아간 흙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다시 살려 보아야 그저 흙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어느 한 문장을 보고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 전체가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하고 또 앞뒤에 있는 문장을 보면서 깨달아야 합니다, 마치 어느 말씀이 불쑥 튀어 나온 것과 같이 해석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모든 성경은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성경으로 볼 수 없게 번역을 해 놓았습니다,
잘 보시기 바랍니다,
12절 앞에는 죽은 사람의 부활이라고 제목을 붙여놓았습니다, 그리고 35절 앞에는 몸의 부활이라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이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성경말씀을 보기도 전에 이미 그 제목에 미혹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죽은 사람이 부활을 합니까?
그리고 몸이 부활을 합니까?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몸의 부활도 분명히 표현을 해야 합니다. 신령한 몸의 부활인지 아니면 신체의 몸인지를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자기들 마음대로 제목을 붙이다 보니까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 말씀을 바로 깨달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살지 못하면
그냥 우리가 쉽게 이 말씀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가 살다가 죽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과 같이 그대로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이 세상을 살다가 죽고 그 다음에 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는 뜻으로 아주 쉽게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8:22절을 보면
“예수께서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좇으라 하시니라”
죽은 자입니다,
누구를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물론 실제 죽은 자도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죽은 자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죽은 자입니다, 실제 땅 속에 들어가 있는 자도 물론 죽은 자이지만 아담의 자손은 흙으로 돌아가야 하니까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를 말씀합니까?
지금 실제 신체의 생명이 죽은 그런 죽은 자를 말씀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아담의 자손은 모두가 죽은 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그 말씀을 제자들에게 하고 있습니다, 제자 중에 한 사람이 자기 부친의 장사를 하게 해 달라고 하니까 주님께서 죽은 자들로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입니다,
아담의 모든 자손은 다 죽은 자입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든 안 믿든지 다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신체는 분명히 살아 있지만 주님께서는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자입니다,
우리 아담의 몸은 죽은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아담의 신체를 죽은 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도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하면 성경이 우리를 죽은 자라고 말씀을 하면 죽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자기 신체가 살아 있다 보니까 죽은 자라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죽은 자입니다, 그 죽은 자에게 성령으로 난 영이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아나지 못한다는 말씀은 그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으로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그 죽은 자는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다시 사는 자는 그 죽은 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난 영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분명히 죽은 자들입니다, 이 인생이 도무지 어떠한 방법으로도 다시 살지 못하면 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한다는 국어의 의미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도무지는 아무리 하여도 입니다, 그리고 다시는 원래 살았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원래 살았던 것과 같이 다시 살지 못하면 이라는 말씀입니다,
생명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죽은 신체가 다시 산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 말씀을 보고 마치 신체가 다시 사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누군가 첨삭을 해서 죽은 사람의 부활이라는 제목을 붙여 놓다보니까 사람들이 그 제목을 보고 아주 쉽게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우리 죽은 자입니다, 그 죽은 자가 도무지 다시 사는 것이 없다는 말씀은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살지 못한다면 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앞에 죽었던 신체가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방법으로든지 다시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떠한 방법인가를 주님께서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방법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볼 때는 국어를 바로 알고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목사들이 국어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국어를 모르니까 그저 자기들의 이성에 보이는 대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말씀을 보고 마치 신체가 다시 사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신령한 몸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신체는 썩을 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는 것은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는 것을 말씀을 하는 것이지 이 썩을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부활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하지 못하면 반드시 율법주의와 행위에 빠지게 되어 있어서 불교와 마찬가지로 해탈의 경지에 오르려고 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례입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어서 장사 되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 세례의 의미입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 받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세례를 받아보아야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성령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 지내고 다시 사는 것은 죽었던 것이 다시 사는 것이 아니라 이제 하늘의 것으로 다시 산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신체가 다시 사는 것이 세례가 아니라 하늘의 것으로 다시 사는 것이 세례이고 그것을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죽은 사람이 세례를 받습니다,
그것은 물세례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세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를 받음으로 해서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하고 성령으로 난 영이 내 안에 거하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하고 있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 세례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입니까?
아니 죽은 신체가 다시 사는 것입니까? 그것은 불교의 사상입니다, 그들은 윤회를 하다가 결국에는 해탈이 되어서 열반에 오른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신체가 점점 더 해탈이 되어서 결국에는 열반에 올라간다는 것이 불교의 사상입니다, 결국에는 그 신체가 그렇게 된다는 말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윤회를 하다가 열반을 하는 것과 기독교에서 신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부활을 한다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단지 윤회만 다를 뿐이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제까지의 모든 신학자들이 그런 사상으로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있고 그러다 보니까 천국에서 서로 만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세례입니다,
그것은 성령이 내 안에 오심으로 내 육체는 죽고 이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죽은 사람이 세례를 받는 것은 바로 이 영의 탄생이 있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 있습니다, 그 영이 살아나기 때문에 세례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왜 이 시대 율법주의에 빠지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신체의 부활을 믿고 있다 보니까 그 신체가 천국에 가서 자랑하려고 하니까 율법주의가 되고 있고 교회 안에서 점점 더 많은 행위를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성도의 부활은 그런 신체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부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입니다, 그것은 죽은 자입니다, 그러나 이 죽은 자가 세례를 받는 것은 성령으로 난 영이 우리 안에 있어서 그 영이 다시 살아나기 때문에 세례를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부활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사람의 이성적으로 성경을 너무 쉽게 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공동번역입니다,
“또 우리는 무엇 때문에 언제나 위험을 무릅쓰면서 살고 있습니까?”
부활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이 부활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었기 때문에 그가 얼마나 많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살았는가를 성경을 통해서 잘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부활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냥 이성에 따라 살다가 죽으면 그만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성경은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부활을 마치 신체의 부활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은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사람이 생명이 있고 그 생명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모든 사람이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아담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아담이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영의 비밀로서 거듭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부활을 하는 것이지 아담의 사람이 부활을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천국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의 것은 어느 것도 가져갈 수 없습니다, 아담의 사람은 이제 썩어 없어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사람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로마서에서는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동족의 위협과 그리고 로마의 위협 그리고 강도나 도적들의 위협으로부터도 견디고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이 영의 놀라운 비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이 없으면 내가 이러한 일을 왜 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사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내 안에 거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새번역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여러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이나 확실한 것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
정말 우리 신체는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왜 날마다 죽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하신 그 일로 내가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만큼 자기가 죽는 것이 확실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영의 비밀을 모르면 절대로 부활에 참여를 하는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이 무엇입니까?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에서 우리 속에 착한 일을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 속에 착한 일을 하셔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 생명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모릅니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너희에게 자랑하고 있고 그리고 신체의 자신은 날마다 죽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사도 바울이 죽어야 예수 그리스도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입니다,
그것은 우리 신체가 다시 살아나는 생명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 안에 탄생이 되는 거룩한 생명입니다 그 생명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생명이 있는 성도만이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부활의 신령한 몸을 입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내가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하더라도, 인간적인 동기에서 한 것이라면, 그것이 나에게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할 것입니다.”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의 깊은 비밀을 알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성경을 거의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초등학문으로 만들어서 복음을 깨닫지를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맹수와 싸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입니다,
그리고 다른 복음을 가진 거짓 형제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에베소에서 그 맹수들과 싸웠습니다, 왜 싸웠는가 하면 부활을 믿고 있었기 때문에 싸웠다는 말씀입니다, 그 싸움이 그저 인간적인 이성을 가지고 싸웠다면 나에게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유익이 없다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자기가 한 모든 일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부활이 없다면 나는 내일 죽을 것이니까 먹고 마시면서 그저 짐승과 같이 살았을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복음을 가진 자가 거의 없습니다. 솔직히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힘들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왜 합니까?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죽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그 영이 주님의 날에 부활의 형상을 입는 것이 없다면 저 역시도 이 일을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목사들과 같이 그저 좋은 말만 하고 감성을 자극하면서 종교인으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분명한 부활이 있습니다, 그 부활은 신체의 부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부활이라는 말씀입니다.
“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새번역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나쁜 동무가 좋은 습성을 망칩니다.”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면 반드시 율법의 행위에 열심을 내게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악한 동무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술친구들로 더불어 먹고 마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악한 동무입니다,
마태복음 24장에서 나오는 악한 동무는 바로 율법을 지키는 자를 비유로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히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려면 자기 신체로 행하는 것을 잘하려고 애를 쓰게 되고 있고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로 시작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키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왜 율법을 지킵니까?
신체의 부활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신체가 부활을 해서 천국에 가니까 더 좋은 모습으로 가기 위해서 그리고 칭찬을 받기 위해서 당연히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고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한다고 하면 절대로 율법주의에 빠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못 믿습니다,
아니 안 믿어집니다, 성경을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악한 동무에게 속고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동무라고 하니까 이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를 악한 동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악한 동무가 선한 행실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를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신체의 부활을 말하는 악한 동무가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선한 행실을 더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더럽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는 악한 동무에게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속는 순간에 반드시 사망이 찾아옵니다,
“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새번역입니다,
“똑바로 정신을 차리고, 죄를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을 부끄럽게 하려고 내가 이 말을 합니다만, 여러분 가운데서 더러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없습니다.”
의를 행하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의를 행합니까? 내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있습니다, 그것을 마태복음에서 재물로가 하나님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가 되는 것이 의를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죄입니까?
사망에 이르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에 있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부끄럽게 하려고 부활에 대해서 바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계속해서 어떠한 몸으로 부활을 하는 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러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고 영으로 난다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제가 영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그 영에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썩지 않는 몸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신체의 부활이라는 어리석은 주장들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것은 아담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아담의 사람이 부활을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아담의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 영이 썩지 않은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한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안에 탄생이 되는 영의 놀라운 비밀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가 되어서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다시 살아서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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