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120-1,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윤주만목사 2025. 5. 14. 06:01

로마서11:33절을 보겠습니다. (25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거의 거꾸로 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제까지의 신학자입니까?

그가 아무리 이름이 있다 해도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고 또 그들의 행적을 우리가 알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사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지만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은 그 은혜가 반감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지독한 율법주의에 있다가 긍휼을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금 11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 그들이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복음을 처음부터 들었다 해도 그 감격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방의 교회가 왜 그렇게 쉽게 율법주의에 빠졌는가 하면 사실 율법주의에 있다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깨닫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할 때 그는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들고 있었고 또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는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재판에 넘기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그가 왜 긍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니까 자기가 알지 못할 때에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보다 더 긍휼을 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율법주의에 있다가 복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복음에 대해서 강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는 이 율법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지는 않지만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중에서는 정말 사도 바울 못지않게 나름대로는 율법을 지켰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율법주의에서 하나님께서 사랑을 해 주심으로 이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왜 초대 교회에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쉽게 빠져 들어갔는가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다가 나온 사람은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긍휼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도 긍휼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더 큰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이 비밀을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다가 긍휼을 입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이 비밀을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는 정말 이 복음이 이 시대 우리에게 계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보다 더 율법주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로마서를 기록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감동이라면 누구라도 기록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까지 교회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제까지 율법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했습니다.

얼마나 오묘합니까?

이것은 정말 비밀입니다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감격해 하고 있는가를 이제 뒤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저주를 받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이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이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긍휼을 입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이여, 사도 바울이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저 역시도 가슴에 다 담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감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긍휼을 입은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지혜와 지식에 아주 조금 접근을 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최고의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극치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는데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사도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그 부요함이 얼마나 깊은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성경을 문자로 보고 그것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아는 것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초등학문을 가지고 이 시대 달변가들이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는 깨달을 수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고 가슴에 와 듣습니다. 아니 성령이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이 감동을 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과 같이 그런 율법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보다는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이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전도서7:24-26절을 보겠습니다. (955)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 긍휼하심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긍휼하심을 입은 자만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있는가를 이 전도서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성경 중에서도 철학적인 사상이 담겨져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전도서를 모르고 있고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이 전도서의 말씀을 전혀 설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지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 지혜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아주 조금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정도로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사실 그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세상 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 이 세상에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연스럽게 율법을 지키면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서기 150년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의 교회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쉽게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입니다

솔로몬이 총기가 있을 때는 성경의 거의 모든 지혜를 깨달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솔로몬이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을 하면서 너무 깊어서 통달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이 되지도 않은 영의 일과 내세의 일만 해도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압니까?

정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지혜를 아는 것만도 그것이 얼마나 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부활을 했을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같이 환하게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해 보아야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의 사랑도 다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 목사들은 그리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들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희미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서 하나님을 볼 때 그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깊이를 어느 누구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정말 우리는 사망의 구렁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전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너무 깊고 멀어서 통달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지혜를 깨달을 수 없어서 거의 모든 사람이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교회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망보다 더 독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모두가 포승으로 묶여 있습니다. 어느 누가 지금 이 시대 정통의 기독교를 음녀라고 하고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에게 임하지를 않아서 모두가 그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유대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입니다 이 두 교회는 음녀가 되었고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로는 그것이 음녀인지 그리고 짐승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에게 피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저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왜 그들이 붙잡혀 있는가 하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거기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이 여인이 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여인이 짐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에게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이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은혜가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사람의 지혜로 어느 정도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당시 그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세상에서 자기 지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을 깨닫고 나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늘 깨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평생을 이 지혜를 구한다 해도 아니 성경만 보고 산다고 해도 겨우 구원에 대해서 아는 정도고 그것을 희미한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아는 것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지혜가 없어서 다 이 여인에게 붙잡혀서 포승으로 메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이 사망보다 독한 여인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이 여인을 피해서 이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승도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 압니다. 그리고 새가 그물에 걸리면 압니다. 또 물고기도 자기가 그물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파닥거리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죽고 맙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만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 시대는 인격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꽤나 지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모두가 이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입니까?

루터입니까? 칼뱅입니까? 웨슬레입니까? 로이드존슨입니까? 감히 우리가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어렵게 생각하는 그들이 모두가 이 여인에게 붙잡혀서 포승에 묶여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그대로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까?

이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면서 그들이 이 지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깨달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던 우리를 그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서 건져 주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부요합니다.

그 지혜와 지식입니다 정말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망보다 독한 여인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심으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3:8-9절을 보겠습니다. (312)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정말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율법주의에 있었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것은 정말 사도 바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입니다.

그 부요함이 우리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을 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기 때문에 부요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깨달아서 구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부요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깊습니까?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뼈 속부터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본성을 따르는 나무에서 가지를 찍어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깊은 가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본성을 찍어 버리셨습니다. 우리 이성으로 그것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찍어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해서 우리가 이 영의 일을 깨달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지혜와 지식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긍휼을 입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자기가 더 작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은 성도만이 이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정말 우리는 지극히 작은 성도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판단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그리고 강퍅케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것을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제 복음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어서 그것을 아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불의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것을 감히 누가 측량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시고 그 자리에 우리 이방인들을 접붙이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제 아주 조금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에는 그 역시도 율법주의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불의하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닫고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고 그 지혜와 지식의 비밀을 나타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찍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는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경륜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찍어 주시고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7:14절을 보겠습니다. (10)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린도전서2:10절을 보겠습니다. (265)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의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어두움에 빠져 그 길을 찾지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만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역시도 그 길을 찾지 못해서 모두가 어두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성경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그 길을 찾아서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가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마치 자기가 길을 찾아서 가고 있고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어두움에 있어서 아직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방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입니다

지구의 인구가 70억 명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적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천주교를 빼고 그리고 이단들을 빼고 나면 정말 적은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들이 보아도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지만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당시 정통의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그 길을 찾지 못 했습니다. 아니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왜 없습니까?

이것은 영의 일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는 이스라엘로서는 자기들이 충분히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예배와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렇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실제 이 시대를 보더라도 아니 이방의 교회를 보더라도 그의 길을 찾아서 간 사람이 거의 안 보입니다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가 보았지만 그의 길을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의 모든 교회는 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그의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생명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막연하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

성경이 그의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하면 다수가 그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시대에 얼마나 적은 수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는가를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도 듣지를 않습니다.

적습니다.

이 세상 전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적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역시 그의 길을 찾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해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게 접붙이셨습니다. 우리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이제까지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그의 길을 찾지 못하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다가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의 길을 찾았다면 아마도 지금 교회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언입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선언적인 말씀입니다 왜 찾지 못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자식의 부요함이 너무 깊어서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성도님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찾지 못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전도서에서 말씀하는 그 여인에게 모두가 붙잡혀 있습니다. 그 여인은 사망보다 더 독한 자인데 그 여인에게 모두가 포승으로 묶여서 사망으로 가고 있지만 지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이 짐승보다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은 비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찍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영의 일을 그러니까 영의 생명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이 시대는 성령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을 모르다보니까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 놓은 샤머니즘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모든 것이 실상은 모두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종교의 샤머니즘적인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자기들의 육체로 나타내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입니다

그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영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뿌리가 거룩합니다.

가지도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거룩한 뿌리와 우리가 접붙임이 되어서 우리 가지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길로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는가 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본성을 찍을 수 없습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죄라고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오신 성도만이 그것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이것을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본성을 찍어야 합니다. 그것을 찍지 않고는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어느 누구도 찾지 못 합니다 그의 길을 사람이 신학을 공부를 해서 찾을 수 있었다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본성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신학을 공부를 하고 평생을 성경을 보면서 산다 해도 하나님께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주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는지도 모르고 성경에 성령이라는 단어가 있으니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묻고 있습니다. 비교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해서 받으면 하나를 하면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해서 받으면 듣고 믿어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듣고 믿어서 받으면 율법의 행위로는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고 듣고 믿은 성도만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진리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듭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그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스스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그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순종치 아니하심에 갇혀 있는 사람은 아직 긍휼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긍휼을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는 점점 더 순종치 아니하심의 본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