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1:9-1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4쪽)
“또 다윗이 가로되 저희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옵시고 저희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저희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
남은 자들이 완악하여졌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미리 아신 백성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거절을 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을 감기게 해서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없어서 사람의 이성을 따라 율법주의를 지향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은 성도입니다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 표면적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예표입니다
그들을 경계로 해서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구약의 말씀들을 계속해서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을 하고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굳게 믿고 구원을 받을 것으로 생각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표면적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배성이 아닌가를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더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성경을 보면서도 눈이 감겨서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율법의 의가 없는 거지와 같은 자를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그렇게 가난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구하는 것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또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가난한 자만이 이 은혜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부자는 절대로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과 지키지 않은 사람은 분명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율법의 의가 전혀 없는 사람은 구하는 것이 은혜로 밖에는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율법의 의가 있는 사람은 그것이 온전히 은혜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행위로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완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완악한 자들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보지 못할 눈을 주셨습니다.
성경을 보았지만 그들은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물론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이성으로는 보지 못할 눈을 주셨지만 그들은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주의로 가고 있습니다.
보지 못할 눈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다가 둘 다 구덩이에 빠진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어왔고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본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소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왜 소경입니까?
성경을 문자 그대로 보았기 때문에 소경입니다. 율법을 보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 했기 때문에 소경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 앞에 온 청년과 같이 이스라엘은 소경이 되어서 어려서부터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주님께서는 소경이라고 말씀을 하시지만 그 말씀을 보는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눈이 감겼습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편지를 통해서 우리가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그 율법에서 이제는 복음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역시 율법주의로 있을 때는 아무리 율법을 보아도 그것이 복음으로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소경이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보는 사람의 눈이 소경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있는 문자 그대로를 보고 말씀대로 하려고 했던 이스라엘이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의 교회 역시 소경이 되어서 율법을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주님 앞에 온 청년이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부자 청년은 근심하고 돌아갔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에게 주일을 지키지 말고 십일조를 하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역시 돌아갑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율법에 대해서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악한 일이라고 하지만 그들은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들을 보면서 근심하고 있습니다. 저와 많은 사람들이 통화를 했지만 역시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복음을 보면서도 그 심령이 혼미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이 혼미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복음을 보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어렵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그 미리 아신 자가 아니고는 복음을 받아들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듣지를 않습니다.
왜 듣지를 못하는가 하면 이미 사람의 이성이 그들을 지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그렇게 이 세상 초등학문을 사람의 마음에 뿌리 깊게 자리하게 만들어 놓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교회에 나와서 아무리 성경을 보아도 복음이 안 보이고 또 설령 듣는다 해도 그것이 안 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우리도 예전에는 그들과 같았습니다. 아니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거대한 종교가 이끄는 대로 끌려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 시대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진리를 좇아 교제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가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되었고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어 구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성도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순전히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들보다 똑똑합니까?
우리가 기독교인들보다 지혜롭습니까? 우리가 기독교인들보다 세상에서 더 많이 공부를 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 복음이 보이고 있습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오직 믿음으로 살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여기까지 온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진리를 좇아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영광을 받을 그것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영광에 참예를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 이 시대 우리에게 임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다윗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밥상이 그들에게 올무가 되고 덫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이 걸려 넘어지고, 보복을 받게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서 보지 못하게 되도록 하여 주십시오. 그들의 등이 언제나 굽어 있게 하여 주십시오."”
다윗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이면 이 말씀은 주님이 하시는 말씀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다윗의 예언은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희 밥상입니다
누구의 밥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밥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실제 먹는 밥상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구하는 것을 얻고자 먹고 있는 성경말씀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보고 아는 지식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의 마음이 혼미하게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고 그 율법을 가지고 주님을 대적하는 것을 보고 저희 밥상이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이 성경을 보고 아는 지식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같은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성경 외에 것을 본 것이 아니라 그들도 여려서부터 성경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은 것이 아니라 혼미한 심령이 되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고 그것을 다윗의 시편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6:27절을 보겠습니다. (신 153쪽)
“썩은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마태복음16:12절을 보겠습니다. (신 27쪽)
“그제야 제자들이 떡의 누룩이 아니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교훈을 삼가라고 말씀하신 줄을 깨달으니라”
저희 밥상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썩는 양식이 있고 썩지 아니하고 영생하는 영식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썩는 양식입니다
그것을 먹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썩어 없어진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으로 보면 반드시 썩는 양식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밥상입니다
썩는 것을 먹는 밥상이 있습니다. 그리고 영생하도록 썩지 아니하는 밥상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들어오면 반드시 이 둘 중에 하나를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 둘을 함께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이 중에 하나를 먹게 되게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에서 이렇게 두 가지를 비교를 해서 말씀할 때는 반드시 하나는 되고 하나는 안 됩니다.
썩는 양식을 먹습니까?
저희 밥상에 썩는 양식이 놓여 있습니까? 그 밥상에는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없습니다. 또 그 밥상에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있습니까? 그 밥상에는 썩는 양식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둘을 함께 먹으며 어떻게 되는가 하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썩는 양식을 먹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있습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먹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율법을 지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율법주의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합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상에 무엇이 있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썩는 양식이 있는 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먹고 있는 밥상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그저 종교가 주는 대로 먹고 있습니다.
알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밥상에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그것을 전혀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분명히 두 가지 양식이 놓여 있습니다. 썩는 양식이 있고 영생을 하도록 있는 양식이 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율법의 행위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밥상입니다
교회 안에서 듣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듣고 있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는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만 있는 것이 아니라 썩는 양식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듣고 있는 그 말씀이 썩는 양식인지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까?
이 시대 목사들이 오직 예수를 말하지 않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오직 예수라는 말에 썩는 양식이 포함이 되어 있다면 그것은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이 아니라 썩는 양식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 양식을 먹으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어느 목사가 오직 예수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영생 하도록 있는 양식을 전하는 목사는 없습니다. 오직 예수라고 하는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그 밥상에 누룩을 섞어 놓고 있습니다. 그 누룩이 무엇인가 하면 바리새인의 누룩이고 그것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하라고 하는 말입니다.
양식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그 음식에 독이 있으면 사망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밥상에 정말 산해진미가 있다 해도 미량의 독이 있으면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미량의 독이 무엇인가 하면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한다는 말씀입니다.
썩을 양식입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들의 누룩입니다. 그 누룩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정말 이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무지에 가깝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율법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밥상이 왜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썩을 양식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율법을 지키면서 하나님을 믿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런 바리새인들에게 썩는 양식을 위해서 일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전혀 주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독입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해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는 할례를 받은 너희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모든 율법을 항상 다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하는가 하면 율법을 한 가지를 지키면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온 율법을 지킬 의무가 주어집니다.
저희 밥상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의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밥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밥상만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먹고 있는 모든 말씀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먹고 있는 밥상에 무엇이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잠언23:3절을 보겠습니다. (구 936쪽)
"그 진찬을 탐하지 말라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니라"
베드로후서2:13-14절을 보겠습니다. (신 385쪽)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저희 간사한 가운데 연락하며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성경말씀입니다
그것을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가 양식이 아니라 그 안에서 복음을 보고 듣고 믿는 것이 양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진찬을 먹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내가 먹고 있는 이 음식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진찬을 탐하지 말라고 하니까 마치 세상의 음식을 탐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잠언의 말씀은 마치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일을 가르쳐 주는 지혜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잠언도 역시 우리의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진찬을 먹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무엇을 먹고 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있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전하면 복음을 듣고 있고 목사는 오직 예수라는 말 한 마디를 하면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까?
그 목사가 설교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 설교를 했습니까? 그래도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고 있고 또 십일조를 내라 하고 있고 헌금을 하라고 하고 있다면 그는 오직 예수가 아닙니다. 그는 교회 안에서 진찬을 베풀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에서도 음식을 먹고 있는 네 앞에 있는 자가 누군가를 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간사하게 베푼 식물입니다
그 식물에 대해서 베드로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찬이 있는데 그 음식이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라는 말씀입니다. 진찬이 무엇인가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아주 진귀한 음식을 진찬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진찬이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찬
맛있는 식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식물이 맛있겠습니까? 썩을 일을 위해서 먹는 식물이 맛있겠습니까? 영생을 위하여 있는 음식이 맛있겠습니까? 우리 사람의 이성에는 썩을 음식이 맛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영생을 위하여 있는 음식을 먹여 주면 어떻게 됩니까? 그들은 먹지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진찬입니다
그것은 간사하게 베푼 식물입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의에 대해서는 이미 로마서1장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다시 이 불의를 말씀드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불의의 값입니다.
그러니까 불의를 행함으로 해서 불의를 당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에 대해서 말씀할 때 그것이 거의 다 율법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불의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라고 설교를 하는 것이 간사하게 베푼 식물이고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먹고 있는 양식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낮에 연락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입니다
누가 연락을 했습니까? 한 부자가 나사로의 비유에서 부자가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했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부자가 누구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한 부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호화로이 연락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낮에 연락을 합니다.
성도는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연락을 하는 것을 사도 베드로는 간사한 가운데서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서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어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 밥상입니다
그것이 이스라엘만의 밥상이 아닙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 시대 우리가 어떻게 간사하게 베푼 식물을 먹게 되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불의의 값이 간사한 식물입니다. 그리고 그 불의의 값으로 간사한 가운데 연락을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범죄 하기를 쉬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을 쉬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만 범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가 어떻게 되어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가 한 이 말씀 그대로 믿음에 굳세지 못한 영혼들이 모두가 유혹을 당하여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믿음에 굳세게 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유혹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다 유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이라는 진찬을 가지고 간사하게 식물을 베풀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목사들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그 말 한 마디를 하면 자기들이 영생을 위하여 있는 양식을 먹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까?
유혹을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베드로가 굳세지 못한 영혼들이 유혹을 당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유혹을 당하고 있는가 하면 베드로후서2장10절의 말씀과 같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썩어서 더럽게 되는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의 밥상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의 밥상입니다. 그 밥상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의 밥상을 주님께서는 썩는 것을 위하여 일하는 밥상이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리새인이 지키고 있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바리새인 못지않게 외식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을 잠언에서는 진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간사하게 베푼 그 진찬에 모두가 유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믿음에 굳세게 서지 못한 사람은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직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 역시 믿음에 굳세게 서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무엇을 먹고 있습니까?
내 밥상이 무엇이 놓여 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너무 바쁘게 살아가다 보니까 낮에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깨어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는 낮에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진찬에 연락할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언제 그 진찬을 먹을 시간이 있습니까? 정말 성경에서 영생을 위하여 있는 양식을 먹기 위해서 일하는 시간도 부족합니다. 우리 평생의 시간을 그것에만 매달려도 시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진찬을 먹이고 있고 그 진찬을 먹으면서 연락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믿음에 굳세게 서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여러분은 반드시 유혹을 당하게 되어 있고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육체로 썩어 버리는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모두가 믿음에 굳세게 서지 못해서 간사하게 베푼 식물에 유혹을 당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희 밥상입니다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밥상이 그렇게 된 것과 같이 이방인의 교회도 역시 그렇다는 것을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의 밥상에 무엇이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오직 예수를 믿으라는 그 말 한 마디에 모두가 유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시편69:22-23절을 보겠습니다. (구 851쪽)
“저희 앞에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저희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저희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하는 왕입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이방의 교회에게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의 밥상입니까?
이 시대 바알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밥상입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모든 사람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 모두가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를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사람이 더 많이 있다는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의 보응이 되게 해 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 밥상을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먹고 있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이 썩을 것을 위하여 일을 하고 있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을 위하여 양식을 먹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다 속고 있습니다.
모두가 유혹을 당해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저희 눈이 감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지만 성경을 보면서 자기들이 보고 있는 문자를 아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나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성경을 보고 정말 그 말씀에 대해서 깊이 상고를 해야 합니다. 누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나쁜 의미로 기록이 되어 있는 말씀은 이스라엘의 일로 치부를 해 버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하나님께서 보는 눈을 주셨다고 하면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그대로 먹고 있습니다.
저희 밥상입니다
그것은 진찬입니다. 그리고 낮에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얼마나 연락을 하고 있습니까? 예배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을 받게 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찬양을 부르는 사람들이 그들의 혼을 다 빼 놓고 있고 통성 기도를 한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고 헌금을 하고 나면 마치 자기들이 성도나 된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연락을 하고 있는 행위들입니다. 사실 찬양 한 가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찬양을 부르면서 얼마나 연락을 하고 있습니까? 그 찬양을 그들의 말대로 은혜롭게 부르고 나면 마치 자기가 성도가 된 것과 같고 천국은 보너스 같이 여겨지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연락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밥상이 되고 있지만 그러한 행위를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지 못할 눈을 주시면 그들은 죽을 때까지 복음을 깨닫지를 못하고 낮에 그렇게 연락을 하면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보응이 어떻다는 것을 모르고 연락에 빠져 나오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밥상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먹고 있는 밥상이 불의의 삯이라고 사도 베드로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에 굳세게 서지 못해서 유혹을 당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은 생명의 양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위하여 있는 양식입니다
그것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 믿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초등학생과 같이 성경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영생을 위하여 있는 양식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누룩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이 시대 역시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리새인의 누룩을 주의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들과 같은 밥상을 먹고 있으면서도 전혀 주의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아니 차라리 문자를 모르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말에 선 무당이 사람을 잡는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서 문자를 아는 것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 딴에는 그 문자를 아는 것이 대단한 것과 같지만 사실은 선무당과 같습니다.
나만 죽으면 괜찮습니다.
왜 다른 사람들까지 유혹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 유혹을 하는 그 사람도 자기들이 유혹을 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진찬으로 유혹을 하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을 잘 믿는 행위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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