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찌어다(계20:9.)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107-2,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윤주만목사 2025. 3. 22. 17:06

스바냐3:12절을 보겠습니다. (1308)

내가 곤고하고 가난한 백성을 너의 중에 남겨 두리니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의탁하여 보호를 받을지라

남겨 두었습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게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입니다. 다수가 아니라 남은 자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소수가 옳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숫자의 의미보다는 남은 자가 누군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는데 그 남은 자가 누군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그 남은 자가 누군가를 찾는 것이 아니라 그 문자만을 보고 막연하게 자기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고 교회 안에 있는 소자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목사가 남은 자라고 하니까 남은 자인 줄 알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내게 대해서 기록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이유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성경을 보는 이유는 이 성경에 영생을 얻는 지혜가 있기 때문에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지만 성경을 보고 도리어 저주를 받을 일만 교회 안에서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교회의 다수는 다 그렇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부터 이제까지 얼마나 많은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데도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고 있고 그것을 11장에서는 바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습니다.

그들이 누군가는 이미 1-4절까지에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그 말씀을 전혀 모르고 그저 성경에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자기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누구입니까? 곤고하고 가난한 자가 남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가난한 자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모두가 바알을 섬기면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얼마나 부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모르고 바알에게 분향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누가 은혜를 받을 수 있는가를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은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도리어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바알을 섬기면서도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를 하나님께서 보호를 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사단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는 그 사자에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아니 싸워 봤자 게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보호하시지 않으면 우리는 아무 힘도 없이 사자의 밥이 되고 맙니다.

어떻게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까?

곤고하고 가난한 자가 되어야 보호를 받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난한 자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으려면 반드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려면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교회에만 들어오면 부자가 되려고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수냐 소수냐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남은 자가 누군가를 알고 남은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남은 자가 되기보다는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굳게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남은 자가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자입니다.

로마서11:6절을 보겠습니다. (254)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에 근거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은혜는 이미 은혜가 아닙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만일, 있을지도 모를 뜻밖에 경우를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에 대해서 바로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수가 영생을 받았다고 하니까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생은 정말 하나님의 기적입니다.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닙니다.

성경이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으로 살 수 있는데 그 믿음이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이 그렇게 쉽다면 사도 바울이 왜 만일이라는 단어를 썼는가를 한번쯤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거의 없습니다.

아니 너무도 적어서 사람들이 누가 구원을 받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다 종교에 의해서 속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세뇌가 되어 있는 것을 가지고 믿음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아니라 세뇌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분별이 안 됩니다

자기가 세뇌가 되어 있는지 믿음이 있는지를 모르고 다수의 흐름을 따라 가고 있습니다. 다수가 옳다고 하니까 아무 것도 모르면서 다수를 따라 가고 있습니다. 그 다수가 사망의 길로 가고 있지만 사람의 이성으로 아무리 생각을 해도 그 다수가 옳기 때문에 끌려가고 있습니다.

은혜로 된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부인하는 사람이 없고 그것을 만약에 어느 누가 부인을 하면 교만하다고 하고 이단이라고까지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입니다

은혜를 아는 것이 아니라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자기가 어떻게 은혜를 받았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성경에 문자적으로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은혜로 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라는 단어의 뜻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이기 때문에 은혜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누가 은혜로 된 것입니까?

남은 자가 은혜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이 은혜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 것은 전혀 모르고 그저 은혜라는 단어의 의미가 좋으니까 아니 자기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기 위해서 은혜라는 말을 아무 것에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남은 자가 은혜로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남은 자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분명히 성경에서 가난한 자를 남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자기가 가난한지 부자인지도 모르면서 성경에 가난한 자가 남은 자라고 하니까 기도를 할 때마다 자기들이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말로 가난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는 누가 못 합니까? 가난하지도 않은 자가 가난하다고 하는 것은 가증한 일입니다. 실제 내가 가난해야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지 실상은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 가난하다고 하면 누가 그것을 인정하겠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자기들이 다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라야 은혜를 받을 수 있으니까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주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난한 자가 누군지도 모르고 그저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이 율법에 대해서 가난한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가난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가난한 정도가 아니라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수많은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들이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말과 행위가 다릅니다.

겉과 속이 다른 사람을 이중인격자라고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안에서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은 이중인격자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말과 행동이 전혀 다릅니다. 말로는 가난하다고 하는 그들이 부자가 되어 있고 말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는 그들이 살아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까?

그러면 반드시 가난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누가 가난한 자인가를 알고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말과 행동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실상은 말과 행동을 전혀 다르게 하고 있습니다.

신명기15:7-8절을 보겠습니다. (286)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땅 어느 성읍에서든지 가난한 형제가 너와 함께 거하거든 그 가난한 형제에게 네 마음을 강퍅히 하지 말며 네 손을 움켜쥐지 말고 반드시 네 손을 그에게 펴서 그 요구하는 대로 쓸 것을 넉넉히 꾸어 주라

베드로후서1:11절을 보겠습니다. (384)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우리의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아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미리 아신 백성이 되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빈핍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빈핍한 자를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를 단어로만 알지 어떻게 은혜로 된 것인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구약을 보면서 복음을 못 보고 있다 보니까 은혜가 어떻게 주어지는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받은 은혜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구원의 문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얻기 위해서 성경을 상고하고 있고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성경에서 복음을 깨닫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우리는 유대인이 아니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들이 이스라엘이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을 때 이스라엘이 우리가 다 준행하겠다고 언약을 했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성경은 예표입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도 성경을 보고 율법을 보면 이스라엘과 똑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켜 준행하겠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고 그래서 이 시대 십계명을 아주 잘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되었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우리에게 성전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제사장이 있습니까? 우리에게 기업이 있습니까? 우리는 그런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어떤 언약도 하나님과 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런 이방인입니다

그래서 우리 이방인은 율법의 의로 보면 모두가 다 거지입니다.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는데 뭐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거지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서 자기가 거지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은혜로 택하심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거지가 되라고 하시면서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거지가 되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왜 거지가 되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또 어떻게 거지가 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거지가 되는 줄을 모르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렇게 되어야 합니다. 지금 사도 바울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자가 되지를 않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입은 자가 되어야 우리의 구원이 은혜로 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 은혜로 되었습니까?

우리는 거지입니다. 거지가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거지입니다. 그 거지가 천국에 가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거지가 노력을 해서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는 사람은 다 사기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지입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되는 줄은 제가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지금 이 지구에 진짜 일만 달란트를 가진 자는 몇 사람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웬만한 부자도 가지지 못하는 돈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천국에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꾸어야 합니다. 꾸지 않고는 어떻게 해도 우리가 원하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거지가 어떻게 일만 달란트를 벌 수 있습니까? 그리고 누가 거지에게 그 큰 돈을 꾸어 주겠습니까? 아마 일억만 빌려 달라고 해도 아무도 안 꾸어 줍니다. 누가 거지에게 돈을 꾸어 줍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같으면 거지가 와서 돈을 꾸어 달라고 하면 꾸어 주겠습니까? 어느 정도 달라고 하면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백만 원이라고 해도 쉽게 꾸어 줄 수 없습니다. 물론 돈이 많은 사람은 못 받을 생각하고 불쌍하게 생각하면서 꾸어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 됩니다

거금을 꾸어 달라고 하면 꾸어 줄 수 없습니다. 왜 은혜로 되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은혜로 되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로마서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은혜로 되었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허황됩니까?

로마서의 말씀만 보고 은혜로 되었다고 하니까 자기들에게 은혜로 되었다고 하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은혜로 되었다고 하면서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남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안에서 온갖 율법을 다 지키고 있습니다. 은혜를 알면 어떻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것을 아는 자가 율법을 지키겠습니까? 정말 은혜를 아는 자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은혜로 된 것을 모르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이 미리 아신 백성이라면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성경을 전혀 모르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두려워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 속담입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딱 맞는 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성경을 아는 지식이 없으니까 용감하게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죽인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자기 영혼이 죽는데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물론 자기 육체의 생명에 애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영생을 포기를 하고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부자에게 꾸어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거지에게 누가 꾸어 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율법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율법에 형제 중에 가난한 자가 있거든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지키셔야 하기 때문에 반드시 꾸어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난합니다.

아니 거지입니다. 앞으로 그것을 갚을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가난한 내가 꾸어 달라고 하면 주님은 반드시 꾸어 주셔야 합니다. 그가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꾸어 주라고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요구하는 대로입니다

왜 은혜로 된 것입니까? 우리는 거지입니다. 그런데 율법에 보니까 가난한 자는 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에게 그것을 그가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꾸어 주라고 율법에 기록하셨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내가 거지라는 것을 아는 성도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꾸는 성도만이 감사할 수 있습니다. 이 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이 세상의 이치로는 거지에게 아무도 꾸어 주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가난한 형제가 와서 내게 꾸이거든 네 손을 펴서 그가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꾸어 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안 꾸어 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세상에서 짐승과 같이 살다가 그냥 사라져야 합니다. 짐승과 같은 우리 인생들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이렇게 꾸어 주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내가 필요한 것을 넉넉히 꾸어서 영생을 얻은 성도는 은혜로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구원입니다. 왜 성경에서 은혜라고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문자로 은혜라고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은혜로 된 것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정도는 초등학생도 아는 지적인 수준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것은 세상 초등학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는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구원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은혜가 주어졌는가를 모르고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넉넉히 꾸어 주십니다.

그것을 사도 베드로는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서 넉넉히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거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가 요구하는 대로 넉넉히 꾸어 주셔서 그의 나라에 들어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아니 은혜입니다. 교회에서 은혜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어떻게 은혜로 되었는가를 모르고 있다면 그는 은혜를 말할 자격도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은혜를 받은 자입니까?

그들은 은혜로 된 것을 모르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아니 교회 안에서 바알에 미혹이 되어 있어서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가 아니 기독교가 다 그렇게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그저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천국에 들어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이 은혜를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성령이 오시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가 아무리 성경을 수백 번을 읽었다 해도 성령이 오시지 않으면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은혜를 모르면서도 성경에 은혜라는 단어가 많이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입니다

반드시 은혜로 되어야 합니다. 누구의 은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인으로서 우리 불의한 자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 이 모든 율법의 요구를 이루셨습니다. 주님은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신 부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은혜로 되는 것을 몰라서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반드시 꾸어야 은혜로 될 수 있는데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꾸라고 하는데도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꾸지를 않고 있는가 하면 모두가 바알을 섬기면서 부자가 되어 있어서 굳이 꿀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영생의 문제입니다

그런데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바알이 교회 안에 들어와서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고 있어서 꾸지를 않고 있습니다. 꾸지도 않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꾸어야 은혜로 될 수 있는데 꾸지도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2:16절을 보겠습니다. (304)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기초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많이 인용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로마서의 말씀과 같은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는 일입니다. 정말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이 말씀들을 누가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봐도 못 받아들입니다.

아니 어느 일부는 받아들이지만 완전히는 받아들이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이겠습니까? 지키지 않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면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이 세상에 두셨습니다.

 

구원입니다

행위로 말미암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주일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또 십일조를 하라고 강요를 해도 역시 구원은 오직 예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로는 못 받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입니다. 그들이 어떻게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누군가 이야기를 하면 이단으로 정죄를 받습니다. 실제 이 시대 모든 기독교인들이 행위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고 또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 시대 이단 감별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죄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단 감별사라고 하는 그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행위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하는 그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는 그 사람들이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자기들은 율법의 행위를 구원과 연결을 시키지 않고 성도로서 율법의 제3용도로 사용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아니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단이라고 정죄를 하는 그들이 자기들은 구원을 받은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웃기는 이야기입니까?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이단입니다. 그런데 자기들은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으니까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장난에 모두가 넘어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습니다.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까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둘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킨다면 몰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어떻게 율법을 지켰든 율법을 지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말장난에 모두가 미혹이 되어서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을 정당화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드립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은 불륜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구원을 받았으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기들은 로맨스를 하고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똑같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이렇게 어떻게 지키는가에 따라 이단이 되고 정통이 되고 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아는 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을 어떤 마음으로 지켰습니까? 아니 진심입니까? 나는 하나님을 정말 잘 믿고 싶습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가지고 말장난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고 이제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진실 된 마음으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런 것은 중요하지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면 갈라디아에 있는 말씀대로 반드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율법을 지켰는가를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구원입니다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는 안 됩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의롭다 함을 얻어 이제 구원을 받아서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더라도 다시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그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는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행위로는 남은 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안 됩니다

성립이 안 됩니다. 은혜로 되었으면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교입니다

은혜와 행위를 가지고 비교를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가지고 비교를 할 때는 어느 것 한 가지로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은혜로 구원을 받으면 행위가 완전히 배제가 되어야 하고 또 행위로 구원을 받으면 은혜가 완전히 배제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역으로 생각해 보면 쉽습니다. 내가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럼 은혜가 거기에 있을 수 있습니까? 아니 우리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데 내가 벌어서 일만 달란트를 갚았으면 거기에 은혜가 있을 수 있습니까? 자기가 벌어서 일만 달란트를 갚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사람은 좀 이상한 사람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은혜가 됩니까?

아니 자기가 벌어서 일만 달란트를 갚고 나서 누군가에게 가서 은혜를 받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가 어떻게 생각하겠습니까? 은혜를 준 것도 없는데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멸시를 하는 말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최소한 그가 무엇을 해 주었을 때 은혜를 받았다고 해야 합니다.

이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은혜를 이야기를 하면서 행위를 전혀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멸시를 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모두가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후서2:10절을 보겠습니다. (385)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는 자들에게 특별히 형벌하실 줄을 아시느니라 이들은 담대하고 고집하여 떨지 않고 영광 있는 자를 훼방하거니와

멸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말장난을 하면서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가 어떠한 일인지도 모르고 하나님을 멸시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모든 행위가 다 하나님을 멸시하는 행위가 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은혜입니다

우리 성도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이 은혜로 되었으면 이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은혜로 남은 자가 되었다고 하면서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은혜입니다

자기가 받은 은혜가 없으면서도 은혜를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육체를 따라 더러운 정욕 가운데서 행하며 주관하는 이를 멸시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세상 죄인으로 살지언정 하나님을 멸시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고도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단 한 가지의 행위가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수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만 지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모양으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그들이 부르고 있는 찬양 한 가지만으로도 얼마나 부자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바알입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엘리야가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다 죽이고 있다고 이스라엘을 송사하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이 시대도 여자 이세벨이 주의 종들을 다 죽이고 있습니다. 음행으로, 우상의 제물로 죽이고 있고 그것이 율법의 행위입니다.

은혜로 되었습니다.

우리는 거지 같이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기록이 되어 있는 대로 넉넉히 꾸어서 지금 이 시대 구원을 받은 성도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next1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