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요1서2:25)

이 비밀이 크도다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5:32)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107-1, 남은 자가 있느니라

윤주만목사 2025. 3. 22. 17:05

로마서11:5절을 보겠습니다. (254)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

우리 인생입니다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실제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보아도 그렇고 또 이방의 교회사를 통해서 보아도 역시 모두가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성도는 율법주의에 의해서 고난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엘리야를 통해서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의 선지자입니다

이 세상에 과연 주의 선지자가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우리가 성경의 예표들을 통해서 보아도 잘 알고 있지만 아주 적은 숫자만이 주의 선지자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이기에는 목사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오직 예수를 믿으라고 외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그들이 모두가 바알을 섬기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것조차 인지를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을 지키는 마귀의 자식들이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누군지조차 모르고 교회 안에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이세벨이 있습니다. 아합 왕 때의 그 왕비 이세벨이 있어서 주의 선지자들을 죽이고 있습니다. 어떻게 죽이고 있는가 하면 음행을 하게하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임으로 해서 저주를 받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계시록을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를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그 여자 이세벨이 율법과 예수 그리스도 두 남편을 섬기는 음행을 하게 만들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임으로 해서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 시대 교회를 보더라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렇게 교회 안에는 바알이 깊이 침투해 있습니다.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제 사사기 시대에 보이던 바알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바알이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부자로 만들고 있습니다. 물질을 구해서 부자가 되게 하고 있고 건강을 구해서 부자가 되게 하고 있고 율법을 잘 지켜서 부자가 되게 하고 있고 신앙생활을 잘하게 함으로 해서 마음에서 부자가 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찬양입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더구나 그것이 수천 년을 내려온 교회에서 해 온 일인데 누가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하지만 그것 역시 대표적인 바알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찬양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춤도 추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 무엇입니까?

자기들의 풍요를 나타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에 이런 것들이 다 좋게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그런 풍요를 누리면서 부자가 되어서 연락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연락을 하고 있는 그런 행위들이 다 바알에게서 온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바알이 교회 안에 있다고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바알을 섬기지 말라고 하면 무슨 생뚱 맞는 이야기를 하느냐고 반문할 것이 분명합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교회 안에 있는 수많은 바알이 절대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바알에 죽고 있습니다.

자기가 바알을 섬기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그들이 바알로 죽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바알을 절대 섬기지 않고 있다고 하는 그들이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분향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인들의 기도를 들어보면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 하면 모두가 바알에게 하고 있습니다. 바알이 주는 것을 기도를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풍요입니다

그것이 어떤 모양이든지 다 바알에게서 온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실 신약에서는 바알에 대해서 거의 말씀이 없다보니까 이방의 교회들은 자기들이 바알을 섬긴다는 것은 상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약의 바알이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들어와 있는데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남겨 두시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엘리야 시대와 같이 하나님께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을 남겨 두시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뼈 속부터 율법주의기 때문에 사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남겨 두시고 있습니다.

누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교회 안에 들어와서 성경을 보면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서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는 우리를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서 처음부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습니까? 우리 역시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정말 기적과도 같이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남아 있는 자로 살아가게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지혜입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는 저 역시도 제가 여기까지 온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살았었는데 언제부터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 바알이 무엇인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믿고 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지 않았다면 우리 역시 다수를 따라 바알을 섬기면서 살다가 진노를 받고 지옥의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주셨습니다.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하던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복음 안에서 이렇게 적은 숫자이지만 교제를 하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엘리야 시대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겨 두셨기 때문입니다.

칠천입니다

의미의 숫자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데 그것을 엘리야 시대에는 내가 나를 위하여 칠천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 모두는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시대 우리를 남겨 두시고 우리로 구원을 받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성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셔서 이 시대 우리를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 다수를 버리시고 우리를 남겨 두셔서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바알입니다

그 바알이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행위로 풍요를 누리게 하고 있습니다. 진찬을 먹게 하고 있고 연락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남겨 두셨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 이 시기에도 은혜로 택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남아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왜 은혜입니까? 우리 스스로는 바알에게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바알에게서 스스로 벗어나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하다면 사람의 지혜로 가능하다면 성경에서 은혜라고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전체입니다

우리가 예레미야 시대를 보아서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니 이스라엘은 늘 바알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은 바알을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바알을 섬기는 일이 나쁘다면 혹시 안 섬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누가 율법을 지키는 일을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지금 예배를 드리는 것을 나쁘다고 생각합니까? 누가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찬양을 부르는 것을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누가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행위들을 나쁘다고 하겠습니까? 만약에 그들이 나쁘다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에는 바알에게 분향하는 것이 너무도 좋기 때문에 모두가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사람의 이성에 옳기 때문에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안 보았습니까? 성경을 수백 독씩 읽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보고 또 봐도 역시 그것이 옳은 행위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바알을 섬기고 있습니다.

찬양 한 가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제가 그것이 바알을 섬기는 행위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그들은 저를 아주 이상한 사람으로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 찬양을 하는데 그것이 바알이라고 하면 저를 정신 이상한 사람으로 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이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얼마나 감사합니까?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바알을 바로 알게 되면 바알을 섬기지 않게 되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신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셨기 때문에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사야43:25절을 보겠습니다. (1020)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

은혜입니다

다른 어떤 단어로도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 못하면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그것을 이사야서에서는 나 곧 나를 위하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은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은혜라고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은 여자 이세벨로 인하여 모두가 음행을 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게 되어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음행을 하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습니다.

누가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성경을 보더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사실 영의 일은 우리의 언어로 표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들이 구원을 아주 쉽게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니 기독교인이 많다 보니까 그저 그런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이 시대도 바알은 교회 안에 여러 가지 모양으로 들어와 있고 그 바알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사단은 이 세상에 보이는 교회 여자 이세벨을 세워 놓고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음행을 하게하고 우상의 제물을 먹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가 여기서 빠져 나올 수 있습니까?

누가 바알에 대해서 깨달을 수 있고 누가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것이 사람의 이성에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여자 이세벨에 의해서 모두가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진노를 받고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남겨 두신 우리를 누구를 위해서 남겨 두셨는가 하면 하나님을 위해서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 곧 내가 나를 위하여 이 시대 우리를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조금 이해가 안 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제가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는 내가 나를 위하여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누구를 남겨 두셨습니까?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 칠천을 남겨 두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함께 사시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과 함께 사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고 있는 그들을 주님의 날에 부활이 되게 해서 하나님께서는 함께 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는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실 때부터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남은 자를 보고 계셨습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구원을 하시는가 하면 하늘에서 회개할 것이 없는 의인 아흔 아홉을 인하여 기뻐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우리 죄인이 구원을 받은 것을 기뻐하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지같은 우리를 구원하셔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세상에서 부자를 구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을 구원을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하나님은 공의롭지 않은 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사는 사람들을 다 버리시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시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셨습니다. 누구를 남겨 두셨는가 하면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우리 가난한 자들을 남겨 두셨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그런즉 이와 같이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합 왕 때입니다

그 왕비가 이세벨입니다. 누가 그 이세벨을 피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자 이세벨은 음행을 하게하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이고 있습니다. 누가 거기서 피하여 살아남을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의 지혜로 그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절대 안 됩니다.

왜 이 시대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우리보다 성경을 적게 보아서입니까? 아니 그들이 지혜를 구하지 않아서입니까? 신학자들입니다. 그들이 거짓으로 성경을 보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정말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평생을 성경을 보면서 하나님을 믿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모두가 여자 이세벨에게서 우상의 제물을 먹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성경을 보면 모두가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위하여 이 시대 우리를 남겨 두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제도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겨 두셨습니다.

그런데 누구를 위하여 남겨 두셨습니까? 우리를 위하여 남겨 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셨습니다. 만약에 우리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면 우리를 위하여 남겨 두셨다고 말씀하셨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셨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이 신체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체입니다

반드시 썩어 없어집니다. 그것 역시 우리입니다. 그러나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진짜 나는 아직 보이지가 않습니다. 내 마음에서 믿어지는 역사가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하시고 있습니다. 그 영이 나이기 때문에 신체의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 영은 하나님의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성경이 이해가 됩니다. 구원은 우리가 받는데 왜 성경은 하나님께서 나를 위하여 남겨 두셨다고 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내가 구원을 받지만 누구의 영이 구원을 받는가 하면 내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영이 구원을 받기 때문에 하나님을 위하여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로마서에서는 계속해서 이 그런즉이라는 부사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서를 바로 깨달으려면 이 그런즉이라는 부사를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이 부사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 부사를 이해하지 못하고는 성경을 풀 수 없는데도 사람들은 단지 그 문장의 말씀만 가지고 성경을 풀다보니까 전혀 다른 해석이 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그런즉 입니까?

이와 같은 이제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말씀에 대해서 그런즉 입니까?

로마서111-4절 말씀에 대해서 그런즉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풀어지지가 않으면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는 말씀을 전혀 깨달을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4:18절을 보겠습니다. (94)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11장에서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시겠느뇨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는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1절에서 다시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다고 말씀을 하면서 엘리야 시대에 있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기 백성입니다

그 백성에 대해서는 1-2절에서 충분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깨달아야 이제 5절부터의 말씀이 깨달아질 수 있습니다. 그 말씀을 모르고 5절부터의 말씀을 해석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말씀을 모르게 되면 막연하게 은혜만을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정말 막연하게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은혜라는 단어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말씀을 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성경과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고 결국에는 그 말이 우상의 제물이 되어서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시지 않습니다.

그것을 언제 보여주셨는가 하면 엘리야 시대에 하나님께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을 남겨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는 율법의 의도 없게 되고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의 의도 없습니다. 자기에게 풍요로움이 없고 거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거지입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거지가 됩니다. 바알은 풍요의 신인데 그에게 무릎을 꿇지 않으면 바알이 아무 것도 주지 않으니까 거지가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어야 부자가 될 수 있는데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가난한 자가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입니다.

그런데 이 부사를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 세상에 대해서 자기들이 남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고 교인들은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있습니까?

이 시대 남은 자가 있습니까? 이 시대는 남은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남은 자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이 시대 남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 시대 누가 남은 자입니까? 그 남은 자 중에 한 가지가 바로 곤고하고 빈핍한 자입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서 거지같은 자를 빈핍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사람만이 이렇게 빈핍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모두가 바알에게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차라리 세상에서 죄인으로 사는 것이 그에게 더 유익합니다. 교회 안에서 평생을 바알에게 분향만 하다가 진노를 받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역시 이세벨이 음행을 하게하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여서 모두가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누가 은혜를 입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은혜를 입었습니까? 그들은 그런즉 이와 같이 에 해당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이 로마서의 문자를 보고 아니 앞에 있는 말씀은 전혀 깨닫지도 못하면서 자기들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남은 자가 아니라 바알에게 무릎을 꿇은 우상 숭배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정말 이런 성경의 오묘한 말씀을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제가 지혜가 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대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게 하기 위해서 아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은혜를 받은 자입니까?

누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입니까? 반드시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교회 안에 온갖 바알들이 가득하고 그 바알이 주는 것을 구하기 위해서 매일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거지입니다

우리는 빈핍하여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 가난한 자에게 주님이 오셔서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될 수 있는 그런 가난한 자가 교회 안에 없습니다.

모두가 부자입니다.

왜 그들이 부자가 되었습니까? 그들의 마음에 바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가 이세벨이라서 음행을 하게하고 있고 우상의 제물을 먹이면서 부자가 되게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어 있는 그들이 로마서의 말씀을 문자로 보면서 이와 같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아니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빈핍한 자가 되어야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의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그냥 남은 자라고 하지 마시고 누가 남은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야고보서2:5절을 보겠습니다. (372)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바알은 부자가 되게 합니다.

아니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모든 사람은 다 바알을 숭배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분복으로 받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분복을 주셨고 그것을 누리면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물론 교회 안에서 하나님께서 물질의 부자가 되게 해 달라고 구하고 있다면 그것 역시 바알에게 귀속이 되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어떤 것도 부자가 되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는 안 됩니다. 부자가 되고 싶은 내 마음까지는 어찌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 끝이 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부자가 되기를 바라는 사람은 사실 잘못 찾아 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 그 어떤 것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외에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누가 주고 있는가 하면 바알이 주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얻었어도 그것을 주는 주체는 바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기도를 해서 응답을 받았다고 하는 것을 누가 주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 부자가 되라고 하지 않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말씀을 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부자가 되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가 택하심을 받는 자입니까?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세상입니다

우리나라 기독교는 불교의 사상이 많이 들어와 있습니다. 세상이라고 하니까 불교에서 말하는 속세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세상은 물론 그런 속세를 말씀할 때도 있지만 거의 다 교회를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세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교회를 방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입니다

그 세상에서 우리는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누가 은혜를 받을 수 있습니까? 아니 누가 은혜라고 생각합니까? 내가 빚이 10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빚이 100만원 있습니다. 이 빚을 누군가 같이 갚아 주었다고 하면 누가 은혜를 받았다고 하겠습니까? 물론 100만원 갚아준 사람도 은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10억을 갚아준 사람을 보면 어떻게 됩니까? 자기는 별로 은혜를 받은 것 같지가 않습니다. 똑같이 10억을 갚아 주었다면 은혜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자기는 100만원을 갚아 주었고 100만 원 정도는 자기가 일을 해서도 갚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 은혜가 안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을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아무리 생각해도 자기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고 나니까 내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율법으로 죄를 깨달은 사람은 어떻게 됩니까? 아니 내가 율법을 보니까 하나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십계명의 어느 계명도 지키지 못해서 살인한 자로 살았고 간음한 자로 살았고 우상 숭배한 자로 살았습니다.

가난합니다.

아니 우리는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에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말은 성립이 될 수 없는 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자가 어떻게 은혜를 받습니까? 부자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세상에 대해서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셔서 약속하신 나라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남은 자입니까?

내가 남은 자가 되려면 반드시 거지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율법주의자들이 볼 때 거지 나사로와 같아서 개들이 그 헌데를 핥을 정도가 되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 자를 택하사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모두가 부자입니다

이 의에 대해서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다가 저주를 받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렇게 가난한 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가난한 자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세상에 대해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신다고 하니까 자기들이 세상에 대해서 가난하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고도 하나님의 백성이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래서 율법주의자들이 볼 때는 거지같습니다. 아니 가진 것이 없어서 거지입니다. 그런데 그 빈핍한 자를 하나님께서 택하사 믿음으로 부요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어떻게 부요하게 하시는가 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데 그 의를 믿음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의 의가 나에게 주어지고 있습니다.

어떻게 주어집니까?

내가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다. 그 영이 부요하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전케 하셨기 때문에 부요합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키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어서 그의 약속하신 나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알을 섬기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보이는 것으로 부자가 되어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들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해서 이 시대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세상에 대해서 가난한 자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next 10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