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119:105)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찌어다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87-2, 모세에게 이르시되

윤주만목사 2025. 1. 11. 09:41

로마서9:15절을 보겠습니다. (251)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으니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긍휼히 여길 사람을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사람을 불쌍히 여기겠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입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생각하시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편협 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에서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고 그 생각을 사단이 사로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 복음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교의 샤머니즘에 빠져 겉으로 나타나는 어떤 행위들을 보고 마치 자기들이 성령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율법을 지키는 그것 하나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 인생의 지혜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거의 모든 사람이 신학이라는 것을 공부를 하고 또 사람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을 보면서 그것을 깨달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 목사들이 자기들도 이해가 안 되고 뒤죽박죽이 되어 있는 말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하는 자기도 모르고 있고 또 듣는 사람들도 모르게 만들고 있습니다.

허망합니다.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정말 너무도 허망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허망한 이야기를 진실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얼마나 편협적으로 보고 있는가를 모르기 때문에 허망한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정말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겼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그런즉에서 여기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불의가 없으신가 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양식을 이미 성읍에 쌓아 두셨습니다. 그것을 가난한 우리가 가서 먹으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의가 없는 우리가 먹으면 의를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다 구원을 하실 수 있게 성읍에 쌓아 두셨습니다. 그리고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히 여길 자입니까?

누가 불쌍히 여길 자입니까? 신명기의 말씀과 같이 성읍에 쌓아 둔 십분의 일을 먹는 사람이 긍휼이 여길 자이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긍휼히 여길 자이고 누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인가 하면 그것을 먹는 레위인과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가 긍휼이 여길 자이며 불쌍히 여길 자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33:19절을 보겠습니다. (135)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나의 모든 선한 형상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반포하리라 나는 은혜 줄 자에게 은혜를 주고 긍휼히 여길 자에게 긍휼을 베푸느니라

출애굽기입니다

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인용을 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이런 인용의 말씀을 보면서도 거의 문자 그대로 보고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겼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좋은 의미입니다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긍휼히 여기셨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도 전혀 모르고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그 이유만으로 자기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은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모세가 십계명을 받으러 산으로 올라가서 내려오지를 않으니까 백성들에 의해서 아론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그 일로 모세가 하나님께 이 백성들이 금신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백성을 사해 달라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지워달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 왜 죽어야 합니까? 십계명에 따르면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셨는가를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뿐 아니라 성경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십계명을 왜 주셨는가를 모르고 그것을 문자 그대로 지키다가 사망의 길로 가고 말았습니다.

왜 언약의 돌 판을 주셨습니까?

사람들은 그것을 십계명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성경에서도 십계명이라고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십계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실상은 언약의 돌 판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언약을 해 주신 돌 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십계명을 누가 지킵니까?

이스라엘은 문자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 역시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을 우리는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모든 율법은 주님이 지키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십계명은 문자 그대로가 아니라 사실은 의미를 알아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이 시대도 아마 똑같이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부자 청년에게 말씀을 하신 것과 같이 하면 이 시대 역시 내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지켰다고 하고 또 조금 부족한 사람은 내가 지키려고 노력을 하고 있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누가 긍휼이 여김을 받아야 합니까? 이 십계명을 우리는 지키지 못 했기 때문에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아니 이 세상 모든 사람은 이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이 계명으로 인하여 사망에 이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십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모르고 있는 사람은 로마서를 보고 또 이 출애굽기를 보아도 도무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는 말씀을 아마도 깨달을 수 있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긍휼히 여깁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십계명을 범했습니다. 이스라엘은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도 그렇게 말을 하고 있고 또 자기가 혹시 지키지 못한 것이 있으면 회개를 하고 이제 지키려고 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더 범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십계명을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그 십계명을 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제까지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뿐 아니라 이 영적인 의미를 깨닫기까지는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사람입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자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이 시대는 어린 아이들에게까지 십계명을 지키라고 문자 그대로를 외우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긍휼히 여길 자입니까?

우리 인생 모두는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도 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자기가 십계명을 지키고 있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 거짓에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뿐 아니라 영의 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사람이며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십계명에 의해서 사망에 이르러야 합니다. 그렇게 사망에 이르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심으로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는 자가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긍휼히 여김을 받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를 긍휼히 여기십니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누군가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느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우리 인생 모두는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문제는 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합니까?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긴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입니다

우리 인생은 어느 누구도 십계명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그 육체가 다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심으로 그가 약속의 씨인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왜 사망에 이르고 있는가 하면 계명을 지키지 못했기 때문에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긍휼이 여김을 받고 있습니다.

이사야49:15절을 보겠습니다. (1029)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다는 뜻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육적으로 이 세상에서 강대한 나라가 되는 것을 원했고 또 육적으로 개개인의 삶도 풍요를 누리는 것을 원하고 있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그것을 이스라엘을 통해서 다 예표로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물론 이스라엘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깨닫는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표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나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성경을 전혀 모르고 살았습니다. 왜 그들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서 잡혀 갔는가를 알아야 하는데 그들은 포로가 되어 가면서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또 포로가 되어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도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까지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조상들이 왜 포로가 되었었는지를 모르고 살았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구약을 보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막연하게 이스라엘이 죄를 짓고 하나님을 믿지 않아서 포로가 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정확하게 말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죽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그냥 문자를 아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문자를 많이 아는 것으로 성경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것으로 자기의 지식을 자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암기력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그렇게 알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사법고시를 공부하는 사람이 가장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서울대를 나온 사람들이 다시 공부를 해서 신학을 배우고 나서 목사 안수를 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제까지 세상에서 공부를 했던 그 방식 그대로 성경을 보면서 설교를 하고 있고 그것이 도리어 타락의 길로 가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포로가 되어 갔습니다.

그들이 왜 포로가 되었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어떠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고 있는 행위를 4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헛된 수고입니다

그리고 무익하게, 공연히 힘을 쓰고 있습니다. 그 헛되고 무익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사람이 하고 있는 모든 종교적인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그 행위로 인하여 자기들의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흑암입니다

그것을 요한복음에서는 어두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매 어두움이 깨닫지를 못하더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어두움에 거하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입니까?

그것이 참 빛을 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참 빛을 비춰주셨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 빛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영이 일이기 때문에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육의 일로 비유를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육의 일을 가지고 영의 일을 깨달을 수 있게 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그것이 육의 일인지 영의 일인지를 모르고 다 육에 빠져 헛되고 무익한 일을 하다가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여인입니다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습니까? 정말 구더기 같은 인생이요 벌레 같은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이지만 여인이 어찌 그 젖 먹은 자식을 잊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남자라서 어머니의 마음은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간접적인 체험과 직접적으로 자기가 어머니로 사는 것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어머니가 있습니다.

그 어머니가 어찌 젖 먹는 자식을 잊겠습니까? 일을 하더라도 젖 먹은 아이를 잊지 않습니다. 자기 배 속에서 열 달을 키워서 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가 젖을 먹고 싶어 하는데 그 아이를 잊을 여인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어 있습니다.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아이를 잊겠습니까? 여인을 비유로 해서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은혜를 주시고 이제 그 자손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다가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제까지 거의 50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아직까지 젖을 먹고 있습니다. 그들은 영의 일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만의 일이 아닙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 젖 먹는 아이와 같이 영의 일에 있어서는 무지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때가 오래 되었습니다.

아니 때가 오래 되면 될수록 사람들은 더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때가 오래 되었으면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도리어 뒤로 물러가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육적으로도 여인이 젖 먹는 아이를 잊을 수 없습니다.

이제 갓 난 아이입니다

그 아이는 젖을 먹지 않으면 죽습니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 젖을 계속해서 먹고 있으면 죽습니다. 젖을 먹은지 오래 되었으면 이제는 단단한 식물을 먹어야 하는데 이스라엘도 그렇고 이방의 교회도 그렇고 젖을 먹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그렇습니다.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사람이 성경을 보면 그 성경이 다 젖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에 있어 단단한 식물을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다 젖을 먹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령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면 영의 단단한 식물을 먹을 수 있습니다.

잊지 않습니다.

만약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잊으시면 우리는 다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인생들이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것이 다 젖을 먹는 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고 있습니다.

젖을 먹는 그 아이가 울면 얼마나 불쌍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혹시 잊을 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잊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잊지 않으셨기 때문에 우리 인생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약속의 씨가 태어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여인이 젖 먹이를 잊지 않습니다. 그 여인은 혹시 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을 사랑하셔서 잊지 아니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영의 일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젖을 먹는 아이를 여인이 잊으면 그 아이는 죽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젖을 먹여서 키워서 이제 단단한 식물을 먹게 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자기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자기가 어떤 존재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그들이 도리어 긍휼히 여기겠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신령한 일을 모릅니다.

그가 아무리 세상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신령한 일을 모르다보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무엇을 사랑하시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우리 영을 사랑하고 있지만 그것을 마치 육체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불의가 있습니까?

그럴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다 헛되고 무익한 것을 하다가 사망의 길고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셔서 참 빛을 보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기 때문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하나님께 불의가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모르다보니까 자기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야곱을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에서를 미워하고 야곱을 사랑하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진짜 이삭의 아들인 육신의 자녀인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야곱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야곱의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있는 그 씨를 사랑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누가 이 은혜를 입을 수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이 은혜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신다는 말씀은 정말로 우리 가난한 자들에게는 큰 은혜의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율법을 못 지켰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들어갈 만한 지혜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아가고 고아로 그리고 과부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 성도들을 긍휼히 여겨 주심으로 우리가 주님이 성읍에 저축한 것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게 하셨고 또 우리가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지만 주님이 지켜 주심으로 우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이 시대는 하나님께서 누구를 긍휼히 여기시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도리어 십계명을 지킴으로 해서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내가 십계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긍휼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데 그것을 지킴으로 해서 도리어 부자가 되어서 주님이 성읍에 저축한 것을 배부르게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잠언19:17절을 보겠습니다. (932)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십니다.

잠언에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가 하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하다는 의미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보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무조건 자기가 가난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가난해야 합니다.

말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진짜 가난해야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무엇으로 가난해야 합니까? 물질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런 육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라고 하니까 그런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율법의 의가 없어서 가난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깁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꾸임을 받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신다고 말씀을 하니까 그저 자기가 불쌍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어떻게 되어야 합니까?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누가 가난한 자인가 누가 부자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입으로는 가난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말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말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가증합니다.

부자가 가난하다고 하면 그것은 가증한 사람입니다 실제 가난한 자가 은혜를 구해야 하는데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이 가난하다고 하면서 은혜를 구하고 있다면 그는 가증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교회 안에서 십계명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어 있으면서도 자기가 가난한 자라서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자기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해 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자도 아니고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도 아닙니다. 성경은 반드시 가난해야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으로 가난합니까?

물질이 아닙니다. 반드시 율법의 의로 가난한 사람만이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가난한 자가 되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이스라엘 못지 않게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십계명을 지키고 있는 자는 가난한 자가 아니라 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이 가난한 자에 대해서 얼마나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가난한 자인가 부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것도 모르면서도 자기가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입니다

십계명을 지키지 못해서 모두가 죽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긍휼히 여겨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거꾸로 십계명을 지키면서 긍휼히 여김을 받지를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내가 얼마나 가난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신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온갖 행위를 함으로 해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교인 하나를 교회 안에 데리고 오면 그를 어떻게 하든지 부자를 만들어서 배나 지옥 자식이 되게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8:27절을 보겠습니다. (31)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을 하시면서 대표성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라고 말씀을 하니까 어느 한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류의 모든 사람을 대표하는 사람이 바로 이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에 모두가 속해 있습니다. 나는 그렇게 빚을 안 지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그는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가난합니다. 그 가난이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인류 모두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 인생 모두가 일만 달란트를 빚진 가난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불쌍히 여겨주셔서 예수 그리스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우리가 진 빚을 갚아 주시고 우리를 속량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자기가 불쌍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겨주십니다. 부자를 불쌍히 여겨 주시지 않습니다. 누가 부자를 불쌍히 여깁니까? 만약에 부자를 불쌍히 여긴다면 부자는 화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참지를 못하고 분을 내다가 결국에는 자기 땅에 오신 하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자기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되어야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는데 도리어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온갖 율법을 지키면서 부자가 되어 있는 그들이 말로는 자기가 가난하다고 하면서 가증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것을 아는 사람은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절대로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반드시 긍휼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하고 또한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누구입니까?

십계명을 지키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문자적으로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온갖 율법의 행위를 하면서 부자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안에 약속의 씨가 탄생이 되지 않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야곱을 왜 사랑하셨는지도 모르고 하나님은 불의하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긍휼히 여길 자입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길 자입니다 그들이 누구인가 하면 이 세상 모든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십계명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 볼 때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겨 주시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겨주심으로 우리 안에 약속의 생명의 씨를 주시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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