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3:5절을 보겠습니다. (신 327쪽)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우상숭배입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인들에게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면 도무지 무슨 말을 하는 줄을 모를 것입니다. 아니 제가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면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을 하느냐고 하면서 자기들은 절대로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있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상이 구약에만 있습니까?
신약 성경에서도 우상 숭배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 성도들이 아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지금 이 시대 교인들이 생각하는 그런 우상을 숭배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그런 우상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늘 말씀은 드리지만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밖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있는 사람들이 부처와 같은 조각한 우상을 숭배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그는 성경을 초등학문으로 만들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탐심을 부리지 말라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입니다
이 지체가 살아서 우상 숭배를 하고 있습니다. 이 지체가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으니까 사도 바울이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고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에 있는 지체가 탐심을 내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탐심을 내고 있는가 하면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탐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것이 우상 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교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우상 숭배가 무엇인가를 모르고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탐하면서 자기도 그렇게 되려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체입니다
율법을 누가 지키고 있는가를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이 지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땅에 있는 지체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탐내고 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지독한 율법주의자였는가를 로마서를 통해서 지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탐심을 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니까 탐심이 율법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에 대해서 명확하게 우리에게 말씀을 해 주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몰라서 평생 탐을 내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탐심이라고 증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율법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탐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보고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아니 성령이 오시지 않아서 영의 새로운 것으로 하지 못하고 의문으로 하고 있습니다.
탐내지 마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느 물건을 갖기 위해서 탐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는 조각한 신상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그것이 각 사람이 행한 율법입니다. 그 율법에 은을 입히고 금을 입혀 놓았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에 탐을 내면서 다 올무에 걸려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 줄 모르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고 있지만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지체입니다
이 탐심을 없애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육체와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어느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지를 않고 교회 안에서 탐을 내고 있습니다.
사망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얻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을 하나라도 탐내서 가지려고 한다면 반드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왜 자기가 율법을 안 지키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안 지킵니다.
그것이 탐심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그는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졌지만 그것이 조각한 신상에 입힌 은이나 금이라는 것을 알고 난 이후에는 율법을 안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교회 안에 들어와서 평생 율법을 지키다가 사망으로 가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로마서7:8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죄는 이 계명을 통하여 틈을 타서, 내 속에서 온갖 탐욕을 일으켰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죄입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입니다. 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바리새인으로 살아온 것을 로마서7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은 죄입니다.
그 죄가 기회를 탔습니다. 어떻게 기회를 탔는가 하면 계명으로 말미암아 사도 바울의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자세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교회에만 나오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탑니다.
어떠한 일이나 행동을 하기에 가장 좋은 때나 경우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죄가 기회를 어떻게 타는가 하면 계명으로 말미암아 기회를 타서 사도 바울의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서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깊이 빠져 본 사람만이 압니다.
아니 성령이 오셔서 자기가 예전에 지키던 율법이 사망의 열매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율법을 지키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지만 수많은 목사들이 신학자들이 있었지만 모두가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고 그렇게 가르쳤습니다.
교회입니다
축복은 아주 적은 수가 받습니다. 모두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에 빠져 사망에 이르고 있습니다. 그 수많은 사람들을 유기하고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에 은혜라는 말 밖에는 설명이 안 됩니다. 내가 이 죄를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을 보내 주셔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어떻게 압니까?
우리 성도는 정말 은혜라는 말 밖에는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성경을 깨닫게 되면 정말 우리는 아무 할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 탐심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까?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다 해도 안 됩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율법을 보고 탐심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아니 이제까지의 교회가 다 그렇게 성경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죄가 기회를 타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깨달아 질 수 있습니까? 저는 늘 성경을 보면서 제 자신이 얼마나 미약한 가를 깨닫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은혜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을 구원하셨습니다.
그가 율법주의자였기 때문에 더욱 실감이 나고 있습니다. 죄가 그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일으켰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바리새인으로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예전에는 이 복음을 하나님께서 계시해 주시기 전에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 우리입니다
아니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이 복음을 주셨습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고 있습니다. 이 복음을 깨닫고도 은혜를 모르겠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가능합니까?
이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합니까? 그러나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들을 지금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함으로 해서 사도 바울과 같은 믿음으로 우리가 굳게 서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기록한 로마서를 보고 사도 바울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그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도 율법이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을 몰랐으면 역시 탐을 내면서 살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율법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아니 이제 더 이상 탐을 내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떠한 과정이 있었습니까?
우리 역시 사도 바울과 같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율법의 의로는 감히 사도 바울을 따라갈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 역시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모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로마서의 말씀을 절대로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썼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지만 죄가 어떻게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자기 안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는가를 깨달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입니까?
우리가 그들보다 더 진심이 있어서 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말 이런 말씀들을 깨달을 때마다 하나님께서 우리 성도들을 어떻게 구원하시는가 하는 놀라운 생각밖에는 안 듭니다.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이 있었는데 그것을 이제는 성령의 감동으로 탐내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을 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짓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율법을 안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이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탐심을 내는 것이 율법이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잠언12:12절을 보겠습니다. (구 923쪽)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하나 의인은 그 뿌리로 말미암아 결실하느니라”
각양 탐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악인들은 자기들이 탐심을 이루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악인이라는 말씀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악인이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탐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인들은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악인들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각양 탐심을 이루고 있지만 그 탐심을 도리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을 하고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탐심을 부릴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사람들은 교회에 탐심을 부리기 위해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세상적인 탐심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그것을 버리기 위해서 나와서 정말 헌신 적으로 교회에서 봉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그러한 생각이 다 탐심에서 나오고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겠다고 하는 그것이 탐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이 악인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무엇으로 탐심을 부리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악인입니다
누가 악인입니까? 사람의 이성으로 악인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이성에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같이 보이는 그 사람이 아니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 몸까지도 아까워하지 않고 살아가고 있는 그 사람이 탐심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도리어 우상이 되어서 또 다른 사람에게 탐심이 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하나가 있습니다.
그가 불의의 이를 탐하게 되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탐심을 부리게 되어 있습니다. 누군가 십일조를 하면 자기도 하고 싶어 하고 있고 누군가 새벽 예배를 빠지지 않고 나가면 자기도 나가서 기도를 하고 싶어 합니다.
탐심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탐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탐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해서 살아가는 성도의 모습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악인은 불의의 이를 탐합니다. 그 불의의 이가 무엇인가 하면 율법의 의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불의의 이를 탐하는 자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까?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입니까? 그런 말은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없는 말을 마치 있는 것처럼 만들어서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것이 우상이 되어서 다른 사람까지도 탐심을 내게 우상을 만들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교회는 악인들로 가득 차 있지만 어느 누구도 성경을 보고 악인이라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나쁜 의미입니다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이 악인이라면 성경에 굳이 악인이라고 말씀할 필요성이 있습니까? 모두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일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경계입니다
그리고 책망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어느 일부의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자체가 모순입니다. 이 성경을 보는 모든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스스로가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기 때문에 자기 일을 직접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자기는 교회 안에서 다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은 악인이라 해도 자기만은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으니까 의인이라고 막연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자의적으로 해석하면서 난도질을 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성경을 모두가 자기들에게 이로운 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뜻도 모릅니다.
그러면서 좋은 의미는 자기가 하고 있고 나쁜 의미는 다른 사람이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인이 누군지 의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자기는 의인이고 다른 누군가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본적인 것도 성경에서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았습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고 있는 사람은 아직 구원을 받지 못 했습니다. 그가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구원을 못 받았습니다. 저를 비난해도 좋고 저를 욕해도 좋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정의를 하기 때문에 분명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아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모두가 하고 있는 식사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그 탐심이 우상 숭배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저는 혼자라도 상관없습니다.
정말 모든 사람이 율법을 지키겠다고 해도 저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율법을 지킬 바에는 차라리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다가 죽겠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교회 안에서 악인이 받을 형벌이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이사야56:1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37쪽)
“이 개들은 탐욕이 심하여 족한 줄을 알지 못하는 자요 그들은 몰각한 목자들이라 다 자기 길로 돌이키며 어디 있는 자이든지 자기 이만 도모하며”
개들입니다
성경에서 누구를 개로 비유로 하고 있습니까?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서 개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개들이 나사로의 헌데를 핥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한 부자입니다. 율법주의자들을 대표하는 한 부자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주의를 따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개들입니다
이스라엘을 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구약 성경을 보면서 이스라엘이 꽤나 도덕적으로 잘못하면서 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어느 민족보다도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탐욕이 심합니다.
무엇에 대해서 탐욕이 심합니까?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니까 이사야 선지자가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은 율법을 아주 잘 지켰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잡혀 갔습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타락을 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한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수십 년을 교회 안에서 그렇게 배워왔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도덕적으로 타락해서 바벨론의 포로가 된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개가 되었기 때문에 바벨론의 포로가 되었습니다.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율법을 대표하는 나라인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살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들어온 이후로 계속해서 율법주의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도덕적인 죄를 많이 지어서 하나님께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한 것이 아니라 개들이 되어서 탐욕이 족한 줄을 모르다보니까 그러면 율법의 포로가 되어서 살아보라고 포로로 잡혀 가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포로가 되어서 7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다시 돌아왔습니다. 다시 돌아와서 그들은 더욱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자기들의 조상이 율법을 잘 못 지켜서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갔다고 생각하면서 지독한 율법주의가 되었습니다. 그 이후에 율법을 탐하는 자들이 더 많이 있었습니다.
각양 탐심을 이루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 안에 각양 탐심을 이룸으로 해서 바리새인으로 살면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그렇게 살았는데 율법을 알고 나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제 더 이상 탐을 내지 않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죄는 죽은 것입니다. 율법이 있기 때문에 죄가 살았습니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으면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이룰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죄를 짓고 싶어도 질 수 없습니다. 율법이 있으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우리가 율법을 폐하여야 하는가 하면 아니 죽여야 하는가 하면 죄가 죽기 때문입니다. 율법이 있으면 죄가 기회를 타서 우리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게 되고 그 죄로 말미암아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법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짓고 싶어도 질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율법을 없애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탐심을 알았습니다. 율법을 없애라고 하는 말씀은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탐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법이 우리에게 없으면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율법을 보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죄를 알 수 있습니다. 율법에 탐내지 말라는 그 말씀이 있어서 우리가 이 시대 우상 숭배를 하는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아예 안 보라는 뜻에서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기회를 타는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9절을 보겠습니다. (신 248쪽)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현대인의 성경을 보겠습니다.
“내가 한때는 율법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나 계명을 알게 되자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로마서7장은 사도 바울의 개인의 고백이라고 해도 맞습니다. 그가 실제 경험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전에는 어떻게 살았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이 율법에 대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사망입니다
율법을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율법을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무지한 일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율법을 아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도 교회 안에는 교인의 숫자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것은 축복이 아니라 재앙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세계적은 부흥입니다
기독교 역사에 없는 부흥을 이루었다고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우리나라는 기독교가 들어오고 난 이후에 어느 국가에서도 없었던 부흥을 이루었습니다. 인구 대비로 그리고 연수 대비로 이렇게 빨리 부흥을 한 나라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말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축복해 주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들이 외적으로 보는 것은 분명히 축복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와서 부흥을 이루었지만 그 대신 진리는 사라졌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아니 애초부터 복음은 우리나라에 들어오지를 않았습니다.
성경입니다
기독교는 이미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떠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편지의 말씀이 공허하게 들릴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영적으로는 축복을 받은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복음이 들어오기 전에 다른 복음이 들어옴으로 해서 죄의 정욕이 역사를 해서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말았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전에는 율법 없이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율법 없이 살았습니까? 그는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너무 잘 지켰고 율법을 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전에 법을 깨닫지를 못했을 때는 내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법을 깨닫지를 못 했습니까? 율법에 탐하지 말라는 법을 보고 그것을 깨닫지를 못했을 때는 사울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잘 지키면서 살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그가 바리새인으로 살 때는 율법을 깨닫지를 못해서 자기가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율법을 깨닫지를 못하고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다만 율법을 지키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지 실상은 같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들은 신약 성경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고 이 시대는 신약 성경을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하면서 바리새인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법을 깨닫지를 못해서 여러분이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예전에 율법을 지킬 때 율법을 깨닫지 못 했다고 하면서 그때는 내가 살아서 율법을 지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입니다
내가 살면 안 됩니다. 우리는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율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교회 안에서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 하면 자기들이 살아 있기 때문에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1:13절을 보겠습니다. (신 337쪽)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살아 있을 때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사람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도는 내가 살면 안 됩니다
말로만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고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 감성적인 말에 이 시대 교인들은 다 넘어가고 있습니다. 정말 죽었으면 내가 살면 안 됩니다.
내가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내가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디모데전서에서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으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이 같다는 것을 또한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법을 깨닫지 못하면 내가 삽니다.
어떻게 삽니까?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법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면 당연히 법은 더 이상 지키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도 법을 알지 못 했을 때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우리 역시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율법을 지키면서 훼방자로 핍박자로 포행자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가 살아 있습니다. 자기가 죽었다고 입에 바른 말로는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는 것을 보면 분명히 살아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들은 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구약에서 율법을 깨달은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아니 자기가 사망에 이르는 것을 알고도 지킬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살아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자기가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율법을 지켜서 바리새인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살려서 내가 지키고 있다면 그 사람은 바리새인입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이 시대는 종교인으로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살아 있습니다.
죽은 사람은 법을 지키고 싶어도 절대로 지키지 못 합니다. 그러나 살아 있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키는가 하면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율법을 깨닫지 못해서 자기가 살아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계명이 들어왔습니다.
율법이 들어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죄가 살아났습니다. 교회 안에 계명이 들어오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게 되면 나는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계명을 지키는 순간에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다는 것으로 율법을 지켜야 하는 것으로 너무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거의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을 지키면서 살았습니다. 아주 적은 숫자의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살았습니다.
계명이 들어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는 수많은 계명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율법이 계명이 되어서 들어와 있습니다. 제가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을 정도로 계명이 들어와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계명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고 매너리즘에 빠져서 교회가 유전으로 지켜왔던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면서 그 계명을 지키고 있지만 그 계명으로 사도 바울이 내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유전입니다
사람들은 이 유전을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교회에 들어가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전통으로 해 왔던 행위들이기 때문에 아무 생각이 없이 그것으로 죄가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하지 않고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죽습니다.
계명이 살아나면 여러분은 반드시 죽습니다. 성경에 있는 모든 계명이 살아나서 죽는 것이 아니라 단 한 가지의 계명이 죄가 되어서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렇게 율법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서 계명이 되어서 죄가 살아나서 사망을 당하는 길로 가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next 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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