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59-1,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윤주만목사 2024. 10. 5. 13:42

59-1,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로마서7:5절을 보겠습니다. (248)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반드시 죽임을 당해여 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선언적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죽지를 않고 있습니다. 성경에 분명히 문자적으로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것을 문자적으로는 알고 있지 죽임을 당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반드시 우리는 성경대로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반드시 율법에 대해서 죽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율법에 대해서 어떻게 죽임을 당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율법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성경에는 613가지 율법이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이 그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그 외에도 율법이 될 수 있는 말씀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율법이 될 수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율법도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정해 있어도 자기들이 율법이 아니라고 하면 아닌 것이 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율법의 문제에 있어서는 답이 없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도 많고 설령 율법을 폐했다고 해도 역시 율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어느 율법도 지켜서는 안 됩니다.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는 말씀은 다시 말을 해서 율법이 죽었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율법이 죽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로마서의 문자를 볼 때는 율법에 대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바로 지나가면 또 율법을 지켜야 하는 타당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우리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분명히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율법을 폐하지 않고 있고 율법을 지키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가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지 믿음이 있는 성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는 음부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남편이 죽으면 괜찮습니다.

그러나 남편이 생전에 있으면 안 됩니다. 율법이 죽어 있는 성도만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와서 믿음으로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살아 있는 상태에서는,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제 버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로 가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다른 이에게 가라고 했으면 다른 이에게 가야 합니다. 그런데 먼저 조건이 남편이 죽어야 합니다. 남편이 죽지 않은 상태에서는 다른 이에게 가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가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있었던 남편을 죽이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남편을 죽이시고 우리에게 이제 주님께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가야 하는가 하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야 합니다. 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야 하는가 하면 우리 역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모본입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그가 어떻게 살아나셨는가 하면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죽은 자가 됩니다. 그러나 주님과 같이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은 자가 되어서 영생을 얻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많다 보니까 전혀 다른 일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영생입니다.

그것이 열매입니다

우리가 천국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얻으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는 성도는 반드시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만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위해서 살지 마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다 이 세상에서 자기들이 성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자기들을 위하는 행위가 되고 있지만 도리어 그런 행위들을 하나님을 위해서 열매를 맺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육체의 열매가 아닙니다.

반드시 성령으로 말미암아 탄생이 되는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성도는 하늘의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보고 있는 그런 열매가 아니라 영생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자기 몸으로 율법에 대해서 죽은 이유가 바로 우리로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땅엣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하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교인 하나를 전도를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열매는 내가 맺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우리 안에서 거저 맺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있습니다.

그리고 가라지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함께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교회 안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복음이 전해지고 있는 교회 안에 이 두 사람이 있습니다.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 안에는 가라지만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미 기독교가 되어 있는 종교에서는 알곡이 없고 가라지만 있습니다.

열매를 맺히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열매를 맺히게 하고 있습니다. 이 역사는 온전히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경륜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은 율법의 행위를 함으로 해서 열매가 맺히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를 하나도 잃어버리지 않고 마지막 날에 살리시겠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시는 분도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시는 구속의 일을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모르면 지혜를 구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한 행위가 여러분을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율법의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게 함으로 해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는 일을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죄의 욕정이 우리 몸의 지체 안에서 작용해서, 죽음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이전에 우리가 육신을 따라 살 때는,

이 말씀을 가지고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라는 말씀을 전혀 이해를 하지 못하면서 성경을 억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의 비밀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일입니다

교회 안과 교회 밖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 자기들은 교회 안에 있다는 것으로 자기들이 이전에 교회 밖에 있을 때에 살았던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7장에서 율법이 우리의 남편이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남편과 살던 때를 육신에 있을 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라는 남편에 매여 있을 때를 육신에 있을 때라고 하는 것이지 교회 밖에서 살던 것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육신에 있을 때입니다

어느 때를 말씀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분명히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육신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죄의 정욕에 점점 더 깊이 빠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죄의 정욕입니다

이제까지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세상의 도덕적인 것이 죄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입니다. 그 죄가 정욕을 일으켜서 이스라엘이 문자적으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을 정도로 율법을 철저하게 지켰습니다. 이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3:6절을 보겠습니다. (321)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사도 바울입니다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가 누군가를 빌립보서3장을 통해서 말씀을 하면서 자기 육체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어떻게 육신에 있었는가를 빌립보서를 통해서 아주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습니다.

그는 육신에 있을 때는 정말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기 위해서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경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나는 사도 바울과 같이 율법의 의가 흠이 없어서 육체에 있지 않다고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의 어느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도 바리새인으로 있었을 때는 육신에 있었습니다. 아니 그가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으로 있을 때는 육신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교회를 예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육신에 있는 자로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는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또 누구는 감리교회, 누구는 침례교회, 누구는 성결교회, 누구는 순복음교회를 다니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다 무엇인가 하면 육신에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족보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기들의 족보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왜 그렇게 족보를 따졌는가 하면 육신에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이 다 중요했습니다. 지금도 육신에 속한 자는 자기들이 말하는 교단을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정통의 교단에 속해 있다고 하면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합니까?

그 교단에서 인정하는 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교단에서 요구하는 것을 열심을 다 해서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육신에 있는 사람들은 빌립보서에 있는 말씀과 같이 자기는 기독교장로회의 무슨 총회에 그리고 무슨 노회에 소속이 되어 있는 교회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그것으로 끝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시대는 어떻게 말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라고 말을 하면 어느 교단에 속해 있습니까? 라고 묻고 그것도 부족해서 어느 충회에 속해 있고 어느 노회까지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육신에 있을 때에 내가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에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라고 말을 하는 것과 똑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 합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그런 쓰레기 같은 것은 다 버려야 합니다. 오직 예수라는 말을 하지나 말지 왜 그런 것을 꼭 말해야 하는지를 모르겠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어느 육신에 있는 가를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랑이 되기 때문에 꼭 어느 교단에 있는가를 말을 해야 합니다.

이단이 있어서입니까?

핑계대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장로교회에 어느 교단에 속해 있다고 하는 것은 사도 바울이 육체를 자랑한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배설물보다 더 지저분한 것을 가지고 이 시대는 자기들의 교회에 까지 이름을 짓고 그 교회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 쓰레기 같은 것들로 인하여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꿈에도 모르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는 영의 사람이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로만 영의 사람이 아니라 육신의 것을 모두 배설물로 버린 성도만이 영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육신에 있는지 영에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열 처녀의 비유에서와 같이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는 다섯 처녀의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율법입니다

히브리서에서 육체에 상관된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예전에는 육신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자기에게 계시가 되고 난 후에는 이 육신에 있던 모든 것을 다 배설물과 같이 버렸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도리어 그것들을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기독교인도 아닙니다. 또 장로교인도 아닙니다. 어느 총회에 속해 있지도 않습니다. 어느 노회에 소속이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런 교회 안에서는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지도 않고 있고 주일을 지키지도 않고 있고 어느 것이라도 육신에 모양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육신을 신뢰합니까?

반드시 그 신뢰하는 그것으로 망하게 된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이해가 안 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설교를 보거나 듣는 사람들 중에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함께 주의 만찬을 나누면서 교제하고 있는 성도님들은 육체를 절대로 신뢰하지 않고 있고 그 모양을 내지도 않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반드시 지키고 있습니다. 교회마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이 시대는 율법을 안 지키는 교회가 없습니다. 그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허황된 이야기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과 만나고 난 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주님을 만나기 전에는 육체를 신뢰하면서 살았지만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는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가 할례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자기들의 육체를 신뢰하면서 육신에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3절을 보겠습니다. (304)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어리석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할 때는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방의 교회에 어느 누구에게도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유대로부터 거짓 형제가 와서 성경에서 할례의 타당성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니까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받는 것을 보고 사도 바울이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 안 받았습니까?

그래서 여러분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보다 지혜가 있습니까? 할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할례는 율법 전체를 대표하는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보다 더 어리석으면서도 할례를 받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할례만 받았습니다.

율법 613가지 중에 단 한 가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단 한 가지가 아니라 수도 없이 많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단 한 가지 할례를 받은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리석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수백 가지는 됩니다.

이 시대는 율법에 깊이 빠져 있습니다. 그래도 초대 교회는 사도 바울이 복음을 먼저 전했습니다. 그러니까 사도 바울이 너희가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아예 성령으로 시작도 하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성령을 받아서 율법을 잘 지킨다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제까지의 교회사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는 교회는 성령으로 시작도 하지 않고 육신에 있었습니다. 정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했지만 어느 누구 하나도 성령으로 시작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을 증거 할 수 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 육체에 있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아직 성령이 오시지 않은 사람입니다. 성령으로 시작도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보고도 육신에 있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자기가 육신에 있는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가 어리석은 줄을 모르고 세상 사람을 보고 어리석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리석습니다.

어느 한 사람이 어리석어서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육체로 하고 있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막연하게 자기들은 성령으로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아직까지 성령이 임하지 않은 육신에 있는 사람입니다. 모든 율법을 지켜서가 아니라 단 한 가지의 율법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율법들이 어리석은 사람을 만들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그때 잠시만 성령으로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있을 때 벌써 육체로 마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육신에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 사도들이 다 죽기도 전에 교회는 이미 육신에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얼마나 쉽게 육신에 빠지고 있는가를 모르고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교리로 배우면서 육체에 있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으면 그는 육신에 있는 자입니다. 십일조를 율법이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율법이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삼가 지키고 있는 것이 있으면 다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삼가 지키고 그것으로 정죄를 받는 것이 있으면 다 율법입니다.

성경학자들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613가지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보다 더 많이 있습니다. 신약 성경에 와서 새롭게 율법의 행위가 된 말씀들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까지 합치면 셀 수 없을 정도가 되고 있습니다. 또 장로교회는 장로교의 법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 안에 소속이 되어 있으면서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정당성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어느 것으로도 정당화해서는 안 됩니다. 왜 정당화해서는 안 되는가 하면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망을 당한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면서도 그것이 율법이 아니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율법이 아닙니까?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반드시 바깥 어두운 곳에 쫓겨나 통곡하는 날이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율법을 정당화시키는 모든 사람은 결국에는 그 율법으로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은 단 한 가지를 지키는 순간 중독이 되어서 또 다른 율법을 지키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6:9절을 보겠습니다. (341)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도 그 말씀이 무엇인가를 이해를 못하니까 성경이 해석이 안 되고 있습니다. 마치 도덕적인 죄를 짓지 말라고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작을 모르니까 그 뒤에 있는 말씀 전체가 해석이 안 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하나 지키면 또 지키고 싶어 하고 그것이 자꾸 사람에게서 정욕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이 이 율법에 대해서 바로 생각해야 합니다.

종교개혁이 있었습니다.

왜 개혁이 일어났습니까? 천주교의 부패를 보고 종교개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많은 율법들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만 해도 그렇습니다. 십일조라는 것도 없었고 또 수요 예배도 없었고 새벽 예배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일천번제라는 것은 상상도 하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누군가 수요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금요 철야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또 새벽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구역 예배를 만들었습니다. 헌금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올 때 지금 있는 헌금들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른 복음이 들어왔습니다.

이미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가득 차 있는 종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그 죄의 정욕이 점점 더 심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교회도 깜짝 놀랄 일들이 우리나라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은 놀랍게도 미국의 교회가 우리나라 교회의 죄의 정욕을 따라하고 있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죄의 정욕입니다

그것이 도덕적인 죄입니까? 누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그 도덕적인 죄의 정욕을 나타내고 있겠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사도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어느 극소수의 사람이 이렇게 죄의 정욕에 빠져 사망에 이를 것 같으면 굳이 성경에 기록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다수입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 다수가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에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의 지체 중에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지체로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을 지킨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어느 분이 질문을 합니다.

그럼 이 시대 십일조를 내고 주일을 지키고 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해서 정말 진심으로 십일조를 하고 있고 주일에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그럼 그 사람들 모두가 구원을 못 받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런 질문 자체가 아직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부하려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무엇으로 부하려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부자를 누구를 비유로 말씀을 하셨습니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유고 그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왜 부자가 되기를 원하고 있는가 하면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부하려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싶은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왜 율법이냐고 따집니다.

왜 따집니까? 성경에서 율법으로 기록이 되어 있으면 율법이지 왜 따지고 있습니까? 부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부하려 하고 있기 때문에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율법을 보고도 아니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기록이 되어 있어도 그들은 절대로 이 율법을 버리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부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에 성경에서 십일조를 율법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어도 그 부하려 하는 정욕을 이기지를 못해서 성경도 자기들 마음대로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율법도 율법이 아닌 것으로 만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의 정욕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죄가 어떤 죄인가를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도덕적이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설령 도덕적인 죄를 짓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그 죄를 안 짓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죄의 정욕이 자기 지체 중에서 역사하게 하고 있습니까?

설령 내가 치명적으로 도덕적인 죄를 짓고 있어도 그 죄를 안 짓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지 그 죄가 정욕으로 역사를 하게 두고 있습니까? 이 시대는 성경은 너무 쉽게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면서 전혀 생각을 하지 않고 이미 자기들의 마음에서 아는 것을 기초로 해서 보고 있습니다.

교회 안입니다

누가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했습니까? 바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율법으로는 흠이 없는 바리새인들로 살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싶은 정욕과 도덕적인 죄를 짓고 싶어 하는 정욕 중에서 어느 것이 더 역사를 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기 때문입니다.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한 부자와 같이 고운 옷과 자색 옷을 입고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지만 무엇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입니다

그때가 언제인가 하면 아직 복음을 모르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을 때입니다.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자기가 여자인지도 남자인지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남편이 생전에 있다는 것도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육신에 있는 사람은 이 영의 일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육신에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도덕적인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육신에 있습니다. 육신에 있을 때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하려 하는 자들아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이렇게 되고 있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여 사망에 이르게 하고 있습니다.

죄의 정욕입니다

율법을 잘 지키고자 하는 정욕입니다. 이제까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은 다 이 죄의 정욕에서 벗어나지를 못 했습니다 이 시대는 이미 그 정도가 넘어서 이스라엘의 바리새인 못지않게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해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고 있지만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정욕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욕구를 정욕이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온 사람들이 그 마음에서 어떠한 욕구가 일어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마음의 욕구가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지체가 율법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잘 지키고 싶어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나온 모든 사람은 다 율법을 지키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성도로 살아가고 싶어 합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보면 정욕이 안 일어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래서 이 율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정욕이라고 하면 무조건 나쁜 것으로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사망에 이르는 열매입니다

여러분이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의 행위가 사망의 열매를 맺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진심을 이야기를 하면서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십일조를 드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구원해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서 십일조를 드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무엇입니까?

자기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욕구입니다. 그 정욕이 지체 중에서 역사를 하고 있지만 그것을 율법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정욕이라는 단어가 나쁜 의미이다 보니까 자기들이 진심으로 살고자 해서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의 행위가 정욕이라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next 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