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로마서 강해(오직 믿음)

13-1, 참고 선을 행하여

윤주만목사 2024. 6. 10. 13:14

로마서2:7절을 보겠습니다. (241)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보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행한 대로 그대로 보응을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행한 대로 보응을 하신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더 율법주의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너무 단순하게 문자로 보다보니까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 줄을 모르고 행한 대로 보응을 받으려고 도리어 더욱 진노를 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의 이해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그가 진노를 쌓는 일만 하면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마치 이 세상의 책을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어느 종교의 경전도 이 성경과는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백번 옳습니다. 어느 종교에서 법을 지키지 말라고 가르치고 있습니까? 그런 세상의 이성을 가지고 성경을 보다보니까 진노를 쌓는 일만 하고 있고 그것을 행한 그를 하나님께서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고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것을 가지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그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아마도 이 말씀에 대해서 이견을 갖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행하고 있는 것이 진노를 쌓는 일이라는 것에서는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오묘하게 기록이 되어 있는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주의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사람으로 살았는가 하면 그도 이 세상에서는 나름대로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는데 성경을 보면서 율법주의에 빠져 있다 보니까 이런 사람이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히브리인입니다

베냐민 지파입니다. 바리새인 중에 바리새인입니다. 어려서부터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기 전에는 자기가 알고 있던 그런 지식들이 다 쓰레기에 불과했다는 것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가 인간으로서의 지적인 능력을 가지고 보았던 성경이 그를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로 만들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목사입니까?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와 비교를 하면 게임이 안 될 정도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사도 바울이 바리새인이었을 때 지금 목사들이 만나면 성경적 지식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니까 모든 것을 버렸습니다.

신학을 공부했습니까?

그리고 어렵게 공부를 해서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까? 그것을 쓰레기로 버리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율법주의에서 벗어날 수 없고 기독교의 교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325년부터 해서 이제까지의 기독교의 교리 중에서는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이 많이 있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그대로 배우고 있습니다.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십니다.

어느 교리가 세워지면 사람들은 그 교리에 따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이면 그나마 다행이겠지만 성경적이지 않은 것들이 더 많이 있고 성경적이지 않은 하나의 교리가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노를 쌓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칼뱅의 오대 강령입니다

그나마 어느 정도 성경적인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성경적이라고 해서 그것을 안다고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대 강령을 보더라도 전체적으로는 그럴듯하지만 실제 그 안에 들어가서 보면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한번 구원을 받은 성도는 끝까지 견고케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맞습니다. 한번 구원을 받은 성도를 하나님께서 끝까지 구원을 해 주시는 것을 저 역시도 동의를 합니다. 그런데 이 성도가 누구냐는 것에 대해서는 오대강령도 분명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한때는 칼뱅의 오대 강령이 성경적인 교리라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 칼뱅의 오대 강령을 보면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래도 조금 가까운 것이 칼뱅의 교리지만 그것도 따지고 보면 문제가 있는 것들이 있어서 그대로 배우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제 설교 중에는 칼뱅의 오대 강령을 성경적이라고 말씀한 것이 있는 줄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바꾸겠습니다.

성도의 견인입니다. 이 성도가 누구냐는 것에 대해서 오대 강령은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이 바울에서 어거스틴 그리고 칼뱅이 같은 주장을 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성경에서 말씀한 것과 어거스틴이나 칼뱅이 주장하는 성도의 견인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가 누구입니까?

사도 바울은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나 어거스틴이나 칼뱅은 이 부분이 명확하지가 않습니다.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는데 그것이 우리의 신체와 애매모호하게 결합이 되어서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견고케 해서 구원을 받는다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신체의 주장입니다

그 신체가 영혼과 결합을 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됩니까? 그 신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또 다시 율법주의로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이나 칼뱅이 이 문제를 깨닫지를 못하니까 도덕법이 살아 있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말장난에 불과합니다.

성도의 견인은 우리 신체가 아닙니다.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알미니안주의는 한번 구원을 받은 성도가 끝까지 구원을 받는 것 자체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모두가 영의 비밀과 탄생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육체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육체로 인하여 그대로 보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기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사람은 그 신체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 열심을 내게 되어 있고 그것이 도리어 진노를 쌓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신체로 하는 모든 일이 실상은 진노를 쌓는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 행한 대로 보응을 받습니다.

내 신체는 죄만 짓고 또 악만 행하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정의입니다. 그런데 이 신체가 구원을 받는다고 하면 어떻게 됩니까? 구원을 받기 위해서 죄를 안 지려고 하고 있고 그것이 악이 되어서 진노를 쌓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존귀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진노를 쌓지 마시기 바랍니다.

기독교라는 교리가 진노를 쌓게 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기독교라는 종교를 버리시기 바랍니다. 거기에 있는 것이 50%가 옳다 해도 50%가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다면 그는 진노를 쌓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99%가 옳고 1%가 틀리더라도 그것으로 인하여 진노를 쌓게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기독교라는 종교는 많은 부분에서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들이 배우고 있는 루이스 뻘콥이 지은 조직신학이라는 책부터가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배운 목사들에게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은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도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하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를 원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루이스 뻘콥이 지은 조직신학이라는 책이 과연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절대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성도는 성령의 감동으로 이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는 성도만이 참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에서는 참고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종교는 참고 선을 행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진노를 쌓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야고보서5:8절을 보겠습니다. (375)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보응을 받습니다.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를 하지 않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을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고집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이성에는 백번 생각해도 옳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쉽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쉽습니까? 아마도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쉽다고 아주 쉽게 이야기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이성에 자리하고 있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는 고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지키지 말라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마도 참지를 못할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복음이 있는 성도는 그것을 알고 경험을 했습니다. 이제까지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니면서 식사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감동을 받고 보니까 그것이 외식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제 알았으면 식사 기도를 하지 않아야 하는데 한동안은 무의식적으로 식사를 할 때 기도를 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나쁜 것이 있습니다.

그것도 참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어느 행동을 하면 자기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하고 있는 것이 사람입니다. 특히 식사를 하고 나서 바로 누우면 건강이 아주 안 좋다고 합니다. 그리고 늦은 저녁에 간식을 하는 것도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모르고 저녁에 야식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습관이 되었고 또 배가 출출하니까 먹고 싶은 그 욕구를 참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건강에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 입에서 당기는 욕구를 참지 못하고 있고 그리고 맛있는 것을 먹고 싶은 마음을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것이 옳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이성에 그것을 행하는 것이 아무리 생각해도 옳다고 생각이 되는 순간에는 그것을 참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야고보가 무엇에 대해서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의 옷은 좀 먹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재물과 옷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사람의 이성에 옳은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기 때문에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율법을 지키고 있고 그것을 야고보가 재물과 옷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지 못 합니다

교회에 와서 성경을 보고 하나님을 믿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왜 이스라엘이 율법주의가 되었는가 하면 성경에 있는 율법을 보니까 그것을 지키는 것이 너무 옳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참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더구나 그것으로 사람들로부터 성도라는 칭찬을 듣고 있다면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부자가 됩니다.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부자가 되는 것이 너무도 좋습니다. 이것을 누가 참을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이 왜 율법주의가 되었고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가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에서는 너무도 좋기 때문에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그것이 진노를 쌓는 일이지만 사람의 지혜로는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참으시기 바랍니다.

진노를 쌓는 일을 참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아직까지 율법을 지키고 있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에게 야고보가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 먹었다고 하면서 너희도 길이 참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아는 성도만이 참을 수 있습니다.

아니 복음을 아는 사람도 참지 못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야고보도, 사도 바울도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고 율법주의 사상에 빠져 아직까지 복음을 듣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도무지 이해를 못 합니다 자기들에게 무엇을 참으라고 하는 줄을 모르고 그저 세상을 사는 것에서 참으려고만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말씀을 보고 육의 일로 생각하고 그저 자기가 참아야 하는 것으로 알고 참는 것을 억지로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내가 진노를 쌓고 있는 그 일에서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진노를 쌓는 것이 율법의 행위라는 것을 최소한 알고 있는 사람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입니다

이 시대 그것이 진노를 쌓는 일이라고 하면 도리어 이단이라고까지 공격할 것이 분명합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로마서와 야고보서의 말씀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참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아니 무의식적으로 나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알기까지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을 알아야 율법의 행위가 진노를 쌓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복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해당이 되는 말씀이지 복음을 모르는 사람은 참지도 않고 있고 도리어 진노를 쌓고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의 고집입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이 그랬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이 고집을 버리지를 못했습니다. 정말 율법의 행위를 한 모양이라도 하지 않고 참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성령이 내 안에 임재를 해서 역사를 해야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에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6:15절을 보겠습니다. (358)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아브라함입니다

저가 이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오래 참았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약속을 믿고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주고 너를 번성케 하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었습니다.

믿음입니다.

성도는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가라지는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다보니까 계속해서 율법의 행위를 지향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약속을 믿지 못하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고집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 고집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의 이성이라는 말씀입니다.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을 믿음으로 기다린다는 것이 쉽지가 않기 때문에 참지를 못하고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사람이 영의 일을 믿고 하늘의 생명을 얻는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오직 믿음이 아니고는 불가능합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믿음이 아니고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율법의 행위에 빠져 들어가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지를 못하고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행위로 약속을 받았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는 율법이 있기 전 430년 전에 이미 하나님으로부터 약속을 받아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약속으로 받은 것을 오래 참아서 받았다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믿음으로 참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참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의가 내 이성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때 이 의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사람들은 이 의를 믿는다 하면서도 참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믿지를 못한다는 것이 더 맞는 말씀입니다.

참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인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미 초대교회에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그때에 불의로 진리를 막으면서도 고집을 꺾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이 옳아 보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습니다. 성경을 보아도 옳고 또 사람의 지혜에 따르는 끊임이 없는 욕심이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을 참고 복음을 믿는다는 것이 쉽지가 않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해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게 하지만 이 믿음이 마음에 있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은 참을 수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복음을 알고 믿고 있는 성도는 이 율법의 행위가 아무리 내 정욕으로 욕심을 일으키고 있다 해도 그것을 참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서 종교적인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종교인의 삶이지 복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아니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당장 자기 눈에 보이는 그것을 따라 행하게 되어 있습니다. 복음을 듣고 믿고 있는 성도들에게 자기 육체의 욕심을 따라 행하는 것을 참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7:18절을 보겠습니다. (248)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선입니다.

착하다는 뜻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이 세상의 책이 아닙니다. 이런 단어를 보면서 세상의 이성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자기들의 애매모호한 기준으로 아니 상대적인 비교를 하면서 선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선을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의 선이라는 말씀은 영생과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물론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말씀하는 것도 있습니다. 성경을 볼 때는 어느 것을 말씀하고 있는가를 먼저 알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생명과 연결을 시키고 있고 또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는 선을 세상에서 말하는 선으로 생각하면 성경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강한데 자기 속, 자기 육신에 선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서 말하는 선을 행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사도 바울의 속에는 선이 없습니다. 어떤 선이 없다는 말씀입니까? 어떤 선을 행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까? 생명에 대해서는 사도 바울이 선을 행하지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잘 이해를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선을 행했습니다.

아니 엄밀히 말해서 선을 전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방에 복음을 전하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정말 선한 일을 했지만 사도 바울은 그것까지도 자기가 선을 행하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내 속에 내 육체에는 선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에 대해서 바로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참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7장에서는 자기 자신도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다고 말씀을 하면서 선을 행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할 수 없는 것을 아니 사도 바울에게도 없는 것을 우리에게 하라고 하는 것같이 성경말씀을 기록했습니다.

이해를 못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합니까? 이때는 이렇게 말을 하고 있고 저때는 저렇게 말을 하고 있습니다. 같은 로마서에 있는 말씀을 전하면서 2장에 있는 말씀과 7장에 있는 말씀을 반대로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제가 로마서 강해를 쓴 사람들의 글을 안 보았습니다.

그러나 안 봤어도 그들이 어떻게 로마서를 강해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2장에서 말씀하는 선과 7장에서 말씀하는 선을 같은 선으로 이야기를 하면서 2장에서는 7장에서 말씀하는 선을 행하라고 하고 있고 7장에서는 2장에서 말씀하는 선이 자기들에게는 없다고 말할 것이 분명합니다.

선의 정의입니다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하신 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7장에서 말씀하는 선을 행하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선하신 이를 믿는 일을 선하다고 2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어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선입니다

자기들의 기준으로 착하다는 것을 선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기준으로 하면 세상 사람과 비교를 하면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다 선을 행하는 사람과 같이 생각이 됩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자체만으로도 선을 행하는 일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그러나 2장에서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선이 아닙니다.

자기가 세상 사람과 비교해서 선하다고 생각이 되는 그것은 선이 아니라 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까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믿고 불의로 진리를 막는 일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참는 것이 무엇입니까?

고집을 부리는 것, 율법을 지키는 것을 참으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자의적으로 보면서 도리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것을 선을 행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종교의 법에 따라 예배를 드리고 찬송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하는 행위들을 하면서 세상에 대해서 참고 선을 행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육의 일로 참고 선을 행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의 일로 참고 선을 행하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는 일에 있어서 참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지 세상에 대해서 세상의 욕구대로 사는 것에 대해서 참고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선을 행하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이 하고 있는 행위는 선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 적으로 볼 때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들이 착한 일입니다. 그러나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참고 선을 행하라는 것과는 전혀 반대가 되는 행위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반대가 되는 행위를 사도 바울이 불의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고집을 부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6:9절을 보겠습니다. (30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참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 세상에서 말하는 착한 행위가 아닙니다. 분명히 영생에 있어서 참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지 세상을 살아가면서 종교 안에서 참고 선을 행하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말씀을 보면서 거의 자의적으로 세상에서 알고 있는 선을 막연하게 행하는 것으로 알고 행위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세상의 선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선을 알아야 합니다. 또 성경에서 우리가 어떻게 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인 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모르고 성경을 보는 사람은 결국에는 고집을 부리면서 회개를 하지 않고 진노를 쌓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세상의 선이라면 왜 낙심을 합니까? 세상에서는 선을 행하면 누구나 다 알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서 하고 있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선이라고 하면서 서로 칭찬을 하고 있고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면서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낙심 안 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때 낙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낙심을 왜 합니까? 바라던 일이 이루어지지 않을 때 낙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영의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이 때로는 낙심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바라는 것이 영생이다 보니까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정말 믿음이라는 것은 낙심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믿음에 굳세게 서 있기 때문에 낙심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말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기도를 하면 응답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고 실제 그런 간증을 수도 없이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기도 응답을 받는 책까지 서점에 나와 있습니다. 이렇게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낙심하고 말 것이 없습니다.

율법을 지킵니다.

주일도 지키고 있습니다. 십일조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시간을 정해 놓고 하고 있습니다. 또 자기가 하고 싶은 신앙생활의 일을 행위로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것을 잘하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표징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또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도와주시는 증거라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낙심 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감사해 하고 있습니다. 사실 믿음이 있는 성도는 때로 낙심을 하지만 믿음이 없이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는 일을 잘하는 사람은 낙심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같은 경우를 보더라도 그들은 정말 믿음이 있는 하나님의 백성과도 같아서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누가 낙심합니까?

누가 선을 행하되 낙심을 하고 있습니까?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육체로 썩어질 것을 거두고 있으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성령으로 영생을 거두는 성도는 이 세상에서 정말 때로는 낙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초대교회를 통해서 보여주지 않았습니까?

유대인이 낙심을 했습니까? 로마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는 성도들이 낙심을 했습니까? 다니엘서에서 보면 사자의 굴에서도 건져 주시고 풀무 불에서도 건져 주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사자 밥이 되고 십자가에서 화형을 당하는데도 하나님께서는 건져주시지 않고 그대로 순교를 당하게 버려두셨습니다.

누가 낙심합니까?

누가 선을 행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이 선을 행했습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초대교회의 성도들이 선을 행했습니까? 그런데 누가 낙심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유대인들은 로마의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들이 나중에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말한 그대로 받아서 예루살렘이 멸망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초대 교회입니다

성도들이 낙심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체로 썩어질 것을 거두고 있는 사람들은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거두는 성도들은 이것이 영의 일이다 보니까 그 당시 로마에 의해서 순교를 당하면서 낙심을 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령을 위해서 심어 영생을 거두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령의 감동을 받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함을 받아서 영생을 얻는 것이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육체로 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믿어지는 역사가 선을 행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선을 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유대인과 마찬가지로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기 위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 육체로 불의를 행하고 있다는 말씀이며 그것이 이 세상의 이성이고 고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는 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도리어 교회 안에서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악한 일만 행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을 가지고 선이라고 하면서 그것에 더욱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이런 기초도 안 되어 있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정작 본인들이 어떻게 된다는 것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진노를 쌓고 있으면서도 도리어 성도라는 말로 서로를 축하하고 있고 회개를 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얻는 것이 선을 행하는 일입니다 이 선을 행하는 사람은 반드시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지 않는다는 것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두 가지를 놓고 비교를 해서 말씀을 할 때는 한 가지를 하면 다른 한 가지는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입니다

왜 우리가 성령을 받아야 하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는 일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육체로 하고 있는 율법의 행위를 하고 있는 사람은 성령을 받지도 않았고 성령으로부터 영생도 거두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고 선을 행하시기 바랍니다.

마귀는 이스라엘을 율법주의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육체의 정욕을 이기지 못해서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참고 선을 행한다는 것은 사실 선이 무엇이라는 것을 아는 성도도 쉽지가 않은 일입니다 먼저 성경에서 선을 바로 알아야 참고 선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런 성도만이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해서 영생을 받을 수 있습니다.

next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