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42강,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윤주만목사 2019. 7. 27. 06:37


142,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열왕기하 2:23-25절을 보면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성경을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아니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꼭 그렇게 까지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직면하게 되면 신앙에 대한 가치관들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의 판단대로라면 굳이 그렇게 까지 안 해도 되는데 왜 성경은 그런 말씀들을 기록해 놓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도 그렇습니다.

그 당시 많은 민족들이 있었고 꼭 소돔과 고모라만이 타락을 한 것도 아닌데 그곳을 불과 유황으로 심판을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이라고 해도 조금 지나치지 않은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점령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심지어는 어린 아이까지도 다 죽이라고 명령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지금 그런 전쟁이 있어서 어린 아이까지 진멸을 하라고 한다면 아마 세상 모든 사람들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고 만약 그런 종교가 있다면 어느 사람도 안 믿으려 할 것입니다

 

안티 크리스천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늘 주장하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이 성경에 나와 있는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말씀들을 보면서 봐라 너희가 믿는 하나님이 과연 정상적인가를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사실 그런 주장들을 들으면 일반 교인들은 딱히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 대답을 못 합니까?

자기가 생각해도 이것은 너무 심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사람의 이성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이해를 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서 그렇습니다.

이 세상은 모든 것에 대한 과정을 말 합니다

결과가 어떻든 간에 과정이 좋으면 모두가 칭찬을 하고 또 그의 삶에 대해서 인정을 해 주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정몽주가 있었습니다. 그는 사실 결과적으로 볼 때 조선이 세워지면서 실패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후세는 그 과정을 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당시에도 그가 절개를 지키는 그 과정을 보고 그를 함부로 하지 못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결과는 조금 나빠도 과정이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이 됩니다. 물론 결과도 좋고 과정도 좋다면 금상첨화겠지만 꼭 그렇지 않다 해도 과정이 좋으면 실패를 해도 너그럽게 이해를 해 줍니다

 

이것이 세상의 이성입니다

꼭 일등을 하지 못했을지라도 그가 일등을 할 정도로 노력을 하는 것을 보여 주었다면 그를 인정하고 칭찬을 해 주고 있습니다. 비록 고시에 합격을 하지는 못했을지라도 고시에 합격을 한 사람보다 더 많은 노력을 했다면 그를 나쁘다고 욕하지 않습니다.

 

결과가 보입니다.

사실 인생의 결과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과정을 보게 되고 그 과정이 좋냐 나쁘냐에 따라 마치 결과를 보는 것처럼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사건들은 과정이지 결과가 아니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과정을 보는 것은 사실 율법주의 사상입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에서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사랑을 받았지만 그 결과가 어떠했습니까? 사실 야곱은 장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는 형처럼 정직하지도 못했고 또 형처럼 아버지의 사랑도 받지 못 했습니다.

 

과정은 에서가 좋았습니다.

그러나 에서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과정이 나빴지만 야곱은 하나님께서 선택을 하셔서 장자의 축복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볼 때 야곱이 그렇게 된 것은 너무도 불공평한 것이고 설령 이삭이 실수로 야곱을 축복했더라도 다시 에서를 축복했어야 맞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께서는 결과를 인정하시는 분입니다

왜 결과를 인정할 수밖에 없느냐면 인생의 과정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인은 하나도 없고 선을 행하는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볼 때 의인과 같이 보이고 선한 사람처럼 법이 없어도 살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사람의 생각입니다

 

여기서 오해를 하면 안 됩니다

사람이 과정이 아무리 좋아도 하나님이 보시는 기준으로 볼 때는 그 과정이라는 것은 바람에 날리는 티끌과 같다는 것입니다 헛되고 헛된 그 과정이 좋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불행하게도 사람들은 비교하는 눈을 가지고 있어서 과정이 누구는 좋게 보이고 누구는 나쁘게 보입니다.

 

예정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마지막 까지 그 결과를 미리 아십니다.

그 결과는 이 세상에 있는 인생은 모두 죽어야 한다는 정확한 사실입니다 모두가 죽어야 하는 인생들의 결과를 너무도 뻔히 아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 결과를 좋게 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의 결과가 좋은 쪽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내 과정은 나쁩니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 사상에 빠지게 되면 자기들이 하고 있는 결과를 아주 좋게 생각을 하고 있고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게 됩니다.

 

자기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라는 진토를 모르고 자기가 잠시 행하고 있는 행위를 보고 있기 때문에 자기가 지키고 있는 어느 율법을 보고 있기 때문에 과정이 좋은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면서 하나님의 예정을 보기 보다는 자기들이 행하고 있는 과정을 보고 거기에 취해 있다가 결국 버림을 받고 말았습니다.

 

23,“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길에 행할 때에 젊은 아이들이 성에서 나와서 저를 조롱하여 가로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인생은 과정도 나쁘지만 그 결과도 나쁩니다.

어느 한 사람도 과정이 좋을 수 없고 또 결과도 좋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그 결과를 이해해야 합니다. 결과를 이해하지 않고 과정만을 생각하다가는 율법주의 사상에 빠지게 됩니다.

 

이 말씀도 우리는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엘리야를 대신해서 엘리사가 그 직무를 수행하러 가는 길입니다. 엘리야가 이제 막 하늘로 승천을 하고 그 엘리야의 능력을 갑절이나 받은 엘리사가 벧엘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그가 선지가가 되는 과정을 이해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엘리사는 소를 치며 농사를 짓는 농부의 아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사를 불러서 엘리야를 대신할 수 있게 하셨습니다. 농사나 짓고 살던 평범한 사람이 그 당시 이스라엘 전체에 능력을 행하던 엘리야를 대신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엘리야를 따르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엘리야가 능력을 행할 때 그리고 또 하나님을 어떻게 섬기고 있는 가를 이제까지 곁에서 배워 왔는데 그런 과정을 전혀 모르는 농부를 엘리야가 불러 그의 능력을 갑절이나 받게 하고 그를 대신해서 선지자로서 살아가게 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아마 지금 같으면 그럴 것입니다 정통으로 어려서부터 신학을 공부하고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고 있었는데 신학도 배우지 않고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 불러서 그에게 대신할 수 있게 하셨다면 그는 사람들로부터 놀림의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엘리사는 아닙니다.

그는 농부나 해야 하고 그의 머리는 이제 나이가 들어 훤히 벗겨져 있고 도저히 엘리야를 대신할 수 있는 선지자라고 어느 누구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런 엘리야를 볼 때 얼마나 한심하고 또 얼마나 보잘 것이 없었으면 지금 아이들이 조롱을 하겠습니까?

 

조롱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기준으로 볼 때 엘리사는 참으로 보잘 것 없이 보이고 누구도 그를 선지자라고 생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볼 때도 그렇고 또 엘리사는 이제 겨우 엘리야가 승천하고 난 후에 그를 대신하고 있는 사람에 불과 합니다.

 

그런 그를 조롱합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분명히 조롱을 받을 만한 처지이지만 엘리사는 분명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을 받아 그 시대에 선지자로 세움을 받았습니다. 사실 선지자는 조롱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은 차이가납니다.

아니 하늘의 것을 이야기 하는 자체가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천국을 말하고 또 영혼에 대해서 말하고 우리가 나중에 신령한 몸으로 부활을 한다고 할 때 아마 다 그럴 것입니다 저 사람 미쳤다고 하거나 아니면 조롱하는 말을 할 것입니다

 

역대하30:9-10절을 보면

너희가 만일 여호와께 돌아오면 너희 형제와 너희 자녀가 사로잡은 자에게서 자비를 입어 다시 이 땅으로 돌아오리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은혜로우시고 자비하신지라 너희가 그에게로 돌아오면 그 얼굴을 너희에게서 돌이키지 아니하시리라 하였더라 보발군이 에브라임과 므낫세 지방 각 성에 두루 다녀 스불론까지 이르렀으나 사람들이 저희를 조롱하며 비웃었더라

 

히스기야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서 그동안 이스라엘이 지키지 못했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온 이스라엘로 보발군을 보내 너희가 하나님께로 돌아오면 사로 잡혀 가 있는 너희 형제가 다시 돌아오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멸망을 당했습니다.

그 지역에서 패권을 잡고 있는 앗수르는 사람이 보기에 어느 누구도 그 나라를 점령할 수 없고 그 나라와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앗수르에 의해서 이방 땅으로 옮겨진 이스라엘을 다시 돌아오게 한다고 하는 말은 참으로 허망해 보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허망하지가 않는 말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짓고 난 후에 이 백성이 이방에 포로가 되어 잡혀 갔을지라도 다시 하나님께 돌아와 이 전에서 간구를 하면 이방의 포로에서 다시 돌아오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이 세상을 자기 눈으로 보고 있는 이스라엘에게는 이 말씀이 기억이 될 리가 없고 더구나 자기들도 연약한 남 유다의 보발군이 전하는 말은 조롱거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선지자들은 그들이 돌아오기를 전하고 있지만 이미 포로가 되어 거대한 앗수르에 의해 다시 돌아 올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전하는 말이 오히려 조롱거리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입니까?

선민사상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받고 있다고 늘 생각하고 있는 민족입니다 그런 그들이 이방에 포로가 되어 갔을 때는 하나님에 대한 존재 자체가 부정이 되고 다시 하나님을 찾아서 자기들의 처지를 회복하려 하기 보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에서 육체를 지키기 위해서 안간힘을 쓰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욥기16:20절을 보면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나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고

 

욥도 조롱을 당 했습니다

그가 잘 나가고 있을 때는 조롱을 안 당했지만 감히 어느 누구도 욥에 대해서 정죄를 하지 못했지만 욥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을 때는 그 친구들이 찾아와 위로를 한다고 하다가는 오히려 그의 잘못을 추궁하면서 조롱을 합니다.

 

환경을 보면 조롱을 합니다.

모든 재산을 다 잃고 자녀들이 다 죽고 그 부인까지 하나님을 저주하면서 떠나가고 몸에는 악창이 들어 기와로 긁고 있는 욥을 보면서 조롱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더구나 욥은 자기의 의로움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 욥을 보면서 그 친구들은 욥의 말을 듣기 보다는 네가 무엇을 잘 못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징계를 주신 것이 아니냐 하면서 내 삶을 잘 생각해 보고 혹시라도 깨닫지 못한 것이 있으면 지금이라도 회개를 하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욥은 이 세상에서 가장 의로운 사람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욥보다 더 의롭게 산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욥을 정죄하는 것은 한 마디로 그의 처지를 보고 조롱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볼 때 욥은 분명히 다른 사람보다 무엇인지 모르지만 더 많은 죄를 지은 사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다 똑 같은 인생입니다

그러나 복음을 모르고 하나님께서 인생에 대해서 정의를 하신 그 말씀을 모르는 사람은 자기들의 눈에 보이는 지금 처지를 보면서 조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완전하게 믿고 있다면 어떻게 이런 재앙을 당할 수 있느냐고 조롱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모르면 조롱을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모르면 조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사도 바울과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이 시대에 복음을 전한다면 조롱을 당할 것이 뻔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사도 바울과 이 시대 육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교인들과는 갭이 너무 커서 아마 조롱을 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욥기19:18절을 보면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내가 일어나면 나를 조롱하는구나

 

어린아이들이라도 나를 업신여기고 조롱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는 욥을 보면 어느 누구라도 조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했지만 봐라 지금 네 처지가 어떠한 가 너는 하나님을 잘 못 믿었다고 조롱을 합니다.

 

모르면 어린아이입니다

욥을 조롱한 어린아이나 엘리사를 조롱한 어린아이나 아직 복음을 모르는 율법주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린아이입니다 욥이 누구인가 그리고 엘리사가 누구인가를 모르면 조롱하게 되어 있습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엘리사는 제사장도 아니고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엘리야를 어려서부터 따라 다닌 것도 아니고 아무도 엘리사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지금도 사람의 눈으로 보고 판단을 하는 사람은 역시 어린아이들과 같이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근사하게 교회 건물도 있어야 하고 또 교회에 교인들도 많아야 하고 하는데 그렇지 못한 사람은 아무리 복음을 바로 전한다 해도 조롱거리가 되고 맙니다.

 

분별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반드시 조롱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세워 주셨는데도 그를 구원하시고 있는데도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는 너무 초라하게 보여서 저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겠어 그리고 저 사람이 전하는 복음이 과연 바르겠어! 하면서 직접적으로는 조롱을 하지 못해도 마음에서는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2:13절을 보면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초대 교회에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면서 사도들이 방언을 하고 또 복음을 강하게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도들을 보면서 그들이 누구인가를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은 조롱을 합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가 누구인가를 잘 압니다.

그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이었고 물론 얼마 전까지 예수님을 따라 다녔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이 어떤 출신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성령의 역사를 보면서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사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결코 조롱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에 대해서도 모르고 복음에 대해서도 모르는 사람들은 그들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서도 조롱을 합니다. 이것은 단지 사도들을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 임재 해 있는 성령을 조롱하는 것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모르면 조롱을 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도라는 것을 모르면 조롱을 합니다.

만약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역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임을 알았다면 과연 조롱할 수 있었겠습니까? 감히 조롱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내 눈으로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눈으로 보면 영혼에 대한 비밀을 알 수 없습니다. 엘리사의 모양을 보고 또 욥의 처지를 보고 또 사도들이 전에 누구였는가를 아는 사람들은 조롱을 합니다.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았다면 감히 그럴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욥의 고난을 보고 있고 또 사도들의 전 직업을 보고 있고 엘리사의 겉모습을 보고 있는 사람들은 조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눈은 가려져 있기 때문에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것을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대머리가 벗겨진 아주 이상하게 생긴 엘리사를 조롱하는 것입니다

 

24,“엘리사가 돌이켜 저희를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콤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에 사십이 명을 찢었더라

 

단지 엘리사를 조롱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을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도를 조롱한 것은 그 안에 임재 해 있는 성령을 조롱한 것과 같습니다. 엘리사를 조롱한 것은 단지 사람 엘리사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를 조롱한 것임을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들은 육적으로 죽었습니다.

엘리사가 저주를 해서 암콤 둘이 나와서 사십 이명이나 되는 아이들을 찢어 죽였습니다. 왜 이들이 죽어야 하느냐면 단지 인간 엘리사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신 선지자를 자기들의 눈으로 보고 대머리가 벗겨지고 농사를 지어서 형편없는 그의 외모를 보고 네가 무슨 선지자냐고 조롱을 했기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잘 나가는 사람을 조롱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는 아주 비굴할 정도로 자기를 낮추고 있지만 자기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주 형편이 없을 때 사람들은 그의 겉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을 하고 있습니다. 네가 그래가지고 무슨 복음을 전하겠느냐고 네가 하는 일이 무엇이냐고 하면서 조롱을 합니다.

 

육적인 죽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죽음은 바로 영적인 죽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하나님의 사람은 엘리사와 같이 사도들과 같이 욥이 고난을 당할 때와 같이 주변이 보여 질 수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보면서 단지 외모를 보고 조롱을 합니다.

 

잔인하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린아이들의 장난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어린아이들은 실제 어린아이들 일 수도 있지만 아직 하나님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엘리사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택하셔서 그 시대 선지자를 조롱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조롱한 것과 같습니다.

 

영적인 죽음입니다.

이 아들들의 육적인 죽음은 바로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한 아이들의 영적인 죽음을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도 성령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령이 임재 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반드시 멸망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아무나 조심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제사장들과 많은 권세 있는 자들은 모두가 복음을 거절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들에게는 꼼짝도 하지 못하면서 자기 눈에 보이는 앨리사와 같은 사람 또 사도들과 같이 그 이전에 직업을 아는 사람 또 욥과 같이 고난을 당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람을 쉽게 조롱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들은 분명히 조롱거리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25,“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 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엘리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이전 까지만 해도 그는 농사를 짓는 농부였고 또 대머리가 벗겨져 있는 아주 볼품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선지자라고 하니까 참으로 우습게 보였습니다. 그런 그를 조롱한 것은 단지 엘리사를 조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한 것이며 또 하나님을 조롱했기 때문에 그 영혼들이 멸망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늘 간구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분별할 수 있는 성령의 감동이 없으면 나도 하나님의 사람을 혹시라도 마음으로라도 조롱할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현재 목사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또 신앙생활을 어려서부터 했다고 해서 다 하나님의 사람은 아닙니다.

오직 그에게 성령이 임하여 거듭난 영의 생명이 있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사람인 것입니다.

영의 눈을 가져서 하나님의 사람을 분별하시고 또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