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129강,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윤주만목사 2019. 7. 13. 06:29


129,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느헤미야 5:14~19절을 보면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부터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 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찌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성경은 구원론입니다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어떻게 사랑하시고 또 은혜를 베풀어 주셔서 구원을 이루시고 있는 가를 성경을 통해서 깨닫지 못한다면 그는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특히 구약을 볼 때 주의해야 합니다.

구약은 거의 행위에 대한 말씀같이 기록이 되어 있기 때문에 말씀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구원론 자체가 흔들리고 결국 자기 영혼이 버림을 당하고 또 나로 인하여 남의 영혼까지도 사망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 구약이 무엇을 기록했습니까?

요한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이 성경은 나에 대해여 기록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구약을 해석할 때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답이 나오지 못한다면 해석을 잘못한 것입니다 반드시 성경을 해석하면 예수가 나와야 합니다. 그것은 불변의 진리이고 만약 예수를 찾아 내지 못한다면 잠잠히 있는 것이 좋습니다.

 

구약은 반드시 그림자로 보아야 합니다.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않고 의미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말씀 그대로를 보고 쉽게 해석을 했다가는 결국 행위론 자가 되어 율법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도 지구는 돕니다.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마치고 나오면서 한 유명한 말입니다 당시 지구가 돈다는 말은 천지가 개벽할 주장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무너뜨리는 주장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종교 재판을 했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그 재판에서 지고 나온 후에 역시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100명이 다 지구는 안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주장을 했지만 현대 과학이 발달을 하고 보니까 지구는 돌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종교 안에서 생각하고 있는 모든 사상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외로운 갈릴레이인가 아니면 100명에 속해 있는 다수의 종교인인가를 늘 생각해야 하고 그런 사람만이 자기 영혼을 보존할 수 있을 것이라 저는 믿습니다.

 

지금은 행위가 너무 만연한 시대입니다

그렇다고 이스라엘과 같이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진 것도 아니고 그저 교회 안에서는 자기들끼리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고 있지만 교회 밖에서는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행위를 그렇게 주장하고 있지만 한국 교회 백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 행위에 대해서 늘 손가락질을 받고 있습니다.

 

백년을 넘게 해 보았습니다.

그러고서도 아직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행위에 빠져 있는 것을 보면 참으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제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기들의 행위를 너무 강조를 하다 보니까 세상에서 그들이 선하고 의롭게 살아가야하는 동력을 상실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를 보면 그들만의 잔치를 하고 있고 그저 숫자 놀음에 빠져 교회 안으로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들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살기를 위해 온 힘을 쏟으면 자연스럽게 복음이 전파되는데 그 방법을 모르고 있습니다.

 

세계 교회는 경건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모두가 교회에서 삼가 지키고 있는 그것을 지키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고 그것에 온 힘을 다 빼앗기다 시피 하니까 자기들이 세상에 나가서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 가를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 안에서 하는 프로그램을 잘 소화하면 마치 구원을 받은 것으로 착각을 하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그냥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내 영혼의 보물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이 시대에 남은 자가 될 수 있고 주님의 은혜가운데 거하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구약의 행위는 이 시대 믿음입니다.

그것을 행위로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믿음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그는 결국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주의로 전락을 하게 되고 영적으로 음행을 하는 그런 사람이 되고 맙니다. 믿음은 분명히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사도 바울이 정의를 내리는데도 그 행위를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믿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믿음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행하고 있는 행위를 보면서 믿음이라고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기가 하는 신앙적인 행위가 마치 믿음인 것으로 오해를 하고 그것에 대해서 더욱 열심을 내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구원을 못 받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교회 안에서 그리고 이 세상에서 모든 사람들로 칭찬을 받았다 해도 그 영혼이 구원을 못 받았다 하면 그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저 이성이 없는 짐승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이 산 것입니다 더구나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렇게 살았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내가 유다 땅 총독으로 세움을 받은 때 곧 아닥사스다 왕 이십년부터 삼십이 년까지 십이 년 동안은 나와 내 형제가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느니라

 

느헤미야는 포로에서 돌아 온 후 예루살렘의 총독을 맡은 사람입니다

이 말씀들을 보면 마치 느헤미야가 행위를 참 잘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그것을 제가 부인하고자 이 말씀을 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하는 것은 느헤미야가 지금부터 자기가 무엇을 어떻게 행한 그것으로 하나님께서 느헤미야를 기억하고 그를 구원을 했다면 오직 믿음이라는 그 말씀은 아무 의미가 없어질 것입니다

 

제가 그림자라고 분명히 말씀을 드렸습니다.

느헤미야가 한 행위는 실제적이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대로 볼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가를 우리가 보아야 하고 그 믿음을 통해서 은혜를 구하는 느헤미야의 신앙을 배워야 합니다.

 

십이 년 동안 총독을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 총독의 녹을 먹지 아니하였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총독의 녹은 세상 권세입니다 느헤미야는 실제적으로 세상 권세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 권세를 먹지 아니하였다는 말씀입니다

 

고린도전서9:18절을 보면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인하여 내게 있는 권을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라

 

사도 바울이 자기권을 왜 다 쓰지 않았습니까?

복음을 전할 때 값없이 전하기 위해서 자기가 마땅히 써도 되는 권리를 다 사용하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어떠한 사역을 했는가를 여러분이 더 잘 아실 것입니다 그의 그림자만으로도 사람들이 치유되고 그가 안수를 하면 사람들의 병이 나았습니다.

 

생명과 재산은 바꿀 수 없습니다.

재산을 다 잃는다 해도 생명과는 절대로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병에서 고침을 받았다면 사도 바울에게 모든 것을 다 바쳐도 아깝게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복음을 위해 정말로 헌신을 하고 이방에 교회를 많이 세웠습니다. 그렇게 세운 교회 마다 자기가 권을 다 사용했다면 그렇게 힘들지 않게 사역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입니다.

바로 느헤미야도 자기가 예루살렘을 증축하면서 하나님의 일을 맡은 자로서 사도 바울과 같이 행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권을 다 쓰지 않은 것 같이 느헤미야도 총독으로서의 권리를 다 누리지 않고 예루살렘을 증축하는데 온 힘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은 성전을 건축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보이는 성전을 건축하려고 수고 했습니다. 구약은 보이는 성전이요 신약은 보이지 않는 성전입니다 이 두 사람은 똑 같은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리를 가 사용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파한 것입니다

 

이전 총독들은 백성에게 토색하여 양식과 포도주와 또 은 사십 세겔을 취하였고 그 종자들도 백성을 압제하였으나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이같이 행치 아니하고

 

느헤미야는 권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음을 먹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토색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자기는 백성들로부터 토색을 하지 않았다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 토색이 무엇입니까?

물건이나 돈을 억지로 달라고 하는 것을 토색이라고 합니다.

물론 육적으로 느헤미야는 토색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 토색은 영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경우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양식과 포도주와 은 삼십 세겔은 다 의미가 있습니다.

양식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생명을 얻을 수 있는데 그것을 먹지 못하게 자기가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중세 시대 때 한 때는 일반 교인들이 성경을 보는 것을 금하였고 성경을 본다는 죄로 화형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생명의 양식을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먹기 위해 그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온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빼앗아 늘 영적으로 굶주리게 만들고 있습니다. 실제 교회가 예수에 대해서 바로 가르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영적으로 토색을 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포도주를 빼앗습니다.

두 가지 술이 있습니다. 하나는 진노를 받는 율법의 술이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새 술 성령에 취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전 총독들은 백성들에게서 이 포도주를 빼앗아 갔습니다.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지 못하게 방해를 했다는 말씀입니다 지금도 행위로 말미암아 성령의 감동을 받지 못하게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양식을 먹을 수 있게 성령께서 늘 감동을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가 오히려 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은사에는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실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보혜사 성령에 대해서는 함부로 취했다가는 그것을 빼앗아 가고 맙니다.

 

교회가 암흑기입니다

초대 교회의 예배는 쌍방향으로 강론을 했습니다. 강론 자가 강론을 하다가 모르는 것이 있으면 질문을 하기도 했고 또 강론 자가 잘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다른 강론 자가 일어나서 그 부분을 바로 가르쳐 주고 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예배가 사라지고 일방적으로 그저 한 사람이 전하고 있고 그것에 대해서 어는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그런 시대가 바로 토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은을 빼앗았습니다.

은은 생명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이스라엘은 인구 조사를 할 때 은을 냈습니다. 그 은은 자기들의 생명을 속전하는 은입니다 그런데 이 은을 빼앗았다는 것은 바로 이스라엘의 생명을 빼앗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가 총독으로 있었지만 이 은을 빼앗지 않았습니다. 지금 교회에서 바로 이 은을 빼앗는 자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자기 영혼을 보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33:15절을 보면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 정직히 말하는자, 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 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 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 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

 

이런 성도를 높이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토색을 하는 자는 이 느헤미야와 같이 권력을 가진 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실제 교회사를 보거나 또 요한계시록을 보아도 결국 교회의 지도자들에 의해서 그 영혼들이 생명의 양식과 포도주와 그리고 은을 빼앗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총독이 빼앗았습니다.

지금 총독과 같은 위치에 있는 교회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생각하시고 혹시라도 내가 양식을 그리고 포도주를 그리스도 은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스스로 분별해서 자기 영혼을 보존하시기 바랍니다. 토색을 당하고 있으면서도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자기가 토색을 당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오히려 더 빼앗기고 싶어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도리어 이 성 역사에 힘을 다하며 땅을 사지 아니하였고 나의 모든 종자도 모여서 역사를 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을 쌓는데 힘을 다하였습니다.

참으로 의미가 깊은 말씀입니다 예루살렘은 영적으로 하면 평화의 도시입니다. 그 평화의 도시를 건설하는데 온 힘을 다 했습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땅을 사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일을 하는 사람은 참 많습니다.

그러나 땅을 사지 않는 자는 너무도 적은 것이 지금 이 시대 교회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땅을 사지 말라야 하는데 이 땅을 사는데 모든 힘을 다 쓰고 있습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아래 자기 땅을 사는데 혈안이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이 무엇입니까?

땅은 바로 우리의 육체며 이 육체의 의를 갖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헌신 했습니까?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내가 가진 의를 배설물처럼 버렸다고 빌립보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땅을 사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좋은 땅을 사기 위해서 교회 안에서 서로가 경쟁을 하고 있고 그 땅을 보면서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복음을 위해서 일하는 그가 땅을 사려고 하는 순간 그 영혼은 사망으로 내려간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교회 안에서 행하는 모든 의로운 일과 선한 일을 배설물처럼 버리지 않는 그는 음행하는 자입니다

 

정말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선을 행하느냐 의롭게 사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버릴 수 있느냐 땅으로 사고 있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땅을 사느냐 하는 문제는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내 땅을 사는 자는 반드시 멸망을 당 합니다

 

얼마나 불쌍합니까?

교회 안에서 정말 헌신을 하고 열심을 다 했는데 그것이 자기 땅을 사는 일이 되어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면 그것처럼 불행한 일은 없을 것입니다 제가 그런 일을 하지 말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느헤미야나 사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위해 일을 했을지라도 자기 땅을 사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너무 경쟁을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 땅을 사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든지 자기 이름을 나타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마치 천국을 보장 받는 것으로 오해를 하면서 땅을 사고 있습니다.

 

이 싸움입니다.

내가 선을 행하고 의롭게 사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라 성도는 당연히 그렇게 살아야 하지만 그것을 버리느냐 버리지 못하느냐 하는 것은 또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취급을 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받아들이는 너무도 중요한 일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를 모릅니다.

모르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그 행위들에 취해서 서로 경쟁을 하고 있고 또 교회 안에서 서로 그것을 칭찬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결국에는 모두가 사라지고 마는 그 땅을 사기 위해서 더 좋은 땅을 사기 위해서 열심에 열심을 다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위해 일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내가 땅을 사고 있다면 그는 헛된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기 영혼도 구원을 받지 못하는 그런 일을 하면서 오히려 그것에 취해 그 행위를 보면서 자기 영혼이 구원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내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들 일백오십 인이 있고 그 외에도 우리 사면 이방인 중에서 우리에게 나아온 자들이 있었는데

 

참으로 놀랍지 않습니까?

느헤미야의 상에는 유다 사람들과 민장 일백오십 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면에 이방인도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을 증축하는 일에 유다 사람들만 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도 함께 일을 하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한 상에서 같이 먹었습니다.

유대인의 율법에는 이방인과 한 상에서 먹지 못하는 율법이 있습니다. 갈라디아서에서 보면 베드로가 이방인과 한 상에서 먹다가 유대인들이 오니까 그 자리를 급히 피했다가 사도 바울로부터 책망을 들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한 상에서 먹지 않던 그 시대에 느헤미야는 이방인들과 예루살렘을 증축하면서 한 상에서 먹었습니다. 이것은 율법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면 만찬입니다

그 떡을 먹는 데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우리 이방인이나 모두가 한 상에서 먹는다는 것을 이미 느헤미야 시대에 보여 주었고 하나님께서는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도들조차도 외식을 하면서 이방인과 함께 상에서 먹다가 피하는 것을 보면 그 시대 얼마나 율법이 성행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그렇습니다.

지금도 율법은 우리가 모르는 곳곳에 파고들고 있고 그 율법으로 말미암아 영적인 음행을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릅니다. 여러분이 삼가 지키고 있는 그것이 바로 이 시대 또 다른 율법이며 그 율법에 미혹이 되면 온전한 떡을 먹을 수 없습니다.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찌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

 

모든 백성이 느헤미야를 위했습니다.

이 살진 소와 양과 닭과 포도주는 느헤미야가 육적으로 먹은 것이지만 영적으로는 그가 굶주리지 않게 먹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백성들과 함께 만찬을 들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생각하면서 늘 백성들과 만찬을 했습니다.

 

비록 부역은 중했습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자기 땅을 사지 않으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한다는 것이 얼마나 고독한 일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 일은 정말 사도바울이 고난을 당했던 것과 같이 느헤미야도 힘들게 일했습니다.

 

그러나 총독의 녹은 먹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권세를 사용하지 않고 오직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비록 복음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그 부역이 힘이 들지라도 그래서 땅을 사지도 않고 누구 하나 알아주는 이 없어도 하늘을 소망하는 자는 감사함으로 마땅히 일을 합니다.

 

"내 하나님이여 내가 이 백성을 위하여 행한 모든 일을 생각하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시옵소서"

 

느헤미야가 무엇을 했습니까?

그가 지금 행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까?

느헤미야는 자기가 어떻게 행위를 했는가를 하나님께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어떻게 믿음을 지켰는가를 지금 하나님께서 기억해 달라는 말씀입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한 그 어떤 행위도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면 결국 미련한 자로 살다가 버림을 받게 됩니다. 느헤미야는 자기가 믿음을 지키기 위해 어떻게 행했는가를 잘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자기 믿음을 기억해 달라고 간구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무엇입니까?

내 행위가 조금도 포함이 되지 않은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선물을 은혜라고 합니다. 이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하면서 자기 행위를 주장한다면 느헤미야는 믿음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은혜를 구했습니다. 이 은혜를 구했다는 말씀은 자기 행위를 조금도 주장하지 않았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자기가 한 행위를 이야기 하면서 하나님께 은혜를 구하는 자는 악한 자입니다 은혜는 말 그대로 거저 주는 것인데 내가 이것을 했으니까 은혜를 달라고 하는 것은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이 시대는 자기가 한 행위를 주장하면서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정말 복음이 있는 성도는 자기 육적인 행위가 아니라 믿음을 지키기 위해서 수고한 것을 기억하면서 은혜를 구하고 있습니다.

 

느헤미야와 같이 믿음을 지키면서 평화의 복음을 위해 수고한 그것을 기억해 달라고 참 된 간구를 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