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그가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이것이니 곧 영원한 생명이니라

은혜와 진리의 말씀

47강,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윤주만목사 2019. 5. 13. 08:03


47,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사무엘상 25:3절을 보면

그 사람의 이름은 나발이요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남자는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며 그는 갈멜 족속이었더라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는 한 마음이요 한 몸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말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부부들이 나옵니다. 두 사람의 이름이 명확하게 나오면서 이렇게 극명하게 대비되는 부부를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귀한 뜻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성경에 부부라 해도 여자의 이름은 거의 기록되지 않습니다.

기록되지 않는 것은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당연히 남편이 구원을 받으면 그 부인도 구원을 받기 때문에 굳이 부인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꼭 기록을 해야 하는 사람들을 빼고는 거의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가족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씀을 합니다. 남편이 믿음이 있으면 거의 모든 부인은 믿음이 있는 것으로 성경에서는 말씀을 하고 있으며 또 고대 사회에서는 부인은 남편의 사상을 그대로 따라갔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부인은 당연히 남편을 따라 동일한 믿음을 가지는 것으로 이해를 할 수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부도 나옵니다.

대표적인 예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입니다.

이들은 나쁜 쪽으로 일심동체가 되어 성령을 속이는 일을 함으로서 둘 다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 부부는 처음부터 땅을 팔지 않고 사도들 앞에 자기 땅을 판 것을 내 놓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입니다

 

나발과 아비가일은 그 이름부터 극명하게 대비가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발은 어리석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아비가일은 아버지가 기뻐하신다. 또는 기쁨의 근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이름의 뜻만 알아도 두 사람이 어떻게 될 것인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나발은 갈렙의 후손으로 부유한 사람이라고 성경사전에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아마 나발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면 굳이 아비가일이라는 이름이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을 통해 부부가 일심동체 이지만 또한 일심동체가 되지 않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행사가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교회에 나온 부부를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는 나발이 완고하고 악하게 나왔지만 실제 부부 중에는 여자가 완고하고 악할 수도 있고 나발과 같이 남편이 완고하고 악할 수도 있습니다.

 

나발이 왜 죽었는가는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피해 갈멜 지방에 있을 때 나발의 양과 염소가 심히 많아 그 하인들이 양과 염소를 기르는데 다윗이 울타리가 되어서 그것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쫓겨 다니는 신세고 또 군사와 가솔들을 데리고 다니므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힘으로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나발의 재산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후에 양털을 깎는 잔치가 있어서 다윗이 그 소년들을 보내어 잔치 음식을 나눠 줄 것을 청했지만 나발은 전후 사정을 알아보지도 않고 거절을 해서 다윗이 그 군사를 데리고 와서 그 집에 모든 남자를 죽이려 할 때 아비가일이 그 소식을 듣고 음식을 급히 준비해 가지고 가서 다윗의 마음을 돌이킴으로 해서 당장 죽임은 면할 수 있었으나 나중에 그 소식을 듣고 낙담을 해서 결국 죽고 말았습니다.

 

나발이 죽게 된 직접적인 원인입니다

이스라엘의 육적인 죽음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영혼의 죽음과 같은 것입니다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와 모형입니다

 

나발이 왜 죽었는가를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나발과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깨달아야 할 것은 나발이 다윗에게 음식을 주지 않은 그것 때문에 죽임을 당했다면 우리도 역시 구원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만약 그것이 직접적인 이유라면 결국 믿음에 대해서 오해를 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 합니다.

 

요한계시록3:20절을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나발은 부자입니다

또 이 날은 양 털을 깎는 잔치를 하는 날입니다

이 부자는 단순히 부자가 아니라 이 나발은 율법적으로 부자가 되어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문을 두르려도 그 문을 열어 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음성을 듣지 못 한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부자라서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부자가 되어 있는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문을 두드려도 절대 열어 주지를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발도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 마리나 될 정도로 부자고 또 종을 많이 거느리고 있어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다윗이 아니더라도 그는 스스로 양과 염소를 기를 수 있는 종들이 많았습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먹자고 하지만 자기가 워낙 부자이기 때문에 함께 먹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교회고 또 한 가정은 교회입니다 그러나 나발은 워낙 부자라서 다윗이 음식을 함께 먹자고 청했지만 그것을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는 완고했습니다.

다윗이 정중하게 요청을 했지만 그는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 또 주변 종들에게 그 말이 사실인가를 확인도 하지 않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재산에 취해 완고하게 거절을 했습니다. 굳이 다윗과 함께 음식을 먹을 이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음식을 주지 않아서 나발이 죽었습니까?

나발은 음식을 주지 낳아서 죽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 음식을 함께 먹기를 청했지만 거절을 했기 때문에 죽었습니다. 자기 양과 염소를 나누어 먹기 싫어했던 것입니다

 

고린도후서3:14절을 보면

그러나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나발은 완고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을 보면 나발이 음식을 나눠 주지 않은 것 빼고는 특별히 잘못한 것을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발이 죽었다면 믿음을 가지는데 있어 매우 혼란스러울 수 있습니다.

 

나발은 율법주의자였습니다.

그는 수건이 벗겨지지가 않아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왜 다윗의 요청을 거절했는가를 보겠습니다.

 

사무엘상 25:10-11절을 보면

나발이 다윗의 사환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뇨 근일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 어디로서인지 알지도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 한지라

 

나발이 보는 다윗입니다

아니 그의 사상을 아주 잘 표현한 말씀입니다

자기에게 음식을 청하는 다윗을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는 방탕한 사람으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처지와 형편을 알려고 하지 않고 그가 지금 처해져 있는 환경만 보고 다윗을 판단을 했습니다.

 

율법의 잣대로 다윗을 보았습니다.

율법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아 다윗이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것이 다윗이 마치 무슨 큰 잘못이라도 하고 도망을 다니는 것으로 오해를 했습니다. 누가 율법의 수건을 쓰고 보았습니까?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배척을 할 때 그들이 걸고넘어진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안식일이라는 율법 때문에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 까지 시비를 한 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나발도 완고해서 그 율법의 수건을 벗지 못하고 율법의 눈으로 다윗을 보니까 주인에게서 도망을 나온 사람으로 보인 것입니다

 

나발은 다윗의 처지를 이해할 만한 지혜가 없었습니다.

다윗이 누구인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지금 사울에게 쫓겨 다니고 있는 한 마디로 사울에게 도망을 나온 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왜 쫓겨 도망을 다니고 있는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주인의 입장에서 도망 간 종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윗을 모르겠다고 말 합니다

나발이 왜 다윗을 모르겠습니까? 양이 삼천이요 염소가 일천이나 되는 부자는 그 나라 정세에 관심이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뻔히 알고 있었지만 다윗을 모르겠다고 하면서 내쳤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왕을 삼았다는 것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자인 나발이 다윗을 모른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바로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지고 마음에 부자가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배척을 했습니다. 지금도 역시 교회 안에는 나발과 같이 완고하여 아직까지도 율법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기 보다는 자기들 눈에 보이는 그대로 판단을 하며 멸시를 하고 있습니다.

 

수건을 벗지 못 합니다

나발은 율법의 수건이 벗겨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사울에게 쫓겨 다니는 다윗의 모습만 보였기 때문에 더욱 완고해 져서 다윗의 소년들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나발의 행사가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음식을 나눠 주지 않아서 그의 행사가 악한 것이 아니라 다윗을 바라보는 그의 눈이 악하다는 말씀입니다 자기 자신이 너무 부자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성경은 그의 물질적인 부자를 말씀하고 있지만 구약의 물질적인 부자는 바로 신약의 영적인 부자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부자가 되어서 부족한 것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다윗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있는 바리새인이 그랬던 것처럼 나발도 수건을 쓰고 있어서 다윗을 영접하지 못 했습니다

 

영적인 부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선하고 의롭게 사는 것은 성도의 당연한 본분입니다

그러나 율법에 의해서 자기 자신을 부자로 만드는 사람은 그 마음이 완고해서 절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에는 나와 있지만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그 마음이 율법으로 인하여 부자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3, 그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이라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우나

 

아비가일은 그 이름 뜻 그대로 기쁨의 근원입니다

그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율법에 의해 수건을 쓰고 있는 완고한 자가 있고 또 한사람은 총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총명한 아비가일은 다윗을 영접했습니다.

그러나 완고한 나발은 다윗을 멸시 했습니다.

이 사건은 부부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 있지만 교회 안에 이런 두 사람이 함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도자는 부자가 되어 부족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고 성령께서 책망하시는 그 말씀을 들으라고 하셨습니다.

 

이 두 사람은 예표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두 사람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내가 완고한 사람인가 아니면 총명한 사람인가를 스스로 분별을 해야 합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아직도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아비가일은 총명합니다.

다윗을 영접한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을 예표 하는 것입니다

 

에베소서1:7-8절을 보면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이는 그가 모든 지혜와 총명으로 우리에게 넘치게 하사

 

다윗이 그 집 남자를 모두 죽이려 했습니다.

그때 그 집을 구한 것은 바로 아비가일의 총명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아비가일은 그 은혜를 입어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나발이 죽고 난 후에 아비가일은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녀는 총명이 있어 다윗을 분별할 수 있었고 또한 영접을 해서 다윗의 분노를 누그러뜨리게 할 수 있었습니다. 완고한 자의 눈에는 다윗이 주인의 집에서 도망을 나온 종으로 보였지만 총명이 있는 아비가일의 눈에는 다윗이 분명 왕이 될 것을 믿었습니다.

 

나발은 현재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총명한 아비가일은 미래를 보았습니다.

교회 안에서 지금 현재를 보고 판단하는 사람은 나발과 같이 완고한 사람이며 왕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아비가일과 같이 총명한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은 아직도 메시아를 기다립니다.

다윗의 왕권을 가지고 오실 메시아를 아직도 기다리는 이유는 그들은 율법에 의해 수건으로 성경 말씀이 가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들어와 있지만 수건에 의해 가려져 있는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영접하지 않습니다.

 

나발은 다윗을 왕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은 다윗을 분명히 왕으로 보았습니다.

지금도 마음이 완고한 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보지 않습니다. 왕이라는 의미를 모릅니다.

 

왕은 보호자입니다

그러나 나발은 스스로 왕이 되어 자기를 보호하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상 25:36절을 보면

아비가일이 나발에게로 돌아오니 그가 왕의 잔치 같은 잔치를 그 집에 배설하고 대취하여 마음에 기뻐하므로 아비가일이 밝는 아침까지는 다소간 말하지 아니하다가

 

예수를 왕으로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자기가 이미 왕 같이 되어 있는데 예수를 어떻게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부자도 모자라서 왕이 되어 있는 나발에게 다윗은 주인에게서 도망을 나온 아주 나쁜 종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면 나중에 왕이 됩니다.

율법이라는 수건을 쓰고 있으면 그것이 부자를 만들고 나중에는 왕이 되어 대취를 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기 바랍니다. 나발이 술에 대취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미가 다 있습니다.

이 술은 물론 육적인 술이기도 하지만 영적인 술 율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얼마나 많이 마셨으면 대취를 했겠습니까? 사도 바울이 술 취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는데 나발은 율법의 수건을 쓰고 대취를 해서 부자가 아니라 이제는 왕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술 취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노의 포도주에 취하는 사람은 반드시 망 합니다.

교회 안에서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수건을 쓰고 대취를 해서 자기 스스로 구원을 받은 것으로 오해를 하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왕의 잔치를 배설했다는 것은 자기는 구원을 받았다고 확신을 했다는 것입니다

 

율법에 취해 있으니까 다윗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진노의 포도주에 취해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보지를 못 합니다 그들의 마음에서는 이미 왕이 되어 어떻게 예수만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어 하면서 율법에 대취를 해서 자기 정신을 팔아 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마음이 기쁘겠습니까?

율법의 수건을 쓰고 있는 사람은 그 율법을 잘 지키는 자신을 보면서 마음에 기쁨을 얻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누려야 하는데 자기가 부자가 되어 왕의 잔치를 배설하고 대취를 해서 스스로 구원을 받았다고 마음에서 기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리석은 자의 행사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악한 사람은 바로 자기가 왕이 되려는 사람입니다

다윗의 혈통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데도 자기 마음에서 이미 왕이 되어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율법에 의해 그렇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하나 지키면 마음에 기쁨이 옵니다

그것을 두 개 지키고 또 세 개를 지키고 아주 대취를 할 정도로 거의 모든 율법을 다 지키다 보면 마음에서는 아주 큰 기쁨이 찾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보며 마치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가장 어리석은 자는 성령의 기쁨과 율법의 기쁨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오는 마음의 기쁨을 마치 성령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발과 같이 율법에 대취를 해서 왕의 잔치를 배설하게 되어 있습니다.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대취를 할 정도면 그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수건에 쓰고 완고해져 있는 사람은 절대로 예수를 영접할 수 없으며 그 율법을 지키는 자신의 모습에 취해서 비틀거리고 있습니다. 왕의 잔치를 배설을 하고 마음에서 큰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율법의 특성이 그렇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면 자신도 모르게 나발과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될 수 있습니다.

 

총명 하나님께서 주십니다.

그것을 구하는 자에게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채워 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총명을 구하기보다는 율법을 잘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리는 그들이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는 밤새 펑펑 눈물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13:18절을 보면

지혜가 여기 있으니 총명 있는 자는 그 짐승의 수를 세어 보라 그 수는 사람의 수니 육백육십육이니라

 

총명이 있는 자는 짐승의 수를 셀 수 있습니다.

자기 영혼이 살고 죽는 너무도 중요한 이 총명을 구할 생각은 하지도 않고 오히려 진노에 빠뜨리는 율법을 지키게 해 달라고 매달리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총명이 있는 성도는 짐승의 수를 세고 있습니다.

 

그것을 이마나 손에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총명이 없는 자는 짐승의 수가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대취를 해서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총명이 없으면 나만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로 인하여 내 주변 사람들까지 모두 망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총명이 없음으로 해서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까지 죽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정말 이 시간에도 하나님께 총명을 간절하게 구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 다수는 총명을 구하기보다는 율법의 수건을 쓰고 그것을 잘 지키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영접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나와 있지만 율법으로 말미암아 그 마음이 완고해 져 있어 오히려 복음을 멸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비가일과 같이 총명이 있는 사람은 다윗을 영접합니다.

 

사무엘상 25:42절을 보면

급히 일어나서 나귀를 타고 따르는 처녀 다섯과 함께 다윗의 사자들을 따라가서 다윗의 아내가 되니라

 

자기만 다윗의 아내가 된 것이 아닙니다.

총명이 있는 성도는 나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아비가일은 그를 따르는 다섯 처녀를 데리고 다윗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아비가일의 총명 때문에 다섯 처녀까지 구원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왜 총명을 구해야 합니까?

그것은 내 영혼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라 내 주변에 있는 다섯 처녀를 함께 구원할 수 있는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총명이 없이는 다윗을 왕으로 볼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총명을 얻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내 영혼을 구원하고 또 나와 함께 하는 다섯 처녀도 구원을 하는 아름다운 아비가일과 같은 신부가 되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