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120강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윤주만목사 2018. 5. 28. 00:27


로마서 11:33절을 보겠습니다. (256)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우리 인생입니다

정말 우리는 성경을 보면서 내가 누구라는 것을 먼저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자기가 누군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전체를 거의 거꾸로 보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이제까지의 신학자입니까?

그가 아무리 이름이 있다 해도 이 복음의 비밀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감추어 두신 사람들이 있어서 그들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지 못했고 또 그들의 행적을 우리가 알 수 없을지 몰라도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은 사실 복음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신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지만 자기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구원입니다

사실 처음부터 복음을 들은 사람은 그 은혜가 반감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쉽게 율법주의에 빠지는 것을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과 같이 지독한 율법주의에 있다가 긍휼을 입은 사람은 그 은혜를 감당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지금 11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고 그들이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물론 복음을 처음부터 들었다 해도 그 감격이 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이방의 교회가 왜 그렇게 쉽게 율법주의에 빠졌는가 하면 사실 율법주의에 있다 나오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다 깨닫는다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도 바울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스데반 집사가 순교를 당할 때 그는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의 옷을 들고 있었고 또 스데반 집사가 죽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고 믿었던 사람입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그는 그리스도인을 잡아서 재판에 넘기려고 다메섹까지 갔던 사람입니다 그가 왜 긍휼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보니까 자기가 알지 못할 때에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얼마나 악한 일인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사도 바울보다 더 긍휼을 입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가 율법주의에 있다가 복음을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욱 복음에 대해서 강하게 전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긍휼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는가 하면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 가는 이 율법을 알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율법을 모르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쉽게 말해서 장님이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가 사도 바울과 같지는 않지만 율법을 지켰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중에서는 정말 사도 바울 못지않게 나름대로는 율법을 지켰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율법주의에서 하나님께서 사랑을 해 주심으로 이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우리는 절대로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왜 초대 교회에 사람들이 율법주의에 쉽게 빠져 들어갔는가 하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율법주의라는 것을 몰랐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있다가 나온 사람은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많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긍휼입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는 것도 긍휼입니다 그러나 악인이 구원을 받는 것은 더 큰 긍휼이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에서 이 비밀을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평생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다가 긍휼을 입지 못하고 사망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이 비밀을 누가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는 정말 이 복음이 이 시대 우리에게 계시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씀을 드릴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누구보다 더 율법주의에 있었기 때문에 이 로마서를 기록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이 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감동이라면 누구라도 기록했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순종치 아니하는데 가두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이제까지 교회사를 통해서 보더라도 이것을 깨달은 사람이 없는 것으로 생각이 됩니다. 이제까지 율법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했습니다.

얼마나 오묘합니까?

이것은 정말 비밀입니다 어느 누구도 깨달을 수 없는 비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을 사도 바울이 우리에게 로마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비밀을 깨달은 사도 바울이 얼마나 감격해 하고 있는가를 이제 뒤에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이 복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경륜을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도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저주를 받았어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이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성경에서 이 복음을 깨닫게 하시고 긍휼을 입은 자가 되게 하셨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이여, 사도 바울이 사람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이렇게 말씀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누구보다 긍휼을 입은 자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사도 바울은 가슴이 벅차오르는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이 말씀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얼마나 대단합니까?

저 역시도 가슴에 다 담지 못하고 표현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감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이 얼마나 미약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긍휼을 입은 자만이 표현할 수 있는 최상의 언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감당이 안 됩니다

우리가 이 지혜와 지식에 아주 조금 접근을 했습니다. 저는 사도 바울과 비교도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당시에 최고의 지식인이었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의 극치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긍휼을 입은 자만이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는데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이 말씀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고 사도 바울이 어떤 마음으로 이 글을 쓰고 있는가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입니다 그 부요함이 얼마나 깊은 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들이 성경을 문자로 보고 그것을 아는 것으로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아는 것으로 수사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초등학문을 가지고 이 시대 달변가들이 수사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깨닫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다는 깨달을 수 없을지라도 어느 정도는 깨닫고 있고 가슴에 와 듣습니다. 아니 성령이 우리에게도 사도 바울과 같이 감동을 해 주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과 같이 긍휼을 입은 사람만이 쓸 수 있는 말씀입니다

제가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 바울과 같이 그런 율법주의에 빠져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보다는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로마서를 통해서 깨달은 하나님의 비밀을 생각하면 충분히 공감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고 내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이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전도서7:24-26절을 보겠습니다. (955)

무릇 된 것이 멀고 깊고 깊도다 누가 능히 통달하랴 내가 돌이켜 전심으로 지혜와 명철을 살피고 궁구하여 악한 것이 어리석은 것이요 어리석은 것이 미친 것인 줄을 알고자 하였더니 내가 깨달은즉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자라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를 피하려니와 죄인은 저에게 잡히리로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그 긍휼하심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이 말씀을 기록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역시 긍휼하심을 입은 자만이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을 어느 정도 깨달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의 왕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혜가 있는가를 이 전도서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전도서는 성경 중에서도 철학적인 사상이 담겨져 있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전도서를 모르고 있고 이 시대 거의 모든 목사들이 이 전도서의 말씀을 전혀 설교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혜입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는 지혜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성경을 보면 볼수록 그 지혜의 깊이가 얼마나 깊은가를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들이 하나님의 경륜을 깨닫는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지만 그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아주 조금 그러니까 구원을 받을 정도로 깨닫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사실 그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이 세상 초등학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이 세상 지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보고 이 세상에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알 수 있는 지혜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자연스럽게 율법을 지키면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미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서기 150년 중반이 넘어가면서부터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으면 이단이라고 정죄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의 교회가 얼마나 빨리 그리고 쉽게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지혜의 왕입니다

솔로몬이 총기가 있을 때는 성경의 거의 모든 지혜를 깨달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런 솔로몬이지만 그 역시도 하나님의 지혜를 말씀을 하면서 너무 깊어서 통달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인생의 언어로 표현이 되지도 않은 영의 일과 내세의 일만 해도 우리가 깨닫는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압니까?

정말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 우리가 안다고 하는 것은 겨우 구원을 받을 정도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정도의 지혜를 아는 것만도 그것이 얼마나 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다는 것은 지금은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13장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이 희미하지만 그때는 우리가 부활을 했을 때는 얼굴과 얼굴을 마주보는 것과 같이 환하게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고 해 보아야 그렇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말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의 사랑도 다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 인생인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겠습니까? 그런데도 이 시대 목사들은 그리고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자기들이 아는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심지어는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희미합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서 하나님을 볼 때 그때는 하나님의 사랑을 충만하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깊이를 어느 누구도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정말 우리는 사망의 구렁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전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너무 깊고 멀어서 통달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지혜를 깨달을 수 없어서 거의 모든 사람이 마음이 올무와 그물 같고 손이 포승 같은 여인은 사망보다 독한 교회에 붙잡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망보다 더 독합니다.

그런데 그것에 모두가 포승으로 묶여 있습니다. 어느 누가 지금 이 시대 정통의 기독교를 음녀라고 하고 짐승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에게 임하지를 않아서 모두가 그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유대교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입니다 이 두 교회는 음녀가 되었고 짐승이 되었다는 것을 성경이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지혜로는 그것이 음녀인지 그리고 짐승인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에게 피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두가 저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왜 그들이 붙잡혀 있는가 하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가 거기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지혜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누가 이 여인이 음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여인이 짐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저에게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심으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이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더욱 은혜가 큽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이것을 사람의 지혜로 어느 정도라도 깨달을 수 있다면 사도 바울이 이렇게까지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당시 그는 지식인이었습니다. 나름대로는 세상에서 자기 지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신 것을 깨닫고 나니까 더 이상 할 말이 없었습니다.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늘 깨어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사실 우리가 평생을 이 지혜를 구한다 해도 아니 성경만 보고 산다고 해도 겨우 구원에 대해서 아는 정도고 그것을 희미한 청동거울을 보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아는 것도 우리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세상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지혜가 없어서 다 이 여인에게 붙잡혀서 포승으로 메여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들이 이 사망보다 독한 여인에게 붙잡혀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는 이 여인을 피해서 이제 긍휼을 입은 자가 되었습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짐승도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 압니다. 그리고 새가 그물에 걸리면 압니다. 또 물고기도 자기가 그물에 걸려 있다는 것을 알고 파닥거리다가 결국에는 지쳐서 죽고 맙니다. 그러나 오직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만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입니다

이 시대는 인격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꽤나 지식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모두가 이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붙잡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깊은 하나님의 지혜가 그들에게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사람의 지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어거스틴입니까?

루터입니까? 칼뱅입니까? 웨슬레입니까? 로이드존슨입니까? 감히 우리가 그 이름을 언급하는 것조차 어렵게 생각하는 그들이 모두가 이 여인에게 붙잡혀서 포승에 묶여 있었으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그대로 사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사도 바울의 말씀을 깨달았다고 생각합니까?

이 로마서의 말씀을 보고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하면서 그들이 이 지혜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깨달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던 우리를 그 순종하지 아니하는 가운데서 건져 주셔서 긍휼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부요합니다.

그 지혜와 지식입니다 정말 우리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지혜를 얻은 성도들입니다 우리가 이 사망보다 독한 여인을 알고 하나님을 기뻐함으로 해서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풀어주심으로 성령을 보내 주셨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3:8-9절을 보겠습니다. (312)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 바울입니다

그는 정말 긍휼을 입은 자입니다 그가 얼마나 지독한 율법주의에 있었는가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비밀을 깨닫게 하신 것은 정말 사도 바울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은혜입니다 그래서 그는 더욱 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수고를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입니다.

그 부요함이 우리를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우리를 구원을 해 주시는 지혜와 지식이기 때문에 부요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우리가 아주 조금이라도 깨달아서 구원을 받고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것을 부요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깊습니까?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뼈 속부터 율법주의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본성을 따르는 나무에서 가지를 찍어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다시 생각해 보아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이 얼마나 깊은 가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율법을 잘 지켜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본성을 찍어 버리셨습니다. 우리 이성으로 그것을 찍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두셨다가 찍어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해서 우리가 이 영의 일을 깨달아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지혜와 지식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긍휼을 입은 자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측량할 수 없는 것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역사가 있습니다.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도 자기가 받은 은혜가 너무 커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자기가 더 작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은 성도만이 이 말씀이 깨달아집니다. 정말 우리는 지극히 작은 성도보다 더 작은 자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판단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을 그리고 강퍅케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는 것을 우리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제 복음을 어느 정도 깨닫고 있어서 그것을 아주 조금 알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이 불의하다고 하지만 우리는 성경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것이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그것을 감히 누가 측량할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가지 얼마를 꺾어 버리시고 그 자리에 우리 이방인들을 접붙이셨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측량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셔서 이제 아주 조금을 깨닫고 있습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영원부터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속에 감취었던 비밀의 경륜이 어떠한 것을 드러내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판단을 그리고 가난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기 전에는 그 역시도 율법주의로 살아가면서 하나님의 판단을 불의하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을 깨닫고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들에게 전하고 있고 그 지혜와 지식의 비밀을 나타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본성입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찍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누구도 자기 스스로는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을 수 없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경륜을 측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찍어 주시고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여 주셨습니다.

마태복음7:14절을 보겠습니다. (10)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음이니라

고린도전서2:10절을 보겠습니다. (265)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그의 길입니다

그 길은 생명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어두움에 빠져 그 길을 찾지 못 했습니다 이스라엘만 찾지 못한 것이 아니라 이방인들 역시도 그 길을 찾지 못해서 모두가 어두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그리고 성경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신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말씀을 알고 있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그 길을 찾아서 가고 있습니까? 그 길을 가고 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입니다

그것이 사람으로 길을 찾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마치 자기가 길을 찾아서 가고 있고 생명을 얻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어두움에 있어서 아직 길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누구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방의 교회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 세상입니다

지구의 인구가 70억 명입니다 그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적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특히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천주교를 빼고 그리고 이단들을 빼고 나면 정말 적은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들이 보아도 적은 것 같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은 그 길을 찾는 자가 적지만 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이라는 당시 정통의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이스라엘은 그 길을 찾지 못 했습니다. 아니 그 길을 가려고 하는 자가 거의 없었습니다.

왜 없습니까?

이것은 영의 일입니다 제사를 드리고 있는 이스라엘로서는 자기들이 충분히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예배와 여러 가지 제사를 드리고 있는 기독교인들이 그렇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실제 이 시대를 보더라도 아니 이방의 교회를 보더라도 그의 길을 찾아서 간 사람이 거의 안 보입니다 이제까지 로마서 강해를 통해서 우리가 보았지만 그의 길을 찾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우리가 보고 있는 거의 모든 교회는 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생명입니다

그의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이 생명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 문자로 기록이 되어 있으니까 막연하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시기 바랍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

성경이 그의 길을 찾지 못한다고 하면 다수가 그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한 시대에 얼마나 적은 수가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을 수 있는가를 우리는 성경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도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이가 적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주님의 말씀도 듣지를 않습니다.

적습니다.

이 세상 전체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 중에 적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많은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지만 역시 그의 길을 찾는 사람이 아주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믿었던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아브라함의 행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주셔서 우리가 믿음으로 해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게 접붙이셨습니다. 우리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을 보면 거의 모두가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 합니다

이제까지 그 유명하다고 하는 신학자들과 목사들이 그의 길을 찾지 못하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다가 모두가 사망에 이르고 말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 중에서 어느 한 사람이라도 그의 길을 찾았다면 아마도 지금 교회는 많이 다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언입니다

그의 길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선언적인 말씀입니다 왜 찾지 못하는가 하면 하나님의 지혜와 자식의 부요함이 너무 깊어서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고 있는 성도님들은 사도 바울의 이 말씀이 충분히 이해가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찾지 못 합니다.

그래서 지금의 기독교가 탄생이 되었습니다. 전도서에서 말씀하는 그 여인에게 모두가 붙잡혀 있습니다. 그 여인은 사망보다 더 독한 자인데 그 여인에게 모두가 포승으로 묶여서 사망으로 가고 있지만 지적인 능력이 있다는 사람들이 짐승보다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은 비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시고 있습니다.

지금도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차기까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찍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시고 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 하면 영의 일을 그러니까 영의 생명을 우리 안에 거하게 하기 위해서 성령을 보내 주시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이 시대는 성령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성령을 모르다보니까 기독교라는 종교가 만들어 놓은 샤머니즘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모든 것이 실상은 모두가 샤머니즘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종교의 샤머니즘적인 행위를 하면서 그것을 자기들의 육체로 나타내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입니다

그 길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을 얻을 수 있게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하셨는가 하면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해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영이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뿌리가 거룩합니다.

가지도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거룩한 뿌리와 우리가 접붙임이 되어서 우리 가지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생명의 길로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을 보내 주셨습니다.

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셨는가 하면 성령이 아니고는 우리가 거듭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본성을 찍을 수 없습니다. 누가 율법을 지키는 것을 죄라고 하고 있고 율법을 지키는 것을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오직 성령이 오신 성도만이 그것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깊은 것입니다

우리 인생으로는 이것을 도저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반드시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우리 본성을 찍어야 합니다. 그것을 찍지 않고는 우리는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에서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의 길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어느 누구도 찾지 못 합니다 그의 길을 사람이 신학을 공부를 해서 찾을 수 있었다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본성을 따라 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신학을 공부를 하고 평생을 성경을 보면서 산다 해도 하나님께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주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다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어떻게 받는지도 모르고 성경에 성령이라는 단어가 있으니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니까 성령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실상은 성령을 받은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가 성령을 받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를 묻고 있습니다. 비교법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를 해서 받으면 하나를 하면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의 행위를 해서 받으면 듣고 믿어서는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듣고 믿어서 받으면 율법의 행위로는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복음을 듣고 믿어서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면서 성령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반드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고 듣고 믿은 성도만이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진리로 인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듭나는 역사가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오심으로 모든 것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이성으로는 그의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셔서 우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를 하시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셨습니까?

거짓말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스스로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고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그가 모든 진리가운데로 인도를 하셔서 그의 길을 찾을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입으시기 바랍니다.

순종치 아니하심에 갇혀 있는 사람은 아직 긍휼을 입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아직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긍휼을 입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 기독교는 점점 더 순종치 아니하심의 본에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로마서11:34절을 보겠습니다. (25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느뇨

사도 바울은 이제까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로마서를 통해서 아주 자세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혜가 있다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알 수 있습니까?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주의 마음을 알고 있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성경을 성경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 사람의 지혜와 지식을 다 버리고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으로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물론 다 그렇다고 말을 합니다.

그러나 말로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 말로만 그렇게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이런 말씀이 나오면 우리가 주의 말씀을 모른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자기들이 주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디모데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하나님의 마음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하는 모든 행위가 실상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 시대도 우리 이방인들이 충만한 수에 이르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호세아서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인애를 원하시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도리어 제사에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제사에 깊이 빠져 하나님 아는 것을 소홀히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들은 다 자기들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은 겨우 초등학문에 사로 잡혀서 성경에서 문자를 아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의인이 되면 뭐 합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성도라는 말을 들으면 뭐 합니까? 아니 욥과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악에서 떠난 사람이라는 말을 들으면 뭐 합니까? 그런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말에 꿩 잡는 게 매라는 말이 있듯이 영생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주님의 비유에서 말씀하신 한 부자가 된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교회 안에 있는 자기들이 다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로 안타깝기만 합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는 그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을 누가 구원해 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쉬운 방법을 주셨습니다.

누구나 다 순종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달란트에 비유에서 재능을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순종을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순종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다 음녀의 포승에 묶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는 명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그의 명령이 영생인줄 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려면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입어야 하는데 이 시대는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이스라엘도 주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이 있으신 분이라는 것을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하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분인가를 모르고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습니다.

고린도전서2:16절을 보겠습니다. (265)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겠습니까?

이 시대 목사들이 주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들은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의 마음을 안다면 어떻게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상도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가졌습니까?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게 하셨습니다. 또 성령이 오심으로 해서 하나님의 사정을 알게 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이 성령을 받은 자기를 말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오신 성도만이 주의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누가 주님을 대적을 했습니까? 바로 율법주의자인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단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주님을 대적하는 원수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실상은 주님을 대적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가 영생을 받기를 원하십니다.

그것이 주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오셔서 자기 육체로 의문에 쓴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왜 폐하셨는가 하면 그 율법이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을 해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있게 함으로 해서 우리를 저주 받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습니까?

이 문자를 아는 것으로 감성으로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마음을 누가 가졌는가 하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있다가 그러니까 율법주의에 있다가 긍휼을 입은 사도 바울이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주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까?

반드시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가두어 있다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긍휼을 입은 성도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목사들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주의 마음을 아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주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바로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 외에 어느 것도 우리에게 주시지 않습니다. 물론 주님의 부탁으로 우리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받고 있지만 그것으로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직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마음을 가졌기 때문에 이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해서 그들이 성령을 받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들의 안에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주의 마음을 알고 있습니까?

그가 주의 마음을 알고 있다면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고 그것으로 그 가지가 꺾이는데 누가 율법을 지키라고 하겠습니까?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주의 마음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저주입니다

가지가 꺾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든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 주기를 원하고 계시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 갇혀서 긍휼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어떻게 입을 수 있는가를 말씀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는 그들의 눈이 흐려져 도무지 보이지가 않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어떻게 구원을 하시는가 하면 우리 인생의 본성을 찍어 버리시고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심으로 해서 우리가 율법을 지키는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서 긍휼을 입을 수 있게 하셔서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을 거하게 하시고 그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부활을 합니다.

이사야40:13절을 보겠습니다. (1015)

누가 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느뇨

모사, 남을 도와서 일을 되게 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누가 하나님의 모사가 되겠습니까? 우리는 감히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 접근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들이 자기들이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입니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짐승도 그물에 걸리면 그것이 그물이라는 것을 알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인생만은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포승으로 묶여 있으면서도 그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왜 성경에서 우리를 벌레라고 또 짐승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인생입니까?

실상은 짐승보다 더 못 합니다. 짐승은 자기에게 걸려 있는 그물을 인지를 하고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만은 그물에 걸려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것을 더 좋게 여기고 더 깊이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그런 인생들이 짐승과 비교를 해서 자기들이 지식이 있다고 하면서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이 시대는 어떻습니까? 인격이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들이 꽤나 지혜가 있는 것으로 그리고 고상한 인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목사들이 그렇게 배우고 있습니다. 그들이 신학교에서 배우는 조직신학이라는 책을 보면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짐승보다도 못해서 자기가 그물에 걸려 있는 줄도 인지도 못하는 그들이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격이 있다는 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과 같이 대화할 수 있는 지혜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으면서 하나님과 상의를 하면서 자기가 구원을 받겠다고 하는 것이 인격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인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인격으로 이제는 성경을 성경으로도 보지 않고 하나님을 가르치려고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교만합니다.

우리가 무슨 인격이 있습니까? 그것은 동양에서 나온 사상입니다. 사람으로서 됨됨이가 되어 있다는 것이 인격입니다 우리가 무슨 인격이 있습니까? 벌레 같은 내가 지렁이 같은 내가 구더기 같은 내가 무슨 인격이 있다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그들이 교만해져서 도리어 이제는 하나님을 가르치면서 성경도 잘못되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인격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의 실상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 붙잡혀 있으면서도 거기서 빠져 나오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그 여인이 너무 좋아서 그 안에 더 깊이 들어가고 있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인생입니다

그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자기 마음대고 난도질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인격을 자랑하기 위해서 성경을 난도질을 하면서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인격을 가진 자들이 교리를 만들어 놓고서 모든 사람을 사망보다 더 독한 여인에게로 끌어 들이고 있습니다.

누가 그의 모사가 되겠습니까?

성경을 보는 마음을 겸손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모르면 내가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억지로 풀면서 이스라엘과 같이 하나님이 불의하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모르면 차라리 가만히 있는 것이 자기에게도 유익이고 또 다른 사람을 사망으로 끌고 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모사가 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짐승보다 더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성이 있고 지식이 있다고 하지만 미물보다 더 못한 존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이성과 그 지식이 도리어 짐승보다 더 못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생입니다

솔직히 말씀을 드려서 벌레보다 못한 인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아는 성도만이 순종치 아니하는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지식이 우리의 이성이 얼마나 악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겸손하시기 바랍니다.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을 깨달은 성도는 절대로 교만하지 않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 이 복음을 우리가 아주 조금 깨닫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가 아니고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로마서11:35절을 보겠습니다. (256)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누가 먼저 드리셨습니까?

이 시대는 율법주의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얼마나 순종치 아니하는 줄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제사에 깊이 빠져 있으면서도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치 아니하시는 제사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떻습니까?

이 시대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헌금을 드리면서 그들의 마음에 어떤 생각이 있습니까? 자기들이 드린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갚아 주신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까? 누가 이 시대 드리는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이 시대 교인들이 하고 있는 십일조를 하나님께서 받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도리어 그것을 창기의 소득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라고 말씀하면서 가증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하나님께서 받으십니까?

정말 생각의 전환을 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의 생각에 어느 것도 동의를 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의 이성에는 하나님께서 헌금을 받으시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을 받지 않으십니다. 아니 받으실 수 없습니다.

어떻게 받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십일조를 어떻게 받으십니까? 교회에다가 내고 있는 헌금을 왜 하나님이 받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왜 갚아 주신다고 믿고 있습니까?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 줄을 모르고 종교에 의해서 모두가 순종치 아니하는 일만 하고 있습니다.

헌금을 드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돈을 받지도 않고 받으실 수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내고 있는 그 교회가 받아서 자기들 마음대로 쓰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셨습니까? 좀 냉정하게 생각을 하시고 논리적으로 사시기를 바랍니다.

드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제사도 원치 아니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이 드리는 돈을 받으시겠습니까? 그들이 제사로 드리는 그 많은 양과 소에 배가 불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받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종교에 속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우리는 드릴 수도 없고 받지도 않으십니다.

영생입니다

우리가 그런 것을 한다고 해서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을 주님께서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의 빚도 다 갚아 주셨습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인줄 압니까? 지금 시세로 하면 정확하지는 않지만 약 20조가 넘는 금액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십일조입니까?

감사헌금입니까? 십여 가지가 넘는 헌금입니까? 제발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는 가를 깨닫기 바랍니다. 헌금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헌금을 해서 드린다고 하면 그것은 창기의 소득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며 하나님께서 가증히 여기십니다.

저는 직업이 없습니다.

오직 복음을 위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세상에서 일을 하면 당연히 제가 먹고 살 수 있게 해 주셔야 합니다. 제가 호의호식을 하겠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헌금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자를 여러분이 돕고 있는 것입니다 저를 돕는 것을 헌금이라고 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리고 혹시 말씀드립니다.

그것으로 해서 누구라도 실족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제가 돈이 없다고 해서 이 일을 그만두지 않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게 베풀어 주신 긍휼을 알기 때문에 제 형편과 처지에 맞추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그것으로 실족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에베소서5:2절을 보겠습니다. (314)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

히브리서10:10절을 보겠습니다. (363)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드리는 것을 참 좋아하고 있습니다. 헌금만 드리고 있습니까? 예배도 있고 찬양도 올려 드리고 있고 기도도 드리고 있고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행위로 해서 어떻게 하든지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그런 것들을 절대로 받지 않으십니다.

드린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려고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것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께서 무엇이 부족하셔서 우리 죄인의 것을 받으시겠습니까? 더구나 다 썩어 없어지는 것은 받지 않으십니다.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영생을 받을 수 있게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말로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모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하나님께 드려서 구원을 받으려고 했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정말 주님 앞에 온 청년과 같이 무엇을 해서 영생을 얻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그것이 다 배설물과 같다는 것을 알고 다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바리새인으로 있을 때 드린 그것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으로 갚으심을 받을 수 없으니까 그 모든 것을 버린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주께 먼저 드리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그 어떤 것도 주님께 드리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것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도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기의 것을 가지고 주께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 드리려고 하는 그것이 도리어 악이 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의 어느 것도 받지 않으십니다. 구약에서부터 그것을 예표로 가르쳐 주기 위해서 제사 제도를 율법으로 정하셨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것을 받으시기 위해서 율법에 정해 놓으셨습니다.

주님이 드리셨습니다.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먼저 하나님께 드려서 갚으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아무도 그럴 수 없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모르다가 사망에 이르게 되어 있습니다. 거듭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 인생의 지혜라는 것은 미물보다 더 못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인생이 무엇으로 먼저 드리려고 하다가 도리어 그것이 악이 되어서 진노를 받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통해서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영으로 부활을 하게 하셔서 영생으로 갚아 주셨습니다. 만약에 주님이 드리시지 않았다면 주님의 부활은 없었고 그러면 우리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아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갚아 주실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왜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예정을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드리심으로 우리가 믿을 수 있게 하시고 그 믿음을 보고 행한 대로 갚아 주시고 있습니다. 내가 속히 오리니 각 사람에게 그 일한 대로 갚아 주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갚으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 인생은 안 됩니다 우리는 먼저 드릴 것도 없고 갚으심을 받을 것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드린 것이 하나도 없지만 우리에게 믿음을 주시고 역사하셔서 우리에게 영생으로 갚아 주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이 영의 비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는 자들에게 이 시대도 성령을 보내 주셔서 믿음으로 행할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이 믿음의 비밀을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으로 더욱 든든히 서고 있습니다.

갚아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은 없습니다. 우리가 드린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을 수 있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드리시고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갚으심을 받는 이 놀라운 믿음의 비밀을 우리에게 주셔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1:36절을 보겠습니다. (25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그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습니다. 정말 이 구원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만물들을 통해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만물들을 왜 창조를 하셨는가 하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창조를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온 우주의 모든 만물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그것을 왜 지으셨는가 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그 모든 영광을 나타내기 위해서 지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믿고 있습니다. 세상이 그 어떤 말을 한다 해도 우리는 성경을 보고 그 안에서 복음을 보고 믿습니다.

만물을 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복음을 깨닫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 복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이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하심을 깨달은 성도만이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다는 것을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면 우리의 영의 일을 알면 더욱 더 뚜렷하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체만 보고 육만 보고 있다면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으면 이 창조는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인생도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이 모든 만물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경륜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모든 만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만물이 또 주에게로 돌아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보고 있는 이 모든 만물은 성경에 있는 그대로 됩니다. 세상에 과학이 아무리 발달을 해도 그들로서는 이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신 성도만이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과학입니까?

그들이 아무리 발달을 해서 사람이 장수를 하고 또 천년을 산다 해도 깊은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에는 미치지 못 합니다 아니 감히 같이 이야기를 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과학을 따라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성도는 이 복음을 위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지혜가 있으면 뭐 합니까? 아니 그가 세상을 바꿀 지혜와 지식이 있으면 뭐 합니까?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모른다면 그것은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 썩는 것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서 영생을 바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21:5-7절을 보겠습니다. (421)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가라사대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시고 또 내게 말씀하시되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만물이 주에게로 돌아갑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물은 다 사라진다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의 깊은 지혜와 지식의 부유하심을 깨닫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지혜가 있다고 하는 그 유명한 사람들도 그 길을 찾지 못했지만 하나님께서 이 시대 우리에게 이것을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입니다

그분을 위해서 이 모든 것이 존재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분의 형상을 따라 아들들이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을 해서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상상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을 알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물이 주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리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가는데 주님의 말씀대로 되는데 하나님은 가장 자비하셔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셔서 구원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처음 있던 것이 아니라 모든 만물을 새롭게 해서 우리가 그 영광에 참예를 하는 자로 살아가게 하신다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광입니다

새롭게 하신 그 만물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생명수 샘물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유업으로 얻으리라 나는 저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아들입니다

그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놀라운 역사입니다 그리고 만물을 새롭게 해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새롭게 하신 그 만물을 우리가 볼 때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영광이 넘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