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1:2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장성한 분량에 충만한데 까지 이르러 구원을 받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 종교가 얼마나 성행을 하고 있습니까?
종교입니다
정통이라고 하는 기독교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기독교 안에도 수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일반 교인들은 어디가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많은 교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에는 불교도 있고 천주교도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샤머니즘을 따르는 별별 이상한 종교까지 다 들어와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우리가 밖에 나가서 건물을 보시기 바랍니다. 정말 몇 건물에 하나씩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천주교가 있고 불교까지도 이제 선원이라고 하면서 속세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무당집들이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그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어떻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 주변을 보고 우리 가족과 친지를 보아도 모두가 그런 곳에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늘 우리를 생각하는 척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다고 하고 또 세상에서 복을 받을 수 있다고 하면서 온갖 호리는 말로 미혹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자기 대에서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내 부모 때부터 하나님을 믿은 사람은 내 의지와 상관이 없이 아니 내가 생각해 볼 여유도 주지 않고 우리는 교회에 나가게 되었습니다. 교회에 나가서 한번이라도 진리에 대해서 그리고 영생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지 않고 그렇게 신앙생활을 했었습니다.
내 의지입니까?
제가 신앙생활을 한 것은 제 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저 내 부모가 교회에 나가고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까 나도 당연히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따라하게 되어 있었고 어느 새 그것이 마치 내 믿음과 같이 되어서 살았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어떤 이유에서든지 교회라는 곳에 들어가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가 성경을 한번이라도 고민하고 보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누가 가르쳐 주는 것도 아니고 그저 종교라는 그물에 걸려서 나중에는 그것이 마치 당연한 것과 같이 그렇게 매너리즘에 빠져 살아가고 있는 것이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칭찬을 듣습니다.
세상에서는 들을 수 없는 칭찬을 교회는 정말 많이 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특히 여자들은 어떤 직분들을 만들어서 주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그저 아이의 엄마로서 살고 설령 직장을 다닌다 해도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 된 것과 같은 칭찬을 듣게 되면 사람은 거기서 빠져 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독교는 이미 마케팅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한 영혼을 더 구원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교회 안에 끌어들이는 것이 목적입니다 그들의 말로는 한 영혼을 구원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철저한 마케팅에 교인들이 속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교회가 그렇습니다.
얼마나 안 좋은 환경입니까? 초대 교회는 그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종교가 사방에서 그물을 치고 있고 거의 모든 사람이 그 그물에 걸려들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를 하나님께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저는 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내가 받은 은혜가 어떠한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가 종교에 빠져 있는 이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나를 접붙이시는 놀라운 경륜을 이루시고 있습니다. 세상에 그 유명하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이 시대 우리를 그렇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입니다
우리나라만 하더라도 누가 복음을 전했습니까? 누가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로 살아갔습니까? 물론 전혀 없었다고 말을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서로 남겨진 사람들의 글을 보면 아직까지 그런 사람의 글을 못 보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관심이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삶을 살기에도 버거워서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미 기독교라는 종교의 포승에 묶여 있는 사람들을 보면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아니 수십 년간을 자기 삶의 모든 것을 다 바쳐서 올인을 했는데 거기서 빠져 나온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 됩니다.
적습니다.
앞으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런 사회에서 구원을 받을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정말 하나님께서 원 돌감나무에서 찍어 우리를 잘라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시지 않으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 가지를 찍으시면 가능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찍어 내셔야 합니다.
아니 이 시대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것은 단지 우리를 위한 것만은 아니고 우리를 통해서 이 세상에 복음이 전파가 되게 하시고 있습니다. 내 가족에게 그리고 친지에게 그리고 이웃에게 이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내셨습니다.
복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주변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수 있습니다. 내가 복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내 주변에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수 없습니다. 비록 우리의 숫자가 적을지라도 영을 생각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는 것을 안다면 더욱 더 이 복음을 붙들어야 합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선물입니다
그것을 은사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복음을 모를 때는 그것이 이렇게까지 가슴에 와 닫지 않았지만 이제 복음의 깊은 비밀을 깨달으니까 더욱 더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받았습니까?
이 시대 많은 사람이 이 선물을 받았다면 우리에게 이렇게까지 은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사실 다수가 같은 것을 받는다면 그것은 선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똑같은 것을 나누어 주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선물이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적은 숫자가 받았다면 그것은 분명히 고마운 선물입니다
우리가 누구입니까?
정말 저는 이 선물을 생각할 때마다 기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저는 제 자신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이 선물과는 거리가 멀었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저 부모가 교회에 나가라고 하니까 나갔고 나중에는 그것이 습관이 되어서 아니 기독교인으로 사는 것이 옳다고 생각이 되니까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살았습니다.
세상의 이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에서 찍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이 복음의 비밀을 알 수 있게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다시 생각해도 제가 받을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선물입니다
다수가 속해 있는 기독교인들은 이 선물이라는 단어가 그렇게 와 닫지가 않습니다. 이 시대만 해도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천만 명이 구원을 받은 것인데 그것이 어떻게 선물이 되겠습니까? 그것은 절대로 선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로마서6:23절을 보겠습니다. (신 247쪽)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고린도전서12:31절을 보겠습니다. (신 278쪽)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제일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은사를 많은 사람들에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보더라도 아주 지극히 일부의 사람에게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이 영생을 주시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였지만 솔직히 기독교 안에 있을 때는 이 영생이 그렇게 가슴에 와 닫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복음을 깨닫고 나니까 이것이 현실성이 있게 와 닫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정말 히브리서의 말씀과 같이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는 말씀이 깨달아지고 있습니다. 이 믿음이 없을 때는 막연하게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마치 실상과 같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이 영생의 열매를 맺게 하시고 있습니다.
누가 본성을 거스리고 있습니까?
세상에서 가장 지혜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본성을 거스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누구라도 이 본성을 거스리는 순간 사회로부터 그리고 교회로부터 지탄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것을 거스리게 하시고 좋은 열매, 영생을 얻는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믿음으로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의 로마서입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을 여러 가지로 비유로 해서 우리에게 그것을 지켜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1장에 와서는 자기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긴다고 하면서 우리 이방인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원 돌감람나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찍어 버리셨습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 하셨습니다. 그 본성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것에서 찍어서 우리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게 하시고 믿음으로 영생을 얻게 하시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사실 이 영생은 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 시대 대형교회에서는 병을 고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암병이 고쳐졌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찬양을 하면서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기적입니까? 우리 성도들에게는 그것은 너무도 하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깟 암병이 고쳐지는 것을 가지고 무슨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이 시대는 교회에만 나오면 마치 모두가 하나님의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사가 아주 싼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우리에게 있는 믿음을 싸구려 취급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생을 얻는 성도는 이 선물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물입니다
이 선물이 너무 커서 초대 교회에 성도들은 이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순교까지 당 했습니다 자기 생명을 잃으면서 까지도 이 선물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겨우 암병을 고쳤다고 하면서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대단한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자랑하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얼마나 큰 은사입니까? 그런데 이 영생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영생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이 영생을 전하기 위해서 얼마나 수고를 했는가를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입니다
그 영생을 어떻게 받습니까? 그것을 요한복음에서 영생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얻게 하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회에 삼년을 밤낮으로 훈계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영생을 얻었습니까? 저는 절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선은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임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인들은 본성을 거스리기보다는 본성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에게는 좋은 열매가 맺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선물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찍어 주셔야 합니다.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주셔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셔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성경에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알아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9:15절을 보겠습니다. (신 295쪽)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입니다
우리 성도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사를 이 시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주시고 있습니다. 누가 성경에서 복음을 깨달아서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기독교가 진리를 전했다면 이 말씀이 그렇게 와 닫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복음이 계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본성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 본성을 따라 이제까지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평생을 그렇게 본성을 따라 살다가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인생들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저나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성도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실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우리 주변을 보아도 그렇고 우리의 이성을 따라도 그렇고 정말 진노를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인생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본성을 거스르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이 시대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다른 사람보다 하나님을 더 사모했습니까? 제가 영생에 대해서 정말 간절한 마음을 가졌습니까? 제가 진리를 알기 위해서 남들보다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제가 받은 영생이 말할 수 없는 은사라고 믿고 있습니다.
표적을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영생을 바라보고 사는 성도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그들의 종교의식에 따라 드리는 예배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고 기도를 하고 헌금을 하는 그들은 이 은사를 절대로 받을 수 없습니다. 아니 이 은사에 대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려고 거기서 찍어 내셨습니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은 것은 정말 사도 바울의 말씀과 같이 말할 수 없는 은사를 받은 것입니다 이 복음을 우리가 세상에 전해보지만 그들이 받아들입니까? 사람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아니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게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말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가 받은 영생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이 받는 영생이 어떤 것인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영광스럽고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전혀 모르고 막연하게 영생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고 받지도 않은 영생을 가지고 감사하다는 것을 마음껏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보시기 바랍니다.
실체도 없는 것을 가지고 그렇게 감사하고 있고 기쁨이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도 없는 그들이 그렇게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더구나 영의 비밀도 모르고 신체의 부활을 주장하는 그들이 더욱 감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신체의 부활은 사실 그렇게 영광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았는가를 다 알고 있다면 그것은 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영생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은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신체의 부활이 아닙니다. 죄를 짓고 연약한 우리 신체는 죽으면 그것으로 썩어 없어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오실 때 거룩한 그 영이 부활을 해서 하나님의 아들들로 살아가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체의 영생입니다
그리고 영의 영생입니다 물론 율법주의자들은 신체의 부활을 더 좋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산 그것이 선하고 의롭다고 생각하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모든 것이 얼마나 더럽고 냄새가 나는 것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신체의 부활을 인정할 수 없습니다.
영생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누가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저 역시도 어떻게 이 영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심으로 말미암아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고 하면서 우리에게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영생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우리가 어떠한 선물을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가 은사를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내가 어떠한 은사를 받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구원입니다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며 그저 감사만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실 이 은사를 우리가 아무리 전하려고 해도 사람들의 이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했기 때문에 이 은사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 수 있고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사에 감사가 넘치고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4:7절을 보겠습니다. (신 331쪽)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왜 부르셨는가 하면 영생을 주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거룩하게 해서 영생을 받게 하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거룩입니다.
우리 육체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성경을 보고 이 거룩이라는 말씀을 오해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함을 입었다고 하니까 마치 우리 육체가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아니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기들이 거룩함을 입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을 위해서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마치 우리 육체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만약에 육체가 거룩해지면 우리는 죽어서도 안 되고 또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것과 같이 신체의 부활이 맞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심은 우리 신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그 영이 거룩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합니다. 우리를 접붙이시는 것은 우리 육체를 접붙인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의 일을 우리가 깨달을 수 있게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접붙이는 것과 같이 하여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룩한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심으로 말미암아 거룩케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거듭남입니다.
이 시대 이 거듭남에 대해서 말로 미혹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거듭나는 것을 모르면서도 말 장난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거듭났으면 반드시 결과가 나타나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말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거듭났습니까?
그리고 내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경건치 않은 것을 돌이켜야 합니다. 그리고 저희 죄가 없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서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다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를 거룩케 하시기 위해서 부르셨습니다.
우리 신체를 거룩하게 하기 위해서 부르신 것이 아니라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영으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거룩하시니까 그 가지에 붙어 진액을 먹고 있는 우리의 영도 거룩하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부르심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왜 부르셨는가를 모른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의 문자를 알고 막연하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다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자기 신체를 보고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신체는 절대로 거룩해 질 수 없습니다. 거룩해지지도 않은 것을 보고 부르셨다고 하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부르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셨습니까? 반드시 거룩해져야 합니다. 만약에 거룩함을 얻지 못한다면 그는 하나님이 부르신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무엇이 거룩한지도 모르고 자기의 신체를 보고 부르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 안에 생명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있어야 부르신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은사가 내 안에 있지 않으면서 부르셨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전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기를 왜 부르셨는지도 모르고 있고 그리고 부르셨으면 어떠한 결과가 있어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다면 그는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망하는 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를 거룩하게 하십니다.
우리라고 하니까 신체를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신체의 내가 있고 그리스도의 영으로의 내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내가 거듭난 생명이고 또 그 영이 거룩하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막연하게 나를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런 막연함을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의 언어는 아주 추상적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언어를 쓰다보니까 사람들은 더욱 더 막연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왜 한국에 기독교인이 많습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의 덕도 있는 것 같습니다. 추상적인 언어를 자주 사용하다보니까 성경을 보면서도 그렇게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하면 그 은사가 무엇이고 그 은사를 어떻게 얻어야 하고 또 부르셨으면 그 결과가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가를 성경에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믿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세상을 살아보아서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서 그 사람을 정말 믿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사기를 치고 당하게 되는 것이 세상입니다 자기 딴에는 그를 정말 바로 안다고 했는데 나중에 보면 속은 자신을 보게 됩니다.
믿음입니다.
반드시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이 됩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소년이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으로 자기들이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신체는 안 됩니다
반드시 거룩하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그 뿌리가 어떻게 거룩하신 줄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뿌리부터 신체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으로 거룩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는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그 육체는 없어졌습니다. 주님께서는 영으로 부활을 하셨는데 그 영이 거룩하십니다. 그리고 그 영에 우리 가지를 접붙이셔서 우리 가지에 그의 영이 거하심으로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잘 이해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 후회심이 없다는 말씀이지 다른 것에게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구원하시고 난 후에 우리 안에 거룩하신 이의 영이 거하시는 것에 대해서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사무엘상15:35절을 보겠습니다. (구 433쪽)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다시 가서 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보고 하나님도 후회를 하시는데 왜 로마서에서는 후회하심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느냐고 생각할 사람도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일관성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서는 이 말씀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씀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바로 보아야 합니다.
문자로 후회라는 단어만 보고 이야기를 하는 것은 스스로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후회라는 단어가 나오더라도 그 의미를 알면 충분히 깨달을 수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지식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문자에 스스로 걸림이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울 왕입니다
누가 이 왕을 세웠습니까? 하나님께서 먼저 왕을 세우시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주변 강대국들을 보니까 왕이 있고 그 왕이 백성들을 지켜주는 것을 보면서 사무엘에게 가서 우리도 왕이 필요하니까 왕을 세워달라고 이야기를 하고 사무엘이 그것이 싫었지만 하나님께 기도를 하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을 세우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예표입니다
우리는 후회라는 단어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사울 왕은 여러 가지를 예표를 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사단을 예표 하는 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울 왕을 사무엘을 통해서 기름을 붓게 하시고 이제 그를 폐하시고 또 다른 왕 다윗 왕에게 기름을 붓게 하셔서 그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시고 있습니다.
사울 왕입니다
그는 처음부터 사단을 예표하는 왕으로 세움을 입었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세우신 왕이 아니라 백성이 원해서 하나님께서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사무엘을 통해서 아멜렉을 진멸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멜렉이 무엇입니까?
비유입니다
아멜렉은 우리의 혈과 정입니다 나라를 보더라도 그 나라가 무엇을 비유로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사울은 충분히 아멜렉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고 좋은 것은 남겨 두어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멜렉입니다.
사울은 사단을 예표하는 왕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사단이 있으면 절대로 아멜렉을 진멸하지 못 합니다 그 아멜렉이 무엇인가 하면 우리의 혈과 정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시대 지키고 있는 율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왕을 세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멜렉을 진멸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주셨습니다. 그 믿음은 야고보서의 말씀과 같이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런데 혈과 정 때문에 이제까지 자기들이 지켜왔던 그러니까 형제와 같은 율법을 버리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단 한번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똑같이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왕 같은 제사장으로 삼으셔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육체의 정와 혈을 끊지 못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십니다. 왜 후회를 하시는가 하면 차라리 왕을 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후회를 하십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사단에게 미혹을 당한 자가 있습니다. 마치 사울 왕과 같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충분히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재능을 주셨는데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예표입니다
하나님은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을 통해서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셨다면 당연히 은사를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습니다. 이렇게 영생을 얻고 거룩하게 하신 성도에게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울입니다
그는 분명히 아멜렉을 진멸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탈취를 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재물을 탈취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물론 사울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지만 예표의 의미로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것을 후회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표의 의미입니다
그런 사람을 후회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잘못하셨다는 뜻보다는 사울이 잘못했다는 것을 말씀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만약에 사울이 다윗과 같은 왕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절대로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통해서 사단을 예표하는 왕으로 보여주시면서 후회라는 단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입니다
사울 왕은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는 아멜렉을 진멸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아 거룩하신 이의 영이 있는 성도는 이미 아멜렉을 진멸을 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충분히 말씀을 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영생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거룩하신 이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를 그러니까 그의 영이 거하시게 하는 역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왜 후회하심이 없는가 하면 우리의 구원은 신체가 아니라 영의 구원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의 부르심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부르심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거룩하게 되었습니까? 우리의 신체가 아닙니다.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그 가지는 원래는 본성을 따라 사는 돌감람나무에 있는 가지인데 그것을 찍어서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셔서 우리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접붙임이 되어서 우리에게 영생의 은사를 주신 것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신 것이 아니라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정말 신비롭고 비밀스러운 일입니다 그것은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게 하시고 그 영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부활을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미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힘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찍으셨습니다.
우리가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찍으시고 우리를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영생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하시고 그 영을 거룩하신 이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이 영이 잘못 될 수 있습니까? 이 영이 타락을 할 수 있습니까? 이 영이 한번 거하면 다시 죽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하신 이의 영을 주신 것을 후회를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은 정말 비밀이기 때문에 절대로 그럴 가능성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영의 비밀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체의 구원을 주장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후회를 하실 것과 같은 생각이 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 영의 비밀을 알면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성경을 문자적으로 알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이라는 말씀은 영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하셔서 천국에 들어가셨다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말씀은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왜 후회하심이 없습니까?
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육체를 따라 그것이 변할 수 있다면 분명히 사울을 왕으로 삼으신 것을 후회하신 것과 같이 후회하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거룩하게 하신 것은 후회하심이 없게 하기 위해서 우리의 신체가 아니라 영으로 하셨습니다.
영생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영생을 모르고 있습니다. 불교에 있는 사람과 같이 신체의 부활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썩어 없어지는 것이지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그것이 영생을 얻는다면 성경은 뒤죽박죽이 되고 말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부활을 하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만이 한 영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게 됩니다.
요한일서5: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93쪽)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서 나신 자가 저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저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온 이스라엘입니다
저희 죄를 없이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죄를 짓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거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는 가장 기초가 바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영생을 주시고 있습니다.
반드시 죄가 없어야 구원을 주십니다. 그런데 구원을 주시고 거룩하심으로 부르셨는데 그가 다시 죄를 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이 볼 때는 그럴 수 있습니다. 어느 사람은 복음을 잘 듣고 따라오다가도 다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실제 그렇습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제를 잘하다가도 보면 다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보면 하나님께서 후회하심이 없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죄를 없이하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그 사람도 한동안은 율법을 지키지 않고 정말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면서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실제 교회 안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많이 있습니다.
앞으로도 여기 그리스도편지에 와서 예배를 하고 주의 만찬을 나눌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처음에는 정말 하나님의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과 같이 보입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의 구원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마음에 있습니다. 잠시 율법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고 해서 그에게 거룩하신 이의 영이 있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을 의심하라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도 그런 사람이 있더라도 그 사람의 믿음을 의심하지 않고 싶습니다. 자칫 한 사람을 의심을 하다가 그 영혼을 실족하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의심하지 않고 싶습니다.
그러나 있습니다.
육적인 모습으로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 영혼이 실족을 해서 다시 구원이 취소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잠시 그렇게 보였지만 실상은 그는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성도는 절대로 그렇지가 않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입니다 우리 육체가 그렇다는 것이 아니라 접붙임을 당해서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그러한 것과 같이 우리의 영이 그렇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뿌리로부터 가지가 거룩한 영이 있는 성도는 범죄를 하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까?
반드시 범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어떤 범죄를 하지 않아야 하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거절하는 율법을 지키는 범죄를 하지 않습니다.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그가 다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께로서 난 자가 아닙니다. 단지 그의 육체가 잠시 그렇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로 난 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아버지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겠습니까? 어느 아버지가 자기 아들이 죽는 것을 그냥 두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는데 왜 없는가 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지키셔서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단입니까?
그가 아무리 강하다 해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키시면 우리는 범죄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죄를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이제 접붙임이 되어서 더 이상 본성을 따라 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도입니다
내가 하나님께서로 난 자인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가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아담으로부터 난 자는 본성을 따라 율법을 지키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원 돌감람나무에서 찍어서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열매를 맺는 감람나무에 접붙이셨기 때문에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왜 후회하심이 없습니까?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게 지키시기 때문에 후회하시지 않습니다. 사단이 아무리 강하더라도 하나님을 이길 수는 없습니다. 성경에 이미 그 싸움에서 이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단은 살아 있지만 싸움에서 졌기 때문에 죽은 자나 마찬가지입니다
더 이상 우리 성도를 만질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가 율법을 지키게 미혹을 할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는 누가 하나님께로서 난 자인 줄도 모르고 그저 교회 안에만 있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내가 아버지라고 부른다 해서 아버지가 아니라 반드시 아버지가 낳아야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기독교인들입니다.
성경은 볼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성을 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며 하나님은 무조건 자기들의 아버지가 되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거룩한 자가 되려면 육체로는 안 되고 영으로 되어야 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심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거룩하심을 입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거룩하려면 그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이 영의 비밀을 모르고 자기 육체로 거룩하게 하려고 하다가 도리어 본성을 따르는 율법을 지키다가 사망에 이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절대 다수의 사람입니다
누구를 지켜주십니까?
우리 육체가 하나님께로서 났습니까? 우리 육체는 아담으로부터 났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 육체를 지켜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에 우리 육체를 지켜주시는 것이 맞는다면 초대 교회에 순교한 성도들은 버림을 받은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가 지키십니다.
누구를 지키시는가 하면 하나님께로서 난 자를 지켜 주십니다. 자기 육체를 가지고 하나님께로서 난 자라고 하는 사람은 성경을 모르는 정말로 무지한 사람입니다 우리 육체는 우리 부모에 의해서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아담의 자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거듭남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거듭남을 말씀하고 있고 주님께서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거듭남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아니 그 단어는 잘 알고 있지만 어떻게 거듭나는 것인 줄도 모르고 있고 영에 대한 비밀도 전혀 모르고 거듭났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제도 목사 한 사람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기가 거듭났다고 하면서 이 시대 거듭난 성도가 없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 사이트를 가르쳐 주었는데 글을 하나 보내왔습니다. 그 목사가 거듭났다고 하는 것은 순전히 말장난에 불과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서 겨우 회개를 가지고 어떻게 회개를 해야 하는 것으로 자기가 거듭났다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듭났습니까?
한 가지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범죄하지 않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거듭남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는 그 목사가 율법을 지키고 있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 목사는 성경을 전체적으로 못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귀의 자식들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그들을 마귀의 자식이라고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마귀를 너무 단순하게 알고 있습니다. 마귀는 도덕적인 죄를 짓게 하는 존재로만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는 세상 사람도 알고 있고 나쁜 짓을 하면 마귀 짓을 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모두를 율법주의로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죄를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죄를 깨닫지를 못하니까 도리어 그 율법을 지키는 일에 열심을 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이 시대도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성을 자극해서 그 본성에 따라 살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감동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은사입니다
그리고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서 난 영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이며 그 영을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범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율법을 지키는 범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로마서11:3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5쪽)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는지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육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입니다 교회에 내 육체가 나와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하고 찬송가를 부르고 헌금을 하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서 부르셨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부르심이 무엇인가 하면 돌감람나무 가지에 있던 우리를 찍어 본성을 거스리는 좋은 감람나무에 접붙이신 것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이 접붙임 자체도 육의 일로 생각을 하고 자기들이 교회 안에 있는 것으로 마치 접붙임이 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 육체가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이 있어야 접붙임이 되었고 그 영이 뿌리가 거룩한즉 가지도 거룩합니다.
우리 이방입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라고 하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는 순종치 않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회를 보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살아가고 있습니까?
다 사람의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본성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접붙임이 된 사람이 아닌데도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소경이 되어서 이 영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겨우 교회에 나온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순종이 무엇입니까?
육의 일이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께 순종을 했다면 그의 은사가 있어야 하고 부르심을 따라 거룩한 영이 내 안에 있어야 합니다. 이런 영의 일을 모르고 교회 안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께 순종한다고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의 문자를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 다 미혹이 되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제가 성경 자체를 판단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가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혜가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성경을 보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악을 행하다가 진노를 받고 있다는 것을 또한 알아야 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들에게 이 서신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때 시대와 지금의 시대가 같다고 보면 맞습니다. 성경을 정말 깊이 생각하면서 보아야지 문자만 보아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로마에 있는 사람들은 이방인이고 그들은 하나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영생입니다
그들은 이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에 복음을 전하지 않아서 이방인들은 복음을 들을 수도 없었고 믿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 이방인에게 영생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너희가 전에 하나님께 순종치 아니하더니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으로 이제 긍휼을 입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입니다
그들은 순종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에게 복음이 안전해졌다는 것도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우주를 창조하실 때부터 사람들이 더듬어서 하나님이 계신 것을 알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릅니까?
우리는 정말 바로 알아야 합니다. 물론 솔로몬 시대에 스바 여왕이 왔다 갔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습니까?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내시가 또 다시 찾아왔습니다.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다 핑계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지금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물론 로마 시대는 또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시대에 사도들을 통해서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지만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습니다. 설령 사도들이 전하지 않았어도 사람은 본성에는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3:36절을 보겠습니다. (신 147쪽)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너희가 전에는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제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늘 말씀을 드립니다. 세상 사람은 죄인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의인과 악인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은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에서 주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것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을 순종치 않는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의 순종치 아니함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순종치 아니함이 있습니다. 이방인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도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방인이 순종치 아니한 것은 세상에서 죄인으로 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이고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한 것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이 둘은 다릅니다.
누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사람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니라 실상은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고 있는 사람이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어떻게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까?
그것을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구원을 받지 못해서 순종치 아니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이방인들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과 뒤에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의 것임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방인들 역시 이 세상에서 법에 의해서 본성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예 하나님을 안 믿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은 모두가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어떻습니까? 노아 시대 이전에 다른 신이 있고 다른 종교가 있었습니까? 노아 홍수가 있은 후에 언어가 달라지고 난 후에 다른 종교가 생겨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언어가 하나일 때입니다
그때는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우리 사람은 하나님을 더듬어서 찾게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찾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노를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선물인가를 우리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알 수 있습니다. 그 구원을 사도 바울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 구원이 얼마나 큰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구원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너희가 전에는 순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음으로 해서 이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게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만약에 그들이 순종을 해서 그 가지 얼마가 꺾이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는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지 않았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리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예표와 그림자가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안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고 또 더욱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예정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처음부터 이스라엘은 순종치 않게 이 모든 복음의 비밀을 감추어 두셨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지혜가 있는 백성입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 주시지 않았는가를 사도 바울이 이방인의 사도로서 이 직분을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하면서 지금까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그것은 이스라엘이 아니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이방인들을 보더라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민족이 복음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까? 유럽을 거쳐 아메리카 대륙을 통해서 이제는 아시아까지 복음이 전파가 되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입니까?
그렇게 많은 언어로 성경이 번역이 되어서 전해지고 있지만 이 복음에 순종하는 민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순종치 아니하였어도 자기들은 다 순종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렇게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입니다. 우리 이방인이 순종을 했습니까? 이미 아브라함의 때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의 시간이 지났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이스라엘보다 더 순종치 아니하면서도 그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긍휼을 입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음으로 해서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이방인과 초대 교회의 이방인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이 처음 전해졌고 이 시대 이방인들은 이미 20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상은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히브리서4:10-11절을 보겠습니다. (신 356쪽)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 일을 쉬심과 같이 자기 일을 쉬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저 안식에 들어가기를 힘쓸지니 이는 누구든지 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마태복음19:16절을 보겠습니다. (신 32쪽)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가로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이스라엘은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이 시대는 순종을 하는 것이 무엇인지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순종을 한다고 하는 그들이 도리어 순종치 아니하는 일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처음부터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율법을 반포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우리가 이 모든 말씀을 준행을 하겠다고 대답을 하고 언약까지 했습니다. 사실 그것은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어느 누구라도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나서 율법을 받으면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게 해 준다고 하면 다 그렇게 대답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이방인들도 성경만 보고도 율법을 지키고 있지 않습니까?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제 안식에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고 하면서 또 일을 만들어서 주일이라는 날을 지키면서 그 날에 하나님께 거룩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쉬라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안식일이 변해서 주일이 되었다는 주장을 하면서 쉬지를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 일입니다
안식에 들어간 자는 자기 일을 쉽니다.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아직까지도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자기 일을 하고 있습니까? 이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하면서 자기 생각을 가지고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안식에 들어간 자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지킬 이유가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구원을 과거형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앞으로 받을 구원이라면 우리는 쉬지 못 합니다 그러나 이미 구원을 받은 성도는 이제 쉴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 안입니다
안식에 들어가 쉬는 성도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일이 무엇인가 하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십계명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히브리서에서는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졌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이 살아 있습니까?
그래서 이 시대에도 지켜야 합니까? 그는 아직까지 영생을 위해서 자기 일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누군가 하면 이 부자 청년과 같이 지금도 교회에 나와서 하나님 앞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계속해서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분명히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어서 성도로서 지킨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일이라고 하면 일입니다 그리고 성경이 그것을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진 것이라고 말씀을 하면 그런 것입니다
이 청년입니다
내가 무슨 일을 하여야 하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는 안식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 청년과 같이 자기들이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십계명을 문자적으로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안식에 들어가면 이제 일을 하지 않고 쉰다고 말씀을 하는데 쉬지를 못하고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일이 아닙니까?
감사하는 마음으로 십계명을 지키고 있습니까? 성경이 일이라고 하면 일입니다. 그것을 이상하게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그 일도 하지 말고 안식에 들어가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 역시 주님 앞에 나온 청년과 같이 십계명을 지킨다고 하면서 열심히 일을 하고 있습니다.
순종치 아니하는 본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는 아직 안식에 들어가지 못해서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제가 주일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행위라고 하면 아마도 기독교인들은 그럼 예배는 언제 드리냐고 따질 사람이 있습니다.
예배가 걱정입니까?
제가 예배를 하지 말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고 계십니다. 제가 이 말씀을 몰라서 주일을 지키는 것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진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스라엘의 이 청년이 그 일을 하다가 주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하니까 근심하면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율법 쉬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어느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이미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 있는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교회 안에서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그는 이 청년과 같이 이미 근심하며 돌아간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히브리서3:18절을 보겠습니다. (신 356쪽)
“또 하나님이 누구에게 맹세하사 그의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셨느뇨 곧 순종치 아니하던 자에게가 아니냐 이로 보건대 저희가 믿지 아니하므로 능히 들어가지 못한 것이라“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미 안식에 들어갔습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일을 하지 않아도 되고 성경이 우리에게 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쉬라고 했으면 쉬는 것이 순종하는 것임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믿음입니까?
그런 이상한 이야기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진 것을 율법을 지키는 일을 믿음이라고 말씀합니까? 히브리서에서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을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이로 보건데 저희가 믿지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왜 버림을 받았습니까?
순종치 아니해서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 순종치 아니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순종치 아니하는 행위가 무엇인가 하면 안식에 들어가서 쉬지 않고 일을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이 율법을 지키는 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일을 믿음으로 지킵니까?
십일조를 믿음으로 드리고 있습니까? 성경 어디에 그것을 믿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사단은 성경에 없는 말을 만들어서 마치 있는 것과 같이 교인들을 세뇌를 시키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함으로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데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순종입니까?
초등학문에서 벗어나시기 바랍니다. 성경은 율법을 안 지키는 것이 순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초대 교회 때 이스라엘이 얼마나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성경을 보고도 모릅니까? 사도 바울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이스라엘에게 순종치 않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방의 교회가 그대로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으로 해서 우리 이방인들이 긍휼을 입었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지나자마자 이방의 교회도 역시 이스라엘과 같이 순종치 아니하는 본에 빠져서 긍휼을 입지 못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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