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0:19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뇨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 주셔서 이 땅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먼저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듣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안 보내신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이 듣지를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하다는 말씀으로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더 귀한데 하나님께서 왜 온 땅에 복음을 전파하시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육의 사람이 되어 있는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영이시라는 것조차 모르고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육의 일입니다
그리고 영의 일입니다 성경을 어떻게 보는가에 따라 전혀 다른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이 육의 말씀으로 보면 거의 모든 성경은 육의 말씀으로 보여 지게 되어 있고 영의 말씀으로 보면 또 그 성경이 영의 일에 대한 말씀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노아의 홍수 때와 마찬가지로 이스라엘은 모두가 육체가 되었습니다.
육의 말씀으로 성경을 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부지런하게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지만 그 말씀을 듣고도 도리어 육의 말씀으로 만들었습니다. 분명히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온 땅에 복음을 전파를 하셨지만 이스라엘은 복음을 듣고도 무슨 말씀인가를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출애굽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종살이 하는 애굽에서 인도하셨습니다. 그리고 광야라는 교회에서 이스라엘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복음을 들은 것이 아니라 육의 말씀으로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하늘에 있는 모형과 그림자로 보여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것을 사람의 이성으로 보고 있었습니다.
저희가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이 몇이나 되었습니까?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다 들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그들에게는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성경을 통해서 다 듣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오랜만에 기독교 방송을 아주 잠깐 보았습니다.
유명한 목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기 전에 아브라함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는 의인 50명이 있어도 이 성을 멸하시겠느냐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멸하시지 않겠다고 하자 10명까지 이야기를 하고 이제 물러가는 내용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마치 세상을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교회를 예표로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그 소돔과 고모라에 의인 열 명이 없어서 멸망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또 예레미야 시대에 바벨론에 멸망을 당할 때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찾는 자가 한 사람이 있으면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입니다.
그렇게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그것이 이 시대 자기들의 교회라는 것은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그렇게 설교를 하는 그 목사가 소돔과 고모라와 그리고 바벨론에 멸망당하는 남 유다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것이 자기들의 예표라는 것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문자 그대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무엇을 예표하고 또 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 시대 세상이 성적으로 타락을 하고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하나님께서 멸망을 시켜야 하는데 그래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어서 이 나라가 멸망을 당하지 않는 것으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멸망입니다.
바벨론의 포로가 되어 갈 때 예루살렘에는 공의를 구하고 진리를 찾는 자가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에서 보고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은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전하고 있지만 그 안에서 복음을 전혀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공의를 구하고 있습니까?
그들이 진리를 찾고 있습니까? 그들이 소돔과 고모라와 같이 여자가 순리로 쓸 것을 버리고 역리로 쓰고 있고 남자와 남자로 더불어서 부끄러운 짓을 하고 있으면서도 성경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남의 일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이 안 전해지고 있습니까?
이 시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 그 성경 안에는 복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들이 복음을 전혀 못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여자가 되어서 순리로 써야 하는 것을 역리로 쓰면서 율법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음란에 빠져 있으면서도 성경에서 복음을 못 보니까 사망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문자를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복음을 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기독교가 되어 버린 종교는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성경이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시대입니다
성경도 자기들이 보고 싶은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목사들은 교인들이 복음을 듣는 것을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어느 대형교회는 전혀 다른 성경을 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복음이 전해지지도 않고 있고 교인들은 목사들이 하는 말이 마치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생각이 되어서 맹목적으로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보다 더 안 좋습니다.
그래도 그때는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심으로 말미암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모든 사람이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끌려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모두가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모두가 종교에 빠져 있습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경계를 하는 말씀이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아주 잘 믿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안 봅니다
성경을 보면 뭐 합니까? 이미 세상 지식으로 가득 차 있는 상태에서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 목사들은 성경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장식에 불과하고 자기들의 종교를 위해서 필요한 것에 불과하고 세상의 이성을 따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내가 다시 묻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습니까?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먼저 모세를 통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내 백성이 아닌 사람들로 너희의 질투심을 일으키고, 미련한 백성들로 너희의 분노를 자아내겠다."”
다시 묻습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어떻게 했는가를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예표로 해서 너희도 똑같은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경계로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에게만 하고 있는 말씀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에게서 일어났던 일들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서 똑같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성경을 보고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스라엘의 일로만 치부를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이스라엘이 말을 했던 것과 같이 똑같은 말을 이 시대도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23:29절을 보겠습니다. (신 40쪽)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며 가로되 만일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더면 우리는 저희가 선지자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아니하였으리라 하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이스라엘도 성경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씀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현재진행형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였습니다. 당시에는 선지자들을 백성들이 죽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난 후에 그가 선지자라는 것을 아니까 백성이 그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우리가 조상 때에 있었으면 자기 조상들이 선지자들의 피를 흘리는데 참여하지 않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선지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가장 악한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자기 조상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를 죽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그 조상들과 다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고 있으면서 자기들은 그런 일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보고 이 말씀을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있는 거의 모든 말씀을 문자적으로 다 알고 있습니다.
모릅니까?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민 이스라엘이 자기들은 조상들과 같이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역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자기들은 이스라엘과 같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이스라엘이 했던 모든 악한 일을 교회 안에서 다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상 숭배하지 말라는 말씀을 안 들었습니까?
성경에서 이스라엘이 어떻게 우상을 숭배했는가를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성경을 한두 번이라도 읽은 사람은 누구나 다 알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자마자 바알과 아세라를 섬김으로 해서 하나님께서 이방을 들어 이스라엘을 치게 하셨습니다.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을 보내실 때마다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똑같은 이야기를 할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이스라엘과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비록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어도 우리는 절대로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상은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은 우상을 섬겼어도 우리는 우상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는 그들이 어떻습니까? 아마도 그럴 것입니다 우리가 애굽에서 가나안으로 인도함을 받은 백성이라면 우리는 절대로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주 자신 있게 말을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교회 안에 수많은 우상들을 세우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알지 못했다면 자기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인 그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지 않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자기 조상들이 잘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으니까 자기 조상들이 죽인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면서 우리가 그때 있었으면 우리는 선지자들을 죽이는 일에 참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내리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늘 그 당시에 사람들은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선지자들을 죽였고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고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모셔 내리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습니까?
그들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의인들을 죽인 것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조상들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또 자기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고 있습니다.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을 보면서도 지혜를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자기들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로마서9장과 10장의 말씀은 사람들이 성경을 안 보고 있는 것에 대해서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이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는 것과 비석을 세우는 것과 같은 일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미 성경에 다 기록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경을 보고도 자기 조상들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더 악한 일을 했습니다. 역시 이 시대도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신명기32:21절을 보겠습니다. (구 314쪽)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자로 나의 질투를 일으키며 그들의 허무한 것으로 나의 진노를 격발하였으니 나도 백성이 되지 아니한 자로 그들의 시기가 나게 하며 우준한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격발하리로다”
모세의 예언입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앞으로 있을 일들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미리 아시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홀히 여길지를 아시고 모세로 하여금 이 말씀을 하게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이 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할 것을 들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신명기에서 말씀하신 것을 다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 아닌 자로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허무한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무엇으로 하나님을 질투하게 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들이 바알과 아세라를 섬김으로 해서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했습니다. 그것을 이 시대 교인들이 성경을 보고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이 어떻게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바알과 아세라가 그대로 교회 안에 들어와 있고 자기들이 만든 삼위일체의 신을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자입니다
이 시대는 거의 모든 교회가 성령을 성령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 하나님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이 아무리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이라 해도 하나님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송아지를 각을 떠서 만든 것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으로 진노를 하게하고 있습니다.
허무한 것이 무엇입니까? 잠언에서 악인의 삯이 허무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들었지만 이렇게 허무한 것으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들었습니다. 그 허무한 것이 악인의 삯인데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이 지킨 율법의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허무합니다.
사람이 지키는 율법이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바람에 날리는 티끌과 같습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허무한 것으로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이스라엘이 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교회가 있습니까? 악인은 율법을 지키는 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허무한 삯이 되어서 사라지고 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세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은 모두가 악인이 되어서 허무한 삯을 위해서 일을 했습니다.
성경입니다
이 시대는 왜 성경을 보는지를 전혀 모르겠습니다. 그저 문자를 아는 것으로 마치 자기들이 복음을 듣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그들이 어떻게 할 것인가를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주님이 오셨을 때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 조상들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진노를 받습니다.
그들이 성경을 안 보아서 진노를 받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성경을 보고 진노를 받을 일을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역시 성경을 잘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같이 진노를 받을 일을 하면서 율법을 지키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진노를 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시작하면서 진노를 쌓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이스라엘이 자기 조상들이 그렇게 했다고 하는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잘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알지 못 했습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알지 못 했습니까? 다 알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 다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 기록이 되어도 그것이 남의 일로만 치부가 되고 있고 자기들의 일로는 생각이 안 되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일이 아니니까 그런 일을 하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했습니다. 그런 이스라엘에게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 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 그대로 백성 아닌 자로 시기를 하게 하셨습니다.
사도행전13:45절을 보겠습니다. (신 211쪽)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습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하자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하던 너희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하니까 이 말씀을 듣고 이방인들이 많이 믿었습니다. 그러자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비방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질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리고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함으로 진노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율법 외에 한 의를 나타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모세의 율법으로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는 우리에게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셨습니다. 이방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유대인들이 시기가 나서 사도 바울의 말을 비방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들이 시기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지키는 율법이 의로운 것이 아니라 허무한 것이라고 말씀을 하니까 시기하고 비방을 했습니다. 사실 사람의 이성에는 누가 말하는 것이 허무하게 들려집니까? 사람의 이성에는 사도 바울이 말씀하는 것이 허무하게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에 있어서는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허무한 삯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 미리 말씀을 하셨습니다.
듣지 못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이스라엘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을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서도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렇습니까?
이 시대도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시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만 그렇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이스라엘은 우리 이방인들을 위한 예표입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의 진노를 격발하게 해서 하나님께서 백성 아닌 자로써 이스라엘을 시기 나게 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도 자기들이 영적인 이스라엘이라고 하면서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율법의 행위 아래 있는 자는 진노를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백성 아닌 자로 시기 나게 하신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도 그들이 볼 때 성도가 아닌 것과 같은 사람들로 시기 나게 하시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킵니까?
그 사람들은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비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그리스도편지에서 전하는 말씀이 많이 알려지지가 않아서 그렇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 율법주의자는 시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영생입니다
반드시 성령을 받은 성도만이 확신할 수 있습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그런 영생이 아닙니다. 그들이 볼 때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것과 같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영생을 받았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반드시 시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주일을 지킵니다.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일주일 내내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도 당당하게 확신을 가지고 전파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모든 것을 하고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없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을 시기하게 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누가 시기를 하게 되어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미 이스라엘이 출애굽을 해서 가나안에 들어갈 때 모새를 통해서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하셨지만 그들은 그 말씀 그대로 시기를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1:27절을 보겠습니다. (신 264쪽)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사도행전26:11절을 보겠습니다. (신 233쪽)
“또 모든 회당에서 여러 번 형벌하여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고 저희를 대하여 심히 격분하여 외국 성까지도 가서 핍박하였고”
미련한 백성입니다
우리 성도를 세상에 미련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는 세상 사람이 볼 때 미련한 자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너무도 미련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있다고 하는 그 믿음이라는 것은 실체가 없는 것과 같이 보입니다.
믿음입니다.
누가 그것을 지혜 있다고 하겠습니까? 세상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깨달을 수 없는 것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어서 지혜가 있다고 하는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졌고 이방의 교회도 역시 율법주의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볼 때는 우리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믿음은 정말 미련하게 보입니다.
믿음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 때문에 사도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격분을 했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서 죽였는데 갑자기 그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나타나서 이 믿음에 대해서 전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격분했습니다.
왜 그가 격분했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율법을 전혀 지키지 않고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하니까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을 무시하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고 하니까 격분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이 볼 때 이방은 아주 미련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자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분이 날 일이었습니다. 물론 사도 바울은 바리새인이었을 때 이렇게 했지만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 노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참으로 자기 멋대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형제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고 또 성경이 이스라엘을 예표로 기록하다 보니까 그들을 통해서 복음이 전파가 되었다고 해서 그들이 마치 형제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유대인들이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까? 기독교인들이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마치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을 형제와 같이 대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은 유대교를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팔레스타인입니다. 그들의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믿고 있습니다. 유대교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유대인들이 지금 팔레스타인을 형제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절대 아닙니다.
그들에게 팔레스타인은 이방인으로 밖에 취급이 안 됩니다 지금 이 시대도 수많은 분쟁이 있지만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어떻게 취급을 하고 있습니까? 이방의 개로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의 생각이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유대인이 마치 형제나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착각입니다
성경말씀 그대로입니다. 미련한 백성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니까 더 미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인데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들의 조상이 십자가에서 죽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노엽기만 한 것입니다
성경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복음이라고 하면서 믿고 있습니다. 그런 그들을 이스라엘이 형제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 그대로 이스라엘을 노엽게 해서 그들이 지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많이 살아가고 있는 팔레스타인을 무차별하게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형제입니까?
성경 어디에 이스라엘을 형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성경은 도리어 그들을 사단의 회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단의 회라고 하는 그들을 형제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 역시 사단의 회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알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에서 미리 모세를 통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에 순종치 않을 것을 아시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만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이 시대 역시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이 되는 말씀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로마서10:20절을 보겠습니다. (신 254쪽)
“또한 이사야가 매우 담대하여 이르되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고”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게 이렇게 말씀을 전하였습니다. "나를 찾지 않는 사람들을 내가 만나 주고, 나를 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내가 나타났다."”
복음입니다
이스라엘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역시 똑같은 경계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을 전혀 못 보고 있습니다.
듣지를 않습니다.
이사야가 담대하게 전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얼마나 듣지를 않으면 이사야가 담대하게 전하겠습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시면 이스라엘은 거의 듣지를 않은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선지자의 말씀을 들은 사람이 지극히 적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려 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왜 들으려 하지 않고 있는가 하면 사람의 이성으로는 복음이 깨달아지지가 않습니다. 그들이 듣지 않고 싶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도무지 깨달을 수 없으니까 듣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이 하나님의 의를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복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들이 지키는 율법의 행위가 의롭게 보이기 때문에 불의로 진리를 막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습니다.
믿어야 합니다.
복음을 듣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선지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도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서 이미 이스라엘이 율법주의에 빠질 것을 말씀을 하시고 하나님을 믿는 이방사람으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시기 나게 하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고도 도무지 무슨 말씀인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입니다
그가 아무리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다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복음을 보고 그것을 믿어야 하는데 사람의 지혜로는 성경을 아무리 많이 보아도 복음이 안 보이고 있습니다. 복음이 안 보이니까 계속해서 행위로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자입니다
이 시대 역시 담대할 수밖에 없습니다. 배짱이 두둑하고 용감하다는 사전적인 뜻이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 같습니다. 복음은 자기 생명을 내 걸고 전해야 하기 때문에 담대하지 않으면 복음을 전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담대하지 않고는 복음을 전할 수 없습니다.
타협입니다
사람들은 타협하기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물론 세상의 이성으로는 타협을 하는 것이 참 좋습니다. 전쟁이 나도 빨리 화해를 해서 타협을 하는 것이 상대에게 서로 이익이기 때문에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그 전쟁에서 담대하게 싸울 수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예전에는 그것이 가능하지만 이제는 사실 전쟁의 수가 빤히 보이기 때문에 더 쉽게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입니다
타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 타협을 해서는 안 되는가 하면 그것이 우리의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것 하나쯤 하는 그것이 나를 사망으로 끌고 가고 있습니다. 사단은 지금도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 타협을 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왜 율법을 지킵니까?
그것이 타협점이기 때문에 지키고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도 있고 율법이 폐하여졌다는 말씀도 있습니다. 문자적으로 보면 분명히 그렇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기록이 되어 있다 보니까 사람들은 더 쉽게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율법이 폐하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까?
누가 율법을 하나도 안 지킬 수 있습니까? 이 시대 말로는 율법이 폐하여 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지만 그들의 행위를 보면 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성경에서 복음을 못 보고 있기 때문에 율법과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알아야 담대할 수 있는데 복음을 모르니까 타협을 하고 있습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적은 누룩이 온 덩이를 퍼지게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할례를 받은 그 사람에게 모든 율법을 지킬 의무가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를 지키면 모든 율법을 지켜야 하고 그 율법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는 담대합니다.
왜 담대할 수밖에 없는가 하면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우리는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 생명이 걸린 문제에서 어떻게 담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복음을 알면 담대할 수 있지만 복음을 모르면 담대하지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16:33절을 보겠습니다. (신 177쪽)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이사야 선지자입니다
그만 담대합니까? 복음을 가진 성도는 누구나 다 담대합니다. 육을 보면 우리는 담대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의 일을 생각하면 우리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종교의 자유가 있는 상태에서는 그런 담대함이라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생명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렸을 때입니다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담대했습니다. 어느 정도로 담대했는가 하면 로마에 의해서 사자 밥이 되고 화형을 당하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죽임을 당하면서도 그들은 담대했습니다. 그들이 자기 육체가 죽임을 당하면서도 왜 그렇게 담대할 수 있었는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육으로는 안 됩니다
당장 내 생명이 죽는데 어떻게 담대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생명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육의 생명은 지나가는 그림자 같다는 것을 알고 또 영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영의 생명이 어떻게 우리에게 주어지는가 하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세상을 이기신 것을 믿음으로 우리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가 환난을 당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담대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선지자들이 때로 죽음을 앞에 두고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영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나 역시도 이긴 자의 편에 있다는 것을 믿었고 그 이긴 자의 편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역사입니다
담대합니다.
영의 생명이 있는 성도만이 담대할 수 있습니다. 물론 종교적인 신념이나 자기 사상을 가지고도 담대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에 담대합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영원한 생명이 거하고 있습니다.
믿음입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을 믿고 있습니다. 단순하게 세상을 이기었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심으로 말미암아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시고 삼일 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부활을 하셨는데 영으로 살리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영으로 살리심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영의 생명이 거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강한 말씀입니까?
너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강한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이 말씀 때문에 초대 교회에 성도들은 순교를 당하면서도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선지자들도 담대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선지자들이 얼마나 담대했습니까? 그러나 우리 역시 주님께서 세상을 이기신 것을 믿으면 담대할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인 주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는데 무엇이 두렵습니까? 인생은 어차피 한번 죽습니다.
두려워 할 필요성이 없습니다.
안 죽을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만 언제 죽느냐의 차이입니다 누구는 30대에 죽을 수 있고 누구는 50대에 죽을 수 있고 누구는 자기 수명을 다 살고 죽을 수 있습니다. 사람의 인정은 빨리 죽는 것이 두렵고 안타깝지만 사실 복음을 아는 성도에게는 그것이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더 삽니다.
그런다고 해서 달라질 것이 있습니까? 아니 내가 더 하나님을 잘 믿을 수 있습니까? 세상은 사는 자체가 수고와 고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피가 흐르기 때문에 죽음에 대해서 두려워할 수도 있지만 우리 성도는 이 육체의 죽음이 축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애착을 가지기 마시기 바랍니다.
내 영혼의 구원도 하나님이 하십니다. 내 가족과 친지들과 이웃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내가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어떻게 하든지 긍휼히 여기셔서 구원을 하시고 있습니다.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선지자입니다 복음을 전할 때도 담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을 때는 담대하게 이 복음을 전하라고 주셨습니다. 그 담대함이 어디서 오는가 하면 주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을 믿는 믿음에서 나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사야49:6절을 보겠습니다. (구 1028쪽)
“그가 가라사대 네가 나의 종이 되어 야곱의 지파들을 일으키며 이스라엘 중에 보전된 자를 돌아오게 할 것은 오히려 경한 일이라 내가 또 너로 이방의 빛을 삼아 나의 구원을 베풀어서 땅 끝까지 이르게 하리라”
누가복음15:4-5절을 보겠습니다. (신 121쪽)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일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다니지 아니하느냐 또 찾은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빛입니다
주님은 이방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주님이 오시기 전까지는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시고 부활 승천하시고 난 후에는 이방에 복음이 전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이방이 하나님을 찾아서 복음이 전해진 것이 아니라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대로 이방에 복음이 전파가 되었습니다.
구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세우시고 그들에게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복음이 전파가 되기 시작을 하면서 우리에게 성경이 주어지기 시작을 했습니다.
주님은 이방의 빛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시지 않았다면 우리 이방인들은 하나님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의 빛을 비춰주심으로 지금 이 시대 우리가 복음에 순종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누가 찾았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찾았습니까? 이 시대는 미디어가 발달을 했습니다. 그리고 인쇄술의 발달로 인하여 모두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 해도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주시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성경을 본다 해도 복음을 볼 수도 없고 순종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해서 우리가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는가 하면 주님이 먼저 이 세상에 오셔서 이방에 빛을 비춰주셨습니다. 참 빛으로 오셔서 우리 이방인들에게 비춰주셨습니다
우리는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찾아 주셨습니다. 주님은 실제 이 세상에 오셔서 이스라엘에 잃어버린 자를 찾아 주셨지만 이 시대는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심으로 우리가 성경에서 복음을 볼 수 있게 하시고 있고 순종케 하심으로 믿을 수 있게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찾은 자가 누구입니까?
죄인들입니다 주님께서 이 시대도 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는 의인들을 찾으시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찾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바리새인들은 원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바리새인과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스라엘을 예표로 삼으셨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버림을 받은 이스라엘을 따라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악한 자라는 말씀을 들었는데도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죄인입니다
반드시 주님은 죄인을 찾으십니다. 이사야가 담대하게 외친 그대로 죄인을 찾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죄인이 거의 없습니다. 교회 안에는 의인만 있지 죄인이 없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고 이스라엘의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는 사람만 있지 그것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 없습니다.
십계명을 보았습니까?
그것을 하나도 못 지킨 사람이 죄인입니다 그것을 보고 내가 어려서부터 지켰다고 하는 사람은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를 통해서 담대하게 말을 하게 하셨습니다.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바 되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구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면서 우리 죄인들을 찾아 주시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들을 찾아 주셔서 이 시대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기독교인들입니다
십계명을 가지고 물어 보시기 바랍니다.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어느 사람은 다 지키지는 못했어도 내가 몇 가지 계명은 지켰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면서 나머지도 지키면서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까지는 못 지켰어도 이제부터는 지키면서 살아간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입니까?
주님은 분명히 죄인을 찾아 구원을 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대로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을 찾아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죄인이 없습니다. 말로는 죄인이라고 하는 그들이 자기들이 십계명의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이스라엘의 청년과 같이 십계명을 보면서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찾으셨습니다.
이 시대도 주님께서 찾으시고 있습니다. 누구를 찾고 계시는가 하면 죄인들을 찾고 계십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면서 의인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십계명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주님께서 찾으시는 자가 되는 것을 거절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구하고 있습니까?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영생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구하는 그들이 주님께서 찾은바 된 사람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영생을 구하는 자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것을 원하고 있는 악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인이 되시기 바랍니다.
일부러 죄를 지라는 말씀이 절대로 아닙니다. 성경을 보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십계명을 보고 내가 그 계명 중에서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으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십계명을 보고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기 보다는 이스라엘의 부자 청년과 같이 그것을 지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입니다
우리는 그 중에 하나도 지키지 못한 죄인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씀을 하면 내가 언제 살인을 하고 내가 언제 간음을 하고 내가 언제 우상숭배를 했느냐고 따질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가 그렇게 산 것을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사망에 이른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아니 그 사람은 차라리 믿지 않은 것이 더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아니 주님께서 찾은바 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게 하셨는데 그 이방인들이 이스라엘과 같이 율법주의에 빠져 죄인에서 의인이 되려고 하면서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디모데후서1:10절을 보겠습니다. (신 343쪽)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영생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모든 일을 이루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오셔서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이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일을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영으로 부활하셔서 제자들에게 보이시다가 천국으로 올라 가셨습니다.
이방인입니다
누가 이 영생에 관하여 문의를 했습니까? 우리 이방인은 하나님을 모르는 백성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이 영생에 대해서 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상관이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나타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 이방인은 영생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이 믿는 하나님께 그것을 문의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나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 이방인들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가 보고 있는 이 성경이 없다면 우리는 구원을 받고 싶어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시대도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기 위해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만약에 이 성경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만 되어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 언어를 공부를 하지 않은 사람은 아예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보내 주셔서 방언의 은사를 주심으로 해서 원본과 조금도 부족하지 않게 우리가 국어로 번역이 된 성경을 보고도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번역을 하게 하셨습니다.
은혜입니다
우리에게 이 성경을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성경을 마치 이스라엘의 역사 책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특히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이스라엘을 예표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셔서 더욱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복음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 성경을 보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똑같이 복음에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이 몇이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거의 없습니다.
왜 거의 없습니까?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기독교가 되면서 복음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복음을 들어야 믿을 수 있는데 이 시대는 아예 복음을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저 문자적으로 복음이라고 하면 마치 복음이 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입니다 율법의 행위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과 다른 복음이 섞이게 되면 복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복음만 들어도 사람이 얼마나 쉽게 다른 복음에 미혹이 된다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초대교회에서부터 다른 복음이 교회 안에 들어왔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자적으로 보고 있는 성경은 율법입니다 이렇게 문자적으로 보고 내가 그 행위를 하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그 문자를 보고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하면 그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나셨지만 이방의 교회 역시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밟아가고 있습니다.
예표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으면 이 시대 역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지금 구약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는 것은 이방의 교회도 이스라엘과 똑같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자기 조상들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하나님을 잘 믿는다 하는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도 똑같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 이방의 교회 역시 복음에 순종하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없었습니까? 그러면 이방의 교회 역시 복음을 듣고 믿는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사도 바울이 구약의 말씀들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내가 구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문의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하였다고 말씀을 하니까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찾으셔서 하나님을 아주 잘 믿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경계로 말씀을 하고 있는데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하나님을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어를 모릅니다.
어떤 의미로 말씀을 하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는 사람이 국어를 알아야 이 말씀을 누구에게 하고 있는가를 알 수 있는데 국어를 모르다보니까 거꾸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자기들은 복음에 순종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분입니다
국어 국문학과를 나와서 국어 선생을 하다가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역시 지독한 율법주의에 빠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것을 보면 국어를 안다고 해서 성경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야 한다는 것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국어를 바로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모릅니다.
성경이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에 이 일이 이스라엘에게만 해당이 되는 일이라면 사도 바울은 굳이 구약을 인용을 해서 말씀을 할 필요성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기독교인들도 역시 이스라엘과 똑같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할 것을 아시고 사도 바울에게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들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문자에 기록이 되어 있는 오직 예수라는 말에 미혹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더 지독한 율법주의자들이 오직 예수를 외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라고 할 때는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로마서10:21절을 보겠습니다. (신 254쪽)
“이스라엘을 대하여 가라사대 순종치 아니하고 거스려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셨느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또한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고 "복종하지 않고 거역하는 백성에게, 나는 온종일 내 손을 내밀었다" 하신 말씀을 선포하였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다시 강조를 해서 말씀을 드립니다. 그들은 우리 이방인들의 예표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한 행위를 이방인들도 똑같이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아시기 때문에 사도 바울을 통해서 이 로마서를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성경을 그렇게 보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대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에서 바리새인들에 하신 그 말씀이 이 시대 그대로 진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들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미고 있는 것과 같이 이 시대도 성지라고 하면서 그것을 꾸미고 거기를 평생에 한번 갔다 오는 것이 소원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 많이 있습니다.
뭐가 다릅니까?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의 무덤을 쌓고 의인들의 비석을 꾸몄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입니다. 물론 자기들이 직접 하지는 않고 있지만 기독교라는 종교가 세워 놓은 여러 가지를 쌓고 있고 꾸미고 있는 것을 성지라고 하면서 다녀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지가 있습니까?
다 썩어 없어지는 것이 무슨 성지입니까? 그렇게 하는 자체가 복음이 순종치 아니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자기들은 복음에 순종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자기들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스라엘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스라엘에 대해서 순종치 아니하였다는 이 말씀이 이스라엘을 들으라고 하는 말씀입니까? 저도 국문학을 공부를 안 해서 이것이 무슨 문법인 줄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이방인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예표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경계가 되어 우리가 이 말씀을 보고 이스라엘과 같이 복음에 순종치 않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모두가 복음에 순종하고 있다면 사도 바울은 굳이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로마에 있는 교회에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낼 이유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실제 이 시대를 보면 이스라엘과 같이 복음에 순종치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은 그렇게 했어도 우리는 안 그런 것과 같이 교회 안에서 목사들이 설교를 하고 있고 교인들은 그 말에 모두가 미혹을 당하고 있습니다.
누가 복음에 순종치 않고 있습니까?
그것을 10장 초반에 이미 말씀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는가를 분명히 앞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바로 앞에 있는 말씀도 모르고 막연하게 순종이라는 단어만 생각을 하면서 이스라엘은 순종치 아니하였고 자기들은 순종을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잘 믿고 있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입니다
누가 복음에 순종을 하고 있습니까? 제가 볼 때는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들 외에는 아무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지금과 같이 미디어가 발달을 한 시대에서는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이 있다면 인터넷을 통해서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목사입니까?
그리고 누가 복음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고 가서 들어보면 역시 모양만 순종하는 것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말장난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 있는 이상은 어느 누구도 복음에 순종할 수 없습니다. 제가 이단이 복음에 순종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단은 논할 가치가 없어서 말씀을 안 드립니다.
복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막연하게 복음에 순종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 왜? 어떻게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는가를 알아야 내가 복음에 순종할 수 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막연하게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어서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을 믿는 백성이었습니다.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믿는 것이 복음에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의를 믿는 데는 반드시 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을 로마서10장2-3절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앞에서 바로 말씀한 것도 깨닫지를 못하는 것이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하나님의 의를 알려면 내가 교회 안에서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을 좇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을 깨닫지를 못할 때는 자기 생명이 걸린 문제이기 때문에 끝까지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구속의 일을 이루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주님께서 내가 세상을 이기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께서 이루신 모든 일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이 의를 우리는 성경에서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의에 순종치 않았습니다.
왜 하나님의 의에 순종치 아니하였는가 하면 지식이 없어서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자기들의 육체로 지키는 그 행위가 하나님의 의를 힘써 복종치 아니하는 일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어떻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는가 하면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들이 어려서부터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면서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실상은 십계명의 하나도 지키지 못한 그들이 문자적으로 보이는 십계명을 보고 자기들이 지켰다고 하면서 복음에 순종하지를 않았습니다
십계명을 지키는 것이 순종입니까?
그것은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거절을 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가 십계명의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셔서 우리가 지키지 못한 그 계명을 지키게 하시고 또 우리가 지키지 못한 그 죄를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는데 그것을 믿지를 않고 이방의 교회 역시도 이스라엘과 같이 복음에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것과 같이 너희도 역시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있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십계명이 살아 있다고 하면서 그 계명을 자기 육체로 지키면서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자기의 의입니다
내 의가 하나라도 나타나고 있다면 그는 이스라엘과 같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나타내고 있는 사람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의 의를 모릅니까? 내가 교회 안에서 행위로 하고 있는 모든 행위가 내 의가 되고 있습니다.
예배도 의입니다
기도도 의입니다 찬송을 부르는 것도 의입니다 헌금을 하는 것도 역시 의입니다 절기를 지키는 것도 의입니다 내 육체로 하고 있는 행위가 나를 통해서 나타나고 있다면 그것은 자기의 의가 되고 그 의가 나타나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복음에 순종치 아니한 것과 같이 이방의 교회도 역시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고 있습니다
이사야65:2절을 보겠습니다. (구 1046쪽)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좇아 불선한 길을 행하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들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종일 손을 펴서 부르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종일 손을 펴서 부를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이 시대 역시 종일 손을 펴서 우리를 부르시고 있지만 이스라엘과 같이 복음에 순종치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종일 손을 펴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그 부르심에 응답을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종일 부르실 때 이스라엘이 들었습니까? 그들은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는 일만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셔서 종일 부르시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스라엘은 복음에 순종치 아니하였습니다.
어떻게 했습니까?
불선한 길로 가는 패역한 백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하면 그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함으로 말미암아 불선한 길로 가는 백성이 되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까?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교회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이스라엘이 행한 것을 경계로 삼기 위해서 구약에 선지자들이 기록한 성경을 인용을 해서 너희도 똑같이 복음에 순종을 하지 않는다든 것을 말씀하기 위해서입니다.
순종하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은 순종을 하지 않고 거스려 말을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말씀은 순종을 하는 것이고 율법을 지키라는 말은 거스려 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사도 바울이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그 거스리는 말로 인하여 복음에 순종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복음입니다
이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종일 손을 벌리셔서 우리에게 복음에 순종을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로마서 강해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강해 106강 주여 저희가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0) | 2018.02.12 |
---|---|
로마서 강해 105강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0) | 2018.02.04 |
로마서 강해 103강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0) | 2018.01.22 |
로마서 강해 102강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0) | 2018.01.15 |
로마서 강해 101강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0) | 2018.01.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