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10:13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야 합니다. 성경의 문자를 아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문자에 감추어져 있는 비유와 은유를 바로 앎으로 해서 복음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복음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런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에 빠져 있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모두가 종교의 깊은 수렁에 빠져 있으면서도 그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빠릅니다.
솔직히 먹고 살기도 어려운 때입니다 세상에서 직업을 가지고 그 자리를 유지할 수 있다는 자체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에서 복음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사단은 점점 더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서 사람들의 혼을 빼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굳이 성경을 안 보아도 예배만 드리는 것으로 자기들이 구원받은 성도로 믿을 수 있게 만들고 있습니다.
지식을 좇지 않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한가하게 지식을 좇을 시간을 주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제는 누군가 복음을 전해도 그것을 쫓아 올 사람이 적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예배만 한번 참석을 하면 되는데 머리 아프게 성경에서 복음을 알아간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사단은 점점 더 세상을 그렇게 만들어 놓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자기의 의를 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안다는 것은 너무 어렵습니다. 사실 그리스도편지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하나님의 의를 알고 그것이 내 안에서 믿음으로 역사하기까지는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쉬운 방법으로 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를 모르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성경에서 이 의에 대해서 바르게 정립을 하지 못하면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에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의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차별이 없습니다.
유대인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헬라인 역시도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누구인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또 그가 어떤 사람인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서 부요하십니까?
이 시대는 주님에 대해서 너무 모릅니다. 주님이 부요하시다고 하니까 세상의 것도 부요하신 것으로 알고 그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영생을 주는데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영생에 대해서는 구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입니다
그 의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있게 하는 의입니다 유대인입니까? 헬라인입니까? 그가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라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심을 주시고 있고 저를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부요하신 분입니다
구약에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네가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와 나그네를 먹여 배부르게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먹을 것을 안 먹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자가 십일조를 내서 스스로 부요하게 되고 있습니다. 모든 율법을 주님께서 지키신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십일조를 하심으로 우리가 그것을 먹고 배부를 수 있습니다. 구원에 대해서 배가 부를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십일조를 내셨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토지소산도 없는 자들이 이 시대는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바리새인과 같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스스로 부자가 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토지소산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십일조를 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토지는 누구의 것입니까?
하나님의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주님 밖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토지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리고 그것을 우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먹여 배부르게 하고 있습니다.
부요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주님이 내신 십일조를 통해서 우리 배가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를 부요하게 하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자기들이 십일조를 내고 있습니다. 소득의 십일조를 내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주님께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분명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바리새인과 같이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면서 부자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다.
그가 주님이 드린 십일조를 먹을 수 있습니까? 주님께서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가져와서 우리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배부르게 하고 있는데 자기가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이 어떻게 그것을 먹을 수 있습니까? 오직 주님만이 부요하신 분인데 이 시대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서 교회 안에서 자기들이 소득의 십일조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부요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배부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의로 말미암아 마치 우리가 배가 부른 것과 같이 천국에 가는데 있어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주님이 얼마나 부자인가를 모르고 있고 심지어는 자기가 부자가 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모두가 가난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할 수 없는 가난한 자입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모두가 부자가 되어서 십일조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게 십일조를 하는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에게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다고 주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 시대 역시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사람은 절대로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는 점점 더 십일조를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수많은 헌금들이 있습니다. 그것들이 다 율법이고 성경은 그것을 창기의 번 돈과 개 같은 자의 소득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어서 그것으로 부자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가난해지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바리새인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만이 드리실 수 있는 십일조를 자기들이 드린다고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드리신 십일조를 이 시대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먹고 있습니다. 그 십일조를 우리가 먹음으로 해서 부요하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실 정도로 주님은 토지소산의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내 스스로 부요해지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셔서 저를 부르는 모든 사람을 부요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오직 주님만이 부요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리고 주님이 매 삼년 끝에 창고에 가득 쌓아 놓은 것을 우리가 먹고 배불러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는 데는 어느 누구도 차별이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누구든지 에는 어느 조건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로마서1장에서 여자가 여자로 순리로 쓸 것을 버리고 역리로 쓰고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짓을 한다는 말씀을 보았습니다.
문자적으로는 그런 사람이라도 구원을 받습니다.
이 시대는 교회가 동성연애자들을 막고 있습니다. 물론 저 역시 그들을 환영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느 누구도 막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만약에 그들이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필요조차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동성연애 하는 자들은 안 된다고 하면 그것은 성경에 반하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누구든지 복음을 전해서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받게 해야 합니다.
왜 차별을 합니까?
하나님께서는 차별을 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차별을 하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차별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구원을 얻습니다.
여기에 제약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누군데 감히 성경에서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는데 반대를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기록한 성경에 있는 말씀과 다르게 하고 있다면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누구는 안 된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23:42절을 보겠습니다. (신 139쪽)
“가로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 하니”
강도입니다
성경에는 강도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단순한 강도짓을 했다고 해서 그가 십자가형을 받지는 않습니다. 그 당시 아무리 법이 강했다 해도 단순히 강도짓을 한 것을 가지고는 십자가형을 받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도 모릅니다.
이 강도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형을 당할 정도라면 아마도 중죄를 지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 저 사람은 반드시 죽어야 된다고 할 정도로 흉악한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형을 받고 있습니다.
그 강도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해 달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이르노니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상식으로는 이 사람은 낙원에 있을 수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에서 자기를 부르는 이 강도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누가 더 나쁩니까? 이 강도가 나쁘겠습니까?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 더 나쁘겠습니까? 우리가 솔직히 생각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경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 상식으로 생각할 때 누가 더 나쁜 사람입니까? 이 사람은 강도짓을 하다가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입니다
그들이 얼마나 모순된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제가 이 강도가 나쁘고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 잘 한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저도 도덕적으로 생각할 때 이 둘 다 나쁘다는 것을 인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야 합니다.
동성연애는 사형을 당할 정도로 나쁜 짓은 아닙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에게 죄를 짓고 있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내 곁에 동성연애를 하는 사람이 있고 흉악한 강도가 있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누구에게서 피하겠습니까? 아마도 모든 사람이 그래도 흉악한 강도에게서 피하려고 할 것이 분명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가 강도짓을 했습니까? 그가 간음을 했습니까? 그가 동성연애를 하고 있습니까? 제가 이런 사람들이 잘 했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습니다. 강도짓을 한 죄도 지고 가셨고 동성연애를 한 죄도 지고 가셨고 간음을 한 죄도 지고 가셨고 살인을 한 죄도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말씀을 그대로 믿어야 합니다. 거기에 누구를 구별하고 차별을 하고 있다면 그는 악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누구관데 감히 차별을 합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주일입니까?
십일조입니까? 그런 것으로 진리를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언제 주일을 지키라고 했고 십일조를 드리라고 하셨습니까? 성경의 의미를 모르고 그런 것으로 구원을 막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안 보는 사람입니다. 만약에 그것이 구원과 문제가 있다면 반드시 성경에 누구든지가 아니라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입니다
왜 우리가 성경을 보고 있습니까? 성경에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오셔도 그가 자의적으로 말씀을 하시지 않습니다. 반드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을 깨닫게 해 주시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의 기독교입니다
점점 더 벽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바리새인들과 같이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서 제사를 드리지도 못했던 것과 같이 거의 그런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자기들의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은 교회 안에 들어올 수 없는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누구든지 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천국 문을 막고 있습니다.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한편 강도를 구원해 주셨고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온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누구든지가 아니라 자기들의 암묵적인 조건에 맞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누구입니까? 벌레 같은 인생입니다 구더기 같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각이 없는 짐승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런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의 은혜로 구원을 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내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나를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정말 안개와 같은 사람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존재입니다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사랑하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는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그 율법의 기준을 가지고 차별을 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5:1절을 보겠습니다. (신 268쪽)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성경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성경이 기록이 될 때만 해도 2000년 전입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때는 사람을 사고파는 것도 당연시 되었습니다. 법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이 종을 사고팔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면 포로를 잡아와서 자기 노예로 삼았습니다. 전쟁에서 그런 것은 하나의 전리품으로 생각을 하고 마치 짐승과 같이 그 노예에게 자기 집의 문장을 낙인을 찍었습니다. 지금은 상상도 못하는 일이 당시에는 아무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당시 있었던 실제 일을 비유로 해서 우리의 영의 일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비의 아내입니다
누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습니까? 지금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창세기에서 보았듯이 르우벤이 서모 빌하와 통간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로 그는 장자의 명분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와 2000년 전은 상상도 하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이 이 일을 행한 자를 이미 판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판단은 무엇입니까? 실제 있었던 일을 영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판단을 했다는 말씀입니다 육으로 행하고 있는 사람을 판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회 안에서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자를 판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판단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 사람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실제 그 일을 한 그 사람을 판단했다는 것이 아니라 영으로 그 일을 하는 사람을 판단을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판단을 했다는 말씀은 그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육적으로 아비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아비의 아내를 취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이 시대는 있을 수 없는 일을 왜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기록하게 하셨습니까? 영적으로 실제 이 시대 거의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비의 아내입니다
이미 그리스도편지에 설교로 올려 드렸습니다. 이 아비의 아내는 교회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서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음행이 심한가를 이 시대는 전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이름을 짓습니다.
누가 감히 자기 어머니의 이름을 지을 수 있습니까? 이 세상 도리로도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교회는 저의 아내라고 에베소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분명히 주님의 아내입니다 주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이사야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입니다
교회의 이름을 짓는 것이 어떠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고 그 교회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의 이름을 지어서도 안 되고 또 그 이름을 불러서도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그리스도편지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처음에 세무서에 등록을 하려고 하다보니까 그리스도편지 선교회로 등록을 했습니다. 그냥 그리스도편지라고 부르는 것은 그래도 받아들일 수 있는데 그리스도편지선교회라고 부르는 것은 삼가 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그것 역시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 선교회 역시도 교회의 이름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편지입니다
고린도후서3장에서 너희는 그리스도편지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교회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마음에 걸리고 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 이름을 짓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과 무엇이 다릅니까?
이제까지는 그렇게 불렀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그리스도편지라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우리 자체가 그리스도편지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성도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그 이상의 호칭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제가 사이트에서도 어느 순간부터 선교회라는 것을 다 빼고 있습니다.
아비의 아내입니다.
영적으로 우리는 아비의 아내를 취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은 반드시 판단을 받고 그 사람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정말 이 교회에 대해서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시대는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을 하면서도 통한히 여기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 일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고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이 이런 자를 판단했다는 말씀은 육적으로 실제 있었던 그런 자를 판단했다는 말씀이 아니라 영적으로 교회에서 그런 일을 하는 자를 판단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자입니다
사도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영적으로 그런 일을 하는 자는 사도 바울이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그런 자는 사단에게 내어 주어 그 육신은 멸하고 영혼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얻게 했다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우리 복음을 가진 자도 도무지 용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누가 이 사람을 용납할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용납이 안 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도 누구든지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누구든지 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 있습니다. 내 이성에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의 죄도 주님께서 지고 가셨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 죄에는 우리가 상상도 못하는 그런 죄까지도 포함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도 용납이 안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세상 모든 죄를 지고 가셨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람이 계속해서 교회 안에 있는 다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너희 중에 물리치지 않았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세상에서도 도저히 용납이 안 되는 일을 했을 때는 반드시 그에게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더 이상 그러한 일을 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도덕과 그리고 법이 허용을 하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 안에서 물리쳐서는 안 됩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지금은 동성연애가 세상 법으로 아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것을 우리가 판단하고 물리쳐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그가 교회 안에 들어와서 복음을 듣다 보면 저는 스스로가 고치려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남들이 용납을 하지 않는 일을 더 이상 하지 않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이 허용하고 있다면 우리는 판단을 해서는 안 됩니다
아비의 아내를 취하는 일입니다
저도 법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세상 법도 처벌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상 법에 처벌을 받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법과 제도를 스스로 따르려고 해야 합니다. 교회에서 강제는 할 수 없다 해도 세상 법을 따르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이 사람도 그 육신은 멸하고 영은 구원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어떤 죄를 지었어도 누구든지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주님이 부탁하신 이 복음을 전해야 하기 때문에 세상의 도덕과 법을 잘 지켜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어느 것으로도 막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막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악한 자입니다 왜 성경이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거의 모든 교회들이 자기들이 정한 법을 세워 놓고서 그것을 지키라고 강요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어떤 행위를 해야 직분을 주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18:24절을 보겠습니다. (신 31쪽)
"회계할 때에 일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시편62:9절을 보겠습니다. (구 846쪽)
“진실로 천한 자도 헛되고 높은 자도 거짓되니 저울에 달면 들려 입김보다 경하리로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부자가 되어서 자기가 누군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믿음은 나를 아는데서 부터 출발이 되고 있습니다. 내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까? 영생이 하나님을 아는 것인데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입니다
한 사람입니다. 그것은 누구를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 아담의 자손 모두를 대표하는 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하나, 한 사람이라고 말씀을 할 때는 대표성을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을 어느 한 사람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입니다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비유로 일만 달란트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이 말씀은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은 교회 안에 있든 교회 밖에 있든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거기에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일만 달란트입니다
우리 인생이 갚을 수 없는 금액입니다 우리가 그런 죄인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자기들은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아닌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어느 한 사람이 그런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우리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아니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왜 사람들이 자기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인가를 모르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다른 사람들과 비교를 하기 때문입니다.
주일을 잘 지킵니다.
그리고 십일조도 잘 드리고 있습니다. 또 예배도 아주 잘 드리고 있고 진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분명히 저들은 죄인이고 나는 하나님을 믿는 성도입니다 이런 상태에서는 절대로 자기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제가 우리 인생 모두가 일만 달란트 빚진 자라고 하면 받아들이지를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테레사 수녀가 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죄가 어떻게 같을 수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게 묻고 있는 자체가 성경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고 자기가 누군가를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제가 묻겠습니다.
육체를 죽이는 사람이 나쁩니까? 영혼을 죽이는 사람이 나쁩니까? 세상의 이성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 될지 몰라도 성경은 육체를 죽이는 사람보다 영혼을 죽이는 사람이 더 악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죽이는 사람은 죄인이지만 영혼을 죽이는 자는 악인이라고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모든 사람이 존경하는 어거스틴을 말씀하겠습니다.
그는 위대한 교부입니다. 지금 이 시대 천주교나 기독교할 것 없이 모두가 어거스틴의 사상을 따르고 있습니다. 이 어거스틴이 누구입니까? 대표적인 율법주의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어거스틴하고 히틀러하고 누가 더 악한 자입니까?
히틀러는 육적인 생명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제까지 수많은 신학자들이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읽고 또 그의 사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히틀러가 죽인 육체의 생명보다 더 많은 영혼들이 사망으로 갔다는 것을 생각하면 끔찍한 일입니다 한명의 위대한 신학자로 인하여 얼마나 많은 영혼들이 죽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성경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히틀러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육체의 생명을 죽였습니다. 그가 진 죄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지고 가셨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아서 구원을 받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악합니까? 히틀러가 유대인을 천만 명을 학살을 하고 또 전쟁을 통해서 수많은 인명을 죽게 했습니다. 그 히틀러의 죄가 큽니까? 내가 교회 안에서 나로 말미암아 율법주의로 빠지게 해서 한 영혼을 죽게 한 것이 더 큽니까?
누가 더 악합니까?
영의 생명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천하보다 더 귀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면 화가 날 사람도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 사람이 다 죽는다 해도 아무 상관도 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이 죽는 것에 대해서는 진노를 참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이 영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육체 수천만 명보다 아니 수억 명보다 한 영혼이 더 귀합니다. 이 시대는 이성에 사로 잡혀서 제가 드리는 말씀을 도무지 이해를 못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죄 입니다
그것은 입김보다 더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틀러가 진 죄입니까? 그리고 내가 진 죄입니까? 그것을 저울에 달아 보니까 입김보다 더 경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히틀러도 율법을 하나도 못 지켰고 나 역시도 율법을 하나도 못 지켰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제까지 교회 안에서 율법주의자로 영혼을 죽이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율법을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어떠하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한 영혼이 죽는 것이 어떠한 일이라는 것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켰습니까?
누가 율법을 지켰다고 말을 합니까? 우리는 어느 한 가지도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613가지 율법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이 세상 죄를 지고 가심으로 해서 내가 은혜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마치 주님 앞에 찾아온 부자 청년과 같이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최소한 다른 신은 섬기지 않았고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고 최소한 살인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누구든지가 용납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에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내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라는 이 말씀이 너무 은혜가 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아니 하나님은 정말로 이상한 하나님입니다
어떻게 받아들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누구든지가 용납이 안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사마리아 사람을 마주치면 개를 만나는 것과 같이 아주 싫어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마음에는 그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든지가 안 됩니다
로마서의 이 말씀을 보면 아마도 그들은 하나님을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 분명합니다. 아니 이런 말씀들을 보고도 알려고 하지도 않고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우리에게는 이 누구든지가 너무도 큰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에게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나를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인인가 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섬겼습니다. 그리고 우상을 숭배했습니다.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것을 성경에서 아는 성도만이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는다는 로마서의 말씀이 믿어지는 역사가 있습니다.
요엘2:32절을 보겠습니다. (구 1273쪽)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 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마태복음1:21절을 보겠습니다. (신 1쪽)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누구든지 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은혜가 되어야 합니다. 정말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만약에 누구든지가 아니라 앞에 전제조건이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우리는 어떻게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속의 일을 다 이루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니까 목청을 높여서 주여 주여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귀가 안 들리시는지 그것도 큰 소리로 온 교회의 교인들이 만세 삼창을 부르듯이 주여 주여 주여를 하면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렇게 큰 소리로 불러야 합니까? 이 시대는 교회가 민폐를 끼치고 있습니다. 어느 건물에 교회가 들어가면 아주 큰 소리로 찬송가를 부르고 주의 이름을 아주 큰 소리로 부르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라고 하니까 초등학생과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참 끔찍합니다.
저 역시도 종교의 포승에 묶여 있을 때는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을 하고 누구보다도 더 큰 소리를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들이 다 종교의 세뇌에 의한 행위라는 것을 이제 알고 나니까 사람의 이성이라는 것이 참으로 어리석다는 것을 새삼 느끼고 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이 시대 교회입니다. 주여 삼창을 하고 나서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주님을 불러야 주님께서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 주시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왜 불러야 하는 줄도 모르고 아무 때나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단 한 가지의 이유입니다 그것 외에는 우리는 주님을 불러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의의 삯을 위해서 주님을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들의 이성의 탐욕을 이기지 못해서 주님을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십니다 그럼 주의 이름을 언제 불러야 합니까? 이 구원을 위해서 내 죄에서 나를 구원해 달라고 할 때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언제 주의 이름을 불러야 하는 줄을 모르고 교회 안에 나와서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입니다.
그 이름의 뜻을 알고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냥 아무 때나 주여 주여 하지 말고 주의 이름의 뜻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그렇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를 구원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주의 이름을 아무 때나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아무 때나 부르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자기 육적인 재물을 위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고 자기 가족의 출세를 위해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주님이 누구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주님이 누구라는 것을 알아야 그때 주님을 부를 수 있는데 아무 때나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자기들의 정욕을 따라 행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우리 죄에서 구원해 주실 분입니다 내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단 한 가지의 이유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의 이름을 부르지를 않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기 보다는 바알을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의 이름 모릅니까?
예수 그리스도, 여호와 그 이름을 모릅니까? 그런 문자적으로 알고 있는 이름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주의 이름을 알고 불러야 합니다. 이름의 뜻을 알고 있는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고 그 사람만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디모데후서2: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45쪽)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까? 주의 이름을 부를 때는 반드시 모든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불의에 대해서는 로마서 1장에서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시대는 불의를 모르고 있습니다.
모든 불의입니다
그것이 다 율법의 행위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정말 우리는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닙니다.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구원을 받기 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그는 불의에서 떠나 있지 않기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누가 부르고 있습니까?
이 시대 율법을 안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솔직히 여기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는 성도들 빼고는 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저는 아직까지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을 못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진리로 인도함을 받아 율법을 안 지키는 사람을 못 봤습니다.
반드시 떠나야 합니다.
불의를 행하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아니 그는 주의 이름을 모르고 부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쉽게 말해서 자기가 안다고 해서 대통령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렇게 아무리 불러 보아야 대통령이 알지 못하면 절대로 대답을 들을 수 없습니다.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다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누군가를 이렇게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나와서 주여 주여 한다고 해서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모든 불의에서 떠난 사람만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리고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떠나시기 바랍니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고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거짓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그가 아무리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주의 이름을 부른다 해도 불의를 행하고 있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안 불렀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은 제사를 드리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불의를 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주님으로부터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이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누구나 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의에서 떠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다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만 부른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습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 없습니다. 그러나 불의에서 떠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가 살인을 한 자라도 마찬가지고 그가 간음을 한 자라고 해도 역시 마찬가지고 설령 동성연애를 했다 해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나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이 불의가 무엇인가 하면 거의 율법을 지키는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의미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 먼저 선행이 되어야 합니다. 그가 세상에서 도덕적으로 그 어떤 죄를 지었어도 상관이 없지만 그러나 율법을 지키면 그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 우상을 숭배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이 시대 교회를 보면 모두가 불의를 행하고 있습니다. 불의에서 떠나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면서 로마서의 말씀만 보고 자기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고 하면서 구원을 받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말씀만 보면 그들은 분명히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보면 그들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입니다
자기가 보고 있는 그 문장을 아는 것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디모데후서의 말씀을 찾아서 누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불의가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불의도 모르고 있고 디모데후서의 말씀도 찾으려고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입니다.
그러니까 도덕적인 죄에 대해서는 누구든지 입니다. 내가 도덕적으로 그 어떤 죄를 지었어도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습니다. 그 주의 이름의 뜻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렇게 알았으면 이제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불의에서 떠나 있는 성도만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원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바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세상과 같이 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까? 만약에 우리에게 구원이 없다면 정말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다 죽이고 살았는데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면 우리보다 더 불쌍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감성으로 느꼈습니까?
그렇다고 누구처럼 자랑을 했습니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늘 말씀을 드리지만 무색무취합니다. 그 어떤 것도 느끼지 못하고 오직 내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이 없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가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셔서 내 안에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을 믿게 역사를 하고 있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다는 것이 믿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 믿음의 말씀을 보고 듣고 믿음으로 해서 구원을 받았습니다.
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저도 똑같이 느끼고 감정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 복음 안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님들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정말 나도 자랑하고 싶고 사람의 이성에 옳은 것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서 그 모든 것을 우리는 버리고 있습니다. 아니 불의에서 떠나서 이렇게 무색무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원이 있습니다.
믿음의 선진들도 이 구원이 있어서 앞에 있는 즐거움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 주셔서 이 구원에 대해서 확신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우리가 가고 있습니다.
베드로전서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77쪽)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구원입니다.
앞에 있는 즐거움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광이라고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도 모릅니다. 천국이 어떠한지는 상상이 안 됩니다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 신체가 아니라 영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구원을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고 합니다.
달마다 생명나무 과실이 열린다고 하고 있고 길이 정금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이 우리의 부림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비유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받을 수 없는 엄청난 은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구원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많다고 하면 아마도 조금은 퇴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더라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지극히 적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는 한 사람도 구원을 받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 시대 우리나라만 해도 그렇습니다.
천만 명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얼마나 된다고 생각합니까? 100명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편지에서 교제를 하고 있는 사람들은 30명이 넘고 있지만 그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지는 않고 있습니다. 아직도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한 발을 걸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구원이 없습니다.
그 중에서 구원입니다.
우리 앞 세대입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라는 종교가 들어오고 나서 과연 누가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꼭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지만 우리 전에 누가 복음을 알았습니까? 이미 한 세대가 지나갔습니다. 그 세대는 복음을 모르고 기독교라는 종교를 믿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최소한 2천만 명 중에 우리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구원입니다
2천만 명 중에 만 명만 받아도 제가 이런 말씀을 안 드립니다. 아니 천명 만 받아도 그렇습니다. 그런데 100명도 되지 않습니다. 그런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까?
복음입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어떻게 깨달았습니까? 정말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것을 이 시대 우리가 교제를 하고 있고 인도하심을 받고 있습니다. 저는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그저 은혜라는 단어로 밖에는 설명이 안 되고 있습니다.
제가 지혜가 있습니까?
제가 성경을 많이 보았습니까? 저는 한 번도 제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지혜도 없는 사람이고 또 세상 적으로 보았을 때도 그렇게 공부를 잘하는 사람도 못 됩니다 그런데 제가 상상하지도 못한 복음을 깨닫게 해 주시고 우리가 이렇게 진리로 인도함을 받으면서 교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세상 적으로 지혜가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말씀을 안 드립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세상에 미련한 자를 택하사 세상에 지혜 있는 자를 부끄럽게 하시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어떠한 구원을 받는가를 생각하면 정말 한 시도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습니다.
얼마나 가슴 벅찹니까?
이스라엘이 애굽의 종으로 살다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간다고 해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 기록은 안 되어 있어도 눈물을 펑펑 흘리는 기쁨을 만끽하지 않았겠습니까? 남의 종이 되었다가 자기 땅이 생기는 그런 것을 경험해 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저는 그렇습니다.
이 구원을 생각하면 다른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지혜 있다 하고 세상에 능력 있다 하고 세상에 재물이 많다고 하는 그들을 하나님께서는 버리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이 구원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은혜입니다. 우리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하는 것을 주의 이름을 부른 그것으로 선물로 주시고 있습니다.
비밀입니다
누가 이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이제까지 유명하다고 하는 어느 신학자가 이것을 깨달았습니까? 어느 누가 불의에서 떠나서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이 시대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있습니다.
그런 구원을 받았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런 감동이 있는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안에서 성령의 감동으로 역사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주의 이름을 부름으로 해서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모두가 다른 길로 갈지라도 우리는 이 길이 참이기 때문에 묵묵히 가고 있습니다.
로마서10: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분의 이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어보지도 못한 분을 어떻게 믿겠습니까? 말씀을 전해 주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습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부르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성경을 우리는 바로 알아야 합니다.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를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누구입니까?
저희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다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지식을 좇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믿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 않습니다.
성경입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했다면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똑같이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믿지 않았으면 이 시대 역시 하나님을 안 믿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저희가 믿지 않아서 부르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당연합니다.
믿어야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군가를 믿어야 그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믿지 않은 그들이 어떻게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있습니까?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영혼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성경을 거의 다 육의 일로 보았습니다. 성경을 육의 일로 보니까 도무지 믿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을 말라기에서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고 야곱은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언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동문서답을 하고 있습니까?
그들은 육입니다
육의 일만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의 일에 있어서 야곱을 사랑하셨다고 하지만 이스라엘은 자기들의 형편과 처지를 보면서 하나님이 언제 우리를 사랑하셨냐고 묻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육의 일을 생각합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누구는 잘 믿으면 십일조를 많이 내게 해 주신다고 하고 있고 또 누구는 병도 고쳐 주신다고 하는데 나는 그런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십일조를 낼 수 있는 형편도 안 되고 병도 고침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믿고 싶어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시편14:4절을 보겠습니다. (구 811쪽)
“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도다”
저희가 믿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우리의 예표와 그림자입니다 그들이 믿지 않았다면 이 시대 역시 믿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만은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늘 자기 조상과는 다르다고 한 것과 같이 이 시대 역시 이스라엘과는 다르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죄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모두가 죄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더라도 죄악을 행하지 않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아니 죄가 무엇인지 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그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문자적으로 부르고 있으면 구원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악입니다
사람들이 짓는 도덕적인 죄악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으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죄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죄악을 범하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실제 여호와를 부르지 않았습니까? 그들 역시 진심으로 여호와를 부르면서 살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과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점점 타락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 아니라 타락의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역시 이방에 복음이 전하고 나서 2000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사실 초대 교회를 제외하고는 거의 율법주의에서 벗어나지를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호와를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여호와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쉽게 말씀을 드려서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주시는 것을 모르고 사단이 주는 것을 바라면서 여호와를 부르고 있다면 그는 여호와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늘 제사를 드리면서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제사가 우상에게 절을 하는 것이 되었고 바알을 섬기는 제사가 되다 보니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을지라도 자기들이 바라는 것을 사단이 주고 있기 때문에 실상은 사단을 부른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마귀의 자식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왜 그들에게 마귀의 자식이라고 말씀을 하셨는가 하면 율법을 지키면서 죄악을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정말 정성을 다 해서 제사를 드리고 또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율법을 지켰지만 사단이 율법을 지키게 해 줌으로 해서 흠 없는 율법의 의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죄악을 행합니까?
그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 죄악이 무엇인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죄악을 알아야 그것을 행하지 않을 수 있는데 죄악을 모르다 보니까 그것을 행하고 있고 그것을 행하다 보니까 믿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늘 말씀을 하고 있지만 죄악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악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의 이성으로는 그것이 악하다는 것을 도무지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죄악을 행하고 있고 그들이 주의 이름을 부르고는 있지만 실상은 믿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레미야5:21절을 보겠습니다. (구 1058쪽)
“우준하여 지각이 없으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백성이여 이를 들을지어다”
듣지도 못 했습니다.
말이 됩니까? 우리 상식으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주의 이름을 듣지도 못했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들은 조상 대대로 하나님을 믿었고 한 번도 하나님을 안 믿은 적이 없는 백성입니다 그런데 주의 이름에 대해서 듣지도 못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준합니다.
어리석고 둔 합니다. 이스라엘의 백성들이 우준하여 귀가 있어도 듣지를 못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보내주셔서 복음을 전하시고 있지만 이스라엘 백성은 우준하여 선지자들이 전하는 말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듣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스라엘의 역사를 성경을 통해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 그들 스스로가 주의 이름을 전했습니까?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보내 주시고 있지만 도리어 듣지도 않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들을 수가 없습니다. 왜 들을 수가 없는가 하면 우준하여 지각이 없어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듣지도 못한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데 듣지도 못한 그들이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지극히 적습니다. 우리는 믿음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니 주의 이름에 대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지혜의 은사를 주신 사람을 통해서 들어야 합니다.
그렇게 들으면 믿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듣지를 않아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있습니다. 먼저 성경을 보고 복음을 안 사람을 통해서 들을 수 있게 하시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령을 받은 사람이 없으니까 주의 이름에 대해서 들을 수도 없고 듣지를 못하니까 믿을 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스라엘에 얼마나 많은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이 있었습니까? 그러나 그들 중에 어느 한 사람도 주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있는 사람이 없어서 듣지를 못하고 있고 듣지를 못하니까 믿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들어야 믿을 수 있는데 성경을 보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문자적으로 보다보니까 주의 이름의 뜻을 들을 수 없습니다.
듣지도 못 했습니다.
성경이 좀 심하게 말씀을 합니까? 성경에서 듣지도 못했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거짓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그런 표면적인 것을 보면서 성경을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에 구원을 받을 사람이 얼마나 적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 역시 듣지도 못하고 있습니다. 누가 주의 이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이 시대 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도리어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으로 사람들을 부끄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습니다.
왜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가 하면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부요하신 분으로서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 차별이 없는 의를 주심으로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고 있지만 이 말씀을 듣지도 못하고 있고 믿지도 않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3:16절을 보겠습니다. (신 21쪽)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전파하는 자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을 통해서 전파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역시 스스로 지혜가 있어서 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타락의 길로 갈 때마다 선지자들을 세우셔서 그들을 통해서 복음을 전파하게 하셨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누가 알아서 전했습니까? 우리가 선지자들을 보고 있지만 그들 역시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임해서 전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지만 이스라엘은 그들이 전파하는 말을 듣지를 않았고 도리어 대적을 했습니다.
들을 수 없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 다는 말씀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 역시 주의 이름을 전파하는 자가 거의 없습니다. 이 시대 기독교는 주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종교를 전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종교가 다수를 이르다보니까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전파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굳이 전파하는 자가 없어도 성경을 통해서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셔서 성령을 보내 주시면 복음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전파하는 자가 없습니까?
그것은 핑계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는 누구나 성경을 볼 수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그런 핑계를 댈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고 또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아니하시고 후히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이 성경을 마음 놓고 볼 수 있는 시대가 불과 100여 전 부터입니다. 이 성경을 보고 주의 이름을 불러 구원을 받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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