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로마서 강해 -

로마서 강해 35강 불법입니다

윤주만목사 2017. 9. 28. 17:18


로마서4:8절을 보겠습니다. (244)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

 

불법입니다

반드시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복이 아니라 천국의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단 한 가지의 이유가 있다면 그것은 천국의 복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불법을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성경에서 불법을 말씀하고 있지만 불법이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불법에 대해서 여러 가지로 비유를 통해서 말씀을 하고 있지만 마치 이 세상에서 죄를 짓는 그런 잘못을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의미입니다

불법을 말씀하고 있으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불법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사하심을 받을 수 있고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을 알아야 건짐을 받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성으로 생각하면서 대강 불법이 이런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목사들부터가 성경을 너무 쉽게 아주 단순하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점점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가 되어가고 있는가 하면 성경을 무슨 도덕책으로 생각하고 성경을 보고 도덕에 관한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목사들의 설교만 들어보아도 그들이 성경을 얼마나 단순하게 보고 있는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야기만 하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생을 얻는 것은 쉽습니다. 누군가 한 사람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면 그에게서 복음을 듣고 믿으면 세상에서 지적인 능력이 없어도 믿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군가 한 사람이 진리로 인도함을 받고 있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불법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하심을 받아야 하는지 가리우심을 받아야 하는 줄도 모르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시대는 불법에 대해서는 바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의 가리우심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인입니다

이제까지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했지만 실상은 불법만 행했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불법의 도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극에 달했지만 그들은 도리어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초대 교회를 지나오면서 교회는 급속하게 타락의 길로 갔고 그들은 불법을 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는 그때에 벌써 교회 안에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 나타나기 시작을 했습니다. 아주 짧은 기간 동안에 복음이 전해지고 나서 교회는 완전히 종교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이 시대는 그 종교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기독교인이 아닙니다. 저 역시도 오랜 기간 동안을 기독교인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기 시작하면서부터 내가 기독교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되고 이제는 기독교인이라고 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대로 성도입니다

 

기독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종교가 되는 것을 싫어하시고 있습니다. 종교가 되는 그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불법을 행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종교가 되지 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세상 죄인으로 사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여러분이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 안에는 온갖 불법이 다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믿음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고 교인들은 다 믿음으로 알고 있습니다.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는 오시지 않아서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가 불법이라는 것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오셔서 율법 아래 있지 말아야 하는데 이 시대 교인들은 도리어 성령이 오시면 율법을 잘 지킬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그 자체가 성령을 거역하는 일입니다 주님께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도 사하심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서 사하심을 받지 못하면 그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율법을 지키면서도 전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이 믿음으로 행한다는 말로 미화를 시키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 아래 있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성령을 거역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단은 지금까지 이 세상에 세워지고 있는 교회에 율법을 지키게 함으로 해서 성령을 거역하게 해서 사하심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성도입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우리는 영의 사람입니다 아담으로 말미암아 탄생이 된 육체의 사람은 이미 죽었습니다. 죽었다는 것은 율법에 의해서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며 그래서 사도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는 말로만 믿는다고 하지 실제 그들의 행위를 보면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는 그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렇게 죽은 성도는 더 이상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불법을 행하지 않고 있고 그것을 사도바울이 사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주님께서 죄 없다고 인정해 주실 사람은 복이 있다

 

인정하다

(사람이 어떤 사실을, 또는 사람이 어떤 대상을 일정한 지위로)확실히 그렇다고 여기다 라고 사전에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가 죄인입니다 내가 어떠한 죄인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어떤 죄인인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죄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죄에서 가리우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죄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고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솔직히 이 시대 십계명을 보고 죄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되고 있습니까? 간혹 가다가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합니다.

 

부모를 공경하지 못 했습니다

그러면 자기가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다른 계명에 대해서는 아주 잘 지키면서 살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과 같이 이 시대 교인들도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십계명을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친히 써서 주신 율법대로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를 아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입니까? 그들에게 주님께서 주님을 찾아온 청년에서 하시는 말씀을 똑같이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말씀하면서 계명을 지켰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시대 교인들도 그 청년과 같이 내가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었고 잘 지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면서 살았다고 말을 할 것이 분명합니다.

 

죄를 모릅니다.

십계명을 외우면 뭐 합니까? 그 계명을 보고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가를 모른다면 그는 어리석은 자입니다 아니 부자 청년과 같이 근심하면서 돌아갈 사람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그들의 육체는 교회에 있을지 몰라도 복음에 있어서는 이미 돌아섰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십계명을 지켰습니까?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성경을 모르는 무식한 자입니다 지금 기독교인은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저 역시 기독교인으로 살 때는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러나 그때는 제가 십계명을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는 줄 알고 있었습니다.

 

어느 계명을 지켰습니까?

그리스도편지에 십계명에 대해서 설교를 올려 드렸습니다. 그 말씀을 보고 자기가 십계명을 다 지켰다고 할 사람이 있으면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는 종교에서 살 때 한 가지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그것을 주님께서도 유대교에 있었던 부자 청년에서 가르쳐 주셨지만 그 부자 청년도 자기가 십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잠언28:13절을 보겠습니다. (94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입니다 어떤 죄인인가 하면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는 자기들이 십계명을 지켰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한 그들이 주님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신 그 계명을 지켰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죄를 숨기는 자입니다

물론 죄를 짓고도 숨기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 숨기고 있는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은 죄를 숨기는 자와 같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기가 죄를 짓고 숨기는 것이나 죄를 짓고도 모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를 알아야 합니다.

죄를 모르면 숨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숨기고 싶어서 숨기지는 않을지라도 역시 숨기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죄를 깨닫지를 못하는 사람은 고의는 아닐지라도 역시 숨기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입니다.

율법을 보았으면 내가 그 율법을 범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 율법이 많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서는 주님이 오셔서 하시는 구속의 일도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진짜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영적으로 짓는 죄에 대해서 말씀을 하는 율법도 있습니다. 율법을 보고 이것을 분별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모든 율법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완전케 하셨습니다. 물론 육적인 것도 있겠지만 율법은 그림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영적인 의미가 다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의미를 알아야 내가 죄를 지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죄를 숨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성경을 보고 율법의 의미를 모르고 있다면 고의는 아니더라도 숨기는 자가 됩니다. 죄를 알아야 그것을 자복할 수 있는데 죄를 모르게 되면 자복할 수 없게 되어서 숨기는 자가 된다는 것을 잠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는 이스라엘과 마찬가지로 십계명을 보고도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오해를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은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고 하니까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자기가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그 죄를 자복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자복을 하고 있는가 하면 밤새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를 할 정도로 자복을 하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인들입니다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 사람이 다시는 거짓말을 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가 신이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런 것을 가지고 간증이라고 하면서 도리어 자기의 의를 쌓고 있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예전에 세상에서 살았습니다.

그때는 우상을 섬기면서 살았습니다. 이제 교회에 들어와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실수를 해서 누군가에게 미혹을 당해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고 말았습니다. 십계명을 생각하면서 자기 죄를 자복하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우상을 섬기는 일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그 죄를 버리겠다고 말을 하고 있고 그것을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이 불쌍히 여김을 받습니까?

절대로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자기 죄도 모르는 사람이고 자복하지도 않은 사람이고 또 버리지도 않은 사람이기 때문에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람은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죄도 모르는 사람이 아니 죄도 아닌 것을 가지고 자복하는 그 사람에게 어떻게 그 죄를 용서해 주시고 인정치 아니할 수 있습니까? 이 시대 교인들이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한 행위를 하면서 자기들이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람이 죄인입니까?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죄를 자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죄를 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죄를 깨달아야 합니다. 율법을 보고 죄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는 사람이 어떻게 죄를 자복하고 버릴 수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해 주시고 싶어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육적인 죄입니까?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이 세상 죄를 이미 지고 가셨다면 그것은 더 이상 죄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지고 가신 그것을 죄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죄입니다.

이 세상 초등학문에서 말하고 있는 죄입니다. 그것을 이제 죄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제가 그런 죄를 지어도 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죄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가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죄라고 하고 있고 자복하면서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버릴 수 있습니까?

여러분이 그 죄를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물론 사람에 따라서는 어느 것은 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그런 죄를 버릴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 그것을 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면 아담은 에덴에서 선악과를 절대로 따 먹지 않았습니다.

 

십계명의 어느 계명을 예전에 범했습니까?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고 주님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 기도를 하면서 자복을 하고 나서 이제는 더 이상 그 죄를 짓지 않고 있습니까?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죄를 버리든 안 버리든 우리에게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그것이 상관있다고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 모두는 기독교라는 종교 안에서 우상을 숭배를 했습니다. 나는 우상을 숭배하지 않았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기독교인은 다 우상을 숭배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복음을 들었던 사람 빼고는 모두가 다 우상을 숭배를 했고 지금도 교회 안에는 수많은 우상들이 세워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상입니다

이제까지 우상이 무엇인가를 말씀을 드렸습니다. 로마서를 통해서도 충분히 우상이 무엇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렸습니다. 복음이 내 안에 계시가 되기까지는 우리는 우상을 숭배하면서도 그것이 우상숭배라는 것을 모르고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모든 행위가 다 우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행위들이 다 우상이라는 것을 성경을 보고 성령의 감동으로 깨달았습니다. 정말 우리의 이성적 지식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을 성령을 보내 주셔서 그것이 우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보니까 죄를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육적인 죄가 아닙니다.

영적인 죄를 깨달았다는 말씀입니다 우상 한 가지를 가지고 말씀을 드리고 있지만 우리는 십계명의 어느 한 계명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성령의 감동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내가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했던 십계명이 실상은 다 죄가 되었습니다.

 

깨달은 성도입니다

내가 우상을 숭배했다는 것을 깨달은 성도입니다 그 죄를 자복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것이 죄라는 것을 깨닫고 죄를 자복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우상 숭배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해서 살인도 하지 않고 있고 도적질도 하지 않고 있고 거짓 증거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누가 죄를 버린 사람입니까?

문자 그대로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죄를 버린 사람입니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이 죄를 버린 사람입니까? 이것을 능히 깨달을 자가 없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이것을 능히 깨달을 수 없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은혜라고 밖에는 더 이상 설명할 수 없습니다.

 

누가 죄를 자복했습니까?

이 시대 기독교인들이 죄를 자복하고 버렸습니까? 그들은 죄를 자복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고 있는 우리 성도가 죄를 자복했고 또 죄를 버린 사람입니다 그런 성도만이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시편32:2절을 보겠습니다. (824)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은 자는 복이 있도다


정죄를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군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복이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의 복을 위해서 사는 자가 아니라 하늘에 있는 복을 사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누구에게 정죄를 당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정죄를 당하지 않으려면 자기 죄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죄를 자복하고 그 죄를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죄도 모르기 때문에 자복할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고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누가 복 있는 사람입니까?

부자 청년과 같이 자기가 어려서부터 계명을 다 지켰다고 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까? 그 사람은 율법 아래 있어서 저주를 받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을 보고 그 의미를 알고 율법을 버리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율법을 사람의 이성으로는 절대로 버릴 수 없습니다.

 

왜 죄인이 됩니까?

율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인이 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죄를 당하는 순간에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무엇이 사람을 정죄하고 있습니까? 문자 그대로의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정죄할 지라도 하나님께서 옳다 인정하셔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나를 보고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모든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해도 하나님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신다면 복이 있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사람의 생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니 사람이 어떠한 말을 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성도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시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모든 사람이 나를 죄인이라고 해도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사람에게서가 아닙니다.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말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목사가 하나님의 대언자입니까? 그도 사람입니다 더구나 율법을 지키고 있는 목사라면 그의 말은 전부 거짓이라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그가 아무리 교양이 있게 지적으로 이야기를 한다 해도 그는 거짓에 속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겨주셔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겨주시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죄도 모르고 있고 자복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 버리지도 않고 있습니다.

 

누가 버렸습니까?

죄를 알아야 버릴 수 있는데 죄도 모르는 그들이 어떻게 버릴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 기독교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죄도 모르는 사람이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입니다 아직까지도 십계명의 모든 계명을 어기면서 버리지를 않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지킨다고 하는 그 문자를 보고 버리지를 못해서 정죄를 받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정죄를 당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람에게서 정죄를 당해도 정말 힘이 듭니다. 하물며 하나님께로부터 정죄를 당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정죄를 당하지 않는가 하면 마음에 간사가 없는 사람이 정죄를 당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간사한 자인가 하면 잠언에서 그 진찬을 탐하는 자를 간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진찬이 무엇입니까?

율법의 의로 부자가 되게 하는 말이 진찬입니다 그것이 간사한 자의 말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간사한 것이 없고 정죄를 당하지 않는 성도가 복이 있습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율법에 대해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스스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10:18절을 보겠습니다. (296)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십니다.

그 말씀은 주께서 그를 옳다고 인정해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주님께 인정함을 받으려고 하는 모든 행위가 도리어 정죄를 당하고 있지만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라는 말씀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무엇으로 칭찬을 받습니까?

우리가 행위로 칭찬을 받을 수 있습니까?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죄를 당하지 않고 옳다 칭찬을 받으려면 사람의 행위로는 안 된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도리어 그 행위가 스스로에게 정죄가 되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지도 못하고 생명도 없는 그를 누가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님은 이 세상에 계시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칭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다시 오실 때 칭찬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주님이 다시 오십니다.

죄가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가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죄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자복을 했고 이제는 그 죄를 버렸습니다. 그렇게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 성도를 칭찬해 주겠습니까?

 

아무도 안 합니다

우리를 보고 너희가 진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냐고 물을 것이 분명합니다. 칭찬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옳다고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정죄를 당하고 있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성도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칭찬해 주시고 옳다 인정해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과 같이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우리 성도를 누가 칭찬해 주겠습니까? 누가 옳다 하겠습니까? 이 세상에 어누 누구도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오셔서 우리를 옳다 인정하고 우리의 죄를 인정치 아니하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복입니다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다고 시편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볼 때는 어떻습니까? 우리는 율법을 지키지 않는 죄인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있는 그들이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영의 일입니다

우리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우리 육체는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수 없습니다. 우리 육체의 죄를 인정하셨기 때문에 만세 전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구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은 육체의 죄를 인정치 아니하셨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괜스레 십자가를 지신 것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 육체의 일이 아니라 영의 일이기 때문에 은혜가 더욱 넘치고 있습니다.

 

로마서4:9절을 보겠습니다. (244)

그런즉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 하노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이러한 복은 할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내리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에게도 내리는 것입니까? 우리는 앞에서 말하기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하였습니다.


행복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불법을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누가 행복한 사람인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행복

삶에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 흐뭇하다는 것이 사전에서 말하는 행복입니다 이 세상 사람은 자기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쁨과 만족감을 느껴서 흐뭇하면 행복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행복은 분명히 사전적인 뜻이 맞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육체의 행복을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행복하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육체적으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영의 일입니다

 

예수 믿어서 행복합니까?

무엇이 행복합니까? 여러분이 예배를 드리고 있어서 행복합니까? 마음껏 주님을 사랑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까? 그것을 행복이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이 세상 종교에 의해서 누리고 있는 행복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행복에 대해서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해도 우리 육체로는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남발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에서 행복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영의 일에 있어서 행복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영의 일은 무색, 무미, 무취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영의 일을 우리 육체가 느끼려고 하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행복입니다

복이라는 단어는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는 단 4번밖에는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 로마서4장에서 두 번 나오고 있고 신명기에서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고 있지만 그것을 우리가 육체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느끼려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체험을 하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리는 것은 말씀 그대로 영의 일입니다 영의 일을 느끼려고 한다는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종교가 되어 있는 교회는 사람들에게 느끼게 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려서 행복합니까?

찬양을 불러서 행복합니까? 기도를 드려서 행복합니까? 그것은 성경에서 말씀하는 행복이 아닙니다. 성경은 영의 일에 대해서 행복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제까지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지금 4장이 무엇을 가지고 연결을 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319-26절까지의 말씀을 가지고 이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이 행복이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율법의 행위로는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차별이 없는 하나님의 의가 미치고 있습니다.

 

그 의가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이 모든 일이 영의 일이라는 것을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기억하시고 계속해서 로마서를 보아야 합니다.

 

그런즉 행복이 무엇입니까?

우리 안에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얻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된 것을 행복이라고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누리는 행복은 이 세상 육체가 아니라 영이라는 것을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행복이 무엇입니까?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 자 된 것이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앞에 있는 결론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행복이라는 단어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이 행복인가 하면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된 것이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이 행복입니다

어느 행복인가도 모르고 그저 행복이라는 단어가 나오니까 행복을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보기 쉽게 성경을 편찬하는 사람들이 장절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볼 때는 그 장절만 보지 마시고 앞뒤에 말씀이 어떻게 연결이 되고 있는가를 알고 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행복합니까? 율법을 지키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행복합니까? 그가 느끼는 행복은 육체의 행복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느끼는 행복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성경 말씀을 바로 알아 진리로 인도하심을 받아 영생을 확신하는 그것 뿐 입니다.

 

그런즉 이 행복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그것을 이미 3장에서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3장의 말씀을 알고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그것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직 믿음으로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행복입니다

세상의 행복이 아닙니다. 우리 성도는 이 세상을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늘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입니다 그 행복이 무엇인가 하면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행복이라는 말씀입니다

 

신명기33:29절을 보겠습니다. (318)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뇨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성도입니다

우리는 행복한 자입니다 육의 일에 있어서 행복한 자가 아니라 영의 일에 있어서 행복한 자라는 말씀입니다 이 행복은 이 세상에서 누리는 행복이 아닙니다. 성도가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는가를 모르고 세상에서 느끼는 그 행복을 누리려고 한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이스라엘입니다

그들의 육의 일은 우리의 영의 일을 예표로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들을 왜 행복하다고 하는지를 알아야 우리가 행복한 자가 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에게 하신 이 말씀이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또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모세의 마지막 말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서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마지막으로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마치고 이제 모세는 느보산에 올라가 가나안을 보면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정말 가나안에 들어가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아니 자기 눈으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보고 싶었습니다.

 

신명기를 보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얼마나 가나안을 사모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저 이 세상에 있는 가나안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에 있는 그 가나안을 보고 싶어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이제 느보산에 올라가 죽고 이제 그 자손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것을 말하면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가슴이 찡합니까?

그는 정말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을 사모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들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갈 수 없는 그 땅에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행복한 자인가 하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가는 사람이 행복한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모하시기 바랍니다.

아니 행복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우리도 가져야 합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도 들어가지 못하는 그 땅을 들어가는 이스라엘에게 행복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모세도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천국의 예표인 가나안을 보면서 모세는 정말 사모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에게 마지막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이라는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 조금만이라도 알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스라엘입니다

애굽에서 나온 20세 이상은 광야에서 다 죽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40년이 지난 이제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들어가려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이 세상의 이성으로 생각해도 가슴 벅차는 일입니다 자기 조상들이 우거했던 땅입니다 그 땅을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이제 그 땅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육체적으로도 행복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그런 육체적인 것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그 행복과는 비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모세가 얼마나 부러워하는 마음으로 이스라엘이여 너희는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 줄을 알아야 합니다.

 

천국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그 행복을 우리가 조금이라도 이해하게 하기 위해서 이 행복이라는 단어를 신명기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가나안을 목전에 두고 모세가 죽음을 앞두고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큰 행복이면 모세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이스라엘에게 이 말씀을 하고 있겠습니까? 천국을 사모하고 있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누가 압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누가 이 말씀을 깨달을 수 있고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습니까? 정말 짧은 한 마디지만 가슴이 벅 차는 말씀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천국을 목전에 두고 이 말씀을 듣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몇 번을 계속해서 들어도 기분 좋은 말씀입니다 저는 정말 모세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저에게 하나님께서 이 행복을 말씀한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우리 성도들에게 그런즉 이 행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의 행복이 무엇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을 받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을 모세가 행복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사도 바울이 이 행복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영생을 얻는 일입니다 우리 육체가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탄생이 되어서 그 영이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에 하늘의 신령한 것을 입고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립니다. 그것을 가장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 지금 신명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라는 그 말씀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 시대는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방의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 행복이 무엇인가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에 있어서 행복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육체로 행복을 느끼려고 교회에 나가서 육체의 사람이 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구원입니다

너같이 여호와의 구원을 얻은 백성이 누구냐고 묻고 있습니다. 정말 이 시대 복음을 깨닫고 있는 성도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가 이 행복을 어떻게 받았습니까?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로 행복한 자가 되었습니다.

 

율법주의자는 모릅니다.

그들의 지혜로는 이 행복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만이 말할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와 같이 구원을 받은 성도가 어디 있습니까? 이 시대 천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 중에 누가 구원을 받았습니까?

 

없습니다.

우리와 같이 구원을 받은 성도가 없습니다. 이 행복이 얼마나 가슴 벅차는 말씀입니까? 복음을 깨닫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기 육체와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어 있는 성도만이 이 말씀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들을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을 알면 뭐 합니까?

신명기의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알고 있으면 뭐 합니까?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라는 뜻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행복자입니다 여호와께서 구원을 해 주셨기 때문에 행복자입니다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너의 영광의 칼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적이 누구입니까?

이스라엘의 대적은 당시 가나안에 살고 있었던 족속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대적은 율법이라고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우리에게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그 불법에서 사하심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더 이상 율법을 안 지켜도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해서 율법을 밝히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 대적이 우리에게 복종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대적인 율법을 더 이상 지키지 않고 있습니다. 정말 우리 성도가 얼마나 큰 은혜를 받은 행복자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

우리에게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우리에게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여 너는 행복자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우리 성도를 보고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릅니다.

이 시대는 이 행복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영의 일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육의 일에 빠져 있습니다. 말로는 천국을 간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은 세상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에서 누리는 행복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들이 가고자 하는 천국에 대해서 무지하기 때문에 육체의 일로 세월을 다 보내고 있습니다.

 

성도는 행복자입니다

왜 행복한 자인가 하면 하나님의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행복자라는 말씀입니다 그 구원은 이스라엘과 같은 육의 구원이 아니라 영의 일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구원도 신체의 구원으로 알고 있어서 사실 그들이 천국을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세상이 아니라 천국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 성도는 행복자입니다

 

에베소서1:3절을 보겠습니다. (310)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성도는 행복자입니다

왜 행복한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행복자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입니다 천국은 사람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입니다

신부가 신랑을 위해 단정한 것 같습니다. 여러 가지 언어로 표현을 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에 있는 말씀이 천국을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비유입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라는 것을 알고 성경을 보아야 합니다.

 

하늘이 속한 모든 신령한 복입니다

이 정도로 밖에는 표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가 구원을 받은 것을 사실 우리의 언어로는 표현이 안 되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복을 누리기 때문에 우리를 행복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행복한 자입니까? 우리나라에만 해도 기독교인이 천만 명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그리고 영의 비밀을 알아 우리 육체는 썩어 없어지고 우리 안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탄생이 된 영이 주님이 오시는 날에 깨어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생명을 모릅니다.

영생을 모르고 있습니다. 천국도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기독교는 사실 성경에서 말씀하는 복음과는 너무 동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성경에 로마서에 문자적으로 기록이 되어 있다고 해서 자기들이 마치 천국에 들어가는 구원을 받은 행복한 자로 생각하고 있지만 실상은 멸망을 당하는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행복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사람만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 복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안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것이 얼마나 큰 영광이라는 것을 성경에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 세상에서 대통령이 되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의 영광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입니다

성도에게만 주어지는 복입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성경의 문자를 안다고 해서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지금 이 시대는 교회 안에서 불의를 행하고 있고 또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하심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안 됩니다

율법을 한 가지라도 지키고 있다면 여러분은 절대로 행복한 자가 될 수 없습니다. 이제까지 사도 바울이 로마서를 통해서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불법을 행하는 일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이 하고 있는 행위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복입니다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받은 성도가 행복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행복이 할례자에게뇨 혹 무할례자에게도뇨 대저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자입니까?

무할례자입니까?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할례를 받으라고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이미 할례를 받은 유대인이 있었고 아직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례자냐 무할례자냐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지금 이 시대 복음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들에게는 전혀 해당이 안 되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이전에 이미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는 것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율법과는 아무 상관이 없이 하나님을 믿어서 이것을 그의 의로 정하셨다는 말씀입니다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갈라디아서6:15절을 보겠습니다. (309)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뿐이니라

 

초대 교회입니다

지금 율법을 지켜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 누구에게 복음이 전파가 되었는가 하면 할례자에게 또 무할례자에게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과 같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습니다.

 

물론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우리 성도들 역시도 예전에는 다 율법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복음을 깨닫고 난 이후에는 율법을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과 할례는 다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고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지키다가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면 이제 더 이상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할례는 다릅니다.

이미 할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을 다시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런 의미에서 할례자나 무할례자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지 만약에 십일조를 가지고 말씀을 했다면 사도 바울은 절대로 십일조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씀했습니다.

 

로마서입니다

그리고 갈라디아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할례에 대해서 참 많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번에서 말씀을 드렸지만 할례는 613가지 율법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율법이라는 것을 여러분이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의 대표가 되는 것이기 때문에 사도 바울이 할례를 가지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드리고 있습니까?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런 것을 하면서 구원을 받을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례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지 만약에 이것이 십일조나 주일을 가지고 말씀을 했다면 사도 바울은 다르게 말씀을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다른 율법은 하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할례는 다릅니다.

이미 몸에 한번 했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이스라엘은 조상 대대로 태어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했습니다. 그렇게 할례를 했는데 이제 복음을 들었습니다. 그가 다시 할례를 돌이길 수 있습니까? 만약에 십일조나 주일을 지키는 일이라면 사도 바울은 율법을 지키는 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분명히 말씀을 했습니다.

 

할례

육체에 행하고 있습니다. 무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할례를 했다고 해서 아무 의미가 없고 또 할례를 받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있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할례자도 무할례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면서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담의 자손 아브라함을 의로 여기셨습니까? 절대로 아닙니다. 그런데 이 시대 교인들은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니까 아담의 자손인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할례자입니까? 무할례자입니까?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제가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이미 할례를 받았으면 돌이키지 못 합니다 우리가 할레를 안 받는다고 해서 지금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 말씀하는 것을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무엇이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입니까?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아브라함이 아닙니다. 육체의 내가 아닙니다.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가 누구입니까? 요한복음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렇게 의로 여기심을 받은 영이 행복하다는 말씀입니다 영이라고 하니까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바로 알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썩어지는 내 신체는 내가 아닙니다. 썩어지는 것이 여러분이 되면 뭐하겠습니까?

 

그것은 썩어 집니다.

그 썩는 것을 자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 생각대로 썩어 없어지고 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썩지 않는 내가 있습니다. 그래서 거듭남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누가 진짜 나인가를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시대는 썩어지는 것을 자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아닙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형상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림자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안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나라고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안 믿는 사람이고 영의 비밀을 모르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라 썩어지는 죄 덩어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입니다

누구입니까? 썩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영이 진짜 나입니다 그 영이 하늘의 신령한 몸을 입고 구원을 받아 영생을 누립니다.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우리도 믿음이 있으면 의로 여기심을 받습니다.

 

새로 지으심을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거듭나는 생명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는 이 생명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마치 이스라엘의 사두개인과 같이 자기들이 알고 있는 사람의 이성을 따르는 부활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행복입니다

누가 행복합니까? 아담의 자손 아브라함이 행복합니까? 그것이 아닙니다. 그 아브라함은 이미 썩어 없어졌습니다. 그 흔적조차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구원을 받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 해도 그것은 영의 일이기 때문에 육체의 아브라함은 이미 썩어 없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골로새서3:10-11절을 보겠습니다. (327)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새 사람입니다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그에게 새 사람이 탄생이 된다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안에 새 사람이 탄생이 되고 있습니다. 그 새 사람이 어떻게 탄생이 되는가 하면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으로 탄생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영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람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내 신체가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새로 지으심을 입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는 새 사람을 입은 자입니다 어떻게 입었는가 하면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셔서 입었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입니다

갈라디아에서 아브라함의 아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새 사람을 누가 입는가 하면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겉 사람이 누군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할례를 받았는가 아니면 할레를 받지 않았는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종이냐 자유자냐도 의미가 없습니다. 그가 누군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신 것과 같이 그 사람이 누군가는 중요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있으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성경입니다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이 있는 성도만이 새 사람을 입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자랑할 데가 어디뇨 있을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믿음으로 새 사람을 입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자랑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거기에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습니다.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그 죄를 가리우심을 받는 자는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치 아니하실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불법의 사하심을 받지도 않은 사람은 아니 아직까지 불법을 행하고 있는 사람은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그러나 지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은 다 불법을 행하고 있습니다. 그 상태에서는 그 믿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먼저 그 불법의 사하심을 받고 죄의 가리우심을 받아야 믿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상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의로 여기심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행복한 자입니다 어떻게 의로 여기심을 받는가 하면 오직 믿음으로 여기심을 받는데 이때 새 사람이 지으심을 받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4:10절을 보겠습니다. (244)

그런즉 이를 어떻게 여기셨느뇨 할례 시냐 무할례 시냐 할례 시가 아니라 무할례 시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아브라함이 그러한 인정을 받았습니까? 그가 할례를 받은 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할례를 받기 전에 그렇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할례를 받은 후에 된 일이 아니라, 할례를 받기 전에 된 일입니다

 

그런즉

또 다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어느 말씀에 그런즉 입니까? 로마서310-26절에서 말씀을 했습니다. 그 말씀에 대해서 그런즉 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그냥 차례로만 보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말씀이 어느 말씀과 이어지고 있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즉 입니까?

율법으로는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의로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그리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을 연결해서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로 여기시는 것이 할레시냐 무할례시냐고 물으면서 무할례시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이 언제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가 믿음의 조상이면 그가 율법을 지키지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 아니면 할례를 받은 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먼저냐고 묻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레라는 율법을 지키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냐 아니면 할례를 받은 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냐고 사도 바울이 묻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어떻게 의로 여기셨는가 하면 예수 안에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습니다. 잘 이해를 하시기 바랍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은 영의 일입니다

 

육체의 일이 아닙니다.

할례를 받는 것은 육체의 일입니다 그 육체의 일이 있기 전에 아브라함이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육체의 일과 영의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의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육체의 일을 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 나왔습니까?

육체의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초대교회에 성도들에게 육체의 일을 하기 전에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오해를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할레는 분명히 율법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아니 율법을 지켜도 된다는 정당성을 찾지 마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율법의 문제를 유야무야 넘어가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무엇을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언제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를 말씀을 해 주기 위해서 구약의 예표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율법을 지켰는데도 의로 여기심을 받았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여기심을 받았으면 이제 율법을 지켜도 된다고 말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표면적으로 분명히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기 전에 그 믿음을 의로 여기심을 받았습니다. 그 후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고 난 후에 할례를 받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을 너무 비약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리스도편지에 있는 말씀을 보면 어떻게 하든지 반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지금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어떻게 의롭다 하심을 얻었는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습니다.

 

아브라함도 율법을 지켰습니까?

믿음으로 의로 여기심을 받고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습니까? 혹시라도 그렇게 생각할 사람이 있을까봐 말씀을 드립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가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자기 육체에 할례를 행한 것은 사실입니다 창세가 15장에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고 말씀을 하고 17장에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창세기17:10-11절을 보겠습니다. (2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너희는 양피를 베어라 이것이 나와 너희 사이의 언약의 표징이니라

 

그럴 사람이 분명히 있을 수 있습니다

할례가 400년 후에 율법으로 정해졌습니다. 분명히 할례는 율법입니다 제가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러나 구약은 그림자와 예표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은 로마서에서 말씀하는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때가 언제인가는 이미 말씀을 드렸기 때문에 더 이상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브라함도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다고 말을 하면서 십일조의 정당성을 찾고 있습니다. 그리고 할례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율법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에 제가 이 말씀을 하는 것 자체도 이해를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초대교회입니다

특히 갈라디아에 있는 교회에 사람들이 왜 할례를 받았다고 생각합니까? 그들이 사도 바울로부터 할례가 율법이라는 것을 못 들어서 할례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 말씀을 들었지만 창세기를 말씀하면서 아마도 분명히 그렇게 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았다고 말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봐라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 아브라함도 할례를 받기 전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지 않았느냐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 하시고 그것을 영원한 표징으로 삼는다고 말씀을 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너희도 아브라함과 같이 언약의 표징을 받으려면 할례를 받으라고 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가 몸에 분명히 할례를 받았습니다. 그것은 예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할례가 무엇입니까? 믿음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신명기에서 할례는 마음에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마음으로 지키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율법을 지켰습니까?

그가 의롭다 하심을 받은 후에 율법을 지켰습니까? 표면적으로는 분명히 지켰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에게 하라고 하신 할례는 이면적인 할례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실제 표면적으로 할례를 했어도 아브라함은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표를 통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는 믿음으로 율법을 지켰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 밖에는 없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아브라함의 예를 들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아브라함이 의로 여기심을 받은 것은 무할례시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아브라함과 같이 믿음의 자취를 좇는 자의 본이 되게 하려 했다고 이제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