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서3:18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이 약속을 율법이 생기기전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셨습니다. 보이는 땅을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셨고 영원히 살리라고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 땅은 실제 가나안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율법과 믿음입니다.
이 시대는 그것이 혼합이 되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율법과 믿음에 대해서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지만 사람들은 믿음도 좋고 율법의 행위도 좋아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생기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말씀을 하시고 영원히 거하리라고 약속을 해 주셨지만 믿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전혀 다른 차원입니다.
믿음에 대해서 성경에서 깨닫지를 못하면 그는 아무리 성경에서 문자적으로 많이 안다고 해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내 안에서 역사하는 믿음이라는 것은 내 스스로 신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내 안에 임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입니다.
어느 누구도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도가 믿는다는 것은 종교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이 세상 모든 종교는 그것을 가지고 믿는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것을 말씀하고 있지 않고 그 믿는다는 것은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탄생이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육적으로 받은 가나안 땅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받을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믿음이 있는 성도가 받을 기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을 우리 육체가 받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탄생이 되어 있는 영이 주님께서 오시는 날에 신령한 몸을 입고 부활을 해서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죽은 후에는 아무도 모른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지금 당장의 현실을 더 소중하게 생각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약속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생에서 더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바라는 마음은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의 일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우리 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내세의 일이고 영의 일입니다. 그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통해서 약속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고 우리가 천국에 소망을 가질 수 있게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그 약속과 율법과의 관계를 정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도 약속을 믿기 보다는 율법의 행위에 쉽게 빠져 들어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시고 그것을 성취하시고 있습니다. 그 약속의 성취 중에 중요한 것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완전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자기들 스스로가 율법을 지키려 하다가 결국에는 도리어 그것으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것으로는 약속을 폐할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그 약속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절대로 헛되지 않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헛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율법을 지킴으로 해서 헛되게 만들고 있습니다.
헛되게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도는 분명히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대로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라는 그 땅을 받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주님께서 그 처소를 우리에게 주시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지키는 순간 저주를 받게 되기 때문에 그것이 헛되이 되고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거저 주셨습니다.”
가나안 땅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바라는 천국입니다, 그 천국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그것은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에서 났으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고 약속에서 난 것이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하나님의 약속을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강하게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에서 난 것이면 절대로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자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약속을 받은 자는 역시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 사람은 약속을 받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하시고 영원히 거하리라는 그 약속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이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약속의 자녀라고 말하면서도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왜 그렇게 말 합니까?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실제 교회 안에서 주여 주여 하면서 예배도 드리고 있고 찬송도 부르고 있고 기도로 하고 있고 헌금도 드리고 있고 또 복음을 전하는 일에 헌신적으로 행위를 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종교적인 행위를 가지고 믿음이라고 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율법이라고 하면서 계속해서 그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또 율법은 약속을 폐할 수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천국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가지 못 합니다, 사도 바울은 유업을 말씀하면서 그것이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라 약속에서 난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유업을 받을 수 없고 반드시 약속을 믿는 성도만이 받는다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율법과 약속입니다.
율법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 그대로를 자기 육체로 지키는 것이고 약속은 하나님께서 일방적으로 주시는 은혜를 받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둘이 함께 병행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마치 전혀 다른 길과 같습니다. 이 길로 가면 저 길을 못 가고 저 길을 가면 이 길을 못가는 것과 같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4:14절을 보겠습니다. (신 244쪽)
“만일 율법에 속한 자들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이 되고 약속은 폐하여졌느니라”
유업입니다.
그것은 천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천국을 가는 두 가지 방법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율법이고 하나는 믿음입니다. 다시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은 내가 그냥 좋다고 해서 지키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율법을 너무 모르다 보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절대 아닙니다.
계속해서 말씀을 드리지만 율법은 천국을 유업으로 얻느냐 아니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느냐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 율법이 사람에 이성에는 지키는 것이 아무리 좋다 해도 그것은 사람의 이성이고 성경에서 어떻게 말씀을 하고 있는가를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천국의 유업입니다.
그리고 천국의 후사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내가 이 율법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얻겠다고 하는 의사 표시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내가 원하든 원치 않던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 율법은 나에게 그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나는 진심으로 하나님을 잘 믿기 위해서 지켰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생각입니다, 성경에서는 계속해서 율법을 지켰을 때와 그것을 못 지켰을 때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절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율법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누가 더 의롭냐하는 것의 계량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깨닫기 바랍니다, 내가 살인을 하지 않고 도적질을 하지 않았다는 그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율법을 지키는 순간 그 율법은 천국의 후사가 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게 됩니다. 누가 더 의롭냐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을 받을 수 있냐 저주를 받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은 후사가 될 수 없습니다.
아니 나는 율법을 지킬 때 후사가 되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이제 성도로서 살기 위해서 지킨다 해도 성경은 후사가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후사가 될 수 없기 때문에 그가 믿는다고 하는 그것은 거짓이고 그가 받았다는 약속도 헛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헛것이 됩니다.
그리고 약속도 폐하여 집니다. 내가 한 가지라도 율법을 지키는 순간 그렇게 된다는 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이 성경을 보면서도 국어를 모르다 보니까 정확하게 그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고 그것이 스스로를 저주하는 일이 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아래입니다,
그리고 믿음입니다, 이 둘이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 사도 바울이 이 둘을 이렇게 비교를 해가면서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국어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율법을 지키는 일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쉽게 깨달을 수 있지만 그저 거대한 종교에 의해서 교리로 정해서 내려오는 그것에 세뇌가 되어서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거짓말입니다.
아니 자기 스스로 속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스스로 거짓말을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라고 보면 맞습니다. 율법이 사람을 저주한다는 것을 성경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유업입니다.
그것은 분명히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받은 것입니다, 은혜라는 것은 내가 한 것이 없이 아니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그에게 거저 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으면 안 됩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주는 것이 은혜입니다. 내가 어느 정도 할 수 있는 것은 은혜라고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미 가나안에는 토착민이 있었습니다. 그 땅을 아브라함이 차지한다는 것은 아브라함의 능력으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가 가나안에 와서 자기 아내 사라를 빼앗긴 것만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는 일입니다.
그 땅을 주셨습니다.
그것도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것이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해 주셔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해 주시고 믿음으로 유업을 주시는 것을 은혜라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후사이면 믿음은 헛것입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면 믿음이 후사이면 율법도 헛것입니다. 이 말씀은 믿음이 있는 성도는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비교를 하면서 말씀을 하면 이것은 동전의 양면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이 시대는 믿음도 있고 율법도 잘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2:5절을 보겠습니다. (신 311쪽)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얻은 것이라)”
은혜로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 것은 은혜입니다. 실제 가나안이 아니라 천국을 주신 것은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잘 알겠지만 아브라함은 실제로 가나안 땅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가나안에서 우거하는 나그네로 살았지 실제 그 땅을 얻은 것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서 가나안에 들어갔을 때 얻었습니다.
그것은 천국입니다,
아브라함이 얻은 것은 천국이라는 것을 성경을 조금만 주의 깊게 봐도 누구나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은 은혜로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도 역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하는 이면적 유대인들이 은혜로 가나안 땅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유업입니다.
우리가 받을 유업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주님께서 내가 너희를 위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은혜로 유업을 얻어야 하는데 있어 방해가 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말씀입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은,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로마서와 갈라디아에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자기 능력으로는 구원을 받은 사람이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은혜로 받았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은혜가 은혜 되게 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율법을 지키지 말아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면 은혜는 사라집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을 계속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반포되기 전 430년 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하셔서 유업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가 약속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았는데 후에 반포가 된 율법이 그 약속을 폐하지 못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설령 율법을 지키지 못하더라도 약속이 폐하여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아니 율법이 저주를 하더라도 저주를 받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이 은혜로 받은 유업이 후에 율법이 반포되었다 해서 율법으로 저주를 받을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왜 율법을 지켜서는 안 되는 가를 명확하게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율법에 속한 자들은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자들은 유업을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왜 에덴에서 쫓겨났습니까?
물론 표면적으로는 선악과를 따 먹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따 먹지 말라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원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에 율법 행위에 속하게 되었고 그것으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선악과를 따 먹었습니다,
그것이 죄만의 문제입니까? 그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따 먹는 순간에 아담은 율법 행위에 속하게 되었습니다, 하라, 하지 말라, 율법입니다, 아담이 죄로 인하여 저주를 받은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를 했기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다고 이미 창세기에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보고 그저 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땅입니다,
아담이 따먹은 선악과로 땅이 저주를 받았습니다, 우리 인생은 흙입니다. 땅이라는 말씀입니다, 그 땅이 아담이 율법 행위에 속하는 순간에 저주를 받았고 우리 인생 모두가 율법 아래 있게 되어서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에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는다고 말씀을 했습니다.
내가 지켜도 되고 안 되고 하는 차원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반드시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사실을 모르고 그저 율법이 이 세상의 이성의 도덕으로 옳다고 생각이 되기 때문에 율법을 아무 생각이 없이 지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구원 은혜로 받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왜 은혜 되지 못하게 하는가 하면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를 받기 때문에 은혜 되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이성이 아닌 성경에서 율법을 어떻게 말씀하는 가를 바로 깨닫는 성도만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19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함을 인하여 더한 것이라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율법은 천사들을 통하여 중재자의 손을 거쳐 제정된 것입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사람들은 율법을 보면 지키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다고 해서 주신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로마서에서도 율법을 주신 이유를 말씀을 하고 있고 갈라디아에서도 똑같은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왜 율법을 주셨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정말 이 말씀 하나만 감동을 받아도 율법을 지키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합니까?
성경을 보고 자기들이 율법을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심지어는 율법을 잘 지킬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도들이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하는 기도인 줄을 모르고 있고 그렇게 기도하는 것을 마치 겸손한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기도가 미사여구라는 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자기 겸손의 모양을 나타내고자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지킨다고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자기는 지킬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은혜를 주시고 또 성령을 보내 주셔서 지킨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성경적인가를 따지기 이전에 사람들이 그 말을 들으면 얼마나 겸손하게 들려집니까? 스스로도 그렇게 기도하는 자신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고 있다고 최면을 걸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중보자의 손을 빌어 율법을 반포하셨기 때문입니다. 아니 사람들의 생각에는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율법을 지키려고 하고 있고 이 율법을 지키는 것을 마치 하나님께서 도와 주셔서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착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율법을 중보의 손을 빌어서 베푸신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진짜 우리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말씀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람들이 성경을 오해를 해서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 율법을 진짜 지키라고 하신 것은 절대로 아닙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율법을 주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해 주시기 위해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까지 명확하게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성경을 보려 고는 하지 않고 그저 자기들의 생각에 율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고 지키고 있습니다, 죄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도 율법을 보고 죄를 알려고 하기 보다는 그것을 지킴으로 해서 도리어 죄를 모르게 하고 있습니다, 자기가 죄인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바랄 수 있습니까?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출애굽기20:6절을 보겠습니다. (구 112쪽)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오해를 합니다.
특히 이런 말씀들 때문에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고 하니까 마치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고 또 천대까지 은혜를 받기 위해서 무모한 일을 하고 있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말씀을 잘 이해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하나는 먼저 분명히 내 계명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마치 하나님의 계명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중보의 손을 빌어 반포는 하셨어도 하나님의 계명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을 해서 너희가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이 율법을 자기들의 육체로 지키는 것은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정말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론 문자적인 율법은 하나님께서 중보의 손을 빌어 베푸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왜 안 되는가 하면 그 율법으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저주를 받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믿고 있고 그렇게 말하는 그들이 율법을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한다면 그 말 자체가 이율배반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어떻게 저주를 줄 수 있습니까? 저주를 받게 하는 그 계명은 사람의 계명이지 하나님의 계명이 아닙니다.
사람의 계명은 저주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이 있습니다. 물론 이 말씀이 십계명 중간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만약에 이 계명을 지키라고 한 것이 십계명의 문자 그대로라면 우리는 저주를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는 많이 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율법을 지키라고 하신 것 같은 말씀들이 많이 있지만 잘 분별을 해야 합니다, 아니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킬 수 없는 계명이 하나님의 계명이라면 그것은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습니다. 분명히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는데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우리에게 지키라고 하셨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의 계명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은 무거운 계명이고 또 사람의 계명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말씀은 요한일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생명을 얻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얻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는 것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율법의 문자 그대로를 지키는 것은 절대로 하나님의 계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는 율법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자는 저주를 받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저주 받게 하는 그 계명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을 될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면 쉽게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너무 안타깝습니다.
그저 이 세상의 이성으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내 계명을 지키는 자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는 그 말씀 그대로를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편지 설교에 십계명 하나하나를 설교로 올려 드렸지만 우리는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문자 그대로의 십계명 하나님의 계명이 아닙니다.
그것이 설령 하나님께서 친히 쓰셔서 모세를 통해서 주셨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계명이 될 수 없습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그 계명을 깨닫고 보니까 우리는 저주를 받아야 합니다. 저주를 받게 하는 그 계명이 어떻게 하나님의 계명이 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신다고 하신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계명을 지켰습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는 없습니다. 주님만이 지키실 수 있는 계명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못 지킵니다,
아니 사람의 이성으로는 이 계명의 의미조차도 모릅니다. 그리스도편지에 십계명의 영적인 의미를 다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것이 사람의 이성으로 이해가 됩니까? 이해도 안 되는 그 계명을 어떻게 지킬 수 있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십계명을 지키겠다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모르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그 의미도 모르고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그 말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그 계명을 지킬 수 있습니까? 율법은 우리가 지킬 수 있는 계명이 아닙니다. 오직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그것을 지키시고 천대까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지키라는 그 말씀만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지킬 수 없다는 것을 먼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왜 이 말씀을 하셨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시고 그 은혜를 천대까지 받으셨습니다. 그 은혜를 천대까지 받으신다는 말씀은 영원히 사신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천대까지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우리는 율법을 못 지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을 믿음으로 지켜서 천대까지 은혜를 받을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은혜입니다. 주님이 천대까지 은혜를 받으신 그것을 우리가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대까지 은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주님이 율법의 요구를 이루신 것이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이제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이 천대까지 은혜를 받는 것인데도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다 보니까 자기가 율법을 지켜서 천대까지 은혜를 받으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지키는 것이 절대로 아닙니다,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에는 저주가 있습니다. 왜 중보자의 손을 빌어서 율법을 반포하셨는가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그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약속된 그 후손이 오실 때까지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시려고 덧붙여주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구약에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신 이유는 그것을 지키라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오시기까지 그 율법을 보고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알면 어떻게 됩니까?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문자적으로 보고 지킴으로 해서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없었고 그것으로 인하여 은혜를 거절하는 죄를 지어서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알아야 은혜를 구할 수 있는데 이스라엘은 율법을 보고도 죄를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누가복음5:32절을 보겠습니다. (신 97쪽)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스라엘이 이 율법을 보고 어떻게 했습니까?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율법을 지켰다고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주님이 오시기까지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이스라엘은 몰랐습니다.
이스라엘이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몰랐습니까? 그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을 보고 육체를 살인한 사람을 보고 율법을 범한 죄인이라고 했고 도적질 하지 말라는 율법을 보고 도적질을 하는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이 죄를 지었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아는 것을 가지고 율법을 보고 죄를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율법을 안다고 하는 그들이 죄를 모르고 있습니다.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자기가 도적질을 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고 자기가 모든 율법을 범한 자라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어떻게 됩니까?
교회 안에는 의인만 있습니다. 십일조를 내는 의인이 있고 주일을 지키는 의인이 있습니다. 죄인이 있는 교회가 아니라 의인이 있는 교회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겸손하게 보이려고 죄인이라고 하고는 있지만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도 모르고 그저 남들이 죄인이라고 말을 하니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살인을 안 했습니다.
그런데도 죄인이라고 말을 합니다. 도적질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를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할 때는 모든 율법을 지키지 못했을 때 죄인이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죄인은 없고 교회 안에서 십일조를 잘 내고 주일을 잘 지키는 의인만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을 왜 주셨는가를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까지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율법을 보고 죄가 무엇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 시키러 왔다고 하는 그 말씀을 전혀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저 무조건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기 위해서 오셨다는 이 말씀을 알고 있다 보니까 이스라엘과 같이 의인 행세를 할 수 없으니까 자기를 주님께서 부르셨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자기가 지은 죄도 모르면서 그저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죄인입니까? 의인입니까?
아마도 모든 사람이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는데 있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자기가 어떤 죄를 지었는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왜 모르는가 하면 율법을 보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기 때문에 자기가 무슨 죄를 지었는지를 모르고 그저 죄인이라고 말을 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9:21절을 보겠습니다, (신 408쪽)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적질을 회개치 아니하더라”
요한계시록입니다.
성경은 교회 안에 일이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마지막 때의 일은 맞지만 그럴지라도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닫고 있어야 합니다. 회개를 말씀할 때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하고 있는 것이지 세상 사람은 아예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살인을 했습니다.
누가 살인을 했다는 말씀입니까? 이 세상 살인자가 살인을 했다는 것을 성경에 기록하고 있습니까? 그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살인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복술을 행하고 있고 음행과 도적질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을 모르다 보니까 율법을 보면서도 자기가 살인을 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살인한 자입니다.
자기가 살인하지 않았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로 그는 거짓말 장이가 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는데 마지막 천사가 나팔을 불기 까지 교회 안에서는 이러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안 합니까?
자기가 살인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복술을 빌지도 않았고 또 음행도 하지 않고 도적질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살인을 한 사람은 분명히 자기가 살인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회개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보고도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모르면 절대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살인도 하지 않았는데 누가 자기가 살인자라고 하면서 회개를 하겠습니까? 오히려 자기가 살인을 했다고 하면서 회개하는 그 사람이 더 이상합니다, 율법을 우리에게 주신 이유인데도 사람들은 자기가 실인을 했다는 것을 모르면서 지금도 마음껏 살인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마지막 때까지의 교회의 모습을 환상으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무엇을 살인합니까?
육체를 살인하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죽이고 있습니다. 차라리 육체를 살인을 하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어차피 육체는 한시적인 삶을 사니까 또 한 번 죽는 것이 정해져 있으니까 그런 일은 없어야겠지만 그래도 영혼을 살인하는 것 보다는 낫습니다.
육체를 살인하는 자는 어떻습니까?
아무리 광기가 있는 살인자라 해도 나중에 자기가 정신을 차리고 나면 진심으로 회개를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거짓이든 진심이든지 어찌 되었든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육체를 살인을 하고 국가에 의해서 구속이 되어 있는 사람들은 나중에는 결국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에 대해서 회개를 하면서 뉘우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 안에 살인자는 어떻습니까?
오히려 더 자랑스럽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죽을 때까지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너무나도 자랑스러운 일을 했는데 회개를 왜 합니까? 세상의 살인자는 자기 잘못에 대해서 회개를 하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살인자들은 절대로 회개를 하기 않습니다, 제가 말씀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분명히 회개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모릅니다,
자기가 왜 살인자인가를 모르고 있습니까? 율법을 백번 보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니 성경을 달달 외울 정도로 어려서부터 배웠으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성경을 아무리 보아도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면 그는 절대로 회개를 하지 않습니다.
도피성입니다.
그릇 살인한 자들이 그리로 피하게 성을 만들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안 피하고 있습니다. 그 도피성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정도 비유는 알고 있습니다, 알면 뭐 합니까? 자기가 실인을 해야 그리로 피할 수 있는데 율법을 보고도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을 하니까 피할 생각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살인, 복술, 음행, 도적질
여기서 다시 말씀을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그리스도 편지 설교에 다 해석을 해서 올려 드렸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오실 때까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시기 바랍니다.
부자 청년이 주님 앞에 와서 내가 무엇을 행하여야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율법을 말씀하시니까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다고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 부자 청년의 말은 거짓이 아닙니다. 그러나 율법을 보고 자기가 그것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는데 이 부자청년은 사람의 이성을 가지고 지켰다고 대답을 합니다.
이 부자 청년이 지켰습니까?
육체적으로는 분명히 그의 말대로 지켰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하나도 지키지 못 했습니다. 자기가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면 주님 앞에 나와서 회개를 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자기가 지켰다고 알고 있으니까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근심하며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회개 했습니까?
내가 살인한 것을 회개 했습니까? 내가 복술을 행하면서 이생의 복을 빈 것을 회개 했습니까? 내가 교회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음행을 한 것을 회개 했습니까? 내가 복음을 몰랐을 때 소자를 도적질해서 배나 더 마귀의 자식이 되게 만든 것을 회개 했습니까?
절대로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가 그렇게 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에서 마지막 천사가 나팔을 불 때까지도 회개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다 하면서도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주여 주여 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회개치 않는다고 하면 그런 것입니다. 여섯째 천사가 나팔을 불고 있을 때입니다, 이 나팔 소리는 우리에게 들려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주님이 오시기 직전입니다, 일곱 번째 천사가 나팔을 불면 이 세상은 말씀 그대로 종말이 오지만 사람들은 그때가 되는데도 회개를 하지 않고 계속해서 살인을 하고 복술을 행하고 음행을 하고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있습니까?
율법을 주셨지만 그 율법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도 거의 모든 사람이 회개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말로는 회개를 한다고 하지만 실제 그들의 행위는 아직까지 살인을 하고 있고 복술을 하고 있고 음행을 하고 있고 도적질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왜 주셨습니까?
그것을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까지 사람들이 죄가 무엇인지 알게 하기 위해서 주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말씀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되기까지 죄가 무엇인가를 알게 하기 위해서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만 보면 정신이 혼미해져서 그것을 지키려 하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아니 우리 인생은 율법을 지킬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만이 율법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천대까지 은혜를 받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주님께서는 천대까지 은혜를 받는 영원히 사는 천국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우리가 율법을 봅니다,
그러면 내가 율법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지킨 것이 없다는 것을 성령이 오시면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감동을 받는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구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주님이 천대까지 받는 그 은혜를 우리도 받을 수 있게 되어 영원히 천국에서 축복을 누린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0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중보는 한편만 위한 자가 아니니 오직 하나님은 하나이시니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중재자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 한 분의 생각으로 하신 것입니다.”
율법은 중보자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천사들로 말미암아 중보자의 손을 빌어서 반포를 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중보자가 있기 때문에 중보자가 반포를 했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우리가 다 행하겠다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 대답 그대로 이스라엘은 하나님과 언약을 했습니다.
모세는 중보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서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전한 중보자입니다, 그 중보자가 있기 때문에 율법은 반드시 그것이 옳고 그름을 판단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은 항상 다 지켜 행하면 생명을 얻고 그것을 하나라도 범하는 순간 율법을 범한 자가 되어서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과 약속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성경을 마치 이 세상의 책을 보듯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가 이해하는 그 수준에서 성경을 보고 있습니다. 늘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을 볼 때는 조금 더 깊이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기초를 흔들지 않으려고 지혜를 구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율법은 중보가 있습니다.
그러나 약속은 하나님 한 분 생각으로 하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 약속을 왜 하나님 한 분 생각으로 하셨는데 하면 그 약속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셨습니다.
능력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하셨을 때는 그것을 이루실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중보자를 통해서 반포를 하셨지만 약속은 한 분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중보자의 생각이 들어가 있었고 약속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이루시는 능력이라는 말씀입니다,
약속의 자녀입니다,
성도는 오직 하나님 한 분 생각으로 부르심을 받아 의롭다 함을 받아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된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에게 약속을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약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를 않고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입니다.
약속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율법을 지킬 것인가는 구원의 문제라는 것을 바로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저 아무 생각이 없이 율법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너무 안타깝기만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약속을 받은 성도만이 그 땅을 얻을 수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모르다 보니까 그것을 지키면서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1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을 거스리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공동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겠습니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사람에게 주어진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사람은 율법에 의해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율법에 대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정말 이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율법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을 그저 자기들의 생각대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생각에서 옳다고 판단이 되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율법에 대해서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율법입니다.
분명히 말씀을 드리지만 이 율법도 생명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장 이해를 못하는 것이 바로 이 문제입니다, 율법은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누가 더 잘 지키고 못 지키고 하는 그런 계량을 따르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것을 먼저 확실하게 해 두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런 계량으로 보고 있고 그래서 더욱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율법을 그렇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누가 더 잘 지키고 누가 못 지키고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성경은 계속해서 가르쳐 주고 있지만 율법을 모르다 보니까 이 세상의 생각을 가지고 성경에 있는 율법을 보고 있습니다.
율법을 모릅니다.
첫째는 성경에서 율법을 보고도 자기가 그 율법을 못 지키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에 있는 율법을 보고 자기가 율법을 지키는 사람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자체가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리고 율법은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을 지키고 또 이 시대와 동떨어진 율법은 안 지키고 할 수 있는 문제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하는데 그 기초를 모르고 그저 율법의 문자만을 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은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되는 것이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절대로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말씀을 하시고 영원히 거하리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율법이 이 약속과 반대가 되는 것이냐는 말씀입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고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항상 다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이 유효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 생명입니다,
죽고 사는 문제로 보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그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것을 받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율법을 그렇게 보고 있지를 않습니다. 율법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를 사도 바울이 지금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도 다 지키면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분명히 생명을 준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도 분명히 율법을 지키면 생명을 준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르게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은 반드시 이 생명과 연결이 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을 에덴에서 아담을 통해서 보여 주셨습니다. 선악과를 따 먹은 아담이 정녕 죽었습니다.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하셨고 영원히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이 생기기전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약속입니다. 그러면 율법은 이 약속을 이룰 수 없느냐는 말씀입니다 이룰 수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동일합니다.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다, 율법으로도 우리는 천국에서 영원히 거할 수 있습니다. 그것을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율법을 요구를 다 이루시고 십자가에서 사단에 의해서 죽으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다시 살아나셔서 천국에 들어가서 영원히 사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거스를 수 없습니다.
분명히 율법도 우리를 살게 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약속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그러나 율법으로는 이제까지 어느 누구도 약속에 의해서 받은 천국을 받은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10:5절을 보겠습니다. (신 253쪽)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레위기18장5절의 말씀입니다.
너희는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도 사람이 살 수 있는 방법 중에 하나라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약속을 받습니다.
그것을 사도 바울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약에서 말씀하는 것을 그대로 인용을 해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 율법을 항상 다 지킴으로 해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율법은 사는 것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사는 것입니다.
율법을 왜 지키는가 하면 살기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그냥 내 이성에 좋다고 해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그렇게 지킬지라도 성경은 우리에게 사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시고 나의 규례와 법도를 지키라 사람이 이를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사는 율법을 주셨습니다.
율법을 다 지키면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율법은 이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느냐 없느냐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을 믿어서 약속을 받을 것인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이성으로 율법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서 그렇게 말씀을 하고 있으면 우리는 무조건 그렇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구약의 레위기의 말씀입니다.
그것을 신약에 와서 사도 바울이 그대로 인용을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말미암아 살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를 함께 해서는 안 됩니다 약속을 믿는 것과 율법을 지키는 것을 두 가지를 함께 하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어느 것인가를 택하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믿어서 약속을 받을 것인가 아니면 율법을 지켜서 약속을 받을 것인가를 택해야 합니다, 아니 이 두 가지를 다 해서 약속을 받을 수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리라고 하신 그 땅을 받을 수 있는 방법이 두 가지고 그렇게 받으면 영원히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로마서에서는 그 두 가지의 의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의는 율법을 다 지켜서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고 하나님의 의는 율법 외에 나타난 의로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 둘을 함께 하라고 하지 않고 둘 중에 하나를 하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아니 둘 다를 해도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사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는다고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도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의를 행해서 분명히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 땅에서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그 의가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저주를 받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우리는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율법을 항상 다 지키지 못해서 사람은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그 의로 삽니다.
이것이 분명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가 되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분명히 율법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그 의로 사는 것은 맞지만 그래서 항상 다 지킨 사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받을 수 있지만 율법으로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없고 이제까지 모두가 저주를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사람은 그 의로 삽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 의로 산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의가 살 수 있는 의가 안 되면 율법으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게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살 수만 있고 저주를 안 받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립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오직 생명만 있습니다. 그러나 율법에는 생명과 저주가 함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사람은 그러니까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그 의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으면 분명히 하나님의 약속을 받을 수 있는데 만약에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하고 죄인으로 나타나면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살고 죽는 문제입니다,
율법을 지키는 순간에 그것이 함께 따라 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나는 그것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성도로서 살고 싶다고 해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율법을 지키는 순간 살고 죽는 것이 따라온다고 말씀을 하고 있으면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서 살 수 있었다면 그것으로 살게 해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율법으로는 능히 살 수 없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능히 살 수 있었다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셨을 덴데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의롭게 되는 것이 분명히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다면 이 말씀은 율법으로는 저주를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도 율법으로는 천대까지 은혜를 받아서 영원히 살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을 지키면 반드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받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나는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지키는 것이 아니라고 해도 성경에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 반드시 율법을 지키면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성경에서 말씀을 하고 있어도 국어를 모르다 보니까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깨닫지를 못 합니다,
율법이 살게 할 수 있습니까?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사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율법으로는 살 수 없습니다. 나는 진심으로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십일조를 드린다 해도 율법은 그런 문제의 것이 아니라 내가 십일조를 드리는 순간 그 십일조를 드림으로 해서 내가 의롭다 함을 얻어서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자신 있으면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분명히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받을 육체가 없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살지도 못하는 그 율법을 왜 지킵니까? 살지 못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습니다. 내 영혼이 저주를 받아 구원을 받지 못하고 사망에 이른다는 말씀입니다 그냥 사망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은 특별한 형벌이 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내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지키는 순간 의롭다 함을 반드시 받아야 합니다, 죄인이라는 것을 알아서 회개를 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 약속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율법을 보고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그것을 자기 육체로 지키려고 하다가 결국에는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22절을 보겠습니다. (신 305쪽)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니라”
새번역을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모든 것이 죄 아래에 갇혔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약속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은 다 지키면 약속을 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율법을 사람이 능히 지킬 수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굳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지 않고 율법으로 살게 하셨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가 약속을 받게 하셨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이성입니다.
어느 종교를 막론하고 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의롭다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율법의 지킨 계량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는 것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점도 흠도 없는 의로움이 있어야 하나님 앞에 가서 살 수 있는데 율법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는 것을 깨닫게 해 주고 있습니다,
의롭다 함입니다.
그것은 마치 백지에서 점하나가 있어도 안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 그리고 백지에 있는 수많은 점을 보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지만 사람들은 율법을 보고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아니 도리어 자기를 깨끗하게 하려고 회를 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키는 율법입니다.
그것을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회칠한 무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리새인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지키고 있는 율법이 그렇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영의 비밀을 모르다 보니까 자기 눈으로 보는 그리고 이성으로 아는 율법으로 회를 칠하는데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회가 칠해지면 좋습니다.
아니 그것으로 깨끗해 질 수 있다면 사람은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하지만 설령 내 육체가 그렇게 된다 해도 아담이 범죄를 한 순간 우리 인생들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담이 정녕 죽은 것같이 아담의 자손인 우리 인생들도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무엇으로 죄 아래 가두었는가 하면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 까지 율법을 주셨는데 그 율법이 우리 인생 모두를 죄 아래 가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우리를 모두 죄 아래 가두었습니다, 죄 아래 가두었다는 말씀은 율법이 우리 인생 모두를 저주를 받게 하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진 자는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있습니까?
그것을 단 한 가지라도 지키는 순간 죄 아래 갇힌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왜 죄 아래 갇히게 되는가 하면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니 율법을 몰랐을 때는 자기가 죄 아래 갇혔다는 것을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율법을 알고 나니까 내가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율법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내가 지켜서 의롭다 함을 받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난 후에 율법을 보니까 나는 율법의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성령이 오시기 전에는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사람에게는 없어서 자기가 저주를 받는 줄을 모르고 이 세상의 이성으로 법이 바르니까 그것을 지키려하고 있습니다,
미리 말씀을 드렸습니다.
우리는 살인을 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가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고 해도 모두로부터 존경과 칭찬을 받는다 해도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모르면 율법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율법이 우리를 죄 아래 가두고 있지만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지혜가 없으면 율법을 지키게 되어 있습니다.
누가 의인입니까?
성경에서 누구를 의인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이 아니고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가장 기초적인 정의가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은 하나도 없습니다.
전도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어도 이 말씀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죄를 범치 않는 의인이 없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는데도 사람들은 자기들이 율법을 지키면 죄를 범치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육적으로 살인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가 의인입니까? 세상은 그를 의인이라고 할지 몰라도 성경은 절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미 우리는 살인한 자입니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살인한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무슨 살인을 했느냐고 따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육체적으로는 살인을 하지 않았을지 몰라도 복음이 우리에게 계시가 되기까지는 우리는 살인한 자로 살아갔다는 것을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문자적으로는 살인 안 했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는 다 살인한 자입니다. 우리 스스로는 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진리의 성령을 보내 주셔서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오시고 나니까 율법을 통해서 죄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그렇게 죄를 알면 어떻게 됩니까?
이스라엘이 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까? 율법을 보고도 죄를 깨닫지를 못 했습니다.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달아야 하는데 도리어 율법으로 회를 칠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두움의 빛을 더 사랑해서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살인한 자입니다,
반드시 죽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살인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내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혜가 됩니다, 하지만 자기가 살인한 자라는 것을 모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식적으로는 알고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이렇게 문자적으로 아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죄 아래 갇혀 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그것이 그저 지식이 되고 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은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은혜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그것은 내가 얻을 수 없는 것을 주셨을 때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살인을 한 나는 어떻게 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나니까 그것이 은혜가 되고 있습니다, 그렇게 알고 난 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이렇게 믿는 성도들에게 약속하신 것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믿음을 근거로 해서 약속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에베소서2:8절을 보겠습니다, (신 311쪽)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것은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없는 우리 인생들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입니다 말로 지식으로 알아서 은혜가 아니라 율법을 보니까 내가 죄 아래 갇혔습니다, 율법 613가지 중에 어느 한 가지도 지키지 못한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니까 죄인 중에 괴수인 나에게는 너무도 큰 은혜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하여 세상 죄를 지고 가신 것을 알게 됨으로 인하여 율법을 하나도 지키지 못한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약속을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땅입니다.
그것은 유업입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시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직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사람들은 그저 성경에 기록이 되어 있는 문자로 알고 있고 죄 아래 가두는 율법을 지키고 있다가 저주를 받고 있습니다.
약속이 무엇입니까?
천국의 유업을 받는 것이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것을 에베소서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원을 받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을 받은 자들에게 천국의 유업을 주고 또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갈라디아서는 계속해서 아브라함에게 너와 네 자신에게 주리라고 약속한 그것을 어떻게 받는가를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성도들에게 주시겠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 지키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율법은 우리를 죄 아래 가두고 있습니다. 죄 아래 갇힌 사람은 저주를 받는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주시겠다고 하는데 이 시대는 믿음을 모르고 있습니다. 너와 네 자손에게 이 땅을 주시겠다고 하신 그 약속을 믿는 성도들에게 천국을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믿지를 않습니다.
왜 믿지를 않고 있는가 하면 율법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율법을 보고 죄를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율법을 지키는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었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죄 아래 갇힌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하신 그 약속을 받게 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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