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포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마태복음9:14-17절을 보면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성경은 영생에 대해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는 시각들이 너무 변해가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통해서 더 도덕적인 사람이 되려고 보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려면 차라리 하나님을 믿지 않고 다른 종교에 들어가는 것이 본인에게 더 유익이라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해탈입니다
차라리 불교에 다니시기 바랍니다. 도덕적으로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 또 의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저는 불교를 추천해 드립니다. 아니면 그냥 논어나 서서삼경을 보면서 자기 스스로 수양을 하는 것이 훨씬 본인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까?
이 세상에서 의롭고 선하게 살려고 예수를 믿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이라고 한다면 저는 교회에 안 다니는 것이 본인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정말로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모르고 있고 영생에 대해서 너무 쉽게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영생이 어렵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에 나왔다고 해서 그가 영생을 얻은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실제 성경에서는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타락을 하고 있는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것도 이단이 아니라 정통이라고 하는 교회가 계속해서 타락을 하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시고 있습니다. 그것이 죄를 지어서 타락을 하고 있다고 생각을 하면 그는 성경을 너무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죄 때문에 이스라엘이 버림을 받았습니까?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사람의 이성으로 따지면 그들보다 더 의롭게 산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죄 때문에 버림을 받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의로움으로 인하여 망하게 되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려고 했던 그 행위들로 인하여 망하는 길로 가게 되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시대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의 행위를 그대로 답습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은 완전한 율법을 지키지는 않더라도 이 시대는 자기들이 정해서 지키고 있는 율법에 의해서 그리고 교리에 의해서 너무 묶여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 인생들에게 자유를 주셨지만 교회는 점점 그 자유를 빼앗아가고 있습니다.
죄를 지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지키고 있는 그 율법이 스스로 구속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들이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일들을 보면서 은혜라는 이상한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교에서나 마찬가지로 해탈을 하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종교에 빠지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어느 종교라도 그곳에 빠져 있는 사람은 가장 불쌍한 자들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냥 세상에서 도덕을 배운 대로 세상에서 사는 것이 유익입니다 무엇이 유익인지도 모르고 교회 안에서 스스로 화를 자초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화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다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화를 당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것을 늘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구원을 받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지만 오히려 화를 당한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화를 누가 당하는가 하면 교회 안에서 모든 사람이 저 사람은 구원을 받을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는 그에게 화가 있습니다.
왜 화를 당합니까?
영생을 못 받기 때문에 화를 당합니다. 교회 안에 있지만 자기가 영생을 받을 사람인가 아니면 화를 당할 사람인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거의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을 것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화를 당할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요한복음6:48절을 보면
“내가 곧 생명의 떡이로다”
생명의 떡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나왔지만 이 떡을 먹지 않고 있습니다. 이 떡을 못 먹고 있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교회에 나와서 평생을 신앙생활하면서 주여 주여 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불렀을지라도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이 예수에 대해서 먹지를 않고 있습니다. 그저 교회에 나와서 예수 믿으라는 그 말 한마디 하는 것으로 마치 자기가 생명의 떡을 먹고 있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에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알아가야 하는데 지금 이 시대는 생명의 떡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상의 제물과 누룩이 섞인 떡을 먹고 있으면서도 그저 예수라는 그 말 한마디에 마치 자기가 생명의 떡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을 먹고 있습니까?
그것으로 가장 먼저 나타나는 증거가 무엇이라고 생각을 합니까? 나에게서 율법의 한 모양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 내가 생명의 떡을 먹고 있는 성도하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것이 율법의 모양을 버리는 그것입니다. 그것이 안 나타나고 있다면 그는 아직 생명의 떡을 안 먹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모릅니다.
자기가 율법을 지키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는 것이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아니 이제까지도 초지일관하게 말씀을 드리고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성도의 가장 첫 번째 나타는 행함이 무엇인가 하면 바로 내게 있던 모든 율법의 모양을 버리는 그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율법을 버리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하고 교회가 어떻게 운영이 되느냐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자체가 생명의 떡을 먹고 있지 않다고 스스로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제가 왜 이토록 율법에 대해서 강경한가는 바로 그것이 영생의 첫 발걸음이기 때문입니다.
영생을 얻기 위해서 교회에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영생을 스스로 버리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지만 이 시대는 자기가 어떤 떡을 먹고 있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거대한 짐승에게 속아서 아니 짐승을 경배하느라 예수 그리스도를 도무지 믿지를 않고 있습니다. 말로만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알고 내가 버릴 것이 있으면 그것을 버려야 믿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치 이와 같습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습니다. 사랑을 한다고 하면 다른 것을 쳐다보아서는 안 됩니다. 정말 서로가 사랑을 하고 있다면 다른 남자나 여자를 돌아보아서도 안 되고 마음을 주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기본적인 조건이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른 남자에게 눈길을 주고 있고 그를 너무도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다른 남자를 연모하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거짓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연인이 있는데 여자가 다른 남자를 만나면서 그 남자와 연애를 하고 있으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누가 그 말을 믿겠습니까?
그것은 거짓에 불과합니다.
남의 남자와 같이 손잡고 다니고 심지어는 키스도 하고 있고 자기 마음까지 다 내주면서 사랑한다고 하면 누가 그 여자의 고백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자기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조차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직 그만이 생명이 떡입니다. 그런데 그 떡이 무엇인가를 모르기 때문에 그냥 주는 대로 먹고 있습니다. 우리가 너무 잘 알고 있는 유월절을 어떻게 먹는가를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누룩이 섞인 떡을 먹지 말고 무교병을 먹으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온갖 누룩을 다 섞어서 먹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율법으로는 진노를 당할 것이라고 성경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생명의 떡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율법이요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그 두 떡을 다 먹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떡을 다 먹고 있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도무지 이해를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라고 말씀을 하셨는데도 그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이 생명의 떡을 먹기 보다는 진노를 받는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더욱 많이 먹고 있습니다. 이 시대 목사들의 설교는 다 율법의 떡을 먹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그가 한 시간 동안 예수만 외쳤다 해도 나중에 단 한 마디를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 했다면 그는 누룩을 섞은 자입니다
나를 분멸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율법이 무엇인가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것만 알아도 최소한 진리에 근접할 수 있다는 것을 여러분이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율법을 지키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율법이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에 미혹이 되다 보니까 자기는 율법을 폐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다 율법입니다
지금 교회 안에서 하고 있는 거의 모든 행위들이 다 율법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배도 율법이고 십일조도 율법이고 주일도 율법이라는 것을 모르면 그는 반드시 진노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에 나와서 구원은 고사하고 화를 당하는 이 세상 사람보다 더 불쌍한 인생이 되고 만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 없습니다.
이런 율법에 빠져 있는 사람은 구원이 없다고 저는 단정을 짓습니다. 그래도 이 말씀을 보고도 그것을 버리지 못한다면 그는 어쩔 수 없이 화를 당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밖에 있는 세상 죄인이 화를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 율법을 지키면서 누룩을 섞어서 먹고 있는 그들이 화를 당한다는 것을 성경이 누누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을 바로 아시기 바랍니다.
행위를 보고 자기가 믿는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예배를 드리고 주일을 지키고 또 십일조를 내고 하는 그런 것을 보고 자기가 믿고 있다고 하는 사람은 너무도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분노를 일으키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다른 남자에게 몸과 마음을 주고 있는 여자를 어느 남자가 가만히 있겠습니까?
질투하시는 하나님입니다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까지 내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교회에 나와서 다른 남자를 더 좋아하고 있다면 그는 반드시 진노를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분명히 말씀을 드립니다. 교회 안에서 그런 행위들을 하면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 생각도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오직 생명의 떡인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있는 성도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내가 생명의 떡을 먹고 있습니다.
그런 성도는 절대로 율법을 안 지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나타내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이 곧 사망의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을 받고 있는 성도는 이 모든 것을 다 버리게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이 오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었습니다. 주님이 오시고 난 후에 부활 승천하시고 20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도 세례요한의 제자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와서 질문을 하는 것은 정말 유치하기 까지 합니다.
왜 이런 질문을 합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직까지 율법에서부터 벗어나지를 못하고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지금 요한은 헤롯에 의해서 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그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와서 묻고 있습니다. 자기들과 바리새인들은 금식을 하고 있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있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금식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 시대도 금식을 왜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있습니다. 저 역시도 예전에는 금식을 했습니다. 그때는 정말 아무 것도 모르고 그저 내 삶의 괴로움을 좀 이겨볼까 해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렇게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아서 금식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금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복음을 알고 난 후에 깨달았습니다.
금식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도 역시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했던 금식과 지금의 금식은 전혀 다른 금식이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잘 알고 있듯이 바리새인들은 이레에 이틀을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 있는 것을 보고 금식을 하면서 주님의 제자들은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금식을 왜 합니까?
자기가 왜 금식을 해야 하는 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저 자기 형편의 일을 해결하기 위한 금식이라면 차라리 하지 않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금식을 하는 이유를 모르고 금식이 무엇인가를 모르고 금식을 하는 것은 스스로를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이사야58:6절을 보면
“나의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육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내 육적인 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그리고 율법에 의해서 금식을 하는 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금식은 스스로를 망하게 한다는 것을 우리가 기억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저는 꼭 금식을 하라고 권하고 싶지 않습니다.
흉악의 결박을 풀었습니까?
멍에의 줄을 끊었습니까? 압제에서 자유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는 이미 금식을 마친 사람입니다 굳이 금식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내 영혼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성도는 이미 금식을 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론 이 금식을 했다고 해서 우리가 금식을 전혀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닙니다.
내 이웃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아직까지도 흉악에 결박을 당해 있는 사람이 있고 멍에를 메고 있는 사람이 있고 압제를 당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위해서 우리 성도가 금식을 하면서 그들의 구원을 구해야 합니다. 그것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성도가 해야 하는 당연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왜 금식을 했습니까?
그들은 율법에 따라 이레에 이틀을 금식을 했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제자들 역시 그렇게 했고 더구나 자기들의 스승인 세례요한이 옥에 갇혀서 언제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금식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와서 보니까 주님의 제자들은 금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군가를 모르기 때문에 지금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왜 오셨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 역시도 육적인 구원을 바라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육적인 구원을 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 아닌데 그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지금 제자들에게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는 이 질문은 주님이 세례요한을 구원해 달라고 하는 뜻이 있습니다.
세례요한의 제자들이 11장에서도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지금은 자기들 스스로 왔지만 11장에서는 세례요한이 보내서 왔습니다. 이스라엘의 생각에는 금식을 하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원하는 것을 들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금식을 자기들의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했습니다. 사실은 육적인 것이 아니라 영혼의 문제인데 왜 금식을 해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금식
하나님이 기뻐하셔야 합니다. 내가 기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금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이스라엘도 그랬고 지금 이 시대도 자기들이 기뻐하기 위해서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믿지 않고 행위로 하루를 굶는 그런 금식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님을 믿기를 원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흉악한 결박을 풀을 수 있고 멍에의 줄을 끊을 수 있고 압제에서 자유할 수 있고 멍에를 꺾어 버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그 외에 것을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 시대는 예수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말로는 오직 예수라고 하고 있지만 전혀 오직 예수가 아닙니다. 그리고 행위로 금식을 하고 있고 자기가 한 금식을 자랑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자기의 의를 들어내고 있는 악한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교회 안에서 무용담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 슬퍼할 수 있느뇨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때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주님이 오셨습니다.
우리가 교회에 와서 복음을 듣고 있습니다. 이것은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혼인 잔치에 와서 금식을 할 수 있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이 세상에 함께 계시는데 그 제자들이 금식을 할 수 있겠느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계십니다.
그럼 금식할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이치로 생각을 해도 혼인 잔치에 가서 금식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라도 거기서 금식을 하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혼인 잔치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혼인 잔치에 왔으면 음식을 맛있게 먹어야 하지 금식을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주님의 제자들은 신랑과 함께 있습니다.
신랑이 있는데 그 혼인집에서 슬퍼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세례요한의 제자들은 주님이 누구신가를 모르기 때문에 왜 금식을 하지 않느냐고 묻고 있습니다. 신랑이 있는 혼인집에서는 누구도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이상한 일입니다.
슬퍼한다는 것은 신랑을 신랑으로 인정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신랑이 있다면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즐거워해야지 슬퍼해서는 안 됩니다. 슬퍼 한다는 것은 신랑의 신변에 무슨 변고가 생겼을 때 슬퍼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신랑이 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스라엘의 풍습입니다.
그 지방에서는 신부의 집으로 신랑이 찾아옵니다. 그리고 혼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분명히 신랑이 찾아왔는데 슬퍼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신랑이 오지 않았을 때는 그 혼인집은 슬퍼해야 하겠지만 지금 신랑이 있는데 슬퍼해야 할 일이 전혀 없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그런데 지금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그 기쁜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쁜 일이 있는 혼인집에 와서 금식을 하면서 슬퍼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혼인잔치를 알면 예수님께서 지금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계십니까?
왜 금식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언제 금식을 해야 하는 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이 있으리니 그때 금식할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신랑을 빼앗길 날에 금식을 했습니까? 우리는 성경을 정말 주의 깊게 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말씀 하신 대로 신랑을 빼앗겼을 때에 제자들이 금식을 했습니까?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난 후에 무덤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금식을 했습니까? 아마도 이 말씀을 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도 제자들이 금식을 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리고 무덤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금식을 했다고 생각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슬퍼했을지라도 진짜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말하는 밥을 굶는 금식을 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가를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는 혼인 잔치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신랑이 있는지 그 신랑을 빼앗겼는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신랑이 빼앗긴 줄을 아는 성도는 반드시 금식을 할 것입니다.
모르면 안 합니다.
이사야서에서 말씀을 하고 있는 금식을 합니다. 그러나 신랑이 혼인집에 있다고 믿고 있는 사람들은 절대로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정말 지금 내 안에 계시는 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사단이 와서 그 신랑을 빼앗아 가버렸는데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신랑 빼앗아 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교회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금식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니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교회 안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에수 그리스도께서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깨어 있으시기 바랍니다.
신랑을 빼앗기고도 모른다면 그는 정말로 불쌍한 사람입니다. 혼인집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신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니 당연히 신랑이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시대 혼인 잔치에 신랑이 없는 곳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도 자기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까 당연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금식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신랑이 있는지 빼앗겼는지 알아야 금식을 할 수 있습니다. 신랑이 있을 때는 우리가 금식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때는 반드시 금식을 해야 합니다. 그것보다 더 슬픈 일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모릅니다.
신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혼인잔치에 초대를 받아서 들어와는 있지만 그 안에 신랑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고 있다 보니까 금식을 하지 않습니다. 짐승에 의해서 신랑을 다 빼앗겨 있으면서도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들이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정말 신랑이 있는 가 금식하시기 바랍니다. 신랑이 없으면 슬퍼해야 하는데 전혀 슬퍼하지도 않고 있고 금식도 안 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미혹이 되어서 교회에서 그저 그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마치 예수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는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혼인집에 신랑이 없으면 혼인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구원이 그 안에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율법은 낡은 옷입니다
이스라엘은 자기들이 구원을 받았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생베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아주 깨끗한 구원의 옷을 입혀 주시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생베 조각을 자기들의 낡은 옷에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의도 받아들이고 자기들의 의도 가지고 있겠다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의가 얼마나 낡았는가를 깨닫지를 못하고 생베 조각을 그 낡은 옷에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면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맞는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사야64:6절을 보면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우리의 의는 더럽습니다.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낡아서 잎사귀가 흩어지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낡은 것을 가지고 생베 조각을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을 보시기를 바랍니다. 자기들의 낡은 옷에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옷을 붙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입니다
그것은 낡은 것입니다. 마치 잎사귀 같아서 바람이 날리면 다 흩어져 사라지고 마는 것입니다 마른 잎사귀는 바람에 떨어지면서 다 찢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의 의를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함께 붙이려고 하는 사람들이 교회 안에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 찢어짐이 더하리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낡은 옷도 찢어지고 생베도 못 쓰게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분명히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아무리 강조를 해도 역시 오직 예수입니다 그러나 이 시대는 자기들이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를 보고 있고 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에 옷은 다 해어진다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시기 바랍니다. 생베면 그것을 택하고 낡은 것이면 그것을 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쉽게 해어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율법의 의가 그렇습니다.
내가 지키고 있는 율법의 의는 낡았습니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다가 붙이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은 교회 안에서 율법도 지키고 예수 그리스도도 믿는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반드시 해어지게 되어 있고 그것은 못 쓰게 되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한 의를 주셨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의가 눈에 보이니까 그것을 버리지를 못하고 그것을 같이 붙이려고 하고 있습니다. 지금 교회 안에 있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렇게 하고 있으면서도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정말로 중요한 구원의 문제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낡은 것에 생베 조각을 붙이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그 옷이 찢어지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은 구원을 못 받는다는 것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새 포도주입니다
계속해서 같은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놓으면 부대도 터져 버리고 그렇게 되면 포도주도 버리게 된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낡은 부대에 넣고 있습니다.
성령입니다 우리 안에 진리에 성령이 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우리가 낡은 율법을 지키고 있다면 그 부대는 찢어지고 만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새 포도주 성령께서 증거해 주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내 안에 담으려고 하면 낡은 부대로 해서는 안 됩니다.
이 낡은 부대는 율법을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떻습니까?
이 시대 율법이 성행을 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같이 모든 율법은 지키지는 않을지라도 자기들에게 필요한 율법을 지키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 낡은 부대에 새 포도주를 넣어 보아야 찢어진다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합니다. 내가 새 부대가 되려면 율법의 모양을 다 버려야 합니다.
너무 모릅니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성경을 너무 모릅니다. 우리가 무엇과 싸워야 하는 줄을 모르고 있습니다. 율법과 싸워야 하고 또 교회 안에서 행하고 있는 내 의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습니다.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다 버리지 않고는 안 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것에 집착을 하면서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낡은 부대는 안 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고 있는 내 육체입니다 우리에게서 율법의 모양이 있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설령 성령이 오신다 해도 그 부대가 터져 버려서 새 포도주까지 버리게 된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시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낡은 부대로 새 포도주를 담으려고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가 어떻다는 것을 주님께서 말씀을 해 주시고 있지만 도무지 깨닫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오직 예수입니다.
우리의 것은 다 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혼인집에 신랑이 있는가 없는 가를 바로 아시기를 바랍니다. 신랑이 없는데도 즐거워하고 있다면 그는 이상한 사람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서 구원을 받는 성도님들이 되셔서 주님께서 오실 때 영접을 받아 천국에서 모든 축복을 누리시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Jesus Christ, Letters 아카데미 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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